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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삶의 이유

2011.05.22 19:5905.22

"그러니까 당신이 15억 인구의 운명을 좌우할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말이죠?"

"네"

그는 유리창 바깥으로 보이는 푸른 행성을 잠깐 바라본다.

"그리고 당신은 영웅이나, 미친 과학자나, 대통령이 된 사업가나, 사이비 종교 지도자나, 테러리스트가 아닌 신입 공무원이라고요?"

"맞습니다"

"어떻게 그런 권력을 얻게 된 거죠?"

"중앙 컴퓨터가 제게 이양했습니다"

"재밌군요. 그런 일을 인간에게 맡기나요?"

"음.. 그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중앙 컴퓨터는 고전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컴퓨터는 그저 명령을 내린 인간의 상상력을 가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 명령을 해석해서 실행할 뿐이지요. 그 컴퓨터가 생각한대로라면 인간을 죽이고 살리는 건 컴퓨터 스스로가 아닌 저 같은 인간이 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묻는다.

"그럼 왜 하필이면 신입 공무원인가요?"

"그것도 간단합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경력이 길어질수록 딴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중앙 컴퓨터 입장는 경력이 길수록 공정한 판단을 하기 힘들어진다고 판단합니다. 저희 사이에선 공공연한 사실입니다만, 보통 처음 공무원이 되고 평생 중 가장 큰 업무를 받게되고 그 이후 점점 업무가 가벼워집니다. 느-하라잡씨 주변엔 공무원이나 공무원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었나보군요"

"맞아요. 사실 전 공무원을 처음 보거든요. 아, 그럼 그것을 거쳤겠군요? 7일 고사"

"7일 고시에요. 물론이죠."

"정말 시험 중에 총을 맞기도 하나요?"

나는 물을 한모금 마시고 말한다.

"그건 모두에게 적용되는 일이 아닙니다만 총을 맞는 경우도 있죠. 중앙 컴퓨터가 시험하고 싶은 환경에 -즉 그 사람의 판단 편차가 가장 큰 것으로 계산된 환경에- 사람이 처해지는 것 뿐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는 물어볼 것이 다 떨어진 듯 시선을 거두었다가 다시 생각난 듯 내게 말했다.

"아, 그래서 어떻게 할 건가요? 15억이나 되는 사람들은?"

"그게 고민이죠"

내가 굳이 중계우주선의 카페 중 가장 비싼 최하층에서 물잔을 들이키고 있는 건 그 결정을 위해서였다. 컴퓨터가 부여한 3일 15시간을 거의 소요하고 앞으로 2시간 안에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컴퓨터는 결정을 힘들어하는 내게 이 카페를 권했다.

"클론이 14억 3천만?"

"네"

"그리고 문화와 유전자 다양성 지수가 100이 넘어가는 인간이 7천만?"

"그렇죠"

14억 3천만명인데, 그들의 다양성 지수는 1이다. 1의 14억 3천승은 얼마인가? 다시 말해 그들은 1인으로 대체 가능한 14억 3천만의 인간이다. 그들은 -혹은 그는- 클론으로 살아가는 걸 택했고 한 행성의 거의 모든 구역을 점유하고 있다. 한 편 지금 자신들의 행성이 파괴되는 재앙을 피해 살아남은 인간들이 그 행성으로 이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클론(들)은 조금의 양보도 없다는 통보를 보냈고 이에 중앙 컴퓨터가 중재에 나섰다.

"그 클론 인간은 참 나빴군. 자신을 조금 양보하면 공존할 수 있을텐데"

"대신 그 클론은 자신 전체의 목숨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았습니다. 평범한 인간인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 클론은 자신의 일부라도 포기할 수 없다는 방침입니다"

클론이 형성한 문화는 어떠한 모습인가. 그 행성의 다양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14억이 넘는 인간이 한 모습 한 뜻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건 그 클론에게 문화적 발전(혹은 도태)이 전혀 없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제 생각엔 아마..."

그는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쉽게 대체 가능한 쪽이 사라지는 게 낫겠죠"

"그 인간이 그렇지 않은 쪽의 200배이잖습니까"

"그런 인간이라면 언제든지 중앙컴퓨터가 찍어 낼 수 있어요. 14억이든 14조든 2년도 안 걸려요"

"굳이 그렇게 말하자면, 반대쪽도 4년이면 해결되지요"

인간이 스스로의 역사를 이어가며 고안해낸 많은 자기증명은 그들의 피조물에 의해 하나하나 파괴당했다. 이성, 과학, 예술, 역사, 인류애, 공동체 의지, 자아, 감정 심지어 폭력까지 중앙 컴퓨터의 시뮬레이션에 재현되고 발전되지 않은 영역이 없었다. 즉 다양성 지수고 14억 3천만이고 모두 헛소리이며 그따위 것들은 이 컴퓨터의 가공할 능력 앞에서 조금도 그들의 존재 의의를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 이상 인간은 도망칠 곳이 없다.

"하긴 제가 말하는 것들은 모두 생각해보셨을 것 같군요. 제가 주제 넘은 것 같네요"

"아니에요. 저도 그 정도에서 진전없이 맴돌고 있을 뿐이니까요"

나의 전자화된 상관이 내놓는 일거리 앞에서 난 고민하고 있다. 도대체 인간은 왜 사는가. 이 세상 어디엔가 분명히 자신과 같은 사람-혹은 그 시뮬레이션-이 있고,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면, 그 인간도 자신의 존재 의의를 고민하고 있다면 나는 도대체 왜 당장 행복한 주사를 맞고 영원히 잠들지 않는 것인가. 혹은 이 고민의 과정에는 의의가 있는가. 이 정도야, 아마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컴퓨터도 시뮬레이션 해보았을 것이다.

그가 커피잔을 비웠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우주 어딘가에는 끝나지 않는 고민을 하는 공무원이 있다는 걸 잊지 마시고요"

"물론이죠. 누구 덕분에 세계가 돌아가는데요. 그럼 수고하세요"

나는 또 누군가를 찾아 넋두리를 늘어놓을지, 식사를 할지, 들어가 잠이나 잘지, 인공 혹은 실제 여자와 시간을 보낼지, 아니면 이 고민과 이 고민의 시뮬레이션에 대한 고민을 계속할지 고민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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