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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약한자들의 저항법

2012.12.02 19:2412.02

*약간의 폭력적인 장면과 선정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약한자들의 저항법>

  1
  훗날 왕이라 불리우게 될 그 남자는 사랑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대신 몇 그램의 세포조각과, 정교하게 고안된 유전정보를 담은 화학물질, 고배율의 광학 현미경, 건강한 자궁, 과학자의 손재주 같은 것들로 조합되었다. 그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한 여인의 뱃속에 착상되었다.
  "궁금하군요. 희망이 안에서 자라는 기분이라는 거."
  수영은 산모와 침대에 누워, 그녀의 불룩 튀어나온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부러워요?"
  산모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남자는 생명을 잉태할 수 없으니까. 가지지 못한 것들에는 언제나 질투가 나는 법이지요."
  "그렇담 수영씨는 질투가 많은 사람이겠네요."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산모는 쪽, 수영의 뺨에 키스를 한 뒤 까르르 하고 웃었다. 그러다 문득, 조용해지며 시선을 옆으로 미끄러뜨렸다.
  "아, 방금 움직였어요. 내 생각엔 발로 찬 거 같애."
  "그건 미주씨의 오랜 경력을 바탕으로 한 추측입니까?"
  "후훗, 그냥 느낌이에요. 경력은 무슨…"
  그녀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래서 수영씨, 이번엔 어떤 아이인가요? 슬슬 이야기 해 줄 때도 되었잖아요?"
  "음… 구세주라고나 할까요?"
  "구세주?"
  "계획대로만 된다면, 이번에야 말로 인류는 다시 자유를 찾을 수 있을겁니다."
  "돔 바깥으로 나간다고요?"
  "아마 그 이상일 겁니다."
  산모는 수줍은 표정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조그맣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성모 마리아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네요."
  "틀린 말은 아니지요. 혼자서 아이를 가졌으니까."
  "어머. 그러는 그쪽은 하느님이네요. 구세주를 창조했으니까."
  그녀는 수영을 세게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따스함을 느끼며 깊이 잠이 들었다. 미주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예정에 없던 진통이 시작되었다.
  며칠 뒤 아이가 태어났다. 이른 시기에 산모의 배를 가르고 태어난 아이는 곧바로 인큐베이터로 옮겨졌다. 아이의 이름은 산모가 원하는 대로 '예수'라고 지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의 얼굴조차 한번 볼 수 없었다. 계약이 그러했으니까. 연구소와 체결한 비밀유지 서약에 따르면 그녀는 거액의 보상금을 받는 대신 아이에 대한 한 톨의 정보도 가져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를 가지지 못했다.
  몇 주 후 예수는 성장을 온전히 마치고 처음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매끈한 적갈색의 피부. 놀라우리만치 맑게 빛나는 옥색의 눈동자. 은빛 머릿결과 여섯 개의 손가락만큼이나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는 결코 울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조리한 세상에 태어나 겁에 질린 채 으앙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아이는 입을 꾹 다물고 침착하게 슥 눈동자를 굴리곤 무심한 듯 눈을 감았다.
  첫 6개월간은 각종 검사의 연속이었다. 전자기기 회사의 시제품이라도 되는 것  처럼, 예수는 보모의 품에 안겨 이리 저리 옮겨다녔다. 헤아릴 수도 없는 수의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아기는 자신의 품질을 평가당했다. 소위 전문가라는 이들은 이 아이의 세포가 이렇다. 유전자가 저렇다. 운동성이 어떻네 반응성이 어떻네 신나게 떠들고 펜을 휘갈겨댔다.
  아이의 몸속에 새겨진 유전자는 그의 육체가 급속도로 자라도록 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담당 보모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키와 체중을 새로 재어야 할 정도였다. 심한 날에는 하루에도 몇 센티미터씩 자라곤 했기 때문이었다.
  소위 '담당자'들의 보고서가 바닥에서 1미터쯤 쌓일 무렵에야 아이는 검은 선글라스를 낀 남자의 손을 잡고 다시 수영의 품으로 돌아왔다. 수영에게 돌아온 아이는 이미 아기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가 말했다.
  "많이 컸구나 벌써 세 살은 되어보이는데."
  "당신은 누구죠?"
  "나는 네 아버지란다."
  "아버지?"
  "너를 만든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벌써 말을 깨우치다니! 아직 아무 특별한 교육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는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특출난 지적능력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수영은 아이를 데려가 꼼꼼하게 몸을 씻기고 새 티셔츠를 입혀주었다. 티셔츠는 아이에게 너무 커서 무릎 아래까지 늘어져내린 끝단이 자꾸만 발에 밟혔다.
  "넌 빨리 자라니까 금방 몸에 맞게 될 거다."
  수영은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옷은 아무래도 좋아요.’ 라고 말하려는 것만 같이, 아이는 무표정으로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푹 자거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눈을 감았다. 수영은 벽에 붙은 버튼을 눌러 불을 끄고 방을 나섰다. 문을 닫고 나가기 직전 그가 말했다.
  "너는 인류에게 자유의 등불이 될 거다. 우리에게 너는 희망이란다."
  문이 닫히자마자 아이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말똥말똥한 두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회색 시멘트 그대로 벽지도 바르지 않고 방치된 사방에서 차가운 공기가 새어나왔다. 천정은 휑하니 뚫린 채 배관이며 전기선들이 그대로 드러나 한층 낯선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이는 꼬박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아침이 되자 수영이 찾아와 아이를 일으켜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아이는 닥치는 대로 팻말들을 읽었다.
  "검사실." "화장실." "약제실." "실험실" "인지발달교육실." "체육실."…
   아이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방의 팻말은 <체육실>이었다. 수영은 문을 열고 아이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복잡하게 생긴 기구며 쇳덩이들이 가득한 방이었다.
방 가운데에는 여자 한명이 서 있었다. 그녀는 수영과 마찬가지로 하얀 가운을 입고, 가슴에 '성장발달교육사 박루아'라는 명찰을 매달고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우리 친구! 안녕?"
  수영은 여자에게 차트를 건네고 꾸벅 인사를 했다. 여자도 역시 정중하게 고개숙여 답했다.
  "네. 확실히 맡았습니다. 원장님."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박루아 선생님."
  수영은 다시한번 꾸벅 인사를 하고는 아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있거라.”
  수영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한 여자는 설명도 없이 곧바로 예수를 데려다 런닝머신 위에 세웠다.
  "자- 착하지…"
  빠르게 움직이는 바닥을 이겨내지 못한 아이는 그대로 꽈당 쓰러지고 말았다. 여자가 예수를 일으켜 세우고, 예수가 1분도 지나지 않아 넘어지기를 수십번이나 반복할 즈음, 수영이 다시 방으로 찾아왔다.
  “힘들겠지만 다 적응하는 과정이란다. 조금만 힘내렴.”
  "우우…"
   짜증으로 가득 찬 아이가 크게 소리치려는 찰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이는 입을 꾹 닫고 배를 움켜쥐었다. 수영은 예수를 식당에 데려다 주었다. 아이는 접시에 담겨져 나온 묽은 죽을 단숨에 들이켰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훈련은 계속되었다. 예수는 매일같이 <체육실>에서 신체를 단련했다. 처음에는 걷는 법 부터, 그 다음에는 달리는 법, 공을 던지는 법, 몸을 유연하게 비트는 법, 철봉 위에서 균형을 잡는 법, 전문 트레이너가 완벽하게 준비한 계획에 따라 아이의 어린 뼈와 근육은 순조롭게 성장했다.
  예수는 점차 인간으로서의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100미터를 7초에 주파했고, 제자리에서 2미터를 뛰었다. 연구소의 교육상황을 평가하러 온 '장학사' 앞에서 예수가 두 손으로 자동차를 들어올렸을 땐 모든 강사들과 스탭들이 한마음으로 감동의 환성을 질렀다.
  예수의 활약으로 수영의 연구소에 자금을 대고 있던 관료와 그가 속한 부처는 국정감사에서 높은 등급을 받았다. 자연스레 포상이다 뭐다 막대한 자금이 연구소로 유입되었다. 기뻐해야 마땅한 소식이었지만 수영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밤마다 수영은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아버지."
  "왜 그러니?"
  "바깥이 그렇게 많이 추워요?"
  "'돔'의 바깥 말이니?"
  "응."
   하아. 수영이 한숨을 쉬자 하얗게 입김이 생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빠는 지금도 많이 춥단다. 하지만 바깥은 훨씬 더 춥다고들 하더구나. 영하 40도보다 아래로 내려가기도 한다 하니… 아, 영하 40도가 얼마나 춥냐고 하면… 물을 부으면 곧바로 얼음이 될 정도로 추운 거란다."
  "냉장고에 넣어둔 것처럼?"
  "그래. 냉장고에 넣어둔 것처럼.”
  “왜?”
  “전쟁이 있었거든. 전쟁때문에 하늘에 구름이 덮였지. 구름이 태양을 가리게 되자 추위가 찾아왔단다. 게다가 방사능도 가득차게 되었고."
  "방사능?"
  "독 같은 거란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나지 않지만, 몇십년 넘게 땅에 남아서 사라지지도 않고, 그 자리를 지나가는 사람을 아프고 병들게 한단다. 아빠같은 사람은 한번 숨을 들이키는 것만으로도 그 자리에서 죽어버릴지 몰라."
  "그렇게 많이 아파?"
  수영은 헬멧의 아픔을 상상하며 부르르 떠는 아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예수 넌 아프지 않을 거야. 넌 그런 것들을 모두 견뎌낼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니까."
  “응. 예수는 강해.”
  아이는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수영은 미소띤 얼굴로 불을 끄고 방을 나섰다. 복도에는 박루아 선생이 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는 놀란 눈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절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네."
  "무슨 일이시죠?"
  루아는 그에게 봉투를 하나 건넸다.
  "'위'에서 말씀하시길 '교육에 좀 진척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시더군요."
  "하지만 본격적인 교육에 들어가기엔 아직 준비가 덜 되었어요."
  "다음달이면 국정감사 시즌이에요. 우리 쪽도 뭐 좀 눈에 보이게 진척이 있지 않으면 내년 예산 장담하기 힘듭니다, 원장님. B연구동 쪽은 물건을 들어올렸다더군요. 생각만으로요. 7대학에서는 벌써 감마선 피폭실험에 들어갔다는 소문도 있고요."
  “아이가 견디지 못할 겁니다. 제 견해로는...”
  “원장님.”
  루아는 수영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를 가로막았다.
  "제가 지금 연구원 명찰을 달고 있다고 진짜 당신 피고용자라도 된 것같은 착각이 드시나 본데. 제가 당신 견해 들어주려고 기술부에서 여기까지 파견 와 있는게 아니에요. 그냥 그 편지 읽으시고 하라고 하는거 하세요. 아시겠어요?"
   수영은 더 이상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상대의 논리가 옳거나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말 해봤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전달자일 뿐이었다. 명령은 더 높은곳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이었다.
  "알아들으시겠어요?"
  그녀가 그를 재촉했다. 수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루아는 꾸벅 인사하고 자신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구두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수영은 가까운 쓰레기통을 걷어찼다. 겨우 그 정도가 수영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다음 날 아침 수영은 몇 개월만에 처음으로 예수에게 휴일을 주었다. 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쉬어도 되는 거야?" 라고 물었다. 기쁨으로 그렁그렁한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수영은 "내일부터는 더 힘들테니까 오늘 하루만 쉬게 해주는 거야." 라고 대답해 주었다.
  수영은 예수를 데리고 연구소 옥상으로 갔다. 옥상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곳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들은 젊은 시절 수영이 몰두했던 유전자 연구의 성과들이었다. 그 시절 그는 '돔'밖에서 피어나는 꽃을 보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었다. 그가 보기에 이 꽃들은 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두 사람은 난간에 기대어 서서 멀리 하늘을 보았다. 도심위로 동그랗게 닫힌 돔의 외벽은 한없이 투명해서, 육각형 모양의 골격을 제외하고는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유리 너머 회색구름으로 뒤덮인 세계는 모든 것이 새하얗게 칠해져 언뜻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은 사람이 10분도 생존하지 못하는 죽음의 땅이었다.
  언젠가 예수는 저 땅으로 내몰리게 될 운명이었다. 저 '위'에서 총통이, 혹은 총통의 비호를 받는 누군가가 말 한마디만 건네면, 박루아가 가져다주는 명령서 한통이면, 아이는 당장 내일이라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돔을 걸어나가야만 했다.
  "아들아."
  수영이 말했다.
  "응?"
  "자유가 갖고싶지 않니?"
  "자유?"
  "네가 이 연구소에 갇혀서 매일같이 훈련만 해야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모두 돔에 갇혀서 주어지는 일을 해야만 한단다. 그건 우리에게 자유가 없기 때문이지. 자유가 있다면 우리는 마음대로 하고싶은 일을 할 수도 있고, 예수 너도 이 연구소 밖으로 나가서 뭐든 내키는대로 살 수 있단다."
  "지금은 왜 자유가 없는데?"
  아이가 물었다.
  수영은 이 말을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입술을 떼고 아이에게 진심을 전달했다.
  "그건 총통이 있기 때문이란다."
  "총통? 그게 뭐야?"
  "총통은 사람이란다. 그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지 정해준단다. 직업도 소속도, 수행해야 할 임무도 모두 총통 마음이지. 우리는 모두 총통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단다."
  "시키는 대로만? 왜 그래야 되는데?"
  "시키는대로 안하면 죽게 되니까."
  "싸우면 되잖아?"
  "총통은 무척이나 힘이 센 사람이거든. 아빠가 열 명이 붙어도 못 이길 정도로."
  "그렇게? 그렇게나 힘이 세?"
  "그래. 예수야. 그는 무척이나 강해. 하지만 말이다…"
  수영은 아이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네가 더 힘이 세."
  아이의 눈이 커졌다. 수영은 아이의 눈동자 속에서 그가 익히 알고 있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세상의 비밀을 처음 깨달았을 때의 놀라움. 새로운 발견의 기쁨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양팔로 아이의 허리를 끌어안었다. 품속에서 파르르 요동치는 떨림을 감지하며, 그는 아이를 끌어안은 그대로 일어나 조용히 아이에게 고했다.
  "아들아. 너는 총통을 죽여야만 한다."
  수영은 두 팔을 뻗어 아이를 던졌다. 아이의 동그란 눈동자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채 파악하기도 전에, 그의 작은 몸뚱아리는 13층 아래 주차장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예수는 죽지 않았다.

  2
  3일 뒤 예수가 깨어났을 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피부에는 상처를 찾아볼 수 없었고, 뼈마디 하나 부러진 데가 없었다. 예수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수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루아는 한껏 들뜬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예. 사무관님. 예. 그렇다니까요. 능력이 발현된 게 확실해요. 이 아이는 '회복력'이 있어요. 위버멘시 맞다니까요. 아이 참. 지금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다섯 살 먹은 어린애가 13층에서…"
  몇 시간 뒤 검은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이 연구소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글씨가 빼곡한 카드를 내밀며 자신들을 국가정보원의 보안요원이라 소개했다. 그들은 거칠게 고함치는 수영의 배를 때리고 수갑을 채웠다. 루아는 차가운 표정으로 예수를 붙잡아 일으켜 보안요원들 앞에 데려왔다.
  그날 이후로 아이는 어떤 훈련도, 교육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아이는 보안요원들에게 이끌려 어느 건물 지하의 <연구개발처>라 쓰여진 방으로 갔다.
  모든 것이 하얀 공간이었다. 하얀 벽, 하얀 실험도구들, 하얀 가운을 입은 처음보는 사람들. 유일하게 색깔을 지닌 것이 있다면 그건 붉은 색이었는데, 피를 담은 시험관, 피가 묻은 장갑, 바닥에 말라붙은 핏자국 따위의 것들이었다.
  아이는 사방이 투명한 유리로 된 방으로 안내받았다. 유리벽에는 곳곳에 작은 구멍이 송송 뚫려있어서 바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사람들이 하나 둘 지나다니며 힐끔 아이를 쳐다보곤 했다. 가끔은 이름이 뭐냐고 말을 걸어주기도 했다.
  그중 한 여자가 자신에게 다가와 너는 이제 여기서 나갈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앞으로 힘들테니까 울고싶으면 지금 울라고 했다. 나중에 울면 짜증나니까 제발 부탁이니 지금 다 울어버렸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밤이 되고 모든 직원들이 사라진 다음에도 아이는 유리벽 속에 혼자 남았다. 컴컴하고 축축한 공간은 지금까지의 환경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이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아이는 어둠의 깊이를 헤아리며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아침이 오자 아이는 십자모양으로 생긴 침대에 알몸으로 뉘어졌다. 처음보는 얼굴의 과학자들이 삼삼오오 다가와 아이의 몸 곳곳에 펜으로 낙서를 했다. 낙서가 끝나자 그들은 아이의 팔다리를 혁띠로 단단히 고정했다. 예수는 최대한 힘을 써보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예수가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한 과학자 한명이 지체없이 그의 옆구리에 커다란 바늘을 찔러넣었다. 따끔거렸지만 참을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과학자가 반대편에서 바늘을 찔렀다. 또 반대편에서 쿡, 이쪽편에서 쿡, 저쪽편에서 푸욱, 푸욱, 과학자들은 쉴새없이 예수를 찌르고 또 찔렀다. 하지만 바늘을 뽑아내고 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비웃는 것처럼, 상처는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바늘은 메스로 변했다. 살이 찢기는 고통을 느끼며 예수는 목에서 피가 나도록 저주와 욕설을 쏟아냈지만 그 모든 말들은 공허하게 미끄러졌다. 과학자들은 이미 그가 그럴 것을 예상했다는 듯, 모두 귀에 이어폰을 끼고 시끄러운 노래를 듣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소중한 실험대상을 실수로 죽여버리지 않기 위해서 고통의 강도를 아주 조금씩만 높여나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떤 상처라도 금새 회복하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점점 대범해지기 시작했다.
  일주일 쯤 지나자 아이의 혈관에 청산가리를 주입한다거나, 톱으로 손가락을 자르는 정도는 일상으로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구가 거대해져 갔다. 검에서 톱으로, 톱에서 망치로, 망치에서 황산과 화염을 뿜어대는 로봇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동원되어 그의 살갗을 찢고 뭉개고 그슬렸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3분이상 그에게 상처를 남기지 못했다.
  밤이되면 예수는 다시 투명한 방으로 옮겨졌다. 그는 잠을 청하려 했지만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상처는 회복되었어도 통증은 몸속 깊은 곳에 그대로 남아 며칠이 지나도록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아이의 정신은 이상하게도 더욱 맑고 또렷해져 갔다. 그때 처음으로 아이는, 자신에게 더 이상 잠이 필요없다는 것을 알았다.
  몇 달이 지나게 되자 예수를 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는 몰라보게 자라나 이제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었고, 몸무게도 80kg에 달했다. 여리여리했던 몸도 탄탄한 근육질로 다져져가고 있었다. 어쩌면 고통이 그의 성장을 촉진한 것인지도 몰랐다.
  몸이 자라날수록 그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변화가 끓어올랐다. 밤마다 연구소를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언제나 그와 바깥 사이에는 두터운 유리벽이 존재했다. 그는 양 손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벽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는 벽을 증오하기에 이르렀고, 심지어 그 벽 너머로 존재하는 연구원들, 설비들, 그 외의 세상 모든 것들이 밉게만 느껴졌다.
  매일아침 예수가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렸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예수를 끌어내기 위해서 엄청난 농도의 마취제를 사용했다. 얼마 지나지않아 그마저도 여의치 못하게 되자 예수를 밖으로 내보내는 대신 유리벽 속으로 직접 독극물을 주입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신경가스를 살포하고, 탄저균을 부어넣고, 액체 헬륨을 끼얹어 온몸이 꽁꽁 얼어붙게 만든 다음에야 그들은 만족한 표정으로 서로를 향해 두리번대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가고 싶니?"
  그날 밤 어둠속에서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예수를 이곳에 가둔 그녀, 박루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예수를 향해 다가왔다.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가 귀를 거슬리게 했다.
  "나가고 싶지? 나가게 해줄게."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는 어디있죠?"
  그가 물었다.
  "아마도 좋은 곳? 실은 나도 몰라. 네가 여기로 오던날 최수영 원장은 사라졌어. 처음엔 단순 실종이라 생각했지만, 구린 냄새를 맡은 국정원이 수사를 진행한 결과 지금은 내란 혐의로 수배중이지."
  너는 총통을 죽여야만 한다.
  예수는 수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는 이렇게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나가고 싶으면 내일 꼭 살아남아. 그럼 연구소를 나가게 해줄테니까. 연구소를 나갈 뿐만 아니라 네가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인생을 살게 해줄 수도 있다고. 진짜 사람답고 평범한 삶 말이야."
  루아가 말했다.
  "'자유'도 줄 수 있나요?"
  예수가 물었다.
  "자유?"
  "마음대로,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해도 되는 건가요?"
   하아. 루아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무얼 하고싶은건지에 따라 다른 거 아닐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소매를 들추어 시계를 보았다.
  "이젠 가봐야 할 시간이구나. 내일 실험엔 나도 참석할거야. 아마 그때 다시 볼 수 있겠지. 만약 네가 살아있다면 말이지만."
  루아는 곧장 뒤돌아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혼자가 된 예수는 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는 잠을 자지도 꿈을 꾸지도 않았다. 다만, 너는 총통을 죽여야 한다던 아버지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시끌벅적 설비들이 실험실로 반입되었다. 맨먼저 30cm가 넘는 두께의 금속판이 예수가 갇힌 유리벽 주위에 세워졌다. 다음에는 고열의 플라즈마를 내뿜는 장비들이 불꽃을 튀기며 새빨갛게 달아오른 금속의 벽을 단단히 용접했다. 잠시 뒤 똑같은 두께의 천정이 덮이고 예수의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오후가 되고 콘크리트가 충분히 굳기 시작할 즈음 머리 위에서 해치가 열렸다. 갑자기 쏟아진 빛 때문에 예수는 눈이 부셨다.
  새하얀 빛 너머로 두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온 몸에 녹색 비닐같은 옷을 두르고, 양쪽에서 커다란 집게로 농구공만한 크기의 캡슐을 들고 있었다. 상당한 무게였던지, 집게를 쥔 두 사람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뭐하는 거에요?"
  예수가 물었다.
  초록색 옷을 입은 자들은 대답없이 아래로 캡슐을 떨어뜨렸다. 예수가 갇힌 유리방 위에 떨어진 캡슐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천정 위를 데구르르 굴렀다. 캡슐이 올바른 위치에 떨어진 것을 확인한 그들은 무언가 무서운 일이라도 벌어질 것처럼 급히 천정의 뚜껑을 닫고 용접기를 들이밀었다.
  잠시 뒤, 캡슐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뜨거워진 캡슐은 치이익 소리를 내며 천정의 유리를 녹이고 예수의 발치로 떨어졌다.
  "뭐야 이건…"
  예수는 아픔을 감수하고서라도 캡슐을 한번 만져보기로 작정했다. 뜨거움을 참고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다가가서 손가락을 뻗으려는 찰나, 캡슐이 폭발했다. 온 몸이 녹아버릴 것 같은 뜨거움이 예수의 몸을 덮쳤다.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 모든 과정을 바깥에서 지켜보던 루아는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핵분열의 폭발력은 최소한으로 억제하는 대신 통상 이상의 감마선만을 과다하게 뿜어내는 감마선 폭탄은 아마도 예수를 확실한 죽음에 이르게 할 터였다.
  <위버멘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인간 이상의 지능과 신체능력을 가진 자는 부지기수로 태어났고, 손에 꼽을 정도긴 해도 초능력을 지닌 이들 역시 다수 있었다. 하지만 돔의 바깥에서 생존하기 위한 핵심적인 자질, 즉 방사능 피폭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자는 하나도 없었다.
  "시간이 됐습니다."
  누군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루아가 그에게 되물었다.
  "이제 안전한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차폐막 안의 물질들은 자동적으로 돔 바깥으로 배출되도록 되어있습니다. 내부에 방사능은 남아있지 않을 겁니다. 이제 해치를 열어서…"
  그 순간 쾅.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차폐막의 한쪽이 꺾이며 튀어나와 있었다. 누군가 안에서 충격을 가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모양새였다.
  "설마 실험체가?"
  누군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충격과 함께 벽이 통째로 튕겨나갔다. 수백킬로그램에 달하는 납덩어리는 실험실 반대편에 놓인 기구들을 부수고 미끄러졌다.
  열기어린 수증기가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 뒤엉켜 서서히 흩어졌다. 한쪽면이 노출된 방 한가운데 새카맣게 타버린 캡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정신을 잃고 알몸으로 쓰러진 예수가 있었다.
  루아는 곧바로 예수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예수를 똑바로 눕힌 뒤 손목의 맥을 짚으며 귀를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 때문에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모두 조용!"
  그녀가 소리쳤다. 일순 실험실 내의 모든 사람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주위가 무거운 정적으로 가득한 가운데, 그녀의 귓가에 새근거리는 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좀 더 가까이 귀를 가져가자 그것은 속삭임으로 변했다.
  "나가고 싶어요."
  혈관 자체가 꿈틀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예수의 손목에서 힘차게 맥이 뛰었다.

  3
  예수는 곧바로 근처의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이틀 만에 다시 다른 병원으로, 삼일 뒤에는 아무도 모르게 한 호텔로 이송되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시한 것은 루아였다. 그녀는 이미 완전히 회복한 예수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먹어. 햄버거라는 거야"
  예수는 묻지도 않고 햄버거를 한입 베어물었다. 달콤한 소스가 혀를 한번 자극하자 참을 수 없이 허기가 느껴졌다. 그는 단숨에 불고기 버거 다섯 개를 먹어치웠다.
  "맛있어서 말이 안나오지? 연구소에선 맨날 허여멀건 죽만 먹었으니까."
  루아는 침대 위에 너저분하게 흩어진 포장지를 주섬주섬 치우며 말했다.
  "오늘 밤엔 아마 더 맛있는 것들을 먹게 될 거야."
  "이것 보다 더?"
  "이런 싸구려는 비교도 안되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응. 들여보내줘."
  전화를 끊자마자, 누군가 노크를 했다.
  "들어와요."
  문이열리고 예닐곱명 정도의 여자들이 방으로 들어와 인사를 했다.
  "오늘 '그분'을 뵈어야 하니까. 잘 꾸며줘요."
  "네. 알겠습니다."
  여자들 중 하나가 대답했다. 그녀들은 아직도 상황을 모르는 예수를 끌어다 의자에 앉히고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으로 면도도 했다. 그때까지 예수는 자신의 턱에서 그런 털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마지막으로 샤워하고 화장을 마치고 나니 거울 속에 비친 예수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해있었다. 왁스로 세운 머리에서는 단단한 힘이 느껴졌고, 하얀 와이셔츠와 와인색의 넥타이는 그를 한층 어른스러워 보이게 했다. 온몸에서는 연구소 옥상에서 자라던 꽃들만큼이나 좋은 향기가 났다.
  "좋아?"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 루아가 물었다.
  "모르겠어."
  "요."
  "응?"
  "'그분' 앞으로는 반말을 하면 안 돼."
  "그분?"
  "총통각하 말이야."
  총통이라니?
   "넌 오늘 총통 각하를 만나러 가는 거야."
  "내가 왜?"
  "그럼 내가 아무 이유없이 공짜로 널 내보내줄 줄 알았어?"
  "…나는 내가 돔 밖으로 나가게 되는 건 줄 알았어."
  "조만간 그렇게 될 거야. 하지만 그 전에 각하를 만나게 될 거야."
  "어째서?"
  예수가 물었다. 하아. 루아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질문이 참 많네. 그야 총통이 널 마음에 들어하시니까지."
  "왜 나를 좋아하는 건데?"
  "야. 그만 좀 물어보면 안돼?"
  결국 그녀는 폭발했다. 예수는 입을 꾹 닫고 고개를 숙였다. 루아는 푹 숙인 아이(적어도 그녀의 눈에는 아이처럼 보였다.)를 보며 가엾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사람들은 저 듬직해보이는 겉모습만 보고 많은 걸 기대하게 될 거야. 아직 어린애인데. 그걸 알고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나밖에 없는데.
  루아는 결국 입을 열었다.
  "…총통은 강한 것들을 좋아해. 총이나 대포, 미사일, 강한 군인과 격투가들, 강한 존재라면 뭐든 환영이지. 그는 아마 널 좋아하게 될 거야. 육체적으로만 본다면 넌 세상에서 제일 강한 남자니까. 말투가 좀 건방지긴 하지만 제대로 교육받은 적이 없다고 내가 보고서를 올렸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의외로 그런 격식에는 관대하거든. 그러니까…"
  그녀는 예수를 뒤에서 꽉 안아주었다.
  "자유를 원한다고 했지? 그건 오늘 밤 네가 하기에 달린 거야."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예수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보안요원들이 도착했다. 예수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차에 올라 총통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은 도시에 있는 어떤 건물보다도 높은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었다. 돔에 사는 누구도 내부를 훔쳐볼 수 없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가지 보안절차를 통과하고 들어선 내부는 그야말로 황량한 광장이었다. 1킬로미터는 족히 되어보이는 긴 도로가 집무실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 좌우로 축구장의 다섯 배는 되어보이는 공간에 탱크며 자주포, 전투용 헬리콥터 같은 무기들이 가득 줄지어 있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수백명의 군인이 총을 들고 예수를 맞이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그들은 일제히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차에서 내린 뒤로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실내는 지루할 정도로 넓었다. 예수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규모때문에 주눅이 들다가도, 그거야말로 이 번쩍거리는 건물의 목적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고쳤다.
  멀리 총통이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예수보다 한참 높은 위치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수십명의 여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멀리서도 축 늘어진 턱과 불룩 튀어나온 뱃살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깡마른 여자들의 몸집때문에 그의 뚱뚱함은 더욱 선명히 강조되었다.
  이윽고 예수는 총통의 앞에 서서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총통 각하."
  "오오 자네가…"
  "성은 없고 이름은 예수라 합니다."
  "그래그래. 뭐하니? 빨리 식사 준비하지 않고."
  총통이 손짓하자 여자들은 우르르 달려가 커다란 식탁을 옮겨왔다. 식탁 위에는 생전 처음보는 음식들이 모락모락 김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자. 앉거라."
  총통은 자신의 바로 옆에 예수를 앉혔다. 예수가 자리에 앉자 다른 여자들도 그들 주위에 둘러앉아 키득키득 웃어댔다.
  "인류를 돔에서 해방시켜줄 우리 국민 영웅께 박수!"
  총통이 말에 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예수에게 집중되었다. 예수는 그 눈빛이 쑥스러워 고개를 숙이고 음식만 쳐다보았다.
  "허! 남자가 그렇게 숫기가 없어서야… 고개 들거라. 남자가 패기가 있어야지."
  "네…"
  예수는 시키는대로 총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그에게서 별다른 위협이나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총통이 무척이나 강한사람이라고 했는데. 전혀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걸.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내가 더 강하기 때문일까?'
  총통은 한손으로는 포크를 들고 고기를 씹어먹으며 다른 손으로는 한 여자의 허리를 감싸쥐었다. 여자들은 그의 곁에서 볼에 뽀뽀를 하고 손을 주무르며 때로는 밥을 떠먹여주기도 했다. 예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부끄럽느냐?"
  총통이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허허. 모르면 모르고 알면 아는 거지 잘 모르는 건 또 뭐란 말이냐."
  "그건…"
  "저기 서 있는 비서실장이 가르쳐주기로, 너는 세상물정에 많이 어둡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설명해주마. 잘 듣거라. 여기 있는 음식과 여자들은 모두 내 것이다. 아니, 이 도시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다 내 것이나 다름없지. 내가 모든 권력을 가졌으니까. 권력은 이런 것도 가능하게 하지."
  총통은 옆에 있는 여자의 가슴팍에 손을 집어넣고 거칠게 주물러댔다. 여자는 싫어하는 기색도 없이, 더욱 꽈악 총통의 몸에 안겼다. 다른 여자들도 질세라 그의 몸을 손으로 훑고 감싸기 시작했다. 예수는 총통의 돼지같은 몸이 한없이 역겹게 느껴졌다.
  "나를 위해 일하거라. 경호실에 자리를 내 주마."
  총통이 말했다. 예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이 확정된 것처럼, 그는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월급은 섭섭치않게 나갈 거다. 조만간 집도 하나 새로 지어주마. 그때까지는 방을 하나 준비해 줄테니 여기서 생활하거라. 뭐 특별히 바라는 게 있으면… 아 그렇지. 내가 그 생각을 못했구만."
  총통은 뭔가 생각난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뜻밖의 제안을 했다.
  "이중에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느냐?"
  "네?"
  "꼴리는 여자가 있냐고."
  총통은 그렇게 말하며 주먹과 손바닥으로 경박한 손짓을 했지만 예수는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섹스는 그가 연구소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 중 하나였다. 무슨 여자를 어떻게 고르라는 것인지 그는 정말로 몰라 한참을 머뭇거렸다.
  "하 답답하네… 이중에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여자를 골라 보란 말이다."
  예수는 반사적으로 한 여자를 지목했다. 수수하고 어려보이는 소녀였다. 왠지 모르게 그 소녀가 총통에게 가슴을 주물럭히는 것을 보고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통은 호탕하게 웃더니 식사는 이만 되었다고 말했다. 너무 이르지 않느냐고 비서가 되묻자, 총통은 부끄러움도 없이 말했다.
  "고기보다 더 맛있는 것이 눈앞에 있는데 먹을 마음이 들겠소? 자자, 오늘은 이만 할테니 사양말고 실컷 먹고 오거라. 우리 국민 영웅!"
  총통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예수는 총통에게 인사하고 비서실장을 따라 준비된 방으로 안내되었다. 소녀는 마치 등 뒤에 붙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비서실장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소녀는 한마디 설명도 없이 그를 데리고 샤워실로 향했다.
  소녀는 여전히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 그를 정성스레 씻기고는 수줍게 그의 손목을 잡고 그를 침대에 이끌어 눕혔다. 소녀가 훅, 하고 머리맡의 촛불을 꺼뜨리자 방 전체의 전등이 자동으로 어두워졌다. 예수는 그녀가 두 팔을 들어 머리를 올려묶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유는 모르지만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되고 단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소녀가 입속에 그의 신체 일부를 집어넣었을 때, 그는 거의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것은 대체 어떤 시간이었던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 방 안은 이미 어두컴컴해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오른 팔을 베고 잠든 소녀의 따스함만이 그의 정신 속에 가득했다.
  "아 이런 것이었구나."
  예수는 무언가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그는 지쳐 곯아떨어진 소녀를 내버려두고, 망설임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방을 나섰다. 복도의 화려한 조명때문에 눈이 찌푸러졌다.
  잠시 뒤 총통의 침실 문이 열렸다. 어둠 속으로 하얀 조명불빛이 뻗어나갔다. 빛의 길 한가운데 예수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방 한가운데 침대 위에 총통이 잠들어 있었다. 예수는 양 옆의 여자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위로 기어 올라갔다. 자신의 몸 위로 올라타는 체중에 깜짝 놀란 총통은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켰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예수의 손이 그의 입을 단단히 움켜쥐고 그를 누르고 있었다.
  "너는 이런 것을 위해 사람들의 정점에 서서 그들을 억압하고 있었구나."
  예수가 말했다.
  총통은 새빨개진 얼굴로 바둥거렸다. 몸부림치는 진동때문에 깨어난 여자 한명이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그녀는 예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꺄악 비명을 지르며 알몸으로 방을 뛰쳐나갔다. 나머지 여자들도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나 금새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방 밖에서 도움을 찾으려 두리번대다가 피를 흘리고 죽어있는 경호원들의 시체를 발견하고 또한번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호원들이 그의 주위를 포위했다.
  "그 손 놓지 못하겠느냐!"
  누군가 소리를 질렀지만 예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차분히 그들을 노려보았다. 저들도 나보다 약해. 하지만 분명 총통보다는 강한데. 어째서 저들이 이런 자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걸까? 예수가 고민하는 사이 총통이 그의 손을 비집고 튀어나와 소리를 질렀다.
  "쏴! 이놈을 죽여라! 뭐하고 있느냐!"
  총통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기관총들이 불을 뿜었다. 예수의 옷에 무수한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예수는 꿈쩍도 않고 그들의 공격을 받았다. 금새 장전된 탄창이 하나 둘 비고 총성이 잦아들었다.
  그는 왼손으로 옷에 묻은 먼지를 털듯 몸 주위를 쓸었다. 찌그러진 납덩이들이 팝콘 쏟아지듯 떨어져 침대 시트 위를 데구르르 굴렀다. 총알이 빠져나간 자리엔 생채기조차 없었다.
  "소용없어."
  예수가 말했다.
  그는 총통을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총통의 목이 꽃송이를 꺾는 것보다도 쉽게 부러졌다. 그 광경을 지켜본 경호원들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은 아까의 여자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쳤다.
  예수는 이미 숨이 끊어진 독재자의 몸뚱아리를 싫증난 장난감 다루듯 창밖으로 휙 던져버렸다. 총통의 시체는 창문을 부수며 날카로운 유리조각들과 함께 창밖 아래 광장으로 떨어졌다.
  침대 옆 테이블에 먹다 남은 음식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예수는 아까 맛보지 못했던 립아이 스테이크와 랍스타 구이를 양손에 하나씩 집어들고 햄버거처럼 배어물었다. 처음 경험해보는 맛과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자유의 맛이었다.
  총통이 죽었다는 소식은 보도통제를 할 새도 없이 행정부 내의 소식통들을 타고 순식간에 돔 전체로 퍼져나갔다. 한 시간도 지나기 전에 돔의 모든 국민이 독재자의 최후를 알게 되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저항군이었다. 그들은 그동안 집 한구석에 감추어두기만 했었던 검정과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전투복을 꺼내 입고, 각자의 무기를 챙겨 총통의 집무실 앞으로 모여들었다.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몇 번의 총성이 오간 것을 끝으로 총통의 경호군은 무기를 내려놓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총통 한사람의 손에 집중되어있던 지휘체계가 그의 죽음으로 완전히 마비되어버린 탓이었다.
  수영은 1개 중대규모의 저항군 병사들을 이끌고 총통의 관저였던 건물로 진입했다. 피와 먼지로 가득한 복도를 지나 총통의 집무실에서 그는 예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수는 이전 총통이 앉아있었던 커다란 의자에 앉아, 팔걸이에 턱을 괴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수고했다. 아들아."
  수영이 말했다.
  "별말씀을요."
  예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들의 미소를 보고 한결 긴장이 풀린 수영은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네 덕분에 우리가 총통을 이길 수 있었단다. 고맙다, 아들아. 이제 사람들에게 총통이 갖고 있던 부와 권력들을 다시 돌려주자꾸나."
  "왜 그래야 되죠?"
  "왜냐니? 네가 총통을 죽였기 때문이지 않느냐."
  "네. 그는 약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강해요. 그 똑똑한 과학자들이 절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지 보셨어요? 아버지. 아무도 저를 죽일 수 없어요. 그런데 제가 왜 이것들을 포기해야 하죠? 제가 이 모든 것들을 가질 수 있는데 어째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겁니까?"
  예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뻗었다.
  "아버지는 저에게 자유로워지라고 하셨죠. 만약 제가 여기서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해야 한다면, 그건 자유롭지 못한 것 아닌가요? 저는 총통을 죽이고 자유를 얻었어요. 하지만 자유는 단 한사람만의 것이에요. 제가 고기 한 조각이라도 누군가에게 나누어주어야만 한다면, 저는 그만큼의 자유를 빼앗기는 겁니다. 아무것도 드릴 수 없어요. 전부 제가 가질 겁니다."
  "아들아…"  
  수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등 뒤에서 한 중년 남자가 걸어와 말했다.
  "원장님. 제가 말씀드린대로지 않습니까?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 면목이 없습니다. 소령님."
  "이제 원장님이 나설 일이 아닌 듯 싶군요."
  중령이라 불린 남자는 품에서 권총을 꺼내어 예수를 향해 겨누었다.
  "부디 고통스럽지 않은 마무리를…"
  수영은 도망치듯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저항군 사령관은 무전기로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수십 명의 병사가 일제히 총알을 퍼부었다. 예수는 피하려는 기색도 없이, 가슴을 내밀고 모든 공격을 받아주었다.  
  "놈은 회복력이 있다! 회복할 틈을 주지마라!"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은 일제히 수류탄을 꺼내어 예수를 향해 던지고 몸을 숙였다. 특수한 방식으로 제작된 수류탄의 화학물질이 산소와 격렬하게 반응하며 불사신의 육체를 태웠다.
  예수는 온 몸에 화염을 두른 채로 병사들의 사이에 뛰어들었다. 배웠던 격투술을 활용해 한 번에 세 명의 병사를 넘어뜨리고, 그들 중 하나를 팔로 꿰뚫어 죽였다. 그는 곧바로 죽인 자의 총을 빼앗아 주위의 적들을 쏘았다.
  그가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관저 밖으로 나서자 그곳에는 총통이 애지중지 긁어모은 탱크와 기관총, 헬리콥터들이 그를 향해 포신을 겨누고 있었다. 그 모든 무기들의 앞에 일곱 명의 남녀가 서서 말했다.  
  "우리는 모두 당신처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오.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으니 항복하시오."
  예수는 그들을 비웃으며 달려들었다. 한 남자가 능력을 선보이기도 전에 목이 잘려나갔다. 나머지 초인들은 뒤로 물러서며 일제히 예수를 향해 능력을 펼쳤다. 그중 한 여자가 팔을 뻗어 예수의 움직임을 봉했다. 예수는 자신을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힘 때문에 무릎을 꿇었다. 염력에 의해 팔이 부러지고,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생각만으로 물건을 옮긴다더니…"
  예수가 말했다.
  대답 대신 무기들이 불을 뿜었다. 예수는 꼼짝달싹 못하는 상태로 포탄과 미사일의 집중포화를 당했다. 광장은 금새 먼지와 화약연기로 가득 메워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공격이 잦아들었다. 사람들은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표정으로, 예수가 서 있던 방향을 노려보았다.
  흙먼지 속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서서히 먼지가 걷히자 다섯 명의 초인들이 그의 발치에서 온몸이 기괴한 형태로 뒤틀린 채 쓰러져 있었다.  
  "아아. 이렇게 하는 거였군."
  예수가 담담히 말했다. 그가 손바닥을 내밀자 눈앞의 장갑차 두 대가 하늘로 떠올랐다 떨어졌다.
  "사격개시!"
  외침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포격이 쏟아졌다. 폭발을 뚫고 예수는 하늘로 뛰어올랐다. 놀란 헬리콥터가 급히 방향을 선회하려다 돔의 천장에 부딪쳐 아래로 추락했다. 예수는 광장 가운데 놓인 지휘차량을 향해 곧장 질주했다.
  "적군의 목표는 지휘소다! 절대 놓치지 마라!"
  아군의 희생을 감수한 포격들은 모두 예수가 지나간 등 뒤를 허무하게 때렸다. 예수는 달리는 속도를 점차 가속하며 몇 초 만에 지휘차량의 앞까지 도달했다.
  예수가 멈추어 서자마자 두 명의 남자가 허공에서 나타나 그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아까 보았던 일곱 남녀들과는 또 다른 자들이었다. 둘이서 똑같은 얼굴을 한 그들은 예수의 양 팔을 움켜쥐고 자신들의 능력을 사용했다. 일순 시야가 흔들리더니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졌다.
  저 멀리 돔의 외벽이 보였다. 예수는 금새 상황을 파악했다.
  "이곳까지 순간이동한 건가?"
  그의 주위로 미리 설치되어 있던 폭탄이 터졌다. 돔의 붕괴를 우려해 위력을 조절할 수밖에 없었던 공격들과는 달리 한계를 모르는 강력한 충격이 불사의 몸을 덮쳤다. 충격으로 수십 미터를 날아 떨어진 예수의 몸에 또한번 압력이 가해졌다. 이전의 염력과 똑같은 속박이었다. 쌍둥이는 꾸욱 주먹을 움켜쥐고 그를 포위하듯 능력을 개방했다.
  예수는 똑같이 힘을 개방하여 버티려 했지만 폭발의 충격으로 뇌가 잘 작동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염력은 고사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아 무릎이 꺾였다.
  쌍둥이의 코와 귀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방사능에 노출된 탓이었다.
  "같이죽자."
  "같이죽자."
  쌍둥이가 동시에 말했다. 멀리 돔 한가운데 천정이 열리며 커다란 로켓이 솟아올랐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로켓이 아니라 거대한 미사일이었다. 미사일은 높이 솟아오르는 대신 곧장 방향을 꺾어 예수의 머리위로 떨어졌다.
  밤을 낮으로 바꾸는 거대한 빛이 그를 덮쳤다. 한참동안 세계가 진동하는 것 같더니 이윽고 빛이 저물었다. 열기로 일렁이는 잿빛 대지 위에 사람이 서 있었다. 예수였다.
  그 광경을 모니터로 지켜보던 저항군 지휘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예수는 광장 한가운데로 순간이동했다. 그가 허공에 대고 주먹을 쥐자 모든 전차와 폭탄들, 그것들을 제어하는 전자기기들이 찌그러지며 불꽃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저항군 사령관이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의 어깨 위로 머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도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예수는 곧장 수영의 모습을 찾았다. 그는 아버지의 앞에 서서 말했다.
  "이제 내 마음대로 살 겁니다. 자유롭게."
  
  4
  예수는 돔 곳곳을 돌아다니며 내키는대로 행동했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빼앗아먹고, 마음에 드는 집에 들어가 마음에 드는 여자와 밤을 보냈다. 몇몇 정의감에 사로잡힌 이들이 그에게 저항했다가 너무나도 손쉽게 죽임을 당했다. 누가봐도 그는 명백한 악이었지만,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절대적인 힘 앞에서 도덕과 정의는 은퇴를 마치고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처럼 보였다.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돔의 국민들은 예수에게 저항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관식이 열린 것도, 특별한 동의나 선언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예수를 부르는 칭호는 자연스럽게 한가지로 통일되었다.
  그 날 이후로 예수는 왕이 되었다.

  5
  "당신들은 왕의 치유력이라는 게 도마뱀의 꼬리 같은 걸 몇 배로 강화한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었지요.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위버멘시의 능력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거라고 말입니다."
  컴컴한 어둠속에서 수영이 말했다.
  "그들의 능력은 뇌파로 분자들을 조종하는 것이 원리입니다. 각기 달라보이지만 사실은 다 같은 기술인 셈이지요. 왕이 다른 초인들의 능력을 흉내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테이블 가운데 놓인 촛불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그 작고 유일한 빛에 의지해 둘러앉은 남자들은 각자 침통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를 죽일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까?"
  한 호전적인 간부가 물었다.
  "현재로서는."
  수영이 답했다.
  "하지만 조만간 죽을 겁니다. 빠른 진화를 위해서 생애주기를 짧게 설계했으니까요."
  "얼마나 말입니까?"
  누군가 물었다.
  "길어야 15년이겠지요."
  수영이 답하자 그가 혀를 차며 손에 쥐고 있던 권총을 집어던졌다.
  "이보시오, 최선생! 1년 만에 천오백명이 죽었소. 어떻게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란 말을 할 수가 있소? 15년이면 저 괴물이 우리들 모두를 죽이고도 남을 거요."
  수영은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했다.
  "고래로, 사람이 악인을 처리하는 방법은 언제나 두가지 뿐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도덕을 가르치는 겁니다. 도덕은 일종의 신념이니까요. 양심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은 스스로 내면의 악에 사슬을 채웁니다."
  "그래서요?"
  참지 못한 간부가 그를 재촉했다.
  "저는 저 아이에게 도덕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장관님이 반대하셨죠. 국정감사가 코앞이라 스케줄에 딜레이가 생긴다면서요. 그가 자신의 성공욕을 위해 한 짓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생각해보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군요. 저 아이는 도덕을 모릅니다. 그러니 사람을 죽이고 괴롭히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죠."
  누군가 헛기침을 하며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사람들은 애써 그를 무시하며 수영에게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럼 두 번째 방법은 뭐요?"
  "하아. 잘 아시다시피 두 번째는 법률이지요. 법이란 결국 힘입니다. 따르지 않는 자를 공권력으로 겁주고, 잡아가두고, 심지어 때려죽여서 힘으로 찍어누르는 방법이지요. 하지만 이것도 불가능하다는 거 다들 동의하실겁니다. 아시다시피 저 아이는 1만 3천의 남아있는 모든 인류를 다 합친 것보다도 거대한 폭력이니까 말입니다."
  잠시 기대로 차올랐던 간부의 눈에 실망이 보였다.
  "15년을…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오?"
  수영은 그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다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기다리는 것이 싫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지요?"
  "그건 이런 방법입니다."
  수영은 차분히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그가 말을 마치자 사람들은 동요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불확실한 감정에 모든 인류의 목숨을 걸란 말입니까? 그가 굴복하는 대신, 우리들 모두를 죽일 수도 있소."
  한 간부가 말했다. 수영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에게 반박했다.
  "자유롭게 살지 못할 거라면 이 목숨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이루고자 했던 혁명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까? 죽어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를 위해서 투신하려던 것이 아니었느냔 말입니다. 모두에게 물어보십시오. 사람들은 동의해 줄 겁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그가 설명을 마친 다음에도 웅성거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하지만 뚜렷하게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딱히 뾰족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6
  왕이 한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을의 입구에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왕은, 그녀가 겁먹은 사람들이 내보낸 희생양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소녀의 눈빛이 너무나 당돌해보였다.
  소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안녕. 동생아. 내 이름은 메리. 메리-13-노벰버. 너와 나는 같은 여자의 태반에서 태어났어. 어떤 의미에서 나는 너의 형제야. 정확하게는 누나라고 해야겠지. 내가 너보다 2년 먼저 태어났으니까."  
  왕은 그녀에게서 왠지 모를 위험을 느꼈다. 메리의 눈동자에서는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같은 겁쟁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와 싸우겠다는 건가?"
  "아니. 싸우지 않아. 나는 너를 무시할거야."
  "무시한다고? 나를?"
  왕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 나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너를 무시할거야."
  메리가 말했다.
  "그게 무슨…"
  "며칠 전 인류의 지도자들은 다 같이 모여 한 가지 합의를 했어. 그 누구도 더 이상 너에게 굴복하지 않기로. 하지만 너를 이길 수는 없으니, 이기는 대신 너를 상대해주지 않기로 약속했어."
  "흥. 너희같은 겁쟁이들이? 웃기는군. 네 자신만만한 얼굴이 얼마나 빨리 무너지는지 두고 보겠어. 누나."
  왕은 메리를 옆에 둔 채 다른 사람을 붙잡아 명령했다. 하지만 그는 왕을 무시한 채 스쳐 지나갔다. 왕이 그의 팔을 비틀어 뽑아도 그는 절대 왕을 쳐다보지도,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았다.
  "어라…"
  왕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욕하고 때리고, 죽여댔다. 여자를 붙잡아 겁탈하려고 하자, 여자는 이유도 없이 심장이 멎어 죽어버렸다. 다른 여자에게 똑같은 짓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왕이 아무리 소리치고 물건을 부숴도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뭐야... 뭐냐고!"
  왕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 울림은 공허했다.
  "너희 놈들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너희들은 약해 빠진데다 겁쟁이인데 어떻게 이걸 참을 수 있는 거야?"
  "겁쟁이니까."
  한참동안 말없이 그를 지켜보던 메리가 입을 열었다.  
  "겁쟁이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력을 믿지 않았어. 대신 나를 찾아왔지. 말했잖아? 나도 너처럼 사람의 손으로 태어났다고. 너처럼 강하진 않지만 내게도 능력은 있어. 내 건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망가뜨리는 힘이지."
  그녀는 엄지와 검지로 권총 모양을 만들어 자신의 이마를 가리켰다.
  "내가 사람들의 뇌 속에서 너를 지웠어. 인류는 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라. 앞에 있어도 볼 수 없고, 네 소리도 못 들어. 널 인지할 수 없도록 뇌의 일부가 파괴되었거든. 네가 아무리 괴롭힌들 저들은 아픔조차 느끼지 못해.”
  "아무도 날 볼 수 없단 말이야?"
  "그래 나를 제외하곤 누구도 널 볼 수 없어. 아무도 너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너의 응석을 받아주지도 않고, 너를 안아주지도, 너에게 말을 걸지도 않을 거야. 결국 외로움이 널 죽일거야."
  “그런...게 가능할 리가 없어.”
  “믿든 말든 그건 내 알바 아니야. 이젠 나도 더 이상 널 받아주지 않을 거니까.”
  빵. 메리는 마치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발사하는 것처럼 손목을 튀겼다. 소녀의 작은 몸이 축 늘어진 채 휘청거렸다가 잠시 후 균형을 되찾았다. 그녀는 이제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왕은 천천히 다가와 메리의 뺨을 때렸다. 메리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맞았다는 낌새조차 없이 고개를 치켜들고 별을 보았다. 다시한번 뺨을 때렸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왕은 이번엔 그녀의 목을 졸랐다. 뼈를 부러뜨릴 것처럼 엄지에 힘이 실렸다가, 부르르 떨리는 손끝에서부터 공포가 밀려왔다. 그는 결국 황급히 손을 풀고 말았다.
  왕은 메리의 몸을 내팽겨치고 무작정 돔을 걷기 시작했다. 어느 도심지에서 왕은 사람들을 관찰했다.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각자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모든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상대자들이 있었다. 말로, 글로, 때로는 몸으로. 그들은 서로의 삶에 깊게 비집고 들어가 마음의 틈새들을 메워주고 있었다.
  나만 아무도 없어.
  왕은 도심을 뒤로한 채 다시 한참을 걸었다. 도시의 외곽으로 향할수록 사람들과 마주치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이윽고 돔의 외벽에 다다랐을땐 더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갑자기 무서워진 왕은 다시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소리를 지르며 한참을 내달린 그는 어느새 다시 메리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메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투명한 천정 너머로 비치는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은 떨리는 손으로 메리의 두 팔을 붙잡고 크게 소리쳤다.
  "날 봐! 날 보라고! 자 이렇게 두 손을 내 허리에 두르고 나를 힘껏 끌어안으란 말이야! 죽여버리기 전에!"
  메리의 주변이 염력으로 폭발해 먼지가 일어났다. 자동차가 찌그러지고 높은 첨탑이 불꽃을 쏟으며 무너져 내렸다. 전신주가 쓰러져 그녀의 옆을 스쳤다. 소녀의 뺨에 길게 한줄기 상처가 생겨나 턱을 타고 주르륵 피가 흘렀다. 하지만 메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봐. 누나. 날 보란 말이야…"
  왕은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가 태어나고 부터 지금껏 언제나 은밀히 품고 있었던 막연한 감정이 처음으로 명백히 드러나 그의 가슴 가운데로 솟아올랐다.  이름모를 그 감정은 무척이나 서럽고, 추웠다.
  왕은 메리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그는 엉엉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눈물 콧물이며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막 태어난 아기라도 된 것처럼 진심으로 겁에 질린 채 몸을 떨었다.
  세상을 향해 그가 울먹이며 부탁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를 봐주세요. 이렇게 안아주세요. 제발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부탁입니다. 지금 너무 괴롭단 말이에요. 저 좀 살려주세요. 네? 제발요. 제발… 당신만이라도 좋아요. 저 좀 사랑해주세요, 네?"
  그 말을 들은 메리는 그제야 다시, 하지만 여전히 시선은 밤하늘에 고정해 둔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번 생각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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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게 쓰다보니 분량을 초과해서 여기저기 싹둑 잘라내느라 정신없었네요. 원고지 150매가 많은듯 하면서 은근 짧은거 같아요. 'ㅁ'
여러분 모두 좋은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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