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그녀의 초록색 우산

2011.05.19 04:5905.19

  잿빛 구름 사이로 햇볕의 편린들이 몸을 뒤채이더니 구름의 갈래갈래 사이로 짙은 명암이 도드라지자 창문은 갑작스레 비를 맞이한다. 그녀는 이불 아래 숨어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청명한 빗소리가 그녀의 귓전에 나지막히 내려앉자 그녀는 빗방울 속으로 침잠하는 느낌에 몸을 내맡긴다. 빗방울은 빗소리를 이끌고 빗소리는 그녀를 최초의 기억으로 소급시킨다. 아득하게 들리는 천둥소리에 그녀의 눈꺼풀이 스스르 감긴다 - 그녀는 목청껏 울고 있다. 그녀는 두세살 남짓 되어 보인다. 여물지 않은 곡성이 그래서 더욱 날카롭다. 분홍색 신발 한짝만 신은 채 엉덩방아를 찧으며 아기인 그녀는 계속 운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사위가 잠잠해지고 지는 땅거미에 대지로부터 습한 냉기가 스며들 무렵 그녀는 울음을 그친다. 지쳐 빠진 흐느낌으로 그녀가 몸을 떨때 한 여인의 손길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여인은 그녀를 안아올려 품에 안는다. 시린 엉덩이와 한기에 지친 아기의 몸뚱아리에 따뜻한 체온이 전달된다. 따뜻한 포옹은 포근한 감정을 전달한다. 흐느낌을 멈춘 그녀의 눈에 여인의 얼굴이 들어온다. 팽팽한 얼굴에 깊게 새겨진 팔자주름 사이로 여인의 입술이 옴짝달싹한다. 그녀는 어리둥절하게 여인의 얼굴을 다시 올려다본다. 여인은 빙긋이 미소를 띄우더니 그녀의 조그마한 귀에 대고 다시 한 번 입술을 옴직거린다 - 열음아 너의 탄생을 저주한단다.
  방문 돌쩌귀가 내는 비명소리에 열음은 눈을 떴다.
  치렁치렁한 남색 드레스 차림으로 홍옥순 여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미소 띤 얼굴로 들어오는 그녀의 팔자주름은 기괴하게 벌어져 있다. 열음은 자신이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인가 잠시 혼동했지만 땀이 식으며 등골을 훑어내리는 서늘한 한기는 너무도 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열음아, 벌써 열 두시가 넘었는데 아직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니. 여사는 다정하게 이마에 손을 짚어 보았다. 서릿발 같은 냉기가 머리를 휘감았다. 열음은 여사의 손을 뿌리치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열은 다 내렸어요, 홍옥순 여사. 홍옥순 여사는 미소를 띄우며 자신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큼지막한 홍옥이 그녀의 검지를 감싸고 있었다. 열음의 시선이 그녀의 반지에 잠시 머물렀다. 엄마가 시원하게 무국 끓여놨다. 상 차려서 갖고 오마. 홍옥순 여사가 방을 나가자 열음은 다시 누워 이불을 머리맡까지 끌어올렸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를 발음하는 열음의 입이 까끌까끌하게 서걱거린다. 엄마, 라는 단어는 누구에게 배운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엄마, 라는 말을 나 역시 홍옥순 여사에게서 배운 것인가. 열음으로선 알 길이 없는 문제였지만 그녀는 홍옥순 여사에게서 ‘엄마’를 익히진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홍옥순 여사가 나가자 열음의 귓전으로 다시금 빗소리가 이끌려 왔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빗방울은 사라지고 창문 위로 빗물이 끝없이 흘러 내렸다. 누워 있자니 다시 시선이 몽롱해졌다. 아득해지는 느낌 속을 부유하며 열음은 미소를 머금었다. 열일곱살에 어울리지 않는 팔자주름이 그녀의 입꼬리 양 옆으로 주욱 그어졌다.
  열음은 자신의 어린시절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기보다는 건져올릴 기억의 건더기가 거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최초의 소급점으로부터 쭉 이 방에 있어왔다. 열음에게 있어 그녀의 과거 - 어린시절을 구성하는 기억의 대부분은 방이 품고 있는 풍경의 조각들 뿐이었다. 언제나 잠겨 있는 적갈색 방문과 맞은 편 벽의 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격자창문이 서로를 마주보며 대치하고 있는 그녀의 방. 굳게 닫혀 있는 시커먼 방문과 그에 맞서 싸우기라도 하듯 언제나 활짝 열려 햇빛을 쏟아내던 격자창. 창문 오른편에 붙박혀 있는 커다란 나무 책상에 앉으면 고요한 밤하늘 격자창 오른편 구석에서 고개를 내밀던 초승달의 모습. 창문 너머로 보이는 좁은 골목길과 맞은 편 이층 창문으로 보이던 인간들의 단초 - 한 번도 자신이 직접 얘기를 건네보지 못한 타인의 잔상.
  방 안에서 열음과 소통하는, 열음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타인은 홍옥순 여사 뿐이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일곱살 때 처음으로 실감했다. 열음의 어린 시절 홍옥순 여사는 밥 먹을 시간이 되면 항상 일층에서 상을 차려 올라와 그녀의 방에서 그녀와 함께 밥을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여사는 밥상을 놔두고서는 그대로 일어나 방을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고 방문고리가 잠기는 소리가 열음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소반엔 열음의 밥 한공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소반머리 앞에서 일곱 살배기 열음은 악을 쓰며 울었다. 눈물이 마르고 울음소리에 마른기침이 자꾸 섞여들어도 열음은 피를 토할 듯이 고래고래 악을 쓰며 울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음에도 열음은 울음 소리로 굳게 닫힌 적갈색 방문을 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적갈색 방문은 표독스럽게 굳건했다. 아무리 울어도 그녀가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갑작스러운 추위처럼 몸으로 느껴졌을 때 열음은 울음을 그쳤다. 다음 날 아침 홍옥순 여사가 어제와 같이 밥상만을 남겨 두고 다시 내려가버리자 열음은 아무 말 없이 혼자 밥숟갈을 떴다. 그 후 열일곱살이 된 지금까지 열음은 자신의 이층 방에서 혼자 밥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절실하게 한 가지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소통의 유일한 창구는 홍옥순 여사 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더 근본적인 사실을 열음에게 일깨워 주었다. 열음에게 소통의 다른 통로를 극단적으로 막아버린 사람 역시 그녀의 어머니 - 홍옥순 여사 뿐이라는 사실을. 출구가 없는 사면 속에 있던 열음에게 빛이 된 것은 홍옥순 여사가 일주일에 세 번씩 찾아와 가르치던 글과 숫자였다. 문자와 숫자를 배우면서 열음은 격자창 왼편 구석에 쌓아놓은 책더미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것들과 소통한다고 믿고 있던 열음은 책더미들 속에 열려 있는 새로운 창窓을 만나면서 충격에 휩싸였고 그만큼 더욱 문자에 집착했다. 집착의 정도가 심한만큼 열음은 글을 빨리 익혔고 빨리 읽게 되었다. 내용이 이해 되지 않으면 반복해서 읽었고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연습장에 베껴 썼다. 벽에 의미없이 걸려 있던 달력이 의미를 획득하고 열음의 중요한 친구가 되었다. 책을 읽게 되면서 열음의 혼잣말도 급격히 늘었다. 아니, 혼잣말이라기보다는 방 안의 온갖 것들과 대화하는 일이 급격히 늘었다. 열음은 그 중에서도 화장실에 붙어 있는 벽거울 속의 자신과 가장 많이 이야기했다. 홍옥순 여사가 찾아와 무슨 말이라도 나눈 날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여사와 대화했던 말들을 끊임없이 거울 속의 자신과 되풀이해 말하곤 했다. 그녀의 혼잣말은 점점 그녀 자신과의 대화로 바뀌어갔다. 하루 온종일 자신과 대화하는 날이 늘어났다. 아무도 없던 그녀는 그녀 자신을 친구로 삼았다.
  그러나 그러한 혼잣말도 열음이 열네살 되던 무렵 어느 날 사라졌는데 그 날은 열음이 초경을 흘린 날이었다. 난생 처음 피를 쏟아내자 열음은 잠겨 있는 방문을 걷어차고 방범창에 머리를 찧으며 발작을 했다. 방 밖을 벗어나지 못했던 지난 시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난동이었다. 홍옥순 여사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온화한 표정으로 열음에게 달거리를 설명해주었다. 열음아, 넌 이제 여아에서 여인이 되는 거란다. 여인이 된다는 것은 곧 고통의 시작이지. 붓기 있는 아랫배를 감싸쥐며 열음은 눈물을 쏟아냈다. 밥상을 남겨두고 떠나버린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울었던 일곱 살의 그 날 이후 두 번째였다. 거의 열흘 간 이어졌던 초경이 끝났을 때 열음은 혼잣말 대신 연습장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재된 혼잣말과 같은 것이었다. 열음은 자신이 처한 환경, 자신을 규정짓고 있는 세계의 모습을 연습장에 문자화하기 시작했다. 갇혀 있는 삶에 들러붙어 비정상적으로 - 혹은 순조롭게 - 형성되던 열음의 자아의식은 초경을 겪고 발작을 일으킨 이후부터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 열음이 하얀 공백에 토해내듯 적어 내려 간 첫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어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무관심과 방관으로 자식을 옭아매는, 지독한 감금 속에 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올이 굵은 구름의 가닥들을 바라보며 시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명실 타래 같은 구름의 가닥들은 사방으로 풀어 헤쳐지더니 빗방울이 되어 성글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한은 바깥창까지 열어젖힌 채 창틀에 턱을 괴고 있었지만 빗방울은 방충망도 뚫지 못하고 흘러 내렸다. 시한은 자신의 방 창문과 마주보고 있는 맞은 편 주택의 이층 창문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이틀 내내 내린 비처럼 맞은 편 집 창문 역시 이틀 내내 굳게 닫혀 있었다. 커튼까지 드리워져 있어 시한은 소녀의 모습을 도저히 볼 수 없었다. 손에 잡힐 듯 가깝지만 창문은 비가 그치기 전까지는 도저히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의 원인은 분명했으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시한은 담배 한 대를 빼어 물며 한숨처럼 연기를 뱉었다. 옛날이라 하기도 민망한 요 몇 달간의 기억들이 두서없이 시한의 머릿 속을 다시금 훑고 지나갔다.
  시한은 지난 두 달 간 - 사실 시한은 두 달인지 세 달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기억하지 못하는 것보다 여러 기억들이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일의 순서들을 명료하게 배열시키지 못하는 게 더 큰 문제였다. 기억의 파괴는 점점 시한의 머릿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시한은 아직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이 먼저인지 그녀와 이별한 게 먼저인지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은 날 동시에 하늘과 대지로 돌아간 것은 시한에게 있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얽혀 있는 운명의 실타래를 느끼게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내몰리듯 자유로워진 자신의 처지에 곤란함을 느끼게 된 것이 우선인 일이었다. 타들어가는 담배 한 개비를 바라보며 시한은 쓴웃음을 삼켰다.
  시한을 외아들로 두었던 시한의 부모 - 그와 그녀는 아들이 네 살 되었을 무렵 서로 이별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시한은 그가 키우게 되었다. 어미인 그녀는 도시로 나가 건강기능식품 종류의 신약을 주로 개발하는 연구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아비인 그는 어린 시한과 함께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시한은 시골의 품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라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홀로 도시로 나가 어른처럼 살았다. 어릴 때부터 이 마을 저 마을을 뛰놀며 살았던 탓인지 얽매이는 걸 죽도록 싫어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시한은 변변한 기술 하나 가지지 못했다. 시한은 그때부터 고향 근처 K시에 있는 산업단지를 전전하며 수습공으로 살았다. 그러던 그가 B시에 있는 자동차 부품 하청공장에서 하청노동자로 정착하게 된 것은 새로운 인생의 계기가 되었다.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움직이는 차체와 함께 시한의 삶 역시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청노동자로 정착하며 살게 된 B시에서 시한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게 되었고 시한은 내년 봄이 오면 그녀와 함께 살겠노라고 약속했다. 시한은 자유분방한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구속하는 것들에 대한 안정감을 맛볼 수 있었다.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가다 보면 차체가 완성되듯 시한의 삶 역시 지금처럼 모든 것이 완성에의 길로 귀결되는 듯 싶었다. 적어도 두 달전까지는.
  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무엇이 먼저였던가. 시한은 필터 끝까지 타버린 담배 꽁초를 창틀에 비벼끄며 생각해 보았다. 가장 먼저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한을 안전하게 묶고 있던 컨베이어 벨트가 일단 끊어져 버렸다. 새로운 자동차 출시와 함께 기존의 작업라인에 변화가 생기게 되자 시한이 맡고 있던 공정 자체가 통째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원청 직원들은 새로 생긴 컨베이어 벨트 앞으로 옮겨와 여전히 일할 수 있었지만 하청 노동자인 시한은 사라진 컨베이어 벨트와 함께 회사에서 쫓겨 났다. 여기서부터 시한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실타래가 꼬이기 시작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 회사에서 쫓겨나기 전이었는지 아니면 그 이후였는지 시한은 기억하기가 힘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시한은 고향을 찾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간 뒤 처음으로 찾은 고향이었다. 올해로 쉰 아홉이었던 시한의 아버지는 말라 비틀어진 나뭇등걸처럼 시한을 맞아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 있었다. 송장은 만지면 버석거리는 검불처럼 사그라들것만 같았다. 시한은 고향에 일주일 간 머물렀다. 일주일 동안 시한의 기억은 더욱더 균열의 틈이 벌어져 있었다. 상을 치룬 기억이 희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의 장지葬地가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 고향에 머물러 있던 기간이었는지 다시 B시로 돌아온 이후였는지 시한은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의 파편은 점점 꼬여만 갔다.
  시한의 어머니는 K병원 중환자실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올해로 쉰 여섯이었던 시한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도 그녀가 살던 대도시 인근에 위치한 한 여대의 강연장에서 자라나는 청춘들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는 형식의 강연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이끈 것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 열정의 힘이었노라고 젊은 여성들에게 힘주어 이야기했다. 그녀는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지병이었던 당뇨병에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시한은 화장 후 납골당에 안치된 어머니의 유골함을 찾아가 뵈었다.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기보다는 아무런 느낌이 없어 당혹스러웠다. 납골당을 나오면서 시한은 자신의 양 귀를 관통하는 듯한 이명에 잠시 주춤하였다. 그것은 지난 두 달간 - 혹은 세 달간 시한의 머리를 울렸던 수많은 이명 가운데 지금 시한이 기억하는 첫 이명이었다.
  그리고 사랑했던 그녀가 B시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B시에서 태어나 B시를 벗어난 적이 없는 순하고 가녀린 여자였고 B시에서 노동자로 정착하던 때 시한은 그녀와 결혼을 약속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기억의 전부였다. 그녀는 환각이었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녀와 어떻게 이별하게 된 것인지 시한은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그녀와 함께 살았던 친언니가 그에게 건넸던 몇마디뿐이었다. 걔가 이렇게 스스로 가버릴 줄 누가 알았겠나. 난 자네를 믿네만 행여 어머니 뵐 생각은 하지도 말게. 자넬 쥐어뜯지 못해 안달이니깐 말야.
  스스로 떠난 거겠지. 내 어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담배 한 대를 또다시 입에 물고 시한은 중얼거렸다. 비는 그칠 생각 없이 더욱 쏟아졌다. 방충망을 뚫고 물세례가 조금씩 시한의 얼굴로 다가왔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사랑했던 그녀가 떠나간 뒤 시한은 B시에서의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를 찾기 위해 그 곳을 떠났던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기억나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B시에서 이 곳으로 오게 된 과정 역시 시한의 머릿 속에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B시를 떠나던 당시의 유일한 기억은 B시에서 그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외면했다는 인상 하나 뿐이었다. 뒤틀린 집들이 힘겹게 서로에게 의지하며 붙어 있는 듯한 인상의 이 산동네로 처음 왔을 때 시한은 이 곳에서 점점 흩어져 가는 자신의 기억들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이사 온 이층은 단칸방에 부엌이 하나 달린 단촐한 집이었다. 방 안에 있는 커다란 겹창이 특히 시한의 마음에  들었다. 이사 온 첫 날 시한은 먼지가 켜켜이 앉아 있는 방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집을 보수했다. 소녀를 처음 본 건 이사한 다음 날 오전이었다. 끼움새가 맞지 않아 잘 열리지 않는 겹창을 보수하려고 창틀에 걸터 앉았는데 맞은 편 주택의 이층 창문으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골목길이 상당히 좁아 맞은편 집 창문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 한 방에 같이 있는 것처럼 잘 보였다. 유난히 하얀 얼굴에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녀였다. 소녀는 초면에 당황스러울 정도로 시한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시한은 빙긋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안녕 어제 새로 이사 온 아저씨란다.
  안녕하세요 열음이라고 해요
  비는 그치지 않고 내린다. 필터까지 다 타들어간 뒤 짓물러진 담배 꽁초 두 대가 창틀에서 비에 젖어든다. 시한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나이 서른에 주책맞은 짓이라며 잠시 자신을 꾸짖어보지만 나이가 서른이라 해도 시한은 더 이상 기대고 앉아 있을 사면의 벽이 존재하지 않음을 느낀다. 제멋대로 흩뿌려진 지난 날의 기억들은 이제 더욱 예전의 기억들에까지 그 영역을 넓히며 시한의 머릿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시한은 자신을 자신으로 만드는 구속의 경계선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음을 강렬하게 느꼈다. 송두리째 깨져버린 자신의 삶처럼 그의 기억은 서서히 깨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굳게 닫혀 있는 맞은 편 이층 창문 너머엔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는 소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한이 최근에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굳건한 기억의 초상이었다. 그랬기에 시한에게 있어 소녀의 창문은 반드시 열려야만 했다.
  그러나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졌다. 시한은 방충망을 열어 젖히고 담배 꽁초를 빗 속으로 내던지고는 창문을 거칠게 닫았다.

  서낭기가 부러진 것을, 쯧쯧.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자넨 무당이 아닐세.
  악귀이지.
  백자 다기茶器가 품안의 것을 쏟아내며 방바닥을 굴렀다. 홍옥순 여사는 잿빛 다기상을 부여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이마에 솟아난 땀방울을 닦으며 그녀는 행여 무슨 변화라도 있을까 자신의 신당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정갈하게 정리된 무구巫具와 제단 위에 가득하게 들어 앉아 있는 관세음보살의 형형한 눈매하며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저 차 한잔 들기 위하여 앉은 것인데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었다. 홍옥순 여사는 실소를 머금었다. 전안에서 졸다니 보살님이 노하실 일이로다. 그러더니 여사는 이번엔 머금던 실소를 터뜨리며 까르르 웃음소리까지 뱉어냈다. 아직도 내가 무당이란 말인가. 별의별 잡몽을 다 꾸는구나.
  홍옥순 여사가 스스로 폐하기로 마음 먹은 신당 안으로 들어온 것은 육 년만의 일이었다. 어제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열음의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어젯밤에 상서롭지 못한 꿈을 꾼 것이었다. 여태 잊고 지내던 남편이 별안간 꿈에 나와 무당이길 포기한 자신을 꾸짖고 있었다. 물론 꿈의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다. 꿈에서 그녀는 처음 무당생활을 시작했던 젊은 시절 여사의 모습이었다. 무당이길 포기한 것은 마흔이 넘었을 때의 일이었고 그때는 남편과 헤어진 이후였다. 그런데 꿈 속에서 남편이 나타나 그녀가 무당임을 포기했다며 젊은 여사를 꾸짖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여사는 흐느끼며 거울 앞에서 울고 있었다. 그런데 눈물을 닦으며 쳐다 본 거울 안에는 여사가 아닌 열음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홍옥순 여사는 기겁을 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께름칙한 기분으로 맞이한 오늘 아침이었다. 이층으로 올라가 열음의 상태를 한 번 확인하고 무국을 끓여 올려주었지만 기분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선 육 년만에 신당 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는데 다시 깜빡 잠에 빠져 어제 꿈을 또다시 꾼 것이었다. 그녀는 엎어진 찻잔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품이 넓은 남색 드레스가 신당을 삼킬 듯이 휘날렸다. 여사님, 손님이 찾아 오셨는데요. 거실로 나온 여사를 향해 가정부 아주머니가 말했다. 현관문 앞에 멀쑥한 청년 한 명이 서 있는 것이 여사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기억 속엔 없는 사람이었다. 쓰고 온 초록색 우산을 신발장 옆에 아무렇게나 세워놓고 거실 안으로 발을 들인 사람은 시한이었다. 젖은 소맷자락을 털어내며 시한이 꾸벅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지난 주에 맞은 편 이층으로 이사 온 사람입니다. 아, 우산꽂이가 여기 있었군요, 하하. 시한은 공허하게 웃어보이며 예의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여사는 천천히 고개로 인사를 맞받더니 시한을 소파로 안내하고는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차를 내오라 일렀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차를 내오자 홍옥순 여사는 아주머니에게 덧붙여서 신당청소를 부탁했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신당 속으로 사라지자 비로소 시한은 입을 뗐다.    
  시한은 이웃사람으로서 으레 할 수 있는 인사치레와 함께 잡다하고 장황스러운 말들을 이어나갔다. 주로 집주인에게서 전해 들은 이 동네의 일상과 자신이 일주일여 살면서 느꼈던 동네의 모습 등이 시한이 쏟아내고 있는 실없는 말들의 주제였다. 여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간혹 네, 그렇군요 따위의 대답을 섞어가며 손님의 용태를 살폈다. 시한은 파리하게 시들어 있는 낯빛에 어울리지 않게 혈색 있는 미소를 띄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시한과 마주 앉으며 홍옥순 여사는 온몸으로 시한의 의중을 짚어나갈 수 있었다. 그것은 확고한 예감처럼 여사에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마른 잎들이 뿔뿔이 흩어져 헐벗은 나무의 앙상한 나뭇가지가 여사의 망막에 까닭없이 맺혔다. 자신의 검지를 물고 있는 홍옥 반지를 쓰다듬으며 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한의 말에 동의하는 의미의 고갯짓은 아니었다. 시한은 어느새 비어버린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입을 열고 있었다.    
  하하, 반지가 참 특이하게 생겼네요. 결혼반지신가보군요? 아, 그러면 위층에 사는 여자아이는 따님이신가요?
  홍옥순 여사 역시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시한을 말없이 응시하였다. 온화한 미소를 건네며 여사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상부喪夫한지 이미 이십여 년이 다 되어 가는 미망인입니다. 자식은 없습니다. 홍옥순 여사의 단호한 대답에 시한은 의뭉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런가요? 제가 이 집 이층 창문으로 여자애의 모습을 본 것 같아서 말이죠. 시한의 파리한 낯빛은 더욱더 푸르스름한 기운을 더해가며 망자의 느낌을 품어내고 있었다. 시한은 사람 좋은 웃음을 한 번 터뜨리며 여사를 응시했다. 대답을 요구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여사가 짧게 대답했다. 그럼 귀신인가 보군요. 시한의 낯빛이 일순 붉어졌다. 여사가 덧붙여 말했다.  
  무당 살던 집에서 귀신이 보이는거야 뭐 놀랄 일도 아니지요. 이왕 오셨으니 재미삼아 점이라도 봐드리죠. 복채는 필요 없어요. 전 이제 무당은 아니니까요. 과거에 굴곡이 많으신 것 같군요. 자, 이야기를 풀어볼까요 어디?
  깊게 박혀 있는 팔자주름이 여사의 미소를 더욱 기괴하게 만들었다.  
        
  빗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커튼까지 쳐 놓아 열음의 방은 칠흑을 발라 놓은 듯 깜깜했다. 그러한 어둠 속에서 열음은 눈을 떴다. 침대맡에 찬거리를 올려 놓은 쟁반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무국의 표면 위로 기름기가 번들거렸다. 명암순응에 유달리 익숙한 열음의 눈은 암흑 속에서 사물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그러한 까닭에서인지 열음은 어둠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을 지독하게 좋아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에는 더더욱 그러했는데 열음은 비와 함께 스며드는 비 특유의 비린내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그래서 비가 내리면 열음은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쳐 버리고는 이불 속으로 숨어 어둠을 즐겼다. 사위를 감싸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따뜻한 포옹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둠의 품에 안겨 열음은 시한을 떠올렸다. 아저씨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안녕 어제 새로 이사 온 아저씨란다.
  안녕하세요 열음이라고 해요
  열음이 거울 속의 자신과 수도 없이 연습해왔던 말을 그녀는 정확히 팔일 전 시한에게 건넬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어제 오전 비가 내리기 전까지 열음은 창문과 창문으로 시한과 매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짧은 잡담의 연속이긴 했다.
  학교 안 가? 아, 방학이겠구나 하하.
  학교는 원래 안가요.
  어? 오늘도 창문에서 만나는구나. 안녕.
  안녕하세요 열음이라고 해요.  
  열음이 타인과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눈 건 시한이 처음은 아니었다. 열음이 창문가에 서서 자연스럽게 바깥을 내다볼 수 있을 때부터 열음은 맞은편 주택 이층에 사는 인간들을 항상 응시하였다. 열음이 기억하는 첫 번째 인간은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가씨였는데 열음이 자신의 방과 자신을 주시한다는 걸 느끼면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쳐버려 열음은 그 여성과 이야기를 해 볼 기회는 없었다. 그녀가 어느샌가 이사를 떠나고 다음으로 이층 방의 주인이 된 건 삼십대 중반 쯤 되는 아저씨였는데 밤이 되면 창가에 기대어 담배 연기를 뿜어대는 게 일상인 사람이었다. 원체 창문과 창문 사이가 가까워 그 남성은 처음에는 어이 없다는 듯이 털털하게 웃고는 열음과 몇 마디를 주고 받곤 했었는데 그 역시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그 곳 창가에서 담배를 피지 않았다. 이층 방에 살던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가 비슷했는데 아예 처음부터 그녀를 피하든지 그녀와 첫 한 마디를 나누었더라도 그 다음 날부터는 거짓말처럼 그녀를 피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골목길에서 이층 창문을 올려다보던 열음 나이 또래의 소년과 이야기를 한 적도 한 번 있었는데 그 소년 역시 다음 날부터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 이후 열음은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한동안 비어 있던 이층 방에 새로이 들어온 이가 시한이었다. 그리고 열음은 자신이 살아온 이래 처음으로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타인과 짤막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무나도 무의미한 대화들이 열음의 머릿 속을 채웠고 열음은 항상 그래왔듯이 연습장에 그것들을 베껴 썼다. 비가 오기 전 날 역시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속에서 열음은 창가에 기대어 이층 창을 응시했다.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있는 시한이 창가에 나타났다. 시한은 열음의 존재를 눈치 채고는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한의 눈매가 내리쬐는 햇살에 찌푸려졌다.
  안녕, 아가씨. 지랄맞게 좋은 아침이야.
  안녕하세요.
  시한이 풀어내는 담배 연기가 열음의 후각을 자극했다. 매캐하고 고소한 연기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허구헌날 보니 꼭 같이 사는 것 같네. 하하하. 그런데 넌 어째 맨날 그렇게 방에 있니. 좀 나가 놀지 않고. 보면 넌 항상 방에 있는 것 같더라.
  네, 항상 방에 있어요.
  날도 좋은데 친구들이랑 나가 놀아야지. 난 방에 있으면 몸이 근질거려 죽겠는데 말야.
  항상 방에 있어요. 나갈 수 없어요.
  시한이 깊게 들이마신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담배 연기가 일순 나풀대나 싶더니 사라져버렸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열음의 눈을 할짝거린 듯 그녀의 눈꼬리에 살풋 눈물방울이 맺혔다. 두 눈을 비비며 열음이 말했다.
  이 방에 갇혀 있어요. 나갈 수가 없어요.
  나갈 수가 없다고?
  전 아무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대화들. 이어질 듯 말 듯 끊어졌던 대화들. 대화가 길어질수록 열음은 힘들었다. 듣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고 듣고 반응하는 것에는 더 익숙하지 못했다. 시한은 창문 밖으로 상체를 거의 내놓으며 말했다. 손만 내밀면 악수라도 할 수 있을만큼 가까워진 거리. 얼마나 오래 이야기했던 것일까. 열음은 더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창문을 닫아 버렸다. 시한이 창문 너머로 건넨 선물이 그녀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열음은 방범창 밖으로 걸려 있는 바깥창까지 모두 걸어 닫고 그 위로 커튼까지 드리웠다. 침대에 누워 어둠을 맞아들였다. 머리에서부터 천천히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열은 더욱 끓어올라 입 안이 헐기 시작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홍옥순 여사는 가장 많이 열음의 방을 들락날락거렸다. 하룻밤이 지나고나자 오늘부터 열이 어느정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밥생각은 전혀 없었다. 점심 들라고 홍옥순 여사가 날라 온 찬거리를 머리맡에 그대로 놓고 열음은 침대에 계속 누워 있기만 했다. 열은 많이 내렸지만 비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잦아들던 빗소리가 다시금 굵어졌다.
  열음은 비가 그치지 않으면 시한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열음이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를 벗어나 일어났다.
  장막같은 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줄기가 보였다.
  
  빗물을 잔뜩 먹은 셔츠 위로 빗방울들이 물줄기로 흘러내렸다. 검은색 우산이 정수리를 땅바닥에 쳐박고 비를 받고 있었다. 시한은 주저 앉아 젖은 머리를 쥐어짰다. 양 귀를 송곳으로 쑤시는 것 같은 이명이 머리를 헤집었다. 두 눈을 겨우 치켜뜨면 시선은 뱅글뱅글 돌아 거꾸로 펼쳐진 우산이 올바로 보일 지경이었다. 지독한 이명에 시한은 한동안 눈을 감고 주저 앉아 비를 맞았다. 삑- 하는 이명이 빗소리를 삼키고 시한마저 삼키는 듯 했다. 어깨를 토닥이는 빗줄기가 의식적으로 느껴지고 빗소리가 고막을 스칠 무렵 시한은 살며시 눈을 떴다. 이명은 사라졌다. 더 이상 시선이 어지럽지 않았다. 시한은 하늘을 향해 품을 벌리고 있는 우산 안에 빗물이 가득 고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물을 쏟아내고 우산을 다시 머리 위에 드리웠다. 우산 안을 흐르는 빗물이 물방울로 떨어져 내렸다. 시한은 골목길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한바퀴를 돈 시선은 그의 발아래에서 멈췄다.
  여기가 어디지?
  시한은 이 곳이 B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좀 전의 기억을 되짚어 보려 했다. 우산을 펼쳐들고 골목으로 나오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갑작스러운 이명에 우산을 내팽겨치고 주저 앉은 자신의 모습이 좀 더 분명히 그려졌다. 내가 어디서 우산을 펼치고 나온거지? 그 이전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한 건 자신이 사는 곳이 B시였다는 사실 하나 뿐이었다. 그래, 그녀를 찾아야 해. 시한의 시선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시한은 우산을 잠시 비켜들고 우산에 가린 하늘을 틔웠다. 시한의 시선이 좀 더 위를 향했다.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건물 이층의 겹창이 유달리 익숙하게 느껴졌다. 익숙한 느낌에 시한은 당혹스러웠다. 우산을 다시 고쳐 쓰고 시한은 발걸음을 옮겼다. 당혹스러운 감정에 떠밀리듯 내미는 발걸음이었다. 시한은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 이 골목의 익숙함이 낯설어 시한은 어디로든 일단 이 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발걸음은 느리고 힘에 겨웠다. 시한은 물웅덩이에 처박히는 자신의 갈색 구두를 망연히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었다. 뜻모를 중얼거림이 시한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녀는 죽은 건가.
  그래서 시한은 자신을 주시하던 열음을 볼 수 없었다. 열음은 커튼을 활짝 젖혔다. 창문까지 모두 열어젖히자 비냄새가 순식간에 온 방을 메웠다. 오슬오슬한 한기가 열음의 몸을 기어다녔다. 창틀이 빗물에 순식간에 젖어들었다. 열음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골목길에서 쓰러져 있는 시한의 모습이 보였다. 열음은 입을 굳게 닫고 시한의 모습을 계속 주시하였다. 시한이 위로 고개를 지켜들었던 순간 열음은 시한과 다시 한 번 눈을 마주치리라 여겼다. 그러나 시한은 자신의 이층 집 겹창만을 바라보더니 다시 우산 속으로 사라졌다. 시한은 검은색 우산과 함께 천천히 열음에게서 멀어졌다. 멀어지는 시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열음은 입술을 깨물었다. 잇사이로 피가 배어나올듯 열음은 입을 앙다물고 멀어지는 시한을 주시하기만 하였다. 열음의 머릿 속으로 하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럼 이걸 줄게. 어차피 선택은 자신이 하는 거니까.
  식칼의 손잡이를 움켜쥔 열음의 손아귀가 하얗게 물들었다. 식칼의 서슬이 푸른빛으로 어둠을 빨아먹고 있었다. 탁상 시계의 형광 바늘이 여섯 시를 향해 느릿느릿 움직였다. 여섯 시가 되면 홍옥순 여사는 밥상을 들고 열음의 방 안으로 들어올 것이었다. 오 분이나 지났을까. 다급하게 자신의 방을 향해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열음의 귀를 쿵쿵 울렸다. 열음은 숨을 내뱉기가 어려웠다. 지독한 비냄새가 속을 울렁케 했다. 문고리가 철컥대는 소리가 열음의 목을 죄어왔다.
  굳게 닫혀 있던 적갈색 방문이 환하게 열렸다.
    
  다시 태어난다면 우산으로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눈두덩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아내며 시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자조섞인 웃음이었다. 난간 아래로 거친 물살이 수로를 넘칠듯 흘러내렸다. 시한의 옆에 서서 우산은 물구나무를 서고 있었다. 검은색 우산은 커다란 대접처럼 빗물을 받았다. 시한은 그 모습에 두 눈을 가리고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눈을 가린 손 사이로 쉴새없이 빗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천둥 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아득하게 멀어졌다. 시한은 홍옥순 여사의 이야기를 들은 직후 자신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시한은 집 앞 골목에서 이명이 사라진 직후 자신이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던 것은 단순한 착각 - 어리석은 기만이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기억났을 때 시한은 검은색 우산을 다시 내팽개쳤다. 검은색 우산은 고꾸라져 빗물을 받았다. 이미 다 젖은 꼴에 우산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별 생각 없이 옮기던 발걸음은 시한을 수로 위에 올려진 작은 다리 앞에 서게 했다. 시한은 이 세상 모든 비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시한과 우산은 하늘을 향해 팔벌려 비를 맞이했다. 시한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소리쳤다. 그녀는 죽었다! 아니 내가 죽였다! 온 얼굴에 빗물이 흘렀다.    
  그 때 다리 저 편으로 초록색 우산을 쓴 누군가가 걸어 왔다.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리던 시한은 폭우의 장막 안에서 다가오는 인적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리 입구에 올려 놓은 발은 새하얀 맨발이었다. 새하얀 맨발은 한 걸음 한 걸음을 묵직하게 떼며 비를 맞고 있는 시한을 향해 다가왔다. 다섯 걸음 안으로 맨발이 들어 왔을 때 시한은 고개를 돌리고 다가 온 사람을 바라볼 수 있었다. 물기 어린 시한의 눈동자에 초록색 우산을 머리에 드리운 열음의 얼굴이 맺혔다.
  우산 쓰세요.
  열음의 맨발이 더욱 시한을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시한의 갈색 구두가 반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열음의 맨발이 그보다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귓전까지 시한을 적시며 내리던 빗방울이 시한의 머리 위에서 사라졌다. 초록색 우산이 시한과 열음을 품에 안았다.
  내일은 해가 뜰까요.
  글쎄다. 난 별로 궁금하지 않구나.
  초록색 우산 속에서 시한과 열음이 마주보고 섰다. 창문에서 서로를 바라볼 때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였다. 열음은 시한의 옆을 힐끔 쳐다보았다. 비를 삼키는 검은색 우산이 보였다. 시한은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열음의 왼손을 힐끔 쳐다보았다. 빗물에 아롱진 칼날이 서슬을 번득였다. 열음의 눈에 마른 잎들이 뿔뿔이 흩어져 헐벗은 나무의 앙상한 나뭇가지가 일순 스쳐 지났다. 시한은 웃음을 흘리며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열음은 두 눈을 가리는 시한의 손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큼지막한 홍옥 반지가 시한의 약지 손가락에서 붉게 빛나고 있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697 단편 여동생이 준 연필 류대식 2011.06.01 0
1696 단편 벚꽃이 피었습니다 김진영 2011.05.31 0
1695 단편 [번역] 못 하나가 모자라서 - 메리 로비넷 코월 이형진 2011.05.30 0
1694 단편 삶의 이유 공간 2011.05.22 0
1693 단편 월세가 저렴한 방1 헤르만 2011.05.22 0
1692 단편 냉장고 폐기법 문애지 2011.05.20 0
단편 그녀의 초록색 우산 윌라얄리 2011.05.19 0
1690 단편 중년z persona 2011.05.16 0
1689 단편 적묵(赤墨)-下 이니 군 2011.05.15 0
1688 단편 적묵(赤墨)-上 이니 군 2011.05.15 0
1687 단편 히키코모리 방콕기 니그라토 2011.05.06 0
1686 단편 별을 따다줘 룽게 2011.05.05 0
1685 단편 MINUS persona 2011.04.23 0
1684 단편 내 눈에 콩깍지 2011.04.23 0
1683 단편 한낮, 광대와의 술자리 이니 군 2011.04.17 0
1682 단편 좁은 방 2011.04.15 0
1681 단편 머릿속에 족쇄 LSD 2011.04.10 0
1680 단편 늙은 소녀1 조원우 2011.04.09 0
1679 단편 유니크 이야기 김진영 2011.04.04 0
1678 단편 유토피아를 위하여 bastet 2011.04.02 0
Prev 1 ... 58 59 60 61 62 63 64 65 66 67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