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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플라잉 봅슬레이

2020.12.30 17:1312.30

 

 

플라잉 봅슬레이

 

 

 

 

1.

  빌어먹을. 내가 플라잉 봅슬레이에 빠지게 된 것은 순전 우리가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이제 탁구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위가 좀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치들은 테니스를 쳤지만, 그게 그거지. 뭐. 쥐 불알만한 공을 쫓아다는 건. 실제로 쥐를 본적은 없지만.

 

 

2.

  내 이름은 초유 본서.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지만 뜻까지 알지는 못 한다. 한자로는 初乳 本書. 물론 써본 적은 없다. 과거 제3구역의 공영문자가 한글이었기 때문에 내려온 관습으로 난 그냥 ‘초유 본서’라 썼고, 다들 그렇게 불렀다. 3구역의 후손들은 대개 영어를 위시한 인도유럽어족 계열의 이름을 썼다. 근데 이것도 그냥 관습이다. 먼 옛날 지구시절부터 내려온. 어쨌든 무질서하게 흘러버린 120년의 시간동안, 아버지들로부터 이어졌다는 성은 사라졌고, 인종 역시 마구 섞여버렸으니 동양인의 특성이 많이 발현된 내 생김새나 이름이 독특한 취급을 받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마치 남다른 운명을 이미 예고하고 있던 것처럼.

  난 지금 사람들로부터 재생의 문이라 불리어진 곳 앞에 서있다. 부담돼 죽겠네. 아주 예전부터 선택된 자들만이 들어설 수 있다고 전해진 문이란다. 문을 열면 난 죽어버릴까? 진짜? 겨우 열일곱에? 그저 그 머저리들을 이기고 싶었을 뿐이라고!

 

 

3.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21세기 중반까지 육체개조가 금지되던 시절의 복싱이다. 특히 마지막 헤비급 챔피언인 마이크 밀로비치를 가장 좋아했다. 그는 처음 챔피언에 올랐던 서기 2049년부터 무려 4번이나 통합 챔피언에 올랐는데, 특히 상대의 스트레이트를 살짝 피하며 턱에 꽂는 어퍼컷이 유명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주거지역을 뒤지면 구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역사 파일 목록에 있었고. 사실 내 또래들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지구시절 동영상은 역시 축구다. 메시나 펠레 같은 선수들의 개인기 동영상들도 유명했지만, 무엇보다 넓게 트인 녹지를 선수들이 전력으로 질주하는 모습은 120년 전, 그 날 이후 지구환경을 모방해 만든 여섯 개의 주거지역을 모두 잃고, 중력과 산소가 남아있는 동력지구의 기계들 틈바구니로 숨어든 사람들에게 커다란 쾌감과 대리만족을 주었다. 하지만 난 언제나 소수파였으니까. 지금은 복싱이 뭔지도 모르는 바보천지들이 넘치지만, 뭐든 혼자 싸우는 게 내 체질에 맞으니까.

  물론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들 모두를 무조건 기성세대들을 탓을 할 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파이어아이호는 무려 7만 5천여 명을 싣고, 지구를 떠나 항성 간 우주를 가로지르고 있었거든. 아무리 당시 신기술이던 반물질엔진으로도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해지는 말로 그 시절 만해도 넓고, 푸른 주거지역에 프로축구팀이 무려 5개나 있었고, 그곳에 사는 모두는 20세기 미국 중산층의 살던 목조주택을 본뜬 단독주거기구가 지급됐고, 향긋한 가공육즙 정도는 물려서 먹다 버렸단다. 그리고 이 위대한 모험의 끝에는 빠르면 출발시점으로부터 19세대가 지나간 후에는, 즉 내가 어른이 됐을 때쯤이면 새로운 지구를 만나야했다. 원래 우리의 고향보다 3.4배가 크고, 중력이 96퍼센트 일치하는, 강수량이 풍부한.. 새로운 항성에. 아마 마이크 밀로비치의 어퍼컷 같은 거였겠지? 낯선 태양풍에 거대한 운석덩어리가 덮친 것은. 조금씩 공간을 접어가며 달리던 이 배를 다시 작용반작용의 세계로 밀어 넣고, 겨우 5000 남짓한 사람들만이 살아남게 만든 그 충돌 말이다.

  내가 봤을 때, 지구 문명이 기운 것은 복싱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이크 밀로비치는 만 38세가 되던 해에 파킨슨병 판정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손이 떨려오고, 말이 나날이 어눌해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뇌질환치료는 유전자치료를 의미했고, 당시 세계복싱연맹의 규정상 어떠한 종류의 유전자치료도 육체강화나 개조 행위로 치부돼 프로선수를 은퇴해야하는 사항이었다. 그는 모두의 만류에도 은퇴를 미루고, 자신보다 무려 10살이 어린 ‘수소폭탄’ 마티니 블루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 꼬마는 그가 이제껏 쓰러뜨린 여느 복서들과는 다른 새로운 타입이었다. 개조도 안 한 육중한 몸뚱이를 초전도체 레일 위에 실은 것 같이 움직이는 괴물. 한번은 싸워보고 싶던 꿈의 상대. 머지앉아 프로복싱에도 육체개조가 허용되면 다시는 이런 대결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지구가 낳아준 그대로의 상태의 짐승들이 이런 수준으로 겨루는 모습을. 진짜 복싱을. 나는 이런 지구스타일 낭만을 좋아했다. 밀로비치는 실은 자신이 도전자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는 적당히 은퇴해 명성을 유지하며 사는 것보다 복싱 선수로써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선택을 했다. 그 결과 근본적인 치료시기를 놓치더라도. 그 시합 즈음부터 이 배는 건조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우리의 고향별은 운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든 도전을 회피해선 희망이 없으니까.

 

 

4.

  우리 윗세대들은 모두 그로기 상태라 할 수 있다. 엔진이 꺼진 채 우주공간을 그저 관성에 의해 떠다니는 이 파이어아이호처럼. 인위적으로 반물질을 생성시킬 입자가속기나 우주공간의 반물질을 채집할 기구를 수리하거나 다시 작동시킬 고급 엔지니어들은 이미 모두 사라졌다. 먼 항성들에서 오는 미약한 빛으로 구동되는 비상동력장치는 다시 굴속으로 숨어든 인간들의 하루하루를 간신히 연명하게 해주는 수준이었고. 허나 어느 시대나 미쳐 날뛰는 혈기는 있는 법. 가령 지구시절 록음악을 듣던 세대 같이. 물론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원래 중력적응 훈련을 하던 장치를 개조한 세탁기계 옆에 자리를 잡고 400명분의 세탁물을 돌리고, 분류하는 임무를 맡았다. 대형 파이프 밑을 200미터 정도 기어가야 사람들이 주거하는 구역이 나오는 외진 곳이었다. 반대로 그런 특성 때문에 내 또래 애들의 아지트가 되었는데, 덕분에 그곳에 남들보다 일찍 가게 되었다.

  과거에는 접근금지구역이던 이 거대한 배의 심장부까지 쭉 나버린 거대한 금을 따라, 그 사면으로 몸을 던지는 이 위험한 스포츠가 언제부터 유행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옛 주거지역 천정을 덮고 있던 투명한 섬유물질은 잘 구부러지면서도, 절대 찢어지지 않아, 주저앉은 프레임 덩어리에서 한 조각 떼어내 몸을 감싸면 살짝 언 금속표면을 질주하는 복장으로 안성맞춤이었는데, 그것을 걸치고 수 킬로에 달하는 두께의 금속 벽이 외부충격에 수십 미터가 쩍 벌어져 만들어진 절경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저릿한 경이감에 젖어들었다. 우린 그것을 ‘더 계곡’이라고 불렀다. 더 계곡 저 멀리에는 지금은 꺼져버린 반물질엔진을 향해 중력이 작동되고 있었다. 마치 우리들을 끌어당기듯이. 선조들의 위대했던 문명을 향해. 이젠 다다를 수 없는 이 배의 영혼을 향해.. 자. 이쯤에서 몸을 던질 것. 고대유물인 투시안경을 쓰자고.

  레디. 셋. 고!

  물론 일단 시합이 시작되면, 모든 생각은 스피드에 잠식된다. 오로지 코스를 따라 박힌 붉은 불빛들과 무중력지대와 무산소지역을 표기해둔 푸른빛들이 아드레날린과 함께 흩날릴 뿐. 이라고 내 라이벌 메디치 올레는 말했었다. 거대한 덩치치고 언어감이 좋은 녀석이었다. 녀석에 비해 난 훨씬 단순한 놈이다. 이건 록이고, 약이고, 중독이다. 나는 현재를 버렸다. 좁다란 복도나 기계로 가득 찬 공간, 그 구석에 자리 잡은 잠자리도 간헐적으로 끊기는 전기와 산소에 얼른 반대 중력지대까지 좁은 비상구를 기어가 도망쳐야하는 현실도. 더 이상 가르쳐줄 것이 없는 어른들도, 기껏 식량이나 에너지관리 정도 하는 주제에 격납고 같은 큰 자리에 터를 잡고 사는 엔지니어들도. 모두 이 스피드 앞에 약자였고, 패배자였다.

 

 

5.

  전형적인 코카서스인종의 얼굴을 한 메디치 올레의 얼굴이 보인다. 팔다리에 사각 섬유물질의 모서리를 묶여 다람쥐처럼 펼쳐 스피드를 내며, 바싹 약이 올라 내 뒤를 쫓고 있다. 멍청한 놈. 나는 놈을 비웃듯 어깨를 비틀어 섬유물질을 날개의 날처럼 기울여 코너를 돌았다. 그 뒤로 달리는 녀석들은 한참 먼 곳에 있었다.

  메디치와 난 자주 선두를 다투는 사이였다. 녀석은 20살이 되면 인구제한을 위해 추첨되는 ‘화학적 거세’에 뽑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대개 녀석처럼 딱 봐도 남성호르몬이 넘쳐나는 타입이 뽑히긴 했지만 잘 일어나는 일은 아닌데. 하긴 제한된 자원에 인구가 느는 것은 재앙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잔재주로 엔지니어그룹이 기득권이 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심지어 충돌 이후 첫 지도자가 산부인과 의사였다니! 야만을 제어하는 것까지는 인정. 하지만 억제와 금지. 그리고 금지. 금지. 금지.. 음악도 금지, 약물도 금지..

  플라잉 봅슬레이에 관련된 괴담중의 하나는 엔지니어들이 일부러 이 스포츠를 어린 애들 사이에 유행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뜬소문이다. 아이들은 모두 기술자집단을 싫어했다. 1위를 하면 격납고로 갈 수 있다는 말도 들렸지만 말 같지도 않은 소리지. 어찌 되었든 메디치에겐 여자 친구가 있었다. 봉모양의 무언가가 침입해 반 이상이 파손되고, 천장이 머리높이까지 주저앉은 과거 메인 컨트롤타워에서 나와도 섹스를 나눴던 애였다. 언젠가 그 애가 고양이 홀로그램을 보여줬는데 내가 구토를 하자 그 후로 날 피했다. 모성본능은 구습이라고 공격했더니, 그녀는 영역을 침범당한 고양잇과 동물처럼 화를 냈다. 한때 인류가 성별도 뒤바꿀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신기할 뿐, 분명 모험심 강한 유전자유형에게 배를 맡겼다는데, 모두 무언가로 도망치듯 가장 원시적인 무언가에 집착하는 것이다. 하긴 난 뭐 다른가? 사실 나는 섹스보다 이게 더 짜릿하다. 플라잉 봅슬레이. 메디치 녀석을 이기는 건 큰 의미다. 이 우주에서 제일 빠른 인간이 되는 것이니까. 말했듯이 나는 이런 구식 낭만이 좋았다.

  역시 메디치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금세 날개를 오므려 배에 모으고, 바닥을 긁어 빠르게 회전을 해 나를 쫓아왔다. 놈은 나처럼 일찍 부모를 잃고 혼자 컸다. 나보다 더 후진 일을 했는데, 이 배의 외부로 나가 금이 가고, 틀어진 금속 벽의 틈으로 산소가 빠져나가는 것을 땜질하는 험한 일이었다. 우린 무식했지만, 이배가 죽어간다는 인식에 동의했다. 우리 때는 아니길 바랐지만. 이 거지같은 세상에 세탁기라도 제대로 돌아간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이니? 하지만 전원이 끊기는 일이 점점 더 자주 발생하고 있었어. 시발. 잊자. 난 시합에서 널 이길 거야. 나도 너를 이길 거야. 덩치 큰 겁쟁이에게 질 순 없지. 나도 마찬가지야. 우린 거대한 세탁기 안에 탁구대를 깔아놓고 탁구를 치며 말했다. 합성알코올 더 있어?

  나는 날개를 펼쳐 스피드를 냈다.

 

 

6.

  더 계곡의 가장 멀리까지 가본 사람은 따로 있었는데, 지금 백치가 된 그레고리우스였다. 그는 나보다 5살 정도가 많았고, 신앙을 끝까지 유지하던 혈통이었는데, 과거 탐험 팀이 조사한 곳 너머로 가본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경애하는 그레고리우스. 나의 우상. 그는 챔피언자리가 지루해질 정도여서 한번은 정해진 코스를 이탈해 무중력지대를 향해 몸을 던져봤다. 곧 살짝 떠오른 몸이 무한한 가속도로 달렸다. 엔지니어들이 정해놓은 선을 넘어, 몸은 더 깊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시간이 무화될 정도의 환희가 온몸을 휘감을 무렵, 달리던 방향의 수직으로 금속 벽이 벌어져 생긴 거대한 절벽을 만났는데, 그 절벽을 넘자마자 갑자기 몸이 허공에 멈추더니 산소가 끊겼단다.

  심장박동은 빨라지고 귀가 멍해져왔다. 그는 충격과 뇌에 산소공급이 부족해져 겪는 환각에 시달리며 허공을 헤엄쳐 절벽 너머 어떤 불빛을 향해 들어섰다. 다행히 그 복도의 바닥은 중력이 작동했고 산소가 있었다. 그는 무작정 걸어 거대한 문 앞에 다다른 뒤 쓰러졌다. 그때 그는 계시를 받았다. 파이어아이의 부함장까지 지냈다던 그의 고조할머니가 꿈에 나타난 것이다. 고조할머니의 얘기라고 해봤자 집안 대대로 전해지던 것이었다. 금속 벽 너머, 막혀버린 복도 너머엔 이 배의 비상용 수소엔진을 켤 수 있는 레버가 있다. 연꽃무늬가 그려진 문..

  간신히 숨이 돌아온 그레고리의 눈에 연꽃무늬가 보였다. 그레고리는 다시 허공을 헤엄치고, 중력을 등지며 수 킬로를 기어와 어린 숭배자들 앞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는 아주 바보가 된 탓에 아무도 그의 얘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재생의 문에서 도망친 그레고리는 뭐에 짓눌린 듯 그 문을 열었다면 자신이 죽었을 것이라는 말만 반복하는 인간이 되었다. 물론 다시는 플라잉 봅슬레이는 타지 않았고.

  어느 날 아직 미치기 전의 그레고리우스는 발밑에 나뒹굴던 한때 식량배급표로 사용되던 옛 주거지역의 홈키 카드들을 발로 차며 우리들에게 말했었다.

  초유 본서. 무서웠어. 그걸 당겼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까봐..

  소문에 따르면 구조신호가 간다던데? 그레고리우스. 지구에서 출발한 후발대가 있다면.. 그 배에 신호가 간데. 언제 올지 모르지만, 나노우주선같이 더 좋은 기술이 지구에 생기면..

  지구는 희망이 없었잖아. 동영상에 다 남았어. 하여간.. 제일 무서웠던 것은 동력구역이 분리된다는 전설이야. 분리탈출 버튼일수도 있거든. 격납고는 거기 속해. 파손부위에 사는 사람들은 우주에 버려지는 거지. 게다가 난 채소농장에 취직했으니까.. 거긴 공기질도 좋아. 15년 근속이면 격납고로 갈수도 있어.. 그래서 참은 거야.

  나한테 약을 알려준 녀석. 록음악이란 걸 듣던 세대가 있었다고, 그렇게 되자던 새끼. 그레고리우스는 제 이름처럼 확 늙어버렸다. 몰래 시드창고에서 빼내온 대마초를 키우던 패기는 어디 갔나? 사실 파이어아이의 비상동력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아마 제일 가까운 항성과 거리가 더 멀어져서 그런 것 같다. 지구를 떠날 때 냉동캡슐을 택해 수백 년을 버틴 사람들도 90년 전 전원공급이 끊어져 모두 죽었다. 하긴 수억 명의 dna를 추출해 보관하던 창고가 그 전 사고로 없어졌으니 그게 더 슬픈 일일지도 모르지. 메디치라면 뭔가 위로가 될 만한 시적 표현을 할 텐데.. 암튼 일단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교육용 자료 외에 음악 같은 걸 재생하는 일은 금지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듣지도 못한 록음악을 동경했다.

  사실 대충돌 직후 생산력이 떨어지자 벌어진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의 싸움은 매우 비참했다. 그랬기에 이후 무기 종류는 모두 우주공간에 버려졌는데, 그때 텅 빈 무기 격납고는 엔지니어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나마 이 배에서 고개를 들고 산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데. 원래 그곳 소속이던 할아버지는 내게 기술을 배우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체질이 안 맞았다. 윗대가리 비유 맞추기도 싫고. 무엇보다 냉동캡슐에 있던 사람들을 위해 끝까지 대신 싸워준 우리 부모를 비참한 삶으로 몰고 간 엔지니어들이 미웠다. 의료기술만은 긴 기록을 유지해온 이 배에서라면 밀로비치라도 치료가 가능했을 텐데.. 우리한텐 그 혜택이 안 왔다.

 

 

7.

  뒤를 돌아보니 메디치가 멀어지고 있었다. 녀석이 어설피 몸싸움을 걸어온 결과였다. 바로 방향을 꺾으면 출발지점 맨 끝에 붙은 격납고 바닥을 향해 작동하는 중력 장치를 향해 날아 나는 무난히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었다. 나는 힐끔 메디치의 뒤편 광활하게 펼쳐진 텅 빈 공간을 내려다보았다. 누구나 알고 있다. 저 먼 수평선 너머에 반물질엔진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거기 가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여기서 멀리. 잠든 미래가 있다는 것을.

  내가 코스를 이탈한 건 그냥 충동이었다.

  아니 그저 더 빠른 스피드를 바랐을 지도 모른다. 그저 메디치의 낭패한 얼굴이 지겨워서. 혹은 녀석이 내 뒷모습을 보는 것이 지겨울 것 같아. 아니. 왠지 나는 가능할 것 같아서.

  무한한 스피드. 내 머리 위와 배 아래에 금속 벽을 두고, 허공을 달리는 속도감. 이게 그레고리우스를 끝내 미치게 만들었던 감각의 영역이구나. 이대로 난 갈가리 찢기는 걸까? 가속도.. 이 미칠 듯한 가속도. 이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만약 그레고리 말이 틀렸다면? 혹은 내가 조금이라도 내 몸을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어딘가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겠지. 무슨 상관이람. 더욱 더 빨라지는 이 스피드에, 온몸을 찢고 불태우는 것 같은 황홀감에.. 이 몸뚱이쯤 부서진들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이 배 역시 마찬가지 운명이야. 난 세탁실에서 죽을 운명이고. 정신을 잃을 무렵, 마이크 밀로비치가 내 옆에 나타났다.

 

 

8.

  나는 숨이 막힌 채, 그물에 붙들린 새처럼 허공에 버둥거렸다. 내 옆으로 버려진 주거지역에서 올라온 온갖 쓰레기들이 허공에 떠 있었다. 다리 밑으로 내가 달려온 계곡과 수직으로 뚫린 또 다른 거대한 계곡은 아마 옛 주거 지역과 연결된 듯 했다. 난 바람 빠진 축구공을 발로 찼다. 옛날 사람들의 속옷이 눈을 가렸다. 그리고.. 복서의 글러브가 보였다.

  마이크 밀로비치는 그런 내 옆에 서서 태연히 쉐도우 복싱을 하고 있었다. 환각이구나. 얼마나 오래 여기 있었지? 이 절벽 너머 복도를 찾아야 한다. 그레고리우스가 알려준대로.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느낌에 힘겹게 팔다릴 휘젓는데, 마이크 밀로비치가 나를 향해 입을 열였다. 문을 열어선 안 돼. 그럼 너는 죽을 거야. 나는 사지를 버둥거리며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허공을 가로질렀다. 마이크 밀로비치는 거듭 나를 만류했다. 기다려. 죽음에 무뎌지지 마. 마이크 밀로비치? 아직 아니야. 나는 도전하고 싶어요. 무엇에 대한 도전? 기껏 위로 올라가봤자 격납고잖아. 네 가족이 내려온 곳. 도전하고 싶어요.

 

 

  나는 복도 바닥의 중력에 온몸을 기댔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이 몸이 무거웠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부터 설명해줄게. 마이크 밀로비치. 너는 캡슐 안에 있어. 너의 뇌에 생긴 병을 낫게 해줄 의료기술이 나올 때까지 이 캡슐에 있기로 했어. 파이어아이 안에. 너는 젊고, 패기 있는 싱싱한 육체를 원했어. 다시 스릴을 즐기길 원했고. 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앞을 향해 걸을 뿐이었다. 그는 계속 말을 걸었다. 이건 있을 수 있는 오류야. 네 뇌 속에 구멍이 생겼으니까. 지나치게 많은 주먹을 맞은 탓이지. 그래서 시뮬레이션 된 세계에 오류가 생긴 거야. 하지만 지금 문을 열면 안 돼. 비상레버는 산소를 완전히 끊는다고. 정말 죽는 것이 나을 때만 사용하는 거야. 조금만 더 버텨. 뭘 버티란 말이지? 이 지독한 세상에서 아무 희망 없이 늙어가는 것? 너는 많은 재산이 있어. 네 머릿속을 고칠 수 있는 의료기술만 나오면 캡슐에서 나가게 될 거야. 정신 차려. 마이크 밀로비치. 마이크 밀로비치!

  아쉽게도.. 마티니 블루와 밀로비치의 시합 결과나 영상은 남아있지 않다.. 밀로비치의 최후의 진술만이 음성기록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의 병은 너무 진행되어 치료를 하면 진행을 멈출 수는 있었지만, 완치를 하려면 후속 기술을 기다려야했다.

  아 맞다. 난 마이크 밀로비치였지. 나는 연꽃이 그려진 문 앞에 서서 거울처럼 내 옆에 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결국 몸이 마비되는 단계를 맞이했고 의료기술을 기다리며 당시로써는 신기술이었던 이 캡슐에 들어가는 계약을 맺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뉴스는 파이어아이호의 출발이었다. 뭔가 오류가 생긴 것 같다. 원래는 정지해 있어야할 두뇌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캡슐 회사는 이럴 때를 대비해 비상레버에 관한 시뮬레이션 이미지를 심어놓았다. 나는 지금 파이어아이호에 있지만. 사실은.. 플라잉 봅슬레이는 그러니까.. 으 비상 레버를 당기면.. 레버를 당기면 어떻게 되더라? 나는 너무 괴로워 생각을 멈추고 싶었다. 문을 열면.. 어떻게 되더라.. 나 마이크 밀로비치는..

  마이크밀로비치는 배가 완전히 건조되는 40년 후에는 자신도 깨어나 치료를 받고, 이배에 올라타고 싶어 했다. 누구든 도전을 회피해선 희망이 없으니까..

 

 

9.

  내 이름은 초유 본서.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지만 뜻까지 알지는 못 한다. 한자로는 初乳 本書. 물론 써본 적은 없다. 과거 제3구역의 공영문자가 한글이었기 때문에 내려온 관습으로 난 그냥 ‘초유 본서’라 썼고, 다들 그렇게 불렀다. 내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것은 내게 고양이 홀로그램을 보여줬던 여자아이가 처음으로 내 손을 잡아줬을 때 감각이 갑자기 생생하게 떠올라서였다. 그 애 이름이 떠올랐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20세기 팝스타처럼 생겼던, 내게 플라잉 봅슬레이를 처음 가르쳐줬던 아이. 작은 체구에 이젠 메디치와 미래를 꿈꾸게 된 간호사를 지망했던 현명한 여자아이. 네가 맞았던 것도 있는 것 같아. 우리는 철이 들어야해. 근데 너한테 말 안한 것이 있어. 나는 가끔 전원이 끊어진 캡슐들을 가끔 생각해. 부모님이 그 안에 계신 것 같거든. 그러다 내 삶 역시 캡슐속의 삶일 뿐이란 생각이 들지. 모든 것이 시뮬레이션이 된. 슬프지 않니? 네가 내 말을 들었어야 해. 그래도 내가 틀렸다고? 헉!

  알고 있다. 엔지니어들이 10대들을 이곳에 보내기 위해 플라잉 봅슬레이를 유행시켰다는 소문쯤은. 이 배를 다시 띄우기 위해 나같이 철없는 10대 몇은 절벽에 몸을 던져도 상관없다는 것이겠지. 사실이라도 상관없어. 브리트니. 나는 이미 여기까지 왔다고.

  나는 무의식중에 잡고 있던 뜨끈한 문고리를 놓았다. 어느새 마이크 밀로비치에 대한 환각은 사라져 있었다. 마치 마지막 답은 나 스스로 내려야한다는 듯. 나는 박동이 멈춘 파이어아이의 심장, 대대로 재생의 문이라 전해져오던, 아마 불교를 믿었던 누군가가 붙여놨을, 어쩌면 지구에서부터 붙어있었을 수도 있는 오래된 연꽃 모양의 스티커가 붙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진흙 속에서 피는 꽃.. 난 흙의 감촉도, 꽃의 감촉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내 덕에 모두가 그 감촉을 느끼게 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흙일지 꽃일지 누구도 모르지만. 나는 오래된 질문 앞에 선 것이다. 어차피 서서히 죽어가는 배잖아.. 붓다의 자비는 이 우주를 관통할 것인가? 확신이 없다. 한 마디만 해줘요. 밀로비치.. 마티니 블루와의 대결은 누가 이겼어요? 당신의 선택의 결과는 어땠어요? 난 이상한 감각을 느끼며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가끔 재미삼아 해보던 동작이었지만, 너무 능숙하게 팔이 움직여 깜짝 놀랐다. 보여?

  내가 초유 본서가 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몇 년 전부터 그렇게 생각해왔다. 10대가 되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하지만 난 다르다. 왜냐면? 왜냐면.. 새로운 플라잉봅슬레이 챔피언이잖아? 게다가 진짜 마이크 밀로비치일수도 있고. 마지막까지 복싱을 포기하지 않던. 죽음에 무릎 꿇지 않던.. 그레고리우스. 메디치, 브리트니! 제발 아무나 대답 좀 해봐. 이 문은 출구야? 아니면 죽음이야? 시간을 함께 했던 모두가 각자 길로 사라졌다. 결국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 자신과 외로운 선택만이 남았다. 난 내 삶을, 내 주변을 감싼 환경을 바꾸고 싶었다.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너는 누구야? 누군가 다시 여기까지 올 순 있지만,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다. 난..

 

  초유 본서는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문에 새겨진 연꽃무늬 위로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써봤다. 어색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리고 그냥 문을 열어버렸다.

 

 

10.

  120년간 멈춰있던 파이어아이호의 엔진에 곧 불꽃이 피어올랐다. 배는 미뤄진 계획을 실현하려 새로운 항성을 향해 움직였다. 소년의 몸은 순식간에 타버렸다. 캡슐들의 잔해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있던 마이크 밀로비치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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