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Bag of holding

2012.12.31 22:0512.31

Bag of holding


1.

1849년

다르망은 마창문을 열었다. 싸늘한 한기와 햇빛 너머로 30년 만에 다시 찾은 눈의 제국이 펼쳐져 있었다. 그 후로 모든 게 변해 버렸지만, 다르망의 눈은 여전히 차갑고 비정한 풍경을 비추었다. 하룻밤 사이 수천 발씩 총알을 장전 하고 살덩이와 핏물로 더럽혀도 아침이면 다시 눈으로 뒤덮여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리는 냉소적인 대지였다. 다르망은 마창문을 닫아버렸다. 마치 자신과 닮아 있는 듯하여 마음이 편치 못했기 때문이다.

두 시간이 지나 마차가 도착지에 당도했다. 미리 소식을 전해 듣고 찾아온 러시아 사교계 인사들이 다르망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르망 백작의 권세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모르는 귀족이 없었다. 얼굴을 비추려는 이들이 끊이질 않았다. 다르망은 적당히 예를 표해 환대에 응하고 자신의 친우 얼몬스를 찾았다. 얼몬스는 때 아닌 손님 접대와 선물공세에 난처해 하고 있었다. 다르망은 다짜고짜 그의 팔을 붙들고 구석자리로 끌었다. 그리고 이 집에서 가장 조용한 방으로 안내를 부탁했다.

"아니 이보게. 무얼 그리 서두르나. 몸부터 녹여야 하지 않겠나. 이 차부터 좀 들게."
다르망은 차를 거절하는 대신 얼몬스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이 고약한 땅에서 얼어 죽을지언정 자네에게 부탁이 있어서 찾아 왔다면 믿어주겠나?"

얼몬스는 말문이 막혔다. 이 친구가 몇 살 더 먹더니 농담을 배워왔나 싶다가도, 안색을 보아하니 그가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방문 했을 때 비해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3년 사이 20년은 더 늙고 쇠약해진 몰골이 아닌가. 워낙 오랜만이기도 하고, 아직 러시아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그런 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난로방에서 마주 앉아 자세히 보면 볼수록 달라진 건 외모만이 아니었다. 매 순간 불안한 듯 손을 떨고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설산 한 가운데 덫에 걸린 짐승처럼 절박해 보였다. 한 가지 여전한 점이 있다면 가방, 저 허름해 보이는 가방 뿐 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치 생명줄처럼 애지중지했다.

"얼몬스, 내 친구 얼몬스. 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네."
"나한테 다 말해보게."
"부인이 집을 나가 돌아오질 않네. 벌써 20년이 지났어."

그는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쏟아내더니

"…이보게. 자네 부인은 집에 불이 나서 변을 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래 그랬지. 나이를 먹으니 헛소리만 나오는구먼. 그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네."

언제 그랬냐는 듯 울음을 그쳤다.
얼몬스는 하인들을 내보냈다. 손수 땔감을 새로 고치고 두터운 외투를 가져다 다르망에게 입혀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기다렸다. 가족들과 사별한 충격이 아직도 그를 사로잡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난 그동안 남부럽지 않게 살아왔네. 오히려 남들이 나를 부러워했지. 아마 사람들은 망한 집안 출신에 혁명파 잔당 따위가 어디서 저런 돈이 났나 궁금해 했을 게야. 자네도 그랬을지 모르지. 아니, 마음 쓰지 말게. 나 같아도 똑같이 생각 했을테니까. 하지만 나한테도 고민이 있다네. 아주 오래된 고민이야. 누군가에게 말하기에는 너무도 터무니없는 고민이라 나는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네. 언제나 속으로 삭혀야만 했지. 그렇지만 나는 평생 동안 한시도 그 고민을 떨쳐낸 적이 없었다네."

얼몬스는 차분히 친구의 말을 귀에 담았다. 말할 곳이 없어 답답하고 괴로웠다는 심정토로는 충분히 이해할만한 부분이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인줄만 알았다. 그러다 이야기가 묘하게 흘러가더니 가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착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무엇이든 담아서 감췄다 다시 꺼낼 수 있고 그 수치에 끝이 없는 물건이라니. 자신의 부와 명예는 순전히 그것으로 이룬 결과라니. 어젯밤 찾아와 황금으로 거위 알을 만들겠다고 후원을 요청하던 연금술사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치매가 오기에는 이른 나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믿기 어려울 게야. 알고 있네. 직접 보여줄 수밖에 없겠지."

다르망은 품에서 가방을 꺼내 덮개를 벌렸다. 그리고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들어서 집어 넣으려했다. 가방 보다 훨씬 부피가 커서 들어갈 리가 없는 의자가 마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 듯 사라졌다. 얼몬스는 벌떡 일어나 가방 안을 살폈다.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보고도 믿지 못하겠는지 한참을 경직된 자세로 서 있다가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혼이 빠진 얼굴이었다. 다르망이 기대한 그 얼굴이었다.

"자네에게만 보여주는 내 비밀일세."

얼몬스는 다르망의 요청대로 귀족 하인 구분 없이 전부 돌려보냈다. 둘은 며칠 굶은 사람처럼 칠면조 요리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저택 맨 위층에 있는 얼몬스의 서재로 올랐다. 얼몬스는 자신이 익힌 다양한 학문적 지식을 총동원해 다르망의 가방을 증명 하려 했다. 성경은 물론이고 부정적 입장이었던 코란까지 꺼내서 어떻게든 이 물건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혼자서 떠들고 자문자답을 반복하는 모습이 이 상황을 모르는 누군가가 보면 영락없는 광인이었다. 다르망은 말없이 지켜만 보았다. 나도 다 알아봤는데 허사였네 라고 말하지 않았다. 증명할 방법이 없다고 스스로 깨닫는 게 제일 효과적일 터였다. 시간이 지나고, 얼몬스는 결국 다르망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누군가 직접 들어가 보는 수밖에는 없겠네."

다르망은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몇 년 만에 웃어보는 건지 몰랐다. 타인이 자신의 본심에 동조해준다는 게 이토록 기쁜 것이라고 새삼 깨달았다. 다르망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얼몬스라면, 그라면 이해해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얼몬스. 자네가 들어가 보지 않겠나?"
"…내가 말인가? 자네 혹시 그것 때문에 나를 찾아왔나?"

다르망은 이 명석한 친구에게 자신의 생각이 잘못 전해지지 않도록 신중을 기했다.

"생각해보게. 돈만 주면 이 안으로 들어갈 사람은 얼마든지 있네. 하지만 그건 의미가 없어. 이러한 물건이 존재한다고 인식하고 이 물건의 본질에 대해 궁금해 하는 순수한 학문적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들어갔다 나오는데 성공한다한들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일세. 자신이 무얼 봤는지 판단하고 표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얼몬스 내 친구여. 혁명은 성공했지만 세상은 더 멍청해졌네. 요즘 같은 시대에 자네 같이 올곧은 지식인은 전 세계를 찾아다녀도 만나기 힘들단 말일세. 자네는 내 소중한 친구야. 혹시라도 잘못 될지 모르니 완전히 들어가 보라고 하지는 않겠네. 얼굴만 들이밀어서 잠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네. 부탁함세."

"자네가 들어가는 건 어떤가? 수십여년을 궁금해 하지 않았나."
"무, 물론 내가 들어가고 자네가 관측자가 되는 것도 괜찮겠지. 허나 나에게는 이미 편견이 생겨버렸네. 가방 안에 내가 집어넣은 물건들을 기록한 책만 해도 600권이 넘어서 안에 뭐가 들었을지 알고 있는 게 너무 많다네. 손을 집어넣고 기억하는 물건을 빼낼 때처럼 눈을 들이밀어도 똑같은 것들만 보인다면.. 그 얼마나 허무한 경험이란 말인가."

얼몬스는 턱을 괴고 생각했다.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에는 얼몬스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고서 이토록 열의에 불타오른 적은 그로서도 오랜만이었다. 다르망이 자신에게 위해를 입히려는 목적은 없을 것이었다. 그와 알고 지낸 7년 동안 사소한 말다툼 한 번 없었다. 가방 안에 뭐가 있을지,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점이 석연치 않긴 해도 얼몬스는 자신이라면 이 가방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아낼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알겠네."
"정말, 정말인가? 고맙네 얼몬스, 정말 고맙네!"

다르망은 얼몬스의 손을 잡고 아이처럼 기뻐했다.


2.

혹여나 가방 속으로 전신이 빨려 들어갈 것을 대비하기 위함이라고는 하나, 얼몬스는 다르망이 자신의 몸을 의자에 묶어두는 게 탐탁치 않았다. 첫째로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모든 걸 집어 삼키는 물건이라면 이런 조악한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었다. 둘째로는 다르망에게 무언가 다른 속셈이 있어서 이렇게 묶어두는 건 아닐지 하는 근거 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왼 팔도 같이 묶어서 한 순간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인다면 바로 가방을 벗겨주겠다는 다르망의 진심어린 언행을 얼몬스는 믿어보기로 했다.

그들이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다르망이 가방을 거꾸로 들어서 조심스럽게 얼몬스의 얼굴에 씌웠다. 우려하던 빨아들임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르망에게는 여느 가방을 뒤집어쓴 우스꽝스러운 노인네로만 보였다. 몸에 미동이 없고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는 것만 제외하고는 달라짐이 없었다.

얼몬스는 어느 미술 화랑에 서 있었다. 신체적인 고통이나 위화감이 없어서 현실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은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고 호흡에도 문제가 없었다. 기이한 것은, 주변 환경과 시간의 흐름이 얼몬스를 관측자로서 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발을 움직이지 않아도 그는 화랑 속으로 인도 되었고 손을 뻗어도 그 흐름을 멈출 수 없었다.

꾸엘 드 다르망이란 인물의 탄생부터 유아기, 유년기까지. 한 사람의 삶의 흔적들이 인물화와 풍경화로서 전시 되어 있었다. 다르망이 말하기를 가방을 손에 넣은 것은 혁명기 시절이라고 했다. 얼몬스는 어째서 이런 오래된 과거까지 가방 속에 수집되어 있는 건지, 가방에 들어가는 것은 사물에 한정된 게 아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청소년기까지 고속으로 흐르던 흐름이 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시기부터 매우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모든 절망과 희망, 열정과 용기는 민중들의 편으로 그려져 있었고 그들과 맞서는 귀족과 왕족들은 설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악귀나 부랑자만도 못한 무능력자들로 묘사 되어 있었다. 얼몬스는 이 그림들의 내용이 다르망 본인의 생각과 기억인 것인지 궁금했다. 편파로 치우친 그림들을 보며 불편해진 심기는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 그림에서 솟구쳤다. 값비싼 예복을 입은 돼지들의 시체 위에 올라서서 검을 높이든 나폴레옹의 머리 위로 천상의 빛이 내리쬐는 모습을 젊은 다르망으로 보이는 청년이 감명 깊게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얼몬스는 직접 움직여 화랑을 지나칠 수 없으므로 계속 그 그림 앞에 서 있어야만 했다. 눈을 감아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오래된 감정이 꿈틀 거렸다. 지난 일이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지만, 민중을 선동해서 프랑스 역사상 다시없는 독재자로서 군림한 망나니 따위를 저토록 신봉 하는 것은 얼몬스로서는 시간이 지나도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르망이 보나파르트 주의자였다는 배경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연을 맺은 이후로 한 번도 서로의 정치적인 성향에 대해 말을 나눠본 적이 없었기에 마치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얼몬스는 감정을 추스르려고 다른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시대배경과 무관한 그림이 한 장 있었다. 시골에서 밭을 가는 여인을 그린 풍경화였는데, 화풍과 채색이 낯선 것이 동양권 작가의 그림인 모양새였다. 이상한 건 그림 속 한 켠에 그림의 주제와 도구적 쓰임새로도 연결되지 않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심지어 그려 넣은 것도 아닌 사진처럼, 아니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얼몬스는 그림을 만져보려고 손을 뻗으면서도 이곳은 현실과 다르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공간이라고 되뇌였다.


3.

얼몬스가 그림에 손을 대자 1817년 프랑스 남부의 어느 미술 전시회가 펼쳐졌다. 그곳에서 얼몬스는 보고 들을 수는 있어도 만지지 못하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미천한 출신이기는 하나 에이드리언은 미술적 가치와 상대의 구매욕 파악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눈치도 빨라서 귀족들이 빼어난 모조품을 들이민다거나 궤변으로 그림의 가치를 폄하해 가격을 깎아보려는 수작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그간 노고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오늘 손님으로 찾아온 이 남자의 품격은 남달랐다. 손에 잡힐 만큼 공감대를 유지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미학적 토론은 에이드리언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자신도 모르는 새 그동안 지적 허기에 시달렸던 탓인지 고양된 기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단숨에 들이킨 유리잔에 백포도주 대신 남자의 자태만 남았다. 주름 한 점 없는 벨벳 의복 안으로 근육 없는 매끄러운 피부를 상상했다. 남자가 액자에서 그림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로 말아서 미리 준비한 보관통에 담아 그림을 은닉하는 과정마저 고혹적으로 보였다.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마치 자신의 것인양 품 안에 담는 대범함이라니, 그것도 왕당파 소유인 이곳에서.

뒤늦게 깨닫고 나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에이드리언은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경고를 하기엔 이미 늦어버렸고 그의 지위로는 위해를 가하지 못하므로 형식상 양해를 구한 다음 홀로 가서 전시회 주최자에게 보고 하기로 했다. 방에서 홀까지 가는 몇 안 되는 걸음이 불붙은 장작처럼 분노와 실망으로 타올랐다. 주최자는 유명 악단 연주에 흠뻑 빠져서는 그게 웬 미친 소리냐며 코웃음 쳤다. 에이드리언이 벌겋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과 손님 목록을 들이밀기 전까지는. 주최자는 비대한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재촉했다. 때마침 다르망이 입구까지 나와 있었다. 그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시오. 내 동업자가 말하길 당신이 값을 치르지 않았다고 하는데, 결례가 안 된다면 확인하는 동안 잠시 기다려주겠소?"
"아,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군. 그러시게."

다르망은 일절 동요하지 않았다. 주최자는 수하들에게 없어진 그림이 있는지 찾아보도록 명하고 이번 해 손님들 중 유일한 보나파르트 주의자를 훑어보았다. 과연, 장교 출신답게 몸가짐에 격조가 있었다. 더욱 놀라운 건 그의 행색이었다. 이집트산 옷감에 최상급 보석으로만 꾸며진 장신구를 걸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허리춤에 보이는 황금제 피스톨은 듣도 보도 못한 물건이었다. 허름한 가방이 눈에 거슬렸지만 다른 호화품에 눈이 가서 1초 이상 기억되지 않았다. 아직도 이런 부티나는 보나파르트 당원이 있을 줄이야. 이 남자가 그가 모르는 대귀족과 연결된 누군가이고 혹여 그가 무고하다면… 이라는 불길한 가정도 잠시. 최고가 그림이 없어졌다는 정보가 주최자의 귀에 들어왔다. 그는 밝게 웃었다.

"껄껄, 아주 좋소. 그림 보는 안목이 대단하시구려. 밭가는 여인 태흐나히는 작품성이 뛰어남에도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동방 작가의 그림인지라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이 드물었소. 참주인을 만난 것 같아 주최자로서 기쁘기 그지없다오. 자, 그럼 값은 어떤 방식으로 지불하실 생각이신지?"
"명화의 가치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바라네. 허나 난 그 그림을 살 생각이 없소만."
"가당치 않은 소리! 저 자가 그림을 훔치는걸 나 에이드리언 파커스가 똑똑히 봤네."

냉정함을 되찾은 에이드리언이 애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덕분에 주변에서 그들과 이 상황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주최자의 얼굴이 굳었다. 싱싱한 애첩도 들이고 사업도 잘되가는 판에 이런 변고가 생기다니. 잠잠해진지 5년도 더 된 고혈압이 다시 도지는 것 같았다. 그림이야 가방 안에 있겠지. 어제까지 멀쩡히 그림만 잘팔던 에이드리언이 이런 미친짓을 벌일리가 없다. 문제는 이 잡음이 다른 귀족들 귀에 흘러들어가는 불행한 가능성이다. 여하간 정리하자면, 그래. 보나파르트 광신도놈의 일인극쯤 되겠다. 신봉하던 나폴레옹이 프로이센 떨거지에게 나가 떨어진 이후로 작금의 시대가 얼마나 비탄스럽겠냐만은 왜 하필 하고 많은 사업장 중에 자신의 전시회에서 행패란 말인가. 오늘 밤은 꿈자리가 사나울듯 싶었다. 주최자는 어서 마무리 짓고 해가 지기 전에 전시회를 닫기로 결심했다.

"껄껄, 가방을 확인해 봐도 괜찮겠소?"
"얼마든지."

곧 죽어도 미쳐서 관구석에 들어갈 놈! 주최자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가방 안에 손을 넣었다. 다음 순간, 주최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보다 못한 에이드리언이 가방을 잡아채서 아예 거꾸로 털었다. 먼지 하나 떨어지는 게 없었다. 둘은 똑같이 얼빠진 표정으로 다르망을 쳐다보았다. 다르망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3번 교향곡 연주가 끝나기 전에 덤덤히 문을 나섰다.

발칵 뒤집힌 전시회장을 뒤로 하고 다르망은 마차에 올라서 두 시간쯤 지나 저택에서 충분히 멀어졌을 즈음 마창문을 열었다. 저편으로 구름에 뒤덮힌 산맥들과 초록빛 대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남부 지방의 경관은 프랑스 최고였다. 그가 기분 좋게 가방에 손을 넣고 밭가는 미녀를 상상하자 그림 두루마리가 손에 잡혔다. 다르망은 상쾌한 풀내음과 호두나무숲을 배경 삼아 명화를 음미했다. 아직 처녀이거나 신혼으로 보이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잠시 밭일을 멈추고 지평선을 바라보는 순간이 그림에 담겨져 있었다. 바람을 집어다 붓으로 칠해 그려넣은 듯 비스듬히 뉘인 풀밭과 농모 사이로 비어져 나온 여인의 머리카락, 원근감이자 평온함을 자아내는 나뭇잎 흐트러짐까지. 흠잡을데 없는 명화였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만족감은 찰나였다. 낯선 여인과 몸을 섞고나면 찾아오는 공허함처럼 순간의 쾌락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갈증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정도 되는 명화로도 채우지 못했다. 다르망은 그림을 구겨서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날 저녁, 다르망은 홀로 밤길을 걷고 있었다. 오늘 방문한 사교 모임은 왕당파로 돌아선 전 공화파 변절자들을 앞세워 황제를 모욕하고 전체주의를 설파 하는 역겨운 자리였다. 다르망은 걷다 말고 허공에 한참동안 욕지거리를 쏘아댔다. 그러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크고 검은 인영이 보였다.

"꾸엘 드 다르망 맞소?"
"그렇소만."
"진정 그렇소? 보나파르트 주의자 꾸엘 다르망이 맞소?"

다르망은 그가 왕당파라고 직감했다. 홧김에 마차를 마다한 게 실수였다. 주변에는 도움을 요청할 누구 하나 없었다.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미처 허리춤으로 손을 내리기도 전에 남자의 사브르가 다르망의 어깨를 찔렀다. 외마디 비명이 울렸다. 다르망은 피스톨과 함께 한쪽 무릎을 떨어트렸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숨어 있어도 죽임을 당할 판에 무슨 낯짝으로 여기까지 행차 한거요. 나를 만난 걸 다행으로 아시오. 내 고통 없이 단칼에 숨을 끊어줄테니."

검이 내리 꽂히는 절체절명의 순간, 다르망은 매고 있던 가방을 들어올렸다. 살기를 바란게 아니라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 다음 순간에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암살자는 온데간데 없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꿈이 아니었다. 여전히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욱신거렸다. 다르망은 가방부터 챙겼다. 겉모습에는 문제가 없었다. 해지고 짙은 갈색 모양 그대로였다. 하지만 가방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문득 자신을 죽이려하던 남자가 머리에 스쳤다. 설마 살아 움직이는 것들도 가방에 들어갈수 있다고는 지금껏 생각지 못했었다. 기분이 묘했다. 가방에 손을 넣고 안에 남자가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다르망은 고민 끝에 가방 덮개를 닫았다. 혹시라도 남자가 가방 속으로 들어간 것이라면 그를 다시 불러냈을 때 다르망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4.

다르망의 과거에서 벗어나 이번에는 폭풍우 속의 첨탑이 나타났다. 얼몬스는 보고 들은 것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가방이 보여주는 흐름을 따라가기 바빴다. 그런 얼몬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이번에는 얼몬스가 직접 걸어서 꽈배기 계단을 올라야했다. 지면을 밀어당기면서 처음으로 관측이 아닌 실감이 와 닿았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머릿속에서는 그 곱절만큼 번민으로 요동쳤다.

처음 미술 화랑에서 느꼈던 대조적인 감정과 방금 전까지 보았던 다르망의 절도와 살인까지, 어디까지고 사실이고 아닌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얼몬스는 평소 습관처럼 그가 모르는 것에 대해 명제와 가설을 세우기로 했다. 이곳이 진정 가방 속의 또다른 공간인지 아닌지에 대한 불확실성은 제쳐두고, 여기서 보여주는 모든 것들은 다르망과 관계된 사물과 그것에 깃든 다르망의 기억이라는 사실, 하나의 사물을 들여다보면 그 사물과 관련된 다른 동시대 사물과 기억과 연결된다는 가설이었다.

그렇다면 이 첨탑의 연관성은 무엇일까. 생각을 정리하면서 첨탑을 오르던 중이었다. 얼몬스의 귀에 속삭임이 들려왔다. 작은 속삭임은 그가 들으려고 귀 기울이자 명확한 목소리들로 확장 되었다.

"소피님은 도련님이 워털루에서 돌아오셨을 때도 숙청에서 사면 되도록 도와주신 은인이십니다. 도련님과 혼약한 사실만으로도 문제 삼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까지도 헌신을 아끼지 않고 계십니다. 가문이 왕당파에 속한 그분이 도련님을 위해 얼마나 큰 위험을 자초하셨는지 정녕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

"혁명과 함께 도련님도 변하셨군요…."

"영감, 파리에서 혁명파 동지들이 모인다는 전갈을 받았어. 이럴 시간이 없다고."

"내가 혼약을 파기하면 소피는 안전해. 어차피 그녀와는 함께 할 수 없어. 이렇게는 살아가지 못해. 지금 나에게는 저 난롯불처럼 내면을 불태울 강렬한 무엇인가가 필요해."

"내 사랑이 무사해야할텐데. 그는 제가 모르는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저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네요. 점점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이 사라져가… 이대로 그를 놓칠 것만 같아서 너무나 두려워요."

몇 개의 대화들이 회오리처럼 서로 뒤섞이면서 시시각각 내용의 순서와 배열을 달리했다. 모든 정황을 유추해내기는 힘들었지만 얼몬스는 이 대화들이 앞서 보았던 다르망의 행보와 연결 돼 있다고 직감했다. 무리한 추측도 아니었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고 몰락한 황제의 유능한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방황을 마치 나라를 빼앗긴 듯 포장해 설파하고 급기야 백색테러까지 자행하던 시대와 맞물렸기 때문이다.
층계를 거의 다 오를 즈음에는 얼몬스의 감정도 차분한 궤도에 올라 있었다. 이제는 감정과 추측이 아닌 확신과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연극의 다음 막이 오르는 것처럼, 첨탑 꼭대기에는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얼몬스를 올려다보는 다르망이 있었다. 얼몬스는 그 역시 가방 속의 흐름인가 싶어서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얼몬스! 이 친구야. 어땠나. 뭐가 보이던가?"

다르망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얼몬스는 여기가 현실인지 혼돈스러워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랜 세월 한결 같은 자신의 서재가 맞았다.

"자네가 가방을 벗겨준 건가? 난 그곳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실감이 와 닿지 않네만."
"여기가 현실일세. 자네가 갑자기 고통스럽게 신음하길래 걱정이 되서 그랬네."
"내가 들어가고 나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5분 남짓일세."

얼몬스는 지나고 나서야 인식했다. 미술 화랑에 있을 때도 수천 장은 될 법한 그림들을 대충 훑어보고도 각각의 그림들이 어떤 내용인지 정확히 이해 할 수 있었다. 감각으로 인식하지 않아도 어떤 의지가 그에게 정보를 주입 시킨다는 느낌이었다. 친절하게도 첨탑 부분에서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까지 주었다. 현실과 가방 속의 시간은 다르다. 그 시간의 균열은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의지로 결정 된다. 새로운 가설이었다.

명제나 가설이라는 척도와 안에서 보았던 내용과는 별개였다. 얼몬스는 차근차근 자신이 보았던 것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기대한 것들과는 많이 달랐는지 다르망은 듣는 내내 시큰둥하고 실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얼몬스는 어조를 직설적으로 바꿨다.

"자네와 난 좀 더 일찍 만났어야 했네. 그랬다면 내가 자네를 보나파르트의 망령에서 건져낼 수 있었겠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네의 오래전 기억을 보았네. 워털루에서 패한 이후로 방황하는 안타까운 기억이었지. 씻을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기억이기도 할테고."
"죄악이라니, 시대적 흐름일 뿐이네. 여하간 다 지나간 일일세. 내가 자네에게 부탁한건 과거의 평가가 아니지 않은가. 그만 하게나."
"안에서 내가 본 게 그런 것들 뿐인데 난들 어쩌겠나. 그보다 자네, 나한테 말하지 않은게 있더군. 가방 안에 사람이 들어갈 수도 있다고 말한 적은 없었지 않나?"
"가설일 뿐이었지. 지금 자네가 들여다본 것처럼 얼굴 뿐만이 아니라 완전히 들어갈수도 있지 않겠나."
"아니, 난 자네가 오래전 고의로 사람을 집어넣은 살인 행위를 말하는 걸세."

다르망은 허를 찔린 듯 놀란 표정이 되더니 착잡한 얼굴로 긴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다가,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가방 안에는 정말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담겨 있었나 보구먼. 나도 어쩔 수 없었네. 그대로 묵인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네."

얼몬스는 더 변명해보길 바라고 말을 아끼고 있다가 예상치도 못한 상황을 맞이했다. 그는 얼몬스에게 한 번 더 안을 들여다 봐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가방 안에는 자신의 가족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난데없이 무슨 헛소린가? 불행히 죽은 가족들을 날더러 살려내라 이 말인가? 가방 주인은 자네이지 않은가."

다르망은 얼몬스에게 사실대로 고백했다. 그는 기억과 가족을 가방에 빼앗겨 유일하게 믿을수 있는 친구로 생각하는 얼몬스에게 가방 안에서 가족들을 찾아주길 바랐다. 가방을 가진 이후로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을 비롯한 소중한 사람들이 사라져 갔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세상에서 증발해버렸지만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을리도 없고, 그렇게 말했다가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흠집이 생기니 갖가지 사고에 휘말려 변고를 당했다고 밝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드러나지 않게 고액의 포상금을 내걸고 비밀경찰이나 이름난 탐정들을 고용해 행방을 찾아보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실마리 하나 찾아내지 못했다. 얼몬스에게 처음부터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도 그가 믿어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이유에서였다.

"…가방이 자신의 의지로 가족들을 자네에게서 빼앗아갔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권력을 안겨준 대가로?"

덧붙여 이전에 저지른 죄악처럼 어느 날 미쳐버려서 가족들까지 집어넣은 건 아니냐고 몰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그가 보나파르트 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너무 앞서간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얼몬스가 보기에 그것 말고는 다른 객관적인 여지가 없었다. 치매로 의심 되는 증세가 보이는 이상, 중년의 나이에도 정신분열을 일으켜 화를 입혔을 가능성이 컸다. 탐정 같은 외부 도움을 받고도 단서가 없었다는 게 그 증거가 되는 셈이다.

"간절히 부탁하겠네. 자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지불하겠네."

다르망은 무릎까지 꿇고 눈물 흘리며 애걸했다.

"일단 줄부터 풀어보게."

시간은 8시를 지나고 있었다. 뒤늦은 백야 현상 때문에 아직도 창밖은 밝았다. 밝지만, 온전치 못한 음울한 밝음이었다. 얼몬스가 다르망이란 인물에 대해 느낀 감상도 그와 같았다. 우연히 학문적으로 뜻이 맞아 어울렸을 뿐, 얼몬스는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유일하게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방에 대한 것도 직접 그 능력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보나파르트 주의자들에 대한 묵은 감정까지 드러난 이상 친구로서, 감정으로서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다만 다르망이 자신을 납득 시켰던 처음의 이유라면, 고민할 만 했다. 가방의 신비한 능력은 무한한 연구 가치를 지녔다.

"뭐든지 지불하겠다고 말했었지. 그럼 그 가방을 나에게 넘길 수 있겠나?"
"물론이네!"

그는 오히려 바라던 바라며, 의구심이 들 정도로 일말의 여지없이 승낙했다.


5.

사물과 기억이 연동된다는 얼몬스의 가설을 토대로, 다르망은 가방 속에서 그의 가족과 연관된 물건을 꺼내보려고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오는 게 없었다. 그는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했다. 얼몬스는 그토록 간절하면 직접 들어가 찾아보는 게 낫지 않겠냐고 말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이제 와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만하게. 내 생각해둔 게 있으니 이제 시작해보지."

관측자의 의지에 감응하는 것도 말하지 않은 가설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가방 속 시간 흐름을 조절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부탁하네…"

다르망은 눈물을 훔치며 얼몬스의 머리에 가방을 씌웠다.

1820년 파리, 술집 지하. 열성적인 보나파르트파 청년이 또 한 번 손사래를 쳤다. 와인 잔은 대체 몇 개나 부셔먹었는지. 어디 그 뿐인가. 삿대질도 서슴치 않았다. 그의 신념에 따르면 왕당파에게 돈을 지불해 그들과 한통속이 된 변절자를 다시 받아주는 파렴치한 짓거리는 황제 이름에 오물을 끼얹는 중죄였다. 그러나 다른 보나파르트 당원들은 생각이 달랐다. 워털루 대패 이후 쇠약해진 보나파르트당으로서는 이유야 어찌됐건 거액의 지원금을 제시하는 다르망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것도 사죄의 의미라면 더더욱이었다. 잠자코 지켜보던 이가 진정하라는 듯 청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청년은 손을 뿌리치고 거칠게 몸을 돌렸다. 그곳에 청년보다도 풍채가 좋은 백발노인이 서있었다. 술렁이던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는 가브리엘 알퐁스, 워털루 전투에서 여단을 지휘했던 남자였다.

"동지들. 꾸엘 드 다르망이 왕당파에 자금을 지원한 사실은 명백한 사실임에 틀림없소. 허나 그는 속임을 당한 것이오. 왕당파는 돈을 받고도 꾸엘 가문에 보복을 가했소. 시체조차 남겨두지 않고 말이오! 이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이란 말이오. 나는 다르망의 분노와 의지를 이해하오. 이렇게 다시 우리를 찾은 것은 어떠한 기만도 없는 참뜻이라 믿소."

다르망은 자신을 위한 알퐁스의 변호가 마음에 들었다. 가족들이 살해당했다는 거짓 비보를 꾸며내기 전까지는. 당원들이 의논하는 동안 둘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거짓이라니. 자네 가문이 보복 당했다고 자네가 직접 말하지 않았나. 나뿐만 아니라 파리 전체가 알고 있네. 민중들이 분노 하고 있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제가 제 가족들을 팔아서까지 동정을, 동정을 구할"

다르망이 말하다 말고 머리를 얻어맞은듯 휘청거렸다. 낯선 장면이 뇌리로 파고 들었다. 그의 모친과 부친, 정혼자 소피와 그녀의 시종 두베르까지 모두 누군가에 쫓겨 달아나고 있었다. 다르망 자신이 그들을 쫓는 장본인 시점이었다. 사냥감을 추적하는 정복욕과 역동적인 심장박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불가사의한 영상은 구석에 몰린 사냥감에게 주인공이 손을 뻗는 대목에서 멈췄다.

"다르망!"

쓰러져 있던 몇 분 남짓 되는 시간이 다르망에게는 며칠은 자다 일어난 감각이었다. 원기가 넘치고 머리가 맑아졌다. 알퐁스는 그 점이 석연치 않았지만 지금 그의 건강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가문에 대한 보복이 그의 말대로 사실무근이라면 단순히 거짓말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알퐁스는 다시금 보복에 대해 확실한 사실이냐고 물었다.

"물론입니다."

다르망은 즉답했다. 태연한 표정이었다. 몇분 전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기억이 머릿속 한켠에 각인 돼 있었다.

모의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다르망은 앞서 과거에 대한 사죄를 거듭 강조하고 보나파르트파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시대유감을 토로했다. 샤를 10세를 위시한 왕당파의 무자비한 숙청, 혁명의 불씨를 간직하고 있는 민중들의 열망등,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이야기들 뿐이었다. 당원들은 왕당파에 대한 적의에 불타기도 하고 암울한 현실에 침울해 하다가도 혁명이라는 두 글자에 피가 끊는 자신들의 존재의의를 재확인했다. 다르망을 비난하던 젊은 청년도 잔뜩 상기 되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분위기가 고조 되자 다르망은 지금이 제안을 꺼내놓을 적기라 판단했다. 이 한 마디만을 위한 백 마디 말이었다.

"나는 감히 말하겠소.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 암살을 제안하는 바이요."

장내가 떠나갈듯 파도 쳤다.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 그런 거사를 벌일 수도, 벌여서도 안 된다는 신중파와 죽음도 불사해 성사 시켜야만 한다는 급진파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부르봉 왕가는 오래전 황제를 암살 하려다 실패한 근본부터가 치졸한 왕족이요. 그런 소인배들이 황도에 머무르는 것도 모자라 우리를 핍박하고 있소. 본보기를 보여주어야만 하오. 거사에 필요한 모든 자금은 나 꾸엘 드 다르망이 전액 지원하겠소. 말하건데 이것은 선택과 행동의 문제가 아니요. 혁명을 완성 시키겠다는 의지. 그리고 우리가 아직 그분의 것이라는 충심이오."

시간이 지날수록 여론은 한 쪽으로 치우쳤다. 이성적인 목소리들은 작아져만 갔다. 구부러지지 않는 신중파들은 알퐁스를 비롯한 그의 소수 측근에 불과했다. 분노의 격류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알퐁스는 가만히 눈을 감고 판단을 아끼고 있었다. 평온한 겉모습과 상반 되게 그의 속내는 요동치고 있었다. 보나파르트파에 남은 몇 안 되는 세력가들은 전통과 명예를 중요시 했다. 변절자 다르망이 다시 입당하는 걸 그들이 용납할리 없다는 판단 하에 이번 모임은 하류급 인사들을 중심으로 초빙했다. 개중에는 퇴역 군인이나 떠돌이 같은 신세가 변변치 못한 자들도 상당했다. 언제나 분노와 한탄에 가득 차 있어 작은 불씨로도 미쳐 날뛸 수 있는 도화선을 가진, 감정적으로 휩쓸리기 쉬운 이들이 다수였다. 원래부터 신분과 처지에 관대한 알퐁스였다. 다르망을 다시 받아들이자는 목소리를 당내에 알리기 위한 임시방편 정도로만 생각했다. 설마 이런 제안을 가지고 왔으리라고는 신에게 맹세코 상상도 못했다. 그가 수도 내에 어렵게 만든 이 모임은 마치 다르망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노리고 있던 것처럼 보기 좋게 장악 당했다. 이래서는 당원들이 보기에 알퐁스와 다르망이 미리 뜻을 맞추고 있었다는 추임새가 된다. 꾸엘 드 다르망이라는 남자를 잘못 보았던 것일까. 황제가 유배되기 전까지 자신의 여단에 있었다는 출신과 일가가 왕당파에게 몰살 당한 비극적인 배경, 그리고 눈빛을 보고 그를 택했다. 복수심으로 말미암았다 해도 그렇게나 열정적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본적이 없었다. 몇 달간 함께 지내며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고 외동딸이 그에게 연정을 품는 것도 흔쾌히 생각했다.

알퐁스는 감았던 눈을 뜨고 현실과 대면했다. 여전히 그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라면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세한 내용을 들어봐야 한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만장일치였다.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민들이여, 황제는 아직 당신들을 버리지 않았소!"

화창한 오후, 보나파르트 당원들이 거사를 위해 베리 공작령 부르주에 모였다. 먼저 일선에서 선전조가 활약을 시작했다. 왕당파 집권 이후 언제 다시 이런 유세를 펼칠 수 있겠냐며 더욱 열렬히 목청을 높였다. 부르주 도시에서도 가장 인파가 몰리는 시간대와 구역을 선별한 탓인지 경비병들의 귀에 들어가기까지 여유가 있었다.

"또 한 번 왕당파의 집권을 두고 보려는 것이오? 깨어나시오, 깨시민으로 다시 태어나시오. 그분께서 곧 다시 돌아오실 것이오. 그분의 사전에 포기란 없소이다. 우리는 사치 대신 대의와 민중을 위해 싸우겠소. 우리와 뜻을 함께하고 싸울 용맹한 혁명가들은 모두 모이시오!"

감동과 지지가 파도칠 거라 생각했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시민들은 분노했다. 전쟁과 불황으로 입은 피해를 언급하며 공격적으로 몰려들었다.

"또 우리를 전쟁으로 내몰려고?"
"내 아들 다섯 중 넷씩이나 보나파르트가 일으킨 전쟁에서 죽었지!"

한 구두닦이 소년이 던진 신발을 시작으로 대규모 돌팔매질이 일어났다. 다르망은 곧바로 다음 조에게 행동을 지시했다. 어찌됐건, 시민들의 관심을 끌어서 경비대가 나타날 상황을 만들겠다는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계획대로 자경대로 변장한 당원들이 그들을 인솔했다. 마침 공작의 저택에서도 경비병들이 파견된 시점이었다. 다르망은 자경대를 대표해 페르디낭 백작을 알현하기를 청했다. 감히 부르봉 왕가령에서 반대파 유세를 펼친 만큼 백작이 직접 판결을 내려주길 바란다는 의도였다.

불이 붙은 시민들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수천 명이 입을 모아 처형하라, 처형하라를 외치고 있었다. 공작의 저택에서도 그 목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다르망의 요청과 정황을 전해들은 공작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자경대장으로서 다르망은 아무 의심도 경계도 받지 않고 너무도 쉽게 공작에게로 안내 받았다. 다르망은 가방 덮개를 미리 열어두고 휘파람까지 부르며 춤추듯 공작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아아아!"

다르망은 난처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가방을 씌우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얼몬스의 상태가 썩 좋지 못하다가 급기야 괴성을 질렀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기에 얼몬스의 용태를 생각한다면 바로 벗겨주어야 하는 게 맞지만, 혹여 자신의 가족과 만났을지도 몰라서 지금껏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 고민 끝에 얼몬스를 위해 가방을 벗겨 주었더니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이 쳐 죽일 놈!"

두 눈이 심하게 충혈 되고 얼굴 전체에 오른 핏대가 금방이라도 터질듯 꿈틀댔다. 정작 얼몬스 본인은 비정상적인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는 듯 했다. 다르망은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묻고 싶은 속마음도 제쳐두고 그를 진정 시키려고 했다.

"네가 죽인 거였어. 바로 너였다고."
"이보게.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샤를 페르디낭은 내 조부셨다. 그리고 너는 20년 전 그분을 암살했지. 내 말이 틀린가? 대답하지 못하는걸 보니 정곡임에 틀림없군."

다르망은 그가 안에서 뭘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저 이 상황이 지나가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얼몬스의 광기는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씩씩 거리며 옆방으로 향하더니 장전된 피스톨을 가져왔다. 언제 챙긴 것인지 다른 손에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어, 얼몬스. 나에게 왜 이러는 건가. 내가 암살 했다는건 뭐고 자네 조부가 부르봉 가문이라는 건 또 무슨 소린가?"
"끝까지 시치미를 뗄 생각인가 보군. 이 역겨운 보나파르트 광신도놈! 워털루에서 여단을 지휘하던 가브리엘 알퐁스라는 자를 통해 너희 더러운 보나파르트파 당원들을 부추겨 그분을 암살한걸 똑똑히 보았다. 이래도 모른 척 할 셈인가?"
"얼몬스,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보게."
"닥쳐! 아주 끝까지 거짓말이군. 치매가 도져서 머리가 안 돌아가나?"

얼몬스는 다르망의 이마에 피스톨을 갖다 댔다.

"사실을 시인하면 곱게 죽여주고 네 가족들의 운명도 말해주지. 계속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살점을 모두 발라내 까마귀 먹이로 던져줄테다."

어떤 선택을 하건 다시는 가족들을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다르망은 눈물을 쏟았다. 가방으로 얻은 권력과 그로 인해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 그 모든 과오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 가방은 결코 사용자에게 원하는 것들만 안겨주는 보물이 아니었다. 자신을 죽이고 가방을 차지할 생각이라면, 평생 동안 만나본 인물들 중에 유일하게 그에게 사심 없이 대해준 친구 얼몬스에게 그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

"알겠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게 해주게."
"그래, 어디 해봐. 낱낱이 인정해 보라고."

얼몬스는 키득 거리며 잠시 피스톨을 내렸다. 다르망은 그 틈을 타서 빠르게 말을 전했다.

"언제가 됐건, 꼭 확인해보게. 자네는 경계해야만하네. 가방에게 속고 있는 거야. 가브리엘 알퐁스란 자는 존재하지 않아. 자네는 영국 가문 출신이네. 샤를 페르디낭 암살은 부르주 도시의 시민이 벌인 일이네.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말게. 내 말 꼭…"

총탄이 다르망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는 태엽 풀린 인형처럼 널부러졌다. 시체에서는 붉은 피 대신 모래가 흘러나왔다. 완전히 분해된 시체는 모래가 되어 가방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얼몬스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늙은 노인은 사라지고 정력적인 청년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가뿐한 숨을 내쉬고는 어질러진 주변을 정리했다. 서재에 앉아 양피지와 펜을 들었다. 꾸엘 드 다르망의 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펜을 잡은 얼몬스의 오른손이 모래로 변하더니 다르망의 손으로 변했다. 생전의 다르망과 똑같은 필체가 그대로 구현 되었다.
빈테르만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916 단편 무제 김진영 2013.01.07 0
1915 단편 나비 유리아나 2013.01.03 0
1914 단편 기사도 초연 2013.01.01 0
1913 단편 바람이야기 초연 2013.01.01 0
1912 단편 239Pu Leia-Heron 2013.01.01 0
단편 Bag of holding 빈테르만 2012.12.31 0
1910 단편 피를 먹는 기계 사이클론 2012.12.30 0
1909 단편 드래곤의 땅 Leia-Heron 2012.12.29 0
1908 단편 죽음을 두려워하다 먼지비 2012.12.25 0
1907 단편 몽유기행 민근 2012.12.16 0
1906 단편 너구리맛우동 2012.12.15 0
1905 단편 안녕 하루 너구리맛우동 2012.12.15 0
1904 단편 극우 더 라이징 니그라토 2012.12.14 0
1903 단편 줄리엣의 언덕5 바보마녀 2012.12.05 0
1902 단편 (번역) 나는 어떻게 아내에게 청혼했나 : 외계인 섹스 이야기 (5) ... 완결2 직딩 2012.12.03 0
1901 단편 여자는 필요없다3 니그라토 2012.12.03 0
1900 단편 약한자들의 저항법1 바보마녀 2012.12.02 0
1899 단편 줄 없는 꼭두각시 니그라토 2012.12.01 0
1898 단편 (번역) 나는 어떻게 아내에게 청혼했나 : 외계인 섹스 이야기 (4)2 직딩 2012.11.30 0
1897 단편 벚꽃을 꺾다 나비바람 2012.11.30 0
Prev 1 ...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