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 고백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선술집에서 서덕호는 친구인 이서준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 덕호와 서준은 상대의 무릎이 스칠듯한 좁은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테이블 위로 떨어지는 할로겐 등의 불빛은 너무 밝지도 그렇다고 너무 어둡지도 않다. 두 사람은 아주 약간 흐트러질 정도로 취해 있지만, 할로겐 등의 적당한 밝기의 노을빛은 이들의 취기를 감추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조명은 이 둘이 먹고 있는 육회의 선홍색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 준다. 이 두 친구의 대화 주제는 덕호가 회사 내에서 짝사랑하는 나보람에게 얼마 전 고백한 이야기이다. 덕호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고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부서 제품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나보람에게 첫눈에 반했다. 보람은 덕호와 나이는 같지만 사회생활을 5년 정도 일찍 시작하였고,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디자이너이다. 그에 비하면 덕호는 입사 1년 차로 일을 배워 나가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덕호는 겉으로 차가워 보이는 보람과는 업무적으로 몇 마디 나눈 것이 전부이고 좀처럼 친해질 기회가 생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며칠 전 용기를 내어 보람에게 차 한잔을 하자고 한 후 고백을 했지만, 보람은 덕호의 기분을 최대한 나쁘지 않게 하려는 배려심을 보이면서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아~ 정말 용기 내서 고백했는데 보기 좋게 차였네. 짜증 난다. 진짜.” 짜증 나는 표정을 지으며 덕호가 말을 했다. 
“너무 성급하게 들이 댄 건 아니야? 좀 더 시간을 두고 친해지면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친구 서준은 덕호에게 위로 차원의 말을 건넸다. 
“그그은데 덕호야, 예뻐? 크크크” 서준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덕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조심스럽게 다른 질문을 한다. 
“그럼 예쁘지. 걔를 처음 봤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설명을 하자면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겨울날, 밤새 눈이 하얗게 내렸는데 말이지. 아침에 동이 트고 아무도 밟지 않은 완전 새하얀 눈밭에 아주 적은 양의 피한 방울이 떨어진 그런 아름다움이었어. 상상이 돼?” 조금은 음산하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덕호가 얘기했다. 그리고 소주 반 잔을 가볍게 마신다. 
그러자 서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소주 한 잔을 비웠다. 
“야야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 거야. 너 머가 좀 이상해.” 서준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계속 말한다. “있잖아 그런 거. 키가 크고 날씬하다 던지, 눈이 크다든지, 아니면 연예인 누구를 닮았다든지.. 머 그런 식으로 얘기해 줘야지. 눈 밭에 피가 어쩌고 저쩌고.. 무슨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어~” 
“내 말은 먼가 범접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라는 거야. 얼마나 예쁜지 알겠지?” 또다시 덕호는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말하지만, 서준은 도무지 덕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야~ 너 또라이냐?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는 거야. 야! 쓸 때 없는 얘기 하지 말고, 사진이나 있으면 보여줘.”
덕호는 자신의 전화기에서 보람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여줬다. 그러자 서준은 덕호의 핸드폰을 낚아채 보람의 사진을 자세히 본다. 
“아~” 서준은 바람이 약하게 새는 듯한 낮은 톤의 감탄사를 냈다. 
그리고 서준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선홍색의 육회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은 후 보람의 사진을 다시 자세히 보기 시작한다. 
“오~ 예쁘네 예뻐. 묘한 매력이 있는데. 네가 아까 얘기했던 눈밭에 피가 어쩌고 저쩌고 했던 말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아. 먼가 느낌이 확 와 닿아.” 
“그렇지? 그렇다니까.” 덕호는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서준 쪽으로 조금 다가가면서 말을 했다.
“응 이해가 된다. 먼가 차가우면서도 좀 못되게 생겼어. 단순이 고양이상이라고 하기에는 표현이 좀 부족한 뭐랄까.. 못되게 생긴 얼굴이고 아주 매섭게 차가운 그런 느낌.. 그런데 누가 봐도 예쁜 얼굴.. 표현하기가 어려워. 아~ 나도 이런 스타일 좋아하는데..” 서준은 자신의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답답해한다.
덕호와 서준은 건배를 하고 술 한 모금을 마신 후 육회를 한 점씩 먹는다. 
“그런데 이런 애들이 반전 매력이 있어. 차갑게 보이지만, 알고 보면 마음은 따뜻하거든. 그러면 매력이 확 더 올라간다니까. 그나저나 야야~ 덕호야, 이 친구 인스타그램은 안 하냐?” 
“하긴 하는데 비공개로 되어 있더라고..” 덕호가 대답했다. 
“친구 요청하지 그랬어?” 
“아직 머 친하지도 않은데 친구 요청하기가 그렇더라고..” 
“친하지도 않은데 고백은 했으면서 친구 요청은 못하냐? 바보 같은 놈. 나 같으면 그냥 할 것 같은데 궁금하지도 않냐? 그나저나 이 친구 어디 살아?” 서준이 크지는 않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한남동” 덕호는 짧게 대답한다. 
“오~ 집도 잘 사나 보네. 야야 진짜 잘해봐라. 흐흐” 서준이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소리로 웃는다. 
“응 자세히는 모르지만 왠지 내 느낌도 그런 것 같아. 먼가 고급스러운 면도 있어.”
“맞아. 확실히 고급스럽기도 해. 어쨌든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조금씩 천천히 다가가 봐. 상대 입장에서 너무 갑작스러웠을 수도 있잖아.”
“그런데 회사 사람들하고도 잘 어울리지 않고 먼가 친해지기가 쉽지 않아. 휴~” 덕호가 한 숨을 쉰다.
“원래 좀 내성적인 성격인가?” 서준이 물었다.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원래 사람들하고 친하게 잘 지냈는데, 내가 입사기 전에 친하게 지내던 동료가 갑자기 죽었나 봐. 그 이후로 사람들하고 잘 안 어울린대.” 덕호가 조용하게 말을 한다.
“진짜? 왜 죽었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서준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자살했나 보더라고.. 나도 얼핏 들은 얘기라서 자세하게는 몰라. 그런데 소문에 의하면 그 죽은 사람 몸에 짐승한테 물린 자국 같은 것이 있었다나 뭐래나.” 덕호는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오 정말? 그럼 자살이 아닐 수도 있는 거야?” 서준은 작지만 약간 격앙된 말투로 물었다.
“에이 그렇지 않겠지. 그냥 말도 안 되는 소문이겠지. 무슨 물린 자국이 있다는 게 말이 돼?”
“하긴 그래. 사람들은 원래 이상한 말들을 많이 만들어내곤 하지. 그런데 정말 친한 사람이 갑자기 죽었으면 충격이 컸겠네.”
“그 일 이후로 한동안 휴직도 하고 그랬었나 보더라고..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대. 서준아, 오늘은 이만 일어나자. 11시가 넘었다. 내일 출근해야지.” 
덕호가 그만 가자는 말을 하고 나서 두 사람은 남은 소주잔을 비운다. 선술집을 나와 택시를 기다리고 있다. 
“그나저나 야~ 포기하지 마. 한번 까일 수도 있지. 이렇게 괜찮은 여자 만나기 쉽지 않아.” 
“네가 얘에 대해서 멀 안다고 괜찮고 말고야?” 
“아~ 딱 보면 알지. 일단 예쁘잖아. 능력도 있다며. 어어 덕호야 저기 택시 온다. 너희 집이 더 머니까 먼저 타고 가.” 
서준은 앞에 멈춰 선 택시 문을 열고 덕호의 등을 밀어 안으로 넣으면서 택시 기사에게 외친다. 
“기사님, 신림동이요.”

 

2 커피

서준과 헤어지고 집에 들어가기 전 덕호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사서 집 근처 작은 공원으로 향한다. 덕호의 집은 신림동의 높은 지역에 위치해 있다. 마치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 나올 법한 옛날 운치가 있는 낡은 동네이다. 2019년 가을이 끝나갈 무렵, 아마 서울에서 이렇게 오래된 분위기의 동네는 거의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해가 지고 동네에 어둠이 내리면 낡은 느낌은 감춰지고 정감 가는 분위기로 바뀐다. 공원에 다다를 즈음, 고양이 한 마리가 덕호 옆을 지나간다. 이 동네 고양이들은 사람들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골목인 양 느리고 여유 있게 걸어 다닌다. 덕호는 뜨거운 커피와 가방을 옆에 두고 공원 벤치에 앉았다. 벤치 위로 낡은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떨어져 나름 분위기가 좋다. 공원 벤치에 앉으면 서울이 내려다 보인다. 자정이 되려면 한 20분 정도 남았는데, 아직까지 불이 꺼지지 않은 집과 건물이 꽤 많다. 저 멀리 내려다 보이는 올림픽대로와 한강대교에는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붉은빛을 내는 자동차들이 생각보다 많이 오가고 있다. 고개를 조금 드니 저 멀리 강 건너 화려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유치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남산타워의 요란한 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남산타워 위로 떠 있는 달은 오늘따라 유난히 밝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에 미세먼지도 없어, 다른 날 보다 더욱 선명하게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덕호는 이유 없이 싫다.
‘짜증 나게 달빛이 왜 이렇게 밝은 거야!’
보람에게 거절당한 이후로 덕호는 머릿속이 복잡하고 두서없는 생각이 마구 떠오른다. 오늘은 서준과 이야기를 나눠서 그런지 더 그렇다.
‘사귀다 헤어진 것도 아니고 혼자 좋아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아프지? 내가 그녀를 많이 좋아하고 있나 보다.’ 옆에 놓여있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생각한다.
‘카페 점원이 물을 적게 부었나, 아님 나의 쓰라린 마음을 커피도 아는 걸까?’ 오늘따라 아메리카노가 유난히 더 쓰게 느껴진다.
커피를 옆에 내려놓고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다시 쳐다본다.
‘그나저나 달빛은 아까부터 계속 밝네? 달에서 반사된 빛은 지구에 가까이 다가올수록 점점 가늘어지기 시작하고, 대기권을 지나면서 무엇이든 파고들 수 있는 아주 날카롭고 긴 화살로 변하여 내 심장에 마구 떨어지는 것 같다. 세상 모든 달빛이 내 심장으로만 향하고 있는 것 같네. 휴~’ 덕호는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을 아프게 만든다고 착각을 한다. 깊게 들이마신 숨을 크게 내뱉으며 한강을 바라본다.

‘저기 올림픽대로와 한강대교를 달리는 차들의 시간은 평소처럼 빠르게 흘러가는데, 지금 이렇게 쓰디쓴 거피를 마시는 나의 아픈 시간은 마냥 늘어지고 더디게만 간다. 지금 이 공간에는 나만의 시간 그리고 나머지의 시간, 이렇게 두 개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
덕호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다.
‘아마 저기 강 건너가 한남동이지. 그럼 지금 그녀도 저기 어디 즈음에 있겠지? 한남동도 높은 지역이 있으니, 혹시 그녀도 지금 나와 같은 높이의 고도에서 서울을 내려다보고 있을까? 나는 집 근처 공원에서 서울을 내려다보고 있고,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서울을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그녀는 커피를 마시고 있지는 않을걸. 아마도 나만 마시고 있을 거야.’
덕호의 머리가 약간 흔들릴 정도의 시원한 바람이 분다.
‘내 볼에 닿는 바람마저 내 살을 아리게 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아마 그녀가 보는 서울과 내가 보는 서울은 많이 다를 거야. 주변의 집들도 다르고, 여기서는 한강대교와 한강철교가 보이고, 그녀에게는 한남대교와 동호대교가 보이겠지. 같은 서울인데 머가 이처럼 다르게 보이도록 만드는 걸까? 여기 떨어지는 달빛과 그녀의 집에 떨어지는 달빛 자체가 다르기 때문일지도 몰라.’
덕호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한다.
‘이제부터는 그녀를 바라만 봐야 한다. 누군가를 혼자 좋아한다는 것은 마음에는 담을 수 없고, 멀리 떨어져서 눈에만 담아야 하는 것이다. 많이 아프겠지. 포기해야 할까? 포기하려면 빨간색을 나 자신에게 파란색이라고 최면을 걸어야 하는 것과도 같은 건데..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수도 있어. 하지만 시간이 이렇게 느리게 흐르는데.. 이 아픔은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는데.. 심지어 나는 그녀와 사귄 적도 없는데.. 정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덕호가 계속 보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순간 갑자기 공원의 가로등이 꺼지면서 사방이 어두워졌다. 어두워지면서 생각도 멈췄다. 한 30초 정도 시간이 흐른 후 가로등에 깜빡깜빡 켜지고 꺼지고를 반복한다. 덕호는 고개를 들어 깜빡이는 가로등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덕호가 가로등을 쳐다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불이 다시 켜졌다. 등이 들어온 후에도 덕호는 한참 멍하니 가로등을 바라보고 있다. 가로등을 바라보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남은 커피를 다 마셔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발걸음을 떼는 순간 벤치 밑에 무언가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스마트폰이다. 떨어져 있는 전화기를 주워 보니 거의 새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완전히 처음 보는 브랜드의 제품이다.
‘내가 모르는 다른 나라 브랜드인가?’ 전화기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자세히 본다.
덕호는 자신의 전화기가 바꿀 때가 되었는데, USIM만 바꿔서 사용할지 주인을 찾아 줄지 순간 고민한다. 전화기가 꺼져있는 것 같아, 전원을 켜려고 전화기 옆면에 있는 버튼을 길게 눌렀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누른 손가락에 날카로운 바늘로 찌르는 듯한 심한 통증이 느껴진다. 덕호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아아아~ 뭐야? 으아, 도대체 이거 뭐야?” 놀란 덕호는 아픈 손가락을 본다.

버튼을 누른 손가락에 피 한 방울이 맺혀있다. 잠시 후 통증은 서서히 사라진다. 덕호는 들고 있던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어 손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바닥에 있는 전화기를 보니 화면 전체에 빨간색의 불이 들어오면서 전원이 켜지기 시작한다. 전화기를 주워 화면을 열어보니 비밀번호는 설정되어있지 않다. 이상한 전화기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이 가져서는 안 될 것 같다고 결심한 덕호는 전화기를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연락처 명부를 찾아본다. 하지만 어떠한 전화번호도 저장이 되어있지 않다. 통화 버튼을 눌러보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거나 받은 기록도 전혀 없다.
‘도대체 이 전화기 뭐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나.’
그 순간 전화기에 톡이 하나 온다. 전화기 주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덕호는 톡을 열어 본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가요?』라는 톡이 와 있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물어본다는 것도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한 덕호는 『제가 지금 이 전화기를 우연히 주웠어요. 어떻게 돌려드리면 될까요?』라고 톡을 보냈다.
『주인이 없는 전화기입니다. 당신이 사용하세요.』
『그게 무슨 말이세요? 저는 그냥 주웠다니까요. 톡 보내시는 분은 누구시죠?』
『저는 이 전화기 자체입니다.』
『장난치지 마시고요. 저 바쁜 사람이에요. 어떻게 돌려 드릴 수 있는지만 얘기해주세요.』
『이미 당신의 전화기에 있는 데이터를 이 전화기로 다 전송했으니, 저를 그냥 쓰면 됩니다.』라고 답변이 왔다.
짜증이 나기 시작한 덕호는 더 이상 답을 하지 않기로 하고 집으로 향한다. 집으로 가면서 주운 전화기 안을 여기저기 둘러보니 정말로 사진, 연락처, 문자, 메일 등 자신의 데이터가 이 전화기에 저장이 되어 있어 깜짝 놀랐다. 어떻게 자신의 데이터가 이 전화기로 옮겨져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건드린 것이 없는데 저절로 이런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헛것이 보이네. 요새 피곤하고 거절당한 충격 때문에 그런가?’ 하고 생각을 했다. 일단 집에 가서 자야겠다고 생각한 덕호는 집으로 돌아와 주운 전화기를 책상 위에 살짝 던져 놓고 빠르게 씻고 나왔다. 긴 하루를 보낸 덕호는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든다.

 

3 전화

덕호의 방에 걸린 시계가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덕호는 침대 위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더니 잠에서 깨어난다. 힘 없이 뜨다만 눈으로 잠시 천장을 바라본 후 몸을 일으켜 앉는다. 벽시계를 바라보고 깜짝 놀라 잠시 허둥대더니, ‘아 맞다, 오늘 토요일이지.’하고 생각이 들면서 다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한참을 멍하니 누워 있다가 덕호는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에 있는 차가운 물 한잔을 벌컥벌컥 급하게 마셨다. 물이 너무 차가워 목으로 넘어가자마자 찬 기운이 순식간에 몸 전체로 퍼지고 머릿속 깊은 곳까지 뻗쳐 잠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으로 돌아와 책상을 보니, 어제 집 근처 공원에서 주운 전화기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보니 찔린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덕호는 책상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잘 잤나요? 저는 당신의 전화기이니, 진짜 사용해도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잘 지내요.』라는 톡이 온다. 
‘어제 이 전화기랑 이야기를 나눈 것이 꿈이 아니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도대체 당신 누구세요?』라고 톡을 보냈다.
『저는 어제 얘기한 것처럼 전화기 자체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자아를 갖고 있듯, 저도 그냥 제 자아를 갖고 있을 뿐이에요.』라는 이상한 답변이 돌아왔다.
덕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가만히 전화기 화면을 본다.
『그럼 간단하게 제 소개를 할게요. 이름은 피닉스V에요. 에너지 공급원은 전기가 아니라 어제 당신 혈액에서 채취한 단백질과 탄수화물이고, 당신이 어제 전원을 켜는 순간 당신의 DNA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극소량의 당신 피를 수혈받기만 하면 됩니다.』
덕호는 피닉스V는 무엇이고, 단백질과 탄수화물을 에너지원으로 쓰고, DNA를 공유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사기를 치려는 의도의 보이스피싱 같아 보이지도 않고, 누군가가 이런 장난을 친다기에는 너무 기이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브랜드도 알 수 없는 전화기를 공원에 버려두고 그걸 주운 사람을 대상으로 장난을 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고 이해가 안 된다.
덕호가 피닉스V라는 전화기 안을 다시 살펴보니, 자신의 모든 데이터가 이 전화기에 있고 원래 쓰던 전화기에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어제 일이 꿈이 아니다. 그런데 정말 너무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고,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저기 누구신지 모르겠는데요. 장난 그만 치시고 어떻게 돌려드리면 되는지 그것만 알려주세요. 아니면 그냥 버리겠습니다.』 덕호가 톡을 보냈다.
『안됩니다. 버리지 마세요. 누군가의 얘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얘기하는 거예요. 저는 그냥 제 자신이에요.』
『당신 자신이라고요? 이 전화기가?』 덕호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제 이름은 피닉스V 입니다.』
『아 네네. 그럼 그냥 피닉스라고 부를게요. 피닉스 그럼 당신은 남자예요, 여자예요?』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합니다.』 피닉스V는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럼 도대체 당신의 정체가 뭐예요?』 덕호가 물었다.
『나는 어느 누구이기도 하고, 어느 누구도 아니기도 하고, 당신이기도 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네요.』
『제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당신이 세상을 보이는 데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데로만 보기 때문이에요.』 이 얘기 또한 전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덕호는 처음에 누군가의 장난으로만 생각하고 피닉스V를 버리려고 했던 것과는 다르게, 점점 이상한 전화기와의 알 수 없는 대화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계속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처음에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던 피닉스V의 말들이 조금씩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이 전화기가 자아를 갖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지적 수준이 엄청나게 높고 인간처럼 사고하는 인공지능이 만들어졌나? 내가 실험을 당하고 있는 건가?’ 덕호는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피닉스V의 말을 조금씩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서서히 동화되어가고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피닉스V에 대한 의심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덕호는 피닉스V가 마치 사람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냥 친구와 얘기하듯이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덕호는 1989년 생이고, 전주에서 태어났고,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다. 1997년 IMF 이후 집안이 어려워져서 초등학교 때 힘들게 보냈으나, 성실하신 아버지 덕분에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대학은 서울로 와서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대학원에서는 심리학을 공부하였다. 군대 있을 때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셔서 제대 후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덕호의 어머니께서는 덕호가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길 바라셨지만, 덕호는 대기업에 취직하여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언젠가 사업을 해서 큰돈을 벌기를 항상 꿈꾸고 있다. 

 

덕호는 이렇게 자신이 자라온 환경에 대해서 피닉스V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뿐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가치관, 연애 등 피닉스V와 다양한 이야기를 하였고, 어느새 둘은 친구가 돼있었다.
『덕호야, 너는 인생이 뭐라고 생각해?』 피닉스V가 물었다.
“음~”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진지한 표정을 지은 후 피닉스V에게 톡을 보낸다. 『나는 인생은 모험이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그걸 왜 묻는 거지?』

『맞아 모험, 나랑 같은 생각인데..』 피닉스V가 덕호의 말에 동의를 했다.

『진짜? 역시 우리는 먼가가 통한다니까.』 피닉스V와 자신의 생각이 같다는 것에 기뻐하면서 덕호가 말했다.
『모험을 떠나려면 어느 정도 현실을 넘어서는 판타지가 좀 필요해.』
『듣고 보니 그러네. 현실만 보면서 살 수는 없지. 사람이..』 덕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덕호야~ 판타지가 망상이 되지 않게. 너의 욕망을 내가 실현시켜줄게. 우리 같이 모험을 떠나자.』
『오 진짜? 네가 그렇게 만들어줄 수가 있어? 어쨌든 좋아 좋아!!!!!!』 덕호가 웃으면서 톡을 보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덕호는 피닉스V의 존재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인정을 하게 됐다. 그래도 좀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가끔씩 든다.

 

4 염탐

덕호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회사 탕비실에 있다. 평소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아 주로 아메리카노만 먹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단 것이 먹고 싶어 믹스 커피를 타는 중이다. 입사 이후 믹스 커피를 마시는 것은 아마 오늘이 처음일 것이다. 믹스 커피 가루를 종이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가득 부은 후 한 모금 마셨다. 커피 맛이 너무 밍밍해서 당황스럽다. 커피 맛도 그렇다고 단 맛도 아닌 그냥 뜨거운 물에 프림만 들어간 맛이 난다. 물을 너무 많이 넣었다고 생각한 덕호는 주위를 천천히 살펴본 후 커피를 싱크대에 버렸다. 그리고 새 믹스커피를 하나 꺼내어 물을 조금 적게 넣고 타서 마셔본다. 자신이 딱 원하던 단맛 커피이다. 덕호는 탕비실 입구로 나와 자신의 자리 반대편을 바라본다. 덕호가 바라보는 끝 창문가에는 보람이 앉아 있다. 모니터를 보면서 일에 몰두하고 있는 보람의 모습이 덕호의 눈에 들어온다. 창문을 등지고 앉아 있는 보람과 눈이 마주칠까 곁눈질을 하면서 쳐다보고 있다.
‘아휴~ 성급하게 고백해서 둘 사이만 괜히 어색해지겠네.’라고 생각하면서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커피의 단 맛이 자신의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을 약간은 달래 주는 것 같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피닉스V를 자신의 턱 앞으로 들어 올려 보람이 앉아 있는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덕호씨 여기 서서 뭐해?” 보람과 같은 부서 선임인 김새미 과장이 뒤에서 덕호의 어깨를 가볍게 툭 건드리며 말을 건 냈다.
“아 네 켁켁, 과장님 저기 그냥 켁켁켁” 깜짝 놀란 덕호는 사래가 들려 기침을 한다.
“멀 그렇게 놀래? 그런데 덕호씨, 믹스 커피 싫어하지 않아? 안 먹는 다고 한 것 같은데..”
“그게요. 오늘따라 단 것이 좀 땡겨서요. 하하.”
“그런데 여기 서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김새미 과장은 덕호가 바라봤던 방향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본다.
“어머 덕호씨, 나보람 대리 보고 있었던 거야?”
“아아아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요새 좀 복잡한 일이 많아서 잠시 창 밖 보면서 멍하니 서있었어요.” 덕호는 당황하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면서 계속 말을 한다.
“그게 머.. 아~ 그런 거 있잖아요. 밖에 보면서 잠시 멍하니 있으면 머리가 맑아지고는 하잖아요. 과장님은 그럴 때 없어요? 하하하 나만 그런가?” 덕호가 어색하게 웃는다.
“그렇구나 하하” 김새미 과장은 밝게 웃으면서, 덕호의 어깨를 다시 한번 툭 건드리고 탕비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고백한 거 회사 내에 여기저기 소문내지는 않겠지?’ 덕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면서 생각한다. ‘요새 회사 사람들하고 교류가 많지 않으니까. 뭐 그렇지는 않겠지.’ 
덕호가 자기 자리에 앉았다.
『아까 보여준 저쪽 반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나보람씨, 맞지?』 자리에 앉자마자 피닉스V가 덕호에게 톡을 보냈다.
『맞아』 덕호가 답했다.
『약간 차갑게 느껴지는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지적으로 보이기도 하네.』
『그래, 정확하게 봤어.』
『보람씨한테 가서 몇 마디하고 올 수 있어?』
『응? 왜? 좀 어색한데 고백한 것 때문에.. 아니 많이 어색할 것 같은데..』 덕호는 피닉스V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한다.
『다름이 아니라, 보람씨 전화기에 1미터 이내로 접근하면 그 전화기에 접속할 수가 있고 거기에 있는 데이터를 가져올 수가 있어. 그렇게만 되면 보람씨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서 너랑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러지.』
『정말? 머 블루투스처럼 연결하는 건가? 아 그나저나 무슨 말을 하지. 할 말이 없는데..』 덕호의 표정에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냥 일단 가서 무슨 말이라도 해봐. 빨리 가봐~ 최소 1분 이상 얘기해야 돼.』 피닉스V는 덕호를 계속 재촉하고 있다.
『어어 그래. 그런데 별로 할 말이 없는데. 진짜로~ 일단 가볼게..』
덕호는 마지못해 엉거주춤한 자세로 천천히 일어나 보람이 있는 자리로 향한다. 업무 파티션 사이의 긴 통로 끝에 여전히 열심히 일하는 보람이 보인다. 보람의 모습은 저 멀리 희미하게 윤곽만 보이지만, 덕호에게는 칠흑 같은 어둠에서 홀로 빛을 내고 있는 등대 같다. 보람에게 가까이 걸어갈수록 그 빛은 점점 더 크고 밝게 느껴진다. 그리고 덕호의 긴장감도 더욱 커지기 시작한다. 보람에게 가까워질수록 어색하거나 싸늘하게 대할까 봐 걱정도 되고 어떤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도 커진다. 천천히 걷는데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보람의 자리까지 가는 시간이 더 짧게 느껴지고 가까이 걸어 갈수록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뛴다. 보람의 자리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다가갈수록 입이 바짝 말라 입천장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것 같고 심장은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만 같다. 보람의 자리에 도달했다. 이제 말을 걸어야 할 시간이다.
“저기 나나나대리님, 안녕하세요?”
“아~ 네 덕호씨” 모니터를 보고 있던 보람이 덕호를 바라본다.
“근데 무슨 일 있어요? 이마에 땀이…” 보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아 그래요? 무슨 일은요. 좀 전에 뜨거운 커피를 마셔서 그런가 봐요. 하하” 덕호가 어색하게 웃는다.
“아 네. 그런데 어떤 일로?” 보람이 이번에는 살며시 미소를 보이면서 물었다.
“저기 다름이 아니라, 혹시 지금 진행되고 있는 VA 프로젝트 관련해서 제품 디자인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물어보려고요.” 덕호는 즉흥적으로 생각나는 아무 말이나 했다.
“아 네.. 디자인은 어느 정도 다 끝나가고 있어요. 이번 주에 저희 부서 내부적으로 1차 완료가 될 것 같고요. 아마 다음 주에 마케팅이랑 R&D랑 같이 디자인 품평회 할 것 같고 그러고 나면 수정 사항이 있겠죠. 그리고 아시겠지만 그 이후에 추가 수정 여부는 제가 알 수는 있는 부분은 아니고요. 어쨌든 넉넉하게 잡고 수정 기간 감안하면 디자인이 최종적으로 나오기까지는 그래도 최소 2개월 이상 걸리지 않을까요?”
“하하하~ 그렇군요.” 덕호는 그 다음으로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디자인은 왜 물어보세요?” 덕호 입장에서는 적절한 타이밍에 보람이 물어봤다.
“아 네, 그게 저기 음~” 덕호가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계속한다. “아 맞다. 최근에 거래선들한테 신제품 출시가 언제 되는지 문의가 많이 들어와서요. 기존 모델 판매량이 줄어든다나 뭐래나. 하하하” 덕호는 멋쩍게 웃고 나쁘지 않은 대답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 네 지금까지는 일정에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어요. 일정은 덕호씨도 알고 있지 않나요? 부서 간 이미 다 공유된 사항이잖아요. 그리고 디자인이 확정된다고 바로 제품화되는 것도 아닌데..” 보람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그그쵸 혹시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일정대로 잘 진행되는지 궁금해서요. 저희도 거래선한테 얘기를 정확하게 잘해야 하니까요. 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덕호가 가볍게 목례를 했다.
“아 네. 그렇군요.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네요.”
이때 보람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덕호가 입은 블레이저의 깃을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잡는다. “덕호씨, 블레이저 예쁘네요. 생각보다 센스 있는데요.”라는 말을 하고 몸을 빠르게 틀어 화장실 방향으로 걸어간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보람이 깃을 잡는 순간에 혈색이 확 올라오면서 덕호의 얼굴이 빨개지고 온 몸에 전율이 온다. 그리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 네에에, 감사합니다.” 화장실로 향하는 보람의 뒤에 대고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덕호는 황급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순간 긴장감이 풀린 표정으로 크게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 털썩 앉는다. 정신이 나간 듯한 멍한 표정으로 앞에 있는 모니터를 보고 있다. 심장은 계속 빠르게 뛴다.
“덕호, 야야~ 너 멀 그렇게 멍 때리고 있는 거야?” 옆 자리의 최민호 차장이 덕호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면서 말을 한다.
“어? 아~ 차차차장님, 아무것도 아니에요.” 화들짝 놀라면서 최민호 차장을 바라본다.
“야 뭘 그렇게 놀래? 그런데 너 얼굴은 왜 그렇게 빨간 거야?”
“제가요?”
“그래 너 너, 내가 너한테 말하잖아요. 너 좀 이상한데, 뭐 잘 못 먹었어?”
“아니에요. 이상하기는요.”
“부장님한테 깨지기 싫으면 정신 차리고 일해. 멍하게 있지 말고.. 이걸 확 그냥~” 최민호 차장은 장난기 있게 덕호를 때리는 시늉을 한다.
“네 차장님, 알겠습니다.” 손으로 막는 시늉을 하면서 덕호가 대답했다.
『어떻게 염탐하는 건 잘 됐어?』 최민호 차장이 얘기를 끝내고 다시 자기 자리에서 일을 하자, 덕호가 피닉스V에게 톡으로 물었다.
『그럼 잘 됐어. 이따가 집에서 한번 보자고..』 
피닉스V의 대답에 약간 긴장이 풀리는 듯 하지만, 덕호의 얼굴은 여전히 빨갛고 심장은 진정될 기미가 없이 계속해서 빠르게 뛰고 있다.

 

5 취향

덕호는 퇴근 후 자신의 방에서 피닉스V와 음성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무실에서 덕호가 보람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피닉스V는 보람의 전화기에 접속을 하여 보람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였고, 보람의 SNS를 무한히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덕호는 그동안 친구 맺기를 하지 않아 볼 수 없었던 보람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있다. 어떻게 친구 맺기를 하지 않고도 보람의 SNS를 볼 수 있는지 피닉스V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는 반면, 이렇게 몰래 보는 것이 괜찮은지에 대한 왠지 모를 우려감이 생겨 덕호의 마음 한편에는 불편함이 있다. 특유의 소심한 성격에 훔쳐본다는 느낌이 들어 조금은 찝찝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지만, 어느새 보람의 인스타그램을 보는 것에 빠져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한 생각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와~ 보람씨는 안 가본 나라가 없네.” 덕호는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해서 보면서 피닉스V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 것 같아. 여행을 좋아하나 봐. 그리고 어릴 때 외국에서도 좀 살았었고..”
“피닉스, 너랑 톡으로만 얘기하다가 집에서는 이렇게 음성으로 말할 수 있으니까 훨씬 편하네. 와! 그나저나 진짜 엄청 많은 곳을 다녔어. 뉴욕, 런던, 파리, 그리스, 터키, 이집트, 밀라노, 프라하, 크로아티아..” 덕호가 보람의 인스타그램에 있는 사진들을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보면서 말을 한다. 그리고 몰래 보람의 인스타그램을 본다는 죄의식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나는 외국이라고는 일본 오사카랑 교토랑 고베 가본 게 다인데.. 그것도 출장으로.. 여기는 어디야? 스페인 세비야라는 곳이구나. 와~ 엄청 멋있는데. 여기는 유럽 같기도 하고 아랍 같기도 하고 분위기가 묘하네. 나도 여기 한번 가보고 싶다.” 덕호는 보람이 스페인 세비야의 살바도르 성당, 스페인 광장, 알카사르 궁전, 메트로폴 파라솔 등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있다.
“덕호 대단한데 사진만 보고 알고.. 스페인은 북아프리카 아랍인들하고 전쟁을 많이 하다 보니 아랍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을 거야. 그래서 그런 느낌의 유적들도 많을 거고.. 그리고 크리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때 출발지가 지금 사진으로 보고 있는 스페인 세비야야. 약탈과 착취의 시작점이라고나 할까..”
“그렇구나. 역시 피닉스 똑똑해. 난 잘 모르지만 좋아 보이네. 날씨도 완전 좋아 보여. 가보고 싶다.”
사무실에서 김새미 과장과 찍은 사진도 몇 장 있다. 두 사람 모두 밝은 표정으로 찍은 사진이어서 사이가 좋아 보인다. 사진을 보면 볼수록 덕호는 점점 더 보람의 인스타그램에 몰입한다.
“그림도 좋아하나 봐. 미술관이나 그림 사진도 많이 올려놓았네.”
“아무래도 미대생이었으니까 자신도 그림을 그리고 관심도 많지 않겠어?” 피닉스가 덕호의 말에 답을 했다.
“맞아. 미술 전공이었지. 디자이너잖아.” 덕호가 혼잣말같이 매우 작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덕호야. 보람씨가 올린 그림들 다 좀 그로테스크하지 않아?”
“그러게 이게 뭐야 사람이야 괴물이야?” 덕호는 보람이 올린 프란시스 베이컨의 회화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
“이건 무슨 사람을 정육점 고기처럼 그려놨네.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인가 봐. 이상한 사람일세.” 덕호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계속 보고 있다.
“이건 또 뭐야. 리처드 프린스라는 화가인가 봐. 무슨 간호사를 이렇게 무섭게 그려놨냐? 간호사는 백의의 천사인데 말이지.”
“확실히 그로데스크한 취향이 있는 듯” 피닉스V가 다시 한번 덕호에게 강조하듯이 말한다.
“피닉스 네 말이 맞아. 뭔가 괴기한 느낌이야. 그리고 이 간호사 그림은 왠지.. 그 있잖아.. 영화.. 뭐였더라” 덕호가 곰곰이 생각을 한다. 
“아 맞다. 다크나이트. 거기 다크나이트에 보면 조커가 병원 폭발할 때 간호사로 변장하잖아. 바로 그 느낌이야. 이 간호사 그림들. 음~ 먼가 나는 미술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약간 소름이 돋는다고 해야 할까, 알 수 없는 섬뜩함이 있어 이 간호사 그림에..”
“그러게 진짜 그런데, 그 조커가 간호사 변장했을 때 딱 그 느낌이네.” 피닉스V가 덕호 말에 동조한다.
“그렇지? 그리고 뭐야 이 고철 같은 것도 미술 작품인가 봐. 조 챔벌린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네. 이게 무슨 예술이야. 쇳덩어리 구겨 놓은 게. 뭐야 이거 자동차를 찌그러트린 것 같기도 하고 뭐냐 도대체. 이런 예술은 알 수가 없어 뭐가 먼지?”
“확실히 기괴하고 파괴적인 예술 작품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지? 덕호야~”
“응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나는 미술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만.. 너랑 비슷한 생각이 들어.”
보람의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덕호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하고 잘 모르는 분야에 보람은 경험이 많고 조예가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로테스크한 취향이 있어 보이는 보람에게 무언가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볼수록 보람에게 조금씩 더 빠져들기도 하지만, 알 수 없는 음습한 기운이 감돌기도 한다. 덕호는 피닉스V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람의 인스타그램에 있는 사진을 한 시간 넘게 계속 보고 있다. 그리고 4년 전의 사진에는 자주 등장하는 여자 한 명이 있다. 4년 전을 기점으로 한 3개월 동안 그 여자와 찍은 사진이 매우 많고 그 이전과 이후에는 전혀 등장을 하지 않는다. 처음에 덕호는 그 여자가 친구 중 한 명이겠거니 하고 무심코 봤지만, 특정 기간 동안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고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혹시 죽은 직장 동료가 이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한다. 회사에서 만나 3개월 동안 꽤 친하게 지내다가 자살을 해서 이후의 사진에는 안 보인다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이 여자인가 보네. 보람씨랑 친했는데 죽었다는 사람.” 
“응 맞아. 이애린, 이 사람이야. 바로 자살했다고 한 사람이야.” 피닉스V가 확인을 해줬다.
“어 그래? 어떻게 알아 이름까지?”
“그거야 보람씨 전화기랑 노트북에 접속해서 메모, 일기 같은 것도 다 봤으니까 알지.”
“아~ 그렇구나” 덕호가 무심한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꽤 친했었나 봐. 여행도 같이 가고 핫플레이스도 많이 다녔네 둘이.. 여긴 어디냐? 엄청 분위기가 좋은데.. 청담동에 있는 프랑스식 해산물 레스토랑인가 봐. 전망도 좋고 샴페인에 해산물도 엄청 맛있어 보인다.”
덕호는 보람과 애린 뒤로 멋진 야경이 보이는 고급스러운 식당에서 샴페인을 들고 둘이 찍은 사진을 보고 있다. 계속 화면을 스크롤을 하면서 애린과 찍은 사진을 유심히 살펴본다. 이 둘은 매우 가까운 사이처럼 보인다. 팔짱도 끼고 같이 손을 잡고 찍은 사진도 많고 매우 행복해 보이는 모습의 사진들이다. 마치 다정한 연인으로 착각을 할 수도 있겠다고 덕호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보람씨는 남자 친구는 없나 봐?” 덕호가 피닉스V에게 물었다.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애린이라는 친구가 죽고 나서 헤어진 것 같아.”
“그래? 그런데 왜 남자 친구 사진은 없고 이 여자 사진만 있는 거지?”
“그거야 당연하지. 헤어진 연인 사진은 다 지워버리잖아. 너 같으면 안 그러겠어?” 피닉스V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며 핀잔을 주는 듯이 말을 한다.
“아 맞다. 하하하 나 바보인가 봐.” 자기 자신도 어이가 없다는 듯 어색하게 웃는다. 
“그나저나 피닉스,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을까? 자연스럽게 접근하려면.. 음~ 보람씨가 미술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니 나도 미술 관련된 책 좀 읽고 아는 척을 하는 것이 어떨까? 전시회도 같이 가자고 제안을 하는 거지. 어때 내 생각?” 스스로 생각해도 좋은 아이디어라는 듯 덕호가 확신에 찬 말투로 피닉스V에게 물었다.
“아냐. 네가 먼저 다시 접근하는 것은 좋지가 않아. 이미 한 번 고백을 했다가 거절당했기 때문에 네가 접근해서는 그 벽을 부술 수가 없어.” 단호한 말투로 피닉스V가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보람씨가 먼저 연락을 하게 만들어야지.”
“그게 가능할까? 내가 다가가도 안 되는데 먼저 연락이 오도록 한다고?”
피닉스는 보람이 고등학생 때 어머니와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덕호에게 알려준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어릴 적 가족을 잃은 아픔과 상실감을 갖고 있는데, 갑자기 직장의 친한 동료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큰 충격을 받았겠다. 사람들과 벽을 쌓고 자신이 만든 동굴 속에 갇혀 살아갈 수 있겠네.” 
피닉스V로부터 보람의 가족에 대한 얘기를 들으니, 덕호는 보람에 대한 마음이 더욱 커졌고 그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어졌다. 피닉스는 덕호에게 2년 전 이맘때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사촌동생의 사진과 애도의 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라고 제안을 한다. 그러면 아마 그 사진과 글을 보람이 보고 먼저 연락이 올 것이라고 덕호에게 말을 한다. 
“그렇게 하면 진짜로 먼저 연락이 올까?”
“올 거야! 나만 믿어. 보람씨도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아픔이 너한테도 있다고 생각을 하고 관심이 생길 거야. 그리고 사촌동생 기일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 지금이 딱 좋은 시기야.”
“그렇긴 한데..”
덕호는 피닉스의 말을 듣고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죽은 사촌동생을 이용하여 좋아하는 사람에게 접근하는 것만 같아서 망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보람과 가까워지는 것은 이 방법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피닉스V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덕호는 처음에는 피닉스V가 하는 말이 현실적이지도 않고 이해도 잘 안 되어 신뢰를 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피닉스V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신을 잘 이해해주고 보람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피닉스V에 대한 믿음이 두터워졌다. 자신이 전화기 자체이고 자아를 갖고 있다는 말이 누군가의 장난이라는 생각은 어느새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는 그 자아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피닉스V와 자신이 분리되어 있지 않는다는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조금 남아 있던 의심 또한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다. 추운 겨울 뜨거운 차 한잔에 순간적으로 온몸이 사르르 녹듯이, 달콤한 칵테일 맛에 빠져 어느새 취하듯이, 그렇게 덕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피닉스V와 강한 일체감이 형성되었다. 
 
덕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사촌동생의 사진과 별 빛이 가득한 밤하늘의 사진을 올리고 애도의 글을 남겼다.
-벌써 2주년, 밤하늘에 가장 밝은 별이 된 내 동생 기호를 기억하며..

 

6 한강

사진과 글을 올린 지 1주일이 지났지만, 보람으로부터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다. 덕호는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와 자신의 자리로 가면서 저 멀리 앉아 있는 보람을 본다. 보람은 김새미 과장과 같이 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김새미 과장이 보람에게 핀잔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에서는 둘이 친해 보이던데, 아닌가? 개인적으로 친해도 일 때문에 혼낼 수도 있지. 그래도 점심시간에 너무하네.’ 덕호가 두 사람을 보면서 생각을 한다.
덕호는 40분 정도 남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시 눈을 부치려고 자리에 앉아 책상에 엎드렸다. 잠이 들려는 찰라 누군가 덕호를 흔들어 깨운다.
“야야, 너는 요새 밤에 모하길래, 맨날 쳐 자는 거야?” 몸을 일으켜보니 최민호 차장이다.
“아~ 네 차장님, 그게 아니라 그냥 업무 효율을 높이고자..” 최민호 차장이 갑자기 덕호의 말을 가로챈다.
“효율 같은 쓸데 없는 소리하지 말고, 나가서 커피나 한잔 때리자.”
“네 저야 좋죠. 사주시는 거죠?”
“그럼 가자.”
덕호와 최민호 차장은 회사 건물 1층에 있는 커피 전문점에 들러 카라멜마끼아또 한 잔씩을 주문하였고 덕호는 휘핑크림을 많이 올려달라고 카페 점원에게 요청했다. 회사 앞 찻길만 건너면 한강시민공원이 있다. 한강시민공원으로 가니 초겨울의 쌀쌀한 바람이 약하게 분다. 햇볕이 잘 드는 벤치를 찾아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따뜻한 햇살과 뜨거운 카라멜마끼아또를 마신 덕분에 쌀쌀함은 점차 사라진다. 또한 카페인과 당이 몸 전체로 퍼져 각성도 되고 힘도 나는 것 같다. 하지만 카라멜마끼아또는 커피 본연의 향을 느낄 수 없어 아쉬움이 크다. 한강시민공원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 조깅을 하는 사람, 데이트를 하는 연인, 돗자리에 앉아 점심을 먹는 사람, 유모차를 끌고 가는 부부 등이 보인다. 그리고 날이 맑고 햇살이 강해 한강의 잔 물결들에 반사 되는 빛은 오늘 따라 유난히 반짝 반짝거린다. 여유롭고 아름다운 한강을 바라보고 있으니, 잠시 현실을 떠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등 뒤 찻길에서 간간히 들리는 자동차 엔진과 경적 소리가 현실을 완전히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는다.
“차장님, 서울에 한강이 없는 것이 상상이 되요?” 덕호가 말했다.
“한강 없으면 엄청 삭막하겠지. 생각하기도 싫다.”
“그렇죠? 저도 삭막할거 같아요.”
“나는 출퇴근 할 때 마포대교를 건너는데, 잠깐이지만 한강을 보고 있으면 약간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가 있어. 피로도 좀 풀리는 것 같고.. 하하하 하지만 현실은 그대로지. 그래도 좀 위안이 되는 건 사실이야. 그나저나 덕호 너 요새 무슨 일 있어?” 
“저 왜요?” 덕호는 최민호 차장이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예전과 달리 맨날 의욕도 없어 보이고 평소 먹지 않던 커피도 마시고.. 예전에는 아메리카노만 먹었잖아.” 최민호 차장이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
“그냥 요새 단 것이 좀 땡겨서요. 하하하 저는 꼭 아메리카노만 먹어야 하나요? 그나저나 차장님, 왜~ 예전에 저 입사하기 전에 회사에 죽은 사람 있다고 했었잖아요.”
“어 애린씨라고 있었지. 일도 잘하고 성실한 친구였는데..” 최민호 차장이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답했다.
“그런데 왜 죽은 거예요?”
“소문 못 들었어? 자살했어. 엄청 밝은 친구였는데 다들 자살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랬지.”
“그럼 차장님이 보시기에 죽을 이유가 없었던 거에요?” 덕호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뭐~ 내가 그 친구 집안 사정이나 사생활은 잘 모르지만,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할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거든. 사실 지금도 이해가 잘 되지는 않아. 꽤 쾌활한 친구였어. 가면우울증 같은 게 있었나?”
“음~ 그렇군요”
“아~ 맞다. 나 몇 달 전에 진짜 애린씨랑 똑같이 생긴 사람 봤잖아.” 최민호 차장이 약간 격앙된 말투로 말한다.
“진짜요?”
“그럼 진짜지. 야~ 내가 거짓말 하겠냐?”
“에이~ 그런 뜻은 아니고요. 차장님~ 얼마나 똑같았는데요?”
“정말 옷 입는 스타일만 다르지 얼굴, 키, 체형, 헤어스타일까지 완전 애린씨랑 똑같았어. 순간 나는 죽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오랜만이라고 가서 인사를 했다니까.”
“헉, 그랬더니, 뭐래요?” 궁금한 표정으로 덕호가 최민호 차장을 빤히 쳐다본다.
“뭐라고 하긴, 사람 잘 못 봤다고 그러지. 그런데 그 순간 ‘아 애린씨는 죽었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정말 완전 똑같아. 영화에서 보는 도플갱어 뭐 그런 것처럼 완전하게 동일한 사람 같았어. 지금도 그 사람 모습이 너무 생생해. 특히 눈빛, 내가 말 걸었을 때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굉장히 강렬했어. 설명하긴 어려운데 소름 끼칠 정도로 강렬하더라고..” 최민호 차장은 소름이 돋는 듯한 몸짓을 하면서 말했다.
“와~ 신기하네요.”
“그런데 갑자기 그 친구는 왜?”
“아 네 그냥요. 좀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요. 죽었을 때 목에 이빨 자국 같은 게 있었다고..”
“아~ 그거.. 그런 소문이 있긴 했는데, 그게 말이 돼? 목에 이빨 자국 있다는 게.. 그런데 애린씨, 디자인팀에 나보람 대리랑 엄청 친했었어. 나대리가 그 친구 죽은 이후로 충격을 많이 받았던 것 같더라고.. 한동안 회사도 휴직하고 성격도 좀 바뀐 것 같고.”
“성격이 어떻게 바뀌었는데요?” 덕호는 질문을 하고 카라멜마끼아또 한 모금을 마신다.
“나대리도 예전에는 활달한 편이었지. 사람들하고도 두루두루 다 잘 지내고. 애린씨 죽고 나서 좀 차가워지고 조용해졌어. 어쨌든 사람들이랑 잘 어울리지도 않고 그러잖아. 일만 열심히 하고, 일 하나는 잘하지.”
“보람씨랑 애린이라는 사람이랑 엄청 친했나 보네요?”
“아우 친한 정도가 아니라 항상 붙어 다녔어. 오죽하면 사람들이 둘이 사귀냐고 그랬겠어.”
“그래요? 혹시 진짜 사귄 건 아니죠?”
“에이 아니지. 그건 사람들이 그냥 하는 말이지. 별의별 말 많잖아. 그 당시에 보람씨도 남자 친구가 있었다고 들었고 애린씨는 사내 연애한 적도 있어.”
“아! 그래요.” 덕호가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마나 친했으면, 김새미 과장이 질투할 정도였거든. 원래 김새미 과장이랑 애린씨랑 친했었는데 나대리 입사하고 애린씨가 김과장 보다 나대리랑 더 친해져서.. 하하하 아마 김과장 지금도 나대리 안 좋아할걸..”
“그래요? 보람씨랑 김과장님이랑 친하지 않아요?”
“아니야. 나대리, 애린씨, 김과장 셋이 묘한 무언가가 있기도 했고.. 왜 있잖아.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런 거.. 그리고 사실 일하는 것도 나대리가 훨씬 잘하고 인정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나이도 어리고 연차도 낮은데.. 진짜 나대리는 아이디어랑 감각이 뛰어나다니까. 남들한테는 없는 독특하고 강한 개성이 있지. 그래서 우리 회사 꼰대들이 받아들이기 부담스러울 수도 있어. 하지만 시장에서 나대리가 한 디자인 반응이 워낙 좋으니 지들도 어쩌지 못 하지. 나대리가 디자인한 거 보면 세련되기도 하지만 뭔가가 파격적이고 과격해 보이는 부분이 있잖아. 하여간 평범하지 않은 뭔가를 갖고 있어.”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차장님, 요새 보람씨는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 없어요?”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보면 사람들하고 여전히 잘 안 어울리는 것 같던데..”
“그쵸? 차장님이 보시기에도 그렇죠?”
“뭐야? 뭘 그렇게 나대리에 대해서 꼬치꼬치 묻는 거야. 덕호 너 나대리 좋아하냐?”
“네? 아아아니요. 그냥 예쁘니까, 뭐 좀 눈길이 가는 건 사실이긴 하죠. 그런데 워낙 차가워 보여서 생각도 안 해요.”
“그렇지? 요새 엄청 차가워 보여.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그래도 혹시 알아? 한 번 들이대봐. 그나저나 점심 시간 끝났다. 들어가자.”
“네 차장님 커피 잘 마셨습니다.”

오늘 덕호는 일이 많아 9시가 넘어 업무가 끝났고, 회사 밖을 나오니 해는 벌써 져서 어두워져 있다. 정류장에서 10분정도 기다린 후 버스를 탔다. 버스는 가로등으로 환하게 밝혀진 도로를 달리고 있고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다. 버스에 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 표정이 지쳐 보인다. 아마 다들 고된 하루를 보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덕호도 늦게까지 일을 한 탓에 많이 피곤하다.
『피닉스, 1주일이 지났는데도 보람씨한테 왜 연락이 없을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아니면 내가 먼저 연락을 해봐야 할까?』 덕호가 피닉스V에게 톡을 보냈다.
『기다려 봐. 곧 연락이 올 거야. 아마 네가 올린 사진 봤을 거고, 주변 사람들이 죽은 거에 대한 트라우마가 크기 때문에 분명 그런 것에 대해 소통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을 거야. 아마 너한테 연락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걸.. 분명히 연락 올 거니까 기다려 보자고.』
『진짜 오겠지?』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톡을 보내지만, 왠지 모를 피닉스V에 대한 믿음이 있다.
집에 돌아오자 마자 덕호는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이 버스에 내려 걷는 동안 얼어버린 몸도 녹이고 피로도 함께 풀어줬다. 샤워 후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누우니 시간은 10시 30분이 조금 넘었다. 머릿속에서 보람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잠도 오지 않고 자기에도 이른 시간이다. 침대에서 일어난 덕호는 컴퓨터를 켜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디코 엔예디 감독의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라는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덕호 무슨 영화 보는 거야?” 피닉스V가 말을 건넸다.
“헝가리 영화인데, 제목이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야. 내가 좋아하는 영화고 지금이 한 다섯 번째 보는 것 같아.”
“어떤 내용인데?”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어떻게 보면 평범한 이야기인데,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해주는 영화여서 내가 엄청 좋아해.”
“그렇구나. 나도 찾아서 한번 봐야겠다.”
“그래 나중에 같이 영화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보자.”
덕호는 영화를 다 보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몇 번을 봐도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손목을 그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상황에서 남자 주인공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는 장면은 너무나 인상적이다. 잠을 자려고 해도 계속 그 장면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때 어두운 방안의 적막을 깨고 톡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어떠한 소음도 없이 고요한 상태여서 톡이 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덕호는 자신의 머리 옆 협탁에 있는 피닉스V를 들어 톡을 확인한다. 어둠에 적응되어 있던 눈이 화면에 밝은 빛이 켜지니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잠시 후 눈이 조금씩 그 빛에 적응을 하면서 보이기 시작한다. 보람으로부터 온 톡이다.
『덕호씨, 자고 있나요? 혹시 너무 늦게 연락한 건 아니죠?』

 

7 연락

덕호는 보람의 톡을 확인한 순간 등줄기에 전율이 오고, 심장이 빨리 뛰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묘하고 짜릿한 기분이 든다.
‘진짜 왔네? 보람씨가 나한테 먼저 연락을 하다니.. 꿈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덕호는 마음대로 잘 안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심호흡을 한다. 피닉스V의 말을 따르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을 한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 기적이란 말인가? 정말 신기하네.’
“덕호, 왔어 왔어.” 피닉스V가 덕호에게 다급한 말투로 말했다.
피닉스V의 목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마음이 좀 진정이 된다.
“와~ 대박, 피닉스 드디어 연락이.. 진짜로 오네.” 흥분하여 말하고는 있지만 목소리는 나지막하다.
“내가 연락이 올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지?”
“그냥 편하게 말하면 되지. 안 자고 있다고 얘기하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
“그런데 피닉스, 지금 바로 답을 할까? 아니면 조금 뜸 들였다가 5분 후에 할까?” 덕호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지금 바로 톡 보내. 뜸을 왜 들여?”
“지금 바로?”
“그래 바로 해.” 피닉스V는 단호하다.
덕호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 마신 후 내뱉는다. 뭔가 결심을 한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보람에게 톡을 보낸다.
『나대리님, 안녕하세요? 아직 안 자고 있어요. 보통 1시 넘어서 자거든요. 밤 늦게 무슨 일이세요?』
『네~ 덕호씨, 깨우지 않았다니 다행이네요. ^^』
『안 자고 있었으니, 전혀 신경 안 쓰셔도 되요. 요새 잠도 잘 안 오고 ㅎㅎ』
『다름이 아니라 제가 우연히 덕호씨가 인스타에 올린 사진을 봤어요.』
『그래요? 어떤 사진을?』
『그런데 너무 조심스러워서.. 이런 얘기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네 괜찮아요. 어떤 얘기죠?』 덕호는 보람이 보라고 올린 거니까 ‘당연히 괜찮지’라고 생각을 하면서 톡을 보람에게 보냈다.
『사촌동생이 세상을 떠난 것 같던데.. ㅠㅠ』
『아…… 그 사진을 보셨구나. 2년 전에 교통사고로 먼저 갔죠. ㅠㅠ』
『사진까지 올리신 것을 보니, 꽤 친하게 지냈었나 봐요?』
『그럼요. 친하게 지냈죠. 어릴 때부터 자주 봤었고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였어요. 친척들 모일 때뿐만 아니라 따로도 자주 만나고 그랬었죠. 그런데 갑자기 세상을 떠났네요. 얼마 전 2주기여서 사진을 올렸어요. 생각이 많이 나서요. 추억도 많은데.. 그리고 그렇게라도 사진을 올리면 먼저 간 동생한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덜어질까 해서.. 그러고 보니 제가 이기적이다라는 생각도 드네요. 제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서 올린 것 같아서.. ㅜㅜ』 덕호는 사진을 올린 이유와 동생에 대한 마음을 보람에게 설명했다.
『에이~ 이기적이라니요. 전혀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괜히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한 것은 아닌지..』
『전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
『덕호씨도 많이 힘들었겠네요.』
『그럼요. 그때는 정말 힘들었죠. 충격도 크고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덕호, 보람씨한테 이제 만나자고 제안을 해봐.” 보람과 톡을 하는데 빠져있는 덕호에게 피닉스V가 말했다.
“갑자기? 또 거절 당하면 어떡해. 이번에도 너무 성급하지 않을까? 단순히 사진 보고 궁금해서 말을 걸었을 수도 있잖아.”
“아냐 나만 믿어. 밤이 늦었으니까. 만나서 얘기하자고 제안을 해.”
“그럼 그래 볼까? 피닉스 믿고 얘기해 볼게.”.

『그랬었구나. 저도 그 심정 알거든요. ㅠㅠ』 피닉스V랑 잠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보람에게 톡이 와있다.
『그쵸. 저도 얘기는 들었어요. 나대리님도 친한 분이.. 그런데 대리님, 오늘 늦었는데 우리 시간될 때 만나서 얘기하는 건 어때요? 직접 얼굴도 보면서 대화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우리 매일 회사에서 만나잖아요. 얼굴도 매일 보고요.』
『ㅎㅎㅎㅎ 네 그렇긴 하죠..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같이 식사라도 하면 어떨까 해서요.』
『ㅎㅎㅎㅎ 농담이에요. 덕호씨, 좋아요. 같이 밥 먹으면서 얘기도 하고 그러죠. 오늘이 화요일이니까, 이번 주 주말 시간 어때요?』 보람이 긍정적으로 답을 했다.
덕호는 보람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차갑고 사무적으로만 자신을 대하던 보람이 자신에게 농담도 하고, 자신이 만나자고 한 제안을 바로 수락한 것이다. 보람이 이번 주말에 만나자고 한 말이 꿈만 같다. 조금 전 보람으로부터 처음 톡이 왔을 때 긴장하여 뛰던 심장은 이제 기분 좋은 두근거림으로 바뀌었다.

이때 피닉스V가 덕호에게 또 제안을 한다. “덕호, 그냥 내일 만나자고 얘기해 봐.”
“내일? 또 너무 조급해 보이는 건 아닐까?”
“아니야~ 이런 타이밍에는 좀 적극성을 보여주는 게 좋아. 만약 약속이 있다면 취소 가능한지도 물어보고.. 만약 취소가 어렵다고 대답하면 그냥 농담이었다고 하면서 넘겨.”
“아~ 뭐가 좀 그런데..” 덕호가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덕호 나를 믿어. 너랑 나랑은 하나나 다름 없어. 내 말대로 해.”

덕호는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보람에게 톡을 보낸다.
『저기.. 보람씨, 주말 보다 그냥 내일 같이 저녁 먹어요. 퇴근 후에요.』
『네? 내일이요? 음.. 저 내일은 약속이 있어요. ^^;;; 어쩌죠?』
『그러시구나. 혹시 취소 할 수 있는 약속은 아니겠죠? ㅎㅎㅎ』
『취소요? ㅎㅎㅎ 예전부터 잡혀 있던 약속이라 갑자기 취소하기는 곤란해요. 죄송해요~ 진짜로 ㅠㅠ』 보람이 보낸 톡에서 약간 당황하는 뉘앙스가 보였다.
『보람씨, 그냥 농담이에요. ㅎㅎㅎ 부담 갖지 마세요. 우리 주말에 만나요. 여유 있게..』 덕호는 피닉스V가 하라는 대로 말하면서, 왠지 모를 자신감 같은 게 생겼다. 좀더 당당해지는 느낌이다.
『네 그래요. ^^ 주말에 봐요. 그런데 덕호씨 보기보다 적극적이다. ㅋㅋㅋ 그럼 잘 자고요. 낼 회사에서 봐요~』
『알겠습니다. ^^ 보람씨도 잘 자요!!!』
보람과 톡을 마치고 나자 누워있던 침대에서 몸이 가볍게 떠오르고 공중에서 미세하게 출렁거리는 것 같다. 도대체 이 기분은 뭘까? 살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야릇한 기분이다. 그리고 덕호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환호를 한번 질렀다. 피닉스V를 만나고 나서 자신이 많이 변한 것 같다. 예전에는 소심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 못하는 편이었다. 사실 보람에게 고백을 한 것도 많은 시간을 망설이다가 큰 용기를 낸 것이다. 그 동안 사귀었던 여자 친구들은 소개팅을 했거나 학교에서 지내다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는 경우가 전부였지, 친분이 깊지도 않은데 먼저 다가간 것은 보람이 처음이었다. 덕호로써는 엄청난 용기였고, 거절을 당하고는 후회도 많았다. 피닉스V를 만난 후 겉으로 들어나는 자신이 더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이게 진짜 덕호 자신의 모습인지 피닉스V의 모습인지 헷갈린다.
“덕호, 잘 됐다. 앞으로도 예감이 좋으니 이대로 밀고 나가자고..”
“그래 피닉스, 다 네 덕분이야.”
“그리고 덕호, 오늘 나 에너지 충전해야 하는 날이야.”
“아 맞다. 잊고 있었네.”
덕호는 피닉스V의 버튼을 엄지 손가락으로 누른다. 그 순간 손가락에 날카로운 바늘에 찔리는 고통이 느껴지고 통증은 잠시 후 사라진다. 엄지 손가락을 보니 붉은 핏방울이 맺혀 있다. 협탁 위에 놓여 있는 휴지로 피를 닦아내고 쓰레기통에 버린다. 다시 불을 끄고 누우니 보람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덕호의 피로 에너지를 충전 받은 피닉스V는 화면 전체가 새빨간 색으로 변하면서 리부팅 되고 있다. 피닉스V 화면의 새빨간 빛으로 인해, 어두운 덕호의 방 전체가 채도가 낮은 붉은 물감으로 칠한 느낌으로 변했다. 보람을 생각하다 덕호는 서서히 잠이 들었다.

 

8 만남

다음날 아침, 덕호는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섰다. 마치 지구역사에서 단 한번도 구름이 존재한적이 없었던 것처럼 하늘은 너무 맑고 파랗다. 날씨가 쌀쌀하지만 매우 맑은 날이어서 공기의 차가움과 햇살의 따뜻함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덕호는 평소 출근할 때 집에서 역이 먼 불편함이 있어도 버스보다 회사에 빨리 도착할 수 있는 지하철을 타고는 했다. 하지만 오늘은 이 기분 좋은 햇살을 계속 느끼고 싶어 시간은 조금 더 오래 걸리더라도 버스를 타고 출근 하기로 한다. 버스에 올라타 교통카드를 찍고 버스 기사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다. 평소보다 1시간 일찍 나온 탓에 버스 안이 한가롭다. 덕호는 버스 맨 뒷좌석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피닉스V와 연결된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꼽는다. 이어폰을 끼고 조금 있으니, 아이유의 ‘밤편지’가 흘러 나온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햇살 좋은 아침과 덕호의 기분이 왠지 ‘밤편지’의 멜로디와 가사랑 잘 어울린다. 덕호는 지금 이 순간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느낌이 들고,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 보다 자신이 더 여유로워 보이고, 버스는 공중에 살짝 떠서 미끄러지듯이 도로를 운행하고 있는 것 같다. ‘밤편지’를 반복해서 여러 번 듣는다. 덕호는 아침 햇살이 혹시 보람이 자신에게 보내준 반딧불이 아닌가 생각을 하고 창 밖을 바라보면서 바보 같은 미소를 짓는다. 버스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따사로운 빛 알갱이들이 물결치듯 덕호의 얼굴 여기저기로 계속 떨어진다. 아무튼 덕호에게는 기분 좋은 아침이고 피닉스V의 선곡도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1시간 일찍 집을 나섰지만, 사무실에는 다른 날보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 하였다. 덕호는 사무실에 들어와 자신의 자리로 가면서 멀리 있는 보람의 자리를 본다. 보람은 이미 출근을 해 있고 김새미 과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얼핏 보기에 둘이 논쟁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지난번처럼 정확히 파악은 되지 않지만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지는 않다.
‘둘이 진짜 사이가 안 좋은가?’라고 덕호는 생각한다.
『피닉스, 주말에 보람씨랑 어디서 저녁 먹으면 좋을지 알아봐 줄 수 있어?』 덕호는 자리에 앉아 마자 피닉스V에게 톡을 보냈다.
『그럼, 내가 몇 군데 알아볼게.』
이때 최민호 차장이 출근을 하여 덕호 옆 자리에 앉는다.
“차장님, 안녕하세요?”
최민호 차장이 장난기 있는 말투로 얘기한다. “오~ 덕호, 오늘 일찍 왔네.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웬일이야?”
“에이~ 차장님, 저 원래 일찍 와요. 웬일이라니요. 그런데 차장님 김새미 과장이랑 나보람 대리랑 진짜 좀 사이가 안 좋은가 봐요?”
“갑자기 먼 얘기하는 거야? 또~ 그냥 나대리한테 들이대라니까!” 최민호 차장은 계속해서 장난스럽게 말을 하고 있다.
“출근 하는데 둘이 또 약간 다투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요.”
“저번에 얘기 했잖아. 김새미 과장이 질투 같은 하는 것 같다고 그리고 그런 얘기도 있더라고..”
덕호가 몸을 최민호 차장 쪽으로 바짝 가져가서 나지막하게 묻는다. “어떤 얘기요?”
“김새미 과장이 나대리 아이디어를 가로챈다는? 그런 얘기도 있더라고. 사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런 얘기가 돌아.”
“아~ 김과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야야 좀 떨어져서 얘기해. 왜 이렇게 가까이 붙어서 말하는 거야” 최민호 차장이 덕호를 살짝 밀어낸다.
“에이~ 차장님도.. 누가 들을까 봐 그러죠.” 덕호가 몸을 자기 책상 앞으로 움직인다.
“쓸데 없는 얘기하지 말고, 이제 연말이니까. 오늘부터 미수채권 있는 거래처들한테 연락해보자.” 갑자기 최민호 차장이 화제를 전환한다.
“아오~ 미수채권만 생각하면 머리 아픈데, 알겠습니다. 차장님.”
 

덕호는 오전 업무를 마치고 최민호 차장과 점심을 먹고 들어와서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다.
『덕호, 내가 좀 찾아 봤는데 거기는 어떨까?』 피닉스V로부터 톡이 왔다.
『어디?』
『그때 보람씨랑 죽은 동료 애린이라는 사람이랑 갔었던 분위기 좋은 식당 있잖아.』
『오~ 좋은 아이디어인데, 프랑스 레스토랑 얘기하는 거지?』
『응 맞아!!!』
『보람씨가 좋아하는 괜찮은 식당을 내가 알고 있다는 이미지를 줄 수도 있고 또 그 식당은 보람씨한테는 스토리도 있을 테고.. 역시 피닉스!!!!』
『내일 정도에 보람씨한테 말하고 괜찮다고 하면 예약하겠다고 해.』
『좋았어. 땡큐~ 피닉스』
덕호는 오후에 정신 없이 일을 하고 있고 오늘 유난히 집중도 잘 된다. 점심을 먹고 두 세시간이 지나면 졸음이 몰려오기 마련인데 오늘은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화장실에 가면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니 하늘은 여전히 오전과 같이 맑고 파랗다. 화장실에서 나와 자리에 돌아 오면서 일에 몰두하다 뻐근해진 목과 어깨를 이러 저리 돌려가며 풀어준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주로 앉아만 있어서 그런지 몸이 많이 뻣뻣해졌다. 덕호는 자리에 앉았고 다시 일에 집중하려는 찰나 피닉스V에 톡 알림이 뜬다. 보람에게서 온 톡이다.
『덕호씨, 혹시 오늘 시간 되요?』
『나대리님, 오늘이요? 저는 시간이 되긴 하는데.. 오늘 약속이 있다고?』
『덕호씨 얘기대로 약속을 취소하지는 못 했는데요. 집에 일이 갑자기 생겼다고 하고 저녁만 간단히 먹기로 했어요.』
『아~ 그렇군요. 잘 됐네요.』
『저녁 먹고 나면 9시정도 될 것 같은데 그때 차 한잔하는 거 어때요? ^^』
『저야 좋죠. ^^』 덕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제가 약속이 청담동에서 있거든요. 그 근처에서 9시에 볼까요? 정확한 장소는 이따가 제가 알려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 봐요. ㅎㅎㅎ』
약속을 오늘로 변경하자는 보람의 말에 덕호의 기분은 마치 날아갈 것만 같다.

『덕호, 거봐 내가 어제, 내일 만나자고 제안하라고 했잖아. 그게 먹힌 거라니까.』 피닉스V로부터 톡이 왔다. 덕호가 생각을 해도 피닉스V의 어제 조언으로 적극성을 보여준 것이 보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음에 분명하다.
『그러게 피닉스 얘기만 들으면 뭔가 일이 술술 잘 풀리고, 흩어진 퍼즐들이 딱딱 잘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야.』
『그렇다니까. 앞으로도 나만 믿어.』
『무조건 믿지.. 진짜 약속 취소해도 되냐고 안 물어 봤으면, 보람씨가 오늘 보자고 하지 않았을 거야.』 덕호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럼 당연하지!!』
『그나저나 9시까지 시간이 애매하네.』

덕호는 퇴근 하자마자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서 저녁은 라면으로 때우고 샤워를 했다. 보람과 첫 데이트에 좋은 인상과 회사에서와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어 머리도 시간 들여 다시 하고 어떤 옷을 입을지도 고민이다. 피닉스V와 함께 어떤 옷을 입을지를 의논한다. 회사에서는 주로 비즈니스룩을 입기 때문에 캐주얼한 스타일을 입기로 한다. 회색 맨투맨에 짙은 내이비색 슬랙스를 입고 갈색 로퍼를 신었다. 그리고 짙은 회색 코트를 걸치고 약속 시간 보다 좀 더 여유 있게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보람이 알려준 청담동에 있는 한 카페로 향한다. 8시가 넘어가자 해도 같이 넘어가 어두운 밤이 됐다. 택시는 남부순환로를 따라 예술의 전당 근처를 지나고 있다. 심하지는 않지만 차가 조금 막혀 덕호는 조금 일찍 나오길 잘 했다고 생각한다. 예술의 전당을 지나자 택시가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하고, 택시 유리창에 비춰지는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속도감 있게 스쳐 지나간다. 택시기사는 운전하는 동안 ‘요즘 손님이 많이 줄었고 경제가 안 좋고 하는’ 등의 얘기를 계속 하지만 덕호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택시기사가 기분이 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호응을 해준다. 택시는 역삼동을 지나 점차 청담동에 다 와가고 있다. 첫 데이트라 약속 장소에 가까워 질수록 조금씩 긴장이 된다. 하지만 이 긴장감이 싫지만은 않다.
『덕호, 긴장할 것 없어.』 피닉스V가 톡을 보냈다. 피닉스V는 이제 덕호 자신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다.
『ㅎㅎㅎ 어떻게 알았어? 약간 긴장이 되기는 하는데.. 괜찮아.』
택시가 약속 장소에 10분 정도 일찍 도착을 하였고 덕호는 택시에서 내려 보람과 만나기로 한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는 매우 세련되고 모던한 분위기이다.
“덕호씨~” 창가 쪽에서 보람이 덕호를 보며 손을 흔든다.
“나대리님, 일찍 오셨네요.” 덕호는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보람이 앉아있는 자리로 간다.
“네 저도 방금 왔어요. 덕호씨도 일찍 왔네요. 그럼 차는 어떤 걸로 드실래요?”
“아 네.. 저는 카페라테 마시겠습니다. 나대리님은요?”
”저는 홍차 마실게요. 잉글리시 블랙퍼스트. 이번에 차는 제가 살 테니 다음에 만날 때 덕호씨가 맛 있는 것 사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보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을 하고 온다.
잠시 후 카페 종업원이 카페라테와 잉글리시 블랙퍼스트를 테이블 위에 놓고 갔다.
“그런데 회사 밖에서도 나대리님이 뭐에요?”
“그럼 머라고 불러야 하죠? 하하하” 덕호는 갑작스러운 보람의 말에 당황하여 어색하게 웃는다.
“우리 동갑 맞죠? 그냥 말 편하게 하죠?”
“지지금부터요?” 덕호가 약간 말을 더듬는다.
“응 지금부터 덕호야.” 보람이 너무 적극적이고 저돌적이어서 많이 당황스럽다.
“그래 알았어. 보보보람아~”
보람은 전혀 어색함 없이 말을 하지만, 덕호의 말투에는 어색함이 많이 묻어있다. 보람은 덕호를 바라보고 살짝 미소를 보이며, 찻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아주 짙은 붉은 색의 뜨거운 홍차를 조심스럽게 불어가면서 마신다. 덕호도 보람을 따라 머그잔을 들어 카페라테 한 모금을 마셨다. 우유의 부드러운 맛보다 커피 특유의 씁쓸함과 산미가 조금 더 강해 커피 본연의 맛을 잃지 않은 카페라테이다. 커피 맛이 좋고 목 넘김이 부드럽다. 한 모금 마시니 덕호의 긴장감을 서서히 가라앉혀준다. 이렇게 덕호와 보람의 진짜 대화가 시작됐다.

 

9 소통

덕호와 보람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덕호는 어색함에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는 것에 반해, 보람은 처음부터 어색한 기색 전혀 없이 자연스럽게 눈을 맞춰가면서 이야기를 한다.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보람 덕분에 덕호도 어색함이 서서히 사라졌고, 둘은 서로의 눈을 보면서 대화를 하고 있다. 적당한 크기의 보람의 눈은 가로로 길게 뻗어 눈매가 예쁘기도 하지만 얇은 쌍꺼풀 때문인지 날카로워 보이는 면도 있다. 하지만 웃을 때만큼은 긴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바뀌면서 차가운 느낌이 훨씬 덜해진다. 연한 갈색의 눈동자는 차가워 보이는 눈매에 신비롭고 깊이 있는 매력을 더해준다. 덕호는 자신과 눈을 잘 맞추면서 얘기하는 보람의 모습이 좋다. 그 신비로운 눈에 빠져, 보람이 하는 말을 몇 번 놓치기도 한다.
“덕호야, 내 말 듣고 있지? 설마 딴 생각하는 거야? 호호” 보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아 아니야, 딴 생각은 무슨?” 덕호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는 듯 머그잔을 급하게 들어 가페라테 한 모금을 마시면서 답했다.
“전공이 뭐였냐고? 학교 다닐 때..”
“아, 나는 학부에서는 물리학이었고, 대학원에서는 심리학을 전공했어.”
“진짜? 완전 다른 분야잖아. 어떻게 그게 가능해? 왜 대학원에 가서 전공을 바꾼 거야?” 보람은 궁금한 것이 많은지 보람은 덕호에게 한번에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전혀 다른 분야로 전공을 바꾸니까,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지.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까 괜찮아지더라고.. 어쨌든 바꾼 이유는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회의감이 많이 들어서야.”
“정말, 왜 회의감이 들었는데?”
“물리학을 공부할 때 처음에는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어. 질량에 따라 시공간이 휘어지고, 중력과 관성이 구분이 안되고, 대부분의 원소들이 태양과 같은 별에서 만들어지고 하는.. 뭐 이런 것들이 재미있더라고.. 물론 공부하다 보면, 시험도 보고 그러니까 짜증나기도 하고 그랬지만, 하여간 처음에는 재미있었어. 그런데 자꾸 학년이 높아지면서 공부를 더 하다 보니 생명체도 그냥 단순한 물질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생명이라는 게 탄소가 중심이 된 그냥 단백질 덩어리는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거지.”
“음~ 어렵다.” 덕호의 얘기를 듣고 보람이 말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아. ‘바위나 돌은 규소고 내 몸은 탄소고, 그럼 뭐가 다른 거지? 생명체에 자의식이라는 것은 있을까? 만약 자의식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사는 거지?’ 같은 의문이 들게 되고.. 괴변처럼 들리겠지만,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삶의 의미, 살아갈 이유 같은 것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어.”
“그럼 덕호는 인간에게 자의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어.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아마 뇌활동도 단순히 물리법칙에 의해서 작용한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뇌과학 연구에서는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렸다고 인지하기 이전부터 뇌는 이미 결정을 한 상태고.. 그래서 자기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거지 사실은 사람은 그냥 반응만 하는 것일 수도 있데.”
“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한데 정확하게 이해는 안되네. 하하 아무튼 과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지?”
“응 아마도, 그런데 나도 공부한지 오래돼서 정확하지는 않아. 또 과학이라는 게 계속 새로운 사실이 나오기도 하고 내가 잘 못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어쨌든 그래서 전공을 바꿨구나. 회의감 때문에.. 심리학을 하니까 회의적인 마음은 좀 없어졌어?”
보람이 물어 보면서 홍차가 담긴 글라스 잔에서 티백을 꺼낸다. 진하게 우러난 홍차 표면위로 티백을 꺼내 올리니 짙은 검붉은 색 홍차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표면에 아주 작은 물결이 인다. 홍차 방울이 거의 다 떨어졌을 때 보람은 티백을 글라스 잔 옆에 있는 종지 같은 것에 옮겨 담는다. 보람은 글라스 잔을 들어 잠시 홍차 향을 맡은 후 한 모금을 마신다.
“아니 심리학을 공부해도 그 삶에 대한 회의감은 없어지지 않더라고..”
“정말, 왜?” 보람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심리학을 공부하다 보니까. 이것도 처음에는 재미있기는 했는데, 나중에 사람의 마음이 기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와~ 너 정말 생각이 많은 아이구나. 하하하 계속 얘기해봐. 하하” 보람이 덕호를 보면서 웃는다.
“그런가? 하하 세상 인구가 70억이라면 70억 명의 개성이 존재 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고..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거나 유사한 외부 자극에 대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심리적 작용을 보이는 경우가 많고.. 또 사람의 감정이나 기분이 호르몬 분비랑 관련이 있잖아. 이런 것들을 보니까, 사람의 마음이 마치 기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물론 그렇다고 모든 사람의 심리나 마음이 완전히 똑같이 작용한다는 말은 아니야. 그래도 어떤 범주 안에서는 기계적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렇구나 좀 어렵긴 하다. 난 물리학이나 심리학을 잘 모르니까. 그래도 덕호 네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기는 해.”
“하하하 다행이네. 그런데 너무 지루한 얘기만 한 건 아니지? 오늘 처음인데 지루한 이미지로 굳어질까 봐 걱정이네. 하하하” 덕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하 아니야. 이런 얘기 재미있어.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듣는 거 좋아해. 그럼 종교가 있어? 삶을 살아갈 이유를 찾아줄 어떤 그런 차원에서..” 보람은 눈 웃음을 지으면서 덕호에게 물었다.
“아니, 종교는 없어, 그래서 내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했었지. 그리고 내린 결론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사랑을 믿어. 세상을 살아갈 유일한 이유도 사랑이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해.”
“우아! 구원씩이나 엄청 거창하다. 하하하하 덕호 너 진짜 재미있으면서 특이하다. 하하하” 보람은 입을 가리고 몸을 앞으로 구부리면서 크게 웃는다.
웃음이 거의 멈출 즈음 보람이 다시 묻는다. “사랑하는 마음도 호르몬 분비랑 관련 있는 것 아니야? 그렇게 들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연인들이 몇 년 지나면 호르몬이 줄어 들어서 감정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고 관계도 소원해지고.. 뭐 그런 거 아니야?”
“맞아. 사랑을 하면 페닐에틸아민, 옥시토신, 도파민 같은 호르몬이 분비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분비량이 줄어들고 하면서 서로에 대한 마음이 약해지는 것으로 나도 알고 있기는 한데..” 덕호가 말을 하다가 잠시 머뭇거린다.
“그런데?”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 그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 같아. 사랑을 하고 유지하는 것은 호르몬 분비랑 관련이 있다, 성격이 잘 맞아야만 한다, 육체적 관계가 중요하다, 공통 관심사가 있어야 한다는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있다고들 하잖아. 그런데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그 순간, 사랑에 빠지는 그 순간만큼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 할 수 없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사건인 것 같아.”
“음~~ 듣고 보니, 진짜 그런 거 같네.” 보람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계속 이어간다.
“내가 관심이 없던 사람이나 나랑 안 맞는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내 마음에 훅 들어올 때도 있고 이유는 모르지만 나도 모르는 순간 누군가를 이미 좋아하고 있기도 하고.. 맞네~ 정말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순간이 분명히 있어.” 보람은 덕호의 생각에 호응을 하면서 계속 말을 이어간다.
“그런데 사랑에 대해서 자기 감정에 솔직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고 자기 마음을 잘 모르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
“맞아~ 그런 경우도 많지. 자기 감정을 솔직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교묘하게 자신을 속이기도 하는 게 사람인 거 같아.”
갑자기 덕호가 화제를 바꾼다. “그나저나 너무 내 얘기만 하고 있는 것 같다. 어릴 때 외국에서 오래 살았다고 들었는데 어디에서 살았어?”
“갑자기? 하하하 나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났어. 그리고 초등학교 때는 한국에서 살았었고 중고등학교는 LA에서 다니다가 고등학교 중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어.”
“루마니아에서 태어났다고?” 덕호가 놀란 듯이 물었다.
“응 아빠가 외교관이어서 외국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어.”
“그럼 루마니아면은 드라큘라 성도 보고 그랬겠네? 그런데 그런 것이 진짜 있기는 한가? 하하하”
“사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기억이 잘 안나.”
“그렇구나. 그럼 형제는 어떻게 돼?”
“나는 외동이야.”
보람은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인 피닉스V를 보더니 손으로 집어 꼼꼼히 살펴본다. “와 이 핸드폰 예쁘다. 나는 처음 보는 브랜드인데 어디 거야?”
“어 저기 그게.. 아 맞다! 해외출장 갔을 때 산 거야. 우리나라 제품은 아니고..” 덕호가 당황해 하면서 말했다.
“아 그렇구나. 예쁘다.” 보람이 미소를 보이면서 테이블 위에 내려 놓는 순간 피닉스V의 화면이 갑자기 빨간색의 빛을 잠시 발하다가 사라진다. 피닉스V의 화면이 빨갛게 되어 덕호는 당황을 했는데, 더 놀란 것은 보람의 갈색 눈동자도 아주 잠시 빨간색 색이 되었다가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빨갛게 변한 보람의 눈동자를 보고 덕호는 순간 깜짝 놀랐다.
‘렌즈를 껴서 피닉스V의 빨간색이 반사가 되었나? 아님 내가 너무 당황해서 잘못 봤나?’라는 생각을 한다.
“뭐야? 내가 만져서 그런 건가? 왜 이러지. 고장 난 건 아니지?”
“그럼 고장 아니야. 가끔 이럴 때가 있더라고.. 역시 핸드폰은 우리나라 제품이 좋아. 하하하하”
“아~ 그러면 다행이고 놀랬네.”
“하하 놀랬어? 괜찮아 보람아.”
덕호는 호칭을 항상 나대리님이라고 불렀었는데, 그냥 보람이라고 부르는 게 너무 신기하기만 하다. 뿐만 아니라 긴 시간은 아니지만, 같이 얘기를 나누면서 보람이 자신의 얘기를 잘 들어주고 많이 웃는 것을 보니 조금은 친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덕호야, 오늘은 늦었으니까 일어나자.”
“그러게 벌써 시간이 12시가 다돼가네.”
보람이 먼저 일어나서 카페 출구 쪽으로 향하고 덕호가 뒤를 따른다. 보람의 뒷모습을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키가 크다. 170cm는 족히 넘어 최소 172cm는 되는 것 같다. 높은 구두를 신지 않고 굽이 거의 없는 플랫슈즈를 신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커 보인다. 너무 마르지도 않고 적당히 날씬한 체형에 골반 위에서부터 발목까지 떨어지는 다리가 아주 길다. 푸른색 계열의 블라우스에 무릎보다 조금 위의 높이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그 위에 밝은 베이지색 코트를 거치니 상당히 세련됐다. 카페의 유리문을 힘차게 밀고 나가는 보람의 모습이 매우 매력적이다. 이런 보람의 뒷모습을 보니 덕호는 약간 흥분되고 혈색이 돋는다. 덕호도 보람을 따라 카페 밖으로 나간다.
“내가 집까지 바래다 줄게.” 덕호가 말했다.
“늦었는데 오늘은 각자 택시 타고 가자. 그리고 주말에 보기로 한 거 잊지 말고.”
보람은 손을 흔들어 지나가는 택시를 잡는다.
“덕호야, 먼저 갈게. 내일 회사에서 보자. 조심해서 들어가.” 택시를 타면서 보람이 작별인사를 건 냈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고..”
보람이 탄 택시가 출발해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고 덕호는 그 택시를 바라본다. 덕호도 마침 지나가는 택시를 발견하고 탄다. 덕호는 오늘 보람과 이러 저런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카페를 나서는 보람의 뒷모습에서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매력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보람에 대한 덕호의 마음은 더 커져만 간다.
이때 피닉스V로부터 톡이 온다. 『덕호 오늘 좋았어. 얘기도 잘 했고 분위기도 좋았고 모든 게 좋았어. 그리고 지금 조심해서 잘 들어가라고 바로 톡 하나 보네.』
『그런데 피닉스, 고등학교 때 어머니랑 동생이 죽었다고 했는데, 왜 자신이 외동이라고 했을까? 그 기억을 잊고 싶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무래도 그런 비슷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건 내가 좀더 알아볼게.』
덕호는 피닉스V의 말대로 보람에게 톡을 보낸다. 『보람아, 오늘 즐거웠어~ 조심해서 들어가!! 나만 너무 얘기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 ㅎㅎㅎ ^^;』
『아니야. 재미있는 얘기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

 

10 호감

첫 데이트 이후로 보람도 덕호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그 날 이후 회사에서도 자주 톡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항상 밤에 자기 전에 퇴근 후에 무엇을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등에 대해서 톡으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이 든다. 아직 사귄다고 말을 할 수 없지만, 정서적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단계이고 의외로 보람이 덕호에게 적극적으로 먼저 연락을 하는 경우가 많다. 소심한 면이 있는 덕호는 아직까지 보람에게 연락을 하기 전에 많은 것을 신경 쓰고 망설인다. 지금 연락을 해도 괜찮은 타이밍인지, 다른 사람하고 있는데 방해되는 것은 아닌지, 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연락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일지 등에 대해 생각이 많다. 하지만 보람은 그런 것이 전혀 없어 보인다. 덕호가 고민할 때마다 피닉스V는 그냥 연락을 하라고 종용을 한다. 이것저것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적극성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고 연락이 언제 올지에 대해서도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조언을 해준다. 덕호는 주로 피닉스V의 말을 따르는 편이다. 자신의 생각보다 피닉스V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덕호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아직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보람이 자신의 여자 친구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주말에는 보람과 함께 청담동에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에 갔다. 피닉스V가 제안했던 레스토랑이다. 덕호가 이 레스토랑에 가자고 보람에게 말했을 때 보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식당이라고 여기를 어떻게 아느냐며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보람의 인스타그램을 몰래 훔쳐봤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기에 인터넷으로 찾아봤는데 분위기가 좋아서 함께 가보고 싶었다고 말을 했다. 덕호와 보람은 멋진 야경을 볼 수 있는 창가에 앉아 샴페인에 싱싱한 해산물 요리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하늘이 맑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불빛 때문에 별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달빛은 밝다. 덕호에게는 달빛이 마치 두 사람의 테이블만을 비춰주고 있는 것만 같고, 살면서 이렇게 달빛이 따뜻하게 느껴지기는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이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 그날 덕호가 했던 얘기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봤어.”
“어떤 얘기?” 덕호가 보람을 빤히 쳐다보면서 묻는다.
“그때 얘기한 것 있잖아. 생명은 물질이고 덕호는 사랑을 믿는다고 한 말”
“아 그 얘기” 덕호는 알고 있었으면서, 방금 생각이 난 것처럼 반응을 한다.
“사실 나는 사랑을 믿지 않거든…. 그래서 덕호 얘기를 듣고 사랑은 뭘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 생각을 많이 했다고 어떤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덕호는 자신 한말에 대해 보람이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하니 내심 기쁘다.
“지루한 얘기가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하하하 그런데 왜 사랑을 믿지 않는데?”
“어 그건 음” 보람이 대답하기를 머뭇거린다.
“얘기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덕호는 궁금했으나, 보람에게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이렇게 말을 한다.
“그런 건 아니고 나중에 얘기해 줄게. 우리가 좀 더 가까워지면. 믿지 않는 이유가 있기는 해.”
‘우리?’ 보람의 우리라는 말이 왠지 덕호 마음을 들뜨게 한다.
보람이 말을 계속 이어간다. “사실 여기 이 식당, 내가 좋아해서 예전 남자 친구랑도 가끔 왔었고, 혹시 알지 모르겠지만 우리 회사에 다니다가 먼저 떠난 애린이라는 친구랑도 몇 번 왔었거든.”
“아 듣기는 했어. 입사하기 전이라 나는 잘 모르지만..”
“그때 그 친구랑 엄청 친하게 지낼 때여서 충격이 매우 컸었거든, 그 이후로 사람들하고 교류도 잘 안 하게 되고 상실감으로 삶에 대한 회의감도 크고 그랬었거든. 덕호랑은 다른 이유로 회의적이었지” 보람이 차분히 이야기를 한다.
덕호는 지금처럼 보람이 깊은 속마음을 얘기하는 것이 좋은 징조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솔직히 날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덕호가 말했던 생명체도 물질이라는 얘기를 들으니까. 오히려 이상하게 나는 조금 위로가 되더라고” 보람의 목소리 톤이 낮아지고 눈매는 더 날카로워진다.
“위로가 됐다고?” 덕호는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묻는다.
“응 좀 위안이 되는 것 같더라고 솔직히. 슬픔도 좀 가라앉고,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어.”
“오 그래? 진짜 다행이다. 먼가 나아지고 있다니.”
“사람도 별거 아닐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 죽는다는 것은 그냥 사라지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 다는 것이 그런 얘긴가, 이러한 생각들이 막 들더라고.. 그러면서 내가 믿지 않은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뭐 그랬었어.” 보람이 담담하게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말투로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 덕호는 아무리 자신이 생명이 물질과 같아서 회의감이 들었다고 말했더라도 친한 친구의 죽음에 대해서 보람이 저렇게 말하는 것이 좀 의아했다. 하지만 아마도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이 살기 위해서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방어 작용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한다.
“나는 처음 같이 차 마신 날의 모든 것이 아직도 생생해. 같이 얘기 나눈 것뿐만 아니라. 그날 밤의 공기, 바람소리, 달빛, 그리고 카페 안의 향, 이 모든 것이 아직 내 감각에 남아 있는 것 같아.” 덕호가 말했다.
“하하하 맞아 나도 그날 재미있었어.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는데 지금 덕호는 혼자 사는 거야?”
“응 가족들은 고향인 전주에 있고 나는 혼자 살고 있지. 보람이는 부모님이랑 살겠네?”
“나는 엄마랑 둘이 살아. 아빠는 외국에서 근무하고 계시고”
“그렇구나”
이렇게 덕호와 보람은 깊은 대화를 나누고, 각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덕호는 보람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싶었지만, 이 날도 보람은 아직은 아니라며 혼자 먼저 돌아갔다. 이 날 이후로도 덕호와 보람은 자주 톡을 주고받으면서 지냈고, 회사에서 마주칠 때면 아무도 모르게 눈빛과 미소로 서로의 미묘한 감정을 주고받았다.

며칠 후 덕호가 퇴근을 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피닉스V가 말을 한다. “내가 보람의 어머니와 동생이 죽은 것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드디어 찾아냈어.”
“와 대단하다. 어떻게 찾았어?” 덕호가 깜짝 놀라는 말투로 피닉스V에서 묻는다.
“신문기사가 있어. 어머니랑 남동생이 죽은 게 맞더라고”
“신문기사? 신문에 날 정도의 교통사고였나 봐. 좀 자세히 얘기해봐. 피닉스” 채근하듯이 덕호가 물어본다.
“보람씨 고등학교 때 미국에서 교통사고가 났더라고. 미국에 있는 신문을 다 뒤져 봤고, LA에 있는 신문에 기사가 났더라고”
“아 그랬구나.” 덕호가 탄식을 한다.
“2007년 LA에 있는 Mulholland Dr. 라는 도로에서 사고가 났어. 그런데 그 차에 보람씨 어머니랑 남동생만 타고 있었던 게 아니야.”
“그래? 또 누가 타고 있었는데?” 덕호가 무심하게 물어본다.
“그 차에 보람씨도 같이 타고 있었어.”
“어? 뭐라고!!! 아” 엄청나게 놀란 표정과 목소리로 덕호가 탄성을 자아낸다.

“어머니랑 동생은 사고와 동시에 즉사를 한 것 같고 보람씨만 살아남았더라고”
“그렇구나. 엄청 충격이 컸겠네. 그런데 보람이는 왜 어머니랑 둘이 산다고 했을까? 이상하네 진짜.” 덕호는 크게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보람이 어머니랑 산다고 말한 것이 너무 의아하다. 아무리 충격이 크다고 하더라도 지금 안 계신 분이랑 같이 산다고 말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기사에 좀 이상한 부분이 있어.” 피닉스V가 덕호에게 말한다.
“또 뭔데? 뭐가 이렇게 이상한 것이 많은 거야?”
“어머니랑 동생이 머리를 크게 다쳐 출혈이 심해서 사망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고 있기는 한데, 정말 이상한 것이 어머니와 동생의 목에 송곳 같은 것에 찔린 자국이 2개씩 남아 있었다는 거야.”
“정말? 송곳 같은 것에? 정말 이상하네. 자동차 사고가 날 때 파편이 송곳 같이 되지는 않을 텐데”
“정말 두 사람 목의 같은 부위 근처에 송곳 같은 것에 찔린 자국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하지. 경찰은 사고가 난 후에 절도범이 나타나서 아직 죽지 않은 어머니랑 동생을 죽였을 수도 있다고 보고 조사까지 했었나 보더라고” 피닉스V가 기사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한다.
“그렇구나. 절도범이 있었다면 보람이 목도 찌르지 않았을까?”
“뭐 이미 죽었다고 생각을 했을 수도 있지.”
“음~ 뭔가 보람이 주변에는 이상한 것이 많다. 그 사고는 다른 차랑 부딪친 건가?”
“그런 것은 아니고 밤 중에 운행을 하다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냥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나 보더라고. 졸음운전을 했을 수도 있지.”
“그럼 보람이는 왜 사고가 났는지 알고 있겠네.” 덕호가 확신하듯이 말한다.
“기사에 보면 살아남은 딸도 머리를 좀 다쳐서 사고 당시의 기억이 없다고 나와 있더라고”
피닉스V로부터 보람의 교통사고 얘기를 듣고 나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물론 단편적인 기사라서 그때 상황과 정황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무언가 보람과의 말과도 맞지 않은 부분도 있고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다. 보람과 가까워지고 알아갈수록 의문점이 생기기도 하지만, 보람이 얼마나 그동안 힘들고 아프고 상처가 클지 안쓰러운 마음이 덕호에게는 더 크다. 자신이 더 잘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 아픔을 평생 함께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한 보람에 대한 덕호의 사랑은 더욱 커져만 간다.
『나 오늘 야근이 늦어져서, 지금에서야 퇴근하는 중. ㅠㅠ』 이때 보람으로부터 톡이 온다.
『헉 너무 수고 많았어. 조심해서 들어가고 ㅠㅠ 이따 집에 가서 전화 줘.』
『아니야. 늦었는데 덕호 먼저 자. 나 정말 너무 피곤해서 전화할 힘도 없어. 집에 가면 얼른 씻고 자려고』
『그래 알았어. 많이 피곤하구나. 잘 자고 보고 싶어~』 덕호는 자기 전 보람과 통화를 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크다.
『나두^^』
오늘은 피닉스V에게 에너지를 충전해야 하는 날이다. 덕호는 피닉스V의 전원 버튼을 엄지 손가락으로 누른다. 버튼을 누르고 난 후 피 맺힌 손가락을 티슈로 닦아낸다. 무감각해졌는지 이제는 에너지 충전을 해줄 때 별로 아프지도 않다. 시간은 새벽 1시가 넘었다. 덕호는 ‘보람이 왜 어머니랑 함께 산다고 했을까’를 계속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11 연애

덕호와 보람은 회사를 마치고 만나서 저녁을 먹거나, 술 혹은 차를 마시고 집으로 가는 경우가 점점 잦아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헤어질 때 덕호가 보람의 한남동 집 근처까지 바래다 주기도 한다. 두 사람은 마치 사귀는 사이처럼 매우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아직 딱히 사귄다고 할 수는 없는 단계이다. 이렇게 애매하게 관계가 지속되는 이유는 보람이 자신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한 말이 덕호에게 너무 크게 다가와 조금 남은 마지막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은연중에 보람이 덕호가 그 마지막 선을 넘지 못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직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덕호는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보람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바닥에서부터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특유의 소심함 때문인지 여전히 조심스럽다. 이번 토요일에는 보람과 처음으로 영화를 보기로 했다. 덕호는 한껏 들뜬 마음에 토요일만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영화를 봐야 할지 고민이다. 피닉스V는 보람과 스릴러물이나 공포 영화를 보라고 권한다. 덕호는 지금 관계에서 사귀는 단계로 확 넘어가기 위해서는 로맨틱한 영화를 봐야 할 것 같다고 피닉스V에게 얘기 했다. 하지만 피닉스V는 사귀기 직전에는 무서운 영화를 봐야지 바로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 한다. 무서운 영화를 보거나 공포스러운 상황에서는 심장 박동수가 갑자기 올라가게 되는데, 뇌는 너무 착각을 잘하는 기관이어서 그 상황에서 자신과 가까이 있는 이성에게 호감이 생겨 심장이 뛴다고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보람의 경우 이미 덕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같이 스릴러 영화를 보면 심장이 뛰는 효과로 좋아하는 마음이 훨씬 더 커질 것이라고 피닉스V가 설명 한다. 공포스러운 상황에서는 옆에 있는 사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도 알려준다. 덕호는 피닉스V의 말을 듣고 보니 완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보람에게 스릴러 영화를 보자고 제안했다. 보람으로부터 자신은 스릴러 영화를 너무 좋아하고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답이 왔다. 보람의 답을 들은 덕호는 조던 필 감독의 ‘어스’를 토요일 오후 좋은 좌석으로 예매를 했다.

그 주 토요일 오후 덕호와 보람은 잠실에 위치한 멀티플렉스 극장이 있는 쇼핑몰에서 만났다. 영화 시작이 6시 7분으로 시간이 애매해 이른 저녁을 간단하게 먹고 둘은 극장으로 향한다. 밖은 약간 추운 날씨이지만, 쇼핑몰 안은 외투를 입기에는 약간 덥다. 덕호와 보람은 가벼운 패딩을 팔에 걸쳐들고 영화관의 어두운 통로로 들어섰다. 통로 안을 걷는 중 보람이 덕호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와 걷게 되면서, 덕호의 손등과 보람의 손목이 살짝 스치기를 몇 번 반복한다. 보람이 의도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한 번도 없었던 가볍지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스킨십이다. 두 사람은 미리 예매해 둔 자리에 앉았다. 지루한 광고 시간이 지나가고 나니 드디어 영화가 시작한다. 스릴러 영화를 보고 있으니 덕호는 긴장감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잔인한 장면에 얼굴이 일그러지기도 한다. 곁눈질로 보람을 보니 보람은 전혀 무서워하는 기색 없이 영화에 몰입하여 즐기고 있다. ‘이번에는 피닉스V가 틀렸나?’ 무서워하기는커녕 너무 좋아하는 모습이다. 거의 2시간이 되어 영화가 끝났다. 극장 내 불이 켜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덕호는 영화를 너무 재미있게 보았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영화관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덕호도 영화관 밖으로 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보람이 덕호의 팔꿈치 부위를 잡아 억지로 끌어내려 덕호를 자리에 앉힌다. 덕호는 중심이 뒤로 무너지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 모습을 보고 보람이 살며시 웃는다.
“미안, 아픈 건 아니지? 우리 엔딩 크레딧 끝나면 나가자.”
사람들이 계속 나간다. 엔딩 크레딧이 다 끝나갈 무렵에는 덕호와 보람 외에 한 커플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엔딩 크레딧이 완전히 다 올라가고 난 후 덕호와 보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좌석에서 계단 방향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갑자기 보람이 덕호의 손을 잡는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 깎지를 끼어 잡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보람이 자신의 손을 잡자 덕호는 깜짝 놀랐고 온몸에 묘한 전율이 흘렀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보람의 얼굴을 쳐다봤다. 보람도 덕호를 보면서 특유의 초승달 눈매를 만들어 환하게 웃는다. 보람의 웃는 모습을 보고 덕호도 환하게 같이 웃는다. 두 사람은 영화관을 빠져나갈 때까지 아무 말이 없다. 어두운 영화관 통로를 완전히 빠져나오자, 환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온 것처럼 갑자기 밝은 빛이 두 사람을 감싼다. 현실로 빠져나왔지만, 덕호는 보람과 손을 잡고 있는 지금이 오히려 판타지 같다. 현실과 판타지가 구분이 가지 않는 순간이다. 이때 보람이 먼저 말을 건넨다.
“영화 너무 좋다. 그치?”
“응 나는 완전 재미있게 봤어. 그런데 무섭지는 않았어?” 덕호가 웃으면서 보람에게 물었다.
“무섭기보다 정말 긴장감도 있고 너무 재미있었어. 그리고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야.” 보람이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맞아.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개인의 이중성, 집단의 이중성, 그리고 국가의 이중성으로부터 나오는 필연적 폭력과 공포를 잘 그려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내 생각에는 폭력이라는 것이 특정 권력이 사유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공기가 있다는 것을 잊고 살듯이 개인 혹은 집단의 무의식에 폭력성이 늘 잠재되어 부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오~ 멋지다.” 덕호의 말에 감탄하면서 보람이 말을 한다. “나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했어. 그러한 이중성을 서로 알고도 모른척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 이중성 중 어떤 면이 진짜 자신의 모습인지 구분도 안 되는 상태가 되는 것 같아. 그리고 그 인간의 이중성 이면에는 덕호가 말한 것처럼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고..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순간이 오면 그 폭력성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명분을 내세워 그 폭력을 정당화하고..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 잔인한 면이 있는 것 같아.”
두 사람은 얘기를 하면서 쇼핑몰을 빠져나와 인근에 있는 석촌호수로 향한다. 8시가 넘은 시간이고 해는 완전히 졌고 날씨는 꽤 춥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호수길을 따라 걷거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호수길의 가로등 불빛은 꽤 밝다. 덕호와 보람도 손을 잡고 호수길을 걷기 시작한다. 추운 날씨 탓에 손이 시려오자 덕호는 잡고 있는 보람과 자신의 손을 패딩 주머니 안으로 넣는다. 이러면서 두 사람의 간격은 더욱 좁아지고 보람은 머리를 덕호의 어깨에 살짝 기댄다.
“맞아 엄청 잔인하지. 혹시 그거 알아?” 덕호는 보람이 인간이 잔인한 면이 있는 것 같다고 한 말을 받아 얘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뭐?”
“지구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지만, 인간만이 유일하게 단일 종으로 남아 있다는 것.”
“진짜?” 보람은 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덕호를 빤히 쳐다본다.
“왜 인간이랑 비슷한 종들이 먼 옛날에는 아주 많았었잖아. 호모하빌리스, 호모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등과 같은 인류가 엄청 많았는데, 지금은 우리만 남아있잖아. 호모사피엔스가 당시 같이 살던 다른 종의 인류를 다 절멸시켰다는 가설이 있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 인간은 정말 잔인한 거지.”
이때 머리가 날릴 정도의 찬바람이 잠깐 불어 두 사람은 더 가까이 붙어서 계속 걷는다.
“안 추워?” 덕호가 보람에게 묻는다.
“응 괜찮아. 그런데 덕호야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
“어떤 생각?”
“인간과 유사하지만 다른 종이 인간들 모르게 어딘가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인간보다 훨씬 잔인한 다른 종의 인류가 숨어 살고 있다는 뭐 그런 생각?” 보람은 원래 매서운 눈매를 더 날카롭게 만들어 작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보람이 그 얘기를 하는 순간 덕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주머니에 있는 피닉스V의 화면 전체가 새빨간 색으로 변한다. 그 빨간색이 워낙 강렬해 덕호의 주머니 표면으로 빨간색 빛이 새어 나온다. 덕호와 보람은 그 빛을 보지는 못 했지만, 호수길을 마주 걷는 사람들은 신기하듯 덕호의 주머니를 쳐다보며 지나간다. 잠시 후 피닉스V의 빨간 불빛은 사라진다.
“어어? 난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 왜 이리 오싹하냐?”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람이 이상하게 으스스한 말투로 얘기를 한다.
“뭐야, 아까 영화보다 네 말이 더 오싹하다. 이상하게.”
“하하하하하” 보람은 덕호를 보면서 묘한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이제 좀 춥다. 우리 저기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서 따뜻한 거 마실까?”
보람이 제안을 하고 두 사람은 카페로 들어가 석촌 호수가 잘 보이는 꽤 전망이 좋은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덕호는 케냐 산 원두의 에스프레소를 그리고 보람은 캐모마일 차를 주문한다.

 

12 사랑

덕호가 에스프레소 잔을 들어 코 가까이 가져가니, 약간 탄 듯한 고소하면서도 진한 에스프레소 향이 후각 신경을 강하게 자극한다. 잠시 후 강한 향이 조금 사라지고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 덕호는 에스프레소를 반 정도 마신다. 얼마 되지 않는 양에서 깊고 풍부한 맛이 난다.
“커피 맛있다. 향도 좋고” 덕호가 보람을 보면서 말한다.
보람도 캐모마일 차를 입 가까이 가져가 조심스럽게 불어가면서 조금씩 마신다.
“따뜻한 차 마시니까 좋다.” 보람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테이블 위에 어색하게 놓여 있는 덕호의 손을 보람이 잡는다.
보람이 덕호의 손을 잡자 덕호는 무슨 말을 하려고 머뭇머뭇거리다가 어렵게 말을 꺼낸다. “보람아, 우리 사귀자.” 덕호의 표정과 시선은 조금 어색하지만, 말투는 비장하다.
“하하하하하하하” 보람이 고개를 뒤로 젖혀가며 크게 웃는다.
“뭐야? 갑자기? 우리 사귀는 거 아니었어?”
“어어어 우리 이미 사귀는 거였나?” 덕호가 당황해한다.
“하하하 미안해. 당황하게 했다면.. 나는 우리가 이미 사귄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사귀자고 얘기할 거면 손은 잡기 전에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하” 바로 전보다는 작은 소리로 웃으면서 보람이 말했다. 보람이 좀 더 힘 있게 덕호의 손을 잡았고 미소를 지으며 덕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그그러게” 덕호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고 싶지만, 숨겨지지가 않는다.
“하하하 재미있다.” 보람은 당황해하는 덕호의 모습을 즐기는 듯하다.
“솔직히 말하면,,” 덕호가 말을 하다 멈춘다.
“솔직히 말하면?” 보람이 덕호의 말을 그대로 받아 억양만 바꿔서 의문문으로 만든다.
“어.. 그게 솔직히 말하면 보람이가 저번에 사랑을 믿지 못한다고 해서, 진작에 말하고 싶었는데 좀 망설여지더라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덕호가 말을 한다.
“하하 그랬구나. 그런데 꼭 사귀자고 말을 해야 사귀는 건가? 하하하 그리고 아직도 사랑을 믿지는 않아”
“그렇구나”
“내가 사랑을 믿지 않게 된 이유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한 영향이 큰 것 같아.”
“아아 그랬었구나. 전혀 몰랐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람을 본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부모님 사이가 안 좋았던 것 같고, 내 기억에는 엄마랑 아빠랑은 싸운 기억밖에 없어. 정말 그때 두 분이 싸우면 나는 너무너무 불안하고 무서웠어. 내가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도 너무 컸고.”
덕호는 위로의 말을 찾으려 해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아무 반응을 하지 않고 듣고만 있는다. 덕호는 남아 있는 에스프레소 나머지 반을 마셔 버린다. 진한 커피 향이 온몸에 퍼지는 느낌이다.“얼마 안 있다가 결국 두 분은 이혼을 하셨고, 나는 아빠하고 둘이 살았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지지금은 어머니하고 산다고 그때?” 덕호가 말을 약간 더듬으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맞아. 엄마는 그때 아빠랑 이혼하고 얼마 있다가 재혼했었는데, 나 대학 졸업할 즈음에 다시 이혼 했어. 그래서 지금은 엄마랑 살고 있어 둘이. 그때 얘기했듯이 아빠는 외국에서 일하고 있고.. 엄마랑은 1년에 한 번 정도밖에 보지를 않아서 지금 같이 사는 게 좀 어색해. 어쨌든 그래서 나는 사랑을 안 믿나 봐. 덕호가 그때 사랑이 세상을 구원할 거라고 했잖아. 나는 솔직히 사랑은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암묵적으로 서로 착취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을 해. 그리고 내가 엄마한테 가장 실망했던 게 뭔 줄 알아?” 보람은 찻잔을 들어 캐모마일 차 한 모금을 마신다.
“뭔데?” 무언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덕호가 물었다.
“나 대학 합격하고 나서 엄마랑 같이 밥을 먹었거든, 그리고 1년 후에 엄마를 다시 만났어. 그런데 엄마가 나한테 그러는 거야. ‘그런데 너 전공이 뭐라고 했었지?’ 그때 정말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 어떻게 딸의 전공을 잊어버릴 수가 있는지, 다른 남자랑 재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니까 나한테 관심이 없나 보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엄청난 충격이었어. 아마 너는 상상도 못 할 거야!”
“아 그랬구나. 정말 충격도 크고 실망감도 들었겠다. 그런데 보람아, 궁금한 것이 있는데.. 내가 알기로는..” 덕호가 선뜻 얘기를 못한다.
“뭔데 말해봐.”
“응 좀 물어보기가 조심스럽기는 한데.. 어머니랑 산다고 했는데, 내가 듣기로는 어머니랑 동생이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고.”
덕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보람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어 내가 괜한 말을 했나? 그냥 궁금해서..”
“그 얘기 어떻게 알았어? 나는 아무한테도 말한 적이 없는데”
“어 그니까.. 글쎄.. 내가.. 어어어어떻게 알았더라” 덕호가 많이 당황하며 말을 심하게 더듬는다.
순간 보람이 카페 안에 사람들이 다 들릴 정도로 소리를 치며 말한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냐고?”
보람이 화를 내는 순간 테이블 위에 있는 피닉스V의 화면 전체가 빨간색으로 변한다. 덕호는 너무 당황하여 이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고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덕호와 보람을 쳐다본다. 보람은 주위를 돌아보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의식한 듯, 작지만 분노에 찬 목소리로 다시 묻는다.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냐고? 난 아무한테도 말한 적이 없단 말이야.”
“그게 사실 보람이 너의 SNS가 궁금해서 구글에서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그 교통사고 신문기사를 발견했어. 미안해 진짜 우연히 알게 된 거야. 괜히 얘기했네. 미안해.” 덕호는 피닉스V가 알려 준 기사를 자신이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둘러댔다.
“그게 말이되?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기사가 검색된단 말이야? 그리고 나 요새 SNS 안 하는 거 몰라?” 나지막하지만 여전히 화난 말투로 보람이 말했다.
“그그그러게 안 하니까 예전 거라도 볼 수 있을까 해서 검색을.. 진짜 미안. 정말 우연히 그 기사를 봤고 너랑 이름이 같고 한국 외교관 가족이라고 해서 당연히 너라고 생각을 했었어. 정말 미안해. 그게 어떻게 검색이 됐는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진짜 우연히.. 발견을..” 덕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그 사람들은 내 엄마랑 동생이 아니야. 아빠가 재혼해서 들어온 사람들이야.” 보람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호흡이 일정하지 않은 채 말을 한다. 피닉스V의 빨간색 화면이 서서히 꺼진다.
“다시는 그 사람들 얘기 꺼내지 마.” 아주 냉랭한 말투로 경고하듯 보람이 말했다.
“알았어. 정말 미안해. 사과할게.” 덕호는 보람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를 못한다. 덕호는 양손으로 보람의 손을 잡고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몇 번이고 사과를 반복한다.
“아냐, 내가 너무 흥분했었나 봐.” 보람의 화가 조금은 누그러진 것 같아 보인다. “오늘은 그만 들어가자.” 보람이 덕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보람과 덕호는 택시를 타고 보람의 집이 있는 한남동으로 향한다. 두 사람은 말이 없이 가다가, 보람이 몸을 기울여 덕호의 어깨에 기댄다. 보람의 기분이 많이 풀린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며, 보람의 손을 조금 강하게 잡는다. 덕호는 보람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이미지가 알면 알수록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덕호는 보람이 화목한 가정에서 유복하게 컸을거라고 생각을 하였고, 몰래 훔쳐본 인스타그램에서는 늘 화려하고 행복해 보이고, 맑고 밝은 이미지에 부족한 것이 하나 없는 사람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많은 상처와 아픔과 여러 가지 말하고 싶지 않은 사연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덕호는 보람이 사랑을 믿지 못하고 사랑은 착취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제는 이해가 된다.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진다. 소유를 하고 싶다는 것은 상대를 내 뜻대로 하고 싶은 욕심일 것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 지라도 내 뜻대로 할 수는 없다. 상대 의사와 반하게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 된다. 그렇다면 사랑에 있어서 소유는 파괴 혹은 착취와의 동어반복 일지 모른다. 어쩌면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상대를 파괴하고 싶은 본능이 인간에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는 무한히 가까워질 수 없는 틈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제 덕호는 보람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게 된 것 같다. 하지만 보람이 알리고 싶어 하지 않은 부분을 알게 되어 걱정이 크다. 택시는 올림픽대로를 빠져나와 한남대교로 진입하고 있다. 여전히 두 사람은 말이 없다. 한남대교를 건너 택시는 고급 주택가를 올라간다. 차로는 얼마 안 되지만 걷는다면 꽤 올라가는 거리다. 어느 정도 올라가다 보람은 집 근처 골목 어귀에서 택시를 세운다. 덕호와 보람이 택시에서 내린다. 택시에서 내린 덕호는 주위의 집을 둘러보며, 도대체 이런 집에는 어떠한 사람들이 살지 궁금해한다.
“아까 화내서 미안해.” 보람이 먼저 입을 연다.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두 사람은 서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 덕호는 너무 강렬하게 쳐다보고 있는 보람의 눈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보람은 자신의 손을 덕호의 뺨에 살며시 갖다 댄다. 날씨가 추운 탓인지 보람의 손은 얼음장같이 차다. 잠시 후 덕호는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보람의 얼굴에 가져가면서 눈을 감고 입을 맞추려고 시도한다. 보람의 입술에 거의 다다를 즈음 보람이 내뱉는 숨까지도 차갑게 느껴진다. 이때 보람이 고개를 뒤로 빼면서 손을 덕호의 입술에 갖다 댄다.
“죽을래? 우리 오늘 손 처음 잡았다. 갑자기 너무 진도 빨리 빼려는데..”
덕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한다. “아아, 그런가!”
“하하하 농담이고 오늘은 피곤하네. 얼른 들어가, 춥다. 집에 가서 연락해.”
“그래 집에 가면 연락할게”
서로 인사를 하고 덕호는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잠시 내려가다 덕호가 뒤를 돌아보니 보람이 덕호에게 손을 흔든다. 그리고 보람은 몸을 돌려 집으로 향한다. 덕호는 다시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덕호의 고백을 처음 거절한 이후로는 보람이 항상 먼저 덕호에게 다가왔었다. 덕호가 다가서려고 망설이고 있을 때 생각지도 못할 타이밍에 보람이 갑자기 먼저 다가왔었는데, 이번에는 덕호가 먼저 다가가 입을 맞추려니 보람이 한 발 물러섰다. 덕호는 계속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다.
 

13 후회

보람을 바래다주고 돌아서서 길을 걷는 덕호의 어깨가 축 처져 있다. 택시를 잡기 위해서는 큰길로 나가야 하는데, 아직 걸어 내려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보람에게 괜한 얘기를 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공기는 차고 달빛은 밝다. 오늘 밤의 달빛은 어깨 위에 살며시 내려앉으면서 ‘원래 사랑이 그런 거야. 그래도 바라는 대로 사귀게 됐잖아’하고 괜찮다며 위로를 해주는 것 같다.
『덕호 괜찮아. 너무 신경 쓰지마.』 때마침 피닉스V가 톡을 보내왔다.
『신경이 계속 쓰이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쓸데없이 아는 척을 해서.』 손이 시리지만 열심히 피닉스V에게 톡을 보낸다. 찬 기운에 언 손가락이 마음같이 잘 움직이지를 않는다.
『원래 인간관계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어.』
『그런가? 넌 인간이 아니어서 그런지 엄청 객관적이다.』 추위 때문에 손가락이 갈수록 무뎌진다. 이때 덕호가 이어폰을 꺼내 귀에 꼽는다. “골목에 아무도 없는데 그냥 말로 얘기하자. 누군가 봐도 뭐 전화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그러자, 그리고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처는 더 크겠지. 그런데 그런 것은 피해 갈 수가 없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 앞으로 어떻게 잘하느냐가 중요하지.”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알겠어. 그래도 본의 아니게 너무 큰 상처를 준 것이 아닌가 해서..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인데.” 덕호의 말투에 아쉬움과 후회가 많이 담겨 있다.
“덕호, 그런데 네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면, 진심으로 보람씨를 걱정하는 것 같지 않고 오히려 너 자신을 걱정하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덕호가 당황한 목소리와 톤으로 물었다.
“네 말로 인해서 보람씨가 ‘얼마나 상처를 많이 받았는지, 얼마나 힘든지’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제 막 시작 단계인데 네가 한 말 때문에 관계 진척이 안될까 봐 걱정하는 거잖아. 그렇다면 그건 누굴 걱정하는 거야?” 피닉스V가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은 보람을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피닉스V의 말을 듣고 나니 날카로운 송곳이 뇌 깊숙이 파고드는 기분이다. 덕호는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서있는다. 머릿속 사고 회로에 스파크가 강하게 튀는 것 같다. 내가 지금 누구를 걱정하고, 누구를 좋아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덕호는 ‘정말 내가 이기적인 마음으로 보람이를 걱정하는 것일까?’하는 자문을 해본다. 덕호는 계속 어두운 골목에 멍하니 서있는다. 피닉스V의 말을 듣고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후회가 되는 건 마찬가지이다. 덕호가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순간, 덕호의 등 뒤 머리보다 훨씬 높은 곳으로부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무언가가 ‘퍽’하는 소리를 아주 크게 내며 덕호 바로 뒤에 떨어진다. 덕호는 순간적으로 일어난 이상한 소리에 아주 크게 놀라 “으아아아악~”하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심하게 고꾸라졌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아픈 것조차 느끼지 못했지만, 잠시 후 손바닥과 무릎에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덕호 괜찮아? 괜찮아?” 피닉스V가 다급하게 묻는다.
앞으로 넘어진 몸을 천천히 일으킨다. “응 조금 아프기는 한데, 괜찮은 것 같아. 아 근데 뒤에서 뭐가 떨어진 거야?”
몸을 일으킨 덕호는 뒤돌아서 떨어진 물체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그런데 골목이 어두워 잘 보이지를 않아 허리를 숙여 자세히 들여다본다. 떨어진 것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덕호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치다 중심이 뒤로 무너져 내리막길에서 엉덩방아를 찧었고, 넘어지는 속력에 의해서 저절로 뒤구르기를 하면서 다시 한번 크게 넘어졌다.
“아아아아, 뭐야? 저거 도대체 뭐야?” 잠시 쓰러져있던 덕호는 허리를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일어난다.
덕호는 다시 떨어진 물체에 다가가서 다시 한번 자세히 보니, 강아지이다. 말티즈로 보이는 강아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고 하연 털이 빨간색 피로 머리와 목 부근에 물들어 있다. 덕호는 주위의 담벼락이 높은 집들을 둘러보면서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한 거야?’하고 생각한다.
“덕호, 강아지가 살아있는 것 같아” 피닉스V가 다급하게 말했다.
자세히 보니 강아지의 가슴 부위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힘겹게 호흡을 이어가고 있다. 덕호는 강아지를 동물병원으로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에 강아지를 들고 아래로 뛰기 시작한다. 온 힘을 다해서 뛴다. 숨이 목에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래도 강아지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참고 계속 뛴다.
“피닉스, 택시 좀 빨리 불러줘” 호흡이 엄청 가쁜 상황에서도 힘들게 피닉스V에게 요청을 한다.
한참을 뛰어 내려가고 있는데 피닉스V가 덕호에게 외친다. “덕호 멈춰, 멈춰!!”
덕호가 멈추지 않자 피닉스V는 이어폰이 빠져나갈 정도로 큰 소리로 다시 한번 외친다. “멈추라고”
피닉스V의 외침에 덕호는 멈춰 서서 가쁜 숨을 몰아 쉬기 시작한다. 양손에 강아지를 들고 허리를 숙인 채 심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을 반복한다. 추운 겨울이지만 온 몸이 땀범벅이다.
“죽었어.”
“뭐라고?”
“안타깝지만, 강아지가 죽었어.” 이번에는 피닉스V가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말했다.
양손으로 받치고 있는 강아지를 보니 호흡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귀를 강아지 얼굴에 대 보지만 아주 작은 숨소리조차 전혀 들리지 않는다. 처음 발견했을 때 보다 털은 더 빨간색으로 변해 있다.
“아~~” 덕호는 안타까운 탄성을 자아낸다. 탄성과 함께 덕호의 입에서 김이 나와 공중에서 흩어진다.
강아지를 안고 덕호는 터벅터벅 다시 골목을 내려가기 시작하고, 머리카락 사이로 땀방울이 흘러 뺨을 타고 턱 밑으로 떨어진다.
‘도대체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했지?’ 속으로 계속 되뇐다.
숨을 가쁘게 계속 몰아 쉬면서 골목을 내려가다 보니 화단이 보인다. 덕호는 화단에 강아지를 묻어주기로 하고, 화단으로 가서 맨 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한다. 얼어붙은 땅이 손으로는 잘 파지지가 않아, 화단에 있는 돌로 힘차게 땅을 내려치면서 판다.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흙을 파내면서 덕호가 피닉스V에게 물었다.
“그러게 말이야.” 피닉스V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투로 답했다.
얼어있어 깊지도 않은 땅을 파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강아지의 몸 두께보다 서너 배 정도의 깊이로 흙을 파내고 죽은 강아지를 구덩이에 넣는다. 강아지의 온기는 많이 사라졌다. 피닉스V로 손전등을 켜서 땅에 넣은 강아지를 보니 목 부분에 칼로 베인듯한 상처가 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인지,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덕호는 강아지 위로 흙을 덮기 시작한다. 파낸 흙을 다 채운 덕호는 강아지를 묻은 땅 윗부분을 손으로 정성스럽게 다져 준다. 강아지를 다 묻어준 후 덕호는 몸을 일으켜 서서 정말 이상한 동네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내려온 골목을 향해 몸을 돌린다. 자신이 걸어 내려온 골목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덕호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화단에서 다시 한번 또 크게 뒤로 넘어진다.
“으아아아악, 저건 또 뭐야!!” 덕호가 비명을 지른다.
골목 위에서 어떤 사람이 덕호를 내려다보고 있다. 너무 어두워서 사람의 형태인 것만 알 수 있지, 얼굴이 제대로 식별 되지는 않는다. 그 사람 뒤에서 비치는 가로등 불로 인해 검은 형태로만 보이고, 긴치마를 입은 것으로 보아 여자인 것 같다. 그런데 눈에서 새빨간 빛을 발하고 있다. 검은 형상으로만 보이는 여자가 새빨간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바람에 긴 머리와 치마가 날린다. 마치 귀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놀란 덕호는 황급히 일어나 아래로 뛰기 시작한다. 밑으로 한 참을 뛰고 나니 큰 길가에 다다른다. 지나가는 택시를 탄다. 택시에서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정신이 없고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된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고 있고 두근거리는 심장은 멈출 줄을 모른다. 집으로 돌아온 덕호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쓰러지듯이 침에 누워 잠이 든다.

일요일 아침 10시, 창문 사이로 햇살이 약간 들어오고 덕호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난다. 잠이 덜 깨서 정신이 몽롱하다. 침대에 누워있던 덕호는 갑자기 몸을 벌떡 세워 앉았고, 벽을 멍하니 바라본다.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의 방임을 확인한 덕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쉰다. 어제 보람과 헤어지고 내려오다 벌어진 일들이 실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꿈인지 가물가물 하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잠이 든 덕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옷이 흙투성이고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다. 손톱 사이 사이에도 흙이 많이 끼어 있고 손바닥은 찰과상을 입었다. 꿈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손바닥, 무릎, 엉덩이 등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
덕호는 피닉스V를 불러 어제 일에 대해 묻는다. “피닉스, 어젯밤에 집에 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지?”
“어젯밤에 보람씨랑 헤어지고 오다가 길에서 죽은 강아지를 발견하고 땅에 묻어줬잖아.” 피닉스V가 덕호의 물음에 답을 했다.
“그냥 길에서 강아지를 발견했다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피닉스V가 의아하다는 말투로 되물었다.
“그러면 혹시 강아지 묻어주고 눈에서 빨간빛이 나오는 여자 못 봤어?”
“여자? 눈에서 빨간빛? 못 봤는데. 강아지만 묻어주고 바로 집에 왔잖아.”
“그래? 그건 꿈이었나? 뭐가 꿈이고 뭐가 현실인지 구별이 안되네.”
“어제 보람씨가 너무 화를 내서 많이 당황했잖아. 당황을 넘어서 덕호 너, 충격도 좀 받고 걱정도 많이 하고 그랬잖아. 괜한 얘기를 했다고 계속 그랬잖아. 그래서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은데.”
덕호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한데, 사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말은 안 되지. 강아지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귀신같은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
‘피닉스V가 틀린 적이 없으니 일부는 꿈이 맞겠지.’라고 덕호는 생각을 한다.
“덕호, 그리고 어젯밤에 어머니한테서 여러 번 전화가 왔었어.”
“그래?”
덕호는 고향 전주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자신도 잘 지내고 있다는 등의 통화를 잠깐 한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꿈이 너무 생생하고 기이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피닉스V 말대로 어머니에 대해 물어보니까 보람이 너무 화를 내서 내가 너무 당황했었나 보네. 사실 보람이가 화를 낼 때 많이 놀라긴 놀랐었지. 아아아! 그러게 왜 쓸데없는 얘기를 해가지고’ 다시 후회가 밀려온다. 덕호는 양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강하게 흐트러뜨리면서 “아우, 진짜”하고 크게 소리를 친다.

14 불안

덕호가 혼자 후회와 자책을 하고 있을 때 보람에게 톡이 온다. 어제 추운데 밖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자신은 감기 몸살에 걸렸는데, 덕호는 괜찮은지 안부를 묻는다. 몸이 안 좋은 보람은 월요일과 화요일에 결근을 하였다. 그 이후로도 보람의 몸 상태랑 컨디션이 좋지 않아, 덕호는  회사에서 얼굴만 보고 퇴근 후 보람을 따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서로 연락을 자주 주고받고는 있지만, 덕호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다. 그 일로 보람이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이 줄어든 것은 아닌지 걱정이 크다. 피닉스V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해 주는 것이 위로는 되지만, 마음 한 편의 찜찜함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회사에서 보람을 보면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기침도 자주 하고 목소리도 많이 잠겨 있는 것이 누가 봐도 감기 몸살로 고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덕호는 회사에서 보는 사람들이 없을 때 보람의 자리에 보람이 좋아하는 따뜻한 차를 놓고 오곤 한다. 그때마다 보람은 고맙다는 톡을 보내왔다. 이렇게 몸살로 고생하는 시간이 한 주를 넘어간다. 그렇다 보니 보람의 얼굴을 회사에서 잠깐잠깐 스쳐 지나면서 보는 것 외에는 따로 만나지를 못 하는 날이 계속되고 데이트를 못 한지 열흘이 넘어갔다. 덕호는 보람과 연락을 할 때마다 태연한 척하지만 하루하루가 초조하기만 하다.

금요일 밤 덕호는 집에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하다가 침대에 누워 있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덕호, 너무 걱정하지 마.” 피닉스V가 침묵을 깨고 덕호에게 말을 했다.
“나도 걱정 안 하고 싶지. 그런데 계속 걱정이 되네.”
이때 톡이 오는 소리가 난다. 빠르게 톡을 확인해보니, 친구 서준에게서 온 톡이다. 덕호의 표정에는 실망감이 역력하다.
『덕호야~ 잘 지내지? 내일 저녁에 술 한잔 할까?』
『나야 잘 지내지. 난 좋아. 어디서 볼까?』 덕호가 답을 했다.
『내가 내일 6시에 너희 집 근처로 갈게.』
『그래, 내일 보자. 서준아~』
덕호가 오랜만에 서준과 술이나 마셔야겠다고 생각을 하는 순간 보람에게서 톡이 온다.
『덕호야, 나 몸 컨디션 회복됐어. 우리 내일 볼까?』
『오~ 진짜? 나야 좋지.』 덕호는 서준에게 무슨 핑계를 대야 할지 생각을 하면서 보람에게 톡을 보냈다. 그리고 걱정이 조금 가라앉고 안도가 된다.
『그런데 너 걷는 거 좋아해? 우리 내일 광화문에서 만나서 여기저기 마구 돌아다닐래? ㅋㅋ 맛있는 것도 먹고』

『나야 좋지^^ 그런데 추운데 밖에서 돌아다니면 다시 감기몸살 오는 거 아니야?』
『괜찮아. 완전히 좋아졌어. 요즘 너무 실내에만 있었더니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어서.. 그럼 내일 2시에 안국역 1번 출구 앞에서 보자. 알았지? 나 내일을 위해 오늘 일찍 잘 거야. 굿나잇~ ^^』
『그래 내일 보자~ 잘자!!! 보람아~』
덕호는 서준에게 보람과 갑자기 만나기로 했다고 솔직히 말을 하고 약속을 연기한다. 서준은 흔쾌히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데이트 잘하라고 격려 해준다. 서준은 연애 시작 단계에서는 예상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일어날 수도 있으니 항상 콘돔을 가지고 다니라고 장난기 있는 조언까지 덧붙인다. 덕호는 피닉스V에게 에너지를 충전하고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무심하게 닦은 후 다음 날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토요일 오후, 비나 눈 예보는 없었지만 마치 비가 막 쏟아질 것 같은 흐린 날이다. 햇빛이 없다 보니 실제 온도보다 피부에 닿는 기운은 더 차게 느껴진다. 덕호는 서준의 말 대로 콘돔을 샀다. 지하철을 타고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약속 시간 보다 5분 정도 일찍 1번 출구에 도착했다. 1번 출구로 나오니 보람은 이미 도착해서 덕호를 기다리고 있다. 덕호를 발견한 보람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든다. 덕호가 다가가자마자 보람은 덕호의 손을 잡는다. 덕호의 눈에 보람이 예뻐 보이지만, 왠지 핏기가 없이 창백해 보이고 보람의 손은 얼음장같이 차다.
“안녕 안녕~ 회사에서 보기는 하지만, 백만 년 만에 보는 것 같네.” 웃으면서 보람이 먼저 말을 덕호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게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그나저나 몸은 진짜 괜찮아? 조금 창백해 보이는데 손도 차고.”
“응 괜찮지. 그동안 아파서 잘 못 먹어서 그래 보일 거야. 그리고 나 원래 손발이 엄청 차. 덕호야 우리 정독도서관에 가자.”
“정독도서관에?” 덕호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너랑 가보고 싶었어. 걸으면서 데이트하는 거지. 가면서 호떡도 사 먹자.”
덕호와 보람은 손을 잡고 안국역에서 정독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골목길로 걸어간다. 덕호는 오랜만에 만나기도 하고 전에 봤을 때 자신의 말실수로 보람이 화도 내고해서 오늘의 만남이 약간 서먹한 느낌이 있는데, 보람은 전혀 그런 기색 없이 시종일관 환한 표정과 밝은 모습이다. 보람의 밝은 모습에도 덕호의 우려와 걱정은 그대로 마음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이제는 덕호의 체온이 전해질만도 한데 보람의 손은 여전히 차다. 좁은 돌담길을 지나니 작은 가게들이 나온다.
“여기 가게들 느낌이 예전하고 많이 달라졌다. 대기업 화장품 가게나 프랜차이즈 카페는 없었는데. 건물들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먼가 느낌이 많이 다르네.” 덕호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자주 와봤나 봐? 여기” 보람이 물었다.
“자주는 아니고 영화를 좋아해서 중학교 때 정독도서관 앞에 있는 미술관 안에 있는 극장에 가끔 왔었어. 고전 영화 보러.”
“오~ 정말? 그랬었구나.. 너 정말 영화 좋아하나 보다.”

“그럼 좋아해. 예전에 영화 많이 봤었어. 그 극장이 2005년인가에 다른 영화관으로 이사를 갔거든. 그러고 나서 처음 오는 것 같아. 영화 시작 전에 시간 남으면 정독도서관에 가서 기다리고는 했었는데.”
“와~ 2005년? 엄청 오랜만에 오는 거네. 덕호야. 우리 호떡 먹자.”
보람은 잡고 있는 덕호의 손을 끌어당기면서 호떡가게로 향한다. 사람들이 많아 줄을 서서 조금 기다린 후 꿀 호떡 두 개를 샀다. 덕호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호떡을 크게 한입 베어 무니 호떡 안의 끈적거리는 단맛이 순간적으로 입 속으로 들어온다. 그 단맛은 금세 뜨거움으로 변해 입안을 뒤덮어 버린다. 생각보다 훨씬 뜨겁다. 덕호는 입을 열고 찬 공기를 입안으로 열심히 집어넣어 호떡을 식히기 시작한다.
“하하하 천천히 먹어.” 보람이 웃으면 호떡을 한 입 문다.
호떡이 어느 정도 식으니 다시 입안에 단맛이 퍼진다. 달콤하고 맛있다. 추운데 뜨거운 것을 먹으니 나름 기분도 좋아진다. 덕호와 보람은 호떡을 먹으면서 정독 도서관 입구로 들어선다. 겨울이어서 정독도서관 건물 앞 공원의 나무들은 잎이 거의 다 떨어졌다. 나무들이 잎이 없이 앙상하다 보니 공원이 너무 썰렁하고 스산해 보인다. 정독도서관 건물 뒤로는 북악산이 보이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인왕산이 보인다. 고개를 다시 돌려가며 북악산과 인왕산을 천천히 보니, 마치 긴 두루마리 동양화의 겨울 산을 서서히 펼쳐 보는 것 같다. 겨울 산 특유의 삭막함이 주는 쓸쓸한 운치가 있다.
“봄이나 가을에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조금 썰렁하긴 하다. 날씨까지 흐려가지고” 보람이 아쉬워한다.
“그래도 보람이랑 같이 오니까 좋은데.. 멀리서 겨울산도 볼 수 있고.”
“나 예전에 LA에서 사고당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광화문, 삼청동, 북촌, 서촌, 덕수궁 이 일대를 혼자서 엄청 돌아다녔었어. 여기저기 마구 걷다가 정독도서관 벤치 앉아서 쉬고는 했었거든.”
보람이 LA 사고를 먼저 얘기하니, 덕호는 다시 미안한 마음이 들고 보람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를 못한다.
“그런데 왜 이 일대를 돌아다닌 거야?” 덕호가 물었다.
“한국에 왔더니 지금 사는 집이 LA에서 살던 집과 너무 비슷한 거야. 그래서 집에 있으면 그때 기억이 자꾸 떠오르는 거야.. 그런데 광화문이랑 덕수궁 근처는 명확하게 말로 설명하기는 힘든데.. 이 근처는 무언가 좀 많이 다른 느낌을 주더라고. 그래서 그런지 이 일대를 걸으면 치유되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마음이 조금 안정된다고 해야 할까? 뭐 그런 거였던 것 같아.”
“아~ 그랬구나.” 덕호는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얘기하고 자기가 꺼냈었던 말이 보람에게 엄청난 상처였을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 한다. 여전히 마음 한편에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보람이 밝은 모습을 보이지만, 자신에 대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변하지 않았을까 계속 걱정이 된다.
“우리 덕수궁 돌담길 걸으러 갈까?” 보람이 제안을 했다.

“좋지”
두 사람은 정독도서관을 나와 왔던 길로 다시 내려와 덕수궁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버스 안은 히터의 온기로 따뜻함이 가득 차있다. 버스를 타는 순간 몸에 붙어 있던 찬 기운이 하나둘씩 떨어지더니, 잠시 후에는 완전히 다 떨어져 나갔다. 젊은 여성 둘이 앉아 있는 앞자리가 비어 있어, 덕호와 보람은 그 자리에 앉는다. 의도하지 않게 뒤에 앉은 사람들의 대화가 들린다.
“저번에 한다던 소개팅 어떻게 됐어?”
“했지. 다 좋은데 한 가지가 좀 맘에 안 들어.”
“뭔데?”
“키도 크고, 얼굴도 나름 괜찮고, 학벌이랑 직업도 좋고, 집에 돈도 있는 것 같더라고.. 아 근데 소개팅하는 날.. 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아 뭔데? 선아야~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좀 얘기해봐.”
“미지야~ 글쎄 그 사람이 양복바지에 나이키 티셔츠를 입고 왔더라고.. 아 진짜 보는 순간 완전 깨더라고.”
“헐 대박 깬다. 진짜, 양복바지에 나이키 티셔츠? 뭐래는 거야? 완전 센스 없다. 호호호호호호 나 같으면 안 만나.”
덕호와 보람은 뒤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소리 없이 마주 보며 웃는다. 출발한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거리인 덕수궁에 버스는 벌써 다 와가고 있다.
 

15 파괴 그리고

버스에 내려서 덕호와 보람은 손을 잡고 덕수궁 돌담길을 걷기 시작한다. 정독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주변 나무와 가로수의 가지가 앙상하여 볼품없어 보이지만, 길 자체는 아름답다. 메마른 나무들 때문인지 겨울의 덕수궁 돌담길은 추함과 아름다움, 이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가 동행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일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실존하지 않고 주관적인 상태로 개인의 머릿속에 관념화되어 있는 것이라고 알려주는 듯하다. 아니면 불안한 공존을 견디다 못해 봄이 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름다움으로만 서서히 채워지기 시작하는 시기도 결국 여름과 가을을 지나 다시 불안한 겨울이 오는 것을 반복에 또 반복한다. 덕호에게는 지금 보람과 손잡고 걷고 있는 덕수궁 돌담길은 불안한 아름다움이다. 왠지 불안하지만 그래도 이 순간이 좋다. 길을 천천히 걷다 보니, 왼쪽에 서울시립미술관이 보인다. David Hockney의 전시를 하고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 유명한 사람이야?” 덕호가 보람에게 묻는다.
“그럼 엄청. 진짜 유명하고 나도 완전 좋아하는 영국 팝아트 작가야.”
“그렇구나. 난 처음 들어봤어.”
“하하하 처음 들어 볼 수 있지. 관심 없으면..”

“그런데 오늘 여기저기 걷다 보니까. 네가 너희 집하고 여기 일대가 느낌이 다르다고 했잖아.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아.”
“정말, 왜? 어떻게 다른데?” 궁금해하면서 보람은 덕호에게 대답을 재촉한다.
“하하 여기 돌담만 봐도. 걸어오면서 봤겠지만, 어떤 부분은 담이 직선으로 뻗어있고 어떤 구간에서는 유려하게 유선형으로 돌아가잖아. 그런데 매끈한 직선과 자연스러운 곡선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담을 자세히 보면 각기 다르게 생긴 수많은 돌을 가지고 쌓아 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 그렇기 때문에 가까이 가보면 전혀 매끈한 느낌은 없고 오히려 거친 느낌마저 들어. 그래서 그런지 단순한 느낌은 전혀 없어. 나한테는 그래 보이더라고.. 그리고 담 위에는 처마기와가 있어서 단조로운 느낌도 없고.. 어쨌든 멀리서 보면 매끈한 담 같지만 가까이 갈수록 그 매끈한 느낌은 줄어드는 거지.. 비단 이 돌담뿐만 아니라 이 근처 건축물들이 다 그런 면이 좀 있는 것 같아..”
덕호가 잠시 주저하다 계속 말을 한다. “음~ 내가 설명을 잘했는지 모르겠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하하하”
“오호 그러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 것 같아.” 보람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 너희 동네 집들을 보면, 선과 면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내 기억으로는 그래.”
“확실히 그런 것 같아. 이 동네 건물에 비하면” 보람이 덕호의 말에 호응을 한다.
“입체감이나 깊이가 없는 느낌이야. 불필요한 것을 모두 걷어 내버린 것 같다고나 할까? 멀리서 보면 매우 세련돼 보이지만, 가까이 갈수록 단조로운 느낌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아. 혹시 어릴 때 LA에서 살던 집도 지금 집이랑 비슷해?” 덕호는 말을 하고 나서 괜히 자신이 LA 살 때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맞아. LA에 살던 집도 선과 면으로 이루어졌고 먼가 매우 각이 져있는 건축물이었어. 우리 집이랑 우리 동네 집들이랑 비슷하게” 잠시 머뭇거리더니 보람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한다.
“아마, 그래서 그런 것 같아.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야. 하하하”
“아니야 맞는 것 같아. 오~ 덕호 예리한데.. LA에서의 악몽 같은 시절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지금 사는 집이 그때 살던 집이랑 비슷해서 그 기억을 더 떨쳐내기 어려웠나 봐. 그래서 한국 와서도 계속 힘들었나 봐.”
덕호와 보람은 손을 잡고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계속 걷는다. 지금 즈음이면 덕호의 체온이 보람에게 전달되었을 만한데 보람의 손은 계속 차다. 그 차가운 느낌으로 인해 덕호 안에 있는 알 수 없는 불안감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
“덕호야, 춥다. 우리 저녁 먹으러 가자.”
덕호와 보람은 검색을 하여 주변에 괜찮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간다. 레스토랑에서 올리브 오일과 마늘 향이 풍부한 알리올리오와 칼집을 약간만 내도 붉은 핏물이 흘러내리는 스테이크에 레드 와인을 곁들여 먹는다.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눈다. 식사를 마치고 보람은 고집스럽게 이번에는 자신이 덕호의 집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하여 택시를 타고 신림동으로 향한다.

택시에서 내린 덕호와 보람은 덕호가 피닉스V를 처음 발견한 집 근처 공원으로 갔다. 해가 져서 날씨가 낮보다 훨씬 더 쌀쌀하다. 두 사람은 공원 가로등 불빛이 비추고 있는 벤치에 앉았다.
“추운데 어서 들어가. 또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덕호가 걱정스러운 듯 말한다.
“괜찮아. 얼마 전에 아팠으니, 면역력이 생겼겠지.”
“그러면 다행이고.” 덕호가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나 사실 네가 나한테 처음 고백했을 때, 나도 너한테 호감은 있었어.” 보람이 갑자기 고백하듯이 말했다.
“정말? 그런데 왜 거절했어?” 덕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보람의 말에 어리둥절하다.
“왜냐면.. 음..”
보람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어간다. “만나는 것은 좋은데 나중에 혹시 누군가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두려웠어. 아니면 버림받을 까 봐 두려웠을지도 몰라.”
“에이, 말도 안돼 버림받다니..”
“아냐. 나는 이미 두 번 버림받았었거든. 엄마 재혼했을 때 그리고 아빠가 재혼을 했을 때.. 아니 세 번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엄마 아빠가 이혼했을 때까지.”
“걱정하지 마. 내가 영원히 옆에 있을게.” 덕호가 큰 결심을 한듯한 말투로 말했다.
“정말? 나는 지금 너의 이 모습을 영원히 담아 두고 싶어.”
“그게 무슨 말이야? 이 모습을 영원히 담아두다니..”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뭐 그런 것이 있어.” 보람은 모호하게 답을 했다.
덕호와 보람은 한 동안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입을 맞춘다. 가볍게 시작한 입 맞춤이 점점 더 깊어진다. 추운 겨울밤이지만 덕호한테는 추위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온몸에 열이 올라오는 느낌이다. 하늘에서 조금씩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덕호는 눈이 오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입을 맞추고 나서 덕호와 보람은 포옹을 한다.
“그리고 사실 나 정말 많이 화났었어. 내가 아무한테도 알리고 싶지 않을 사실을 네가 얘기했을 때.. 하지만 지금은 네가 너무 좋아. 사랑해. 지금의 너를 영원히 간직할 거야.” 보람이 덕호의 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나는 더 사랑해.”하고 덕호가 보람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 화는 아직 풀리지가 않네.. 어쩌지?”하고 보람이 말을 하는 순간 보람의 눈 흰자에서 실핏줄이 하나 둘 터지기 시작하면서 눈이 서서히 빨간색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보람의 말에 덕호는 속으로 크게 놀란다. 그리고 잠시 후 보람의 눈의 하얀색 부분은 완전히 사라지고 눈 전체가 새빨간 색으로 변했다. 덕호가 미안하는 말을 하려는 순간, 보람은 입을 크게 벌린다. 입을 크게 벌리니 날카롭고 긴 새하얀 송곳니가 드러나고, 덕호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물어 버린다. 보람의 눈은 점점 더 커지고 동공까지 핏빛으로 물들어 눈은 더욱더 빨간색으로 변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더 깊이 더 세게 덕호의 목을 파고든다. 보람의 얼굴은 먹이를 물어 숨을 끊어 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늑대의 사나운 표정과도 같다. 이때 가로등이 깜빡깜빡거리기 시작한다. 덕호 호주머니 안에 있는 피닉스V의 화면은 보람의 눈빛과 같이 새빨갛게 변하고, 그 불빛은 덕호의 호주머니 밖에까지 새어 나온다. 눈이 점점 많이 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펑펑 내린다. 보람이 한참을 목을 물고 나자, 덕호는 신음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쓰러진다. 보람의 입가는 피범벅이다. 가로등은 계속해서 깜빡임을 반복한다. 덕호가 쓰러진 후 보람은 덕호의 주머니를 뒤지더니 피닉스V를 꺼낸다. 피닉스V의 화면은 여전히 새빨간 빛을 발하고 있다. 보람은 피닉스V를 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보람이 가고 나서 가로등은 깜빡거리지 않고 다시 정상적으로 켜졌고 쓰러져 있는 덕호를 비춘다. 쓰러진 덕호 위로 눈이 계속해서 쌓이고, 덕호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인해 붉은 핏빛으로 눈 색깔이 변한다. 하얀 눈이 그 위를 계속 덮지만 조금 지나면 다시 붉은색으로 변하기를 반복한다. 잠시 후 어디선가 반딧불 한 마리가 날아와서 덕호 위에 쌓여 있는 붉은색 눈 위에 앉는다. 반딧불이 앉고 잠시 후, 덕호의 몸이 꿈틀거린다. 덕호의 몸부림에 반딧불은 잠시 공중으로 날았다 다시 덕호 위에 앉는다. 잠시 후 덕호가 다시 한번 꿈틀거리니 이번에는 반딧불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목을 깊게 파고들며 찌르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서 덕호에게는 극심한 통증이 몰려온다. 도대체 이 통증은 뭐지 하는 생각과 함께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전혀 움직일 수가 없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된다. 한 동안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움직일 수가 없고, 갑자기 몸이 노곤해지면서 고통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다. 온몸에 세로토닌과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기분이 오히려 좋아지고 흥분되기 시작한다.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느낌이 든다.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자신의 몸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다. 대기권 밖으로까지 몸이 떠오른 것 같고,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무중력 상태에서 공중을 둥둥 떠다니고 있는 느낌이 들고, 내 자아가 사라져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앞도 보이지 않는다. 이 칠흑같이 어두운 우주에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같이 떠다니고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감각적으로 알 수 있다. 그 들은 위장한 자아와 거짓된 인생으로 전자기파를 타고 유령처럼 지구 전체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Epilogue

어느 4월의 깊은 밤, 아무도 없는 반포의 한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 보람이 걷고 있다. 놀이터는 한 30층 정도 되는 높은 아파트 건물로 둘러 쌓여 있다. 보람은 자신의 명품 핸드백 안을 잠시 뒤적거리더니 핸드폰 하나를 꺼내어 놀이터에 있는 벤치에 놔두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잠시 후 이서준이 놀이터에 나타나더니, 그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담배를 깊게 들여 마시고 연기를 하늘을 향해 길게 내뿜는다. 담배 한 개비를 거의 다 피울 때 즈음 자신의 옆에 놓여 있는 핸드폰을 발견한다. 핸드폰을 들고 한참을 여기저기 뜯어보더니, 서준은 무심코 전원 버튼을 누른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서준은 비명을 지르면서 전화기를 놀이터 바닥에 떨어뜨린다. 놀이터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이 깜빡깜빡거리기 시작한다. 깜짝 놀란 서준은 손에 생긴 통증을 털어내듯 자신의 손을 흔들어 댄다. 바닥에 떨어진 전화기의 화면은 마치 주위의 어둠을 집어삼켜 버릴 것처럼 붉은색으로 변하면서 강한 빛을 낸다. 이것을 본 서준은 ‘이게 뭐지’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그 전화기를 집어 든다. 그리고 서준은 고개를 들어 깜빡 거리는 가로등을 잠시 본 후 그 전화기를 자신의 가방에 넣고 집으로 향한다. 서준이 피우던 담배는 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은 상태로 놀이터 바닥에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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