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적묵(赤墨)-下

2011.05.15 14:2305.15

경공의 고함 소리에 주위 병졸들이 쭈뼛쭈뼛 나섰으나, 검끝은 흔들리고, 창날은 물러 리훈을 비롯한 노유자, 상율, 무명광대, 공수반의 앞에 감히 나서지도 못하였다. 단지 엄압만이 사시나무 떨듯 하며, 상율의 등 뒤에 숨으니, 보다 못한 리훈이 혀를 차며 한 마디 건네었다. “자네는 그냥, 엄설(嚴舌)로 이름을 바꾸시게.” “다, 닥쳐라! 나는 네 놈과 달리 귀한 몸이야!”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정녕 따로 있었군.”
병사들은 잡을 생각이 없고, 대륙의 고수들 또한 잡힐 생각이 없으니, 오로지 경공과 내관들의 고함 소리만 하릴없이 궁궐 내를 메울 새, 공수반은 소리높여 웃으며 외쳤다.
“리훈, 아직 나의 도전을 받지 않았습니다.”
“저도 받고 싶긴 합니다만, 때와 상황이 이렇군요.”
예리한 논쟁은 어디로 갔는지, 리훈의 대답은 나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공수반은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하잘것없이 병기 한두 개 가지고 무공의 고하를 가리는 시시한 싸움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 누가 무슨 병기로 어찌 방비하든 상관없이 ‘우리’ 는 대륙의 일통을 위해 거병(擧兵)할테니까요. 작금(昨今)에 그대에게 패한 맹철혈이 스스로 성(姓)까지 바꾸고 법국에서 군국으로 망명한 손가(孫家)의 문하로 들어갔다 들었습니다. 상율 판관, 그렇게 끔찍한 표정 지으실 것 없습니다. 당신네들이 법국의 합리성에 맞지 않는다 하여 축출한 군중법무관(軍中法務官)이 군국 병법의 기틀을 다잡고, 또한 위대한 명장들을 배출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병법과 명장과 병기가 한데 모였으니, 천하를 제패할 나라는 군국이요…….”
“그리고, 군국이 평천하한 대륙은, 세월이 지나 기상합종회에게 넘어가겠군요. 금전(金錢)과 기술의 힘으로. 전쟁보다 정녕 더 무서운 것은,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홀리고 꾀어 망치는 것들이지요.”
리훈이 말을 받자, 공수반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역시 잘 알고 계십니다. 이 것이 바로 대륙의 일통을 건, 묵류를 향한 나의 두 번째 도전입니다. 하니, 묵류의 진정한 계승자인 당신은……. 시끄럽습니다, 엄압. 상 판관 뒤에서나 나와서 말씀하시지요. 여하튼, 어찌 방비하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저 연놈들이 계속 주둥이를 놀리도록 내버려 둘 것이냐!”
경공의 고함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수반은 품 안에서 조그마한 천주머니를 꺼내어 그 안에 든 가루들을 사방으로 내어뿌렸다. 파랗기도 하고, 하얗기도 한 그 가루알갱이들이 공기 중으로 노출되자마자 시퍼런 불꽃이 되어 사방으로 쏟아지는 맹렬한 기세에, 병사들이 놀라 창칼을 떨어뜨리며 벌벌 떨었다. “요, 요녀다! 저 여자가 술법을 쓴다!” “아니야! 백린(白燐), 청린(靑燐)이다! 몸에 닿지 않게 조심하시오!” 리훈은 창을 휘둘러 불꽃들을 막아내었으나, 그 소란을 틈타 엄압을 제외한 나머지 객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연기와 그을음으로 엉망이 된 궁궐 안에서, 단검 한 자루를 빼어든 엄압이 울음 가득하여 울부짖는 소리만이 들렸다.
“나, 나는 묵류의 거자다! 나를, 나를 건드리면 묵류의 수하들이 결코 좌시하지 아니할 것이다!”

5.  

리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명색이 거자라면서 넌 밸도 없냐.”
“며, 명재경각(命在頃刻)에 밸은 무슨!”
“걱정하지 마라.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못 죽여. 나한테 필시 물어볼 일이 있을 테니까. 그걸 듣기 전까지는 함부로 내 목을 취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걸 위로라고! 그럼 내 목숨은!”
“잊었나본데, 묵수(墨守)를 쓴 사람이 나다. 심지어 태고적 성왕(聖王)이 살아 돌아오시어 명한다 하더라도, 내 앞에서 누구의 목숨도 함부로 빼앗을 수 없어. 그러니까 제발 체면 좀 지켜주시게. 일어나, 자칭 거자 양반. 남자는 죽을 자리에서도 가슴을 펴는 법이라네.”
리훈의 한가로운 말에 엄압은 흠칫흠칫 눈치를 보면서도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앞을 막아선 리훈의 움직임에 깃털만큼의 떨림조차 없음을 본 경공은, 약간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 말인즉슨 내가 그대를 살려줄 만큼의 비밀을, 심중에 품고 있단 말인가?”
“조금만 살피면 비밀일 것까지도 없거니와, 행여나 그 크고 끔찍하며, 잔혹스러운 일에 나으리까지 관여하심은 없는지, 정히 그렇다면, 아마 묵류의 이름으로 결코 용서받지 못하시리라 극언하는 바입니다.”
“네 놈의 오만무례함은 가히 질릴 지경이로다! 대관절 무슨 일인 것이냐!”
“오만무례한 제가 감히 아뢰어야 듣기나 하실런지요. 하오니, 수하들과 함께 직접 별궁에 친히 왕림하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합니다.”
순간 경공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노기를 터뜨리며 옥좌 위에서 뛰어내려왔다. 그러나 역시 차마 창을 든 리훈의 곁으로는 범접치 못하고 십 보 바깥에서 크게 외칠 따름이었다.
“내 여식에게, 내 여식에게……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이냐! 네가 지키겠다 스스로 장담하지 아니 하였는가!”
“물론 그러합니다. 그러나 누군가 공녀 아가씨께 위해를 가함이 아니라, 그 분 스스로 위해를 부르고 계시니, 지금 당장 막지 아니하면, 또 하나 아까운 목숨이 겨울 꽃잎처럼 지고 말 것입니다.”
“대체 누구의 목숨이……!”
그러나 리훈은 대답 없이 몸을 돌렸다.
“가시지요. 지금 가시지 아니하면 늦습니다.”
리훈과,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은려와, 그리고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반쯤 겁먹은 채로 그 뒤를 따르는 엄압의 뒤로, 경공이 미심쩍은 발걸음을 옮겼고, 내관과 신하들은 역시 이름뿐인 만인지상(萬人之上)을 모시는 죄로 할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밖에서 우물쭈물거리던 갖가지 색깔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색목인 용병들도 급여를 받기 위해서는 일행에게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멈춰 있던 하루가 뉘엿뉘엿 흐르고 있었다. 수십 개의 길어진 그림자와 제각기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별궁으로 통하는 길목의 화원(花園)에 당도하였을 무렵, 리훈은 얼굴을 가득 일그러뜨렸다.
“기색이 더 짙어졌군……. 진정, 강행하실 생각입니까, 공녀 아가씨.”
“무슨 소리인가! 내 딸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다는……!”
화원 사이로 꽃비를 동반한 천둥이 우레처럼 치솟아올랐다.

흙알갱이가 우수수 떨어지는 꽃뿌리를 온 몸에 얹은, 시퍼렇고 창백한 시체들이 썩어버린 눈알과 이를 드러내며 으스스한 살기를 흩뿌렸다. 얼굴과 살점이 반나마 썩어 뼈가 다 드러난 몸뚱이는 실로 참혹하였으나, 영롱한 비녀와 손가락 뼈 끝에 이슬처럼 걸린 장신구, 헐렁하게 벗겨진 비단 옷은 누가 보아도 그들이 한때 별궁의 시비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시체만큼이나 창백해진 얼굴로 은려가 넋을 놓으며 고꾸라지는 순간, 리훈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며 차갑게 경공을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저도 꽃을 정성스레 가꾸는 공녀 아가씨와 시녀들의 손길이 오래 남아 있기 때문이라 여겼습니다. 헌데, 이제껏 제가 온 뒤로 공녀 아가씨와 시녀들의 발길은 뜸한데, 꽃은 여전히 흐드러지고, 사람의 기색은 점점 짙어지기만 하니, 여상스럽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귀공의 여식을 모시다 별궁에서 종적을 감춘 시녀들일 터이니 눈여겨 살피시길 청합니다. 궐내에서 이런 작태가 벌어지고 있었음을 정녕 모르셨습니까?”
“내 어찌, 내 어찌 알았겠는가! 나는 정녕코 몰랐소!”
리훈은 입술을 비틀며 차갑게 일별하였다. “정녕코 그러하셨군요. 어찌 하면 이 나라를 군국이며 법국, 악국을 다 누르는 대국으로 만들까 골몰하여 생모 잃고 아비에게 버림받은 친딸을 이 구석에 처박아두고, 그에 어울리는 화원과 별궁을 지어준다는 핑계로 기상합종회와 긴밀히 연결하여, 총통을 연구하고, 그 반발력을 견딜 수 있는 강건한 신체의 색목인 용병까지 알선받는 동안, 당신의 딸은, 이런 잔혹한 짓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오, 온다, 이 반도의 절름발이 머저리야! 언제까지 지껄이기만 할 거냐!”
쌀알을 노리는 메뚜기처럼 거칠게 몸을 던져오는 시비 하나를, 리훈은 주저없이 창을 휘둘러 그 몸을 꿰어 산산조각으로 만들었다. 이미 거의 마른 체액이 눅진하게 창대를 타고 흐르고, 썩어버린 살점이 뼈끝에 간신히 매달려 땅 위로 자분자분 떨어지는 모습을, 모두들 겁에 질린 눈으로 멀거니 쳐다볼 따름이었다. 리훈은 주저없이 창을 세워들고 앞으로 나서며 엄압에게 외쳤다.
“여길 지켜, 자칭 거자!”
비록 자칭 거자라 하였으나, 그 역시 묵류의 가르침을 오래 받은 이인만큼 전황을 보는 눈은 있었다. “너무 많다! 기세로 막을 수 없는 자들 아니냐!” “잔소리 말고 묵수해!” 창이 호를 그릴 때마다, 움직이는 시체들의 머리통이 수박처럼 부서졌고, 송곳처럼 내찌를 때마다 두서넛씩 꿰었으나 그 전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저 누운 시체 몇십 구를 보아도 섬뜩할 판에, 사지를 찢기워도 목이 날아가도 상관없이 문드러진 혀뿌리로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점점 숫자가 늘어가는 파도를, 리훈은 절벽 아래 작은 바위마냥 외롭게 맞서고 있었다. 내관이나 신하들은 줄행랑친 지 오래였고, 경공은 반쯤 넋이 나가 멍청히 서 있었으며, 근골 우람한 용병들은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저 한데 뭉쳐 덜덜 떨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적 태사의 심정을 알겠군.”
그나마 관절이 굳고, 골육이 쇠하여 그다지 빠르지 않음이 리훈의 창에 약간이나마 여유를 더해주었다. 두어번 창을 되돌려 가까이 다가온 시체들의 허리께를 끊어내니, 비록 상체와 하체가 제각기 허우적거리며 바닥을 기는 모습이 보기에는 더욱 끔찍하였으나, 덕분에 한 호흡 깊게 쉴 수 있었다. 한때 운제를 부수어, 학국을 침탈하려는 군국의 야욕을 꺾었던 적 태사는, 그러나 정작 학국의 시골 마을을 지나가다 우중(雨中)에 초립(草笠) 하나 얻어쓰지 못하고 문전박대 당하였다고 했다.  

내가 지금 그 꼴인가. 리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창을 끌어올렸다. 바람처럼 도는 눈길에 엄압이 든 단검과, 색목인 용병들이 엉거주춤 뽑은 검이 멈출 듯 들어왔다. 매일 곳을 찾아 헤매이던 옛날의 검이라면, 저들 사이에 뛰어들어 문제없이 참살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과거로부터 스멀거렸다. 뜨거운 열기가 불꽃처럼 마음으로부터 치솟는다. 과거를 떠올리며 묻어두었던 유혹은, 뱀의 혀처럼 부드러웠고 숨겨둔 이빨처럼 날카로웠다.
그러나 리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我)는 창(戈)에서부터 비롯된 글자다. 창으로 위험과 거리를 둘수록, 나는 나로서 올바로 남을 수 있다. 리훈은 스승의 가르침을 되뇌이며 다시 시체들의 파도에 맞서기 시작했다. 결단코, 휩쓸리지 않으리라는 기백이 단려한 창법에 가득 배어 있었다.
머리에 꽃을 얹었으나, 땅으로부터 솟아나 점점 불어나는 시체들은 흡사 나무들 같았다. 이제는 파도도 풍랑도 아닌, 숫제 숲처럼 부대끼며 리훈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그들은, 도저히 무너뜨릴 방도가 없어보였다. 손가의 병법에 이르기를, 적은 수로 많은 수로 이기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상황을 바꿔야 한다 하였다. 만약 맹철혈이, 아니, 이제 손철혈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화공(火攻)을 쓰며, 화장(火葬)과 다를 바 없다 여기며 손을 툭툭 털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훈은 묵류였다. 상황에 휩쓸리거나 변화시키는 이가 아니라, 어떠한 상황이 닥쳐온들 묵묵히 기다리며 지켜야만 하는 이였다.
“정녕 방도가 없는가! 방도가 없는가!”
엄압이 분통을 터뜨리며 조금씩 다가오는 시체들의 팔목과 손가락을 끊어내었다. 묵류의 병기술은 상대를 해함에 있지 않고 그저 무력하게 만듦에 요점을 두니, 참으로 묵수의 정신에 어울리는 기법이었으나, 역시 시체들에게는 별무소용이었다. 어느 틈에 정신을 차린 은려가 덜덜 떨며 그 뒤로 숨었고, 경공은 용병들을 재우쳤으나 그들도 시체들을 밀어내는 것 외에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오로지 리훈의 등에 쏟아질 때, 그는 마침내 스승이 전수한 마지막 비의를 쓰기로 다짐하였다.
“모두들, 놀라지 마시오.”
말을 마친 그는, 옷고름을 풀어 실팍한 장작 같은 상체를 드러내었다. 옥결처럼 가느다란 근육이 잡혀 있는 사이로, 여러 전장에서 얻은 상흔이 빗금 같았고, 그리고 그 사이를 다시 붉은 글자로 새긴 문신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모두가 영문을 몰라 공포에 질린 시선을 사방으로 던질 새, 오로지 엄압만이 부릅뜬 눈으로 리훈을 노려보았다.
“적묵(赤墨)……! 실전된 줄 알았는데!”
리훈의 두 눈에서, 그 끝의 옅은 칼자국에 이르기까지, 핏빛 기운이 새순처럼 돋아 가지를 쳤다. 반백장발은 하늘을 향해 치솟고, 온 몸의 붉은 글자들은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며 근육을 맴돌았다. 시체들조차 그 위엄에 뒤로 물러날 즈음, 엄압의 헐떡거리는 고함 소리와, 그리고 리훈의 벽력 같은 고함소리가 절묘하게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명, 명, 명, 명귀술(冥鬼術)”
“제(祭)- 명귀(冥鬼)! 선(先)-초혼(招魂)! 헌(獻)-골육혈정(骨肉血精)!”
리훈의 주위를 떠돌던 붉은 글자들은 제각기 혼(魂)과 백(魄)이 되어 허공에서 서로 엉기는가 싶더니, 고스란히 수십 위(位)의 귀(鬼)가 되어 시체들을 덮쳐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것은 썩어가는 나무들을 덮치는 거대한 붉은 바람이었으며, 그 꼬리는 날카로운 귀곡성(鬼哭聲)이 되어 살아 있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경외감을 품게 하였다. 경공과 용병들과, 멀리 도망간 신하와 내관들, 그리고 궁궐 구석구석에 틀어박힌 궁녀에 이르기까지, 사금파리 내려긁는 듯한 웃음 배인 귀곡성에 귀를 틀어막으며 무릎 꿇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오로지 엄압만이 칼을 내려놓은 채 멍청히 중얼거렸다.
“사람이 사람되어 태어나나, 마땅히 그답게 살지 못할 때가 있은즉, 하늘이 결코 그를 두고 보지 아니한다 하였으나, 뭇 중생(衆生)들이 믿지 아니하니. 명부(冥府)에서 휴(休)하고 한(閑)하던 넋들이 모여 마땅히 사람이 사람되도록 돕는다 하였으나, 그를 청하는 비법이 전해지지 않아, 그저 성선(聖善)코자 하는 선대의 가르침 정도로만 여겼는데, 참으로 오래 전 과거를 불러내어 그들로부터 도움과 가르침을 받는 비법이 있었구나. 진실로, 이를 두고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하겠구나.”
엄압이 그리 중얼거리는 동안, 리훈이 불러낸 명귀들은 시체들을 거침없이 덮쳐, 썩어 문드러진 살을 파먹고, 덩어리진 피를 뽑고, 물렁해진 뼈를 부수며, 마지막으로 땅에 묻혀 겨우 묶여 있는 정기(精氣)를 해방하여 산지사방으로 흩어버렸다. 요사스런 술법으로 천리(天理)를 거슬러 땅에 묶인 지귀(地鬼)들이, 명부에 자리한 명귀(冥鬼)들을 당해낼 수 없음은 명백한 일이었으나, 정작 시체들의 숲이 점점 사라져 감에 따라, 리훈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몸에는 기운이 빠져, 땀을 비오듯 흘리며 창에 겨우 몸을 기대는 것조차 쉽지 아니해보였다.
마침내 시체의 숲이 모조리 허물어졌을 무렵에야, 그는 겨우 마지막 주문을 외워, 읍하였다. “망(忘)- 귀부(歸府).” 명귀들은 연못에 풀어놓은 물감처럼 잠시 어두워진 밤하늘을 배회하다, 다시 글자의 형태로 돌아가 리훈의 몸에 깃들었으며, 비로소 하늘을 내리찢던 귀곡성도 잠잠해져 사람들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다만, 은려만이 황급히 리훈의 곁으로 가 그를 부축하였다.

“공자님! 리훈 공자님! 괜찮으셔요? 네?”
“…그, 그렇게 부르지 말…… 아, 이제 상관없나……. 괜찮습니다. 제례(祭禮)란 본디, 만인이 보는 앞에서 고기와 술을 바쳐 초혼과 기복(祈福)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니, 저들은 시체인지라 그 공양이 충분치 아니하여, 저의 피와 정기를 조금 보태어 어지러울 뿐입니다. 조금 쉬면, 곧 낫습니다.”
경공이 놀라 외치는 소리가 리훈의 귀를 찔렀다.
“그대는, 그대는 무국(巫國)의 전인인가!”
엄압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무국은 무슨……. 어디 그런 잡귀(雜鬼) 부리는 것들과 우리 묵류를 비교한단 말이오! 이건 엄연한 우리 묵류의 비전(秘傳)인 명귀술이오!”
“하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아마도 별궁의 시녀 중에, 무국의 전인이 있을 테지요. 눈조차 보이지 않는 공녀 아가씨가 이러한 비술을 직접 썼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을 것입니다.”
리훈은 피 섞인 기침을 뱉으면서 몸을 꼿꼿이 세웠다. 그 말을 들은 것처럼, 머지 않은 건너편의 별궁 앞뜨락에서, 도깨비불 같은 푸른 불빛이 몇 번 맴을 돌다 바스라져버린다. 은려와 엄압의 부축을 받은 리훈이 잠시 호흡을 고르며 쉬고 있을 동안, 여화 공녀가 한 중년 시녀의 손을 잡고 이끌려 나왔다. 새하얀 달빛 아래 푸르게 드러난 얼굴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있지 아니하였다.
공녀가 차분하게 목소리를 돋우었다.
“거기, 뉘가 계시오.”
동굴 속 메아리처럼 여러 목소리가 섞여 소용돌이 같았다. “너, 너, 너, 이 년! 대체 무슨 짓을!” “아가씨, 아가씨, 이게 대체 무슨 일이세요!” “당신이 이 나라의 공녀였는가!” 그나마 또렷하게 들리운 외침은 이 세 사람들뿐, 색목인 용병들인 제각기 고향 말로 쏟아낸 분노와 적의는 가히 홍수를 이룰 지경이었다. 그 말들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공녀는 다시 되물었다.
“나에게 이름을 받은 묵류의 창수는 있지 아니하오.”
“……리훈, 여기에 있습니다.”
“그대라면, 역시 각(覺)할 줄 알았소.”
“어찌하여 이리하셨습니까.”
“그저, 그저… 개안(開眼)하고 싶었을 따름이오.”
리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여자가 그리 일렀습니까? 많은 이의 피와 목숨을 담보삼아 희생(犧牲)의 제의를 드리면, 능히 눈을 뜰 수 있다고?”
공녀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그 중년 여인이 표독스럽게 나섰다.
“그렇다! 내가 그리 말하였다!”
“내 듣기로, 무국의 여인들 중 하늘과 통하는 이들이 있어, 존경받으며 귀하게 자랐으나, 교만하고 흉폭해진 이들이 간혹 있어 제멋대로 신을 불러내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강신무(降神巫)들이 있다 들었는데, 너희들이 군국의 학살 속에서도 용케 남았구나.”
“항아리 속에서도 살아남았는데, 그깟 창칼, 화살이 대수일까? 나는 하늘로부터 선택받았으니, 내 하는 일이, 곧 하늘의 일이니라!”
리훈은 입을 다물고 잠시 중년 여인을 살폈다. 비록 시녀의 복색을 하고 있으나, 수리의 눈에 뱀의 혀와 사자의 목소리를 가졌고, 호랑이의 등골과 원숭이의 팔, 기린의 다리를 가졌으니, 그 비범함이 지나쳐 독기로 빚어 만든 듯한 여인이었다. 만약 여화 공녀가 육안(肉眼)이 어둡지 아니하고, 개안하고자 하는 욕(慾)에 마음마저 멀지 않았던들, 이 여인의 독랄함을 능히 알아보았을 것이다. 리훈은 입술을 깨물며, 창끝으로 여인을 가리켰다.
“항아리…… 그렇군. 네가 바로 그, 무국에서 비밀리에 길렀다는 항아리 속의 무녀(巫女) 중 하나로구나.”
“그렇다. 내가 바로 무국의 마지막 남은 호무(壺巫), 말희(末姬)다!”
“네가 이미 그 항아리에서 온갖 고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니, 오히려 그 사람같지도 아니한 강신의 의식을, 이번에는 이 어린 소녀에게 치르게 하도록 한 것이냐!”
리훈이 자신을 가리키며 외치는 모습에 은려는 깜짝 놀랐다. “리, 리훈 공자님. 도대체 무엇인가요? 수궁녀(首宮女) 님께서 저에게 무슨 일을 하려고 하신 거죠?” 리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엄압이 대신 나서서 얘기해주었다.
“태고에, 가장 신성한 여인들만이 신령한 동식물과 서로 소통하여 뜻을 나누고, 하늘의 이치도 능히 헤아려, 주위 이들이 떠받들어 나라를 세우니, 곧 무국(巫國)이라, 그 국력이 강성함이 성왕(聖王)이 세웠던 현국(賢國)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습니다. 여성이 득세하던 나라였는지라 남자를 업수이 여기니, 여아를 우선적으로 낳아 그 중 신기(神氣)가 비범한 아이를 항아리 안에 며칠이고 가두어, 기갈(飢渴)에 고통받도록 하면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하여금 영감(靈感)이 최고조로 오르게 한다고 합니다. 그 즈음을 노려, 사지 하나를 끊어내어 가까이 두면 접신(接神)의 능력이 갑절로 오르고, 피를 내어 부적을 쓰면 역신(疫神)조차 능히 범접치 못하게 할 수 있다 하니, 그러한 폐단이 온 땅에 성행하여, 한편으로 여식 가진 집이 두려워할 지경에 이르렀지요. 이에 군국이 겉으로는 끔찍한 폐단을 바로잡고자 거병하여 그 나라를 무너뜨린다 공표하였으나, 실은 항아리 속에서 길러진 소녀들이 자라 국무(國巫)가 되어 천하를 일통할까 두려웠던 겝니다. 그 와중에 궁궐 깊숙한 곳에 숨겨둔 항아리 또한 깨져 소녀들이 달아났을 터이니, 아마도 저 여자가 그 중 한 명이요, 그리고 소저에게 그와 같은 짓을 저지른 뒤, 그 힘을 빌어 아마도 저 공녀의 눈을 뜨게끔 하려는 수작이었겠지요.”

리훈은 한숨을 더욱 크게 내쉬었다. “거자 아니랄까봐 아는 것도 많으셔라. 잘났다, 정말. 그 얘길 꼭 지금, 더군다나 그리 상세하게 하셔야겠냐?” 은려가 겁과 분노에 뒤섞인 눈빛으로 수궁녀로 위장해왔던 항아리의 무녀, 말희를 쏘아보자, 그녀는 태연하게 그 시선을 맞받았다.
“너를 그 빈농가에서 사올 때부터, 천륜(天倫)이 멀어지는 아쉬움과 그리움보다, 오히려 그 눈에 가난을 떨칠 수 있는 통쾌함이 빛나기에, 너의 비범함을 알아보았더니라. 암, 하늘이 내린 무게를 그리 쉽게 떨칠 수 있는 재능, 하늘과 독대하고자 하는 의지는 아무에게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너라면, 진정 국무(國巫)가 될 수도 있었다!”
리훈이 차갑게 되쏘았다. “그녀가 원하기나 했던가?”
“터럭 하나라도 천하를 이롭게 한다면(拔一毛 利天下), 행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 하늘로부터 받은 능력을 썩히는 것은 죄악이다! 양씨(楊氏 - 楊朱)의 오류는 한번으로 족하다!”
“중요-한-건! 자기- 자신! 내가 없다면! 하늘도-없다!”
“그런 불경한!”
리훈과 말희의, 서로를 향한 강렬한 적의가 칼날같은 으르렁거림으로 서로 뒤섞였다. 말희의 이와 손톱이 짐승처럼 늘어나며 리훈의 살을 찢으려 덤벼들었다. 리훈이 재빨리 창을 뒤채어 잡았지만, 야수의 넋들을 몸 안 가득 받아낸 말희를 막기에는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창날과 창자루 위에서 번갯불이 번쩍인다 여길 무렵, 리훈의 뺨과 귀와 목덜미에서 굵은 핏방울이 튀었다. 용이 꼬리를 치고, 봉이 날갯짓을 하는 용미봉익(龍尾鳳翼)의 초식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겨우 그녀를 물러나게 하였으나, 그 몸은 이미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하였다.
“그 야들야들한 얼굴과 목을 찢어주려 했건만!”
“식성…… 별나군.”
그 와중에도 농을 건넬 여유는 있는가 보았다. 말희는 비죽이 웃으며 손톱 끝에 매달린 핏방울을 털어내었다.
“네가 부리는 명귀들을 당해낼 수 없으니까.” 그리고 다시 은려를 쏘아본다. “저 계집의 힘이라면, 아마 무신(武神)도 불러낼 수 있을 테지.”
“그렇게 놔둘 것 같은가?”
“글쎄. 지쳐 나자빠진 묵류의 창수와, 자칭 거자. 제 딸을 내버린 아비와 그 왕을 존경치 아니하는 부하들만 가득하니, 나를 막을 이도 딱히 없어보인다 함을 굳이 말해야겠는가?”
“아니, 하나가 남았다.”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말희의 표정이 돌연 굳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곧 푸르뎅뎅하게 변하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는다. 등으로부터 가슴을 뚫고 심장을 찌른 길쭉한 칼날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통한의 외침을 선혈처럼 뿜었다.
“눈 먼 네 년 따위가!”

“눈이 멀었어도, 마음까지 멀진 않았다. 너 따위의 꾐에 빠져, 인간됨을 저버린 본녀의 죄를 지고 갈 것이다.”
말희의 가슴에서 힘겹게 검을 뽑아낸 여화는, 그러나 허망함으로 일그러진 말희가 쓰러지는 모습을 당연히 보지 못했다. 그녀의 몸이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은려에게 말을 건넸다.
“은려야.”
“……네, 네! 공녀 아가씨.”
“지금 이 곳의 광경이 어떠하냐.”
“네? 아, 네…… 나, 난장판이에요.”
“난장판이라…….”
은려는 처연하게 웃었다.
“어찌 난(亂)하느냐.”
“죽은 사람의 생기를 취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으나, 그 기반이 옳지 못함에 사방으로 흩어졌으니, 이제 이 곳은 심히 황폐할 것이요, 일통의 전쟁이 시작되며, 이러한 광경을 어디서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허나, 이 와중에도 아름다운 꽃이 한 송이 피었으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를 되잡으려는 모습의 인간입니다. 공녀 아가씨, 비록 그 죄를 함부로 덮을 수 없으나, 하늘 아래 스스로를 바로잡으려는 그 모습이야말로,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답다 하겠습니다. 리훈은, 또 한 번 그 모습에 대경(大敬)을 바칩니다.”
“이러한 모습에 그대의 마음이 변치 않았으니, 다행이오.”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과연 묵류의 지킴이란, 명불허전이구려. 그럼 이제 그 꽃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화답할 때가 되었소. 꽃이란 자고로…….” 공녀는, 어색한 손길로 그러나 확실한 기백으로 검을 들어올렸다.
“질 때가 가장 가(佳)한 법. 이 죄 많은 삶은, 이리 절(切)하려 하오.”
그 순간 리훈이 목을 짜내는 듯한 기성을 울렸다.
“안 됩니다!”
“……감쌀 필요는 없소.”
“감싸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렇게 죽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런다고 해서, 이 억울하고 부끄러운 죽음이 결코 덮어지거나, 없었던 일도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녀는 처음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본녀가 무엇을 한다 하여, 이미 망(忘)한 명(命)을 어찌 반(返)할 수 있으리요?”
“개(改)할 수는 있습니다! 비록 저들이 죽었다 하나, 그만으로 끝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이 부양하던 혈육이 있었을 것이며, 그들을 사랑하던 혈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죄를 고하십시오, 사죄하십시오! 더 이상 이런 죽음이 없도록, 알리고 또 알려야 합니다!”
“그 것이, 그러한 일이…… 참으로 가능하겠소?”
리훈은 창백하고 힘없는 얼굴에, 그러나 미소를 가득 지어보였다.
“제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에, 가능성을 따지는 일은 무익합니다.”
공녀는 두려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홀로 어찌…….”
“어찌하여 혼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리훈은 창을 들어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묵수는 아직 끝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렇지요, 은려 소저?” 겁에 질려 멍해 있던 은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예? 저, 저도요? 전 죄 지은 게 없…….” “죄를 지어서가 아닙니다. 당신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은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로운 세상이요?”

“네. 사람에게 지위의 고하가 없이 모두가 평등하여 핍박받지 아니하고, 나라가 전쟁과 형법을 빌미로 하여 함부로 백성을 살육하거나 사지로 내몰지 아니하는, 그런 세상을 꼭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게 가능할 것 같은가!”
경공이 발악하듯 대꾸했다.
“지위의 고하가 없는 세상? 살육이 없는 세상? 말로는 무얼 못해! 현국(賢國)의 성왕들도 꿈꾸기만 했을 뿐, 결국 무력을 통해 이민족들을 압제하고 중화(中和)라 덮지 아니하였던가! 너희, 제자백가들은 다 똑같아! 그저 말과 이상만 앞서는 머저리들! 나 또한 너희들처럼 그저 꽃이나 기르고, 유람객이나 받으며 필부(匹夫)로서의 삶을 살란 말이냐? 나는 그렇게 못한다! 이제 화국(花國)은, 화국(火國)이 될 것이다! 이 대륙을 가장 강한 불꽃으로 휩싸 애태우는, 가장 강력한 지배자가 되리라!”
리훈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적 태사조차 세상의 큰 시류를 거스르지 못하여 단지 지키기만 하셨을 뿐입니다. 나나, 혹은 엄압이 아무리 막으려 한다 해도, 어렵겠지요. 좋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의 딸을 생각하십시오. 세상의 시류란 그렇게 한 사람을 망가뜨리기 쉽고, 그 망가진 한 사람은 열 사람의 피해자를 낳습니다. 당신과, 당신과 같이 생각하는 이들이 망가뜨린 수많은 이들의 삶에, 나중에 어찌, 무엇으로 갚으려 하실지요. 그 무게를, 당신이 정녕 감내할 수 있겠습니까.”
“상관하지 않는다! 고통과 피해 없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색목인들의 말이군요. 그 말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그러나 정말로 고통과 피해를 겪지 아니하였지요. 그들이 마땅히 겪었어야할 고통과 피해를, 자기보다 약한 백성들에게 떠넘겼을 따름입니다.” 리훈은 그를 차갑게 쏘아보며 말했다.
“내 스승의 마지막 말을, 당신께 전해드리며, 이만 떠날까 합니다. 약해져보지 않은 자, 약함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는 결코 강해질 수 없다. 이건 자네한테도 하는 말이야, 엄압. 기왕 거자가 되었으니, 결코 스승들의 뜻에 거스르는 짓은 하지 말아줘.” 엄압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리훈을 바라보았다.
한 손에 은려와, 다른 손에 공녀를 부축한 리훈은, 그렇게 천천히 그 나라를 벗어났다. 분명 그녀들을 부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른 한 편으로 보기에는, 자신이 감당키 어려운 무게를, 조금씩 그녀들에게 나누어 버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終.

이후, 과연 예견한대로 군국의 맹철혈이 손가의 양자로 입적하여 한 손에 검, 한 손에 병서(兵書)를 들고 십오만 대병을 일으키니, 철기(鐵騎)는 바람 같고, 갑병(甲兵)은 파도 같아 어떤 나라도 감히 그 기세를 함부로 꺾으려 들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학국의 드높은 가르침은 먼지처럼 부스러졌고, 악국의 미려하고 귀기로운 음색은, 결국 타다 만 악보와 구전(口傳)으로만 남아 후세에 온전히 전해지지 못하였다. 군국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 이제 이름뿐인 화국과 기상합종회만 무너뜨리면 고대하던 대륙일통을 이룬다 스스로 공언하였으나, 화국에 기이한 병기가 있어 멀리서 거대한 화살을 쏘아 하늘을 무너뜨리고, 땅에서 벼락을 뽑아올려 적들을 몰살시키니, 군국의 군세에 그토록 무참하게 짓부수어질 수가 없었다. 이어 총통으로 무장한 색목인 용병들이, 군국의 수도를 함락시켜 화국의 깃발을 꽂아, 과연 대륙일통은 경공이 고대하던 대로 화국이 이루는가 하였으나, 그들과 긴밀하게 협력하였던 기상합종회의 계략은 그로부터 시작하였다. 총통과 색목인 용병을 알선해준 대가로, 기상합종회는 일통된 대륙 전역에 신무기를 판매하여 이득을 보았고, 색목인들을 수하로 부려 대륙인들을 압제하니, 금전이 천(天)의 자리를 대신하여 사람 사이의 지위 고하는 그저 작거나, 아주 없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명예도 품격도 없이, 그저 금전을 끌어오거나 사람을 직접적으로 억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만이 나서는 시대가 되어버림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었던 예전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늘어났으나, 시간은 그저 앞으로만 나갈 뿐이었다. 다행히도 묵류의 뜻 있는 이들이, 목숨을 내걸고 과거의 유산을 어느 정도 보존하였으나, 삶에 지친 이들은 그저 그리움만 가슴에 품을 뿐, 그 것에 눈길조차 두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세상이 흘러가고 있으니, 2011년 중춘(仲春) 중순에 이니(離泥)가, 창 밖에 철 든 햇빛 한 자락 걸고, 마침내 졸문(拙文)을 맺다.


*      *     *

네, 늘 글은 맺는 것이 어렵군뇨. 5월 15일까지 맞추느라 아주 힘들었습니다. 근데 이거 분량이 맞나 모르겠어요. 열심히 썼는데, 분량 못 맞춰서 심사제외되면 으앙;ㅁ; 여하튼 동양 철학, 서양 철학만큼이나 참 매력 있고 특색 있는 학문이라는 걸, 학부 5년차에야 이제야 깨닫고 있습니다. ^^;; 교육 만화가 인기라길래, 저도 신필 김용 선생을 본받아, 동양 철학화된 무협지를 한번..(펑)
날이 더워집니다. 평안한 하루 되세요.^^


참고문헌-

송영배, 제자백가의 사상, 현음사, 1997.
박상환, 고쳐 읽는 중국 철학 이야기,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7
이탁오, 이영호 편역, 논어평,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9.
앤드류 헤이우드, 조현수 역, 정치학,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3
필립 아이반호 , 신정근 역, 유학, 우리 삶의 철학, 동아시아 출판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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