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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드래곤의 땅

2012.12.29 02:3112.29

안젤리나는 20살이 넘도록 수도원 밖으로 나간 일이 손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젖을 뗄 무렵부터 독실한 신자였던 부모님의 곁을 떠나 수도원에서 생활한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수도원의 바깥은,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뿐이었다. 산과 숲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없이, 그저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이어진 길만이 항상 보이는 모습이었다. 수도원의 가장 높은 창문에서 바라보면 저 멀리 있는 바다와 그 근처에 조그맣게 보이는 도시가 보이긴 했지만, 바깥에 대해서는 오로지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밖에 알지 못하는 안젤리나에게 있어서 그곳은 불쌍한 사람들이 목숨을 근근이 이어가는 곳에 불과했다. 안젤리나에게는 바깥에 대한 호기심도, 동경도 없었다. 오히려 몇 년에 한 번씩 수도원 앞의 공터에 수많은 사람이 몰릴 때, 그녀가 거추장스러운 옷을 차려입고서 수도원의 문밖으로 걸어나가야 했기에 바깥에 대한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가 밖으로 나갈 때마다 수천 명의 사람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그녀의 이름을 외친 것은, 그녀가 역시 어렸을 때 처음 겪은 뒤로 가끔 꿈에 나올 정도로 충격을 주었다. 안젤리나는 그 이후로 여러 사람이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 미간이 쿡쿡 쑤시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일이 아니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 반복되는 수도원에서의 삶에서, 안젤리나는 별다른 호기심을 가질 필요도 없이 자라왔다. 그나마 크게 가졌던 호기심은 그녀가 14살 무렵,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문득 떠오른 ‘왜 나의 눈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파란색인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수도원에서 자라게 된 이유이기도 했고, 그녀가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성녀가 된 기적의 증거이기도 했다. 그러한 호기심도 수도원장의 ‘안젤리나님은 신의 사자이기 때문에 그런 거랍니다.’라는 말과 함께 해결되었다. 안젤리나는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는 시성 청원서 사본에, 그녀의 푸른 눈이 기적의 증거로 천국을 담고 있는 것이라 기록되어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에 대한 호기심까지 완전히 잊고 성실하게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러다 보니 안젤리나에게 있어서 바깥으로의 외출이라는 것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난데없이 백여 명의 병사와 함께 찾아와 거의 한 달은 바깥에 나가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고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는 멋대로 찾아와 자신을 만나겠다고 하는 남자 때문에, 환호성을 지르는 수백 명의 사람 앞으로 자신이 직접 나서야 했으니까.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부정한 바깥세상으로는 나가서는 안 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나 수도원을 떠나야 한다니요.”
안젤리나가 볼멘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수도원장이 십자군 사령관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성녀님의 힘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서쪽에서 드래곤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그야, 이 대륙은 물론이거니와 본토에서도 아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드래곤이 악마의 수하라는 것도 아실 테고요.”
“네, 경전에도 나오는 내용이니까요. 하지만 보통 그런 식의 목격담은 뜬소문에 불과하지 않나요? 이번 소문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요.”
“그 소문의 드래곤 때문에, 서부 개척을 떠난 제 동생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령관은 안젤리나가 놀라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해당 지역에는 여태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큰 야만인 마을이 있습니다. 우리 원정대에게 패퇴한 야만인들이 그 사악한 드래곤을 숭배하는 마을로 점점 모여들고 있어 조만간 제국에 커다란 위협이 닥쳐올지도 모릅니다. 야만인들의 숫자도 그렇지만, 악마의 화신인 드래곤이 버티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신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테니 문제없지 않나요?”
그녀의 말에 사령관이 수도원장을 힐끔 보면 말했다.
“수도원장님께서 성녀님을 잘 가르치셨군요.”
“아, 예…….”
수도원장이 머쓱해하며 안젤리나에게 말했다.
“안젤리나님, 신께서 나태한 이들에게 은총을 내리시던가요?”
“아뇨, 그렇진 않죠.”
“이번 일도 마찬가지랍니다. 야만인들은 신의 자식이면서 신을 믿지 않은 타락한 이들입니다. 게다가 악마의 수하인 드래곤까지 숭배하고 있지요. 사악한 마음을 품은 그들은 신에 대한 바른길을 걷고 있는 우리를 타락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들은 악마의 수하들이니 선량한 신도들을 평화롭게 두라는 신의 의지도 무시할 것이고요. 그들로부터 선량한 신도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나서야 맞겠지요?”
사령관은 안젤리나가 수도원장에게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네, 백성을 지키기 위해 황제 폐하께서 직접 손을 쓰셨습니다. 300년 만에 십자군이 선포되었고, 거기에 성녀님께서 참여해주셔야겠습니다. 이건 이미 정해진 일입니다. 성녀님은 십자군의 정당성을 드러내 주시고 사악한 세력으로부터 병사들의 영혼을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교황 성하께서 십자군을 선포하셨으니, 성실한 신의 자식으로서는 동참하는 것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바깥에는 삿된 것이 많아 하늘에 가까우신 성녀님께 누가 될까 봐 외출하시지 않도록 했습니다만, 십자군에는 신실한 병사들이 성녀님을 지켜줄 것이니 걱정하실 것 없답니다.”
안젤리나는 수도원장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가 처음으로 수도원장의 저러한 표정을 본 것은 그녀가 규모가 큰 미사에 두 번째로 나가게 되었을 때였다고 그녀 스스로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안젤리나는 이전에 수많은 사람의 함성에 놀라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때 그녀가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거부하였을 때 수도원장이 지었던 표정이 지금의 표정과 같았다. 그날 결국 억지로 끌려서 사람들 앞에 나서야 했고, 저녁에는 예정에 없던 금식 기도가 이루어졌다.
안젤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을 숭배한다는 원주민들에게 가는 길은 순탄했고, 안젤리나는 별다른 불편 없이 여행할 수 있었다. 안젤리나는 낮 동안에는 일곱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화려한 마차에서, 밤에는 그녀만을 위해 지어진 커다란 막사 안에서 지내며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런 답답함을 이기지 못했겠지만, 안젤리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할만한 여행이었다. 처음 수도원 밖으로 나왔을 때만 해도 그녀를 마중 나온 수백 명의 병사의 눈길이 그녀에게 한 번에 모였고, 그들과 함께 십자군의 본대에 도착했을 때는 적어도 2만여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선뜻 나선 것에 후회를 거듭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 많은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 출정식을 할 때뿐이었다.
그러한 여행이 일주일 정도 이어졌을 때 안젤리나는 죄스러운 마음조차 들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이 전부 흙먼지를 마시고, 병사들 대부분은 발로 걸어가고 있는데, 혼자 편안하게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이 과연 신께서 보셨을 때 보기 좋으실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안젤리나는 저녁 식사 때나 만나는 사령관에게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특별대우를 받지 않고 움직이겠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사령관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고개를 저었다.
“신성한 성녀님께서 햇볕을 받으며 이동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태양의 찬란한 빛은 온 누리에 고루 비치는 신의 사랑과도 같지 않나요? 햇볕을 쬐면 안 된다니 이해가 안 됩니다.”
사령관은 안젤리나의 말에 대답 없이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자 사령관의 옆에 서 있던, 안젤리나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된 수도사가 대신 대답했다.
“메시아께서 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한 달간 황야에서 고행하셨다는 경전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성녀님?”
“물론이지요.”
“당시에 메시아를 시험하였던 것은 마귀의 망령된 속삭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햇볕이 메시아께 타는 듯한 고통을 주었던 것입니다. 햇볕은 만물을 성장하게 하는 신의 사랑과 은총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너무 많이 쬐면 몸이 상하게 됩니다. 마치 현신하신 신의 존안을 직접 뵙고서 육신이 불타버린 사람처럼 말입니다. 햇볕에 노출되는 것은 신의 존안을 직접 뵙는 것에 비할 수는 없지만, 오래 노출되면 사람의 육신이 그것을 버틸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은 신께서 내리신 선물이며, 신께서 정하신 육신의 쓰임이 다하는 시간이 되기까지는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범부도 아니고 성녀님께서 햇볕에 노출되시면 신의 노여움을 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수도사의 말이 끝나자, 막사 안 여기저기에서 성녀가 몸을 아낄 수 있도록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한 듯한 사람들이 안도하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메시아가 광야를 헤맨 것은 그가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깨닫기 전의 일이었다. 이후에 고행을 해왔던 성인들도 모두 고행 끝에서야 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기적을 이루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었다. 하지만 안젤리나는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기적을 가지고 태어났다. 의심할 나위 없이 공경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성녀가 땡볕을 받고 먼지를 뒤집어쓰며 여행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자칫하여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떠한 문책이 있을지 생각만 해도 두려웠기에, 수도사가 안젤리나를 설득할만한 말을 꺼내자 가슴을 쓸어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안젤리나의 말에 다시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저는 신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습니다. 햇볕이라고 하더라도 저의 몸을 상하게 할 염려는 없으니, 마차를 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수도사의 설득이 이어졌지만, 안젤리나는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평등한데 혼자 호사를 누릴 수 없다며 한사코 거부했다. 안젤리나의 고집에 사령관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자 수도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내일부터는 성녀님께서도 저희와 같이 말을 타고 움직이시지요.”
“이봐, 자네…….”
수도사의 말에 사령관이 움찔하며 그의 어깨를 잡았지만, 수도사가 그의 귀에 소곤거리며 말하자 사령관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도사의 말에 동의했다.
원하는 대로 안젤리나는 마차에서 내려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여정을 이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 안젤리나는 이동하는 동안 더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바깥에서 움직이며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은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말을 타고 움직이는 사람들만 있었기에 그들에게 가려져 수많은 병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부터는 말을 끌고 걷는 병사 한 명과 커다란 양산을 들고 걷는 병사 네 명이 그녀와 함께 움직였다. 그들은 말발굽에서 일어나는 흙먼지에 연신 요란한 기침을 해댔으며, 한 번은 말똥을 밟고서 멋지게 미끄러져 넘어졌다가 다른 말에 밟힐 뻔하기도 했었다. 그러면서도 병사들은 안젤리나에게 햇볕 한 줌 안 비치게 하겠다는 듯이 필사적으로 양산을 치켜들었다. 게다가 안젤리나가 침소로 돌아가거나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별도로 쳐진 작은 막사에 들어가곤 할 때, 문밖에서 지키고 서 있던 병사들은 이렇게 수군거리곤 했다.
“성녀님을 수행하는 병사들의 고생이 많다지? 어쩔 수가 있나. 성녀님을 위해서 우리가 희생할 수밖에.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안젤리나는 그러한 말을 들은 다음부터는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안젤리나는 사흘 만에 다시 마차로 돌아갔다. 결국, 전체 여정의 절반을 달성할 때까지 안젤리나는 사흘을 제외하고는 항상 마차 안에서만 이동하였다. 열흘이 넘도록 햇볕을 제대로 쬐지 못한 안젤리나의 피부는 수도원에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희고 고왔다.
십자군이 출발한 지 열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안젤리나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천막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병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이곳저곳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안젤리나가 밖으로 나서자 병사 하나가 허겁지겁 뛰어와 그녀에게 양산을 씌워주었다.
“형제님, 무슨 소란인가요? 밤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양산을 든 병사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침에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선발대가 해 뜰 녘에 야만인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전투가 벌어져서 공격을 대비하며 보고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의 말과 함께 서쪽에서 먼지 구름이 피어올랐다. 종소리와 나팔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병사들이 임시진지를 방어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는 와중에 수도사가 헐레벌떡 안젤리나에게 뛰어왔다. 안젤리나는 수도사의 안내를 받으며 회의용 막사로 향했다.
사령관을 비롯하여 십자군의 지휘관들이 모두 모인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나서였다. 바깥의 소란은 사그라졌고, 장교 한 명이 테이블 끝에 서서 새벽에 있었던 전투에 대해서 보고했다.
“30여 명의 정찰대를 이끌고 수색하던 도중, 적의 본진으로 향하는 100여 명의 적 기병과 마주쳤습니다. 한 명을 본진으로 복귀시킨 다음 전투가 일어났으며, 세 명이 사망하고 일곱 명이 부상당해 현재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부상자 수습 후 귀환하던 도중 4km가량 전방에서 적 선봉을 발견하였습니다.”
“전과는 어떻게 되는가?”
“적병 100여 명 전원 몰살했습니다. 포획한 말은 전부 키가 작고 속도가 느려 사살했으며, 그 외에 쓸 만한 전리품은 없었습니다. 적병 중 아무도 특별한 물건은 소지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럴 테지. 야만인들이 글을 쓸 줄 아는 것도 아니니 문서가 나올 일도 없고.”
“여기저기서 모여들고 있다더니 그쪽에서 먼저 본격적으로 공격을 해오려는 걸까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냥 손 놓고 있으면 우리가 본거지까지 밀고 들어갈 테니 맞서 싸우러 나올 수밖에요.”
“거참, 궁지에 몰아넣어야 우리로선 쉬워지는데 말입니다.”
지휘관들이 의견을 주고받는 동안 안젤리나는 조용히 성호를 그으며 목숨을 잃은 병사들에 대해 기도했다. 그러던 중 사령관이 그녀에게 말했다.
“성녀님, 이제 성녀님께서 나서실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야만인들의 본거지는 반나절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정찰병들의 보고를 따르면 5만여 명의 야만인 전사들이 모여 있다고 하며, 전사가 아닌 야만인들까지 합하면 20만 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용병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우리 형제님들은 2만 명이 조금 넘지 않나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오늘 아침에도 여러 명이 죽고 다쳤는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야만인들은 헐벗은데다 무기도 조악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병사들은 잘 훈련되어있고, 좋은 장비를 갖추었으며, 무엇보다 성녀님께서 함께 하시니 신의 가호가 강하게 있지 않겠습니까? 아침의 정찰병들은 성녀님과 떨어져 있었지만, 성녀님께서 함께하신다면 열 배의 적이라도 쉽사리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오며 잔혹한 광경을 수차례 목격해오면서, 그리고 그러한 장면을 스스로 손으로도 수없이 빚어오면서 현재의 지위에 오른 사령관으로서도, 신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는 안젤리나를 전장의 한가운데 두기에는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하기라도 하여 병사들의 정신이 흐트러진 사이에 원주민들이 접근하여 안젤리나에게 상처라도 입힌다면, 심지어는 안젤리나가 그들의 손에 순교하기라도 하면 그것은 사령관에게 뿐만이 아니라 제국과 교단에도 심대한 타격이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장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아무도 모르지만, 전쟁을 잘 모르는 신도들의 처지에서는 성녀인 안젤리나에게는 화살도 빗겨나가야 한다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안젤리나를 세우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안젤리나는 제국의 백성과 교단의 신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번 십자군 원정의 정당성을 나타내는 상징 그 자체이며,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나타내는 살아있는 증거였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이번 원정의 적은 악마의 화신인 드래곤과 그를 추종하는 원주민들이었기에, 자칫하면 병사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성녀님께서 전투에 나서는 병사들과 함께 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전력을 기울여 호위할 것이니 신변의 안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그러니 선봉에 나서셔서 적의 사악한 힘을 꺾고 병사들에게 사기를 불어넣어 주셔야 합니다.”
안젤리나는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니, 거절할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일평생 박애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고 살아온 그녀로서는 드래곤의 수하들과 전투를 벌일 형제들의 신변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저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께서 저와 함께하시니, 그 어떤 사악한 적이라도 저에게 해를 끼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령관은 자신의 전차를 안젤리나에게 양보했다. 안젤리나가 탄 전차는 성물로 꾸며졌고, 기도문을 적은 깃발들이 걸려 펄럭였다. 사령관은 그 옆에 자신의 말을 타고 섰고, 그 주위로 안젤리나를 마중하러 수도원에 찾아갔던 호위병들이 도열했다. 호위병들은 자신들이 들고 있는 할버드에 기도문이 빼곡히 적힌 깃발을 매달고 있었다. 호위병들뿐만이 아니었다. 소규모 부대의 기수까지 원래 자신이 들고 있는 깃발 아래에 기도문을 적은 천을 매어놓았다.
“보십시오. 성전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까? 신의 군대입니다. 이 당당한 위용을 보세요!”
수도사가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안젤리나에게 말했다. 그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다. 1만여 명의 머스킷 보병과 7천여 명의 창병, 3천여 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는, 평생 수도원에서 멀리 떨어져 본 적이 없던 안젤리나는 물론이거니와, 전장에 나서본 적 없던 수도사 역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신권과 세속권을 구분하라는 경전의 말에 따라 세속적 권력다툼의 상징인 국가 간의 전쟁에는 성직자가 관여해서도 안 되었고 관여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직자가 군대에 파견된 것은 300여 년 전에 있었던 십자군 전쟁 이후로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안젤리나는 수도사의 감탄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녀의 입이 다물어지게 했다. 안젤리나가 살면서 보아온 사람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번 원정에서 2만여 명과 함께 움직인다고는 하지만,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전차 위에서도 그 모습이 전부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다. 어느 높은 건물에 올라서서 본다면 모르겠으나, 평지에 도열한 사람들을 전부 둘러보며 수를 짐작하기에는 전차의 높이가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 멀리 떨어져서 능선을 따라 길게 늘어선 원주민들은 손쉽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안젤리나에게 두려움을 품게 하였다.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신의 군대가 함께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보십시오, 성녀님께서 어두운 표정을 하시니 모두 걱정이 큽니다.”
수도사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안젤리나가 돌아보자, 사령관을 비롯한 지휘관들이 전부 불편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안젤리나는 그들을 보며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었다.
“신의 자식들을 위한 성전입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요.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안젤리나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때, 원주민들 뒤로 검은 형태가 날아올랐다. 머리에 뿔이 솟아있고 커다란 날개를 어깨에 단 그것은 흡사 악마의 화신과 같았다. 아니, 안젤리나의 머릿속에 그려졌던 악마의 화신 그 자체였다.
“드래곤이다!”
여기저기서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자신들보다 몇 배는 많은 원주민을 보고서도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던 병사들의 얼굴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떠올랐다. 여기저기서 그 자리에 주저앉는 병사들이 속출했고, 호위병 중에서도 할버드를 늘어뜨리는 자들이 나왔다.
“어리석은 것들! 성녀님께서 함께하시는데 무슨 추태냐!”
사령관이 일갈하며 옆에 서 있던 나팔수의 나팔을 빼앗았다. 그리고 나팔을 크게 불었다. 그 소리에 가까이 있던 병사들이 정신을 차렸고, 나팔수들은 사령관을 따라 나팔을 불고, 고수들은 북을 두드렸다.
“우리는 신의 군대다! 성녀님이 함께 하시니 드래곤 따위 한낱 짐승에 불과하다! 전열을 정비하라!”
사령관의 말을 지휘관들이 복창하며 전 병력에 전파했고, 병사들인 이내 대열을 갖추어 적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때, 원주민들 사이에서 몇 기의 기병이 달려왔다.
“저들은 대체 뭐죠? 항복이라도 하려는 건가요?”
안젤리나의 말에 사령관이 답했다.
“야만인들은 전투를 벌이기 전에 사절을 보내는 풍습이 있습니다. 협상해서 얘기가 잘 풀리면 그대로 전사들을 해산하는 것이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수하들에게 나갈 채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협상이라뇨? 거기에 응하실 생각이신가요?”
“물론입니다. 저들이 사절을 보내오지 않았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우리가 선공할 시기는 놓친 지 오래고, 남은 건 야만인들과 회전을 벌이는 것뿐이죠. 그리고 야만인들은 그 절차에 따라서 저렇게 사람을 보내오고 있는 것이고요. 요즘 들어 야만인 토벌이 잦아지면서 불필요한 전투가 많이 벌어진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만인들이 제시하는 협정에 응하려고 하지도 않고 저들을 공격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넓은 아량을 베풀어 마지막 협상 정도는 해줘야 합니다.”
사령관은 참모 두 명과 통역관, 호위부대의 지휘관, 열 명의 호위병을 모아 협상단을 꾸려 앞으로 나섰다. 거기에는 정신적 구심점인 안젤리나 역시 포함되었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교단의 인물을 빼놓고 회담을 진행하였다고 문책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측의 협상단이 마주친 것은 양측에서 500m가량 떨어진 중간지점이었다. 회담은 양측이 10m가량 떨어진 곳에서 말에서 내린 채, 호위병을 남겨두고 걸어서 접근하여 이루어졌다. 십자군 측에서는 사령관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안젤리나가, 좌측에는 통역관이 섰다. 통역관이 말한 바로는 원주민 측에서는 대족장과 통역관이 나란히 서고, 그 뒤에는 여러 부족의 족장들이 섰다. 안젤리나가 원주민을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멀리서 봤을 때부터 그들의 거무스레한 피부를 본 안젤리나는 악마에 의한 타락으로 피부까지 물든 것에 적지 않게 놀라워했다. 성화를 통해 익히 보아왔던 악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회담의 시작은 대족장의 말이 그들의 통역관을 거쳐 전해지면서 시작되었다.
“어려운 시기에 환영하기 어려운 손님이 오셨군. 좋지 않은 일로 오셨으니 더더욱 반기기는 어렵겠구려.”
“환영받을 생각도 없고, 우리도 당신들을 환영할 생각이 없소. 우리는 손님이 아니라 성전을 위해 온 병사들이오.”
“성전이라,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우리네 전통에 따르면 크든 작든 싸움을 벌이기 전에 상대방에게 타협안을 제시할 기회를 준다오. 그리고 싸움을 피하고자 가급적이면 협상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지. 하지만 그대들이 여태껏 우리 사람들에게 제시했던 협상안이라는 건 매한가지였던 것으로 기억하오.”
‘협상안이라는 건 진실 된 믿음을 따르는 신실한 신자로 되돌아오라는 이야기였겠지.’
안젤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성전을 치르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원주민들이 악마의 속삭임에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저런 저주받은 피부를 가졌을 일도 없었을 테고, 그들이 선량한 신도들을 공격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십자군이 결성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여태까지 그들이 협상안을 제시받고도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저들이 신의 말씀을 따를 생각이 전혀 없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전투로 성스러운 전사들이 원주민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 새삼 떠올라, 안젤리나의 마음속에 원주민들에 대한 분노가 슬그머니 올라왔다.
“그랬지. 우리의 믿음을 따르고 우리의 황제 아래에 충성스런 백성으로 살라는 것이었지. 그렇게만 한다면 온갖 지원을 다 해주겠다고 하였소.”
“그것뿐만이 아니었을 것이오.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 중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경우가 많았지. 몇몇 부족들은 그대들의 그러한 제안을 긍정적으로 보아왔소. 그리고 몇몇 부족은 거기에 동의하기도 했었지. 하지만 그대들이 제안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지 않소.”
“물론이오. 당신들이 제국의 통치하에 들어온다면, 복종을 맹세한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야만 하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는 당신들이 다른 땅으로 이주하기를 바라고 계시지. 이건 제국의 원활한 통치 차원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오. 이 대륙은 아직도 미개척상태며, 시간이 지난다면 결국 모든 대륙이 황제 폐하의 통치하에 들어오게 될 것이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모든 곳에 제국의 손이 닿지 않으니, 복속을 약속하였다면 원활한 통치를 위해 더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여야 할 것 아니겠소? 그래야만 약속한 지원을 그대로 해줄 수 있을 것이고.”
“그래,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지. 예전에는 그대들의 그러한 제안까지도 수용하고자 했던 부족들이 있었소. 척박한 땅에서 사느라 당신들과 싸움을 할 여력도 없는데다, 먹고 살 좋은 땅을 마련해준다는 말에 혹한 사람들 말이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이미 우리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소. 이리저리 떠밀다가 원래 살던 곳보다 훨씬 살기 어려운 사막 같은 곳에 몰아넣었지. 게다가 그대들이 우리 사람들을 끌어낸 곳에서 무엇을 하는지도 잘 알고 있소. 통치하기 어렵다며, 도와주기 어렵다며 비워두라고 했던 그 땅에 그대들의 땅에서 온 사람들의 마을이 들어섰소. 나무는 베어지고 바위는 깨어졌으며, 강줄기는 탁해지고 동물들은 병들어갔지.”
대족장이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원하는 게 뭔지 다 알고 있소. 그대들의 기이한 행동은 이 땅에서 그대들이 처음 이 땅에 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널리 소문이 퍼져있었소. 강가에서 접시를 가지고 모래 장난을 하더니 강가의 바위를 깨부수고, 강의 근원까지 쫓아 올라가 땅을 파헤친다는 것 말이오. 비옥한 경작지를 파헤쳐서 흙을 부수고, 흙모래와 돌가루를 강으로 흘려보내 물을 탁하게 만들고, 나무를 베어다가 커다란 불을 피워 흙과 돌을 녹인다지. 그대들이 파헤친 땅에서는 다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고, 그대들이 동굴을 파놓은 산에서는 나무가 사라졌소. 그대들이 흐려놓은 강에서는 고기 한 마리 잡을 수가 없었지. 그것뿐만이 아니오. 강물을 마신 사람이나 동물들은 온몸이 마비되어 죽어가더군.”
사령관이 안젤리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건 땅을 정화하기 위한 작업이오. 비워두라고 경고한 땅에 접근하다니 어리석은 일이지. 당신들은 오랜 시간 동안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당신들이 접촉한 모든 것이 부정한 상태요. 게다가 저기.”
그는 저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드래곤을 가리켰다. 드래곤의 검은 가죽은 찬란하게 비치는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검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드래곤까지 섬기고 있으니 사악한 기운이 서릴 수밖에. 우리의 말을 믿으시오. 드래곤은 사악함의 화신이오. 지금은 당신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본성을 드러낼 거요. 당신들도 사람이니 짐승이 아니라 우리의 믿어야 할 것 아니겠소? 병이 생겼다는 자들은 삿된 것을 숭배하며 지내느라 땅에 배어 있다가 우리가 강물에 씻어 보낸 독기를 마셨기 때문이지 우리 때문이 아니오. 계속해서 그 땅에 산다면 언젠가는 당신들 전부 그렇게 죽어나갈 것이 뻔하지. 그렇기 때문에라도 당신들은 우리의 말에 따라 다른 곳으로 옮아갈 필요가 있소.”
대족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대들은 그 오염되었다는 땅에서 캐낸 독기의 정수를 애지중지하며 그대들의 땅으로 가져가더군. 금과 은을 캐기 위해 모든 걸 오염시킨 건 그대들이 아닌가? 솔직히 말해보시오. 그대들이 오늘 이렇게 몰려온 이유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땅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그대들의 말에 고분고분 따라 우리의 땅을 비워준다면, 그대들은 우리가 그대들의 신을 믿든 말든 상관하지도 않을 것이오. 이미 그대들의 말에 순응한 우리 사람들을 그대들이 같은 사람으로 보지도 않으니, 우리가 무엇을 믿은 그대들이 상관할 것이 아니지. 우리가 얌전히 물러난다면 그대들은 다른 곳에서와 똑같이 마을을 세우고 땅을 헤집고 산을 깨부술 것이 뻔히 보인다오. 이미 그대들의 땅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 땅에서 접시 장난을 하고 돌아간 것도 알고 있소.”
“우리의 말을 믿지 않겠다면 어쩔 수가 없지. 하여튼 말해보시오. 무슨 대가를 치르면 당신들이 그냥 물러날 것이오?”
“협상이라니, 말도 안 돼요!”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자, 안젤리나가 끼어들며 외쳤다.
“저들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신의 이름 아래에서 벌어지는 성스러운 전쟁을 저리 모욕하는데도 대가라니요? 우리가 왜 저들을 위해 대가를 치러야만 합니까? 저들의 손에 죽은 신의 자식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교섭 따윈 고려할 가치도 없습니다. 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저들이 개종하고 자신의 손으로 악마의 화신인 드래곤을 척살하는 것뿐입니다.”
갑작스러운 안젤리나의 말에 사령관은 당황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형식적인 대화는 끝나는 상황에서 원주민들이 숭배하는 드래곤을 직접 쳐 죽이라는 말을 그들의 대족장과 족장들의 면전에서 하였으니, 흥분한 원주민들이 돌발 행동을 하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협상을 위한 회담이라고는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었고, 그것은 단숨에 칼을 뽑아 누구 하나의 목숨을 거둬갈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는 원주민의 대족장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십자군 측의 통역관은 물론이거니와 원주민 측의 통역관도 선뜻 그녀의 말을 통역하지 못했다. 대족장은 ‘무슨 말이든 괜찮으니 그대로 통역하라.’고 그의 통역관에게 지시했고, 원주민 통역관이 하는 말을 들은 십자군의 통역관은 고개를 저었다. 사령관은 통역관을 몸짓과 표정이 굳어가는 족장들을 보고 안젤리나가 했던 말을 저들의 통역관이 그대로 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령관의 예상과는 달리, 대족장은 다시 한 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거참, 맹랑한 여자군. 우리의 손으로 드래곤을 죽이라고? 내가 그대들이 사는 방식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지만, 신이라는 것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긴다고 알고 있소. 우리에게 드래곤을 직접 죽이라고 하는 것은 그대들에게 신을 직접 죽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란 것을 알고 있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사람들은 모두 신의 피조물입니다. 사악한 길에 빠져 타락한 당신들이라도 근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신의 자손이라고요. 그런데 신을 저버리고 그 자리에 드래곤을 둔다고요? 신성모독입니다. 천벌이 내릴 거예요.”
안젤리나는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행동에 족장들이 움찔했지만, 안젤리나는 날붙이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여자였기에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안젤리나는 대족장의 손을 붙잡았다.
“제발 신의 길로 돌아오세요. 진심으로 참회한다면 신께서 그동안의 과오를 모두 용서하실 겁니다. 드래곤은 악마의 화신이에요. 드래곤을 숭배하는 건 지옥으로 떨어지는 지름길이라고요. 조금이라도 빨리 악마숭배를 그만두고 진실 된 길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안젤리나는 그렇게 말하며 대족장의 손을 바라봤다. 하지만 신의 은총을 받은 그녀가 대족장의 손을 잡았는데도, 대족장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피부색이 밝게 돌아오지도 않았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만나 왔던 그녀가 참회시킨 사람들과는 달랐다.
대신에 대족장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그대들이 하는 말은 모두 드래곤에게도 전달되었소. 드래곤은 귀가 아주 좋지. 우리가 하는 말을 모두 듣고 있소.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지는군.”
이어지는 대족장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드래곤이 진짜 악마라면, 악마의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위험하지 않겠소?”
하지만 안젤리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드래곤을 부를 테면 불러보시죠. 신의 가호를 받는 저에게는 손끝 하나 댈 수 없을 것입니다.”
“마침 잘 되었소. 우리는 이번 싸움을 다시는 있기 어려울 커다란 싸움이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싸울지 말지는 결국 드래곤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었지. 그래서 이야기를 하면서 언제 이 이야기를 해야 되나 싶었는데 잘 되었구려. 드래곤이 이 회담에 참여해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당신들이 믿는 드래곤의 허상을 제가 낱낱이 드러내 보이겠습니다.”
사령관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 자리에서 안젤리나를 제지하면 원정에서 승리하고 돌아가더라도 교단 측으로부터 문책을 받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드래곤을 가까이 접근시킨다면, 자신의 동생처럼 이 자리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드래곤을 부르시오. 대신 우리 측의 호위병을 더 많이 불러야 하겠소. 아무래도 드래곤이 힘을 쓰면 우리로서는 대책이 없으니까.”
대족장은 그리하라며 사령관의 말에 동의했다.
곧 양측으로 기병이 달려갔다. 원주민 측에서는 집채만 한 드래곤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 회담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걸어갔다. 사령관은 드래곤이 자신이 보아왔던 다른 어떤 짐승과도 같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드래곤의 겉모습은 코끼리만큼 거대한 도마뱀 또는 악어와도 같았다. 하지만 저것은 악어라기보다는 마치 범이나 사자처럼 품위 있는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가벼운 듯한 발걸음 아래에 이는 먼지 구름은 드래곤이 절대 가볍지 않다는 것을 나타냈다. 거기에 대항하듯 십자군에서는 1백여 명의 기병이 달려나왔다. 그들은 드래곤에게 뒤지지 않도록 부리나케 회담장소로 달려갔다. 먼저 합류해있던 호위병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래지 않아, 회담의 양상은 변하였다. 이전에는 대족장과 사령관의 대화였다면, 이제는 드래곤과 안젤리나의 대화였다. 십자군 병사들은 가녀린 여자가 드래곤에 맞서서 서 있다는 사실에 불안함과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과연 자신들이 믿는 성녀라 드래곤에게 당당히 맞서고 있다는 자긍심을 함께 품으며 깃발을 흔들고 나팔을 불어댔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드래곤이 나선 다음에도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이야기는 전부 들었다.”
검은 드래곤이 입을 열자 짐승의 냄새가 풍겼다. 특히 드래곤의 앞에 마주 선 안젤리나는 드래곤의 더운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흡사 지옥의 마수가 토해내는 불결한 입김과도 같았다. 안젤리나는 저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
“너희가 쉽게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쪽에서도 땅에서 쉽게 물러날 수는 없지. 그래서 이번 협의는 신중하게 진행할 생각이다. 우리에게 이 땅은 거룩한 곳이다. 한 때는 우리가 이 땅을 가득 메우고 살았었지. 이 구릿빛으로 빛나는 피부를 가진 인간들과 나의 일족이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지나갔다. 자연의 주기에 따라 쇠락의 때를 맞이한 것도 아니고, 우리 자신의 손으로 우리를 파멸로 이끈 것도 아니다. 이것은 너희 하얀 피부의 인간들이 재촉한 일이나, 이것을 지금 와서 책망할 생각도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남은 우리에게 너희가 무엇을 할 것인가, 너희가 과연 우리를 이 땅에서 떠나도록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령관이 나섰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최대한의 보장을 해줄 것이오. 당신들 무리 가운데서도 빈번히 분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 우리는 우리에게 협력하는 부족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소. 우리의 군대는 당신들보다 수가 적지만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소. 우리에게 땅을 넘기기만 한다면, 그리고 그대 드래곤이 우리 모르는 곳으로 떠나기만 한다면 우리는 당신들에게 안전한 정착지를 제공할 것이오.”
“흔들리면 안 됩니다, 형제님.”
안젤리나가 다시 나섰다. 그녀는 드래곤의 위협에 눌려 원주민들에게 굴복하려 하는 사령관을 질책하는 표정으로 그를 제지했다.
“이 땅에 대한 모든 권한은 우리의 신에게 있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한 우리의 신에게 정당한 권한이 없다면 대체 어느 누가 이 세상 모든 땅에 대한 권한을 갖는단 말입니까? 우리는 신의 아이들입니다. 신의 의지가 우리와 함께하고, 그분의 가호가 우리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야만인과 그의 사악한 우두머리가 함부로 영유권을 주장할 것이 아닙니다.”
“호오, 신기한 관점을 가지고 있군. 대대손손 여기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죽어온 우리가 아니면 이 땅에서 살 권한이 누구에게 있다는 말인가? 그 신이라는 존재는 내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으며 그것이 나에게 이 땅의 권한을 행사한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한데 도도히 흐르는 강물, 영겁의 세월을 버텨온 산의 곳곳에 우리 조상의 얼이 서려 있는 이 땅에서 우리가 살 권리가 없다는 말인가?”
“물론입니다. 당신들이 이 땅에서 계속 살아왔으니 당신들의 땅이라니요? 신께서는 우리에게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정복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5천여 년 전부터 이미 있었던 말씀입니다. 당신들이 이 땅에 살게 된 것은 아무리 오래 잡아도 전 세계가 대홍수에 휩쓸렸던 일 이후일 것인데, 당신들이 감히 신께서 언명하신 바를 무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5천여 년이라…….”
드래곤이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나는 너희의 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매번 너희가 그 신의 이름을 내세우며 우리에게 해왔던 일을 생각해보면, 적어도 이것만은 알 수가 있다. 너희의 신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애정 어린 손길로 너희를 이끌어 주었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매몰찬 시선만을 보내올 뿐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너희 신의 피조물이라면 나와 이 사람들 또한 너희와 동일하게 너희 신의 피조물일 것이다. 하지만 너희 신의 사랑은 우리에게 와 닿지 않았고, 오히려 너희에게 우리의 피를 흘리도록 하고 있다.”
“그건 당신들이 악마의 하수인이기 때문입니다! 악마의 화신인 당신뿐만이 아니라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모두 신을 배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의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너희의 신을 배반하지 않았다. 오로지 너희만이 신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받았을 뿐, 우리는 신에게 버림받고 방치되어왔다. 이 사람들이 그 악마라는 것을 숭배한다고 하였으나, 이 사람들은 무언가를 숭배해본 적이 없다. 아니, 숭배라는 말 자체가 너희로부터 온 낯선 단어에 불과하다. 너희는 이들이 나를 숭배한다고 하지만, 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며 서로 돕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너희는 어떠한 근거도 없이 나를 악마라고 부르며, 나와 함께하는 이들을 적대하는구나.”
“간사한 혓바닥을 함부로 놀리지 마십시오. 악마가 스스로 자신이 악마라고 밝히는 법은 없습니다. 이곳 사람들도 당신 같은 드래곤의 간교에 넘어가서 신앙을 잃고 타락하게 되었을 게 뻔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들이 신을 숭배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당신이 악마의 화신이라는 것은 우리의 경전에 명백히 적혀있습니다.”
“너희의 신이 있는지 없는지, 너의 주장이 맞는지 틀린 지 증명할 방법은 내게 없다. 하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가 있지.”
드래곤이 그리 말하며 대족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드래곤의 머리가 자신에게서 멀어지자 안젤리나는 잠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신의 가호를 굳게 믿는 그녀였지만, 역시 악마의 화신인 드래곤이 그녀의 코앞에 머리를 마주하고 있는 것은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족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시 그녀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우리가 이 땅에서 떠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면서, 그대들의 말이 우리에게 그다지 믿어지지 않은 이야기라는 증거가 있소. 우리의 영산에는 수많은 세월 동안 우리의 선조의 거룩한 유골이 남아 있소. 이 땅은 단순히 살아가기 위한 땅일 뿐만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는 우리 조상의 넋이 남아 맴도는 곳이오. 우리는 바로 이 땅에서 살아 숨 쉬면서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소. 우리가 이 땅을 떠나게 된다면 우리의 영혼은 죽어버릴 것이고, 우리의 앞에는 부평초처럼 뿌리 없이 떠도는 삶만이 남게 될 것이오. 우리 땅에 묻혀있는 드래곤만 하더라도 30여 구가 족히 넘으며, 사람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소. 그들 모두를 저버리고 우리가 떠날 수는 없는 일이오. 제아무리 그대들이 우리에게 안전과 나은 삶을 보장해준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을 그대들이 지킨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죽어버리기 때문이오.”
“참고로 드래곤의 수명은 5백여 년에 달하지. 지금 이 땅에서 세월의 흔적에 뒤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된 무덤을 제외하더라도, 가장 오래된 드래곤의 무덤은 7천 번의 봄과 7천 번의 가을을 맞이했다. 그러한데 너는 5천여 년 전의 일을 거론하니, 무엇을 믿어야 할지 의심스럽군.”
“말도 안 됩니다!”
안젤리나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7천 년 된 무덤이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지 않습니까. 거짓말에 불과하다고요. 아무리 당신이 부정하더라도 신의 말씀은 진리고 당신은 사악한 드래곤에 불과합니다. 제발 신을 믿고 타락에서 벗어나세요.”
대족장이 말했다.
“이전에 만났던 그대들의 사람들은 ‘드래곤은 상상의 산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 존재했다니!’라고 하더군. 그대들 중에서도 그대들의 신의 말씀이란 것을 굳게 믿지 않는 사람이 적어도 몇 명은 존재하는 것 같았소. 우리도 실제로 신을 보기 전까지는 그대들이 뭐라고 하든 우리는 우리의 기준대로 믿을 수밖에 없소. 그리고 그대들의 신이 정말 존재하고, 우리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이곳에 조상의 얼이 깃들어있는 것은 변함이 없소. 우리는 절대 물러날 수 없소.”
“이까짓 드래곤의 농간에 놀아나지 마세요!”
그 말과 함께 일어난 사건으로, 안젤리나가 한 행위를 본 모든 존재는 마치 잠시나마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이 그대로 멈추어 서서 드래곤을 바라봤다. 안젤리나는 품에서 병을 꺼내어, 그 안에 든 성수를 드래곤의 얼굴에 뿌려버렸다. 아무리 혓바닥을 잘 놀리는 악마라고 하더라도 성수 앞에서 그 모습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었고, 그래야만 할 것이라고 안젤리나는 생각했다.
“이건…….”
드래곤 역시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당황한 듯이 커다란 눈을 껌뻑거리며 안젤리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앞발을 들어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드래곤은 앞발에 묻은 성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그 물기를 털어냈다.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지. 너희 신의 은총이 담긴 성수라는 것이라더군. 만약에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너희의 신과는 다를지도 모르겠군. 적어도 너를 돕고자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드래곤의 그 말과 함께, 안젤리나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급히 호위병들이 그녀를 부축했지만, 그녀는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내가 앞서 말하면서 협의를 신중하게 진행해야 하겠다고 하였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생각을 굽힐 생각은 없다. 만약 너희가 이 땅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환영한다. 우리의 땅은 우리의 물건이 아니며, 너희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넓다. 하지만 우리에게서 이 땅을 빼앗고 우리를 내쫓고자 한다면, 적어도 이것을 되새기며 생각을 바꾸기를 기대한다. 모든 언덕, 모든 계곡, 모든 벌판에 우리의 아련한 과거의 추억이 남아있다. 너희가 지금 딛고 있는 그 땅도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우리의 조상과 함께하였던 거룩한 땅이다.”
드래곤은 거대한 몸을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십자군 측 사람들에게 가해지던 압박감은 많이 줄어들었다. 원주민들은 모두 말에 올라타 자신들의 본진으로 돌아갔다. 그와 함께 드래곤도 서쪽을 향해, 원주민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부디 나중에라도 우리에게 공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주기를…….”

“저들이 우리의 말을 들어주겠습니까?”
대족장의 말에 드래곤이 웃었다.
“그러기를 바랐다면 왜 그리 날카롭게 쏘아붙였느냐?”
“그건 드래곤께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드래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피부가 하얀 사람들도 자신들처럼 말에 올라 돌아가고 있었다. 주저앉았던 여자는 아직도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돌아가자마자 싸움을 준비해라. 이번 싸움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어떻게 답을 할지는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저들 부족의 모든 의지를 대신하여 결정할 수는 없을 것인데, 그러자면 저들의 대족장이 기다리는 곳으로 일단 사람을 보내거나 해야 될 테고 말입니다.”
“너는 저들이 우리의 말을 조금이라도 고려할 것으로 생각하느냐?”
“솔직히 조금 기대는 하고 있습니다.”
“기대를 버려라. 저들은 오로지 금과 은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우리 조상의 넋이 어찌 되었든 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의 영산을 헤집을 것이다. 그 전에 이 들판이 우리의 피로 물들겠지만…….”
드래곤과 대족장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족장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앞을 바라보고 걸을 뿐이었다.
“이번 싸움에서 패한다면 우리는 더는 전사들을 이렇게 모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 전사들이 용맹하게 싸울수록 저들의 우리에 대한 분노는 거세질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아이들에게 더욱 커다란 고통을 줄 것이다. 싸움이 끝나고 흥분한 저들의 전사들은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을 약탈할 것이고, 우리의 아이들은 패배의 혼란 속에서 저들의 화난 총을 피해 달아나야만 할 것이다. 너는 돌아가자마자 전사들을 제외한 모두를 머나먼 곳으로 대피시켜야 한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대족장이 웃어 보였다.
“젊은 사람이 살아야지요. 저의 아들을 보내겠습니다. 그들을 지킬 전사들도 떼어야겠죠.”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죽어야지. 먼 훗날 저 피부가 하얀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들의 욕심 때문에 죽여야 했던 수많은 사람의 넋에 억눌려 숨도 쉬지 못할 정도의 죄책감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이 싸움은 우리와 저들의 가장 큰 싸움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저들은 우리의 후손들에게 우리의 넋이 더해진 이 땅을 돌려줄 것이다.”

회담이 이루어진 날 정오 무렵, 십자군 병사들은 원주민들을 향해 진군하였다. 전투의 결과는 이미 예정되어있었다.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활은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단순하고 작은 크기로 만들어졌기에, 본토에서 전쟁에 사용해왔던 것에 비하면 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의 활의 사정거리는 십자군의 머스킷 사정거리와 비슷한 정도였고, 머스킷 보병들은 창병들의 보호를 받으며 3열로 늘어서서 총탄을 쏴댔다. 원주민들의 기병은 판금으로 이루어진 갑옷을 입은 십자군 기병들에게 상대되지 않았고, 십자군 기병은 이내 원주민들의 보병을 덮쳤다. 그러는 와중에 십자군 기병들은 무수히 화살을 맞았지만, 그들의 화살은 기병의 갑옷을 꿰뚫지 못했다. 사령관은 그 광경을 보며, 이번 전투를 위해 본토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는 판금 갑옷들을 수거해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곧 사령관이 앞으로 식민지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병력이었다. 최대한 살릴 필요가 있었다.
이따금 위험한 순간이 찾아오기는 했었다. 적들의 기병이 머스킷 보병과 창병들의 뒤로 돌진해오는 것을 허용해버린 순간도 찾아왔고, 막바지에는 원주민 전사들과의 근접전이 벌어지면서 창병들이 희생되었다. 더군다나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커다란 변수였다.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저런 존재와의 전투에 대한 교범이 작성된 적이 없었다. 과거의 성인들이 기도만으로 드래곤을 쫓아내었다거나, 신의 은총을 받은 위대한 기사가 드래곤을 창으로 꿰뚫어 죽였다는 기록은 많았지만, 그들이 드래곤과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드래곤은 하늘로 날아올라 십자군의 기병들을 덮치거나, 머스킷 보병들 사이로 내려앉아 꼬리와 발톱을 휘두르며 병사들을 헤집어놓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십자군은 완전히 승리하였으며, 살아서 도망친 적병의 수는 불과 수천에 지나지 않았다. 드래곤도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자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격렬히 저항하다가 결국 병사들이 던진 올가미에 묶여 땅바닥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사령관은 드래곤의 위로 기어 올라가, 교황청에서 하사받은 검으로 직접 드래곤의 심장을 꿰뚫었다.
전투가 시작될 무렵 정신을 수습한 안젤리나는, 우선 전투에서 병사들이 최대한 많이 살아남도록 기도를 올렸다. 사악한 드래곤이 활발히 움직이며 병사들을 낚아채거나 공중으로 던져버릴 때마다 안젤리나의 기도는 간절해졌다. 하지만 이전만큼 절실한 기도를 올리지는 못했다. 그녀 자신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드래곤은 성수에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일까?
구마의식에서 성수는 빠지지 않고 사용되었다. 그녀 자신도 몇 차례 구마의식을 하면서 성수를 사용해왔었다. 그때마다 성수는 삿된 것을 쫓는데 효력이 나타났으며, 그나마 쉽게 접할 수 있는 신의 은총이자 기적이 성수였다.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 자도 아닌, 성녀로 추대된 안젤리나 자신이 직접 악마의 화신인 드래곤에게 성수를 뿌렸는데도, 드래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것을 털어버렸다.
게다가 그 이전에 원주민의 대족장의 손을 붙잡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을 때도, 대족장은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그녀가 접해온 악령 들린 사람이나 악마에 의해 타락한 사람들은 그녀가 접근하기만 해도 괴로워했었다. 하지만 대족장이나 다른 원주민들은 그녀를 코앞에 두고도, 심지어는 직접 접촉을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드래곤이나 대족장이 했던 말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경전의 문구를 왜곡하여 잘못된 가르침을 펴는 경우도 많은데, 겨우 그 정도 말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할지언정 그녀의 믿음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와 성수를 뒤집어쓰고도 태연히 성수를 털어내던 드래곤의 모습은 그녀의 믿음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드래곤은 분명 사악한 존재인데 왜 성수에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성수가 효력이 없었나? 아니면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가?
안젤리나의 고뇌는 수도원으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안젤리나는 수도원에 도착하자마자 수도원장에게 달려갔다.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며 수도원장에게 매달리자, 수도원장은 조용히 그녀를 다독였다.
“안젤리나님, 그 정도로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신께서는 분명히 안젤리나님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안젤리나님의 푸른 눈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드래곤과 마주하고도 멀쩡히 돌아오신 것만 해도 신께서 안젤리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보호해주신 것입니다.”
“대체 왜 드래곤에게 성수가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 거죠? 다른 건 두렵지 않지만, 제가 잘못된 길에 접어든 것이 아닐지 두려워 잠도 제대로 못 이루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안젤리나님은 신의 선택을 받았지만,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겼을 뿐입니다. 옛 성인들은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기도만으로 드래곤을 물리쳤다고 하시지만, 그분들은 안젤리나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을 겪고, 그만큼 강한 신앙심을 갖추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성인으로 추대되고 드래곤을 퇴치하셨을 때는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신을 모셔오며 그만큼 커다란 신의 은총을 몸에 받으셨을 때였지요. 하지만 안젤리나님은 태어나셨을 때부터 신의 은총을 받으셨으나, 아직 젊다 못해 어린 나이시지요. 이렇다 할 고난을 겪으신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안젤리나님께 성령이 충만한 것은 이미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수도원장은 안젤리나의 앞에 무릎 꿇고,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기도를 올렸다.
“안젤리나님께서 그토록 사악함이 충만한 존재들과 만나셨으면서도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신 것만으로 다행입니다. 드래곤이 멀쩡했던 건 오래도록 사악함이 서려 있어 안젤리나님께 닿는 신의 은총마저 조금 옅어졌기에 드래곤이 그렇게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일 테지요. 하지만 안젤리나님은 훌륭하게 십자군에 참가한 신도들의 영혼을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기도합시다. 다시는 그러한 악이 이 땅에 출현하지 않도록…….”
안젤리나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전과는 다른 의미의 눈물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충실하게 신을 섬기기 위해 노력하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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