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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MINUS

2011.04.23 16:2604.23

쿠르르릉. 아파트의 진동에 란은 조용히 눈을 떴다. 잠에서 덜 깬 눈으로 제일 먼저 확인한 건 건너편 소파에 앉아있는 휴였다. 클레어는 다른 소파에 누워 책을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그녀는 짧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늘날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그 모든 죄악들을 이제라도 회계해야합니다. 전 세계에 만연한 전쟁과 살인, 탐욕을 중단하기 위해 바로 이 순간. 당신과 나 그리고 전 인류가 움직이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도 종말이 이런 식으로 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겠지.”

푹신한 소파에 파묻힌 란이 텔레비전에서 방송하는 교황의 설교를 보며 중얼거렸다. 조명 없는 방에 이른 아침의 조용한 빛이 좁은 베란다를 통해 들어와 비쩍 마른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종말이고 뭐고 에이 그냥 다 사라지는 거야! 자 최후의 교황을 위해 건배!”

갈색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진 휴가 공중에 보드카 병을 흔들며 말했다. 지난 밤, 문득 허전한 느낌에 잠에서 깬 란은 집안을 전부 둘러보았지만 어디서도 그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식량을 구하러 나갔구나, 짐작은 했지만 집 안에 그녀 혼자 남아있다고 생각하자 순식간에 주변의 어둠이 온몸을 잠식하는 느낌이었다. 무서움을 떨치기 위해 더듬더듬 손을 뻗어 소파 구석에 박혀있는 리모컨을 꺼내 텔레비전을 켰지만 한참을 뒤척인 뒤에야 다시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얼굴을 마주한 휴는 웬 생크림을 입가에 잔뜩 묻힌 채 아침부터 거나하게 취해있는 것이다.

“뭐야, 왜 그렇게 늦게 들어온 거야? 요즘 바깥이 얼마나 위험한 줄 알면서.”

“케이크를 좀 사왔어. 내가 이걸 사느라 얼마나 멀리 갔는데. 설마 제빵사들이 분실물이 된 건 아니겠지 하고 걱정했었다고.”

휴의 티셔츠와 청바지는 더러워져있었고 드러난 팔에는 언뜻 긁힌 상처들까지 보였지만, 힘들게 버텼던 지난밤을 생각하니 란은 은근히 화가 솟아올랐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걱정하는지도 모르고 위험한 밤거리를 밤새 돌아다닌 거야? 그깟 케이크가 먹고 싶어서? 식량이라면 아직 조금 남아 있잖아!”

“그러게, 그냥 평소처럼 식량을 구하러 나갔었는데. 어쩐지 계속 베이커리를 찾고 있었어. 그땐 정말로 케이크가 사고 싶었단 말이야....... 어쨌든 다음엔 되도록 낮에 나가도록 할게. 먹고 남은 거 냉장고에 넣어 뒀으니까 꺼내먹어. 클레어 것도 좀 남겨주고.”

어제 저녁부터 쫄쫄 굶어 마음은 이미 벌떡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 있었지만 란은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자진해서 남아 봉사하고 있는 경찰들 덕분에 치안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밤새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식량이라면 경찰들이 순찰하는 낮에도 구하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란은 일단 휴가 술에서 깨면 차근차근 이야기해서 사과를 받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케이크의 맛을 입 안으로 상상하던 란이 문득 중얼거렸다.

“대체 아침부터 술은 왜 마시는 거야, 너 술 잘 안마시잖아?”

소파에 기대어 잔 탓인지 어깨며 허리가 뻑적지근해 란은 몸을 길게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온 몸의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상쾌한 기분을 즐기던 란은 갑자기 술병을 바짝 들어올려 남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휴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미쳤어. 뭐하는 거야? 어쩌려고 그렇게 마셔?”

휴는 이윽고 텅 빈 술병을 찡그린 얼굴로 멍하니 쳐다보다 방바닥에 휙 집어던졌다. 소파 아래 카펫으로 퉁, 떨어진 술병은 지진으로 인해 기울어진 아파트의 경사를 따라 천천히 어두운 거실 구석으로 굴러갔다.

“나도 모르겠어.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 다 틀렸어, 모두 다 끝난 거야.......”

멍한 표정으로 굴러가는 술병을 바라보던 휴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단순한 주사가 아니라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화들짝 놀란 란은 그제야 휴의 온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간밤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팔뚝에는 긁힌 상처 뿐 아니라 시퍼런 멍들도 하나 둘 보였고 머리 위에서부터 흘러내린 피는 이마 위에서 대충 닦인 채 검붉게 굳어 있었다. 가슴에도 등에도 휴의 것인지 타인의 것인지 모를 피들이 흘러내리고 튀어 있었다.

“너 괜찮니? 휴, 죽는 거 아니지? 뭐라고 말 좀 해봐!”

혹이나 건드리면 그대로 쓰러져버릴까 란은 휴의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만 볼 뿐이었다. 모든 걸 잃은 것처럼 가슴을 움켜쥔 채 끅끅거리며 눈물을 흘리던 휴는 이윽고 우는 자세 그대로 탁자에 엎어졌다. 휴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탁자에 흘러내려 유리위에 번졌다.

“뭔가 잃어버린 것 같아. 분명히 뭔가 중요한 게 있는데......!”

휴는 고통스러워하며 울음 끝에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탁자에 머리를 기댄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란은 조심히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 숨 쉬는 소리를 느껴보았다. 콜록 콜록! 진한 술 냄새와 함께 란의 볼에 뭔가 뜨거운 것들이 들러붙었다. 윽, 란은 질겁하며 휴의 어깨를 잡아 거칠게 소파로 밀쳐버렸다. 소파 위에 나자빠진 휴는 움찔움찔 자리를 잡더니 그대로 코를 골며 골아 떨어졌다. 란은 조심조심 휴의 티셔츠를 벗겨냈다. 다행히도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간밤에 자신이 덮었던 소파 위의 담요를 가지런히 펴 휴를 덮어 주었다. 시계가 분실물이 되어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지만 창 밖의 햇살이 아직 창백해서 이른 아침인 것은 알 수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이제 100세가 넘었다는 달라이라마가 나와 더듬더듬 인류를 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방송을 통해 희망과 용서를, 뉘우침과 행동을 인류의 지도자들은 전 세계에 전달했다. 하지만 지금은 없어져버린 인터넷에서, 약 한달 전쯤에 퍼진 정보로는 전 세계의 국가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들마저 분실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진실 여부야 알 수 없었지만 그 소식이 알려지자 그들이 말하는 희망에서 맥이 빠진 건 분명했다. 그래도 란은 텔레비전이라도 켜 놓고 그런 메시지라도 듣고 있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식량이라면 많이 부족하긴 해도 주택가를 뒤지면 아직 뭐든 건질 수 있었고, 상가 지역에 남은 치안이 중심되어있어 하루 일정량만 판매하고 있긴 했지만 남은 상인들은 꽤 마음 놓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 외의 지역은 낮에도 버젓이 살인이 일어나는 등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식량만 꾸준히 확보하고 집에서 버텨간다면 언젠가는 이 지옥이 끝날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점점 더 잦아지는 지진 때문에 전등이 모두 떨어져버려 햇빛이 들지 않으면 집 안은 언제나 어두컴컴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어두운 집안을 터벅터벅 걸어 란은 냉장고로 향했다. 두툼한 냉장고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덜컹 평소보다 무겁게 냉장고 문이 열리며 환하고 노란 빛을 어두운 방에 쏟아냈다. 쓸데없이 최고 온도로 맞추어져 있는 텅 빈 냉장고 속에 하얀 케이크가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시큼한 냉기 속으로 팔을 뻗으며 란은 케이크를 꺼내려했다.

쾅쾅쾅. 그 순간 밖에서 현관문을 때리는 소리가 정적을 부스며 온 집에 울려 퍼졌다. 갑작스런 소리에 케이크를 꺼내려던 란은 신음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진이 났을 때의 행동이 몸에 배어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식탁 아래로 기어들어가 식탁 다리를 부둥켜 잡았다. 현관문에 난 총알구멍에서 가느다랗게 새어나오는 빛줄기가 침입자의 움직임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쾅쾅쾅! 문 밖의 침입자는 더욱 거칠게 현관문을 후려쳤다. 문의 경칩과 자물쇠들이 모두 부서져 버릴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 란은 뿌옇게 흐려진 눈을 닦으며 거실 끝의 소파에 누워있는 휴를 보았다. 휴는 아무것도 못 들었는지 기세 좋게 코를 골고 있었다. 란은 식탁 다리를 부둥켜 잡은 채 깜빡이는 현관문의 빛줄기를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쿠르르르릉. 아파트가 흔들렸다.



클레어가 금빛 단발머리를 흔들며 문소리를 듣고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란은 소리 질러 클레어를 불러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문 밖의 침입자와 클레어 간에 몇 마디 대화가 이어지는 가 싶더니 마침내 문이 떨어져나가는 듯 커다란 굉음과 함께 클레어가 빙글 한바퀴 돌았다. 그녀의 얼굴 절반이 몇 개의 덩어리가 되어 방바닥에 흩어졌다. 피를 쏟으며 클레어는 남은 한 쪽 눈으로 식탁 밑에 숨은 란을 쳐다보았다. 풀썩 가는 무릎이 무너지며 클레어는 그대로 쓰러졌다. 놀란 휴가 소리를 지르며 권총을 들고 뛰쳐나와 현관을 향해 몇 발인가 총알을 쏘았다. 란은 밖으로 나가려는 휴의 허리를 잡고 그를 말렸지만 휴는 그녀를 뿌리치고 문을 열었다.



쾅쾅쾅. 다시 문소리가 이어졌다. 란은 눈을 떴다. 노란 냉장고의 빛이 여전히 어둠 속의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식탁 밑에서 기어 나온 그녀는 냉장고 문을 닫고 천천히 일어섰다. 총은 이미 분실물이 되었다는 걸 상기하며 란은 용기를 내었다. 거실 구석에 처박힌 술병을 주워들고 그녀는 문 앞에 섰다. 클레어의 머리를 때렸던 빛줄기들이 조용히 란의 가슴 위를 비추었다. 바깥에 있을 침입자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란은 병을 쥔 오른손에 더욱 힘을 주고 발끝을 세워 문 중앙의 렌즈를 통해 밖을 보았다.

문 밖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란은 차가운 철문을 사이에 두고 자신과 같이 숨죽이고 있을 침입자를 상상해보았다. 인기척을 죽인 침입자는 란이 자물쇠를 열어 밖을 확인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란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인내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 인기척을 느끼려 애썼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렌즈를 통해 밖을 내다봐도 사람의 흔적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이윽고 란의 머릿속에서 침입자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휴의 코고는 소리와 텔레비전 소리가 점점 그 자리를 채워 올 때, 란은 소리를 죽이고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조용히 문을 열어 밖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도저히 엄두가나지 않았다. 그렇게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다시 소파에 돌아왔을 땐 온 몸의 힘이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

란은 소파 옆 베란다로 나가 조심히 창문을 열었다. 죽은 도시의 창백한 냄새가 한기와 함께 들이닥쳤다. 아파트 칠층에 있는 그녀의 집은 언덕배기에 있어 전경이 좋았다. 주택들로 들어찬 언덕 아래에는 작은 공원과 고등학교가 있었고 그보다 더 아래엔 전철역 주변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상가지역까지 가는 길이 위험했기 때문에 그들은 주로 언덕에 있는 주택가를 소리 없이 다니며 식량을 찾았다. 란은 고개를 내밀어 아파트 아래를 내려보았다. 그녀의 창문 바로 아래엔 발레를 하는듯한 자세로 반쯤 썩은 시체가 있었다. 어딘가 수상한 사람이 있을까 구석구석 찾아보았지만 성과는 없었다. 후, 란은 어느새 이마위에서 차갑게 말라가는 식은땀을 훔치며 소파 어딘가에 널브러져있던 숄을 어깨 위에 둘렀다. 멀리 까마귀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파트에 이제 사람들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집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오직 휴 밖에 없었기 때문에 란은 가끔씩 그렇게 물어보곤 했다. 처음엔 란과 클레어도 함께 밖으로 나가 식량을 찾았지만 곳곳에 자살이나 폭행으로 죽은 시체들이 보이고, 대낮에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강도짓을 하는 걸 목격하면서 후에는 휴만 집 밖으로 나갔다. 그에 의하면 아파트 가구의 대부분이 강도에게 습격당했거나 다른 지역으로 떠난 것 같다고 했다. 복도에서 목을 매달거나 창 밖으로 뛰어내린 이들도 적지 않았다. 종말이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비릿하고 이상하게 변해갔다. 종말은 모두가 예상했던 핵전쟁도 아니었고 이상기후가 순식간에 전 세계를 덮치는 자연재해도 아니었으며 소행성이 수 광년 밖에서 가져온 재앙도 아니었다. 하루 24시간 마다 인류는 지상으로부터 조금씩 하지만 확실히 지워지고 있었다.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무엇이 없어졌는지 알 수 없을 때도 많았다. 인간은 그들의 탄생과 다가올 종말에 대해서 끊임없이 연구해왔지만 신은 그것을 영원히 비밀로 하려는 듯 했다.

란은 침입자가 왔을 때 식탁 밑에서 봤던 것들이 신경 쓰였다. 너무 허약해진 탓에 잠깐 기절했던 것일까? 아니면 환영을 봤던 것일까? 자신이 미쳐가는 건 아닐까? 란은 머리를 감싸 쥐고 생각에 잠겼다. 셋은 직장 동료였고 종말이 시작되고 두 달이 지난 후, 사람들이 무언가 일어나고 아니 사라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란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가족들은 이미 사라지거나 살해당한 후였다. 당시엔 하루도 총소리가 그치는 날이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식료품을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도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아직 사람들이 모든 걸 포기하기 전이었기 때문일 거라고 휴는 말했었다. 휴는 어디서 음식들을 구해오는 걸까. 란은 휴가 밖에서 살인을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왔었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클레어가 목덜미까지 담요를 끌어올리며 란에게 물었다.

“아니야. 아무도 오지 않았어.”

찬 바람에 잠이 깬 모양이었다. 란이 서둘러 창문을 닫으며 거짓말을 했다. 클레어는 담요를 끌어안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쾅! “꺄아아악!”

휴는 소파에서 튀어나가 거실에 있는 서랍장 깊은 곳에서 권총을 꺼냈다. 손안에 총알이 잔뜩 든 장전된 권총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란은 식탁 밑에서 울고 있었고 클레어는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란의 비명 소리도, 침입자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휴의 귀에는 이제 들어오지 않았다. 현관으로 뛰어가며 휴는 몇 발인가를 보이지 않는 침입자를 향해 쏘았다. 자물쇠를 여는 그의 허리를 란이 잡고 만류했다. 문을 열면 안 된다고 그녀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몇 달 전 집에서 봤던 죽은 가족들의 모습이 휴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지금 녀석을 잡지 못한다면 문 밖에서 방아쇠를 당겼을 녀석의 수천가지 얼굴이 평생을 괴롭힐 것이다. 휴는 란을 뿌리치고 망설임 없이 자물쇠를 열었다. 뜻밖에도 문을 열자마자 복도의 벽에 등을 기대고 쓰러져있는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휴의 총을 맞은 모양인지 목을 감싸 쥔 녀석의 손가락 사이로 철철 피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더러운 청바지와 셔츠를 입은 거구를 생각했었는데, 그저 안경을 쓰고 약간 야위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녀석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게 떠는 손으로 녀석은 천천히 총을 들어올렸다. 어깨 넓이만한 길이의 샷건이었다. 탕! 두말할 것 없이 휴는 녀석의 이마에 총알자국을 만들어 줬다. 조용해진 녀석을 발로 툭 치자 놈은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튀어나온 뇌 조각들이 그의 등 뒤에 흩어져 있었다.

“이제 다 끝났어!”

휴는 뒤 돌아 란에게 외쳤다.



쿠르릉. 아파트가 흔들리는 소리에 란은 조용히 눈을 떴다. 젠장 이놈의 지진 때문에 마음 편히 잘 수가 없네. 란은 마음속으로 투덜거렸다. 클레어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고 휴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케이크가 있었지. 케이크 생각을 하자 란은 배가 고팠다. 아니 배가 고파서 케이크 생각이 났을지도. 그녀는 부스스 일어났다. 쿨쿨 코를 고는 휴를 보며 란이 말했다. 입안이 말라 쉰 목소리가 나왔다.

“휴 티셔츠 봤어? 왜 그렇게 피가 묻은거야?”

“나도 몰라.”

클레어는 책에서 눈도 때지 않고 말했다.

“너 어제 밤에 휴랑 같이 나간 거 아니었어? 어디 갔던 거야?”

“무슨 소리야. 잘 생각해봐 그날 저녁에 난 나가지 않았어.”

클레어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내가 잘 못 봤나, 란은 쭈뼛거리며 클레어에게서 떨어져 터덜터덜 냉장고를 향해 어두운 거실을 걸어갔다.

“책 읽는 것도 은근히 에너지 많이 쓴다. 그냥 자는 게 최고야. 배고파진다고.”

어엉. 듣는지 마는지 클레어는 여전히 책을 읽으며 대답했다. 두툼한 냉장고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덜컹 평소보다 무겁게 냉장고 문이 열리며 환하고 노란 빛을 어두운 방에 쏟아냈다. 서늘한 냉장고의 냉기 속에 마치 커다랗게 떨어져나간 마음처럼 케이크는 이미 한 조각 잘려 있었다. 쿠르르릉. 지진이 멈출 줄을 몰랐다. 란은 냉장고를 손으로 짚어 중심을 잡았다. 어쨌든 너무나 배가 고팠다. 그녀는 흔들리는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냈다. 딸그락, 케이크 접시 어디선가있던 작은 반지가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란은 케이크를 식탁 위에 올려 두고 허리를 굽혀 반지를 주웠다. 매끈한 곡선과 반짝이는 다이아가 예쁜 반지였다. 란은 반지를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보았다. 뭐야, 반지는 그녀의 손가락을 너무 손쉽게 통과했다. 생선 가시처럼 마른 손가락이 그렇게 미워 보일수가 없었다. 반지는 식탁위에 내버려두고 냉장고 문을 닫으려는데 케이크가 있던 자리에 쪽지가 하나 있었다. 란은 쪽지를 꺼내 냉장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게 뭐야? 휴에게 물어보려했지만 TV 앞에서 들리는 코고는 소리가 란의 말문을 막았다. 그녀는 냉장고 빛에 쪽지를 비춰 천천히 그것을 읽었다. 한참을 읽고 다시 읽어도 란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왠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짧은 글이었다.

쾅쾅쾅! 누군가 문을 부술 듯이 두들겨댔다. 총소리가 들렸고 클레어는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권총을 가지고 휴가 밖으로 뛰어나가려했다.

“......안돼!”

란은 휴에게 뛰어가 그의 허리를 잡았다. 잠시 둘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그의 눈에서 그녀에 대한 어느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마크는 헉헉거리며 언덕을 올랐다. 매일 약간의 운동과 영양 있는 음식으로 다시 건강을 회복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수개월에 걸친 악몽 같은 나날들은 그의 몸을 단단히 망쳐놓은 것이 분명했다. 공원과 주택가를 지나 그는 마침내 언덕 위에 서있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벌써 몇 번이나 방문했지만 음침하기 그지없는 장소였다. 아직 청소가 끝나지 않은 이 아파트는 마치 지옥에 온 것처럼 종말의 냄새가 이곳저곳에 배어 없어지지 않고 있었다. 마크는 될 수 있는 한 눈길을 주지 않으려했지만 저도 모르게 한 구의 시체에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왠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지 확인해두지 않으면 뒤통수가 서늘할 것 같은 생각 때문이었다. 아파트 위에서 뛰어내려 죽은 것 같은 금발의 그 시체는 발레라도 하듯 팔과 다리가 이리저리로 뻗어 있었다. 사망한지 몇 달은 지난 것으로 보이는 여자 시체였다. 마크는 고개를 들어 아파트 위를 올려다보았다. 시체 바로 위로 일곱 번째 층의 베란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잠에서 깬 란은 문득 허전한 느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식량을 구하러 갔으리라 짐작은 했었지만, 집 안에 그녀 혼자 남아있다고 생각하자 순식간에 주변의 어둠이 온몸을 잠식하는 느낌이었다. 란은 텔레비전 빛에 희미하게 비치는 현관문의 총알구멍들을 보았다. 왠지 그 어두운 구멍 밖에서 침입자의 눈이 집안을 지켜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 란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배가 너무 고팠다. 란은 두려움에 몸을 한껏 움츠리고 터벅터벅 냉장고로 걸어가 무거운 문을 열었다. 시큼한 냉기가 그녀를 덮쳤다. 란은 케이크를 꺼내고 반지를 확인하고 쪽지를 읽었다.

- 24번째 생일 축하해 클레어. 사랑해.

란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휴가 이런 쪽지를 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진작 클레어에게 전해주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란은 소파로 돌아가 텔레비전을 껐다. 휴와 클레어를 생각하자 머리가 아팠다. 그냥 이대로 미쳐버리자. 현관문의 총알구멍으로 붉은 눈동자가, 검은 손가락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냉기가 사라지지 않고 그녀를 괴롭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 란은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쿠르르릉. 지진에 눈을 떴을 때 휴는 술에 취해있었다. 왜 무리를 해서까지 그 밤중에 케이크를 사온거야. 반지는 또 어디서 난거야. 란이 물었지만 휴는 대답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뭔가 잃어버린 것 같아, 뭔가 정말 중요한 걸.......”

란은 그게 뭔지 이제 알 것 같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클레어는 책을 안고 다른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났어!”

휴는 뒤 돌아 란에게 외쳤다. 닫힌 문 안에서 란은 대답이 없었다. 휴는 죽은 청년의 피 웅덩이에 푹 적셔진 샷건을 집어 들었다. 꺼림칙했지만 무기는 구할 수 있을 때 챙겨두는 것이 좋았다. 내친김에 휴는 시체에 다가가 주머니와 가방을 뒤졌다.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이 나왔는데 현금이 꽤 많이 들어있었다. 지폐에 오래된 피가 묻어있는 것으로 봐서 모두 약탈한 것으로 보였다. 백팩 안에서는 통조림 몇 개와 샷건 총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퍽! 일어서려는 순간 휴의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억지로 정신을 차려 일어서려했지만 어깨가 부서졌는지 오른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 개자식이! 다들 이리 와봐!”

한 남자가 휴의 등 위로 발길질과 몽둥이질을 해가며 동료들을 불렀다. 휴는 권총을 왼손에 바꿔 쥐고 몸을 돌려 그의 복부를 쐈다. 녀석은 배에 난 구멍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다 쇠파이프를 치켜들었다. 휴는 상체를 일으키며 그의 머리를 쐈다. 놈은 팔을 든 자세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란! 문 좀 열어줘!”

휴는 오른쪽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일어섰다. 총을 쥔 손으로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지만 안에서 잠겼는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때 옆집 문이 열리며 사내 두 놈이 나타났다. 놈들은 바닥에 쓰러진 시체들을 확인하고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휴는 문에 몸을 기대고 그들을 향해 총을 쐈다. 대여섯 발을 쐈을 땐 두 녀석 모두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 집은 원래 빈 집이었다.

“란! 문 좀 열어줘! 빨리!”

쾅쾅쾅! 휴는 문을 두드렸다. 반대편 복도 끝에서 또 다른 녀석들이 뛰쳐나왔다. 란은 문을 열지 않았다. 휴는 오른팔이 어디 붙어 있는지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문을 두드렸다.



어떻게든 문 밖으로 데려오겠다고 하고 일을 마친 상사와 막 헤어진 참이었다. 마크는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문을 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벌써 둘이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허탕을 쳤던 탓에 상사는 다시 그 아파트를 찾아가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녀를 발견한 것은 한 달 전쯤이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거리나 집에 방치된 시체들을 찾아 트럭에 실거나 아직 살아남은 사람들은 구조대에 연락해 보호구역으로 보내고 있었다. 몇 달간 계속되던 종말의 시기는 폭풍우가 사라지듯 어느새 끝나 있었지만 사라진 것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오염된 도시의 청소였다. 죽은 사람은 너무도 많았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너무도 적었으며 도시는 너무나 넓었다. 그들은 겨우 둘이었고 그들이 맡은 구역은 너무나도 넓었다. 몇 달은 꼬박 일해야 일을 다 마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날, 하루 일을 다 마쳤을 때 즈음 마크는 주택가가 있는 언덕 위의 아파트를 올려다봤다. 십 몇 층 정도 되는 높이의 아파트였다.

“저긴 또 어떻게 끝낸다.”

마크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기까지 올라가서 집집마다 들어가 시체들을 끌어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종말이라더니 엄한 것들만 사라지고 시체들은 한 구도 사라지지 않았다. 한바탕 무서운 시대가 지나갔다지만 그의 삶은 별반 변한 것이 없었다. 마크같은 이들의 노동력은 여전히 질병이나 사고의 위험과 함께하는 일에 필요할 뿐이었다. 리스크가 있는 만큼 보수는 짭짤했지만 결국 그것뿐 술이나 담배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 법이다. 그런 인생이었다.

“마크!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이리 와서 이거 드는 것 좀 도와줘!”

상사는 트럭 아래 쌓여 있는 시체 보따리들 중 하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방독면을 뒤집어  쓰고 있어서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예, 갑니다!”

아파트에서 시선을 거두는 마크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작은 베란다들 중 하나에 창문이 열린 것이다. 너무 멀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뭔가 거뭇한 물체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것은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고 긴 머리카락의 여자였다.



란은 철문에 기대어 바깥의 기척을 살폈다. 침입자가 문 바로 앞 까지 다가와 서성이는 걸 분명히 들었다. 손아귀에 너무 힘을 줘 쥔 병이 깨질 것 같았다. 렌즈를 통해 밖을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일어서있을 힘이 없어 란은 소리 없이 두 팔을 들어올려 차가운 철문에 기대고 버텼다. 두려움에 식은땀이 온 몸을 적시었다. 란은 병을 잡고 있는 오른팔을 봤다. 이런 일들이 생기기 전에는 다이어트 때문에 그렇게도 스트레스를 받았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나 이미 죽은 건 아닐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말라있었다.



시체 썩는 냄새가 가득한 아파트다. 특히 마크가 향하는 칠층의 복도에는 총상을 입은 시체들이 여러 구 뒹굴고 있었다. 십여 구는 되어 보이는 시체들이 그녀가 있는 집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문 앞에는 갈색머리의 남자가 한명 죽어있었다. 시체는 심하게 부패해있었고 싸움 중 뼈를 다쳤는지 이제는 뼈만 남은 오른팔은 어깨부터 부서져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그는 누구일까. 그가 그녀를 지켜줬던 것일까? 마크는 그녀가 집 밖으로 나올 때 놀라지 않도록 근처의 시체들을 다른 집 안으로 옮겼다.

소용없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전처럼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마크는 허리춤에 찬 공구들을 꺼내 문의 장석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문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왜 그녀는 문을 열지 않을까. 뭐가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그런 힘든 시기를 닫힌 문 안에서 버텨내고있었을 그녀가 마크는 안타까웠다. 종말이 끝났다고 낙원 같은 세상이 도래할 것 같진 않았지만 그런 세상이라도 그녀에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덜컹!

장석이 떨어진 문은 쿵 하고 바닥에 내려앉았다. 마크는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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