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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INA - 생존자들

2020.12.23 22:5612.23

[그 남자는요?]

 

체스는 고개를 저었다. 간밤에 번쩍인 폭발과 붉은 빛의 장막들은 순식간에 나타나고 금방 사라졌다. 체스는 그 밤, 인간 마법사가 이나를 찾아 왔다고 하였다. 캐시는 기절한 이나를 보살피며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타냐가 음식을 만들고 체스는 담담하게 말하였다.

 

[그냥 기절한 거야, 금방 깨어날 테니 기다려.]

 

[그렇겠죠?]

 

캐시가 이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체스가 캐시를 부른다.

 

[거기, 긴 꼬리.]

 

캐시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캐시라고 불러줘요.]

 

[됐고, 무기는 다룰 줄 아나?]

 

고개를 젓는 캐시에게 체스는 자신의 발톱을 들어 보였다. 캐시도 그녀를 따라 발톱을 꺼낸다. 하얀 늑대보다 작고 볼품없는 발톱을 손으로 가려 감춘다.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누군가는 싸워야지.]

 

[저 싸움은 잘..]

 

[누군가는 해야 해!]

 

체스의 앞으로 타냐가 선다. 불쏘시개를 들고서 선 타냐는 결심한 표정으로 말한다. 불똥들이 주위로 튄다.

 

[날 가르쳐줘.]

 

[안 돼.]

 

체스가 타냐의 입을 막는다.

 

[내가 배우면..]

 

[인간은 안 돼.]

[더구나 어린 아이라면 더더욱.]

 

바람과 먼지들에 덮이는 모닥불. 나무 타는 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둘 사이를 끼어든다. 세찬 바람에 불똥이 튀고 꺼지기를 반복한다.

 

[싸울 수 있어.]

 

[타냐, 수인과 싸운다면 넌 죽게 될 거야.]

 

[내가 널 지킬게.]

 

체스의 고개가 타냐가 있는 곳으로 멈춘다. 그녀의 눈을 감은 붕대가 타냐의 눈을 보고 있다. 타냐는 결심을 굳혔지만 체스는 그녀의 결정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길게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살아남아도 밧줄에 묶여 마녀에게로 팔려갈 것이다.

 

[타냐.]

 

체스 역시 고집을 꺾지 않았다.

 

[넌 집으로 돌아가야 해.]

 

[여기가 내 집이야.]

 

[타냐, 여긴 네 세계가 아니야!]

 

수인들의 몸집과 어린 인간의 몸집. 수인이 가지고 있는 근력은 단련된 인간의 근력을 뛰어 넘는다. 힘도 쓰지 못하게 작게 짓눌릴 타냐의 모습에 체스는 언성이 높아졌다.

 

[마녀가 만든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수인조차도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세계야.]

[수인들을 이겨도 그 마녀가 널 내버려 둘까?]

[타냐, 여기선 그 어떤 생명도 행복하게 살 수 없어.]

 

타냐가 꼿꼿이 서 체스를 보고 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높은 언성과 간절한 설득을 타냐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제발 저쪽 세계로 가 줘.]

 

체스의 눈가로 방울이 맺히고는 떨어진다. 뺨을 타는 방울방울들을 타냐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보지 못하였다. 캐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하늘로 고개를 올렸다. 늘상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쫓고 마녀의 눈을 피해 숨어 살았다. 자신의 마을이 사라졌을지, 가족들은 아직 살아있을지, 그때 그 마법사는 여전히 인간들을 잡고 있을지. 그 모든 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캐시는 숨고 싶었다.

 

타냐의 묵묵부답에 체스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캐시를 불렀다.

 

[싸우는 법을 알려줄 테니 익숙해지도록 해.]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체스는 단호하였다.

 

[해야만 해, 긴 꼬리.]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을 지으며 캐시는 무릎 위에 잠든 이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정말 지킬 수 있을까. 확신이 들지 않았다.

 

 

 

 

 

 

 

회색 늑대를 치료한 사람이 방에서 나와 손을 털었다. 그가 허리를 짚으며 트라나를 보았다.

 

[약도 발랐고 붕대도 감았어.]

[완전히 낫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거야.]

 

트라나가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구원자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작은 나무숲이 있는 깊은 협곡으로 숨어 절벽을 걸친 구조물들을 지었다. 좁은 협곡 사이에 작은 오두막들을 쌓으며 수인들에게 들키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협곡의 중간으로 아슬아슬하게 쌓여진 나무 요새는 썩은 나무 냄새와 분비물 냄새로 진동하였다.

 

사람들은 그 오래된 요새를 무언가의 둥지로 짐작하였지만 어떤 생물의 본거지였는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구원자의 인간들 대부분이 잡히고 죽어갔다. 오랫동안 구원자를 타고 여행을 하던 전승자들 역시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떤 생물이 버린 썩은 둥지를 고치고 엮으며 생존자들은 새로운 집을 건설하였다.

 

[수인을 데려오다니 무슨 생각인거지?]

 

강단 있어 보이는 얼굴의 여자가 억센 눈썹을 찌푸리며 조곤조곤히 말하였다. 여자의 허리춤에는 돌을 벼린 검이 매달려 있다. 트라나가 대답하지 않자 여자는 등을 돌려 제 길을 걸었다.

 

[길게는 있지 못 할 거다.]

 

여자가 계단을 내려간다. 짧게 묶어 올린 머리가 아래로 모습을 감춘다. 트라나는 베스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회색 늑대는 몸을 일으켜 벽에 뚫린 작은 구멍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이나를 찾으시는 건가요?]

 

탁.

 

회색 늑대, 베스가 벽으로 손가락을 튕긴다.

 

[그렇다는 건가요?]

 

탁.

 

[이나를 어떻게 하실 거죠?]

 

베스가 대답을 하지 못한다. 트라나는 팔짱을 꼈다. 그녀는 얼굴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가 묻는다.

 

[이나를 마녀에게 팔 건가요?]

 

베스가 트라나에게서 벽의 구멍으로 눈을 돌린다. 트라나가 그녀를 재촉하려 하였고 베스가 대답을 내놓는다.

 

탁.

 

[역시, 당신도 다를 바 없었어.]

 

트라나가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탁탁거리는 발소리가 방안으로 채워진다.

 

[대체 왜 나를 구한 거죠?]

 

베스가 대답하지 못한다.

 

[그 잘난 발톱으로 써보지 그래요?]

 

베스가 발톱을 꺼내 나무판자로 글자를 새긴다.

 

이유가 필요한가?

 

트라나는 머리를 짚었다. 수인을 믿을 수 없는 것은 맞지만 분명 저 회색 늑대에게 빚을 진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트라나는 베스에게 감긴 붕대를 가리킨다.

 

[빚은 갚았어요.]

[어쨌건 당신이 절 구해주었으니까.]

 

상처를 매만지며 베스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트라나를 지나쳐 문을 연다.

 

[떠나는 거예요?]

 

베스가 발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움직였다.

 

[어디로 가시게요?]

 

주위를 살피는 베스. 인간들이 보이지 않는다. 협곡으로 부는 바람을 따라서 오두막들이 신음을 낸다. 흔들리는 바닥으로 서서 베스는 중심을 잡았다.

 

[왜 이나를 찾으려는 거죠?]

[인간은 여기도 많은데.]

 

베스는 오두막이 끊긴 지점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끝없는 심연이 안개로 하얗게 가려져 있다. 트라나의 질문에 베스는 글을 새기지도 손가락을 튕기지도 않았다. 트라나의 얼굴을 바라보던 베스가 자세를 움츠리고는 협곡의 아래로 뛰어 내린다.

 

트라나는 베스가 뛰어 내린 절벽 아래를 내다보았다. 우리들은 평생 이런 곳에서 숨어 살 수 밖에 없는 걸까. 엉성한 나무 계단을 내려간다. 이름 모를 생명체의 둥지였던 나무 요새는 사람들의 손으로 제법 집다운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찐득한 점액질들과 빈 껍질들을 치우고 협곡 아래로 던진다. 제멋대로 얽히고설킨 나무 둥지는 원통 모양으로 뒤틀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둥지의 내부는 점액질들이 벽으로 들러붙어 빈 껍질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알 껍질들은 크기도, 색도,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트라나는 팔을 감싸며 도리질을 쳤다. 둥지를 따라 지어진 길 위를 걷는다. 난간도 없는 휑한 지지대로 바람이 부는 소리가 울렸다. 날아가고 부딪히는 소리. 트라나는 소리를 따라 협곡의 구석까지 닿았다.

 

둥지의 밖으로 인간들이 세운 조잡한 지지대 위로 한 여자가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화살이 협곡에 낀 안개 너머로 날아간다. 화살촉이 바위와 부딪히는 소리가 아득히 울린다.

 

여자는 억세게 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무엇을 맞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는 활쏘기를 멈추지 않았다. 여자가 곁눈질로 트라나를 훔쳐본다.

 

[그 수인은 계속 데리고 있을 거냐?]

 

[그녀는 떠났어요.]

 

[도망쳤다는 게냐?]

 

트라나는 협곡 아래를 가리켰다. 여자는 활을 집어 시위를 당겼다.

 

[그 괴물들은 이런 높이에서도 살아남을 거다.]

 

[당신도 잡혀 왔나요?]

 

텅.

 

시위가 활과 부딪힌다. 여자의 몸 만 한 크기의 활은 크고 둔탁한 울음을 내었다. 여자가 다시 활살을 집는다.

 

[타인투이.]

 

[네?]

 

텅.

 

묵직한 시위 소리와 함께 안개 너머로 돌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여자는 흔들림 없이 곧게 서 안개 너머를 노려보았다.

 

베스와 헤어지고 트라나는 사람들을 도와 새로운 집을 짓는 걸 도왔다. 일과가 끝나면 항상 같은 자리에서 화살을 쏘는 여자를 만나러 갔다. 아무 말 없이 시위를 당기는 그녀를 따라 트라나도 어쭙잖게나마 활을 만들었다.

 

여자의 자세와 시위를 당기는 힘을 따라하며 트라나는 안개 너머의 무언가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타인투이, 그게 이름인가요?]

 

텅.

 

늘 그렇듯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전 한 수인에게 가족을 잃었어요.]

 

트라나가 안개 너머로 화살을 날린다. 협곡의 바람을 이기지 못한 화살이 맥없이 아래로 고꾸라진다. 트라나는 불평어린 한숨을 내며 다시 시위를 당겼다.

 

[이 세계로 끌려오고 난 후에는 줄곧 미워하기만 했어요.]

 

화살이 다시 고꾸라진다. 여자가 트라나의 뒤로 다가와 자세를 고쳐준다. 팔을 들고 허리를 곧게 핀다. 여자의 손이 트라나의 팔을 붙잡고 뒤로 당긴다.

 

[나도 마찬가지란다.]

 

팔이 덜덜 떨린다. 힘이 풀린 시위가 맥없는 소리를 내었고 화살은 다시 협곡 아래로 떨어졌다. 여자가 일어나 활과 화살 통을 들어 어깨에 짊어 메었다.

 

[타인투이, 당신도 가족을 잃었나요?]

 

여자는 안개를 보고 선다.

 

[그들은 내가 바라던 것들을 들어 주었어.]

[단지 지금은 붙잡히고 싶지 않을 뿐이야.]

 

여자가 지지대를 걸으며 묻는다.

 

[넌 이제 뭘 하고 싶은 것이냐?]

 

트라나도 여자가 보았던 안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있다.

 

[수인들을 모두 죽이고 싶어요.]

 

거대한 활이 바람을 맞아 낮게 울었다. 여자가 작게 속삭이듯 트라나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간다.

 

[팔에 힘을 더 줘.]

[겨누고 쏘는 것이 아니라, 날아갈 곳을 상상해 쏴.]

 

 

 

 

 

 

베스는 협곡의 밑바닥에서 고개를 올려 빛을 찾고 있었다. 졸졸 흐르는 물줄기들이 벽과 바닥으로 끊임없이 흐른다. 거대한 짐승의 울음이 울리듯 바람이 협곡의 가장 낮은 곳으로 불어온다.

 

퀴퀴한 냄새. 코를 찌르는 끈적한 공기가 털 사이사이로 들러붙는다. 코를 막으며 뚫어지게 바라본다. 협곡의 최하층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으로 기어 올라가는 무리들. 보랏빛의 덩어리들이 협곡의 벽 전체로 다닥다닥 붙어 움직인다. 그것들은 협곡 밖에서 훔친 여러 종류의 알들을 뱃속에 품고 있었다.

 

베스는 그들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올렸다. 벽을 타고 오르며 그것들은 자신들의 둥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도망쳐!]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버려!]

 

그것들은 느리고 천천히 둥지 주변을 둘러쌌다. 침을 뱉는 그것들은 인간들이 지은 오두막을 무너뜨렸다. 끈덕진 체액에 뒤덮인 인간은 점액질을 벗겨내지 못한 채 버둥거렸다. 트라나가 화살을 쏜다. 몇몇이 검과 몽둥이를 휘두른다. 그것들은 칼에 맞아 잘리지도, 화살에 맞아 쓰러지지도 않았다.

 

그것들이 쏜 체액들이 뭉쳐져 간신히 지어진 지지대를 뒤덮었고 무게에 못이긴 구조물들이 신음을 내며 협곡 아래로 쏟아졌다. 사람들은 도망쳤다.

 

[물러서지마!]

 

홀로 활과 몽둥이를 든 채 싸우고 있던 타인투이가 양 발목에 체액들로 휘감긴다. 옴짝달싹 못하던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울부짖으며 들고 있는 것들을 사방으로 휘두르는 것뿐이었다. 입에서 욕지거리들을 뱉으며 사납게 싸우는 그녀의 머리 위로 점액질이 뒤덮인다. 그녀의 움직임이 둔해진다.

 

인간들의 비명이 곳곳으로 울려 퍼지고 그것들은 제 둥지로 올라가 알을 벤다. 새 집을 짓기 위해 치워둔 나무 요새가 다시 끈적하고 미끈거리는 액체들로 뒤덮인다. 자신의 고향에서 납치당한 알들이 보랏빛 생명체들에 둘러 싸여 대롱대롱 매달린다.

 

트라나가 시위를 당긴다. 분수처럼 쏘아대는 점액질 하나가 트라나의 몸으로 날아온다. 도망치지 못한 인간들이 협곡 아래로 몸을 던지고 점액질에 붙잡힌 이는 몸을 당기며 칼을 집어 든다. 미끈거리는 그것들을 향해 칼을 내려치는 이가 발을 헛디뎌 넘어진다. 거대한 지지대 일부분이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린다.

 

트라나는 자신의 몸에 달라붙은 점액질을 손으로 뜯어내다 망연히 새 집으로 닥쳐온 시련을 바라만 보았다.

 

협곡의 거대한 입 속으로 무너져 내리고 몸을 던진다. 제 손으로 죽여야 할 것들이 많았는데. 제 손으로 행해야 할 복수가 많았는데. 트라나는 눈을 감고 주위로 퍼지는 비명들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수인이야!]

 

날카로운 발톱이 인간들을 가둔 점액질을 가르고 단련된 다리가 높게 뛰어오른다. 쓰러진 인간들이 들쳐 메어지고 다 무너진 구조물에 매달린 인간들이 땅을 밟는다. 트라나가 눈을 뜬다. 온 몸이 점액질로 뒤덮여 둥지 한가운데에 움직임을 멈춘 타인투이가 점액질에서 벗어나 팔에 안긴다.

 

회색 갈기가 나무 둥지의 이곳저곳을 바쁘게 뛰어다닌다. 두 손을 놓고서 몸이 묶인 채 있었던 트라나에게로 발톱이 다가온다. 끈적거리는 체액들이 갈라지고 회색 늑대의 품에 안긴다. 트라나는 늑대의 갈기를 꼭 쥐었다.

 

또다시 많은 생존자들이 죽었다. 새로 지었던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이 모인다. 한 마리의 수인을 중심으로 인간들은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도망치지도, 발악하지도 않는다. 무기도, 불도, 동료들도 모두 잃은 그들에게 남은 것은 빈손과 허덕이는 배고픔뿐이었다.

 

타인투이가 바로 서서 회색 늑대를 마주 보았다.

 

[우리를 잡아갈 건가?]

 

회색 늑대는 말없이 타인투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모여든 이들 중 몇이 주저앉아 작게 울음을 터뜨린다. 협곡에서부터 찬바람이 불어 트라나는 온 몸이 떨렸다. 늑대는 제 이름도, 제 마을도 밝히지 않은 채 꼿꼿이 서 절망에 빠진 인간들을 둘러보았다.

 

늑대가 멀리로 제 길을 간다. 그런 그녀를 타인투이가 불러 세웠다.

 

[당신이 그 회색 늑대 맞지?]

 

돌아보는 회색 늑대.

 

[회색 늑대, 베스.]

[포프의 전사.]

 

낯선 인간에게서 들려오는 익숙한 이름.

 

[포프의 맹세, 베스.]

 

베스가 뒤돌아 타인투이를 바라본다. 타인투이는 베스에게로 외쳤다.

 

[우리에게 도움을 줘.]

[살아남을 수 있는 모든 방식을 사용해줘.]

 

타인투이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차있었다. 그녀의 대담한 말에 인간들이 모두 베스를 보았다.

 

[그렇게 하면 우리들이 당신을 도와주지.]

 

타인투이는 도박을 하듯 말들을 걸어 보았다. 맞으면 좋고 틀리면 목숨을 잃을, 그런 정도의 도박.

 

[마법사들을 죽이는 일.]

[혹은 마녀를 죽이는 일.]

 

언젠가 들었던 마녀와 싸운 반란군에 대한 이야기. 포프의 전사들 중 가장 유명한 회색 늑대 이야기. 타인투이는 그 이야기 속 늑대가 눈앞의 저 괴물인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의 말에 심사가 뒤틀려 저 덩치의 수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여기 있는 인간들을 모두 죽여 버리는 것 쯤 간단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겨우 살아남아 한 번 도 본 적 없는 괴물들에게 죽는 것보다, 구원자를 습격한 마녀의 광신도들에게 붙잡혀 팔리는 것보다야 나을 것이다. 타인투이는 그런 정도의 도박을 하였다.

 

회색 늑대가 트라나를 보고 있다. 트라나의 눈이 흔들린다. 베스, 저 회색늑대가 원하는 것. 벽으로 손가락을 튕겨, 말하였던 대답.

 

회색 늑대, 베스가 부서진 판자 하나를 집어 발톱으로 글씨를 쓴다.

 

[안 돼, 안 돼!]

[제발, 그 애는 내버려 둬!]

 

울부짖는 트라나로 베스는 자신이 판자에 새긴 단어를 모두에게 보여준다.

 

‘이나.’

 

[아이의 이름인가?]

 

베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아이를 원하는가?]

 

회색 늑대가 끄덕인다.

 

[그 아이만 있으면 되는 거지?]

 

수인이 끄덕인다.

 

[좋아, 약속하지.]

 

타인투이가 손을 내민다. 수인들에게 악수는 평생을 짊어질 약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맹세와 신념을 나타내는 의식.

 

[그 애만은 내버려 둬요!]

 

베스와 타인투이가 서로에게로 다가간다.

 

[그만둬!]

 

트라나의 울음과 비명에 한 여자가 그녀를 감싸 달랜다. 베스와 타인투이가 손을 맞잡는다. 굳세게 잡은 손이 맞물린다. 트라나의 울음이 터져 나오고 인간들은 안도하는 얼굴을 지었다. 살았다고 두런대는 말들. 소녀 하나의 울음을 두고 회색 늑대, 베스와 타인투이는 맹세를 하였다. 이나라는 아이를 찾아 회색 늑대에게 가져다주리라고. 포프의 전사가 그 아이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단지 타인투이는 살아야 했다. 붙잡히지도, 죽어서도 안 되었다. 수인들이 마녀에게서 살아야 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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