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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여동생이 준 연필

2011.06.01 23:4306.01

여동생이 준 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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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 나무가 종이를 긁는 소리와 함께 손에 느낌이 전해진다. 어느새 심이 다 닳았나보다.
이 연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쓰다쓰다 이제는 손가락 한 마디정도만 남았다. 완전히 못 쓸 것은 아니라도, 이쯤되면 버려야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책상에서 일어나 두 걸음만 가면 쓰레기통이 있다. 연필 한 번, 쓰레기통 한 번. 또 다시 연필 한 번, 쓰레기통 한 번. 나는 몇번이나 그 둘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커터칼을 꺼내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정말 마지막이다.


1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다.
"야, 미쳤어?"
시원한 반말과 함께 내 허벅지에 발차기가 꽂힌다. 생각보다 묵직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무릎이 굽혀진다.
"너 왜 내 물건 함부로 만져? 기분 나쁘니까 손대지 말라고 내가 말 했잖아!"
'내가 말'부터 소리가 엄청 커진다. 언성이 높아질대로 높아진 녀석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또다시 날 발로 걷어찼다. 이번에는 예상된 공격이니만큼 나도 팔꿈치로 가드를 올렸다. 녀석의 발등이 내 팔꿈치로 날아와 자진해서 박힌다. 녀석은 발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아아아아!"
"이게 진짜... 봐주니까 한도끝도 없이 기어오르네."
나는 아직도 얼얼한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일어났다.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녀석의 등을 지그시 밟았다.
"엄마한테 다 이를거야... 당장 발 떼라."
"일러봐. 일러보라고."
"진짜 이를거야... 이른다고 말 했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조금 더 세게 녀석의 등을 눌렀다. 살짝 숨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녀석은 입술을 꽉 깨물며 나를 노려보았다. 밟히고 있는 주제에 건방진 눈빛이다.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으으윽..."
"내가 한 두세달 참아주니까 만만하지? 어? 그래서 니가 뭐라도 된 것 같던?"
최대한 악랄하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겁을 주기 위해 분위기를 바꾸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도 녀석의 눈빛은 여전하다. 오히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고 표정에 여유가 묻어난다. 안 되겠다. 나는 언성을 조금 높이며 소리쳤다.
"까불지마라. 경고했다."
"너 지금 화 안 났지?"
단숨에 정곡을 찌르는 그 한 마디에, 나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녀석은 이겼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 지금 화 안 났어. 진짜 화낼때 버릇이 하나도 안 나왔거든. 왜 연기를 해? 화 안나면 그냥 내버려둬."
"화가 안 나? 여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게 개념없이 반말이나 찍찍 해대고 틈만나면 걷어차는데 화가 안 나?"
"나도 그게 궁금해. 내가 이렇게까지해도 왜 화를 안 내? 난 네가 내 연필에 손가락만 갖다대도 온몸에 소름이 돋고 눈앞이 아찔해. 내가 막대하는 게 좋아? 그래서 일부러 내 물건 만지고 그러는거야? 변태새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도 사실 잘 모르겠다. 여동생이 나에게 대드는게 기분 좋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기분 나쁘지도 않다. 여동생의 물건을 만진 일은 대부분 실수거나 생각 없이 건드려본 게 전부니까 고의성은 없지만, 그때마다 나를 변태로 몰아가는 여동생을 봐도 별로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소름이 돋고 눈앞이 아찔하다는 말을 들어도 그냥 그러려니 한다.
"허세 부리지 말고 발떼라."
여동생의 목소리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말 없이 발을 떼고 물러섰다. 여동생은 일어서서 나를 또 한번 매섭게 노려보고는, 방금 내가 만진 연필을 쥐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쾅하고 있는 힘껏 방문을 닫은 여동생은, 저녁을 먹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2
내 여동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올해 중학교 3학년으로 그럭저럭 학교생활도 잘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그런 녀석이다. 열심히해도 성적은 잘 안 나오는 모양이지만,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결실이 있을 테니 포기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과자는 감자가 들어간 것이면 무엇이든 좋아하고, 커피는 블랙커피만 마신다. 내가 아는 특징 중 가장 특이한 것은 다들 쓰는 샤프 대신 연필을 쓴다는 것.
내가 여동생에 대해 아는 것은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다. 여동생에 대해 몰라도 누구 하나 내 여동생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없고 관심을 가지더라도 그냥 나도 모른다고 하면 다들 납득하고 넘어간다. 난 여동생을 몰라도 아무 상관 없다.
"야, 너 내 연필 훔쳐갔냐?"
갑자기 내 방으로 들이닥친 여동생. 녀석은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걷어찼다. 바닥에서 뒹굴며 쏟아낸 내용물들 틈에서 필통을 보더니 다짜고짜 열어 탈탈 털어낸다. 당연하지만 연필 같은 건 없다. 난 샤프를 쓰거든.
"어디 숨겼어!"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날 범인으로 생각하는 걸까? 여동생은 날 죽일 듯이 노려보다 샤프를 주워 나에게 던졌다. 아무리 다 넘어가도 샤프는 꽤 날카로운 물건이기 때문에 주의를 요하고 싶었지만, 그럴 틈도 없이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가 벽에 꽂혔다.
식은 땀이 흐른다...
"난 안 훔쳤어. 다른데 가서 찾아봐."
"네가 안 훔치면 누가 훔쳐? 좋은 말할 때 빨리 내놔."
좋은 말도 아니고 말도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적당히 무시하고 바닥에 흩어진 교과서와 노트를 정리해 다시 가방에 집어 넣었다.
"야, 내 말 안 들려?"
"들려. 하여튼 난 안 훔쳤어."
"이게..."
여동생은 인상을 팍 쓰더니 이제 정리가 다 끝나가는 가방을 한번 더 걷어찼다. 가방은 벽에 부딪히더니 또 내용물들을 뱉어냈다. 신경쓰지 않고 다시 주으려고 하자, 여동생은 내 발을 꾹 밟으며 소리쳤다.
"무시하지 마."
"무시 안 했어."
"무시했어."
"알았어. 잘못했으니까 일단 발 떼."
"싫다면 어쩔건데? 엄마한테 이르려고?"
내가 넌줄 아냐. 나는 다른 한 손만으로라도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동생은 발에 더 힘을 주었다. 점점 강해졌지만 맨발이라 그런지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난 결국 한 손으로 책들을 모아 가방에 차례차례 넣었다.
"화라도 좀 내는 게 어때? 벽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
"난 벽이라서 기분 안 나빠."
"미친 새끼."
여동생은 날 미친 놈으로 몰아가며 발을 떼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음 공격을 위한 준비 동작일 뿐. 여동생의 발은 무릎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번엔 좀 아팠다. 몸이 가벼워서 망정이지 나같은 놈이 밟았다면 손가락이 나갔을 것이다.
"됐어. 상종을 말아야지."
여동생은 그렇게 말하더니 가방을 한번 더 걷어찼다. 기껏 정리한 게 또 쏟아지고 말았다. 오늘만 벌써 세번째다. 여동생은 날 죽일듯한 눈빛으로 한번 더 노려보더니, 그대로 홱 돌아섰다. 나는 신경쓰지 않고 또 책을 정리했다. 이번엔 손이 둘 다 있으니 훨씬 편했다.
저벅저벅, 여동생이 내 방 밖으로 걸어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3
그 연필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남자친구한테 받은걸까? 아니면 멀쩡히 살아계신 우리 부모님의 유품이라도 되는 걸까? 여동생은 그 날 이후로도 틈만 나면 연필을 돌려달라며 시비를 걸었다. 학교나 학원에도 들고 갔을테니 집에 없을 수도 있지 않냐고 말해보았지만, 너나 잘하라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이제 그만 좀 하자. 내놔."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이제 그만 좀 해. 아무리 나한테 찾아봐도 나한테 없는 걸 어쩌라고. 너 내가 연필 쓰는 거 본 적 있어?"
"어디 다른데 썼겠지."
"내가 네 연필을 다른데 쓰면 어디다 쓰는데? 그리고 연필 하나 살 돈은 있으니까 굳이 네 걸 훔칠 필요도 없잖아."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하여튼 내놔."
항상 이런 식이다. 앞뒤도 없고 위아래도 없다. 여동생은 그날도 온 집안을 쑤시고 다니며 나에게 책임을 물었다. 하지만 그 날 대화로 뭔가 깨달은 게 있었다. 그냥 하나 사다주면 편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싸움이 끝나자마자 집 앞에 있는 문구점으로 가 연필을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전에 만졌던 그 연필이 있었다. 그냥 검은색으로 칠해진 심플한 디자인이었기에 기억할 수 있었다. 검은 연필은 연필 코너 중에서도 한 가운데에 정직하게 꽂혀있었다.
다음 날도 어김없이 여동생이 싸움을 걸어왔다. 문이 부서져라 발로 걷어차며 들어와서는 또 다짜고짜 연필을 내놓으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검은 연필을 꺼내 녀석에게 건네 주었다. 녀석은 벙찐 얼굴이 되어 뭐라 알아듣지 못할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 됐지. 이제 가. 연필 훔쳐서 미안했다."
"이건 내 것이 아니야."
"알았어. 근데 똑같은 거니까 상관 없잖아."
"..."
여동생은 검은 연필을 내려다보며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관심 없다. 나는 그러려니하고 하던 일에 집중했다. 분하지만 연필을 되찾았으니 더 이상 귀찮게 할 일도 없겠지.
그때였다. 우드득하는 소리가 들리고, 눈 앞으로 무언가 얇고 검은 것이 지나갔다.
"누가 연필 사달래? 내가 고작 연필 사달라고 이 난리를 피웠겠어? 생각 안 해? 머리는 왜 있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말을 끝낸 여동생은 나머지 하나 남은 연필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나에게 바싹 다가왔다. 어금니를 꽉 앙다물고 주먹을 부르르 떤다.
"난 분명 네가 훔친 연필을 내놓으라고 했어. 잃어버렸으면 찾아내라고 했어. 알아 들었어?"
난 고개를 저었다.
짝─
온 세상이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그 때문인지, 오른쪽 뺨이 얼얼하다.
"얼마나 더 그딴식으로 나오나 보자고. 나쁜 새끼."
제 분에 못 이겨서 콧바람을 연신 뿜어댄다. 녀석은 그렇게 말하곤 또 홱 돌아섰다. 녀석의 긴 머리가 나의 얼얼한 뺨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있는대로 힘을 주어 쿵쿵 걸으며 밖을 향한다.
그리고,
"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녀석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쓰러졌다. 하지만 걱정해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참견하지 말라며 욕이나 돌아올 게 뻔하니까. 녀석은 한동안 자기 다리를 쳐다보더니, 다시 일어나 자기 방으로 돌아가버렸다.


4
내가 즐겨쓰는 샤프가 없어졌다. 매일 이 시간쯤이면 내 방으로 쳐들어오던 녀석 잠잠한 걸 보아 여동생이 훔친 게 분명하다. 난 굳게 닫힌 녀석의 문에 노크를 했다.
"왜."
"할 말이 있어."
밖에서 이야기하라고 할 줄 알았더니, 생각 외로 순순히 문을 연다. 여동생의 방 안은 돼지우리같은 내 방에 비해 상당히 깔끔하고 산뜻했다. 여동생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한번도 들어온적이 없었으니 나름 신선한 느낌도 있었다.
"용건이 뭔데?"
"내 샤프가 없어졌어."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여동생은 도끼눈을 뜨고 나에게 한발짝 다가왔다. 무섭게 나를 올려본다.
"그래서?"
"네가 훔쳐간..."
퍽─
내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녀석의 손바닥이 내 목 옆을 때린다. 별로 당황스럽지는 않았지만 왜 목을 때린건지는 의문이었다.
그것은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던듯 하다.
"어...?"
여동생은 자기 오른손을 쥐었다폈다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도 빨갛게 달아올랐을 내 목과 자기 손을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어깨를 돌려보거나 손을 터는 등 이상한 짓을 계속했다. 내가 눈 앞에 있다는 것도 잊은 듯하다. 어쨌든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나는 계속 말했다.
"네가 훔쳐간 게 아닐까 해서. 너는 내가 네 연필을 훔쳐간 걸로 알고 있으니까, 그 복수로 내 샤프를 훔쳐간 거 아니야?"
팔이 우뚝 멈춘다. 그리고 녀석의 눈이 나를 향한다.
"지금 내가 네걸 훔쳤다 이 소리야?"
"의심가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
"내가 넌 줄 알아? 정신병자 새끼."
여동생은 그렇게 말하곤, 다시 오른팔을 들어 내 뺨을 후려칠 준비를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준비동작이 너무 눈에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오른쪽 어깨를 감싸쥐며 눈을 떴다.
"어어? 어?"
분명 이번에는 뺨을 맞을거라 생각했는데, 여동생이 때린 곳은 의외로 '어깨'였다. 눈을 떠보니 여동생은 그대로 주저 앉아 불안한 얼굴로 자기 다리를 쳐다보았다.
뭔가 이상하다.


5
처음에는 하루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었다고 한다. 불안하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큰 일도 아니었고 조금 있으면 원래대로 돌아오니 신경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잦아지고 워낙 이상한 일이라 결국 병원을 가보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병원에서 하는 말,
"더 큰 병원을 찾아가봐야겠는데요."
그래서 녀석은 더 큰 병원으로, 더어 큰 병원으로 점점 규모를 넓혀나갔다. 그리고 그럴수록 내 여동생은 나약해졌다. 시간이 지나며 증세가 심해지는 것도 있었지만, 그렇게 큰 병원으로 가서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녀석의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 집 안에서야 넘어지고 쓰러져도 고작 집이지만 집 밖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결국 여동생은 학교를 나가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병원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는 안정을 취하기로 했다.
무슨 말을 해도 어차피 좋은 대답이 돌아오기 힘든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무관심으로 일관할 일도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괴로워하는 여동생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엔 평범하고 위험한 말을 하기로 했다.
"괜찮아?"
왜 몸이 안움직이는지도 모르는 여동생에게 기껏한다는 말이 '괜찮아?'라니. 내가 들었다면 화를 냈을 것이다. 염장지르는것도 아니고 평상시엔 관심도 없던 오빠가 갑자기 저런 말을 하면 누구라도 기분이 언짢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 중에 저보다 적절한 것은 없었다. 무슨 말이 돌아오든 이해하기로 마음 먹었다.
"괜찮아. 멀쩡해."
"아, 그래?"
나는 부엌으로 가 가스 레인지에 물을 올렸다. 생각보다 싱거운 반응에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라면 먹을래?"
"아니."
"그래놓고 한 입만 달라고 하면 안 준다."
"걱정 마. 안 먹어."
간만에 우리 남매에게는 그리 일상적이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라면을 다 끓인 후 정해지기라도 한 듯 라면을 끓여 동생 앞에 가져가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생은 유혹을 못 이기는 척 한 입 달라고 할 것이다.
"한 입만."


6
동생은 밤새도록 울었다. 걷는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팔굽혀펴기도 할 수 있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있고, 가족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데 그게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한다. 자기 몸을 믿을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전속력으로 100m 달리기를 해도 상관 없지만 집 밖에서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보호자를 꼭 동반해야한다. 이렇게나, 이렇게나 건강한데도 집 밖으로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다니.
병원에서는 무슨 병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일상 생활 중에 아무 징후 없이 갑자기 근육이 국지적으로 기능을 정지하는 증세라는데, 어떻게 발전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댄다. 그 빈도가 잦아지는걸 봐서 나중에는 완전히 쓸 수 없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더럽고 치사한 병이다.
"차라리 굳어버리지..."
언젠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걸 들었다. 이제부터 내 여동생은 아프지도 않은데 불안에 떨면서 살아야한다. 눈 앞에 밝은 세상이 있고 건강한 몸이 있는데 아무것도 못한다. 부서지느니만 못한 희망 고문이다. 힘을 내고 싶어도 힘을 낼 수가 없다. 이미 힘이 있는데 어떻게 내나.
나는 항상 집에서 여동생을 보살피기로 했다. 학원도 끊고 집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재수생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
"아무거나."
그럭저럭 밝은 목소리다. 내가 안볼때마다 펑펑 우는 주제에 나만 나오면 애써 웃는다. 병에 걸린 후 여동생은 완전히 변했다. 아니, 변했다기보다는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게 더 정확할까. 고등학생이라고 바빠져서 말을 안하다보니 잠깐 사이가 멀어졌지만, 지금은 재수생 신분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요 일년간 봤던 막무가내의 여동생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국 잘 끓였네. 맛있어."
"응."
여동생은 뜨거운 국도 못 먹는다. 혹시 밥을 먹던 중에 팔이라도 마비되었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발작 같은 거에 비하면 그나마 얌전한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위험한 일은 얼마든지 많이 있었다.
그래도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불치병 환자들보다는 훨씬 나았다. 집에만 있으면 갑자기 마비증세가 와도 사실 아무 일도 없고, 가끔 심한걸 제외하고는 일상생활을 그대로 유지했다. 간호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편했다. 공부하다가 여동생이 부르면 나가서 시중을 들어주고 다시 공부하면 된다. 꼬박꼬박 밥 챙겨주고, 가끔 말상대가 되어주는 정도면 충분하다. 아, 마지막 건 수능 공부한다고 지친 내 말상대를 여동생이 해준 것일 수도 있겠다.
하여튼 한동안 여동생과 나는 그렇게 살았다. 여동생의 몸이 본격적으로 안 움직이기 전까지는.


7
여동생은 더 이상 다리를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그 이후로 난 여동생의 방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잠도 이불을 덮어놓고 여동생 옆에서 누워 잔다. 여동생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TV를 방 안에 들여다 놓았지만 공부하는데 크게 지장은 없었다. 그렇게 몇주가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야."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해도 호칭은 변하지 않았나보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러고보니 둘만 있어서 호칭을 부를 일이 없었다. 주어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용건만 말해왔기 때문이다.
침대를 보니 여동생은 나를 등지고 누워있었다. 언제 끈건지는 모르겠지만 TV도 꺼져있었다. 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건가하고 샤프를 내려놓았다.
"내가 불편하지 않아?"
"전혀."
원래 학교 다닐때도 수업보다는 자습을 좋아했던 나였다. 학원정도는 다니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었다. 오히려 집밖으로 못 나간다니 정신 팔 일도 없고 좋았다.
"왜 그래?"
"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왜 내가 해달라는건 다 해줘? 짜증나지 않아?"
"여동생이잖아. 그리고 그걸 떠나서 진심으로 안 힘들어."
녀석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끝인가 하고 다시 샤프를 잡으려는 순간, 녀석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여동생이지?"
난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하고싶은게 생겼어."
"앉아서 할 수 있는 거야?"
"난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 거야."
왠지, 여동생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몇초간 있었던 짧은 침묵동안 나는 오로지 그것에 대해서만 떠올렸다.
"난 여동생이야."
"...그래."
난 대답했다.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난 여자야."
대답해야할지 대답하지 않아야할지 알 수 없었다. 망설이는 동안 여동생이 다음 말을 꺼냈다.
"넌 내 오빠야."
"응."
불안해진다. 이 상황을 피하고 싶다.
"그리고 넌 남자야."
마찬가지로 대답해야할지 대답하지 않아야할지 알 수 없었다. 뭐라고 말리긴 말려야하는데 이걸 어떻게 말려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말린 다음에는? 말린 다음에는 뭐라고 하지? 난 어차피 여동생 곁에서 계속 있어야 한다. 내일까지 갈 것도 없이 이 대화가 끝난 그 순간에도 난 여동생의 곁에 있어야 한다. 말리고 나서 난 어떻게 처신해야할까.
"나 혹시 이러다 죽으면 어떡해?"
"안 죽어. 걱정 마."
"그럼 나 혹시 이러다 안 죽으면 어떡해...?"
녀석의 목소리가 떨린다. 죽어도, 살아도 고통이 되는 녀석의 입장이 떠올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근데 난 아마 죽을 것 같아."
그런 생각 하지 마, 희망을 가져.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방금 녀석의 말을 듣고도 이런 허울 좋은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난 벌써 죽기에는 너무 아까워."
"그래."
모처럼 속 시원히 긍정할 수 있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아차, 바로 다음 순간 난 녀석의 꾐에 걸려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못 해본 게 많아."
내가 말을 하든 안하든 모두가 녀석이 원하는 상황대로 돌아간다. 말을 한다면 녀석이 바란 대답이고, 말을 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녀석의 차례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선택지가 사라져간다.
"넌 키스 해봤어?"
그리고 마침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8
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아니 내가 느낀 기분이 어떤 것인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중학교 3학년짜리 여자아이라면 남자에게 흥미를 가지는 건 당연하다고 본다. 주변에 남자가 없으니 갑갑한것도 갑갑할테고, 거기서 어떤 식으로 뒤틀린 행동이 나와도 오히려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 뒤틀린 행동이 나를 대상으로 삼을 줄은 몰랐다. 근친애는 내 상상을 뛰어넘는 금기였다. 침대가 있는 같은 방에다 다 큰 남녀 두명을 가둬놓는다면 웬만하면 일을 벌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남매는 아니었다. 한 집에서 살고 한 방에서 같이 자고 손을 잡아도 연애 감정따위는 생기지 않는다. 난 이 당연한 사실을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당연하니까. 가끔 근친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미친놈들이라며 속으로 한번 씹어주고 정상은 나와 내 여동생 같은 관계라는 것을 살아생전 의심해본 적이 없는 나였다.
미성숙한 첫키스였다. 어릴적에 가끔 했던것처럼 입술을 쭉 내밀고 쪽 했던 뽀뽀가 아니라, 입술보단 혀를 사용하는 '키스'였다.
여동생은 내 밑에 깔린 채 나를 끌어안았다. 입을 떼기도 전에 힘이 풀려 이불 위로 떨어지긴 했지만 팔힘은 아직 꽤 강했다.
키스를 끝내고 나와 여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눈을 쳐다보며 첫키스의 맛이 어땠는지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그만 일어나려고 하자, 녀석은 멀쩡한 다른 팔로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
"..."
여동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
"..."
"할래?"
바로 방금 전 내가 범했던 그 입술이, 기어코 하지 않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9
나에 대한 여동생의 감정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무슨 생각으로 그런 요구를 했을까. 난 왜 그런 요구를 받아들였을까. 어쩌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버린 걸까. 내가 보기에 여동생은 나를 아주 싫어했었고, 병에 걸리자 아무 이유 없이 희생해주는 오빠에게 고마움을 느껴 조금 부드럽게 변한 것 같았다. 애초에 몸을 섞을만한 관계도 아니며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그 무언가를 뛰어넘을만큼 열렬한 사이도 아니었다. 여동생을 여자로 본 적이 없는것은 당연하고 여동생도 날 남자로 볼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 입장에선 '어느날 갑자기 생긴 일'이었다.
일이 끝난 후 여동생은 울면서 웃었다. 훌쩍훌쩍 울길래 왜 우냐고 물어봤더니, 주인 말도 안들으면서 아플건 제대로 아프다며 피식 웃었다. 그 뒤로는 시트에 묻은 피는 어쩔 거냐며 사소하고도 현실적인 문제를 꺼내기도 하고, 기분은 어땠냐면서 묘하게 부끄러운 질문을 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놓고 봤을땐 밝아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난 밝아질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앞으로 어떡해야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내 머릿속은 후회와 혼란으로 가득 찼다.


10
결국 시간이 지나도 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이 생활이 익숙해지고 편해졌다. 당연하지만 그 일은 기분이 좋았다. 곧 후회가 밀려들 걸 알면서도 나는 여동생을 안을 수 밖에 없었다. 여동생도 점점 변해갔다. 처음에는 울 정도로 아팠던듯 하지만, 나중에는 하는 내내 황홀한 표정이었다. 마치 여동생의 병이 진행되는 것과 같이 점점 횟수도 잦아지고 위험해졌다. 그렇게 우리 둘의 정신병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둘 중 하나라도 멈추자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동생은 그런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기쁨을 찾았고 나 역시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나중에는 내가 먼저 덮치기도 했다. 여동생은 꺅하고 웃으면서 날 받아주었고, 난 짐승처럼 여동생을 범했다.
그러는 중에도 여동생의 병세는 점점 더 심해졌다. 마비는 점점 더 심해져서 목 위의 근육과 손가락을 간신히 움직이는 정도가 되었다. 여동생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차라리 움직일 수 있을 때보다 마음은 덜 괴롭다며 웃었다.


11
"오빠."
"응?"
"나 더 살고 싶어."
이 여동생은 내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게 하는데 달인이다. 더 살고 싶다는데 난 대체 무슨 말을 해야하나.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데 더 살고 싶어. 그게 너무 싫어."
"만일 더 오래 살 수 있다면 뭘 더 하고 싶어?"
덕분에, 말을 돌리는 기술이 조금 늘었다. 여동생은 한참 생각하다 조금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별로 하고 싶은 건 없어. 그냥 살아 있고 싶어."
"그래도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냐."
"오빠."
"응?"
"내가 지금 행복하다고 말하면 믿을 수 있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죽어가는 몸으로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행복할 리 없다.
"그냥 아무것도 안해도 좋아. 못 움직여도 좋아. 그냥 이렇게 누워만 있어도 좋아."
"움직일 수 있으면 더 좋을 거야. 놀이공원도 갈 수 있고 노래방도 갈 수 있잖아."
"움직이게 해준대도 안 움직일거야."
"...그건 왜?"
"딱 열 달만, 더 이상은 필요 없으니까 열 달만 더 살다 죽고 싶어."
1년이면 1년이지, 애매하게 열 달이 뭐야.
"오빠랑 나랑 사랑했다는 증거, 난 없어져도 사라지지 않을 증거를 남기고 싶어."
"같이 사진이라도 찍을까?"
"그거 말고."
"그거 말고?"
움직이지 않는 열 달, 그리고 사라지지 않을 사랑의 증거. 그때 나의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그날 밤 후회와 죄책감에 잠들지 못했다.


12
뒤틀린 호기심과 나약함으로 우리 둘은 시작했었다. 단순히 둘 다 사랑해본 적이 없어 정욕과 사랑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이끌림이 몸에 대한 것인지 마음에 대한 것인지도 모르는 채 우리는 밤낮 없이 서로에게 매달렸다. 결국 넘어선을 안 될 선을 하나, 둘, 셋. 세개나 넘어버리고 말았다.
한편 여동생은 거의 온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공부를 놓고 여동생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일과가 되어버렸다. 까짓거 상관 없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충격적인 여자에게 그 정도 시간을 쓰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욕망에 따라 몸을 섞는 대신 다정한 스킨십에 열중했다. 순서가 조금 바뀐 것 같지만, 손 잡는 것부터 시작해서 끌어안는 것까지 하나하나 익혀나갔다. 함께 누워만 있어도 행복하다는 기분이 든 순간, 난 이것이 단순한 정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매라는 점에서 그게 더 위험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난 기뻤다.


13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여동생은 표정조차 마음대로 못하는 상태가 되어있었고, 나를 제외한 모두들 벌써 여동생의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여동생이 죽어가는 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본인은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는 것 같았다.
"오빠."
"응."
"사실 나 오빠 싫어한 적 없어."
"응, 알아."
"거짓말..."
"하하하, 들켰네."
내가 멋쩍게 웃자 녀석은 입을 삐죽 내민다. 지금 녀석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정 표현이다.
"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여동생은 있는 힘껏, 그렇게 외치더니 눈을 감았다.
"쪽팔리니까 이렇게 하고 말할게."
"응, 응."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딱히 지금처럼 사랑한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고, 잘 생각해보면 중3이나 되어서 오빠 관심 듬뿍 받는다는게 더 이상하잖아."
"그런가?"
"근데 그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어. 나한테 너무 무관심한 오빠가 날 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오랫동안 생각해봤는데 역시 결론은 하나더라고. 싸우면 관심이 생길 줄 알았어. 그래서 말도 험하게 하고 발로 차기도 하고 그랬어."
"응."
"되게 사소하지? 관심병 환자처럼 엄한 사람 들들 볶고 화내고... 근데 진짜 기분 안 나빴어?"
"그냥 귀여웠어.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렇구나... 아, 오빠."
"왜?"
"연필 기억나?"
"네가 잃어버렸다던 그 연필?"
"그거 사실 아직도 내 방에 있어."
역시 그랬다. 아니,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나.
"연필은 핑계였어. 연필로 오빠한테 말을 걸 수도 있었고, 연필로 싸울 수도 있었고, 나중에는 연필로 화해도 할 생각이었어."
도대체 그 상황에서 어떻게 연필로 화해를 한다는 걸까. 나였으니 망정이지, 일반인이라면 절대 안 된다.
"근데 그랬더니 오빠가 어쨌는줄 알아? 새걸 사온거 있지."
"아무리 핑계라지만 집 앞에서 사오니까 그렇지."
"그땐 진짜 화가 나서 막 씩씩거리고 그랬어."
그러고보니 그랬던 것도 같다. 다른 때는 말그대로 날 도발하기 위한 거였다면, 그때는 진심으로 자기가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책상 두번째 서랍에 있는데, 오빠 가져."
"난 샤프 쓰는데."
"그래도 써줘. 내 인생에서 가장 귀여운 흑역사야."
나와 여동생은 키득키득 웃었다. 나는 여동생이 말한대로 두번째 책상 서랍을 열어 검은 연필을 찾아냈다. 볼펜은 서랍 속에서도 한 가운데에 정직하게 꽂혀 있었다.
"이게 바로 네 인생에서 가장 귀여운 흑역사란 말이지."
지금봐도 참 단순하다. 그냥 쭉 뻗은 육각 기둥에 검은색만 칠해져있다. 이거라면 몇백년이 지나도 촌스럽지는 않을 것 같다.
"커터칼은 어디 있어? 지금 당장 써볼게."
연필을 깎아본지 하도 오래돼서 잘 깎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타고난 손재주가 있으니 그럭저럭 괜찮겠지.
"응? 어디 있어?"
대답이 없다.
"커터칼 어디 있냐니까?"
천천히, 고개를 들어 뒤로 돌아 보았다. 여동생은 눈을 감은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커터칼... 어디 있어...?"
나도 모르게,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커터칼 어디 있냐고!"
난 여동생의 어깨를 흔들며 발광했다. 여동생의 고개가 힘없이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다. 거짓말이지, 거짓말이지? 나는 여동생의 가슴에 손을 얹어보았다.
"...응..."
그때였다. 여동생의 눈꺼풀이 힘겹게 올라간다. 여동생은 식은 땀을 흘리며 내 입술을 쳐다보았다. 심장은 아직 뛰고 있었다.
"오빠, 왜 화났어?"
"화 안났어."
"진짜 화낼 때 버릇이 나왔어. 오빠 지금 입술 막 떨려."
입술에 손을 갖다대 보았다. 녀석의 말대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장난이었는데, 속았지?"
"이따위 장난 하나도 재미 없어. 두 번 다시 하지 마."
"응, 알았어. 헤헤..."
녀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마 본인은 웃고 있다고 생각하나본데, 아까부터 흐르는 식은 땀을 보나 지금 이 표정을 보나 아픔을 참느라 힘이 드는게 빤히 보였다.
"오빠."
"응."
"오빠!"
"응."
"있지, 나 있잖아. 만약에. 진짜 만약에."
"응."
"병 다 나으면..."
"응."
"병 다 나으면..."
여동생의 눈이 감긴다.
"응, 병 다 나으면? 병 다 나으면?"
씨익, 여동생이 미소 짓는다.
"빨리... 병 다 나으면 어쩔건데? 나한테 시집올 거야?"
대답이 없다.
"또 장난 칠래? 나 이거 재미 없다고 했지?"
다시 한 번 더, 여동생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눈물 때문에 여동생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14
이걸 쓸 수 있을까. 이쯤되면 몽당연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해진다. 어떻게든 더 써보겠다고 볼펜 깍지에다 그것을 끼워보지만, 조금만 힘을 주면 안으로 쏙 들어가버려서 제대로 쓸 수가 없다. 어쩔 수 없다. 난 연필의 심만 가지고 써보기로 했다. 중지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아팠지만 어떻게든 참으며 여동생의 이름 석자를 써본다.
그렇게, 내 여동생의 인생에서 가장 귀여운 흑역사는 최후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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