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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치료는 하지 않습니다(하)

                                                   Copyright @2008 by박 찬일(Chaneel Park)
                                                   Nickname 화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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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먹지도 나의심장은
하 않을거 뛰고있고너
다 면서죽 의심장은꺼
아 이고이 진다사그러
름 유도없 든다생명의
답 이부순 불꽃들이받
다 다붉고 고휘두르고
즐 하얗고 찢고부순다
겁 노랗고 나는즐겁고
다 아프다 너는죽는다


*                *                *                *                *                *                *

“자네가 날 먼저 부를 줄은 생각도 못했어.”

평인도 그건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러나,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명함을 발견했을 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걸었다. 박기자는 나는 듯이 달려와 주었다.

“지난번에는 감사했습니다.”
“참 안된일이었네… 조의를 표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평인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박기자는 그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오늘이야말로 그걸 알아낼 기회였다. 장례식장에서는 그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지금에야말로 가능할 것 같았다. 평인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가 원하던 것을 들을 기회.

“일단 한 잔 받지.”
“아니요.”

평인은 술잔을 거절했다. 박기자는 허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정신을 흐트리고 싶지 않습니다.”
“술은 사람을 취하게도 하지만… 때론 흐린 정신을 달래기도 하지.”
“그래도 싫습니다.”

박기자는 말없이 자신의 잔만 채웠다. 불판 위에 곱창이 올려졌다. 연홍색 빛깔에 흐물거리는 고깃덩어리가 불판 위에 올려지는 즉시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고 묽은 곱을 토했다. 그러나 그건 분명히 죽어있는 내장조각일 뿐이다.

“좋아. 한잔 사려고 했더니만. 그래, 같이 술 한잔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뭔가? 한 사람의 인생 선배로써가 아니라 기자로써 나를 대하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말해두겠는데, 기자로써의 나는 집요해.”
“제가 특별히 박 기자님이 좋아져서 여기 나온 건 아닙니다. 전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에서, 이용할 수 있는 기자가 필요했으며, 안면이 있는게 당신이었을 뿐입니다. 일 한다고 생각하세요. 저도 그쪽이 편합니다.”

박 기자는 주머니에서 수첩과 연필을 꺼냈다. 녹음기는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좋아. 시작하게.”
“예? 음…”

평인은 한참 입을 다물고 신음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군요. 궁금한 걸 물어오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아. 뭐. 그래. 나는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준비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먼저 전화를 걸었고, 또 날 이용할 생각이었으니 말야.”

그는 곱창이 타기 전에 서둘러 젓가락을 가져갔다. 고소한 냄새는 식욕을 자극했다.

“뭐, 천천히 먹으면서 하지. 어디부터 할까. 그래, 현 심경은 어떤가?”
“심경이요?”

평인은 머리를 숙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

박 기자는 종이에 다음과 같이 적어넣었다. ‘몹시 혼란스러움. 복잡한 감정.’ 그는 특별히 일에 책임감을 느끼거나 하는 성실한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상대를 보지도 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만큼 성급하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 깨끗하게 글을 썼고, 온점을 찍고 나서야 다시 평인을 쳐다보았다.

“이를테면, 슬픔이라는 감정이 있겠지?”
“… 예.”
“슬프다. 또 이런 건 어떤가. 공허함, 상실감 같은 건?”

평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아무런 소리 없는 신음.

“특별히 가까운 남매 사이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이차도 있으니 심하게 싸울 일도, 그렇다고 같이 어울릴 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랑이는 별로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어요. 평범하게 학교 생활을 했고, 가끔 친구들이랑 늦게 들어오기도 했고, 그러면 부모님게 혼나고, 저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고. 러브레터를 지운다는게 제 하드를 날려먹는 일도 있었고, 저는 화를 냈고 녀석도 화를 냈고… 용돈을 주면 좋아했지만 그리 자주 주지는 않았습니다. 남자친구가 생겼다면서 부모님 몰래 저에게만 알려주기도 했고… 저도 거기에 참견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의 여동생이었습니다. 특별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평범한 여동생.”

박기자는 그 이야기를 간단히 간추렸다. ‘사이좋은 오누이.’

“전 일을 나갔고, 랑이는 학교에 가거나 놀러 나가곤 해서 하루에 얼굴을 보는 시간은 아침에 잠깐, 저녁에 잠깐 정도였습니다. 그 아이가 없다고 해서 특별히 상실감을 느끼거나 할 건… 없습니다. 다만… 다만… 랑이를 생각할 때마다, 그 애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면서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뭔가?”
“분노.”

박 기자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려 애썼지만 고개를 숙인 평인은 좀처럼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분노. 분노라면 대상이 있겠지?”

깍지낀 평인의 손이 빨갛게, 다시 하얗게 물들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았다. ‘나의 분노는 무엇을 향해 치솟는가?’

*                *                *                *                *                *                *

“오빠, 오빠, 이것 좀 봐.”
“뭔데 그래.”

아침 일찍 일어나는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꿈자리가 뒹숭숭 했기 때문에 침대에 누워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때문에 간만에 일찍 일어난 참인데, 동생 평랑이가 호들갑을 떨며 그를 불렀다.

“아침부터 컴퓨터질이냐.”
“이것 좀 보라니까.”

콘택트 렌즈를 착용하지 않았지만 큼직하고 선정적인 빨간 색으로 씌어진 헤드라인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가수 정민우, 소속사 사장 살해’ ‘이미 자백… 충동범죄였다’ ‘본인은 늑대인간병이라 주장’. 기사 전문은 읽기 어려웠지만 내용은 불 보듯 뻔했다. 무엇보다 민우를 잡도록 결정적인 신고를 한 사람은 자신이었으니까.

“안 놀라?”
“응? 아… 이미 어젯밤에 들었어.”
“뭐야 오빠. 왜 이렇게 시큰둥해? 오빠 친구잖아.”

그는 대꾸 없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엄마, 엄마! 이것 좀 봐. 알지? 민우 오빠, 옛날에 오빠 친구였던 사람. 진짜 안됐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소리가 그 모든 소리들을 삼켜버렸다. 차가운 물이 두리뭉실했던 머릿속의 형상을 선명하게 일깨웠다.

민우의 눈. 절망감과 배신감이 교차하는 그의 눈은, 골목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평인의 눈과 정확하게 마주쳤다. 그 먼 거리에서, 그 짙은 어둠 속에서, 민우는 경찰들에게 끌려 가면서도 평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빠 오늘 어디 갈꺼야?”
“응? 왜?”
“아니, 옷을 차려 입으니까.”
“이게 아주 오빠를 날백수로 보고 있어. 나도 바쁘단 말야.”

사실 이른 아침부터 옷을 차려입는 것은 근래 평인의 생활상에 비추어 볼때 드문 일이었다. 일을 갈때도 동생이 촌스러운 쥐색이라고 혹평한 회색 잠바를 대충 걸쳐입고 나가던 처지였으니까. 하도 안 입어 버릇하던 정장을 입자니 목이며 어깨가 답답했다. 그러나 동생에게 한 말 대로, 날백수를 면하려면 옷을 잘 차려 입어야 한다.

“혹 여자라도?”
“그렇다고 해둘까.”
“오, 진짜? 진짜야? 장난 아니고?”

넥타이까지는 너무 오버하는 느낌도 있었지만 어정쩡하게 캐쥬얼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보다 나을 듯도 싶었다.

“여자라기 보다는 꼭 어디 면접보러 가는 것 같은데.”

동생은 쓸데없는 데서 예리했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방글거리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 거울에 비쳐보였다. 그는 넥타이의 매듭을 고치며 물었다.

“요샌 그 남자친구랑 데이트 안해?”
“안 그래도 오늘 만나기로 한 걸. 영화 보러 가자던데.”
“그래?”

그는 지갑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 보았다. 한숨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꾹 참으며 그는 만원권 열장을 꺼냈다. 지갑에서 손쉽게 10만원을 꺼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통장이 아닌 현금으로 보수를 받던 그에게는 지갑이 곧 전재산이었다. 그리고 그건 초라할 정도로 얄팍해졌다.

“랑아.”
“응?”
“이거 오늘 놀러가서 써라.”
“나도 돈 있어.”
“가끔 오빠가 용돈도 줘야지. 아니면 예쁜 옷이라도 사 입든가. 선머슴처럼 하고 다니면 남자친구 떨어져나간다.”
“체, 나 정도 외모면 뭘 입어도 괜찮지만…”
“그러면서 돈은 왜 받아가? 도로 줘 그럼.”
“아 남자가 째째하게. 고마워, 잘 쓸게.”

그는 무거운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직업 소개소도 들려보고, 평소 잘 안 보던 무가지들도 둘러 보고, 직업을 찾으려면 해 볼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마음이 심란해 며칠 쉬었으면 생각하다가도, 쉬고 있으면 더 심란해 질 것 같아 억지로 집을 나선 길이었다.

‘좋아, 심기일전 하는 거야.’

어차피 해고당한 셈이기도 했지만 삼진 브로커리지 같은 골치 아픈 일은 이제 질색이었다. 그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 일은 어차피 끝난 일이다. 앞으로는 돈은 좀 덜 벌어도 평범하고 경력에 들어갈 만한 일을 하고 싶었다.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녔다. 아침엔 주로 직업소개소를 돌아다녔고 오후엔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잔 시켜놓고 신문들을 뒤졌다. 조금 눈치가 보이면 피씨방으로 자리를 옮겨 인터넷을 뒤져보기도 했다.

팩스와 이메일로 이력서를 보내고 몇번 전화통화도 했다. 첫술에 배부르겠느냐만은 면접 보러 오라는 실낱같은 희망의 동아줄도 내려오지 않은, 지치는 하루였다. 저녁 일곱시경에 그는 터덜 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서 이메일을 체크해 보면 혹 좋은 소식이 있을지, 한 일주일 정도 찾아보고 별반 그럴듯 한게 없으면 직업소개소에서 소개해준 아르바이트라도 다녀 볼지,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낯익은 골목길에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뉘엿 뉘엿 져가는 석양이 회색 담벼락을 주홍빛으로 물들인 위에, 경찰차의 빨갛고 파란 경광등 불빛이 섬뜩하게 스친다. 계속, 주기적으로, 반복적으로, 끝없이. 여간해서는 볼 일이 없는 많은 수의 경찰차들, 정복을 입고 분주히 오가는 경찰들. 그 사이로 선명하게 들어오는 노란색 출입금지 폴리스라인.

너무나도 낯선 풍경이었다. 그가 사는 평범하고 조그만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집과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자각하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 경찰이 그를 제지하고 있었고 그는 폴리스 라인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나 이집 살아요!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이봐요!”

그 순간의 기억들은 명료하지 못했다. 마치 잔뜩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기듯, 언뜻언뜻 강렬한 흑색 모노톤의 장면들만이 머리속에 남아 있었다. 호송용의 커다란 경찰 승합차의 문이 열리고, 구속당한 누군가가 집으로부터 끌려나왔다. 경찰이 세 명이나 달라붙어 있고 얼굴과 옷이 온통 피범벅이 된 사내였다.

사내는 평인에게 덤벼들었다. 한 마리 야수처럼 격렬하게 덮쳐왔다. 평인은 넘어졌다. 옆 머리에 충격을 받고 시야가 흔들렸다. 평인의 목을 조여오는 놈의 손은 피에 젖어 미끈미끈했다. 사내의 머리에 흥건한 피가 평인의 몸을 적셨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다시 다음 순간 평인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경찰들은 사내를 억눌렀다. 사나운 짐승을 대하듯이 마비총을 쐈다. 흡혈귀병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쓰는 전기충격요법을 응용하여 만들어진 마비총은 대상의 신경계를 잠시동안 마비시킨다. 사내는 팔다리를 개구리처럼 쭉 뻗고 경련했다. 그의 얼굴 근육들도 멋대로 움직였다. 평인은 사내의 얼굴에서 일그러진 웃음을 발견했다. 흰 이빨을 드러내고, 입가엔 거품을 줄줄 흘리면서. 마비총 때문에 지은 표정이 아니라, 마비총에 얼굴이 뒤틀리면서도 지어낸 웃음이었다.

사내에게 수갑이 채워지고, 호송차량의 구속 벨트가 조여지고 그 문이 닫히고 나서야 평인은 사내가 누군지를 알아차렸다. 민우였다.

머리가 상황을 정리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평인은 경찰의 제지를 무시하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유리 조각이 밟혔다. 어머니가 아끼던 유리로 된 커피테이블은 산산히 조각나 바닥에 널려있었다.

거실의 소파는 제자리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고 TV는 테이블에서 떨어졌으나 전원 콘센트와 커피테이블의 철제 다리의 덕분에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창문의 커튼이 반쯤 뜯어졌고 식탁 의자들이 굴러다녔다. 경찰들이 집안까지 신고 들어온 발자국들이 방마다 가득했다.

동생은, 랑이는 어디 있는가 하고 그의 눈이 주위를 샅샅이 뒤졌다. 아직 들어왔을 리가 없다. 남자친구랑 놀다 온다고 했으니, 분명 늦을 것이 분명했다. 랑이는 아직 들어오지 않은 것이었다… 그의 이성이 속삭였다. 진실을 외면하지 말라고.

그의 대뇌는 천천히 눈앞의 현상을 받아들였다. 물씬 풍기는 피내음. 바쁘게 오가는 경찰들. 피바다가 된 거실 한바닥에 조용히 드러누워 있는 한 사람. 머리가 길고, 체구가 작고, 노란색 가디건을 걸치고 피바다 속에 잠겨 있었다. 그는 계속 부정했지만 그의 이성적인 사고는 이미 대답을 정해놓고 있었다.

랑이는 죽어 있었다.

*                *                *                *                *                *

“누구를 미워해야 할까요.”

침묵. 웃고 떠들고 술잔을 부딪치고 불판에 고기 익는 소리가 가득한 속에서의 외로운 침묵.

“왜 사람들은 그렇게 이성적이지 못한 것일까요? 랑이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민우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그애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살인을 한 본인을 숨겨 오래도록 죄책감과 경찰의 추적에 떨며 살 바에는, 어차피 잡힐 바였다면 즉시 잡히는 편이 나았을 텐데. 설사 나에 대한 증오가 있더라도, 그 대상을 나로 한정해야 했을 텐데. 왜 그랬을까요?”

평인은 말을 계속했다.

“민우를 놓친 경찰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면서 왜 그렇게 허술했을가요? 살인범을 놓쳤으면, 가장 먼저 저의 신변과 저희 가족의 신변보호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닐까요?  이웃들은 왜 그랬을까요?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는데도 왜 이웃들은 들어가 보지 않았을까요? 하다못해 경찰이라도 빨리 불렀으면 괜찮았을 텐데. 우리집에서 가정폭력이나 부부싸움이 있어왔던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렇게 비명과 소란에 무관심 할 수 있었을까요?”

박 기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탓이다. 평인은 씁쓸하게 내뱉었다.

“아니면 탈주한 살인범에게 문을 열어준 바보같은 랑이를 탓해야 할까요?”

평인은 숨을 골랐다. 깍지를 낀 손에서 힘을 빼자 천천히 혈색이 돌아왔다. 손등에 난 손톱 자국서 피가 배어나왔다. 박 기자는 손수건을 건네었지만 평인은 그것을 받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느릿느릿, 평온한 어조였다.

“저는 그들 중 누구 하나만을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박기자는 쓰던 것을 멈추었다.

“감탄할 따름이네. 이 상황에서도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 하니 말이야.”

평인의 얼굴에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성적이지 못한 인간을 싫어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 와서도 이성이 저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지요.”

박 기자의 펜이 멈췄다. 그는 자신이 뭐라고 써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냉철한 척 하는 애송이는, 동생이 무참히 살해당한 이 순간까지도 객관성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렇게 쓰려 하는데, 그의 펜은 그렇게 쓰기를 거부했다. 뭔가가 달랐다.

“그 이성적인 결론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예. 그 어느 누구 하나만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이 세상을 미워하기로 했습니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무른 펜은 종이 위에 파란 잉크 점을 남겼다. 잉크에 젖은 종이는 날카로운 펜촉에 쉽사리 찢기운다. 그는 그 페이지를 찢어내어 버리고 새 페이지로 넘어갔다.

“장례식장에서 내가 물은 적이 있지? 뭐 이제와 새삼스레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조문보다도 자네에게서 이슈가 될 만한 것을 좀 더 캐내려고 하는 속마음이 있었거든.”

평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고, 불쾌하다거나 유쾌하다거나 하는 감정의 표시도 아니었다. 박 기자는 마음을 정했다.

“그때 자네는 입을 열지 않았어. 왜지? 그때와 지금 무엇이 달라졌단 말이지?”
“그때는 경황이 없기도 했지만,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석주 선배를 생각해서라도, 박 기자님에게는 얘기할 수 없었지요.”
“석주를 생각해서라.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사흘 전에 삼진 브로커리지에 갔었습니다.”

*                *                *                *                *                *                *

하늘은 화창하고 푸르러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평인은 비가 오면 좀 덜 우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하철 안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그 생각 뿐이었던 그는 마침내 삼진 브로커리지의 빌딩 앞에 도착해서야 날씨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의 직장이었던 빌딩은 전면부가 유리로 뒤덮인, 현대적이고 세련된 형태의 건물이었다. 그는 더욱 우울한 기분을 느꼈다.

그에게 기다리라고 한 사장의 비서가 아름다운 아가씨였고 친절하게 대해주었기에 그는 더더욱 우울해졌다. 그녀가 그를 사십오분쯤 기다리게 한 다음 – 그 사이 평인은 커피를 다섯 잔 비웠고 화장실을 두 번 갔다왔다 – 예쁘게 웃으며 사장님이 바쁘시니 내일 이나 모레쯤 다시 연락해 주겠다고 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우울해질 건덕지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화를 냈다.

“중요한 비즈니스 관련이라고 얘기했을 텐데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중요성을 모르는 건 아니나 사장님은 다른 일로…”

평인은 흘긋 사장실 쪽을 쳐다보았다. 당연하지만, 이 쪽 업계에서 일을 하는 사장은 스스로의 신변 보호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무술의 고단자인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체구와 외모만으로도 일반인을 압도하는 두 명의 경호인을 평인이 뚫을 수 있는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한번 더 사장님께 전해주시죠. 이건 몹시 중요한 일이라고. 만약 사장님께서 만나주시지 않는다면 의료 4팀이라는 이름이 신문에 오르내릴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평소같았다면, 비서는 계속 웃는 낯으로 거절했을 것이다. 그녀가 월급을 받는 이유의 반 정도는 거기에 있으니까. 삼진 브로커리지의 경리사원에서 사장의 눈에 띄어 비서의 자리에까지 오른 3년 간, 그녀는 별에 별 꼴을 다 보아왔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도 상대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평인은 – 평인의 눈 속에는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사장실로 들어갔고, 잠시 뒤 다시 나왔다.

“들어오시랍니다.”

사장은 커다란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비서가 자리를 권했지만 평인은 앉지 않았다. 그는 사장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섰다. 사장은 평인과 이야기하기 위해 고개를 드는 대신 등받이를 낮추고는 눕듯이 편한 자세로 바꿨다.

“김평인 씨. 내게 비지니스가 있다고 했는데?”
“그렇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뭔지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동생 분의 일은 몹시유감입니다.”

사장이 그러기를 기대했다고 생각했기에, 평인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서로간에 잘 아는 일이니 서론은 생략하겠습니다. 삼진 브로커리지에 의뢰를 하겠습니다.”
“의뢰라면 저쪽으로 가서 접수를 하십시요. 사장 면담은 그럴 때 쓰는 게 아닐텐데요.”
“그럴 수 없는 사안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 제가 비록 계약직이었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의료 4팀이 맡는 건수는 전부 사장님으로부터 직접 내려온다는 것을요.”
“잘 알고 있군요. 그래서 그 관련 건들은 내가 개인적으로 관리하고, 문제가 생겨도 내 개인적으로 해결한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그걸 잘 알고 있는데 그 따위로 처신을 해?”

언성을 높이지 않아도 무서운 사람이 있었다. 사장이 그런 사람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데도 상대방을 움츠려들게 하는 사람. 어느새 존대말이 사라졌지만 평인은 애써 침착해졌다. 존대말을 썼다 하더라도 그의 태도에는 어차피 평인에 대해 일말의 존중도 없었다. 평인은 사무적인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우리 회사에서는, 그래, 자네들 같이 공개할 수 없는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이 꽤 있어. 그리고 회사는 그들이 일한 대가로 그런 분야에서 그들을 보호하도록 노력하지. 예를 들면 식물인간이 된 자네 팀장의 뒤를 봐준다던가 하는 경우 말이야. 그리고 사원들에게도 회사를 보호하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지. 그런데 자네는 어땠지? 정민우가 자네를 찾아왔을 때, 경찰에 밀고를 하면서 뭐라고 했나? 삼진 브로커리지에서 일한 전력 때문에 정민우가 찾아와? 그리고 자네 동생 사건에도, 다시 같은 얘기를 해? 경찰에서 당연히 이쪽을 조사했지. 안 그래도 그네들은 정민우를 한번 탈주시킨 사건으로 욕을 한 바가지 뒤집어 쓴 터라, 희생양이 필요했지. 그걸 내 선에서 무마시켜야 했어.”

사장은 으르렁대었다. 그의 인맥이라면 그걸 무마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화를 내는 것이 대화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 쯤은 평인도 알 수 있었다. 사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손해가 있을 거라 판단했다면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퇴직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되었네. 그리고 이제와서 도와달라는 건가?”
“일은 제가 다 하겠습니다. 돈도 드리겠습니다. 3억까지 드릴 수 있습니다.”

3억이라는 숫자는 이전까지의 수고료들을 종합해 고려한 결과 도출할 수 있었던 평인의 최선이었다.

“어떻게?”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 입니다.”

사장은 웃었다. 냉혈한의 웃음이었다.

“신체 건강한 젊은이니 못할 것도 없겠지. 그러나 안돼. 자네가 회사에 입힌 피해 때문이 아니더라도, 경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민우가 늑대인간병에 걸렸었다고 우겨야 해. 그렇지도 않은데 정민우가 탈주에 성공했다고 하는 건 경찰의 수치가 되니까. 적어도 늑대인간의 괴력은 되어야지 탈주할 수 있었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는거야.”
“정민우의 체포 당시 혈액검사 자료, 모발이 급성장하지 않은 점, 그리고 무엇보다 미친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저에게 보복을 했다는 것 만으로도 녀석이 늑대인간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늑대인간병에 걸렸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사장은 또다시 웃었다.

“바로 그렇다네. 그리고 자네와 자네 팀장은 바로 그런 증거들을 뒤집으며 지금까지 일을 성공시켜왔지. 그런데 이제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 회사는 지금까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셈이 되는데?”
“회사에는 피해가 가지 않게 하겠습니다.”
“자네에게 인생의 교훈을 주지. 거짓말을 하기는 쉽네. 그러나 거짓말을 계속 거짓말로 숨기는 것은 어렵지. 하지만 제일 어려운 것은, 거짓말을 하고 난 뒤 진실을 고백하는 것이야.”
“하지만…!”
“이야기는 끝일세. 미안하군. 약속이 있어서.”

경호원 두 명이 다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 중 한 명이 매우 정중하게 평인을 모셨다. 그리고 평인을 내쫓는 데에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평인이 할 수 있던 유일한 저항은, 사장실의 문을 자신의 손으로 – 쾅 소리가 나게 – 닫는 정도였다.

*                *                *                *                *                *

“증거가 있는가? 삼진 브로커리지가 실질적으로 늑대인간 병 환자가 아닌 사람들을 늑대인간 병 환자라고 주장했다는 그 증거가.”
“자료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법원에 그 자료가 존재하고, 그걸 보는 즉시 어디를 고쳤는지, 어디가 억지인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사실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피해자들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늑대인간병이라는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 이들에 대한 불만은 이미 하늘을 찌를 듯했다. 사회적 논란으로만 끌고 가더라도 충분했다. 특히, 박 기자의 경우는 더더욱 그랬다.

“예를 들어서?”
“자세한 사항은 전부 여기 있습니다. 제가 호르몬 수치를 조작한 내용도 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빠져나갈 수 없겠죠. 제가 장본인이니.”
“그러면 처벌을 피할 수 없을 텐데? 물론 자백하는 것이니 정상 참작은 되겠지만…”
“그 정도는 상관 없습니다.”

평인은 무뚝뚝하게 대답하고는 박 기자에게 봉투를 건네었다. 못해도 A4용지 백장은 되어 보이는 보고서였다.

“제 기억에 의존한 거라서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겠지만, 법정자료와 대조해보시면 됩니다. 큰 그림은 다 맞으니까요.”

박 기자는 첫 페이지를 넘겼다. 긴 리스트의 목차가 눈에 띈다. 1장. 삼진 브로커리지의 시스템. 2장. 검은 커넥션. 3장. 사건 목록. 그리고 3장 아래에는 낯익은 사람의 이름들이 보인다. 다시 다음 장으로 넘기니, 시작부터 빽빽한 글자들이 그를 반겼다. 포인트 10, 아니 어쩌면 9 정도로 보이는 작은 글씨들은 포장마차의 전구알 아래에서 읽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눈에 가혹했다. 쓸데없이 성실하긴, 하고 중얼거리며 박 기자는 그것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나는 한 사람의 기자로써, 이런 식으로 주어지는 자료는 좋아하지 않아. 내가 질문하고, 대답을 듣고, 혹은 대답을 회피하는 자세라던가 말하는 태도 등에서도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건 정보의 진실성이라던가 유효성을 가늠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글쎄요. 이 일에 대해 자세히 모르시니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전부 적었습니다.”
“참고 자료로 삼겠네. 그러나 몇가지 질문이…”

평인은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박 기자는 말을 멈추고 얼굴을 찌푸렸다. 직접적이지는 않으나 그 노골적인 태도에서 충분히 무례함을 느낄 수 있는 행위였다.

“시간이 늦어서요. 이만 가봐야 될 것 같습니다만.”
“이제 7신데?”
“벌써 7시입니다. 병원에 가 봐야 되서요.”
“병원은 무슨 병원인가?”
“어머니가 입원하셔서.”

박 기자는 그를 잡지 않았다. 잡았다 하더라도 평인은 떨쳐냈을 것이다. 평인은 젓가락에 손도 대지 않았다. 곱창 2인분은 그대로 박 기자의 몫으로 남았다. 평인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더 이상 고기에 손을 대지 못했다. 고기를 먹으려 하면 금새 속이 뒤집히고 구토를 했으니, 곱창이 지글거리며 구워지는 앞에서 그리 오래 있었던 것도 사실 대단한 일이었다.

석양이 내리는 저녁 거리를 걸어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은 크고 세련된 건물이었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연한 녹색이 주를 이루는 인테리어는 흡사 고급 호텔이라도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물론 그런 착각에 빠지는 일은 없다. 인테리어와는 별개로, 하얀 환자복을 입은 이들이 어딜 가든 눈에 띄었으니 말이다.

실성한 사람, 미친 사람, 난폭한 사람, 우스운 사람, 조용한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병원 밖의 사람들로부터 환자라는 진단을 받고 들어온 사람들이다. 평인의 어머니도 그 중 304호실이라는 작은 병실에서 다른 세 사람과 함께 누워 있었다. 병실의 제일 끝 창가에 앉은 사람은 오래된 라디오를 켜 놓고 있었다. 천국으로의 계단을 노래하는 슬픈 목소리가 전자기타와 드럼의 신경 거슬리는 화음에 감겨든다. 다가가보니 라디오의 주인인 환자는 잠들어 있었다. 평인은 라디오의 전원을 내렸다.

“어머니, 저 왔어요.”

평인의 어머니는 눈을 뜨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밥은 잘 드셨어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여섯시간에 한 번씩 발작을 일으켰다. 발작을 잠재우기 위해 신경안정제를 투여하면 그녀는 조용해졌다. 지금 처럼,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평인은 퇴원하고 어디 시골에 내려가는게 어떨까 하고 물어봤다. 의사는 약물투여량을 줄여가며 경과를 지켜보자고 말했다. 평인은 그러라고 했다.

“많이 먹지 않으면 기운이 나질 않아요.”

그는 어머니의 손을 쥐었다. 어머니는 그의 손을 잡지 않으면 잠들지 못했다. 평인에게는 고통스런 시간이다. 어머니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플 정도로 손을 조여온다. 그는 내색하지 않고 어머니가 잠들 때 까지 인내했다.

신경안정제의 덕분인지, 어머니는 한번 잠들면 오래오래 잤다. 평인은 어머니가 잠들고 한 시간 정도를 기다리다 일어났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었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마지막으로 버스를 타고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평인이 병원에서 돌아올 때 쯤이면 집은 어둡다.  유리가 깨져 있고 가구가 흐트러지고 신발 자국이 어지러운 그대로다. 그는 신발도 벗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 기사들을 읽다보면 시간은 금방 갔다. 취침은 새벽 두 시쯤에 했다. 어머니가 깨기 전에 병워에 가 있으려 하더라도 아침 여덟 시 쯤 일어나면 넉넉했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며칠 되었다. 전화 했더니 집에 들어올 엄두가 나지 않아 모텔을 전전한다고 하였다. 평인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봐도 밥을 차려먹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은 컵라면, 밤참은 냉동만두로 적당히 때우는 것이 편했다. 아무도 평인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 다시 병원을 나가고, 어머니의 곁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점심 쯤 나와 간단히 요기를 하고, 근처의 피씨방에서 시간을 때우다 저녁에 들어갔다. 그리고 집에 가는, 그런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는 하루에 인터넷 뉴스를 체크하는데 여덟 시간씩 할애했다. 여섯 시간 정도를 취침하는데 쓰고, 그 외 밥 먹는 등의 잡다한 일에 두시간 정도를 소모한다고 볼때 그의 하루 중 나머지 여덟 시간은 다시 신문과 뉴스에 집중되어 있었다.

박기자를 만나고 일주일 쯤 되었을 때 그는 하나의 뉴스를 접하였다. 더 이상 1면에 나오지도 않고 헤드라인도 조그마한 기사였다. ‘정민우, 집행유예… 병원에서 보호감찰 하기로.’ 평인은 그날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그는 밤을 새어가며 집을 청소했다. 깨진 유리를 쓸어 담고 가구들을 제 자리로 옮겼다. 경찰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도, 핏자국도 모두 지웠다. 평소 신경도 쓰지 않던 TV위의 먼지도 닦아내었고 구석 구석을 쓸고 닦았다.

그는 평랑이의 방도 정리했다. 옷가지들은 모두 개어 옷장에 넣었고 침대도 정리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공부했던 책들은 차곡차곡 책장에 넣었고 색연필과 볼펜은 연필꽂이에 넣었다. 핸드백들은 옷장 오른쪽 구석에, 책가방은 책상 네 번째 서랍에 넣었고 커다란 곰인형은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안방과 부엌을 마저 치운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그 자신의 방에는 별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책상 맨 윗 서랍에서 갈색 봉투를 꺼내 품에 넣은 그는 이 집으로 이사올 때 쓰던 박스를 가져와 책상 위의 모든 것을 그 안에 쓸어 담았다. 박스를 테이프로 봉해 책상 밑에 넣고 방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옷가지들을 뭉쳐 침대 밑에 쑤셔박았다.

그는 현관의 신발들을 가지런하게 놓아 마무리를 짓고는 밖으로 나섰다. 병원은 문을 열었지만 그렇게 이른 새벽에는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병실 밖에 앉아 기다렸다. 아홉시가 되어서야 면회가 허락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그는 다시 어머니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잘 잤어요?”

어머니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입을 열었다.

“넌 잘 못잔 모양이구나. 피곤해 보이는데…”

평인은 잠시 말을 잊었다. 사건이 발생하고 근 2주만에 처음이었다. 어머니가 정상적인 언어를 구사한 것은.

“얼굴도 야위었고… 밥은 잘 먹는 거니?’
“네.”
“그래… 내가 빨리 일어나야지.”
“그러려면 밥을 잘 드셔야죠. 어제처럼 조금씩만 잡수시면 안되요.”
“그래… 어머, 인아. 우니?”

그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랑이는 이제 없다. 부모님에게 남은 자식은 평인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없어질 경우를 생각했다. 자신이 일상에서 벗어났을 때를 생각했다.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그 길을 가면서, 어머니는 어떤 심정이 될까. 혹 다시 충격을 받아 쓰러지시진 않을까. 정상적으로 살아나가실 수 있을까.

“아하하. 좀 이상한데.”

평인은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저 잠깐 나갔다 올께요. 창피하게 이게 뭐람…”

평인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의 그의 모습은 우스웠다. 씻지 않아 부스스한 머리에 깎지 않은 수염이 시커멓다. 초췌한 얼굴에 눈이 벌개져 우는 모습이 정말 못견딜 정도로 우스웠다. 그는 물을 틀고 세수했다.

‘감정을 씻어내자.’

한번 찬 물을 끼얹을 때마다 머리속이 차가워진다.

‘약한 마음을 버리자. 그래, 지금 당장 어머니에게 큰 충격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평생 가슴속에 앙금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럴 순 없다. 이 사회에게 틀리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도록.”

마지막에 와서는 입밖에 내어 말했다. 소변기 앞에서 일을 보던 중년 남자가 흘끗 그를 돌아봤다. 그는 매고온 작은 가방에서 몇가지 물건을 꺼냈다. 휴대용 면도기와 정장이었다. 십여분 뒤 평인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복도로 돌아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어머니의 병실 앞을 그냥 스쳐지나갔다.

‘지금 들어가면 다시 마음이 약해질 테니까. 깨끗이 끝내자.’

평인은 특수 병동으로 향했다. 특수 병동 앞을 지키는 경비원들은 평인을 보고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평인은 지금 말끔해진 모습으로 정장을 입고 옆구리엔 서류봉투를 끼고 있었다. 그는 특수 병동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이동해, 드디어 209호실에 다가섰다. 평인은 204호실 앞에서 멈춰섰다. 209호실의 문 앞에는 의자가 놓여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재판부의 판결이 끝난 즉시 민우는 늑대인간 병 환자로 분류되어 병원에서 치료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수의 신분은 아니지만, 사법 경찰 한 명이 그를 감시하게 되어 있었다. 치료가 완료되기 전에 도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지만, 사실 원한을 갖고 찾아오는 자들을 막기 위해서가 진짜 이유였다.

허나 평인은 사복 경찰들도 점심을 먹으러 갈 때나 화장실을 갈 때 자리를 비운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209호실 앞으로 다가갔다. 막 문 손잡이에 손을 대었을 때, 복도 저쪽의 간호사가 소리쳤다.

“뭐하세요?”

평인은 잠시 굳었지만, 곧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그는 문 가까이서 목소리를 내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는 간호사에게 걸어가, 조용조용히 말했다. 경찰로부터 절대 민우가 어디 나가지 못하게 하고, 누가 들어가는 것도 막으라는 부탁을 받았던 간호사였지만, 낯익은 민우가 들어가는 것은 막지 않았다. 들여보내도 괜찮냐는 신참 간호사의 질문에 그녀는 뻐기듯이 말했다.

“여기서 일하다 보면 저런 사람 많이 보거든. 특히 저 사람은 자주 오는 사람이야.”
“네?”
“으이그. 소위 말하는 브로커라고 브로커.”

이제는 더 이상 그 직함으로 불리지 않았지만, 평인은 만족했다. 그는 병실에 들어가는 즉시 문을 잠갔다.

“엉? 누구요?”

침대 커튼 너머에서 민우가 말했다. 평인은 대답하기 전에 먼저 방 안을 훑어봤다. 병실에 흔히 보이는 링겔병 같은 것은 없었다.  꽃병이 하나, 그 밖에 꽃다발 서너 개와 탁상시계가 올려진 작은 테이블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미니 냉장고가 있었다. 침대 커튼 자락 밑으로 슬리퍼 한 짝이 빠져나와 있었다.

그는 서류 봉투 안의 내용물을 꺼내 손에 쥐었다. 이제 봉투는 필요 없었다.

“너…”
“움직이지마.”

평인의 얼굴을 본 민우는 신음을 흘렸다. 어쩌면 그의 손에 들린 것 때문일 수도 있었다. 흡혈귀 병 때문에 사회에 공포가 만연하던 당시, 호신무기 업체는 큰 호황을 맞았다. 굳에 몸에 대지 않아도, 약간 떨어져서 전기충격을 가할 수 있는 새로운 전기총은 그 당시 나온 히트상품이었다.

“그런 걸 갖고…”

간호사 호출 버튼으로 민우의 손이 움직였다. 평인은 다시 한번 말했다.

“움직이지 마. 이거 쏘면 너 죽어. 알고 있지? 옛 용산 뒷골목에 가면 이런거 불법개조 해 준 다는 거.”

사실이었다. 평인은 용산에 가서 전기총을 개조해왔다. 단순히 마비가 될 정도로의 충격을 주던 전기총은, 만원짜리 열 장의 힘 아래에 척추신경계에 막대한 손상을 입히고 심장마비를 불러일으키는 무시무시한 물건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 번에 전류를 모두 방전시키는 것으로, 한번 쏘면 더 이상 못쓰게 되지만 말이다. 그리고 민우도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용산의 불법 개조 골목을 민우가 소개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지?”

평인은 총을 겨눈 채로 대답했다.

“무슨 일일 것 같아?”

민우는 볼을 씰룩거렸다.

“복수냐?”
“복수? 그런 짓은 하지 않아. 이건 죄에 당연히 따라야 하는 심판이야.”
“지랄하지마. 넌 단지 복수심에 미친 거야. 평소 잘난 듯 나불거리던 네 수준도 겨우 그 정도지.”

평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대답해. 왜 랑이였지?”
“뭐?”
“왜 랑이었냐고 묻잖아!”

평인은 거칠게 다가섰다. 총구가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민우는 천천히 양 손을들어올렸다.

“그건 내가 아니었어. 알잖아. 늑대인간 병.”
“아냐! 늑대인간 병이었다고? 넌 정확히 우리 집을 찾아왔어. 늑대인간 병이라면 그럴 수 없어. 이지를 상실하고 주변을 공격해야 해. 네가 탈출한 지점에서 우리집 까지, 너는 대중교통까지 이용해가며 왔어. 그게 말이 돼?”
“글쎄. 그 때는 늑대인간병이 가라앉았던 모양이야.”
“웃기지마! 늑대인간병이 스스로 가라앉는 건 몸 안의 혈당치가 떨어지거나 만족할만큼 다 때려부수고 난 뒤야. 넌 그 중 어느쪽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이성을 가졌다는 거냐?”
“나야 전문가가 아니니까 모르겠지만, 경찰과 법원과 병원은 그럴 수 있다는 모양이야.”

쏴버릴까? 쏴버릴까? 간단한 동작으로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평인이 살짝 손가락을 당기면 끝이었다.

“말해! 말하지 않으면 죽이겠어. 너는 분명 정상이었어. 단지 늑대인간병 처럼 보이려고 행동했을 뿐이야. 단지 그걸 위해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랑이를 죽였던 거야. 그렇지? 여기서 자백하면 목숨은 살려주겠어. 그렇지 않으면 넌 죽어.”
“멍청아. 협박 받을 때의 진술은 아무런 효력이 없어. 나도 그 정도는 알거든?”
“닥쳐!”
“닥치면 말을 못하는데?”

평인은 거의 쏠 뻔했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고 결련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인내했다.

“더 이상 허튼소리는 용납하지 않아. 말해.”
“이런 건 어떨까. 믿고 있던 친구의 배신에 너무나도 큰 상처를 받은 나는, 늑대인간이 된 와중에도 그 집을 떠올리며 찾아갔다고 하는 것은? 그런데 운 나쁜 그녀가 네 대신 당했다는 쪽은?”
“허튼 소리 작작 하랬잖아!”
“글쎄. 난 늑대인간 병에 걸려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기억을 못하니, 객관적으로 상황을 재구성 해 보는 거야. 보라구. 내가 아무리 널 증오했어도, 제 정신이었으면 평랑이를 죽였을 리 없잖아? 나중에 제 정신이 돌와와서, 난 크게 후회했다고. 너무나도 슬프고 절망스럽고, 나 자신이 죽일만큼 미워서, 울면서 통곡했지. 연기였을 리가 없겠지? 난 시트콤에서도 연기 더럽게 못한다고 혹평을 받았으니 말야.”

철컥, 철컥철컥. 문 손잡이가 요란하게 흔들리더니, 곧 쿵쿵대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누구야! 문 열어!”
“빨리 말해! 넌 제정신이었다고, 늑대인간 병이 아니었다고! 죗값을 치루겠다고 말야! 시간이 없어. 열 세겠어. 하나, 둘…”
“살인자가 되고 싶어? 병신아, 넌 못 쏴. 너 같이 말 많고 생각 많은 새끼는 절대 못해.”
“셋, 넷, 다섯, 여섯…”
“내가 겁 먹을 줄 알아? 씨발 겁 먹을 것 같았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이 개새끼야. 쏴봐, 쏴보라고! 겁쟁이 새끼!”
“일곱, 여덟…”

철커덕. 간호사가 열쇠를 갖고 뛰어온 모양인지 잠금장치가 풀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평인은 이를 악물었다. 민우는 범죄자다. 살인자, 그것도 두 명을 죽인 살인자다. 첫 번째 범인은 우발적이었지만, 두 번째는 의도적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늑대인간병이라 주장하기 위해 잔인하고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죽어도 싸다. 죽어도 싸다. 죽어도 싸다. 사형제가 있었으면 사형, 없었어도 무기징역.

“아홉 열!”

경찰이 문을 열어젖히고, 민우가 몸을 옆으로 굴리고, 평인이 방아쇠를 당기는 그 모든 일이 동시에 벌어졌다. 민우의 몸부림은 필사적이었지만 총구를 떠난 발사체는 가느다란 전선을 매달고 민우의 목덜미에 꽂혔다. 그리고, 밀리초보다도 작은 단위의 순간에 강력한 전류가 민우의 심장을 멈춰세워야 했다.

다행, 혹은 불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용산의 불법개조자는 그 책임을 성실히 다하지 않았다. 다섯 개에 한 개 정도 나오는 재수없는 불량품이 안타깝게도 평인의 손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꼼짝마!”

경찰의 몸은 육중했고 평인은 그 밑에 깔려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사색이 되어 숨을 멈췄던 민우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움직여 목 피부에 꽂힌 발사체를 떼어냈다. 멍한 눈으로 그 발사체를 바라보던 민우의 입가가 씰룩였다.

“하, 아하하, 하하…”

평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웃지마 웃지마 웃지마 웃지마 웃지마 웃지마 웃지마 웃지마.

“웃지마아앍 개씹쌔끼야!”

죽여버리고 싶었다. 저 개새끼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는 그 순간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오로지 단 하나의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스스로의 맥박 소리가 너무 커 그의 귀는 다른 소리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들이받았다. 경찰을. 쥐었다. 의자를. 휘둘렀다. 의자를.

의자는 철제의 접이식으로 들고 휘두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첫 번째는 헛스윙이었지만 두 번째는 정확했다. 민우가 나동그라지고 경찰이 나동그라졌다. 유리창이 부서져 조각이 비산했다. 민우의 머리카락을 쥐고 그 머리를 끌어올려 걷어찼다. 그 목을 짓밟고 몇번이고 얼굴을 후려갈겼다. 손을 세워 그 눈을 후볐다. 비명과 함께 나뒹구는 서슬에 밀려났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가공할 폭력 앞에 세계는 침묵했다. 날카로운 파열음도, 둔탁한 파육음도, 째지는 비명도 모두 평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다. 소리, 너는 어디에 있느냐. 빛, 너는 어디에 있느냐. 그는 장님이었고 귀머거리였다. 터무니없는 폭풍에 휘말린 외로운 낙엽이었다. 그는 팔을 휘둘렀고 다리를 휘둘렀지만 온전한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 것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는 유리병을 휘둘렀다. 꽃이 허공을 날았다. 유리 조각과 핏방울이 어여쁘게 빛났다. 그는 그 어둠 속의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빛은 날카로웠다. 빛은 그에게도 피를 요구했다. 평인은 그 고통을 울며 그러쥐었다.

왜 웃어 이 개새끼야. 왜 웃냐고 이 개새끼야!

배를 가르고 내장을 헤집어도 민우의 시체는 대답하지 않았다. 독한 놈, 지독한 놈이었다. 평인은 그 심장을 터트려도 놈이 입을 열지 않을까 궁금했지만 좀처럼 가슴을 들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입 안에 유리 조각을 한계까지 쑤셔 넣었다. 놀랍게도, 박살난 유리병의 거의 모든 조각들이 그 입 안에 들어갔다. 그래도, 민우의 시체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평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쓰러진 경찰도, 실성하여 비명을 지르는 간호사도, 질린 표정으로 총을 겨누는 경찰들도 – 그들은 입을 벙긋거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평인은 답답했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도무지 이성이란게 없는 존재들이었다.

대화가 없는 고독한 세계에서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아우우우우우우우우 –
아우 아우 –
아우우우우우우 –





*                *                *                *                *                *

박 기자는 기사 초안을 송고했다. 에드와 알이 빠진 KISSER는 KISS라는 새 이름으로 앨범을 냈다. 메인 보컬과 랩퍼가 없어도 아이돌 그룹은 어쨌든 연명했다. 그는 KISS가 다음 앨범이 나오기 전에 새 멤버를 영입할 것이라는 추측성 기사를 썼다.

삼진 브로커리지에서 거액을 받는 대가로 평인의 보고서를 넘긴 우리일보는 평인이 병원에서 난동을 부린 사건이 일어나자 땅을 치고 후회했다. 그대로 보고서를 기사화했다면 대박 특종을 냈을 것인데,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다는 게 사내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그 특종을 물어왔던 박 기자는 이후 우리일보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게 되어 편집장도 그의 무리한 기사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들은 박 기자의 눈치를 보았다. 전전날 술자리에서 고까운 소리를 하는 후배 기자를 머리로 받아버린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박 기자는 계속해서 자신이 원본을 갖고 있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것 만으로도 그는 무적이었다.

파일 전송이 진행되는 도중 지루해진 박 기자는 TV를 틀었다. 어디의 시사 프로건 늑대인간 병을 다루느라 여념이 없었다. 재밌는 오락 프로들도 늑대인간 병 특별 방송을 하느라 바쁘다.

“저는 늑대인간 병이 전염성이 있다고 추측합니다. 예를 들면 얼마전의 사건에서 보는 것과 같이…”
“그러나 늑대인간 병이 반드시 바이러스성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정신병 환자들의 주변 인물들 역시 비슷한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병신같은 것들, 똥을 싸라 똥을 싸.”

박 기자는 신경질적으로 리모컨을 내던졌다. TV 스탠드에 부딪친 리모컨이 부서지며 건전지가 튀어나왔다. 베란다로 나가자 차가운 밤 공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그는 란닝구와 팬티 차림으로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질색하던 마누라는 딸내미를 데리고 친정에 가버렸다. 평인의 보고서를 삼진 브로커리지에 뺏긴 그날 박 기자는 술을 퍼마시고 들어왔고 그날은 아내의 생일이었다.

그는 왠지 힘껏 소리지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를 제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자신을 멈출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만월의 달이 도시를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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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157 단편 박애로부터의 자유 니그라토 2008.08.07 0
1156 단편 쓸모1 니그라토 2008.08.07 0
1155 단편 지옥에서라도 딜레탕트 2008.08.06 0
1154 단편 지친 시간 딜레탕트 2008.08.06 0
1153 단편 두번째 나사로 김봉남 2008.08.05 0
1152 단편 G.B1 2008.08.05 0
1151 단편 아내가 죽었다. 혹은 책임소재에 관한 혼란한 이야기 DOSKHARAAS 2008.08.05 0
1150 단편 2014 뽁뽁이 대량학살사건에 대한 보고서10 dcdc 2008.08.05 0
1149 단편 모으다 황당무계 2008.08.02 0
1148 단편 무지개의 군대 Mothman 2008.08.01 0
1147 단편 거인1 위래 2008.08.01 0
1146 단편 생활의 지혜 다니엘 안 2008.07.30 0
1145 단편 새벽부터 황혼까지 지호 2008.07.27 0
1144 단편 리프레인 황당무계 2008.07.23 0
1143 단편 유예된 추락1 미루 2008.07.22 0
단편 치료는 하지 않습니다(하) 화룡 2008.07.21 0
1141 단편 치료는 하지 않습니다(상) 화룡 2008.07.21 0
1140 단편 북미의 한국군1 Mothman 2008.07.18 0
1139 단편 엘리베이터안의 남자1 해파리 2008.07.16 0
1138 단편 나의 작고 어여쁜 인형2 김몽 2008.07.1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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