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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머릿속에 족쇄

2011.04.10 15:2004.10

“오전 6시,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기계적인 여성의 목소리, 남들은 절대로 들을 순 없지만 내 머릿속에선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잠결에 헛된 손짓으로 귀를 틀어막아보지만, 머릿속에 울리는 기상 벨을 도저히 잠재울 수 없었다. 이런 환청 같은 목소리 처음 들릴 때만 해도 내가 무슨 정신병자나,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지만 서서히 이 목소리가 기상부터 취침까지 날 잠식해 들어가자 난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다. 이젠 아침마다 어머니와 ‘어서 일어나지 못해?’ ‘제발! 5분만 더요.’라며 싸울 필요가 없다. 자동적으로 잠에서 깬 나는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베개를 끌어안고 다시 잠을 청한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자, 다음 단계로 내 머릿속에 팡파르가 울려 퍼진다. 과거엔 반도의 남자들이 무조건 군 복무를 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이 소리는 그 군대에서 매일 아침마다 부대에 틀어주던 기상나팔이라 하셨다.

이젠 일어나야 한다. 정신을 각성시키지 않으면 마지막 단계의 충격이 올 것이고, 만약 아침부터 그것을 겪는다면 정신분열증에 걸려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반쯤 뜨고 잠옷바지에 손을 넣어 이미 수북이 털이자란 배꼽 밑을 북북 긁으며 방에서 빠져나온다.

“오빠! 일어났어? 엄마가 빨리 밥 먹으래.”
아침부터 유난떠는 여동생이 말했다. 불쌍한 것, 너도 내년이면 나처럼 머릿속에 족쇄를 달아야겠지. 가족 중에 가장 행복한 그녀가 뒤통수에 칩이 박히고 나만큼 비참해질 생각을 하니, 괜스레 만족감이 들었다. 나는 살아있는 시체처럼 걸어서 식탁에 앉는다.

매일 아침, 평범한 밥상에 두뇌에 좋다는 호두 두 알, 뼈가 튼튼해진다는 흰 우유 한 컵, 매우 쓴 홍삼진액 한포를 먹어야 한다. 입맛은 전혀 없지만, 아침을 거르지 말아야 학습능률이 오른다고 명령하는 칩 때문에 난 숟가락을 집어 들고 기계적으로 밥알들을 푼다. 그 동안 뒤통수에 박힌 칩이 하루 일과와 학습 목표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댄다.

‘젠장! 오늘 뭘 해야 할진 내가 정하니까 그만 좀 떠들라고.’
‘경고! 불안정한 뇌파가 감지되었습니다. 다시 오늘의 공부계획에 집중해주시길 바랍니다.’
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순간적으로 뒤통수에 차갑게 튀어나온 금속을 만지작거린다. 은색 넓적한 판에 SCC(Self-Control Chip)와 ‘made in korea’가 적혀있겠지. 애들 머리에 박는 이 망할 것들을 개발할 나라는 분명 우리나라일 것이다. 난 꾸역꾸역 아침식사를 해치우고는 책가방을 싸들고 학교로 향한다.

어쩌다 이딴 게 내 머릿속에 박히게 되었을까? 수년 전에 오토바이 사고로 아들을 잃은 개발자는 이 칩이 청소년들의 일탈행위(술, 담배, 폭주, 폭력, 성 같은 것들)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SCC를 만들었다고 했다. 맨 처음 양아치들 대가리에 칩이 박히고, 놈들이 갑자기 모범생이 된 걸 보고 얼마나 비웃었던가? 지금의 반도의 고등학교엔 전부 모범생들뿐이다.

제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의 한 성직자는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탄압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또 장애인들을 탄압했을 때도 가만히 있다가, 마지막으로 나치당이 종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할 때, 뼈저리게 후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도 처음부터 강하게 반발했어야 했는데…….

일진들에게 칩이 박힌 후, 부유한 부모들이 암시장에서 구한 칩을 몰래 멀쩡한 자기 자식들 뒤통수에 박아댔었다. 삼 년 후,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박수갈채를 받으며 통과된 법안으로 인해 모든 청소년들 뒤통수에 강제적으로 SCC가 삽입되었다.

삽입된 지 2년 정도 된 내 칩인 ‘남학생용 확장 제 1형’은 기본적인 기능과 함께 추가로 단정한 외모 유지(내 머리카락인데…….), 여성가족부 선정 청소년 유해 매체(대부분의 영화, 게임, 만화 등, 이쪽 인간들은 왜 만날 수억 원씩 받고서 이딴 짓만 할까?) 금지, 학습 집중도 강제향상, 유해 장르(록/힙합 등) 음원 청취 금지, 인터넷 사용량 제한, 이성과의 신체적 접촉 금지(실수여도 가차 없다.) 등……. 이로 인해 나는 참으로 순종적이고 자기주도적인(이를 주장한 전문가에게 침을 뱉으리라.) 한명의 남학생이 되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학교 복도를 털썩털썩 걸어간다. 구세주가 필요했다. 인권위는 지금 뭣하고 있는가? 딱히 신을 믿진 않지만, 신이시여! 아니, 누구라도 날 좀 풀어줘.

“야! 너 또 야한 생각하고 있지?”

빛나가 복도에서 날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같은 교육관의 부모님을 가진 빛나와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함께 영재교육, 독서토론, 한자, 조기영어따위부터 시작해서 피아노, 바이올린, 컴퓨터……. 심지어 방학마다 영어캠프, 어린이 국토대장정, 청학동……. 함께 그 낯선 곳들에서 적응하기위해 애쓴 것을 생각하면 아마 연대기를 쓰고도 남을 것이다. 결국 마지막으로 SCC까지 함께 삽입되었다.

“야한 생각 안했어.” 나는 반쯤 죽은 채로 대답했다.
“오늘 왜 이렇게 힘이 없어? 것보다 내가 굉장한 걸 발견했는데, 알려줄까?” 그녀야 말로 오늘 이상하게 활기찼다.
“뭔데? 안 아프게 죽는 방법?” 난 짐짓 심각하게 물었다.
“히힛! 넌 역시 재밌어. 아, 벌써 종쳤네. 1교시 끝나고 알려줄게.” 수업종이 울리자마자 그녀는 여학생교실로 뛰어갔다.

난 한숨을 쉬면서 내 교실로 들어간다. 반 애들이 좀비처럼 하나둘씩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스크린이 내려오고, 강남에서 제일로 잘 가르친다는 여강사의 면상이 나온다. 그녀는 인사말도 없이 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하, 참 까칠하게도 생겼다. 지는 도도하다고 생각하겠지.’ 여교사를 보며 생각했다.
‘경고! 두뇌의 수리능력과 무관한 영역이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다시 수업에 집중하길 바랍니다.’ 역시나 바로 반응이 온다. 온갖 잡생각으로 나름 반항하던 나는 결국 3단계 충격 바로 전까지 경고를 먹고 나서야 수업에 집중했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빛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교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자동적으로 수업내용을 노트에 정리하는 학생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매점 가자!” 그녀는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 싫어. 겨우 10분밖에 없는데 뭔 매점이야?” 난 귀찮아서 팔을 내저었다.
“빨리! 사실 굉장한 비밀을 발견했는데, 너한테만 알려줄게.” 그녀가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귀찮다니까.” 내가 강하게 뿌리치자 그녀가 덥석 내 손목을 잡는다.

‘경고! 경고! 규칙 위반! 규칙 위반!’
이런 젠장! 이성과의 접촉으로 3단계인 사이렌 충격이 내 두뇌를 강타한다. 상당히 거슬리는 높은 소리와 감전된 것 같은 아찔함이 온 몸을 관통했다. 무슨 삼장법사가 손오공대신 내 머리를 쪼개는 주문을 외는 것 같았다. 개발자들은 사이렌 충격이 실제론 전혀 유해하지 않다고 적극 주장하지만, 적어도 나에겐 완전 고문수준이었다.

“이년이 또 날 죽이려고!” 난 자동적으로 벌떡 일어나며 성냈다.
“또 당하고 싶지 않으면 빨리 따라와.” 그녀는 팔을 나풀거리며 잽싸게 매점으로 향했다. 사이렌 충격을 당하고도 저렇게 생글생글 웃을 수 있다니, 대단했다.

매점은 무책임하게 진열된 상품들과 셀프 계산대뿐이었다. 학생매점은 계산원도 선도부도 CCTV도 필요치 않았다. 칩이 박힌 이상, 학생들 중 어느 누구도 도둑질 따위는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빛나는 조롱하듯이 들어가서 먹을거리를 한 아름 들고 나왔다.

“세상에, 대체……, 대체 어떻게 한거야?” 내 입이 저절로 쩍 벌어졌다.
“맞지? 굉장하지? 그러니까, SCC를 속이는 법을 깨달았달까?” 그녀는 한입가득 빵을 베어 물며 말했다.
“나도, 나도 가르쳐줘!” 난 두 손을 모으고 빌었다.
“사람이 부탁하는 태도가 글러먹었네.” 그녀가 혀를 차며 말했다.
“비천한 저에게 위대한 가르침을 주십시오. 빛나님.”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날 약 올리는 빛나에게 일단 굴복했다.
“음, 그러니까……. 뭐랄까? 그냥 물 흐르듯이 하면 돼.” 그녀는 무언가 설명하기위해 팔을 출렁였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난 어안 벙벙해서 물었다.
“그러니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달까? 아니, 아예 금지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질 않는 거야. 그러면 머릿속에 경고들이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아져. 없어지기도 하고.” 그녀는 검지를 입에 살짝 물고 매우 애쓰며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학교에서 나가고 싶다.’ 아니, ‘나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되뇌라고?”
“아니, 그냥 중간에 학교를 나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봐. 자연스러운 행동인 것처럼. 학교를 탈출한다고 아예 의식을 하지 마!”

우리는 서로를 응시했다. 나와 그녀의 입 꼬리가 서서히 올라간다.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정문엔 경비로봇이 있으니, 후문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안되겠어. 돌아가자.” 앞서가던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뒤돌았다.
“왜 그래? 그러면 확 나 혼자 간다?”

“조용히 하고 빨리 뒤 돌아.”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웅얼거리면서 말했다. 난 이상한 마음에 그녀의 어깨너머로 슬쩍 후문을 살펴본다. 학교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후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학교에선 절대금연이니, 후문 바로 바깥에서 옹기종기 모여 신나게 빨아대고 있는 것이다. 그들 중 몇몇이 우리와 시간을 번갈아 살피며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뒤돌아서 교실로 돌아가는 마냥 걸었다.

“망할 완전 교도소 수준이잖아!” 빛나가 욕지거리와 함께 분풀이를 했다.

사실이었다. 과거 SCC가 없던 시절에도 학교 담장엔 전부 철조망과 감시 카메라(물론 지금은 작동되지 않지만)가 빽빽이 설치되어 있었고, 이 커다란 부지에 출입구라곤 정문과 후문뿐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학교를 빠져나갈지 고민하는 와중에, 나는 번쩍하고 옛 선배님들의 지혜를 기억해냈다.

SCC가 없었던 지혜로운 선배님들은 낮은 담장 위, 한편의 철조망을 절단기로 끊고 이를 ‘위대한 항로’라 명명했었다. 그리고 전설은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살아있었다. 우리는 미국인들이 로데오 할 때 쓰는 환호성을 내지르며 담장을 뛰어넘었다. 수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학교를 빠져나오다니!



우리는 낄낄대면서 거리로 달려 나갔다. 믿겨지지가 않았다. 마음속의 주도권을 잡기가 이리도 쉬웠었다니, 그저 두려워하지도 의식하지도 말고, 뇌의 부정적인 영역이 활성화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되는 것이었다. 내 두뇌를 내가 조정하지 다른 누가 조정하겠는가!

“이제 뭐할 거야?” 한참을 같이 달리던 빛나가 물었다.
“전부 다! 우선 매일 보면서도 지나쳤던 것부터!”

우리는 거리에 자리 잡은 한 옷가게로 들어간다. 나는 하도 많이 찢어져 속살이 드러날 것 같은 청바지를 입고 체인을 주렁주렁 늘어뜨렸다. 그리고 ‘SEXY‘라 새겨진 화려한 원색셔츠를 걸쳤다. 그리고 마치 교복을 사는 것처럼 칩을 속이며 체크카드로 결제했다.

“나 어때?” 갖춰 입은 빛나가 빙그르르 돌면서 내게 물었다.
“워. 안 춥겠어?” 그녀와 친구 먹은 지 족히 십년은 넘었지만, 핫팬츠를 입은 것은 처음 봤다. 옷가게의 화려한 조명아래 그녀의 맨살이 반질거렸다. 난 그녀가 괜히 만용을 부려 하이힐을 신고서 비틀거릴까봐 걱정했지만, 다행이도 신발은 평범한 운동화였다.

“지금 초여름이거든. 어떠냐고?”
“음, 이제야 좀 여자처럼 보여. 드디어 성 정체성을 되찾았구나!” 나는 익살스레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이런!

난 반사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며, 후폭풍을 기다렸다.

“워! 사이렌 충격이 안 오잖아!” 난 두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고마워. 넌 내 구세주야.” 그리고 그녀의 오른손을 덥석 잡고서 말했다. 드라마의 잘생긴 주인공이었다면 당장 눈물이 쏟아냈을 것이다. SCC는 더 이상 내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뭐라 아주 작게 중얼거려도, 귓가에 기본적으로 울리는 웅~ 하는 소리처럼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빛나는 자랑스러운 듯이 거만한 미소를 띠고 맨살이 드러난 자신의 허벅지를 이리저리 관찰했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평소 단골이었던 미용실에 찾아갔다. 미용실 누나는 방금 문을 열었는지, 꽤나 분주하게 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녀는 날 보지도 않고, 딸랑거리는 소리에 ‘어서 오세요.’라고 반응했다가, 이내 내 얼굴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네가 지금 시간에 여길 어떻게…….” 그녀도 재차 시간을 확인했다.
“저희 게 고장 났어요. 그래서 스타일을 화끈하게 함 바꿔보려고요.” 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안 돼. 내가 그러면 이제 네 엄마를 어떻게 보니? 단골이신데…….”
“그러겠죠? 어쩔 수 없죠. 한번밖에 없을지도 모르는 기회였는데…….” 난 빠른 포기와 허리를 수그려서 최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조용히 있던 빛나도 내 전술을 알았는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흥분된 표정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미용실 누나가 호쾌한 표정으로 벽을 탁 쳤다.

“아줌마들한테 소문만 안 난다면 한번쯤은 해줄 수도 있지.” 그녀는 척하고 미용실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러면 그렇지, 그 시크한 성격이 어디 갈 리가 없지 않은가.
“자, 어떻게 해줄까?” 여기 올 때마다 만날 같은 머리로 잘라서 원래 묻지도 않던 질문이었다.

“노랗게 물들여주세요. 샛노랗게요.”

우리가 염색과 파마를 하는 동안, 칩이 최후의 저항이라도 하듯 경고 문구를 곱씹어댔다. 하지만 내가 이게 원래의 머리스타일인 것처럼 되뇌면서 의식을 집중하면, 산골짜기에서 메아리가 점점 사라져가듯 머릿속에 잡음이 사라져갔다. 하면 할수록 익숙해져 갔고, 족쇄는 녹슬어갔다.

난 거울을 보면서 노랗게 자체 발광하는 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어떤 것 같아?” 빛나가 물었다.
“음, 모르겠어. 조금 가렵기도 하고…….”
“아니! 네 황금 대가리 말고, 내 머리말이야.”

빛나는 머리를 구불구불하게 파마를 하고 약간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짧은 머리에도 생각보다 파마가 잘 나와서 부러웠지만, 이미 난 나의 황금 대가리에 감동받은 상태였다.

“음, 괜찮아.”
“괜찮아? 그것뿐이야?” 그녀가 따지는 투로 물었다.
“알았어. 완전 멋져. 이제 빨리 가자. 벌써 오후가 됐네!” 우리는 나가는 길에 쿨한 미용실 누나에게 감사가 듬뿍 담긴 인사를 잊지 않았다.

나름 짧은 머리로 멋을 낸 나는 빛나의 손을 잡고서 집으로 이끌었다. 역시 부모님께선 두 분 다 직장에 가셨고 여동생은 학교에 가서 집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안방 장롱 밑 작은 상자를 찾아 꺼낸다. 부모님의 추억이 깃든 물건들이 담긴 상자였다. 예물, 추억의 장난감, 젊으셨던 시절 사진, 고추가 보이는 갓난아기인 내 사진……, 찾았다! 아버지의 자동차 열쇠.

물론 우리 가족 차는 전기와 수소로만 움직이지만, 지하주차장에는 아버지와 청춘을 함께 불태운 휘발유차가 한 대 잠들어 있었다. 비싼 기름 값과 환경파괴로 타고 나가면 손가락질을 받지만, 아버지께선 드물게 주말에 홀로 그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다녀오셨다. 가장 좋은 것은 그 차는 목소리대신 열쇠로 시동이 걸린다는 사실이었다.

“설마! 너 운전할 줄 알아?” 이번엔 빛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일요일에 딱 한 시간 허락된 오락시간에 내가 레이싱게임만 한다는 걸 모르는군!”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기대 반 흥미 반으로 조수석에 탑승했다. 약간 긴장한 듯 보였다. 사실 더 긴장한 건 내 쪽이었다. 아무리 현실적으로 만든 게임이라도 오락기 몇 번 흔들었다고 운전이 될까? 불안감이 엄습하자 다시 잡음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나는 심호흡을 해서 자신을 진정시키고는 천천히 열쇠를 돌린다.

윙 윙 윙 윙 쿠르릉!

아! 이런 느낌이었다니, 기분 좋은 떨림이 핸들과 좌석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졌다. 275마리 말이 엔진 속에서 보채고 있었다. 그래! 내가 너희들도 곧 자유롭게 해주마. 생각대로라면 벌써 도로에 나왔어야하지만, 안타깝게도 후진하던 차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기둥에 살짝 긁히고 말았다. 약간의 충격이 전해졌고 백미러에 새겨진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이란 글귀가 날 비웃는 것 같았다.

“아앗, 뭐야?” 빛나는 날 쏘아봤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좌석 위쪽의 손잡이를 붙잡는다. 난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기어를 넣고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자동차가 덜컹거리며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오자, 우리는 찰진 소리가 나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그녀는 의자를 뒤로 쭉 빼며 물었다.

“내키는 대로 가자. 더 이상 계획 따윈 세우지 않아!” 난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부는 그렇게 해도 안 익숙해지던데, 운전은 삽시간에 익숙해졌다.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가 풀리고, 발바닥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운전이 한결 편안해질 때 쯤, 우리는 도심을 벗어나 외곽 도로로 나왔다.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로엔 가족이 꽉꽉 들어찬 경차부터, 선글라스를 끼고 가슴 큰 여자가 운전하는 빨간 스포츠카까지 다 함께 달리고 있었다. 가로수들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고, 하늘에 떠있는 구름조차 서서히 가까워져 왔다. 드디어 내 주변의 세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느낌을 받은 게 대체 얼마만일까?

“좋다아! 어디 음악 좀 틀어봐.” 차창을 열고 입을 헤 벌린 채, 바람을 맞고 있던 빛나는 기지개를 쭉 펴고는 말했다.

“음악 좋지. 라디오? 아니면 DMB?” 내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왜 지금까지 음악을 안틀었을까? 내 장래희망이 로또 당첨이나 주식 대박으로 스포츠카를 산 다음, 음악을 귀 떨어져라 틀은 다음 질주하는 것이었는데……. 살면 살수록 헛된 꿈에서 벗어나 현실로 끌려 내려오기 때문에 음악생각이 안 난 듯 했다.

“아니, 대형 기획사에서 훈련된 애들 꺼 말고. 우리들의 음악을 틀어봐.” 음악방송을 틀려는 내 손을 탁치고 그녀가 말했다.
“우리들의 음악이라……, 아버지가 뭘 들으셨는지 한번 살펴보자.”

호기심에 찬 손가락이 화면을 찍어 음악폴더를 열어젖힌다. 구형차라서 그런지 아니면 용량이 커서 그런 진 모르겠지만 꽤나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는 홀로 계실 때 무엇을 들으실까? 난 괜스레 호기심이 부풀어 오른다.

“믿을 수 없군. 내가 봤을 때, 아저씬 되게 근엄하신 분이었는데…….”

그녀의 말이 맞다. 아버진 명치에 위엄, 낭심에 체면이라고 새겨진 분이셨다. 폴더에서 튀어나온 록 음악들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앨범커버엔 하나같이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은 히피들의 사진이 있거나, 기괴하게 찌그러져 알 수 없는 그림들도 있었고, 또 잔인한 악마가 그려져 있거나 나체의 여성이 그려진 메탈밴드들의 앨범도 보였다. 하나같이 사회적 불안감 조성이나 폭력성 유발 등을 이유로 우리에겐 금지된 곡들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아버지의 귀두 컷이 점점 길어져 장발로 변해버렸다. 난 상상 속에서 그의 정장을 벗기고 꽉 끼는 가죽재킷을 입혔다. 그도 젊었을 적엔 록커를 꿈꾸셨을까?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60년대부터 새천년 대까지 포진한 이정도의 앨범을 모으려면 웬만한 열정 가지고는 안 될 것이다.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국’이란 폴더에 들어가 아무 곡이나 재생시켜본다.

낮게 깔리는 드럼의 파동은 자동차 엔진의 것과 또 달랐다. 단조롭지만 강하게 울려 퍼지는 박자가 내 심장에 열쇠를 꽂고 시동을 켜는 느낌이었다. 후에 기타 선율이 껴들더니,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보컬의 목소리엔 어떠한 기교도 섞이지 않았다. 예쁘게 보이려는 가수의 노력도,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려는 떨림이 없었다. 마치 자기 혼자 열 받아서 마이크에다 대고 무작정 소리치는 것 같았다.

“이거 괜찮은데.” 우리는 박자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면서 서로 쳐다봤다. 그것도 잠시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듯 연주가 빨라지면서 보컬도 기를 쓰고 소리쳐대기 시작했다. 마구잡이로 내려치는 것 같은 박자엔 고개를 까닥이며 리듬을 탈 순 없었다. 이 곡에선 사랑과 이별의 노래가 선사하는 감동은 없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묘한 전율이 느껴졌다.
우리는 어느 샌가 킬킬대면서 간단한 가사들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내 말 들어!”

차 안엔 둘 이외에 아무도 없었지만, 우리는 누구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쳤다. 우리는 마치 노래방에 온 것처럼 몇 곡 더 소화해냈다.
사실 발라드나 댄스곡을 부르면서 서로 폼만 잡고 박수쳤던 노래방보다 이곳이 몇 배는 더 재밌었다. 내가 아직 여자 친구가 없어서 그런지 시시한 사랑과 이별보다, 록의 강한 가사들이 훨씬 가슴에 와 닿았다. 우그러진 성대가 뻥 뚫려버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 같았다.

도시를 빠져나온 듯, 도로의 차선과 폭이 넓어졌다. 넓고 끝이 안 보이는 직선도로와 몇 대없는 자동차들 그리고 ‘제한속도 80km’란 표지판을 보고 우리는 다시 눈이 마주쳤다. 빛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슬쩍 한쪽 눈썹을 추켜세워 그녀의 반응을 살핀다.

“좋아. 말 달려볼까?” 그녀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난 심호흡을 한두 번하고 핸들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오른발가락을 꼼지락대다가 결심하곤 엑셀을 짓이겼다. 계기판에 치솟는 속도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90, 100, 110, 기어가 바뀌는 소리가 나고 속도는 계속 치솟았다. 120, 130, 140, 마침내 속도계가 빨간 부분까지 차오르자, 엔진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브레이크를 밟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밟는 대로 세상이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빛나는 창문을 열고 상체를 내밀어 속도감을 만끽한다. 오늘 파마한 그녀의 머리카락이 금방이라도 풀릴 듯 펄럭였다. 하지만 내가 힐끔힐끔 보게 된 건 거칠게 펄럭이는 그녀의 상의였다. 노출이 심한 상의가 펄럭이면서 아담하게 솟은 가슴(속옷에 가려졌지만)이 보일락 말락 했다.
‘안 돼! 집중해야 해.’
차가 중앙선을 넘어 마주오던 화물차와 충돌할 뻔 했다. 상대의 거친 클랙슨 소리에 정신이 든 나는 속도를 조금 줄이고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당장은 왠지 죽고 싶지 않았다.



“봐! 바닷가야. 우리 저기로 가자.” 빛나는 저 멀리 나타난 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져가면서 번진 노을빛이 멋지게 바다를 적시고 있었다. 나는 이제 완전히 익숙해진 운전솜씨로 기가 막히게 주차를 하고서 차에서 내린다. 강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폭주했을 때 스며 나온 식은땀을 날려주었다.

기러기 소리가 들리고, 짠 냄새도 나고, 의미 없이 걸어 다니는 연인들과 바위사이를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 같은 것들도 보였다.
“아, 좋다. 넌 전에  바다에 와본 적 있어?” 그녀가 난간에 쭉 기대며 물었다.
“모르겠어. 온 것 같기도 하고, 처음인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웃기지 않아? 인터넷과 TV로 하도 바다를 보니까 마치 와본 것처럼 느껴지잖아. 사실 우린 한 번도 바다에 온 적이 없는데……, 실제가 훨씬 나아. 훨씬 넓고, 시원해.”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 그런 것 같아.”
“잉? 반응이 왜 그래?” 그녀는 입을 쭉 내밀면서 물었다.

“아니, 지금 좀…….”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뱃속에서 엔진소리가 났다. 빛나는 배꼽을 부여잡고 웃음을 터뜨렸고, 원래 나도 같이 신나게 웃어야 하지만 이상했다. 왜 이렇게 창피하지? 난 멋쩍은 미소를 띠고 그녀가 웃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그래, 밥부터 먹자. 아, 넌 정말 재밌어!”
오징어 집에서 대충 식사를 때우고 나오자, 이미 해가 져서 어둑어둑해졌다. 식당이 모여 있는 곳에는 이미 바다에 놀러온 사람들이 가득차서 조개구이 따위를 먹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우린 소화도 시킬 겸 슬슬 걸어 나갔고, 바로 뒤쪽의 번화가와 대조적으로 어둡고 한적한 곳이 튀어나왔다. 파도소리와 저 멀리 불타는 등대만이 앞이 바로 바다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런 어둠속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어두운 모래사장에 앉아서 여유를 즐기다가,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빛나를 내버려두고, 난 구석진 편의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에 달린 종이 딸랑거렸지만, 점원은 스마트 폰 화면에 초집중한채로 ‘어서 오세요.’만 웅얼거렸다. 그는 내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지만, 난 괜히 눈치를 보면서 냉장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처음 먹는’ 소주 두병을 집어 계산대로 가져갔다.

어차피 SCC시대부턴 청소년이 술을 사는 게 아예 불가능해졌으니 그는 무표정한 채로 계산한다. 행여 걸릴까 바싹 긴장해있었지만, 난 좀 더 나아가서 점원에게 말했다.

“음……, 저기 빨간 거하고 라이터도 하나 주세요.”
“손님.” 점원은 담배와 라이터를 계산대에 올려놓고 따지는 투로 말했다.
“네?” 이런! 멍청하게 당황해버리다니…….
“손님, 담뱃값은 팔천 원으로 인상됐는데요.”

“아, 네.” 나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낸다. 과거엔 세종대왕님이 그려져 계셨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위대하다고 추대 받는 여성 위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오만 원짜리도 대단한 여성이었다. 세종대왕님보다 위대한…….

난 봉지를 들고 나오면서 밖에서 기다리던 빛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굉장한데. 너 용감한걸!” 그녀가 말했다.
“빛이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다시 어두운 바닷가에 앉아서 말했다.
“내꺼 손전등 돼.” 그녀는 어느새 꺼뒀던 스마트 폰의 전원을 키려한다.
“아니, 아니. 전깃불 말고……. 혹시 너 ‘도덕’이 타는 냄새 맡아봤어?” 난 한쪽 입 꼬리만 올리며 물었다. 그녀는 잠시 혼란스러워하더니, 이내 의미를 깨닫고는 같이 미소 지었다.

학교에서 도덕선생님은 평소에 수염을 길게 기르고 매일 전통 한복을 입고 스크린에 나온다. 그것까진 괜찮지만, 감히 도덕주제에 수업시간에 주요과목 자습(어쩌다가 이게 당연해진지는 모르겠지만)을 안 시키고 수업을 해서 학생들 모두 짜증이 났었다. 빛나는 습관적으로 챙기고 있던 책가방을 열고서 도덕책을 꺼낸다. 나는 그녀에게 무기를 전해주듯이 조심해서 라이터를 건넨다.

번쩍이는 라이터의 섬광과 함께 불꽃이 피어올랐다. 바닷바람과 코팅지로 강하게 저항하던 교과서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달콤하면서 쓰린 향이 엄습했지만, 커져가는 불꽃을 바라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와 같은 기쁨을 느끼는지 빛나가 자신의 책가방에서 책들을 탈탈 털어낸다.

“그래! 다 태워버려. 수학도, 영어도, 역사도……, 문학까지도!”

나는 두꺼운 ‘교과의 정석’을 손으로 정성스레 찢어서 불길 속으로 던져 넣는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보였던 불길이 한 장 한 장 이어 붙으며 활활 타올랐다. 어렸을 적 ‘불장난하면 밤에 오줌 싼다.’식의 장난 섞인 협박과 SCC의 도움으로 우리는 단 한 번도 직접 불을 피워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피운 바닷가의 모닥불은 휘발유로 만든 정형적인 캠프파이어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훨씬 더 아름다웠다.

은은한 노란빛으로 주변이 밝아지자, 빛나가 광고속의 섹시스타처럼 소주병을 빙빙 돌려 소용돌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야!” 그녀가 소주병을 놓치고 마비되어 소리쳤다.
“왜? 충격이야?”
“어. 아이 씨! 갑자기 왜 이러지?” 그녀는 한참동안 머리를 움켜쥐고 있다 겨우 풀려나서 중얼거렸다. 나는 의아해하며 직접 뚜껑을 돌리려 소주병을 집어 든다.

“이런 망할!” 곧바로 난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하루에 사이렌 충격을 두 번이나 쳐 받다니, 오늘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면서 최악의 날이 될 것이다. 칩은 오늘 쌓인 행위들을 모두 징벌하겠다는 기세로 날 짓이겨오기 시작했다. 빛나가 걱정스런 손짓으로 내 등을 쓰다듬었지만, 난 그녀를 뿌리치고 뒤통수를 움켜쥔다.

“야! 뭐하는 거야? 위험해!” 그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난 손톱으로 칩의 끝부분을 깔딱거리며 긁어댔다. 살점들이 조금씩 뜯겨 나오면서 또 다른 고통이 엄습했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고 어느 정도 튀어나온 칩을 강하게 움켜쥐고 확 뜯어냈다. 마치 첫 사정을 경험했을 때처럼, 칩은 공포와 환희가 뒤섞인 채로 뽑혀나갔다.

난 투포환 선수처럼 도움닫기와 기합을 내지르며 바다를 향해 살점 붙은 칩을 던졌다. 바다에 떨어진 칩이 푸른색 전기스파크를 튀기다 서서히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아! 조용해. 드디어 잡음이 사라졌어! 내 머리를 되찾았다고!” 낄낄대며 울부짖었다.
“나도…….”
“뭐?” 빛나가 뭐라 중얼거린 것 같았지만, 배꼽을 붙잡고 뒹굴며 폭소를 터뜨리는 나에겐 잘 들리지 않았다.

“나도 풀어줘!” 그녀가 소리쳤다.

“깜짝이야! 두 번은 자신 없는데? 다시 한 번 부탁해봐.” 난 골반을 흔들면서 약 올리는 춤을 추다가, 그녀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발견하고 진지해졌다. 그녀의 칩을 달걀을 움켜쥐듯 양손으로 조심스레 쥐고선, 긁어내는 과정 없이 한 번에 확 뽑아버렸다. 꽤 아팠을 텐데 빛나는 입을 앙다물고 버텨냈다. 대신 뒤통수의 플러그모양의 작은 상처에서 피가 눈물처럼 찔끔 흘러내렸다.

“자! 그럼 짠!”
소주병이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난 심호흡으로 흥분된 자유의 열기를 잠시 진정시키고, 병에 입을 대고 쪽쪽 빨기 시작했다.
“부왘! 이거 완전 맛없잖아!” 내가 컥컥대며 말했다.
“뭐야? 지금 겁쟁이처럼 안 마시는 거냐!” 그녀가 비웃었다.
“절대 아니지!” 내 고함소리와 함께 우린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소주를 섭취했다.

잠깐 동안, 아무느낌도 없다가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온몸에서 격동하는 맥박을 느낄 수 있었다. 적적해보였던 주변 암흑이 꽤나 운치 있는 분위기로 변했고 내 눈앞에 보인 빛나의 손짓과 몸짓 하나하나가 즐거워보였다. 교과서에는 혈액 속에 들어간 알코올이 간에서 아세트알데히드라는 독성물질로 바뀐다는 사실만 적혀져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이 기분 좋게 취한 느낌은 안 적어놨단 말인가!

“야! 괜찮아? 네 얼굴이 폭발할 것 같아!” 빛나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익! 정말로? 그런데 넌 괜찮아?” 난 화끈거리는 얼굴을 더듬다가 새빨개진 내 손을 발견했다. 같은 양을 마셨는데, 난 다이너마이트처럼 변하고 그녀는 멀쩡하다니.
“글쎄 조금 흥분된 느낌은 있어.”
“그래. 갈 때까지 가보자.”

우리는 과거 자칭 잘나가는 십대들이 똥폼잡을 때나 핀다는 고 타르 담배를 물고서 같이 불을 붙였다. 맘먹고 한번 쑥 들이키기 무섭게 목구멍에서 반발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고꾸라져서 기침을 해댔다.

“그래, 뱉어내!” 먼저 기침을 멈춘 그녀가 쓸데없이 내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아! 뭐지, 붕 떠오르는 것 같은데?” 내가 물었다.
“그러게. 오, 정말!”

두 번째 모금부터는 기침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담배연기가 내 몸속에 약하게 남아있는 걱정과 고민들을 씻어내는 듯 했다. 그간 고생했던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몸이 땅으로부터 살짝 공중 부양한 느낌이 났다. 한껏 연기에 취해 있다가 빛나를 바라봤는데, 그녀는 날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난 화답으로 미소를 짓고 다시 고개를 돌려 담배연기에 계속 마음을 실어 뿜어냈다. 그래도 그녀는 그 불편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왜에?” 내가 애교 있게 물었다.

“키스해줘.”

그녀는 내가 채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서서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런, 담배냄새가 날 텐데? 영화배우들이 어떻게 했었지? 이게 뭐야. 너무 가깝잖아.
프랑스의 한 작가는 키스가 과거 로마인들이 개미들의 영양교환을 흉내 내서…….
대체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짧은 시간 닿았다가 감질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그녀의 입술로부터, 아찔한 파동이 볼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졌다. 나는 아직 가까이 있는 그녀의 눈을 깊게 응시했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잠시 동안 그렇게 있던 나는 빛나의 어깨 너머로 빠르게 다가오는 헤드라이트들을 발견했다.
“이런, 부모님들 차야!” 난 정신이 번쩍 들어 소리쳤다. 술과 담배의 기운이 순식간에 깡그리 없어져 버렸다.
“아! 어떻게? 우리 어떡해! 여길 어떻게 알고 왔지!” 뒤를 돌아본 빛나의 눈에 벌써부터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모르겠어.” 문득 난 바다 속에 던져버린 칩이 생각났다. 그것이 더 이상 기능을 못하게 됐으니, 당연히 부모님께 바로 연락이 닿았을 것이다. 설마 그게 내 위치와 행동을 일일이 보고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난 좀 더 약삭빠르게 행동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난 그녀의 얼굴을 잡고서 다시 내게로 돌렸다.

“같이 도망가자.”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고개만 도리도리 젓고 있었다.
“왜? 왜 안 돼!”

“지금 간다고 우리가 뭘 할 수 있는데?” 그녀가 힘없이 말했다.

내 팔에도 힘이 빠졌다. 그녀로부터 한두 걸음 떨어진 다음 고개를 떨어뜨렸다.

빛나의 말이 맞다.

그녀는 머리채가 잡혀가고 난 아버지의 호된 발길질에 갈비를 맞고 모래사장에 고꾸라진다. 다시 솟구친 술기운 때문에 어지럼으로 빙빙 돌면서 어렴풋이 어머니의 외침이 들렸다.
“당신도 참! 다 큰애를 왜 때려요!”
잠시 후, 그녀는 날 데리고 벤치에 앉혔다. 아버지는 저 멀리 바위에 올라서 담배를 태우시며 분노를 삭이고 계셨고, 어느새 빛나는 그녀의 부모님과 함께 사라졌다.
“괜찮다. 아들아. 그 나이 때는 이럴 수도 있어. 괜찮아. 왜 그랬니? 우리 맘 터놓고 한번 이야기나해보자.” 어머니께서 자비로운 말투로 말하셨다.        
그냥 침묵 속에서 꾸중만 듣고 있으면 곧 끝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나는 다시 용기를 내서 수년전에 꺾였던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저, 열심히 할게요. 진짜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교 들어갈게요! 그러니까, 철학과로 가게 해주세요.”
“얘가 또 이러네! 대체 거기 가서 뭘 배우려고 그러니!”
“글쎄요. 자본주의 돼지가 되는 법보다 나은 거요?”
“됐다! 그만두렴. 새로 SCC달면 지금까지 그 취미생활이라며 시간 낭비하던 글 쓰는 것도 못하게 할 거야. 그러면 너도 공상에서 빠져나와, 좀 현실로 돌아오겠지. 이제 아버지께 가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렴.”

답은 같았다. 내 등급으론, 하늘에 있는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다가, 결국 지하철 노선에 있는 대학에 가게 될 것이다. 하늘에 있는 대학들은 엔간히 공부를 잘해도 못가는 곳이라, 가면 멋지기야 하겠지만, 그곳을 위해서 내 십대의 모든 것을 포기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쳐진 어깨를 끌고 아버지께 걸어갔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는 아무대답도 안하고 그저 서계셨다. 꽤 긴 시간 침묵이 흘렀다.
“혹시 꿈이 음악가셨어요?” 내가 물었다.
“음악은 지금도 가끔 듣는다. 넌 아직도 취미생활이랍시고 글을 쓰고 있니?”
“네” 아버지께선 뒤돌아서 천천히 내게 걸어오셨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어깨를 펴주며 말했다.

“넌 아직 몰라. 이 사회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은 예술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단다.”

“하지만…….” 내가 웅얼거렸다.
“그만! 사람들이 뭐 너보다 멍청해서 죽어라 공부해서 좋은 대학가고, 노량진에 박히는 줄 아니? 이제 집에 가자. 가서 오늘일 다 잊고 다시 시작하자.”
난 아버지의 앞서간 발걸음을 따라 터벅터벅 따라 걸었다. 하지만 내 눈빛은 그리 힘없지 않았다.

‘아니에요. 아버지, 두고 보세요!’

에필로그

당신의 자녀가 몰래 칩을 분리해 일탈행동을 벌일까 두려우신가요?
성인이 돼서도 칩의 도움을 계속해서 받고 싶으시다고요?
좀 더 많은 기능을 지닌 영구적인 비서가 필요하신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젠 두뇌에 직접 깊숙이 설치하는 SCC2가 있으니까요. 흉터 없이, 후유증 없이, 지금 바로 수술받으세요!
(가장 부유한 남자가 화면에 나와 손가락을 치켜들고 말한다.)
“SCC! 당신과 자녀의 성공을 책임집니다.”

* 크라잉 넛의 말달리자 가사 중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십대의 일탈을 추억하며....
LS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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