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유예된 추락

2008.07.22 01:2307.22

마지막 컬럼비아호의 마지막 폭파사고 최후의 생존자를 만나고 왔다. 그녀의 이름은 ↙였고, 지금은 ↘이다. 항상 그녀는 동세를 안고 있었고 지표면에 직각으로 치솟는 콜럼비아호에서 한순간 ↑였다.

지구의 기류는 매 순간 달라지는 것이어서 폭파 이후 아직도 떨어지고 있는 그녀는 가끔 △이기도 하지만 그녀와 나의 대화에서는 뉴턴의 운동을 설명하는 다이어그램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야만 했다. 우리의 대화가 열어놓은 마지막 컬럼비아호의 마지막 폭파를 진술하는 세계에서 그녀는 ↑이어야만 했다.

컬럼비아호의 폭발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는 더듬더듬 폭발의 원인이 된 내열타일의 이름을 외웠다.

대기권에 진입한 컬럼비아호는 그동안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던 큰 문제에 직면했다. 대기였다. 대기는 늘 그랬던 것 처럼 컬럼비아호를 쓸어담았고, 컬럼비아호는 목적처럼 그를 뚫고 지나야만 했다. 그래야만 별빛을 실감할 수 있었고, 태양을 경이할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은 그렇게 태어났던 것이다.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부서진 내열타일의 틈새는 한순간에 컬럼비아호를 달구었다. 대기의 목덜미 쯤에서 컬럼비아호는 폭발했다.

우린 컬럼비아호가 발사된 홍대 주변에서 긴 대화를 나눴다. 그녀가 말 한 점멸하는 연애의 감정처럼 우리의 대화는 점멸하며 서로 몸을 부딪쳤다. 술취한 그녀의 한탄에서 아직 그녀의 동세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난 안도했다. 많은 살아 남겨진 몸에선 너무나 당연한 동세마저 박탈당하는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우린 유예된 것들에 대한 기쁜 대화를 잠시 나누었다. 그녀는 그녀의 동세를 내게 빌려주었다. 난 뉴턴의 세가지 운동을 설명해 그녀를 조금 위로해주었다. 그녀는 나의 스물한 살을 담담하게 확인시켜주었다.

중국 어딘가 있을 저기압 덩어리는 그녀가 막연히 부유에 몸을 내맡기게 하지 않았다.
매번 그녀를 내쳤고, 그녀를 쓸어담았고, 비틀었다. 그녀는 중국에 있는 저기압을 의식하지 못하고 다만 불안해 할 따름이었다. 나 또한 중국 어디서 저기압이 어떤 자세로 무슨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중국 어딘가... 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저기압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기나 한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보다 - 난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많이 불안해 하는 것이 분명했다.

우린 많은걸 바라지 않았다. 치명적인 생활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국 어딘가 있는 저기압 때문이었다. 그를 향해 달려가는 기류 때문이었다. 목소리도 모르는 뉴턴 때문이었다. 하얗게 달구어진 내열타일 때문이었다. 우린 그저 비명을 지르곤 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목록을 써내려가야 할 베이지색 노트에 해야 할 것의 리스트를 날카롭게 파내야만 했다.

우리의 20대는 이 모든 것들을 그냥 그렇다고, 어차피 그런거라고 무표정하게 대꾸할 틈을 주지 않았다. 우린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살아야만 했다. 유예된 추락 이후에도.

유예된 그녀의 추락. 그녀는 기류를 타고 있었으나 기류에 몸을 내맡기지는 못했다. 그녀가 먼지 섞인 땅에서 아픈 허리를 펴고 일어설 때 그녀와 나는 폐허가 된 홍대 발사장에서 기쁜 목소리로 그때의 추락을 나눌 것이다.
나의 추락과 동세와 색감 또한.

난 그녀에게 21세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되뇌어 온 말 하나를 선물해주었다. 난 익숙한 발음으로 ↘의 잘못이 아니에요. 내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던 이 말은 그녀에게 완성된 내열타일로 자리잡기를 기대했다. 때로 우린 얼굴이나 성기, 항문 등을 가릴 내열타일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하얗게 달구어져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겠지만. 부적 같은 것 말이다. 그녀는 맛있는 딸기쿠키를 선물했다. 정성들여 손으로 빚은 쿠키라는 말과 자기가 빚은게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생각보다 맛있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컬럼비아호가 발사된 홍대의 폐허는 많은 파일럿들을 끌어모았다. 그들은 가끔 몇 년 전의 20세기를 유언처럼 회상했다. 군중이 된 이야기 한복판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컬럼비아호의 폭발은 몇 년째 새빨갛게 계속되고 있었다. 폭발은 몇 년째 홍대를 울리고 있었다.

딸기쿠키를 먹으며 돌아오는 긴 길 한복판에서 폭발이 지속되는 하늘을 보았다. 뭘 그리 서럽게 참았는지 온 세상에 악다구니를 쓰며 설치는 국지성호우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세상 모든 아스팔트는 희멀겋게 말라 들어갈 것이다. 그때 러시아의 미그 비행기는 투박하게 찢어진 구름 사이 노란 가루를 뿌리고 사라질 것이다. 언젠가 우린 장마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 있겠지. 그녀의 불안, 나의 불안은 언젠가 기류를 타고 중국으로 넘어가겠지.
미루
댓글 1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157 단편 박애로부터의 자유 니그라토 2008.08.07 0
1156 단편 쓸모1 니그라토 2008.08.07 0
1155 단편 지옥에서라도 딜레탕트 2008.08.06 0
1154 단편 지친 시간 딜레탕트 2008.08.06 0
1153 단편 두번째 나사로 김봉남 2008.08.05 0
1152 단편 G.B1 2008.08.05 0
1151 단편 아내가 죽었다. 혹은 책임소재에 관한 혼란한 이야기 DOSKHARAAS 2008.08.05 0
1150 단편 2014 뽁뽁이 대량학살사건에 대한 보고서10 dcdc 2008.08.05 0
1149 단편 모으다 황당무계 2008.08.02 0
1148 단편 무지개의 군대 Mothman 2008.08.01 0
1147 단편 거인1 위래 2008.08.01 0
1146 단편 생활의 지혜 다니엘 안 2008.07.30 0
1145 단편 새벽부터 황혼까지 지호 2008.07.27 0
1144 단편 리프레인 황당무계 2008.07.23 0
단편 유예된 추락1 미루 2008.07.22 0
1142 단편 치료는 하지 않습니다(하) 화룡 2008.07.21 0
1141 단편 치료는 하지 않습니다(상) 화룡 2008.07.21 0
1140 단편 북미의 한국군1 Mothman 2008.07.18 0
1139 단편 엘리베이터안의 남자1 해파리 2008.07.16 0
1138 단편 나의 작고 어여쁜 인형2 김몽 2008.07.15 0
Prev 1 ... 85 86 87 88 89 90 91 92 93 94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