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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북미의 한국군

2008.07.18 16:4407.18


비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김태호 소위를 포함하여 모든 소대원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거친 비바람을 견뎌내면서 행군하고 있었다.
하늘을 뒤덮은 칠흑과도 같은 구름의 움직임은 거친 바람이 내는 소음과 맞물려 실로 기괴한 풍경이었다.

“젠장, 날씨가 미쳤나.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김태호 소위가 참다못하고 불만스럽게 내뱉는 순간 번개가 내리쳤다. 푸른 번개였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지축과도 같은 북소리. 아니 천둥소리가 모두의 오감을 자극했다.
처음 말을 꺼낸 김태호 소위는 물론, 야지 행군 중이던 7사단 수색대대 2중대 3소대원들 전원이 몸을 움찔했다.
3소대장 김태호 소위는 불안한 얼굴로 검은 하늘을 응시했다.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푸른 번개가 여러 각도에서, 또 여러 형태로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그 연속적이면서도 불규칙적인 움직임은 실로 섬뜩한 광경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기상 현상에 점차 동요하긴 소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거칠게 울부짖는 천둥소리에 귀를 틀어막는 소대원도 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번개가 내리치는 걸 목도한 김태호 소위가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상은 고요했다.

“어?”

김태호 소위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분명 그들은 울창한 숲 근처에 있었지만 그들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없는 들판뿐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청명한 푸른 하늘. 분명 자신들은 어두운 하늘 아래 서있었다.
주변 풍경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가 당황하는 사이 부소대장 최현성 하사가 다가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대장님, 인원이 24명밖에 없습니다.”

“뭐?”

급히 김태호 소위가 들판 한 가운데 이리저리 서있는 소대원들을 눈으로 확인했다.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들을 몇 번이고 다시 세워봤지만 겨우 22명뿐이었다.
김태호 소위와 최현성 하사를 포함하면 총 24명으로 나머지 소대원 16명이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통신병!”

소대원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잠시 웅성거리다가 한 소대원이 앞으로 나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병장 최우걸입니다! 저기, 통신병이 보이지 않습니다.”

1분대장 최우걸 병장의 말에 김태호 소위는 점차 머리가 아파왔다. 사라진 인원 중에 통신병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알았다. 일단 현 인원 파악해서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담배가 피고 싶어졌다. 그러한 욕구를 억누르며 김태호 소위는 최현성 하사를 불렀다.
무슨 일입니까? 라며 다가온 최현성 하사를 소대원들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 속삭였다.

“너도 대충 짐작은 가겠지만 현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최현성 하사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우리가 있는 지역과 우리가 조금 전까지 야지 행군 중이던 지역의 명백한 불일치. 그리고 난생 처음 본 그 수수께끼의 기상 현상. 이게 의미하는 게 뭔지는 알거라 안다.”

“대충 짐작은 갑니다. 하지만...하지만 이건 대체...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군요.”

절망적 표정인 최현성 하사의 중얼거림에 김 소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그렇다. 하지만 소대원들에게 있어 우리가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한다. 일단 계속 행군하면서 마을을 찾도록 한다. 현재 상황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해주어도 되고 또 현 상황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다른 지역으로 내던져졌을 수도 있으니 확단은 금물이다.”

“그...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김태호 소위는 뭐라 말하기 힘든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최현성 소위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아, 절대 동요하지마라. 침착하게 행동하는 거다.”


꽤 심각한 상황이었다. 총 4개 분대로 나뉘어진 소대원 40명 중에 현 인원 24명. 문제는 온전한 분대 자체가 없었다.
1분대장과 3분대장은 있었으나 모두 5명만이 잔존했으며 분대장이 사라진 2분대와 4분대의 경우도 각각 6명만이 잔존했다.

“그리고 모두 소총수만 남아 있다니....이거 참.”

유사시에는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김태호 소위는 우선 소대의 인원 정비보다는 소대원들이 쉴 수 있는 곳을 찾기로 생각했다.
불안한 현재 상황에서 우선 하나의 목표가 주어지면 위험한 돌발 상황 발생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좋아. 모두 내 말 잘 들어라. 우리는 현재 길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혼란스러운 기상 사태에 모두 이성을 잃고 흩어졌다가 지금 여기서 정신을 차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해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하여 불안해하던 소대원들은 소대장의 그나마 납득이 가는 설명에 모두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김태호 소위는 약간 죄책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일단 가까운 민가를 찾아 부대와의 연락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10분 후에 행군하기로 한다. 알겠나?”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알겠습니다!”


끝없는 들판이었다. 이렇게 광대한 들판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구심마저 들만큼 드넓고 비옥한 초록빛 대지였다.
김태호 소위가 점차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이쯤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 갈 것인가는 생각을 품은 순간 누군가가 외쳤다.

“마을이다!”

실로 반가운 소리였다. 김태호 소위를 비롯해 소대원 대부분이 다시 기운을 번쩍 차려 그 목소리가 외친 곳으로 달려 나갔다.


“이...이건 대체...”

“저...소대장님?”

최현성 하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으나 망연자실하기는 김태호 소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 눈앞에는 원뿔형 흰색 천막들이 펼쳐져 있었고 그 주위를 깃털 장식을 한 구리빛 사람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마을에 그들은 도착한 것이다.

“여기가 인디언 보호 구역인가요?”

“설명 좀 해주십시오! 이건 대체?”

“아니야...아니야...설마...”

소대원들이 혼란에 빠진 채 횡설수설에 가깝게 말했지만 혼란스럽긴 김태호 소위와 최현성 하사도 마찬가지였다.
김태호 소위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사태가 더 심각한 것임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건장한 체격의(그러나 3소대원들보다는 체구가 작은) 인디언 청년 둘이 창과 도끼를 든 채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어....소대장님?”

최현성 하사가 불안한 목소리로 외침과 동시에 K-2 소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음. 일단, 저들과 이야기부터 해봐야겠지.”

김태호 소위는 두 손을 흔들었다. 그 나름의 평화의 제스처로 저 인디언 전사들이 이해했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어느새 다섯으로 불어난 인디언 전사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이 그들 주변을 감싸 안고 있었다.
김태호 소위는 바디 제스처로 자신이 이 집단의 가장 높은 인물이며 당신들의 지도자, 추장과 만나고 싶다는 의미의 몸동작을 현란하게 선보였다.
한 인디언 전사가 그 모든 의미를 이해하기까지 4분가량이 걸렸다.
인디언 전사들은 서로 이야기를 하더니 다시 한 번 김태호 소위와 소대원들을 흘끗 쳐다보고는 한 명이 어디론 가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추장에게 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디언 전사가 돌아올 때까지 소대원들은 인디언들의 지대한 관심에 시달려야 했다.
어느새 인디언들이 몰려와서는 소대원들의 특이한 복색과 얼굴, 괴상한 물건을 열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김태호 소위는 자신들이 광대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인디언이라.
곧 인디언 전사는 김태호 소위와 소대원들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해보이고는 걸어 나갔다.
화려한 규모와 장식으로 이루어진 천막 입구에 당도하자 인디언 전사가 들어가도 좋다는 뜻의 손짓을 했고 김태호 소위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인사를 표명했다.

"최현성 하사와 나만 들어간다. 나머지는 밖에서 경계를 서도록 해라."

소대원들에게 그렇게 당부한 김태호 소위는 약간은 긴장된 마음으로 천막 입구를 열고 들어갔다.
천막 내부는 전체적으로 어두웠지만 안의 사람들을 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추장이라고 생각되는 노인과 건장하고 단단한 몸을 자랑하는 전사 2명이 침묵과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광경에 김태호 소위는 순간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말도 통하지 않겠지만.
김태호 소위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면서 인사의 예를 표명했다.
추장이 입을 열어 뭔가 말을 했으나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김태호 하사는 추장이 하는 말의 뉘앙스와 몸짓으로 자신들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 것으로 해석하고 먼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과 최현성 하사를 가리킨 후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하늘을 가리킨 손가락을 다시 내려 자신들을 가리켰다. 추장과 인디언 전사들은 이해했다. 물론 김태호 하사와 최현성 하사, 그리고 밖의 이방인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을 쉽게 믿지는 않는 듯 의심스러우면서도 알 수 없다는 표정과 목소리로 서로 대화를 나눴다.

"아무래도 뭔가 보여줘야 될 것 같군."

김태호 소위는 담배갑과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라이터에 시선이 집중된 것을 확인한 김태호 소위가 불을 붙였다. 반짝이는 작은 물체에서 불이 생겨나자 인디언들 모두는 놀라움의 숨을 토해냈다.
김 소위는 피식 웃으며 불을 껐다 켜는 등을 여러 번 반복해본 후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불을 붙였다.
옛날 여자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 배웠다가 어느새 버릇이 된 담배 연기 모양 만들기를 선보이자 신기한 듯 허공을 떠도는 담배 연기의 형상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김태호 소위는 새 담배 하나에 불을 붙여준 후 추장에게 건네주었다. 추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필터를 물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연기를 내뿜었다. 추장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른 인디언에게도 건네주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김태호 소위는 플래시를 꺼내들었다. 플래시에서 불빛이 뿜어져 나오자 모두는 깜짝 놀랐다. 김태호 소위는 플래시로 이곳저곳을 비추어 보이면서 그들이 자신들을 태양을 통에 담아 다니는 사람들로 각인하길 원했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추장과 인디언들은 김 소위와 최 하사를 경외심 비슷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김태호 소위는 라이터를 추장에게 선물로 바치고 이곳에 잠시 머무를 공간을 할당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김태호 소위와 최현성 하사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몸짓으로 의사 표명을 열심히 해 보인 결과 추장이 좌측에 앉은 인디언에게 무어라 말하였다.
그 인디언 전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추장은 고개를 돌려 김태호 소위와 최현성 하사를 각각 바라본 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의미는 물론 수용의 의미였다.


인디언들이 자신들을 위한 천막을 준비하는 동안 김태호 소위는 공터에 앉아있는 소대원들에게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모두 보면 알겠지만, 우린 과거에 와있다. 타임 슬립이라는 현상으로 수수께끼의 기상 현상, 알 수 없는 지역 등등. 모든 것은 확실하다."

김태호 소위의 말에 최현성 하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소대원들은 절망적 표정과 함께 고개를 푹 숙이며 신음성을 토해냈다. 몇몇은 아예 울먹이기 시작했다.
김태호 소위는 그런 소대원들이 안타까웠으나 달래줄 여유 따윈 없었다. 상황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상상을 초월했다.

"더 큰 문제는, 일반적 SF소설과 달리 우린 과거로 타임 슬립하면서 우리나라의 과거가 아닌 다른 나라의 과거로 내던져졌다는 것이다. 인디언들을 보면 알겠지만 우린 북아메리카 대륙에 와있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단순히 과거로 온 것도 충격적인 사실이었지만 자신들과 전혀 관련이 없는 신대륙의 과거에 와있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과거의 고향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이곳에서는 아무런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우린 여기가 어딘지도 모른다. 대평원 지역인지, 남동부 지대인지, 북동부 지역인지. 심지어는 정확한 연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인디언 마을을 관찰하면서 말이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는 16세기 이전이 아닐까 추정되지만 이마저도 확실하지는 않다."

김태호 소위는 혼란을 넘어 패닉 상태 직전의 소대원들에게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알려주었다.
먼저 현지에서 배를 어떻게든 건조해내 한국으로 가보는 것. 여기가 바다와 가까운 곳인지, 내륙 지방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과 자칫하면 대양 한가운데서 죽어버릴 수 있다는 심각한 위험이 있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냥 인디언들과 함께 평화롭게 사는 것. 가장 손쉬운 선택이었지만 역시 인디언들을 쉽게 믿을 수 없다는 점이 위험 요소였다. 또한 모든 소대원들이 순순히 이 시대에 적응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여전히 소대원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좋아. 일단 무장 상황부터 확인해보자."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김태호 소위는 파악해낸 현 무장 상황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김 소위를 포함해 병력 24명. 전원이 K-2 소총을 가지고 있었으며 1인당 탄창 4개, 수류탄 2개를 소지하고 있었다. 김태호 소위가 K-5 권총 하나를 소지하고 있는 점을 빼면 별로 특색 있는 화력은 아니었다.
미묘한 숫자에, 미묘한 화력. 김태호 소위는 소대원들에게는 말하지 않고 묻어둔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운다는 선택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어떡한다.

"이제 어떡한다?"

그가 조용히 중얼거림과 동시에 인디언 전사가 달려왔다.


비슷한 크기의 천막이 좌우 대칭으로 두 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최현성 하사가 안을 살펴보니 대충 10명 정도는 넉넉히 잘 수 있는 크기였다.
김태호 소위는 추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근엄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움직이자 인디언 전사 몇몇이 식량으로 생각되는 가죽 포대를 천막 앞에 갖다 놓았다.
물론 확실히 믿을 수 없어 전투식량으로 밥을 먹을 생각이었지만 그런 속내를 감춘 채 김태호 소위는 미소와 함께 또 한번 감사의 뜻을 표했다.


저녁 시간이었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입맛이 없어보였다. 김태호 소위도 애써 먹으려 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저 멀리서 호기심에 찬 인디언 꼬마 몇몇이 구경하고 있었다. 아니, 호기심 많은 건 아이나 어른이나 별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럭저럭 저녁 식사가 끝난 후 김태호 소위는 조각난 4개 분대를 2개 분대로 재편성했다. 그리고 1분대장은 그대로 1분대장이, 2분대장은 3분대장이 맡도록 했다.
물론 2개의 천막은 각 분대마다 할당했다. 김태호 소위는 피곤한 기색으로 3시간마다 불침번을 세우도록 하고 모두 잠자리에 들도록 했다.
첫 불침번은 김태호 소위와 최현성 하사가 자진해서 서기로 했다.
둘은 말없이 청명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별과 달이 수놓은 광경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김태호 소위는 하늘에서 시선을 돌렸다. 절대적 고독감과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높이를 알 수 없는 하늘은 자신들을 내려다보며 군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작고 별 영향력 없는 존재인지를 보여주며 시간과 공간의 어긋난 곳에 서있는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사실, 난 내심 기뻐했었다.”

김태호 소위는 타오르는 모닥불의 움직임에 눈을 떼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과거의 한국으로 왔을지도 몰랐다는 생각에...새로운 미래를 우리들이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최현성 하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애써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하지만 이 상황은 대체! 대체 뭐냔 말이야! 제기랄!”

김태호 소위의 고함 아닌 고함과 동시에 어디선가 늑대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천막 안에서는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와 욕설이 들려오는 듯 했다. 모든 소대원들은 감정적으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최현성 하사는 체념과 절망이 반반 섞인 채였다.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으며 애써 소대장을 위로했다.

“기운 내십시오. 그래도 인디언이 이렇게 환대해주니 뭐.”

“아니! 인디언은 믿을 수 없어. 그래, 믿을 것은 오직 우리뿐이다.”

김태호 소위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눈을 부릅뜬 채로 그는 천천히 되뇌었다.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을 지켜보는 모든 것들에게.

“이런 기회를 그냥 썩힌다고? 말도 안 되는 개소리. 두고 봐, 우린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한국으로. 우리의 조국으로. 과거의 조국으로....”

잦아드는 모닥불과 함께 두 개의 그림자는 어둠 아래로 잠겼다.


공기를 진동시키는 총성과 함께 사슴은 쓰러졌다. 정확히 머리 부분에 명중시킨 최현성 하사는 내심 기분이 좋지 않으면서도 짜릿한 감각을 느꼈다.
사냥을 따라 나온 다른 소대원들도 적당하게 살이 찐 사슴을 잡았다.
쓴 총알은 1인당 2발 남짓. 그와 바꿔 잡아들인 수확물은 전 소대원이 2주는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다.
장소 안내 차 따라 나온 인디언 전사가 입을 딱 벌린 채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특히 천둥을 내뿜는 검은 막대기를 쳐다보며 경외 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최현성 하사는 씩 웃으며 이제 돌아가자는 뜻의 제스처를 취했고 인디언 전사는 공손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허둥지둥 그들을 안내했다.


사냥을 마친 최현성 하사는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몇몇 적응력 빠른 소대원들은 인디언 처녀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최현성 하사는 그 녀석들을 잠시 노려보고는 다시 길을 걸어 나갔다. 아이들 몇몇이 이리저리 뛰어놀고 있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생기는 흐뭇한 광경이었다. 이 시대가 자신들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여기서 사는 것도 괜찮은 선택일 것이다.

“이 시대가 우리를 환영한다면....말이지”

최현성 하사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그는 어느 곳에 나란히 걸린 생선들을 발견했다.
생선! 그는 놀라 혹시나 해서 냄새를 맡아 보았다. 바다 비린내가 났다.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다는 의미였다.
때마침 추장과의 만남을 마치고 최현성 하사를 찾던 김태호 소위가 다가왔다. 그 역시 최현성 하사가 발견한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급히 뛰어왔다.
생선. 틀림없는 바다 생선이었다.
김 소위는 지나가던 인디언 한 명을 붙잡고 생선에 대해 다그치듯 물었다. 당연히 못 알아들었지만 김태호 소위의 행동에서 묻어나는 뜻을 대충 유추해낸 그는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을 따라 들판 너머, 그리고 작은 언덕 너머로 계속 가면 찾을 수 있으리라. 바다를.


"바다가 있다."

점심 식사를 끝마친(다행히 소대원들의 식욕과 기분은 어제와 비교해 상당히 나아져 있었다.) 소대원들에게 김태호 소위가 말했다. 바다가 있다는 뜻은 그들이 배를 타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과거의 한국으로.

“여기는 아마 캘리포니아 부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부족은 아마도 캘리포니아 수렵 채취 부족이고.”

소대원들은 묵묵히 김 소위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디언에게 얻어낸 정보를 토대로 우리는 여기서 바다가 그다지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말은 곧, 바다를 통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소대원들은 돌아간다는 말에 동요한 듯 웅성거렸다.

“물론 돌아 가봤자 우리가 아는 한국은 없다. 과거의 한국만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돌아갈 수도 없다. 가다가 죽을 수도 있다.”

잠시 말을 멈추고 소대원들의 반론을 들을 시간을 주었으나 여전히 조용하자 그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그냥 평범하게 죽을 것이냐? 아니다! 우린 해변으로 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일단 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서 왔다. 미래의 한국에서 온 미래인이다! 바다를 건너는 원양 항해선 정도야 우리들이 시간과 힘을 들이면 어렵기는 해도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또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너희들은 여기서 인디언들과 함께,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그냥 쓸쓸히 역사의 미아로서 묻혀서 지내고 싶은 것인가?”

“아닙니다!”

김태호 소위의 열정적 연설에 소대원들의 마음은 점차 고조되면서 함께 외쳤다. 최현성 하사는 그러한 광경을 불안한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간단한 비밀 투표 결과 3소대는 김태호 소위의 제안에 따라 주둔지를 해변가로 옮겨 원양 항해선 건조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그와 같은 결정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김태호 소위는 박수를 쳤다. 메마른 박수 소리에 소대원들은 잠시 당황했으나 곧 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최현성 하사는 과연 이 박수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천천히 생각했다.


그들이 타임 슬립하고 2번째 밤이 지난 다음 날, 모든 소대원들은 떠날 준비를 마쳤다. 각 소대원들은 인디언이 제공해준 물품들과 말린 사슴 고기, 과일이 가득 담긴 가죽 포대를 하나씩 짊어지고 있었다. 그 대신 추장은 김태호 소위에게 군용 대검과 손목시계를 선물 받았다. 추장의 얼굴은 기쁨의 기색을 조금 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들이 출발할 때 대부분의 인디언들이 환송해주었다. 몇몇 인디언 처녀들은 약간 슬픈 기색으로 환송했는데 최현성 하사는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매우 궁금해졌다.
추장이 붙여준 길 안내원은 과묵했지만 그 자신의 임무는 충실히 해냈다.
인디언 마을을 출발한지 2시간 후에 그들은 공기 너머로 맡을 수 있는 바다 냄새와 시원한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울창한 숲 너머로는 모래가 곱게 깔린 해변이 펼쳐져 있었다.
최현성 하사는 길을 안내해준 인디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로 마을로 돌아갔다.
해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김태호 소위는 당분간 여기서 배를 건조하면서 지내기로 결정했다. 아무리 원주민들이 친절하게 대해줬다고는 해도 본질적으로는 믿지 못할 존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 사이를 지나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여기가 새로운 대한민국의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김태호 소위의 가슴은 뭐라 말하기 힘든 감정으로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좋아, 이제부터 바빠질 거니까 어서 서둘러라!”

김태호 소위의 명령에 따라 3소대원들은 인디언들에게 얻어온 천막을 쳐 거주지를 만들었다.
휴식 차원에서 남은 전투식량과 사슴 고기로 푸짐하게 배를 채운 소대원들은 불침번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편안한 심정으로 잠이 들었다.


날이 밝으면서 고요하기만 했던 해변가는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했다.
인간의 거친 손길이라고는 인디언 정도 밖에 경험해보지 못한 숲에게 있어 실로 가공할만한 작업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디언들에게 얻은 투박한 도끼와 돌을 직접 가공해 만든 수제 돌도끼로 소대원들이 나무 밑둥을 연신 찍고 있었다. 너무나 빈약한 장비였지만 군대 특유의 효율적 작업으로 진척 속도는 예상 외로 빨랐다.
손재주가 좋은 소대원들은 한쪽에서 지푸라기 대용으로 발견한 풀을 가지고 밧줄을 만들고 있었다. 한 소대원은 나무껍질을 가지고 새끼를 꼬는 시도를 하다가 잘 안되자 얼굴을 찡그리며 다른 나무껍질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밧줄들은 배의 재료가 될 나무들을 고정시켜줄 중요한 요소였다. 물론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아교가 하겠지만 기본 틀은 밧줄이 잡아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김태호 소위와 최현성 하사는 모래사장과 숲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언덕 부근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 소대원이 원양 목선의 건조에 매진 중입니다. 현재 재료 확보의 경우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문제는 설계도인데.....”

최현성 하사는 탁자라고 하기도 뭐한 평탄한 바위 위에 펼쳐진 동물 가죽을 쳐다보았다.
공학이나 산업디자이너, 조선토목 등등 이공계 계열 녀석들을 쥐어짜서 급조해낸 목선의 설계도였다. 설계도라고는 해도 종이와 필기구가 없어 평탄하게 다진 동물가죽 위에 목탄으로 그린 처절한 수준이었지만.
최 하사는 여전히 미심쩍은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과연 제대로 될 것인가?
김태호 하사는 그런 최 하사와는 정반대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쉽지만 이 정도만 해낸 것도 감지덕지할 정도였다.

“아주 훌륭해.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 소대원이 단결하여 잘해내고 있군. 이 속도라면 1개월 안에 윤곽이 드러나겠어.”

“글쎄요. 너무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건 아니신지.”

김태호 하사는 혀를 차며 그를 노려보았다.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라. 우린 미래인이다. 신으로부터 선택받아 과거 개변의 기회를 손에 얻은 선택받은 이들이란 말이다. 현성 하사, 이건 운명이야. 이 난관만 넘기면 모든 문제는 손쉽게 해결 될 것이네!"

김태호 하사는 해변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자랑스러우면서도 사뭇 감격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장기 항해를 위한 식수와 식량 확보를 위해 활동 중인 그룹, 벌목 작업 중인 그룹 등등 그 모습 하나 하나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이제 오욕과 굴욕에 찬 조국의 역사는 없다. 전 세계가 우러러 볼 것이며 그 이름을 찬양할 위대한 대쥬신제국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새로운 조국을! 바로 여기서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것이다!”

김태호 소위의 원대한 이상과는 달리 최현성 하사는 모든 것이 피곤했다. 정확한 시간대도 알 수 없는 미지의 과거에서 섣불리 움직이는 것은 소대원들과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만일 김태호 하사의 말대로 이것이 운명이라면 그냥 이 세계에 녹아드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소대장의 명령에 반기를 든다는 것도 그는 거부감이 들었다. 아니, 소대장 말대로 자신이 너무 현실 순응적이며 소극적인 것인지도 몰랐다.
최현성 하사는 그렇게 애써 자기 자신을 달래며 벌목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숲으로 걸어갔다.


우연은 실로 기막힌 감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신의 장난이라고 할 만큼.
그들이 해변가에 당도했을 때 모든 소대원은 바다에 별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김태호 소위와 일부는 숲 속에서, 몇몇은 벌목 작업 같은 각자만의 일로 인해 해변가를 등진 채 그 시선을 바다로 향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소대원들이 바다를 등진 채 숲, 해변과 숲의 경계, 그 경계에 가까운 해변가에 두런두런 모여 있을 때 그들은 당도했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야만인이며 도망자, 약탈자였다. 그리고 ‘얼음의 나라’에서 도주해온 범죄자들은 해변가에 진을 친 정체불명의 원주민들에게 먼저 화살부터 쐈다.


나무의 잔가지를 도끼로 정리하던 한기일 상병은 공기를 날카롭게 찢는 소음을 듣고는 뭔가 싶었다.

“야, 너 이상한 소리 못 들었.....”

한 상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김 일병을 가리키며 입만 벙긋벙긋 거렸다.

“이...임마, 너 목에!”

날카로운 화살촉이 김 일병의 목을 꿰뚫고 삐죽하게 솟아나와 있었다.
김 일병 역시 잠시 상황 파악을 못하다가 나오지도 않는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한기일 상병이 당황해 분대장을 찾으려는 순간 짐승의 울부짖음을 연상케 하는 고함이 해변가에서 들려왔다.

“GAAAHHH!”

해변가로 시선을 돌린 그는 입을 딱 벌리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배 1척이 해변에 접안해 있었으며 저 멀리서는 대충 봐도 수십명은 넘는 남자들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건장한 체격에 흰 피부, 금발과 붉은 머리, 갈색 빛 머리카락을 치렁치렁하게 기른 채 달려오는 그들은 중세인의 차림새였다.
저런 복식과 생김새로 북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딜 인종은 오직 하나였다.
바이킹!

“커억!”

바로 앞에서 엉거주춤 서있던 소대원이 가슴팍에 도끼가 박힌 채 쓰러졌다. 한 상병은 서둘러 소총을 꺼내들어 겨누었으나 달려오는 바이킹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뭐라 말하기 힘든 기묘한 소리와 함께 창이 한 상병의 복부에 그대로 파고들었다.

“우아아아악!”


비명성을 들은 김태호 소위가 숲 속에서 달려 나왔다.
그 역시 그 엄청난 광경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가 한 상병이 복부에 장창이 박힌 채 쓰러지는 모습에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죽여 버려!”

쇄도해오는 바이킹들을 향해 소대원들은 급히 총을 겨누었다. 순간 대부분의 소대원들은 난생 처음으로 사람을 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망설임을 느꼈으나 김태호 소위가 말 그대로 바이킹 5명을 쓸어버리자 모두 전투의 광기에 말려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격렬한 총성이 해변가를 뒤덮었다. 선두로 달려오던 바이킹들은 벌집이 된 채 전멸해버렸고 일부 관통한 총알은 뒤에서 달려오던 바이킹마저 덮쳐들 정도였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모두 쏴버려!”

고함을 내지르던 김태호 소위는 문득 자신의 눈앞에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물건이 있음을 깨달았다. 바이킹들이 타고 온 저 배!

“저 배를 탈취한다! 저 배를....크윽!”

귀를 거슬리는 금속성과 함께 투박하게 제련된 칼날과 총신 부분이 맞부딪쳤다. 본능적으로 칼날을 막아낸 김태호 소위의 코앞에 덥수룩한 수염과 거친 숨을 내몰아쉬는 바이킹의 푸른 눈동자가 똑똑히 보였다.
우리들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김태호 소위는 문득 그런 생각과 함께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를 느꼈다.

“우아아아아!”

짐승과도 같은 울부짖음과 함께 바이킹의 칼을 쳐내고 개머리판으로 그대로 내리쳤다.
경련하며 쓰러지는 녀석의 머리에 김태호 소위는 총구를 겨누고 그대로 쏴버렸다.
피가 얼굴에 튀었다.


총격을 받은 바이킹이 중앙에 쇠 돌기가 달린 원형 나무 방패로 총알을 막으려 했으나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바이킹 전사들은 통일된 복장이 아닌, 여러 복장이 뒤섞여 있었다. 투구와 사슬 갑옷을 걸친 전사들도 있었지만 가죽 옷과 가죽 모자만을 걸친 이들도 있었다.
물론 둘 다 방탄에는 별 효과가 없었지만.
동물의 이빨을 목걸이로 걸친 한 전사가 털가죽 모자만을 걸친 채 철제 칼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복부에 무수한 총상을 입고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나자빠지자 뒤에서 달려오던 녀석이 장창을 그대로 내던졌다. 무지막지한 힘이 실린 그 창의 일격은 아슬아슬하게 최현성 하사의 어깨 죽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크윽!”

불에 데인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3점사로 창을 던진 녀석 먼저, 그 옆의 녀석, 그 뒤의 녀석 순서대로 다급히 총격을 가했다.

“아아악!”

비명성이 들린 쪽에는 바이킹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난도질당하고 있는 소대원이 보였다. 피범벅이 된 얼굴 때문에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의 소대원이었다.

“제길!”

총을 단발로 맞추고 하나하나 쓰러뜨렸지만 피가 흥건한 채 쓰러진 녀석은 더 이상의 움직임도, 비명도 보여주지 않았다.


불꽃이 총구에서 뿜어져 나왔다. 격렬한 총성과 함께 이전웅 상병의 K-2 소총이 흩날리는 탄피와 화약 연기와 함께 바이킹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이야야아아!”

이전웅 상병은 고함을 내지르며 총을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주변에는 바이킹 전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처음 바이킹들이 육박해올 때 자기도 모르게 본능으로만 움직였다가 소대원들 품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전후좌우 오직 바이킹만이 있다는 사실에 공포와 전율을 느끼며 서둘러 빠져 나오려 이곳저곳 총격을 가하게 된 상황인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돌파하면 될 것 같았지만 그 얼마 안 되는 거리가 지금은 너무나 멀어보였다.


“저 바보가!”

허군호 병장은 바이킹 무리에 둘러싸인 채 이리저리 도망치고 있는 한 소대원을 보고 고래고래 고함을 외치기 시작했다.

“수류탄 던져! 수류탄! 수류탄 던지고 이탈하라고!”


이전웅 상병은 허군호 병장이 필사적으로 외치는 목소리를 듣고는 조끼를 더듬었다.
순간 자기보다 머리 하나가 커 보이는 바이킹 전사 한 놈이 칼을 휘두르며 돌격해왔고 김전웅 상병은 아슬아슬하게 피해냈지만 균형을 잃고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크아악!”

왼쪽 팔뚝을 강타하는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더듬어보니 화살이 박혀있었다.

“비...빌어먹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이전웅 상병은 뒤에 남아있던 바이킹 몇 놈에게 남아있는 탄알을 모두 쏟아내고는 서둘러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바이킹들은 약간 질린 듯한 표정으로 거리를 띄운 채 조심스레 접근하고 있었다.

"이 개새끼들...개새끼들..."

이전웅 상병은 떨리는 두 손으로 수류탄 하나를 꺼내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욕설을 반복하면서 안전 클립을 제거하고 안전손잡이를 꾹 움켜쥔 채 왼손 검지손가락으로 안전핀을 잡아 뽑았다.

"죽어, 이 개....으아아아악!"

그는 정말이지 이를 꽉 깨물고 수류탄을 내던지려고 했었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그의 오른손목에 화살 하나가 박히기 전까지는.
온몸을 엄습하는 고통에 순간적으로 수류탄을 땅에 떨어뜨린 이전웅 상병은 뒤늦게 자신이 저지른 짓을 깨닫고는 비명성을 내질렀다.
절규에 가까운 비명성은 얼마 안가 공기를 진동시키는 폭발음에 묻혀버렸다.
이전웅 상병이 서있던 자리에는 검은 연무와 핏빛 파편만이 널려 있을 뿐이었다.


김태호 소위가 던진 마지막 수류탄이 폭발을 일으키면서 바이킹 5, 6명을 쓰러뜨렸다. 전투 상황은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인한 초기 상황에서 현대식 무기에 힘입은 3소대에게 바이킹이 유린당하고 있는 상황으로 180도 바뀐 뒤였다. 바이킹들은 여전히 화살을 날리는 등의 공격 행위를 계속하긴 했으나 서둘러 도망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바이킹들은 배로 도망치고 있었다. 배로.

“소대장님.”

어깨에 피를 흘리고 있는 최현성 하사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김 소위의 눈은 바이킹의 배를 보고 있었다.

“소대원들의 피해가 큽니다.”

여전히 김태호 소위는 공허한 눈길로 푸른 바닷물을 헤치며 배로 뛰어드는 바이킹들을 바라보았다.

“소대장님?”

“배를 탈취한다.”

최현성 하사는 강한 충격을 받고는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라고요?”

“배를 탈취한다고 했다. 우리들의 화력이라면 손쉽게 가능한 일이다. 소대원들을 재편성하고 공격한다.”

“이런 젠장!”

최현성 소위가 김태호 소위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그의 목소리는 실로 피를 토해낼 것과도 같은 처절한 음색이었다.

“소대원들의 피해가 크다고 이 개자식아! 여긴 한국이 아니야! 여긴 미국이라고! 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 우린 돌아갈 수 없어! 미래의 한국에도, 과거의 한국에도!”

지금까지 쌓여온 분노를 모두 토해낸 최현성 하사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박동하고 있었으며 온몸의 피는 분노로 뜨겁게 끓어올랐다.
김태호 소위는 바다 저 멀리 떠나가는 바이킹의 배를 계속 응시하다가 그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눈을 감았다.
전투 전과 마찬가지로 해변에는 파도가 잔잔하게 치고 있었다. 그 파도 소리는 너무나 평화로웠다.


“몇 명 죽었냐...”

최현성 하사는 침통한 얼굴로 나란히 눕혀진 사망자들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피 묻은 군복으로 상체를 덮은 그 모습은 몇 번이고 봐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세어 봐도 그의 머리는 본능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예, 1분대는 2명 사망했습니다. 부상자는 3명 경상, 1명 중상입니다.”

“2분대는 3명 사망했고 2명 경상입니다.”

최 하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쉽게 무너져서는 안 되었다.
소대장이 생각났다. 이제 그에게 있어 김태호 소위는 더 이상 소대장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소대장은 미친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전 소대원을 위험의 중심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자신과 소대원들도 김태호 소위의 망상에 찬 계획에 거의 순순히 따른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다.
아, 그렇군. 최현성 하사는 깨달았다.
우리들 역시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에 사로잡힌 것이었어.

“그리고...저희들은 아무래도 10세기 초나 중반에 온 것 같습니다. 바이킹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이 그쯤인 것으로 봐서는...”

최현상 하사는 바이킹의 시신을 쳐다보았다. 총상으로 한 쪽 눈이 날아간 그 녀석을 보며 그는 쓰게 웃었다.

“5명의 목숨 대신 시대 정보라는 건가...하하하”

“오히려 더 잘 된 것일 수도 있지.”

최현성 하사는 바로 뒤에서 김태호 소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분노에 찬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지금 잘 되었다고 하는 겁니까?”

김태호 소위는 분노에 찬 최 하사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10세기라면 고려 시대이다. 우리는 역사 개변에 있어 유리한 위치를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최현상 하사는 분노로 몸을 떨며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죄 없이 죽어간 5명의 장병들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집니까? 대답해보시죠!”

김태호 소위는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다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건 나의 잘못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어. 어쩔 수가 없는 일이...”

“이었다고요?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인디언 마을에 머물렀으면 바이킹과의 전투는 애시당초 벌어지지도 않았을 겁니다. 여긴 한국이 아닙니다. 우린 대한민국 육군 제7사단 수색대대 3소대라는 집단에 더 이상 구속받지도 않습니다. 알겠습니까?”

“인디언 마을에 가서 부대를 재정비해야 된다는 것은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최현성 하사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뭐요? 또 그 잘난 역사 바꾸기 말입니까? 대쥬신제국? 이게 당신이 원하는 거에요? 미안하지만 당신이 틀렸어! 이 빌어먹을 자식아!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 시대에, 그리고 이 장소에 적응해 평범하게 살아남는 것 그것뿐이야!”

김태호 소위가 분개해 권총을 뽑아들었다.

“난 너의 상관이다! 3소대의 소대장 김태호 소위란 말이다!”

김 소위가 권총을 뽑아든 것과 동시에 차가운 금속성 소음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죄송하지만 소위님. 그 총 내려놓으십시오.”

1분대장이 흉흉한 눈빛으로 총을 겨눈 채 말했다. 아니, 그를 포함한 6명의 소대원들이 총을 겨누거나 최현성 하사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중상자를 뺀 나머지 소대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갈등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자랑스러운 3소대원들! 우리는 위대한 대한민국 제7사단 수색대대의 소속원들이다. 질서에 반기를 들고 상관에 총을 겨누는 저런 무질서한 집단에 동조할 생각인 것이냐!”

소대원들은 여전히 주저주저하며 소대장과 부소대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결국 8명의 소대원들이 김태호 하사에게 다가갔고 나머지 2명이 최현성 하사에게로 갔다.


중상을 입은 소대원은 정용준 이병이었다. 정 이병은 발견 당시 오른팔 부분이 거의 찢겨 나가다시피 할 정도로 심하게 잘려나가 있었으며 등에는 화살 두어 발이 꽂힌 채 쓰러져 있었다. 임시변통으로 대강 만든 들것 위에서 그는 여전히 신음성만 낼 뿐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소대원들은 묵묵히 인디언 마을을 향해 길을 걸어 나갔다. 최현성 하사는 황폐해진 표정의 그들에게서 심각한 심정적 고통과 절망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무덤을 생각했다. 타국에서, 그것도 태어나기 몇백년도 전인 과거의 땅 아래 차갑게 잠들어있는 소대원들을.
무덤을 만들면서 사망한 소대원의 장비는 모두 챙겼다. 죽은 소대원들의 경우 3명을 제외하고는 총도 제대로 못 쏴보고 죽었다. 그들을 제외한 모든 소대원들은 전투 당시 탄창 하나를 완전히 비웠고 몇몇 소대원들은 두 번째 탄창도 소모했다. 3명의 소대원들은 수류탄 전부를 다 써버렸고....
최 하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 그런 게 뭐가 중요하지?
그는 무의식적으로 현재 소대원들의 탄약 상황을 계산해나가고 있었다. 최 하사는 그런 자신이 너무나 경멸스러워 못 견딜 지경이었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 정 이병은 숨을 거두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의 인디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은 무덤을 만들었다.


두 개의 그룹으로 분열된 소대는 인디언 마을에 돌아와서도 그대로였다. 원치 않은 결과였지만 별 도리가 없다고 최 하사는 생각했다.
어차피 탈출구가 없는 이곳에서 오직 시간만이 해결할 문제라는 자조적 핑계와 함께 그는 체념해버렸다. 또한 김태호 소위와 최현성 하사, 이 둘은 상호 간에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함과 동시에 우연히 마주친다고는 해도 별 다른 대화는커녕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소대원들의 상황도 엇비슷했다. 가끔 두 그룹의 소대원끼리 싸우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는 충돌은 없었다. 결론적으로 두 그룹은 모두 긴장과 의심, 불신 속에서 서로를 노려만 보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상호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던 어느 날, 정확히는 타임 슬립하고 6번째 밤이 지난날의 오전 10시 즈음에 김태호 소위가 최현성 하사에게 다가왔다.
고기를 훈제 하고 있던 최현성 하사는 그가 오는 둥 마는 둥 여전히 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찾아온 김태호 소위였다.

“원양 항해 계획은 취소하기로 했다. 너무나 많은 위험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최 하사는 여전히 아무런 태도의 변화라던가 감정의 변화도 보여주지 않은 채 고기를 잘라냈다.

“그리고 새롭게 생각해낸 계획이 있다. 이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해도 충분한 준비만 있으면 안전하고 확실하게 갈 수 있다.”

새로운 계획. 최현성 하사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원망과 분노와 같은 온갖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베링 해협을 횡단해 러시아 쪽으로 들어가면 시간은 오래 걸려도 무사히 갈 수 있다.”

최현성 하사는 조금 전까지 작업하던 결과물에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김태호 소위를 똑바로 직시했다.

“그렇습니까? 멋진 계획이군요. 맘대로 하십시오.”

그는 K-2 소총을 집어 들어 어깨에 메고 조용히 걸어 나갔다. 아니, 세 네 걸음을 걸어 나가던 최 하사는 몸을 돌려 분노에 찬 얼굴로 외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몇 명 죽일 겁니까? 죽는 건 당신 혼자로 끝내고 다른 이들은 그만 끌어 들이길 희망합니다! 제발 부탁하는데, 정신 좀 차리시죠!”

그렇게 일갈한 최 하사는 침을 뱉었다. 미련 없이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김태호 소위는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천막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최 하사는 K-2 소총을 바닥에 내던지면서 주저앉았다.
그는 멍한 눈으로 생각에 빠졌다. 자신이 이끄는 소대원들은 인디언들과 상당히 친해진 상황이었다. 어느 녀석은 곧 인디언 처녀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며 싱글벙글 하기도 한다.
이제 융화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간단한 사실을 그들은 언제 정신을 차릴 것인지.
그는 바닥에 내팽겨진 K-2 소총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가진 힘의 상징이자 현대 문명의 집결체적 물건이었다. 이제는 가끔 사냥에나 쓰이고 있었고 일부 소대원들은 가까운 미래를 생각해 투창이나 활을 배우고 있었다. 언젠가는 사라질 물건이었지만 유일하게나마 자신들이 미래인이라는 사실을, 미래에서 온 한국군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물건이었다.
순간 최현성 하사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으로 타임 슬립한 후 총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총기란 게 꾸준히 관리를 해주어야 되는 정교한 물건이었지만 그들에게 총기 수입유는 한 방울도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최근의 급박한 상황 때문에 총기 관리에 신경을 써주지 못한 점이다. 총기 수입유 대용으로 동물 기름 같은 것으로 총을 닦기는 했지만 그 자신도 2일 전에 한번 한 것이 다였다. 다른 소대원들의 상황은 어떨지 눈에 환히 보였다.

“흠.”

생각해보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관리를 소홀히 한 K-2 소총은 고장이나 오발의 위험성이 상당해졌을 것이다. 자칫하면 어느 소대원이 다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차후에 이야기 해야겠군. 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천막 문을 거의 박차다 시피 하며 어느 소대원이 들어왔다.
겁 없이 마을 주변을 이곳저곳 신나게 돌아다니는 허군호 병장이었다. 가장 인디언처럼 동화된 모습을 보여줘 내심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녀석이기도 했다.

“하사님! 제가 본 걸 믿지 못하실 걸요?”

허 병장이 흥분과 경이, 놀라움이 가득 찬 눈동자를 빛내며 외치자 그는 약간 심술궂게 웃으며 반농담조로 되물었다.

“흠, 뭔데 그러냐? 거인이라도 봤어?”

허군호 병장은 땀에 뒤범벅이 되었지만 너무나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날, 허군호 병장은 날이 밝자마자 오늘도 상쾌한 공기를 한껏 들이쉬며 K-2 소총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가보지 않은 남북쪽 방면으로 가보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바이킹과의 전투에서 기념품으로 챙긴 양날검을 허리에 차고 보무도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그는 이 시대에 아직 말이 없다는 것이 정말이지 아쉬웠다.
느긋하게 걸어오면서 정확히 2시간 23분 후에 목적지에 도착한 허 병장은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파진 그는 적당한 나무 그늘에 늘어지게 누워서 과일과 말린 고기를 꺼내 늦은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을 벌컥 벌컥 들이키면서 목을 시원한 만족감으로 채운 그는 곧 포만감과 함께 느긋하게 하늘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하늘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기분 좋게 눈이 감겨진 순간 하늘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선잠을 방해하는 제트기 특유의 소음에 그는 짜증이 났다. 수원이 고향인지라 저런 소음은 정말 지겹도록 들었....

“비행기?”

허군호 병장은 잠이 확 깼다. 지금은 분명 인디언이 사는 과거의 북아메리카였다. 비행기가 나올려면 아직 머나먼 미래의 일이었다. 그는 급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소음을 내는 물체가 절대 비행기가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로봇이었다. 하늘을 비행하는 정체불명의 거대로봇!
너무나 비현실적인 광경에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그것은 상공을 천천히 날면서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허군호 병장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뛰어나갔다.

“믿을 수가 없군!”

허 병장은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며 달려갔다. 상공을 천천히 날던 그것은 굉음과 함께 천천히 하강하고 있었다. 가까운 지점에 착륙을 할 것이 분명한 움직임이었다.
그의 눈앞에 마침 몸을 숨기기 매우 좋은 언덕이 보였다. 허 병장은 바닥에 바짝 엎드리면서 호흡을 진정시켰다.
메마른 갈증이 느껴졌지만 물을 마실 생각은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허군호 병장의 모든  감각은 그 로봇에게 집중되어있었다.
로봇은 언덕 아래에 위치한 목초지 위에 잠시 정지해 있었다. 그리고 공기를 뒤흔드는 소음과 함께 로봇의 발바닥과 등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섬광이 점차 옅어졌고 동시에 지면과 상공의 거리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그 속도를 줄이면서 하강하던 그 로봇은 굉음과 함께 바닥에 착지했다.
그제서야 허군호 병장은 그 로봇의 얼굴이 라던가 세부적인 모습을 좀 더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얼굴 형태는 대략 붉게 빛나는 두 개의 날카로운 눈과 얼굴 부분이 수직으로 쭉쭉, 촘촘히 그어진 검은 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람의 귀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좌우 대칭의 뿔이 달려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는 자세를 취한 로봇의 몸에서 기묘한 소음이 발생했다.
허군호 병장은 그 소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로봇의 흉부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한 돌출부가 상하로 분리되면서 그 안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윤곽만 확인할 수 있는 그 사내는 로봇의 왼손에 올라탔고 로봇은 천천히 그 손을 바닥에 뻗고 있었다.
단단한 대지에 발을 붙인 사내는 천천히 걸어 나가면서 한 손에 든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붉은 색 꽃. 장미 한 송이였다. 사내는 장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장미들을 내려다보며 무언가 생각에라도 빠진 듯 묵묵히 서있었다.
허군호 병장은 그 광경까지 보고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가슴은 흥분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설렁설렁, 느긋하게 걸어올 때와는 다르게 전력으로 질주해나갔다. 인디언 마을에 도착해 최 하사를 만나기까지 고작 35분 정도 밖에 안 걸릴 정도로.


“음.”

최현성 하사는 진지한 얼굴로 허 병장의 얘기를 분석해나갔다. 로봇 대목이 나왔을 때는 ‘아, 이놈이 드디어 전투피로증에 걸렸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허 병장이 그런 거짓말을 늘어놓거나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또한 말이 안 되는 얘기라고는 해도 따지고 보면 지금 자신과 소대원들이 과거로 내던져진 것도 논리적으로만 보면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허 병장의 얘기에 등장한 사내의 행동이라던가 침착한 태도에 주목했다. 만일 자신들이 휘말린 타임 슬립 현상이 어느 시대에서는 보편 상용화된 시간 여행 기술로 정착되었고, 그 시대에서 왔다고 추정되는 그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로봇(!)을 끌고 과거로 잠시 놀러온 것일 수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와 접촉한다면 무사히 귀환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으음....”

최 하사는 신음성을 나지막이 토해냈다. 하지만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한 결과였다. 만약 그가 ‘미개인’을 사냥하기 위해 여행 온 것이라면?
미래의 윤리 관념은 현재와 다를 수 있었다. 모 아니면 도인 셈이었다.

“아, 젠장!”

최현성 하사는 머리를 북북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하게 있던 허군호 병장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이렇게 시간만 보내는 것은 무의미해. 좋아, 내가 직접 가서 그와 접촉해보겠어. 위험 따위는 이제 상관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아,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길 안내를...”

“아니!”

최현성 하사는 허 병장의 말을 딱 자르며 외쳤다.

“그렇다고 너까지 위험에 노출할 수는 없다. 나 혼자 간다. 죽는다면....그건 그것대로 운명이라고 받아들여야지.”

허 병장은 말문이 막힌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최현성 하사는 온몸으로 굳은 의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는 최 하사를 설득하려 해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길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복잡하지는 않습니다만...”

한숨을 내쉬며 구체적 길을 말하려던 허군호 병장이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해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그가 없으면 어떡하죠? 그가 이미 사라졌을 가능성도...”

최현성 하사 역시 내심 생각하던 가능성을 부하에게 직접 듣자 가슴이 아파왔다.
그가 없다면.....

“뭐, 그럼 돌아오면 되는 거야! 어쩔 수 없는 문제구만. 하하하!”

최 하사는 애써 유쾌한 표정과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또 그가 애써 과거에 와서 그냥 갔을 리도 없잖아? 로봇만 거기 세워놓고 다른 데로 놀러갔을 수도 있으니 거기서 일단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문제야.”

“아, 그렇군요.”

허군호 병장은 최 하사의 필사적 희망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가겠다. 벌써 3분이나 지났군.”

K-2 소총을 둘러메고 출발 준비를 하는 최 하사에게 허군호 병장이 물었다.

“그런데 다른 소대원들에게는 비밀로 하는 겁니까? 김태호 소위님...아니, 그에게도?”

최현성 하사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여전히 김태호 소위는 믿을 수 없었으며 위험했다.

“비밀로 한다.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어쨌거나 명심해라. 4시간이다. 4시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죽은 걸로 간주하고 나를 찾을 생각은 절대 하지마라. 그리고 적어도 5시간은 지나고 나서 소대원들에게 이야기 해줘라. 그 때 구체적 설명을 해줘도 늦지는 않겠지.”

“알겠습니다.”

허 병장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4시간. 그 시간이 지나면 최 하사의 목숨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의미였다. 물론 최후의 희망 또한.


“휴...”

최 하사를 배웅한 허군호 병장은 천막 안으로 걸어가면서 피곤한 기색으로 이마를 주물렀다. 제발 잘 되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아무리 잘 적응한다고는 해도 현대가 그리운 것이 사실이었다. 애인은 아니지만 즐겁게 대화 나누고 가끔 면회도 와주는 그녀가 생각이 났다.
아무런 이성 감정 없는 친구임에 분명한 그녀가 지금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오랜만이군, 허 병장.

허군호 병장이 천막 안으로 다시 들어왔을 때 김태호 소위가 뒤틀린 미소와 함께 K-5를 겨눈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지나가다가 우연히 듣게 돼서 말이야. 자, 그럼 그 언덕으로 가는 길을 한 번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까? 대략적인 건 우연히 들어서 알고 있으니 거짓말 할 생각은 하지 말고.”


최현성 하사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언덕에 도착해 아래의 로봇과 사내를 목도했을 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는 생각했다. 더 이상 고민하지 말자고.

“그래, 더 이상 고민하지 말자.”

21세기에서 온 한국인은 언덕의 사면을 내려갔다. 이제 슬슬 발견당할 타이밍이었다.
최소 10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대 로봇에 순간적으로 시선이 갔지만 곧 최 하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를 관찰했다.
그를 보는 순간 최현성 하사는 알 수 있었다. 그 사내가 자신과 같은 군인이라는 것을.
잿빛을 연상케 하는 회색 군복 차림(그 형태는 장교 정복에 가까웠다)의 그는 사람 좋은 미소와 흥미롭다는 복잡한 표정으로 최 하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최현성 하사는 그의 어두운 청색 머리칼과 에메랄드빛 눈동자, 그리고 얼굴 생김새를 통해 그가 서구 계열의 인종임을 알 수 있었으며 또한 그가 매우 잘생겼다고 느꼈다.
최 하사는 긴장된 목소리로 천천히, 서툰 영어로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전 대한민국 육군 제7사단 소속 최현성 하사입니다."

최현성 하사의 말을 듣던 그 사내는 이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기묘한 억양의 한국말로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당신은 시간의 표류자가 분명하군요."

최현성 하사는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억양을 제외하면 완벽한 한국말이었다.

"으음, 당신이...그러니까..."

사내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시간 보호군 육군 제1전투FS중대 소속 2소대장 에더 드레인거 소위라고 합니다. 편하게 에더 소위라고 부르세요."

최현성 하사는 너무 반갑고 감격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그의 손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든 상황을 이해하겠습니다."

에더 소위는 최현성 하사의 상황 설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 하사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그를 바라보며 타임 슬립 현상의 본질이나 개변군 등에 대해 부분적으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가 설명해준 바에 의하면 타임 슬립 현상은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자연 현상으로 대기 중에 퍼져있는 미세 입자의 일종인 TS 입자의 불규칙적 활동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타임 슬립 현상에 자주 휘말리는 집단은 보통 군과 같은 무력 조직으로 시공을 뛰어넘어 역사 개변을 시도하는 이들은 개변군으로 규정되어 시간 보호군이 격퇴시킨다는 것이다.
만일 자신들이 아메리카가 아니라 과거의 한국에 떨어졌다면 그들 역시 개변군의 길을 걸어 시간 보호군에 격멸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최현성 하사는 경외의 눈길로 영원의 군사조직에 속해있는 군인을 바라보았다.
1013년 7월 3일의 북아메리카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어쨌거나 운이 좋으시군요. 제가 모두를 원래의 시간대로 데려다 주겠습니다. 집으로 가는 거죠."

마지막 대목에서 그는 살짝 윙크했다. 최현성 하사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나머지 소대원들을 이곳으로 데려오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 당연한 일인걸요. 참, 그리고 기지로 이동하면 약간의 기억 조작은 미리 생각하고 계셔야 할 겁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데 그 정도쯤이야 별 문제도 아니었다. 최 하사는 씩 웃으며 다시 한번 인사를 한 후 달려 나갔다.
인디언 마을로. 모두가 있는 곳으로.


기쁨의 감정으로 도취된 채 달려 나가던 최현성 하사는 우거진 수풀 너머로 익숙한 차림새와 익숙한 자세로 무언가를 겨눈 채 나뉘어져 있는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젠장!”

하필이면, 하필이면!

“왜, 지금에 와서야! 대체 왜!”

그는 분통을 터뜨리며 달려갔다. 서로 총을 겨눈 채 대립하고 있는 그들은 바로 3소대원들이었다. 한 쪽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 다른 한 쪽은 김태호 병장을 따르는 무리.
최 하사가 수풀에서 뛰어나오자 모든 소대원들이 깜짝 놀라면서 반사적으로 그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물론 한 쪽은 곧 방향을 바꿨지만 다른 한 쪽은 아니었다.

“제길, 허 병장! 상황 설명해봐.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는 온 몸을 겨누고 있는 총구와 흉흉한 시선을 애써 견뎌내며 자신을 따르는 쪽으로 걸어간 후 다급히 물었다.

“김태호 소위가 우연히 엿들은 모양입니다. 망할, 저 미친 녀석이 그 사내를 죽이고 로봇을 탈취한답시고 녀석들을 선동해 달려가더군요. 그래서 전 급히 애들을 모아 녀석들을 막기 위해 추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하사님이 보는 대로입니다.”

허 병장이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내뱉은 말에 최 하사는 헛웃음만 나왔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 집단은 서로의 급소에 총구를 겨눈 채 강렬한 긴장감으로 상호 간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서 총을 안 잡은 이는 최 하사, 그 뿐이었다.

“모두들 당장 총 내려놔! 이건 미친 짓이야!”

물론 순순히 총을 내릴 상황은 아니었다.

“하..하지만 하사님!”

“소위님. 제발 부탁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제발 현실을 직시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분명 시간 보호군의 장교라고 했습니다. ‘군’ 말입니다.”

김태호 소위는 여전히 총을 겨눈 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양자 간의 대치 상황도 변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최현성 하사는 필사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들은 모두 알아요. 우리들 같은 존재들. 이른바 개변군들 말입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시공간 현상, 타임 슬립 현상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며 그 원리도 파악하고 있는 절대적 조직입니다! 시간을 보호하는 신적인 조직이라고요! 애시당초 우리들은 역사 따위 바꿀 수 없었어요!”

김태호 소위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 빈틈을 놓치지 않은 최 하사가 거침없이 그와 그들을 몰아붙였다.

“그는 우리들을 불행한 상황에 놓인 표류자라고 했어요. 그는 우리를 원래의 곳으로 돌려보내준다고 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기습을 한다고 해도 로봇 병기를 운용하는 군대에서 온 군인이 저희들에게 제압당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원래의 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 그 말의 파장은 예상 외로 컸다. 대치 상황에 놓인 양 집단 모두가 동요했던 것이다.

“소위님. 부탁입니다. 제발!”

김태호 소위는 하늘과 땅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긴 한숨을 토해낸 후 그는 총구를 힘없이 떨구었다.

“미안하다.”

최현성 하사가 감격에 겨운 얼굴을 지었다. 가장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순간 공기를 가르는 소음이 들려왔다. 바람인가? 아니, 보다 선명한 금속성의 맑은 소음.

[탕!]

익숙하면서도 지금은 너무나 낯선 총성이었다.
최 하사는 가슴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감각에 고개를 내려 자세히 보려했으나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피를 토하며 쓰러지기 직전 총을 쏜 소대원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는 방아쇠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거친 동물기름으로 총기손질을 해온 탓에 오작동 위험률이 커진 K-2 소총 하나가 일으킨 실수였다.
사실 원인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 총성은 말 그대로 방아쇠가 되었고 격렬한 총성과 함께 양자 간의 교전이 벌어졌다.
최현성 하사는 피를 토하면서 서서히 흐릿해져가는 의식 한가운데 피투성이로 죽어나가는 소대원들의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아, 그렇구나. 그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역시 우린 이 시대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어.


에더 드레인거 소위는 자신의 신분을 최현성 하사라 밝힌 한국 군인을 보낸 후 느긋하게 그와 다른 이들을 기다렸다. 그들은 정말이지 너무나 운이 좋았다.
그가 그들을 처음 포착한 것은 한 사내가 자신의 FS(시간 보호군이 운용하는 인간형 병기)와 자신이 꽃을 내려놓는 광경을 몰래 지켜볼 때였다. 자동 방어 시스템에서 그 사내에 대해 알려왔을 때 그는 적잖이 놀랐다.
시간 보호군을 골치 아프게 하는 광기의 한국군이 과거의 북아메리카에 있다니!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타임 슬립 현상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초월적 현상이었다. 원래 장소에서 수천,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타임 슬립 한다고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에더 소위는 그 사내가 허겁지겁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곧 다른 이가 자신에게 접촉하리라 추정했다.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그의 추정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한국군은 너무나 운 좋게도 그에게 구원 받게 된 것이다. 경사였다.
지금으로부터 25분 후 격렬한 총성을 듣게 될 에더 소위는 장미가 놓여진 장소를 애수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기 평화롭게 잠든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들 또한 발견되지 못했겠지.
아, 그리운 나의 사랑. 기억 속에 영원할 나의 여신이여.
그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시간은 충분했다. 그것이 시간의 묘미였다. 어떤 때는 너무나 모자지만 어떤 때는 너무나 넘친다.
지금으로부터 35분 후 피투성이로 죽어 있는 3소대원들의 시신을 수습할 에더 소위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느긋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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