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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바람이야기

2013.01.01 18:1301.01

바람은 곧 천사가 될 영혼들이라고들 한다. 바람의 여정은 곧 인간의 세상의 모든 곳이며 그 이유는 선한 영혼들이 천사로 태어나기 전에 신의 명령으로 인간의 세상을 둘러봐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엇하나 거리낄 것 없는 바람들은 세상 곳곳을 다닌다. 그렇기에 바람 안에는 세상 곳곳의 사연들이 가득 담겨져 있다. 재밌는 이야기, 슬픈 이야기, 화나는 이야기 세상 모든 이야기가 바람 안에 담겨져 있다.

모든 인간이 바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어떤 사람은 그런 바람을 악용할 것이요, 어떤 사람은 그저 바람과 대화하는 것 자체를 즐겁게 여길 것이요, 혹은 수다스런 바람을 만나 귀찮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들이 바람과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다행인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명쯤은 바람과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이 있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싶다. 뭐 괜찮고 괜찮지 않고를 떠나서 유일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바람과 이야기할 수 있으니 안 괜찮으면 뭐 어쩔 것인가.

[뭐야. 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며칠 전부터 나를 따라다니는 한 바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바람과 대화를 하게 되면서부터 많은 바람들과 이야기를 했었지만, 이렇게 수다스러운 녀석도 정말 처음인 듯 했다. 이런 녀석들도 정말 선한 영혼이 맞는 걸까? 할아버지의 말씀이 틀렸던 걸지도 몰라. 이런 녀석이 선한 영혼일리 없어.

"무슨 생각하긴. 네가 어떻게 해야 조용해질지 고민하고 있다."

[에이, 각박하게 너무 그러지마. 재밌는 이야기 잔뜩 들려준다니까?]

바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재미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같이 재밌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이 하는 이야기는 꼭 전에 한 번은 들어봤던 이야기였던 것이다. 웬만해서는 바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겹치는 일은 없는데, 이 녀석은 정말 특이한 녀석인 듯 했다.

[아냐. 이번엔 네가 확실히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일거야.]

이러한 확신도 요 근래 며칠 동안 꽤 들어본 것이었다.

[이 마을 네가 좋아하는 여자애이야기!]

"야!"

바람의 엉뚱한 이야기에 그만 소리를 질러버렸다. 안 그래도 요즘 이 녀석 때문에 마을에서 은근히 귀신과 대화하는 녀석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지금 내 모습은 사람들 눈에는 영락없이 혼자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소리 지르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역시 주위를 둘러보니 지나가는 어린애들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 녀석이 다른 바람이 들려줬던 다른 나라 이야기, 지금 여행 중인 언젠간 용사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 더 멀리 보자면 다른 대륙의 이야기라던가 마법사에 관한 이야기 등등은 도저히 다른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었는지 대놓고 내 개인사까지 파고들었다.

"……. 진짜냐?"

다시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물었다. 딱히 개인적인 욕망이 있는 것은 아마 아닐 것이다. 내 나이대의 남자애들은 흔히 좋아하는 여자애의 물건을 일부러 만져본다든지, 그 애 이야기가 나오면 왠지 자세히 귀 기울이게 된다던지 뭐 그런 것들을 하지 않은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흐흐, 역시 관심을 보이는군.]

역시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틀린 게 분명했다. 이런 녀석이 선한 영혼일리가 없어!

[그런 표정 짓지 마. 계속 네 옆에 붙어있었는데 그 애를 지켜보고 올 시간이 언제 있었겠어. 어린 놈이 발랑 까져서는.]

음? 내 표정이 어떻기에 저런 소리를 하는 거지? 난 황급히 표정을 정리했다.

[늦었어. 인마]

저 놈의 바람이! 살다 살다 저런 바람은 처음이었다. 사람을 낚는 바람이라니.

"넌 바람 중에서 특이한 놈으로 안 통하냐? 내가 보기엔 넌 돌연변이 바람이야."

[다른 바람들이 개성이 없는 거지.]

저 놈의 능청스러운 어투는 며칠 동안 듣다보니 적응이 돼버렸다.

[어쨌든 진짜로 네가 좋아하는 여자애 이야기나 알아봐줄까? 싫진 않지?]

"됐네. 이 바람아. 집에나 들어갈 거야. 더 이상 나에 대한 흉흉한 소문 도는 거 싫거든?"

바람들은 인간의 집에는 인간들이 초대하지 않은 이상은 못 들어간다고들 한다. 하긴 집 안에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집 안에 바람이 부는 일은 없지 않은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상당히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능글맞은 바람하고 집 안에 있으면 떨어져있을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촌장님 댁으로 글을 배우러가거나, 부모님의 농사를 도우러갈 때 빼고는 나갈 일도 별로 없으니 집 안은 좋은 피신처가 되어주었다.

[그럼 난 네가 좋아하는 여자애나 구경하러 가지 뭐. 기대해라.]

그러든 말든 나는 집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저 놈은 내가 어떤 여자애를 좋아한지는 알기나 한데?

집에서 한창 쉬고 있는데 갑자기 집 문틈으로 바람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분명 그 녀석이 나를 부르는 중일 것이었다. 수다스러운 녀석이었지만 내가 집 안에 있을 때까지 이렇게 찾는 놈은 아니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집에 문을 열자 선선한 바람만이 불었었는데 갑자기 내 앞머리가 넘어가버릴 만큼 강한 바람이 불러왔다.

[야! 왜 이렇게 늦게 열어! 이렇게 한가하게 있을 때가 아냐.]

"무슨 일인데 그래?'

[네가 좋아하는 여자애. 지금 대장간 집 무크라는 아이한테 놀림당하고 있다고. 이럴 때 점수따야지!]

음? 이 녀석 정말로 아는 건가? 내가 누굴 좋아하는지?

[당연하지. 너 걔가 지나갈 때마다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눈 마주치려고 그렇게 애쓰는데 내가 몰랐겠냐? 잡화점집 리아 라는 아이잖아! 그 노란색 머리에 귀여운 인상, 그리고 호리호리하게 생긴 여자아이. 그 얼굴보다는 착한 성격 탓에 어느 정도 인기가 있고 그 대장간 집 아들과 네가 좋아하는 그 아이!]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정확한 정보를 알았던 거지? 아니, 그나저나 이 녀석 정말 아네. 그렇다면 정말로 그 애가 무크한테 괴롭힘 당하고 있다는 건데.

"어디야?!"

점수고 뭐고 일단 이런 일로 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일단은 나도 남자고 그 애를 좋아하는데 아무리 그 오크같은 무크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얻어맞는 일이 있더라도 리아만큼은 빼내리라!

바람이 안내하는 곳으로 가니 동네 뒤쪽 동산이 나왔다. 그 곳에서 무크와 그의 부하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무크 뒤에 붙어서 뭐라도 안 떨어질까 기다리는 비겁한 놈들이었다.

"그러지 말고, 나랑 사귀자고. 잘 해준다니까?"

"싫어! 그만해, 보내줘!"

무크패거리 틈 사이로 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무크가 리아한테 강제로 사귀자고 하는 건가? 저 망할 놈이!

"야! 무크!"

"엉? 넌 나루 아냐. 지금 내가 좀 바쁘거든? 할 말 있으면 다음에 하자."

무크가 귀찮다는 듯이 나를 한 번 쓱 훑어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금 해야겠는데? 여자애 괴롭히면서 즐겁냐?"

솔직히 겁이 안 난다면 그건 허세일 것이다. 무크 저 놈은 부모님의 대장간 일을 억지로나마 도와서 그런지 힘도 또래보다 강했고 덩치도 내 2배는 되는 놈이었다. 대충 보면 오크 한 마리가 마을에 쳐들어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런 놈에게 이리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리아가 보고 있어서일까? 하지만 몸은 이미 사시나무 떨 듯 떨어대고 있는 듯 했다.

"뭐? 내가 지금 리아를 괴롭히고 있는 걸로 보이냐? 너 눈 나쁜 거 아냐? 난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라고."

"무크가 왜 리아를 괴롭히겠냐? 멍청아."

무크가 한마디 하자 주위에서 패거리들도 신나서는 열심히 내게 뭐라고 했다. 이거 듣고 있으니 은근히 열 뻗히는데?

"네 부하들 다 이끌고 와서 압박 넣으면서 사귀자는 것이 고백하는 거냐? 괴롭히려는 거지. 아니면 혼자서는 고백할 용기도 없는 겁쟁이인거냐? 어느 쪽이던 참 꼴볼견 이네."

아이고, 내가 미쳤지. 저 무크를 어쩌자고 도발하고 있는 거야. 틈을 봐서 리아 데리고 도망쳤어야지.

[잘한다! 저런 놈들은 확 네가 다 때려눕혀버려!]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저 바람 놈 입부터 어떻게 못 하려나.

"뭐? 이 놈 봐라? 겁을 상실했네. 좀 맞아봐야 정신 차리려나?"

저 멍청한 놈이 내 도발 같지도 않는 엉성한 도발에 넘어와 버렸다. 애초에 몸에 반비례한 지능을 가지고 있던 터라 쉽게 넘어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한 번의 도발에 제대로 넘어올 줄은 몰랐다. 그나마 데리고 도망칠 희망도 없어진 것이었다. 뭐, 내가 맞고 있는 동안 리아가 도망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남은 장사일 것이다.

"너희들은 리아 지키고 있어. 어디 못 가게. 저런 조그마한 녀석은 나 혼자서도 충분히 혼내줄 수 있으니까. 이 녀석 패는 동안 리아가 가버리면 곤란하잖아?"

저 놈이 언제부터 저렇게 똑똑해 진거야? 당황스러워졌다. 생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안 하고 사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저런 기특한 생각을 다 하다니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맞고 있는 동안 리아가 도망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남은 건 내가 어떻게든 무크 녀석을 이기고 그 남은 패거리 또한 도망가게 만들어야했다. 아니, 최소한 리아가 도망갈 시간은 벌어야했다.

[근데 너 쟤 이길 수는 있냐? 보통 작은 인간은 큰 인간한테 지던데. 도와줄까?]

도와준다고?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지? 바람이 도와준다니 의아하긴 했지만, 일단은 그 도움도 없는 것보단 나을 상황이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저 무크 녀석부터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급했다.

[알았어. 도와줄게.]

"날 화나게 했으니 그 대가를 받아야지? 나루?"

무크가 손에서 뼈 소리를 내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나마 좀 떨어져 있을 때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있어보이진 않았는데 이렇게 다가오기 시작하니 무크와 나의 체격차이가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 녀석은 날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야?

[장단 맞춰 줄 테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무크 녀석만 겁에 질리게 하면 나머지들은 오합지졸일 뿐 이었다. 바람을 이용해서 가장 간단하게 그리고 효율적이게 무크에게 압박감을 줄 수 있는 마법흉내를 내면 충분히 먹힐 것 같았다.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래, 배짱 있게 가자. 오크마을에 끌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다. 옛말치고 틀린 말은 그다지 없으니 믿어보자!

"뭐? 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무크 녀석이 비웃었다. 간단히 오른손을 무크 앞 쪽으로 쭉 뻗었다. 그러자, 내 주위로 바람이 서서히 불어오더니 땅바닥에 떨어져있던 나뭇잎 하나가 민들레 씨앗이 떠오르 듯 바닥을 향해 있던 내 손바닥 아래까지 떠올랐다. 이거 정말 마법같은데?

"다가오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이야기했어. 마법에 당하고 싶지 않다면."

마법이란 단어가 나오자 무크가 흠칫했다. 글은 아직 잘 몰라도 여러 이야기를 바람에게 들은 나는 마법이 그렇게 무서워할 것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 촌장님이 글이나 상식을 가르쳐주는 날에도 빠지기 일쑤고 글은 나보다 더 모르는 무크 녀석이 마법에 대해 자세히 알리가 없었다.

"뭐야! 그건!"

무크 녀석은 이제 서야 내 손바닥 아래에 떠있는 나뭇잎을 본 모양이었다. 정말 둔한 녀석이었다. 무크 녀석 뒤로 패거리 녀석들은 이미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저 녀석들도 무크보다 잘난 것은 전혀 없는 녀석들인 것이었다. 무크 녀석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 지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패거리와 리아 앞에 있는 것 때문인지 섣불리 도망은 치지 못 하고 안절부절 그저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좀 더 극적인 효과가 필요할 듯 했다. 나는 손을 앞으로 뻗은 상태에서 엄지손가락만 들어 올려 무크를 가리켰다. 그러자 어디선가 다른 나뭇잎들도 날라 오더니 나뭇잎이 나비모양처럼 겹쳐졌다. 그리고는 나비가 꽃을 향해 날라 가듯이 무크를 향해 날라 가기 시작했다. 무크 바로 얼굴 앞까지 날라 가더니 무크의 앞머리가 뒤로 넘어갈 정도의 바람을 남기며 다시 원래의 나뭇잎들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다음엔 널 개구리로 만들어버릴지도 몰라. 난 그렇게 참을성이 많은 편은 아니거든. 웬만해선 마법은 숨기고 살려고 했는데. 네 녀석 때문에 들통 났잖아!"

물론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 허세도 도발처럼 무크에게는 너무나도 잘 통했다. 무크는 내가 소리 지르자마자 등을 돌리고 마을로 도망쳐버렸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연기 잘 하네.]

내가 봐도 꽤 괜찮은 연기였다. 다리가 떨리는 것을 막느라 엄청 고생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론 무크 겁주는 것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리아가 있는 쪽을 돌아보자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리아를 생각 못 하고 마법쇼를 펼친 것 이었다. 뭐 어쩔 수 없는 건가.

“저기, 도와줘서 고마워.”


리아가 그나마 용기를 낸 듯 나한테 다가와 감사의 인사를 했다. 어떻게 보면 리아가 무크보다 용감한 면이 있는 것 같았다.

[용감한 아가씨인데?]

“아냐. 괜찮아. 내가 원해서 제멋대로 나선 거니까.”

무엇보다 나 혼자였다면 이렇게 하지 못 했을 것 이었다. 이번만큼은 이 바람 녀석에게 고마웠다. 이 녀석 덕분에 무크에게 밀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야, 너 얼굴 빨갛다?]

내가 이렇게 부끄럼타는 성격이었던가? 괜히 나한테 화가 났다. 이럴 때 쿨한 행동이 되면 좀 좋아. 그 때, 리아가 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내 얼굴이 그렇게 웃긴가?

“너 그거 속임수였지? 네가 마법이라니 말도 안 돼.”

그게 속임수라고 믿는 건가? 나쁠 것은 없었다. 리아가 나를 무서워하는 것 보단 야 그게 속임수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속편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속임수였고 말이다. 아니 바람과 말한다는 점에서 이미 나는 마법사인건가?

“뭐, 그렇지.”

대강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역시 일단 착하게 살고 볼 일이었다. 착하게 살다보니 이런 행운도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또 자만심에 가득 차 있겠지.]

옆에선 바람의 한심하단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뭐라 하든지 지금의 내 기분은 그야말로 살아오면서 느껴봤던 기분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그 뒤로 나는 리아와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 한 번이라도 눈을 마주치게 위해, 그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난리치던 시절은 옛날과 같이 느껴졌다. 보고 싶으면 언제든 놀자고 찾아가도 되었고, 어떤 때에는 리아가 먼저 놀자가 찾아오기도 했었다. 물론, 서로 사귀자해서 사귀자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위에선 어느 새 나와 리아를 마을대표 연인으로 뽑고 있었다. 무크 녀석이 뒤에서 분해하는 모습도 보였었다. 무크 녀석은 엄청 분해하면서도 내가 마법사라는 오해를 아직 풀지 못 하였는지 나에게 덤벼오지는 못 했다.

그런 나름대로 편안한 날들이 평생 이어질 것만 같았다. 이 수다쟁이 바람도 끈질기게 안 떠났지만 지금이 되선 이 바람이 없으면 아쉽고 서운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래, 그렇게 된 건가? 그렇다면 수도로 가야지. 암 그렇고말고.”

리나 네 부모님들이 집에 찾아와서는 뭔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자세히 듣진 못 했지만, 이것 한 가지만큼은 너무나도 똑똑히 들렸다.

"저희 수도로 올라가게 되었어요.”

리아 네 가족이 전부 이 나라의 수도로 올라가게 된 것 이었다. 그 동안 사귀는 듯 안 사귀는 듯 그냥저냥 지내왔었다. 굳이 사귄다고 못 박고 싶지도 않았다. 어른들이야 어린애들끼리 사귄다고 하면 좋게 보시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언젠간 이라고 밀어왔던 고백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달았던 것 이다.

[야, 너 어떻게 하려고?]

“좀 도와주라.”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선물. 물질적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잊어보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그런 멋진 마음에 남는 선물을 주고 싶었다.

“나루?”

그녀가 약속된 장소로 나와 주었다.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바람에게 신호를 주었다. 바람으로 인하여 미리 한 쪽에 피워두었던 불꽃이 기름을 적신 줄을 따라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낮에 미리 꺾어 뿌려둔 꽃송이들이 둥실 떠올랐다. 꽃의 정령들이 불의 원 안에서 춤을 추며 잔치를 벌이는 듯 하는 모습이었다. 의도했던 장면은 충분히 나왔다. 이제 한 마디의 용기가 필요할 뿐이었다. 그녀에게 내 진심을 전할 수 있는 한 마디면 충분했다.

그녀가 떠나갔다. 그녀가 떠나가서야 알게 된 리아의 가족이 수도로 떠나게 된 이유는 그들의 친척이 수도에서 상인으로 성공하여 그 가족들과 같이 지내자며 불렀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찌되었든 그 쪽으로 가는 것이 리아가 생활하는 것에는 훨씬 편할 것 이었다. 이런 산골짜기에 붙어있는 마을보다는 여러 볼거리, 먹을거리가 넘치는 수도의 거리가 훨씬 재미있을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좋은 것 이었다.

[또 편지 쓰냐? 미래의 아내라고 아주 지극정성이구나.]

“미래의 아내는 무슨 아직 어떻게 될 진 모르는 거잖아. 지금은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가지라도 더 찾아서 하는 것뿐이야.”

[그 자리에서 거절당하지 않은 이상 80%는 성공한 거라니까?]

바람의 말대고 그 날의 고백은 거절은 당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내 마음이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었다. 어찌 되어진 것이 나면 그녀가 대답을 미룬 것 이었다. 나도 단지 그 때에는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 대답을 딱히 원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조금만 더 용기가 없었더라면 그 날 고백하고 바로 마을로 도망쳤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대답을 미루었다고 해서 그렇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멀리 떠나는 입장에서 나에게 고백을 받은 그녀가 훨씬 당혹스럽고 고민스러울 것 이었다. 그 날 그녀와의 연락은 계속하기로 했다. 이 주일에 한 번 그녀의 삼촌의 집배원이 우리 마을을 방문해 나와 그녀의 편지를 전달해주었다. 게다가 바람의 도움으로 그녀의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이면 충분했다. 먼 훗날 내가 어른이 되어 그녀가 그 때도 정혼자가 없다면 내가 당당히 찾아갈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좀 더 참아도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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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나루라는 바람의 마법사와 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그 마법사의 아름다운 아내는 대륙을 여행하며, 그들만의 이야기를 써갔다고 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인간들과 바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나갔으며, 그리고 어디서부턴가 흘러나온 그 둘의 어릴 적 풋풋한 이야기는 대륙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퍼져나갔다. 그들의 전설을 다루는 책이라면 그 이야기는 꼭 첫 장에 기술되었다. 물론, 그 이야기가 어느 정도까지 진실이고 어느 정도까지가 각색된 것인지는 후세의 사람들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전설로 전해지는 인물들의 평범하고 풋풋한 이야기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전설들에게는 색다른 이야기로 읽혀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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