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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기사도

2013.01.01 18:1601.01

시리도록 하얀 달빛이 들판을 적시고 있었다. 천사의 광휘가 감싼 듯한 성스러운 광경에 걷던 걸음이 자연스레 멈춰버렸다. 타락한 몸을 달빛으로 씻겨내기라도 하듯 팔을 벌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를 용서하시옵소서. 약한 자의 피와 눈물로 취한 이 몸을 정화하여 주시옵소서."

평생을 살며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신에게 조심스레 빌어보았다. 문득 이 들판이 어떤 들판인지 기억이 나자, 실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피로 적신 이 땅에서 내가 신을 찾다니."

그 한 번의 실소로 인해 터져버린 그 날의 기억이 걷잡을 수 없이 내 눈 앞에 한 장면, 한 장면씩 흘러지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영광스런 기사였다. 귀족들을 섬기는 어설픈 기사가 아닌, 왕국에 속해 위대하신 국왕 폐하께 충성을 다 하는 이 왕국에서 손꼽히는 기사였다. 약한 자를 지키며, 왕국에 충성을 다 하는, 기사도를 목숨과 같이 생각하는 어릴 적부터 꿈꿔오던 그런 멋진 기사. 적어도 나는 그렇게 되고 싶었다.

하지만 국왕 폐하 앞에서 기사의 명을 받고, 보게 된 현실은 어릴 적부터 배워왔고 꿈꿨던 기사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사는 꼭두각시와 다를 것이 없었다. 왕이 시키면 그것이 정당하던 정당하지 않던 따라야했다. 그 누구도 왕의 부당한 명에 항의를 하지 않았다. 좀 더 왕의 눈에 띄기 위해, 좀 더 많은 부를 위해, 혹은 자신들의 쾌감을 위해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부당한 일을 앞장 서 해왔다. 내가 본 왕국기사단의 단상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나와 똑같은 꿈을 꾸며 들어온 동기들은 대부분이 오래 버티지 못 하고 기사단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꿋꿋하게 버텨냈다. 이 더러움을 이겨내고, 더 노력하여 기사단장이 되어 이 기사단을 바꾸리라. 나는 포기하지 않고 참고 또 견뎌내었다. 결국 '기사단장'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더러운 돈과 가문의 힘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을 누르고 순수한 내 일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인정받아 오를 수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한 일은 기사단의 재정비였다. 기사로서 타락한 이들을 내쳤다. 아니 내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곧 귀족들의 압박이 들어왔다. 물론 귀족들의 압박정도로 포기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귀족들의 압박이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왕명이 내려온 것이었다.

[그들의 자식을 입단시키게나. 그렇지 않으면 자네를 쫓아낼 수밖에 없네.]

대략적인 내용은 위와 같았다. 난 불쾌함을 삭히며 그들을 기사단에 입단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기사단장이라는 자리를 유지해야, 이 기사단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으로 분노를 마음 속 깊숙이 눌러 담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비슷한 일들은 계속 되었다. 그리고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눌러 담았다. 결국 나도 전의 기사단장과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더러운 일을 행하고 다니는 기사들을 보고도 못 본 척 해야 했으며, 실력보단 가문을 우선적으로 보고 뽑아야했다.

난 이것을 깨달았을 무렵에 기사단장을 그만뒀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 했다.

죄책감마저 희미해져갈 무렵, 나라에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이 왜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나의 '왕'께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이었다. 오래만 에 기사다운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때보다 열심히 기사단을 이끌었다. 반란군들이 필사적이라 생포하는 것이 힘들었고, 나도 생포하기 보다는 한 명이라도 더 죽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찮게 반란군 중 한 명을 포로로 잡게 되었다. 반란군의 전략가로 있는 놈인 듯 했다. 어느 정도 배운 놈일 것 이었다. 오로지 조국에 충성을 다 한다는 마음으로 배우고 무예를 익혀온 나로서는, 나와 같은 배운 놈이 반란을 돕다니,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절차상 심문을 해야 하는 것도 있었고, 이 잡힌 포로에게 호기심이 가기도 하여, 직접 심문을 하기로 했다. 부하 녀석이 심문준비가 끝났다고 보고를 해왔다. 그의 안내를 받아, 심문을 할 고문방에 들어가 보니 두 손이 묶인 채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묻는 질문에 제대로 답만 해준다면 쉽게 끝날 것이다."

"더러운 국왕의 개놈이로군."

포로는 잡혀있는 상태에서도 당당했다. 그런 점들이 오히려 신경에 거슬려 참을 수가 없었다. 화로에 달궈진 쇠막대기를 들고 그 놈의 배를 향해 휘둘렀다.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가죽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포로는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묻는 말에만 답한다면 쉽게 끝날 거라고 했다."

"질문이나 하시지."

말투는 여전히 거슬렸지만, 좀 고분해진 것 같아, 바로 질문으로 넘어갔다.

"왜 반란을 일으킨 것이냐?"

나의 질문에 그 녀석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반문을 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우리를 죽여 왔던 것이냐?"

"다시 묻겠다. 왜 반란을 한 것이냐?"

달궈진 쇠막대기를 들어 올리며 다시 물었다.

"왕이 왕답질 못 하고, 귀족이 귀족답지 못 하니, 우리들이 살기가 힘들어 살 길을 뚫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내가 이 자에게 들어야하는 말은 이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 말은 묘하게 귀에 울렸다. 애써 잊으며 쇠막대기를 다시 한 번 휘둘렀다. 포로의 입에서 고통에 겨운 거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시 묻겠다. 누가 반란을 주도했지?"

"너희의 왕과 귀족이 우리를 반란하게끔 했다!"

단순히 휘둘러서는 안 될 먹을 녀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어느 정도 식어버린 쇠막대기를 다시 화로에 집어넣고 잔뜩 달궈진 인두를 꺼내들어 그 녀석의 배를 지졌다.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가 코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소름끼치는 고통의 외침이 고문실 안에서 울려 퍼졌다.

"너희 국왕과 귀족의 개놈들이 무엇을 아느냐! 기사도를 져버리고 달콤한 권력에 빠져버린 네 놈들이 무엇을 아느냔 말이다! 우리들에게 약탈해간 재물로 너희들의 더러운 배를 채우니 좋더냐! 너희들은 우리들의 억울함을 아느냐! 우리들은 죽더라도 원령이 되어 너희들을 저주할 것이다!"

인두를 잠시 때자, 그 녀석이 마치 악마와 같은 붉은 눈자위를 드러내며 나에게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 할 말들이었다.

"저주할 것이다. 신이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신이시여, 이 자들을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이 한 영혼을 바치나니, 이 자들을 저와 같이 지옥으로 인도하소서! 또한 이 자들의 저와 같이 절대 편히 죽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이시여. 저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주시옵소서!"

광기에 찬 외침과 기도에 나는 공포를 느꼈다.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 원한이 얼마나 큰지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 인두를 가져다 댈 용기가 없었다. 그는 반항할 힘도 없는 지식인이었고, 현재 묶여있는 상태였지만, 오히려 내가 고양이 앞의 쥐 마냥 꼼짝할 수도 없었다. 저주에 찬 기도가 끝나자, 포로의 입 사이로 붉은 선혈이 한 줄 흘러내렸다. 부하 녀석에게 뒤처리를 맡긴 후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천막 밖으로 나왔다. 포로의 말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요동을 쳤다.

애써 잊으려 애를 쓰며, 반란을 잠재웠다. 결국 내가 직접 심문한 포로는 그 한 녀석이 다였다.

그 뒤로 개인적으로 반란에 대해 조사해보니,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난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은 약자였다. 권력자들로 인하여 상처받고, 반란으로 내몰린, 그리고 나는 그들을 지켜야하는 기사였다. 하지만 난 그들에게서 약탈한 재물로 월급을 받고, 기사단을 유지한 권력자에 불과했다. 결국엔 그들의 피와 눈물로 배를 채우고, 그들의 피와 눈물에 젖어가며, 그들을 죽이며 기뻐한 살인마였다. 나는 기사가 아니었다.

그 뒤로 나는 스스로 기사단장에서 내려와, 용서받지 못 할 테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스스로 내 죄를 씻어내기 위해, 조금이라도 그들이 사는데 보탬을 주기 위해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기적이라고 욕을 해도 좋았다. 나 스스로도 이런 내가 이기적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내 삶이 끝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기사에 가까운 삶을 살고 싶었다. 약자를 돕고 진정으로 나라를 위한 길을 걷고 싶었다.  

지금 내가 지나가는 들판은 반란군들과 마지막 전쟁을 벌인 들판이었다. 말이 전쟁이지 힘이 없는 그들은 우리 왕국 정규군을 이길 수 없었고, 실제로는 결국 학살에 지나지 않았다. 그 전쟁으로부터 이미 한 달여가 지나있어, 시체는 전부 치워져있었고 피 냄새도 이미 바람에 다 날아가버린 뒤였다. 지옥도처럼 처참했던 장면은 사라지고, 오히려 성스러운 장소가 되었다.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듯 은은히 빛나는 달빛 사이로 이 타락한 몸이 지나가는 것에, 그들에게 너무나도 큰 죄책감이 들었다.

이 곳에서 내가 용서를 빌다니, 나는 그래선 안 되었다. 나는….

"아닙니다. 신이시여, 저를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저를 절대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나를 지옥으로 인도하시옵소서. 약한 자의 피와 눈물에 취한 이 영혼에게 영원한 고통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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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도문은 의적 '가르시엔 드 골딩'이 항상 외던 기도문으로 유명하다. 원래 왕국기사단의 기사단장 이었던 그는 자신이 해왔던 일을 평생 스스로 용서하지 못 했다고 전해진다. 의적활동 10여 년 동안 그는 귀족들에게서 재물을 훔쳐내 서민들에게 베풀었으며, 그들이 재물을 다시금 빼앗는다면 다시 찾아가 기어코 그 귀족의 목을 베었다. 그가 활동하는 동안에는 귀족들은 목숨이 아까워 국민들의 재물을 함부로 약탈하지 못 했다. 결국 어느 한 영지에서 재물을 훔치던 중 잡혀, 수도의 처형대에서 공개적으로 사형을 받았다고 한다. 아래는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이다.

"드디어 내가 지옥으로 가는구려. 지옥의 악마들이여. 나에게 영원한 고통을…"


[코신왕국의 숨겨진 역사 2권(역사학자 포르나드 첸타 저) 中 '의적 가르시엔 드 골딩에 대한 고찰' 일부 발췌.(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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