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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내 눈에 콩깍지

2011.04.23 12:4704.23

내가 그녀를 본 건 기원전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화려한 궁정에서 아름다운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의 풍성한 머릿결~내려주오~~!!!”

기원전 아마도, 평민이었을 나는 그 궁정의 마지막 층에서 그녀의 머릿결을 찬양해야했다.
그것은 내 의무였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거라는 걸 나는 잘 알았다.
한번이라도 그녀는 날 돌아봐주지 않을테고, 나는 항상 그녀의 긴 머리를 갈망해야 했을 터였다. 근데 지금 내 눈앞에 그녀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아, 그녀의 머리가 이 정도로 길었었나...

“요기야! 오빠한테 문대지마!”

차가운 감촉에 눈을 떠 보니 역시나 그렇지. 동생이 키우는 코카스파니엘이 내 얼굴을 핥고 있었다.

“깼어? 아침 먹어야지.”

동생의 말에 난 비척비척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저 놈의 코카스파니엘을 누가 안 치워주려나...
3대 지랄견같으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현재 직장이 없고, 동생에게 얹혀 사는 신세였으니...

“오빠. 오늘 면접 일정이 어떻게 돼?”

딴집에서야 88만원 세대의 비극이니 어쩌니 하면서 갈굼 당하기도 하고, 측은한 보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지만, 우리 집은 동생과 나 둘만이 있을 뿐이다.
고로 세상이 싫다며 문을 닫고 히키코모리가 될 수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취업하지 않는다고 심하게 엉덩이를 걷어차일 일도 없다.
다만, 며칠에서 몇달까지 심하게 굶을 뿐이다.

“오늘은 별로 없네. 3건 있다. 이걸로 오전은 끝이고...오후에는 아르바이트 구하러 나가야지...”

“이번에는 꼭 붙으면 좋겠다. 그래야 오빠도 좀 양복 말고도 좀 옷 더 장만할테니까.”

지금 현재는 동생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것으로 떼우고 있다.
하지만 동생도 재계약 시점이 다가오고 있고,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돈 버는 사람인 동생이 다시 쉬게 되면 돈이 들어올 일은 없는 것이다.
대학도 우리 둘 다 고학생이었으니 더 할 말도 없고.

“오늘은 꼭!”

투박한 회사 건물을 보면서 다짐했다. 눈높이도 이만큼 낮췄으니 취직이 되지 않을까하는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가능할 것이다.
근데 그 건물 옆에는 어울리지 않게 시커먼 소형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흑색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그 건물옆에 조그만 명판이 하나 있었다.

[콩깍지 클럽]

겉보기에는 고급 클럽같은데...어째서 이름이 저런지...
결국 나는 그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을 손으로 열어보았다. 의외로 문은 쉽게 열렸다.
겉은 까맣고 속은 화려한 무엇.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뭔가 내 기억속에 들어있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회사 로비에 도착해서도 머리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결국 난 면접에서 떨어졌다.

"면접 몇 개 떨어졌다고 해서 그렇게 상심할 건 없잖아.“

동생이 된장국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별로 할 말도 없었다.
내 나이 이제 스물 아홉.
물론 서른이 되어서도 취업 못하는 사람이야 많다지만, 난 경쟁사회에서 이렇게 패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호스트라도 하고 싶다....”

동생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실제로 암담했다.
대학시절 틀림없이 취직한다고 장담하면서 끌어쓴 학자금 대출도 있고...
생활비도 부족하고...

“오빠가 호스트를 해? 지나가던 개도 웃겠다."

사실 동생이 코카스파니엘을 키우겠다고 했을 때도 반대를 좀 많이 했다.
사실 개전용 먹이라는 것도 상당히 비싼 거니까. 동물병원비도 많이 들고...

“야, 요기 밥이라도 제대로 줘야 하잖아.”

하지만 요기를 처음 데려왔을 때 동생의 눈과 요기의 눈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져온다.
요기는 병이 걸려 있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구타당해 유기된 개였다.
동생은 요기를 꼭 붙잡고 놓치지 않았고, 그 당시에 과외로 어느정도 수입이 있던 나는 그 눈들을 차마 떨쳐낼 수가 없었다.

“하하~ 요기야. 너네 오빠가 너 걱정 많이 하네.”

할짝.
난 개를 좋아하진 않지만 요기가 보여주는 그 신뢰감이 좋다.
물론 신뢰감 좋지만, 얼굴에 닿는 그 혀까지 좋다는 건 아니다...

“으악! 핥지마! 이거 면접용 구두라고!!!!”

물론 신뢰감을 가진다고 해서 모두 다를 아는 건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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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호스트?”

고등학교 시절부터 날리던 선배를 찾아가서 자문을 구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호스트 중 하나라던 그는 피식하고 웃음부터 날렸다.

“네가 면상이 된다고 생각하냐?”

사실 너보다는 내가 낫지. 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잘 아네. 하지만 면상 좋다고 다 잘되는 것도 아니고...나도 요새 찬밥이다. 야. 나도 힘없어서 널 거둬줄 힘같은 건 없어.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 눈이 진지했다.

“어쩌면 네가 가장 잘 어울릴지도 모르지. 나도 못 가는 덴데-아니 못가는 게 아니라 안가는 거지만.- 너같이 거길 위해서 태어난 것 같은 놈이라니 조금 열받지만...”

선배가 손으로 명함을 들고는 빙글빙글 돌렸다.

“여기만 들어가면 세상 만사 오케이! 자~ 후배를 위해서 자상하게 길을 이끌어주는 선배의 앞에서 무릎으로 기고 멍멍하고 짖어봐라~ 그럼 던져주마!”

그럼 그렇지. 본성이 어디 가냐...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목구멍이 먼저였다.
그는 명함을 휙 하고 던졌고, 나는 개처럼 네발로 뛰어서 명함을 입으로 물었다.

“하하하하하! 진짜로 하는 놈이 있는 줄은 몰랐네.”

그는 배를 붙잡고 웃어대더니 이내 진지하게 말했다.

“하여간 잘 해라. 나머지는 네 하기 달렸으니까.”

그는 그리고는 내게서 등을 돌렸다.

“어서 가! 나는 밤 영업 때문에 좀 자야겠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선배.”

“흥! 그 근성이면 충분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니까 별로 고마워 안해도 되고.”

그리고...뭐라고 이야기 한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얼핏 듣기로...

[넌 여자들이 좋아할 타입이 아니라 남자들이 좋아할 타입이거든.]

였던 것 같긴 했지만.
명함을 들어보니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콩깍지 클럽.]

그 새까만 대리석으로 된 수상한 클럽...

[지배인: 류우미 ]

뭔가 알 듯 모를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편해졌다. 호스트가 알 정도의 클럽이면 뻔하겠지...
싶었지만.

“여~ 장동건 부럽잖게 멋있게 변했는 걸.”

“자넨 어떻고, 피부에 윤기가 흘러. 마나님이 잘해주시나?”

호스트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정상적인 루트의 정상적인 남자들이 정장차림을 하고 좌악 앉아있는 테이블이란...

“아, 기원이는 아직도 그러고 있나?”

“뭐, 자기 인생에 그런 여자들은 필요없다고 하더라고...”

기원은 바로 내 선배의 이름이었다.

“쯔쯔. 지 인생도 생각해가면서 폼을 잡아야지. 바보.”

이놈들 게이인건가!
정장차림에 테이블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그들에게서는 중년의 위기도, 먹고 살아야 하는 아득바득한 정신도, 당뇨, 고혈압 등에 대한 경각심도 전혀 없었다.
그저 그림에 그린 듯한 남자들이 친목회를 빙자하여 연애게임을 하는 듯...

“저런. 신입이 있네?”

신입?
아니, 저는 빼주시겠어요. 제 인생엔 이런 이력이 전혀 없어요...

“응, 기원이가 알아서 쓰라면서 보내주던데?”

“아, 기원이는 사람보는 눈은 정확하니까. 철민이도 그 녀석이 보내줬잖아.”

“기억나네요. 확실히 암울한 시절이었죠.”

철민이라고 불린 남자가 의자를 하나 뺐다.

“여기 앉으세요. 우리 이야기나 좀 하죠.”

“에...전 일하러 왔는데요...”

“이게 일이에요. 앉으세요.”

그러고보니 분위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떠들썩한 웃음도 없고 잔잔한 담소만 이어지는.

“그러고보니 요즘 사모님은 어떻게 지내시나?”

“여전하지 뭐. 아직도 내 눈에는 그냥 천사같이 보여. 사업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우리 둘의 힘이라면 가능할 거야. 너희들도 알겠지만 그 여자가 어디 보통 여자냐.”

어라...

“그 집 사모님만 보통이 아냐? 우리집은 더 하다고.”

“뭐, 부인 칭찬만 하면 불출산에 올라간다던데? 하긴 더 이상 팔불출이 될 인간들도 없지? 여긴?”

“말 나온김에 다음에 한번 부부동반 모임을 갖는 건 어때?”

“신입한테 보여주면 충격이지 않을까? 기원이도 그래서 돌아가버렸잖아.”

“지 그릇이 안되는 놈들이야 그러고살라 그래. 쯔쯔.”

부부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걸 보니 내 생각과는 아주 다른 곳 같았다.
남자들의 비밀 사교클럽도 아니고, 여자들이 우글우글한 호스트 바도 아니다...
어쨌든 이 회합은 자정에 끝났다.
청소라도 하려고 했지만 무뚝뚝한 지배인이 대걸레를 빼앗아들고 쫓아내는 바람에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배인은 두툼한 봉투를 내밀면서 말했다.

“다음주 같은날 같은 시각에 와라.”

봉투 안에 든 돈은 100만원이었다.

“거기 엄청 수상한데. 조폭 관련 아냐?”

동생은 투덜거렸다.

“오빠, 다음엔 가지마. 거기 호스트바보다 질이 더 안 좋은...”

요기가 할짝할짝 물을 핥는 소리가 들려왔다. 개의 좋은 점은 인간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긴 개가 뭘 알겠는가. 제 녀석의 존재가 귀염을 피우고, 귀염받고 하는 것이 전부라는 걸. 남의 애정에 의해서나 존재하는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 건 소수의 인간에 불과하다.

“너, 다음주가 재계약일이던데.”

내 말에 그 애가 소리없이 굳어졌다.

“오빠, 어떻게...”

“조심성이 없으니까 그렇지. 가계부 사이에 있더라.”

“아니, 재계약 잘 될테니까 오빠도 제대로 된...”

“먹고 사는 게 먼저야. 그리고 여기가 어떤덴지는 조금 두고봐야 알잖아.”

“그럼. 오빠. 이렇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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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각.
나는 정장을 잘 차려입은 사람과 함께 클럽을 다시 방문했다.

“어서 오게~ 손님도 같이 오셨군.”

좌장인듯한 남자가 우리를 테이블로 불렀다.
“부부동반이라고 해서 같이 왔나? 숙녀분, 콧수염은 떼시죠.”

후후. 하고 그가 웃었다.

“다행이군. 우리 부인들 상대 해줄 여자가 한명쯤 있었으면 했거든.”

“사모님들은?”

“아직 도착을 안 했어. 다들 자기 일부터 처리하고 와야 하니까.”

이내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사락사락하는 옷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 왔군. 아가씨 저쪽으로 가시죠. 자넨 우리랑 같이 앉고.”

“저...”

“괜찮아. 우리가 어디 당신들 잡아먹을 사람으로 보이나?”

동생은 뻣뻣하기 그지 없는 지배인의 손에 이끌려서 따라갔다.
계속 뒤를 돌아보는 것이 어째 요기의 그 눈동자를 생각나게 했다.

“저 여잔 안돼.”

“네?”

뒤이어 이어지는 남자들의 목소리.

“사귀고 있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헤어져.”

“네?”

“돈복이 없는 여자야. 빈상이지.”
뒤이어 이어지는 남자들의 목소리.

“혹시 모대학을 나왔다면 이 책도 읽어본 적 있겠군. 내가 알기로 호시이 신이치의 작품을 다 갖춰놓은 곳은 거기가 유일하거든. 나도 사실 거기 출신이라서..."

먹고 사는데 바빠서 호시이 신이치는 읽어본 적도 없었다.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저런 앞으로 우리처럼 살려면 그 정도 소양은 기본인데...지금이라도 익히게. 소설 몇권 읽는다고 시간이 그렇게 낭비되는 건 아냐.”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러했다.
여자만 남자 인생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인생도 여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고.

“저...죄송합니다만, 여긴 호스트 클럽입니까? 아니면 전직 호스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들 웃어댔다.

“호스트 클럽? 아니지. 콩깍지 클럽이지.”

그게 그거 아니냐고 묻고 싶었는데 이내 저쪽편에서 여자들이 웃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클린턴이 어느날 주유를 하는데 보니 부인의 전애인이 그 주유소의 주인이었지. 그래서 클린턴이 힐러리에게 물었다지. 나하고 결혼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주유소 부인이 되어 있었겠지? 그러자 힐러리가 대답했지. 아니, 저 남자가 대통령이 되어 있을거야. 우린 그런 여자들과 사는 게 너무 행복하다네. 매일매일이 자극과 그 섹시함이 폭발하는 나날들이지.”

힐러리가 나오는 걸 보니 보통 여자들이 아닌 모양이다.
확실히 내가 봐도 그녀는 굉장히 아름답다.

“사모님들이 다들 굉장한 분이신가 보군요.”

“굉장하다뿐인가! 우린 왕이 되는 기분이라고!”

위스키가 한순배 돌았다. 남자들은 조금씩 취해갔고, 약간씩 흐트러지기도 했다.

“우린 다 자네같이 가난하게 살았었지.”

“먹고 살 길이 없어서 길거리에 떨어진 핫도그도 집어 먹을 정도로.”

“세상이 얼마나 가혹한지 아나? 남자니까 무엇을 해야 해. 무엇을 하던지 일류가 되어서 먹고 살아야지. 하는 소리가 얼마나 듣기가 싫었는지...아마 자네도 이해할거야. 그리고 자네 여자친구도.”

그들의 설교가 길게 이어졌다. 또 술이 한 순배 돌았고, 그들은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자네만 좋다면 다음에도 또 초대를 하고 싶은데.”

“아..."

"월급은 지배인에게 맡겨 놓았으니 가져가고...그리고, 다음에는 저 여자친구는 떼고 오게나.“

역시 무뚝뚝한 지배인이 내게 다가왔다.

“따라오게.”

그리고, 나는 문 밖에서 우는 여동생을 보았다.

“다음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각에 다시 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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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그곳에 갔다 온 이후부터 말을 잃었다. 재계약은 다행히도 잘 되었고, 1년만 지나면 정식 직원으로 채용될 터였다.
그리고 내가 그곳으로 다시 가는 날짜가 되자 급속도로 침울해졌다.

“오빠, 면접 보러간다. 올 때 뭐 사줄까?”

“오빠...”

웃는 얼굴이지만 힘이 없었다.

“요기 밥이라도 사올까? 저번에 받은 돈 있으니까.”

“아냐...”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희롱, 폭행의 흔적은 없었다. 다만 동생이 눈에 띄게 침울해져 있다는 걸 제외하고는.

“이번 면접은 잘 될거라고 생각한다. 잘 되면 내가 베니건스에서 좀 쏠게.”

“그래. 근데...”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아이는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렇게 동생을 뒤로 하고 다시 면접을 뛰었다. 오전에 2군데, 오후에 1군데가 있었는데 사실 오후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름부터가 거창하기 그지 없는 대기업이었던 것이다.
오전 면접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면접관이 자신의 가족관을 피력하는 바람에 물건너가버렸고...오후는...

“믿을 수가 없어요.”

다시 클럽에 모인 남자들은 내 면접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오전 이야기를 하자 다들 자신들의 일인것처럼 분개했고, 오후 이야기를 하자마자 웃음기를 참지를 못했다.

“면접관이 말했죠. 자네같이 탁월한 직원을 데리고 있게 되어서 정말 기쁘네. 더 이상 면접을 진행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 정말 기쁘네! 라고 이야기했어요!”

“당연한 일이지.”

그들은 지배인을 불러서 와인을 하나 땄다. 여기의 지배인은 홀 서빙과 관리, 소믈리에도 겸임하는 듯 조용하고 신속하게 모두의 잔에 멋지게 부어주었다.

“그럼 그 전의 여자하고는 확실히 끝냈겠지?”

좌장이 다시 말했다.

“아, 예.”

차마 친동생이라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어서 대충 둘러댔다.

“소개해주고 싶은 여자가 하나 있어. 아마 자네도 몇 번 만났을거야. 전설적인 그 어떤 시기에...”

사락사락 딱 듣기에도 고급스러운 천이 쓸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어서오시죠. 아가씨. 바로 아가씨가 만나고 싶어하던...”

그리고 기원전부터 내가 기다려온, 그 꿈의 주인공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을 감사하는 바로 그 순간, 나는 또 하나의 내 인생이 무너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자네가 오늘 면접 합격한 그 회사의 무남독녀 아가씨지.”
내 손으로 먹고 살고, 힘있게 살아가야 할 그 순간을 철저하게 무너뜨린 내 최고의 여자.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정유원님 되십니까? 여기 경찰선데요...동생분이...”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경찰관의 멱살을 잡았던 것 같기도 하고, 동생 시체를 보면서 눈물을 펑펑 흘린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샌가 나의 그녀의 다리를 베고 누워있었던 것 같았다.

“깼어요?”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얼굴을 비볐다. 정말 보기 싫은 얼굴이었을텐데.
그녀의 결 좋은 갈색머리가 내 얼굴에 스쳤다.

“아,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은...”

“꿈이긴요.”

그녀가 생긋 웃었다.

“이젠 괜찮아요. 우린 잘 해나갈 수 있을거에요. 전 당신을 믿어요.”

“네.”

그녀의 손과 내 손이 포개졌다. 그리고 동생이 자살한 지 1년 되던 해, 나와 그녀는 결혼했다.

“와 멋진 이야기네요.”

“흠.”

신입은 신나게 제 손으로 치즈며 와인이며 퍼먹고 있었다. 다른 남자들은 귀찮아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행목을 위해선 버려야 할 것도 많은 법이지. 다 알고 나면 이해하게 되지만. 그때는 모르는 법도 있는 법이거든.”

여왕님을 모시건, 공주님을 모시건, 혹은 공주님을 꿈꾸는 여왕님을 모시건, 여왕님을 꿈꾸는 공주님을 모시건, 혹은 여왕과 공주를 꿈꾸는 평민과 사귀건. 그 행복의 어느 한순간만큼은 버려야 하는 무엇이 있다.

“코카스파니엘은 어떻게 되었어요?”

“음, 죽었어. 병으로.”

기원전, 공주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길 원했던 노예는 결국 공주와 똑같은 장소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느끼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노예는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리고, 목이 잘린채 공주의 입맞춤을 받았다.

“여보~시간 다 됐어요.”

부부동반 모임에서 아내들의 모임이 먼저  끝이 났다. 아내의 목소리에 나는 일어섰다.

“어, 벌써 가시게요? 이야기 좀 더 해주시지...아쉽게...”

“우리가 좀 바빠서...”

나는 콩깍지 클럽과 통해 있는 여왕 클럽에서 나온 그녀에게 준비해둔 선물을 내밀었다.
그녀가 생긋 웃었다.

“정말 당신은...”

“뭐, 이 정도야...”

그녀의 얼굴은 잠시 신입을 보고는 좀 굳었다. 그리고...

“여보, 저 먼저 나갈게요. 따라오세요~.”
“부인께서 상당히 미인이시네요. 다른 분들 사모님들은 좀 못생겼던데. 어떻게 그렇게 다들 잘생긴 분들이 그런 여자들이랑 결혼을 하셨는지...”

“충고하나 하는데. 여잔 얼굴이 다가 아냐. 그리고 아내를 여왕처럼 대하는 남자가 무릇 세상의 왕이 되는 법이지. 그리고...”

나는 신입의 귀를 살짝 잡아당겼다.

“나한테 너무 친하게 굴지마. 질투 사면 저 어딘가에 묻히는 수가 있다고.”

아름다운 나의 공주, 나의 여왕은 아직도 내 마음을 괴롭힐 정도로 아름답고 차갑다.
내면까지 아름답진 않지만.
동생의 죽음에 한몫 거든 것이 그녀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녀가 내 동생을 애인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유서도 남기지 않아 알 수 없었지만, 이사하던 중 책장 한켠에 뒤집어져 있던 일기장을 펼치자 그 날의 일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아내는 동생에게 심한 모욕을 가했다.
가난했지만 자존심으로 먹고 살았던 그 아이는 심한 충격에 빠졌고, 그 이후는...

“호시 신이치의 책을 읽어보았나?”

“엥? 저는 인터넷 세대에요.그런 걸 읽을리 없잖아요.”

호시 신이치의 행복의 남자는 세상 최고의 추녀이자 세상 최고의 성격 엉망인 여자와 함께 살았다. 하지만 그 남자는 도망치려고 했고, 도망칠 수 조차 없다는 걸 알자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런 것은 순진하게도 그 당시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요즘 세상에는 일부러 그렇게 살려고 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호시 신이치는 몰랐으리라.
결혼 이후에야 호시 신이치의 그 단편을 접하게 된 나는, 매년 동생의 기일에 그 부분만 읽고 또 읽는다.
아내는 내가 왜 항상 그 시기에만 그 책을 읽는지 이해는 하지 못하지만, 방해는 하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나를 사랑한다.
나는 상무보까지 승진했고, 아내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아직까지 나는 행복하다. 콩깍지가 벗겨질 때까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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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 신이치 단편인지 엽편인지 중에 정말 불쌍하다고 생각되던 단편내용이 조금 첨가되어 있습니다.
호시 신이치는 그렇게 취향인 작가는 아니었지만 인테리어 광 이야기와 함께 마음에 새겨진 엽편이었습니다.
...본인 취향과는 다르게 다소 비하가 들어있는 부분도 있으나 그것은 주인공의 생각일뿐, 쓴 사람의 생각과는 연관이 없음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건 어느 날 밤 꿈이야기이기도 합니다...;;;;;;상세하진 않았지만 비슷...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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