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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유토피아를 위하여

2011.04.02 23:4904.02

이곳은 서울 근교의 아파트들 중 하나였다. 건물들은 아주 높고, 우주선같은 은빛 광택을 냈으며, 미래적인 곡선으로 먹지처럼 시커먼 밤하늘을 향해 쭉 뻗어 있었다.

완벽하게 자동화된 그 인텔리전트 아파트는 고층건물들이 으레 그러듯 바람에 미묘하게 흔들리며 명상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준 고급 지능은 오로지 난방기구를 덥힐지 말지 판단하는 데만 쓰였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는 지금은 그 뱃속에 있는 사람들처럼 그 역시 조용히 잠이 들어 있었다. 사람이라도 되는 듯이, 수백 개의 창문은 검게 눈을 감고 어떤 빛도 내보내지 않았다. 휴식을 취하면서.

은색 빌딩의 길고 높은 뱃속에 수백 개로 나눠진 구획들은 각각 몇 호 라는 명패를 달고, 문 안쪽은 어둠과 빈 공간으로 가득 채워져 있거나, 아니면 사람의 피곤한 육체가 훈온한 어둠 속에서 쥐죽은 듯 조용히 뉘여져 있었다. 피곤한 숨결만이 움직이고 있는 그 어두운 방 안엔 가구도 몇 없었다. 침대와 식탁과 냉장고와 시계 정도가 보편적이었다.
시계는 알람이 새벽 여섯 시에 맞추어져 있었다. 시계바늘은 현재 5시 59분 56초에 있었으며, 새벽 6시 정각까지는 앞으로 3초, 2초, 1초, 제로.

알람 시계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김씨의 빠른 손이 텁 시계를 움켜 잡았다. 안락함에 취해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그 사이 더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찌푸린 얼굴로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깜깜한 어둠에도 불구하고 눈이 번쩍 뜨였다. 너무 많이 잤다! 5분이나 더 잤단 말인가? 3시간 5분이나 퍼질러 자다니. 나란 놈이란! 이 게으른 놈! 이 멍청한 놈!
김씨는 침대맡에 놓아둔 알약 더미를 물도 없이 꿀떡꿀떡 삼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자리 밖으로 뛰쳐 나왔다. 빨리 회사로 가야했다. 낭비하는 시간은 끝났다!

"시간이 부족해! 시간이 부족해!"

월요일은 김씨에게 있어 가장 바쁜 날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또 다른 가장 바쁜 날 중 하나인 화요일이 바로 다음날로, 연달아서 바쁜 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요일이 왜 바쁜가 하면, 가장 바쁜 날 중 하나인 일요일이 그 전전 날에 있어서 제대로 업무 처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토요일도, 금요일도, 목요일도, 수요일도 같았다. 김씨에게 일주일은 항상 바빴다. 한달도 그랬고, 일년도 그랬다. 바쁘지 않은 날이래봐야 평년의 2월 29일 정도일까.
그렇지만 아직 젊은 김씨로서는 바쁜 게 나았다. 바쁘다는 것은 일이 있다는 의미였고, 일이 있다는 의미는 노후에 쓸 돈을 충분히 벌어둘 수 있다는 말이었다. 현대의 인류는 백 살까지는 돈을 벌고 이백 살까지는 노후를 즐겼다. 바쁜 젊은 시절은 늙은 뒤 들어갈 '유토피아'의 수준을 보증해주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바빴다!

"하루에 한 시간만 더 있다면 좋을 텐데! 제기랄!"

김씨가 허둥지둥 출근준비를 하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짜낼 수 있는 자투리 시간은 모두 짜낸 상태였다. 잠은 하루에 세 시간 잤고, 식사는 아까처럼 알약으로 대신했다. 샤워는 인체세척기 안에서 1분 내로 끝냈다. 여의치 않으면 왕왕 안 씻기도 했다. 시간을 단축시키는 온갖 도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항상 모자라기만 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로 갈수록 인간이 하는 일은 줄어들게 되리라 생각했었지만, 현실은 약간 달랐다.
과거 사람들의 생각대로 제조업이나 생산업에서 이제 인간이 할 일은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서비스업의 업무량만큼은 미친듯이 증가했다. 할 일이 없어진 사람들은 돈을 썼고, 사람들이 쓰는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은 일을 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다시 벌기 위해 또 일을 했고, 또 일을 하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서운 점은, 늙으면 일을 못 한다는 점이었다. 누구던 신체의 노화로 인해 돈을 쓰고 돈을 버는 순환고리에서 벗어난 순간 궁핍한 삶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또 늙으면 노화방지제를 먹어야 했기 때문에 숨만 쉬고 있어도 돈이 나가는 판이었다. 그러니 젊을 때 최대한 일을 해둬야만 했다. 그래야만 모든 소비재를 무상으로 지급하는 유토피아 지역의 거주권을 살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여가시간? 여가시간이라니! 현대의 엘리트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건 미래의 가치를 모르는 멍청이들이나 가진 것이다. 지금 5분의 수면으로 여가시간을 가진 김씨는 죄책과 불안에 떨었다.

김씨는 빠르게 회사로 향했다.


회사에 도착하니 밝은 형광등 아래 다들 한창 일에 열중이었다. 김씨도 서둘러 자리로 가려는데, 눈길을 끄는 한 명이 있었다.

동료 심씨였다.

심씨는 무려 한 손에 뜨거운 커피를 들고 호호 불어가며 천천히 컴퓨터를 쓰고 있었다. 심지어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화면- 그러니까, '여가시간'에나 보일 법한, 우스갯거리가 잔뜩 떠오른 화면을 띄워 놓고 있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저렇게 여유가 넘쳐도 되는 건가? 몰상식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회사에서 저렇게 노닥거리고 있으면, 심씨의 인생이야 혼자 추락하던 말던 알 바 아니지만, 팀의 효율도 같이 추락할 게 아닌가? 젊을 때 1초 더 노력하면 늙어서 1분 더 편하게 산다는 말도 모른단 말인가?

"심씨! 뭐하는 거야?"

김씨는 화가 나 심씨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사실 따지는 시간도 아깝지만, 1분을 투자해 업무의 효율을 증진시킨다면 그것도 나쁜 거래는 아니다. 물론, 1분이나 투자할 생각은 없었다. 김씨는 속사포처럼 말을 뿜어냈다. 약 52초 간의 설교가 끝나자, 심씨가 그제야 김씨를 쳐다봤다.

"끝났어?"

가만히 무시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던 심씨는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고 물어왔다.

"뭐?"

김씨는 기가 막혀 더 말이 안 나왔다. 그냥, 부끄러움도 없는 이 파렴치한 남자를 포기하고 신성한 내 업무를 시작하는 게 훨씬 이득이리라. 저런 식으로 일하다가는 곧 짤려서 낙오자가 될 게 뻔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돌아가려는 데, 심씨가 말해왔다.

"너무 그러지마. 내가 1주일동안 몇 시간을 일하는지 알아?"

1주일동안 얼마나 일을 하는지 아냐고?
우스운 소리였다. 김씨는 하루에 수면 시간 3시간과 준비 및 출퇴근 시간 14분을 포함해 3시간 14분을 제외한 20시간 46분을 근무하고 있다. 일주일로 치면 145시간 22분 가량을 일하고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김씨가 남들보다 성실하다고는 하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비슷하게 일을 하고 있는 처지다. 130, 140시간씩 일하는 게 당연한 상황에서 누가 더 일을 많이 하네 마네 하는 건 무의미한 물음이었다.
심씨 자신만 힘들여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아마 과로로 돌아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심씨는 또박또박한 말씨로 자답했다.


"165시간이야. 165시간. 네가 1주일에 하는 일보다 21시간 정도 더 많군. 난 너보다 거의 하루 더 일하는 셈이야."

김씨는 충격받았다. 충격에 뭐라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게 가능이나 한 소리인가? 자신보다 일을 그렇게나 많이 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거기다가 난 하루에 30분의 여가시간도 갖고 있지."
"말도 안 돼!"

머릿속에서 알아먹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곧 김씨의 이성도 결론을 내렸다. "말도 안 돼."
김씨는 두 의견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렸다. "말도 안 돼!"

그렇게 결론을 내리거나 말거나 심씨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요새 그 시간동안 게임을 하는데 벌써 랭킹도 찍었다고. 대단하지?"

심씨는 그에게 모니터를 보여줬다. 무엇을 뜻하는 화면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김씨는 그냥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말도 안 돼." 심씨는 김씨의 멍청한 표정을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후 내쉬고 말을 시작했다.

"자네는 오늘도 3시간 동안이나 수면을 즐기시고, 왔다갔다 쓸모없는 시간을 소모해 약 4시간이나 그대로 갖다 버린 모양이지?"
" ... "

3시간쯤이었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김씨에겐 체감상 그게 그거였으니까. 쓸모없는 시간을 소비했다는 건 본질적으로 같았다.

"거기다 그 얼마 없는 20시간 중에 또 몇 분은 내 여가를 방해하는데 쓰셨군. 그래놓고 어디가서 일한다고 나불댈 생각인가? 심지어 난 이제 자네 동료도 아니야. 내 헌신적인 근무량을 보고 감동받은 회사측에서 날 승진시켜주는 덕분에, 오늘부터 난 자네 상사라고."

김씨는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사실여부를 떠나 심씨가 하는 이야기는 하나하나 너무 충격적이였다. 게다가 만에 하나 저게 사실이라면, 김씨는 여태껏 자신이 깔봐왔던 존재들보다 하등 나을 거 없는 인간이 되버린다. 미래의 가치를 무시하고 현재의 안락함에 빠져 있는 멍청이들, 중 한 명이 돼버리는 것이다.
김씨는 다시 불안에 떨었다. 갑자기 무력감이 느껴지고 자신이 너무 작은 존재 같았다. 쓸모 없는 존재. 남들보다 3시간이나 더 노는 존재. 심씨가 매일 김씨보다 더 일했다던 3시간의 차이들이 무게가 되어 김씨의 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아니었다. 시간의 차이만큼 키가 커진 심씨의 거대한 엉덩이가 자신을 깔고 앉은 느낌이었다. 숨이 막혔다. 김씨보다 훨씬 거대해진 심씨는 천천히 그 웃음기 띤 입을 열었다.

"뭐 좋아. 일에 너무 열중해 나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면 그럴 수도 있지."

김씨는 현실로 돌아왔다. 심씨는 아직 자기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심씨는 다 마신 친환경 커피용기를 재활용 쓰레기통에 가볍게 던져넣고 일어나 김씨와 마주했다.

"자네는 매우 성실해. 다른 버러지들이 하루 4시간이나 잠에 낭비하는 데 비해 1시간이나 아끼고 있어."

심씨는 웃으며 김씨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 자네에게는 알려주지. 내가 어떻게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는지."

심씨는 김씨에게 가까이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에게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고 신선했으며 정말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뭐라고?!"

김씨가 놀라 말했지만 심씨는 시계를 보더니 딴청을 피웠다. 이제 아침 6시 30분이었다.

"이런. 여가시간이 끝났군. 그럼 난 일로 돌아가도록 하겠네. 업무 끝나고 꼭 가보라고."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김씨도 일을 하러 자리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흘끗 게시판을 보니 정말 심씨가 승진해있었다. 그가 말한 일이 모두 사실이란 뜻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김씨가 됐어야 할 승진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에 화가 나진 않았다. 일하는 내내 김씨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즐거워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매일 피곤에 패배해서 억지로 가는 것만 같았던 집에 가는 시간도 지금은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졌다.
김씨는 마음 속으로 몇 번이나 지씨에게 감사를 표했다.
말로는 할 수 없었다. 업무시간이 줄어들 테니까.
시간은 착실히 갔다.




  새벽 2시 30분.

놀랍게도 김씨는 벌써 회사에서 퇴근했다. 보통 때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맙고도 고마운 심씨 덕분에 반 시간이나 일찍 올 수 있었다. 부족한 업무량은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자 그는 대답했다.

"30분 정도야 내가 대신 해주지. 내일 여가시간 30분 대신 일을 더 하면 되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에게 존경심을 넘어 경외심까지 들었다. 김씨는 나오는 길에 심씨에게 몇 번이고 꾸벅꾸벅 감사 인사를 했다. 아무튼 그 일은 그 일이다. 김씨에겐 지금부터 할 일이 더 중요했다. 회사를 나서자마자 김씨는 곧장 심씨가 알려준 장소로 향했다.

"포스 코퍼레이션..이 여기가 맞습니까?"

잡아 놓은 예약 시간까진 충분히 남았지만, 1초라도 더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훨씬 먼저 도착해버렸다. 시간을 칼처럼 지키는 현대의 엘리트 치곤 꽤나 낭비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안내자는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 아무런 위화감 없이 담당자에게 데려다주었다. 담당자가 웃으며 물었다.

"김 로동씨 되십니까."
"예. 맞습니다! 제가 바로 김 로동입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담당자가 전자 서류와 예약 시간 등을 확인하려 이것저것 건드리느라 시간이 지체되자, 안 그래도 초조한 김씨는 답답한 마음에 화가 나려고 까지 했다. 담당자의 느릿느릿한 움직임에 분통이 터질 거 같던 김씨는 온갖 데로 시산을 돌리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그는 그제야 십 분이나 빨리 왔단 사실을 알아챘다. 김씨는 깜짝 놀라 사과했다.

"제가 아무래도 시간보다 너무 일찍 온 거 같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10분 가량의 시간에 그렇게 죄스러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여유'를 파는 회사니까요."

담당자는 서류와 함께 간단한 설명서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저는 포스 코퍼레이션의 A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고객님들의 잠을 대신 자드리고 있지요."

그렇다.
심씨가 알려준 것은 바쁜 사람들을 위해 대신 잠을 자주는 '전문 수면가 서비스'였다. 이런 사람들이 있으니 지씨는 한숨도 안자고 23시간 근무를 하며 1시간의 여가 시간을 누릴 수 있었겠지. 담당자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문 수면가는 요근래 뇌파 관련 연구로 만들어진 신생 직업입니다. 저희 회사에서는 재능있는 전문가들이 질적, 양적으로 우수한 숙면을 생산해서 고객님께 제공해드릴 겁니다."

김씨는 장황할 것 같은 설명에 다시 마음이 급해졌다. 담당자 A는 그런 김씨의 눈치를 보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고객님들께서 바쁘신 건 저희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만, 대단히 새로운 분야의 서비스기 때문에 규정상 숙지하실 건 숙지하셔야 합니다. 어차피 십 분이나 일찍 오셨지 않습니까? 편안히 들어주세요. 게다가 계약을 하시게 된다면, 앞으로 세네 시간씩 시간이 더 생기실 테니 조급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계속 해도 되겠습니까?"
"예. 부탁드립니다."

그가 조금 여유를 가지라고 말하긴 했지만, 김씨는 담당자가 너무 여유를 부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휴먼 두잉, 그러니까, 행위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되고 있죠. 행위하므로써 인간다워진다고.
행위하는데 필요한 건 시간입니다. 고로, 저희 서비스를 사용해 얻을 수 있는 시간으로 더 많은 일들을 하게 된다면, 보다 인간적인 인간이 되는 겁니다. 이건 그냥 캐치 프레이즈구요."

담당자가 손가락으로 설명서에 나온 그림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생물의 뇌는 자는 시간에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못할 뿐이죠. 저희 서비스는 이를 활용한 방법입니다. 전문 수면가와 고객님의 뇌파를 동조시켜 일정한 시간 동안 깨어 있음과 동시에 잠을 자는 효과를 낳는 것이지요. 궁금하신 점이 있으신가요?"
"부작용은 있습니까?"

담당자 A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약 같은 겁니다, 김 로동씨. 오늘 아침에도 약을 드셨겠죠? 칼로리에그나 포만제, 아니면 베리타스 같은 약들이요. 이것들은 인체에 도움이 되는 성분들을 추출해 높은 효용을 주는 거죠. 하지만, 저 같은 경우엔 베리타스랑 잘 맞질 않습니다. 그래서 가끔 밤에 잠을 설치기도 하죠.
그런 것처럼, 전문 수면 서비스도 누군가에겐 잘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그런 사람은 못 봤어요. 맞는다면 시간을 아낄 수 있고, 안 맞는다면 그냥 해약하시면 됩니다. 다른 궁금하신 점은요?"
"아니요, 없습니다. 이제 계약할 수 있는 건가요?"

A는 즉시 서류를 띄워 이것저것 확인하기 시작했다.

"우선, 고객님은 이번에 수면 서비스만 선택해주셨군요."
"예. 그렇습니다."
"한 달 써보시면 아마 더 많은 서비스를 신청하시게 될 겁니다. 저희는 다른 자극들도 판매하고 있거든요. 미각, 후각, 아니면 예술 작품을 봤을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같은 것들도요. 이런 서비스는 주로 시간을 소모하지 않고 여가를 보내고 싶으신 분들이 선택하십니다."

담당자 A가 말을 하면서 김씨의 앞으로 문서를 띄웠다. 아직 빈 칸 투성이의 계약서였다.

"수면은 하루에 몇 시간 정도 필요하십니까?"
"예? 이전에는 하루 3시간 쯤 잤었는데요."
"흠, 그러면 6시간 정도가 어떨까요?"
"6시간이나요?"

김씨는 깜짝 놀라 말했다.

"그렇게나 많이 자면 몸이 망가지지 않을까요?"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천히 줄여나가며 최적의 시간을 찾아드리는 과정이니까요."
"흠…… 그렇다면야."

김씨는 시간란에 6 을 적어 넣었다.

"수십 년 전의 인간은 하루에 8시간도 잤다고 합니다."
"허, 완전히 게으름에 찌든 것들이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들을 가볍게 비웃어준 뒤에 김씨는 서류를 마저 채워나갔다.

"시간대는 언제가 좋으시겠습니까?"
"음…… 10시에서 4시까지가 좋을 거 같은데요."
"글쎄요, 그 시간대는 보통 많이들 선택하시는 시간대라 값이 비싼데. "
"그렇습니까?"
"예. 아무리 저희들이라도 한 명이 같은 시간동안 두 명의 잠을 제공해드릴 순 없으니까요. 최적의 동조율로 최고품질의 수면을 만들어야만 효과가 있거든요."

김씨는 망설였다. 그가 내민 가격표에서 보이는 가격 차이는 꽤 컸다. 김씨의 평균 시급의 반에나 해당했다. 이렇게나 많이 잘 필요가 있을까? 김씨가 주저하고 있자, 담당자 A가 덧붙였다.

"미래 투자적인 이득에 주목하세요. 저희가 제공하는 건 단순한 숫자와 만족이 아니라, 고객님께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도 합리적인 선택이죠."
"음……."
" 며칠만 조금 힘드실 뿐입니다. 적응하시면 오히려 득을 보셨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정 안 되겠다 싶으시면 나중에 바꾸셔도 되구요."

그 말에 김씨는 하는 수 없이 끄덕였다.
A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계약서를 받아들고 각종 주의사항과 이용에 대해 설명했다.
계약은 30분을 조금 넘겨서야 끝이 났다.






1.

일주일 뒤.

김씨는 일주일 만에 집에 돌아왔다. 오후 4시 쯤이었고 이런 시간에 들어오는 건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거기에 이런 충만한 기분도.

"아빠!"

공부방에서 나와 있던 김씨의 딸 지연이가 기쁘게 맞아주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고도의 효율주의자인 김씨가 자식이 있다는 게 놀라울 수도 있겠지만, 자식의 수입 10%가 부모의 소유로 인정된다는 현대의 법에 의하면 그다지 특이할 건 없었다.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표정이 밝으세요."

지연이는 아빠가 일주일이나 집에 안 들어와 걱정했었지만, 일에 방해가 될까 연락도 못 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빠의 밝은 표정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김씨가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지연아! 아빠한테 좋은 일이 있어. 사실 너한테도 좋은 일이야!"
"뭔데요?"
"아빠가 승진해서 여유가 좀 생겼단다. 그래서 지연이 주려고 선물을 준비했지."

김씨가 꺼낸 것은 작은 상자였다. 지연은 기뻐하며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엔 작은 구(球)형의 장치가 들어 있었는데, 아마도 모종의 홀로그램 장치인 듯했다.

"이게 뭐에요, 아빠?"
"이게 바로 그 비싼 [사이버 아빠] 서비스란다. 앞으로 지연이한테 큰 도움이 될 거야!"

사이버 아빠는 말 그대로 아빠 역할을 대신 해주는 사이버 아빠였다. 바쁜 부모님 대신 아이를 돌봐주고 바르게 교육해주는 보조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지연이도 부자 친구들이 사용하는 것을 종종 봐서 알고 있었다. 요새 아이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은 제품이었다.
하지만, 지연이는 그다지 기쁜 기색이 아니었다.

"아빠가 있는데 왜 사이버 아빠가 필요해요?"
"아빠보다 사이버 아빠가 더 잘 해줄 거야. 네가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정확하게 답해줄 수도 있고, 아빠랑 있을 때보다 더 많이 놀아줄 수 있잖니."
"그치만, 이거 비싸잖아요. 그냥 아빠가 일을 안 하고 같이 있으면 안 돼요?"
"그만큼 시간을 아껴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잖니? 이건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란다, 지연아. 그리고 네게도 좋을 거야."

지연이는 이게 좋아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없었다.

"아빠, 꼭 일해야만 해요? 저도 꼭 공부해야만 해요?"
"우리 딸이 벌써 그런 나이가 됐구나."

김씨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나이요?"
"사춘기.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질병 같은 거야."

지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질병이요?"
"걱정하지 말거라. 잘 듣는 약이 있으니까. 아빠가 베리타스를 좀 사두마."
"베리타스가 뭔데요?"
"일종의 집중력 향상제인데, 음…… 어휴, 설명하기 힘드네. 그, 밤에 잘 때 환영 같은 걸 보는 게 뭐더라?"
"꿈이요?"
"그래. 자주 안 쓰는 단어는 잊어 버린다니까. 하여간, 그런 잡다한 기능에 낭비되는 뇌 능력을 집중시켜주는 약이야. 원래 네 나이쯤 되면 먹게 되어있어. 설명하기 어렵네. 사이버 아빠라면 바로 대답해줬을 거야. 보렴, 사이버 아빠가 훨씬 낫겠지?"

김씨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곤 다시 문을 열었다.

"자, 아빠는 일하러 갈게."
"잠도 안 주무시고요?"

"잠?"

김씨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2.

담당자 A에게서 업무를 하달받은 수면가 R씨는 정말 이 일이 이렇게 고될 줄 몰랐다. 잠을 자고 또 자도, 씹어먹은 사탕처럼 꽉 달라붙어 있는 피곤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 인간은 무슨 피곤 불감증이라도 걸려 있단 말인가? 몸이 망가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휴식을 취할 수 없다. 그의 휴식은 그가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재화를 받고 판매되는 상품이었다. 이제 그 누구도 온전히 휴식을 소유할 수 없었다. 없게 되었다. 알게 뭐람. 그는 남의 잠을 잤다.



3.

한달 뒤.

김씨의 아침은 평온했다.

처음에는 평소와 잠자던 시간대가 맞지 않아 괴로웠지만 어느정도 적응이 되자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내친김에 모든 서비스를 신청한 김씨의 생활은 윤택했다.
지씨와 함께 하루 23시간을 근무하고 1시간을 여가로 사용했다.
사내에서는 엘리트중의 엘리트라 불리며 인정받았고, 개인적으로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김씨는 이제 여가시간을 점점 줄여나갈 예정이였다.
얼마 안 가 그는 24시간을 전부 근무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지구에서 가장 많이 일하는 사람!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시간을 일하겠지만, 공동 1등이라도 그는 행복할 것이다.



4.

"아빠."
「말씀하세요, 우리 공주님.」

간드러진 말투에, 아직도 조금은 역겨운 느낌이 들었다. 한 달 쯤 같이 지냈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사이버 아빠였다. 그래도, 궁금한 건 물어봐야지.

"꿈이란 뭐죠?"
「수면 중 여러가지 환각이나 환청을 듣는 정신적 현상입니다. 금세기 초반에 마약류로 규정되어 현재는 다양한 약품류로 통제하고 있습니다.」

명료한 설명이었다. 그러나 몇몇 질문은 그러지 못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질문.

"왜 사람은 일을 해야하죠?"
「유전학, 철학, 경제학, 신학, 보편적 관념 중 어떤 대답을 선호하니?」

지연이는 그냥 어깨를 으쓱 해 보일 뿐이었다. 아직 저 대답에 한 번도 대답해 본 적 없다. 뭘 선택해야 할 지 도저히 모르겠었다.
사이버 아빠는 지연의 으쓱임을 단어가 너무 어렵단 표시로 받아들였다.

「유전이란, 생물이 자신의 형질을……」
"아, 진짜! 그만해요! 백 번도 더 들은 거 같아."
「알겠어. 미안합니다. 덧붙여서, 정확히는 스물 네 번이에요.」

지연은 곧 7학년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 시점에서 사이버 아빠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모르는 점이 있으면 곧바로 찾아서 알 수 있었고, 확실히 아빠보다 훨씬 많이 도움은 됐다.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더 '좋은' 걸까?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공부방 시계가 10시를 알렸다.

「수면 시간입니다, 공주님. 자기 전에 보조제를 섭취하고 주무시오.」

사이버 아빠가 알약과 물을 건넸다. 칼로리에그, 포만제, 영양제, 베리타스였다. 지연은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저기, 아빠."

「수면 시간입니다, 공주님. 자기 전에 보조제를 섭취하고 주무시오.」

아마도 약을 먹기 전까진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 그렇게 프로그램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약을 먹고 나면 꼭 뭐라 하려고 했는지 까먹곤 했다. 그래서 지연은 손을 상하로 움직이며 권유하는 행동을 취하고 있는 사이버 아빠에게서 약을 바로 받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지연은 쉽게 생각해낼 수 있었다.

"인간은 왜 살까요?"

사이버 아빠는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로 딸을 바라봤다. 눈을 마주보고 있자니 왠지 무서워졌다. 사이버 아빠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지연은 대답을 기다렸다.

  「수면 시간입니다, 공주님. 자기 전에 보조제를 섭취하고 주무시오.」
"알았어요."

지연은 약을 삼켰다. 의무를 마친 사이버 아빠는 기계적으로 눈꺼풀을 내리고 지연을 재우기 위한 경음악을 재생했다. 잠들어가는 의식 속에서, 지연은 기억을 되짚었다.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했더라, 아마도 쓸데 없는 거겠지.
그녀는 합리적으로 사고했다.

5.

어둠이 깔렸다. 도시는 불빛 하나 없었고, 앞으로도 없었다. 저 너머 유토피아 지역에서 흘러 나온 늙은 꿈들은 도시의 오래된 어둠 아래 여태 그래온 것처럼 짓눌렸다. 곧 완벽한 정적이 찾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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