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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닿을 수 없는

2020.01.12 11:5801.12

닿을 수 없는

 

 

거대하고 둥근 물체가 한 도시를 뭉개며 지구에 떨어졌다. 하늘에서 떨어진 파란 빛을 내는 거대하고 둥근 물체. 저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저 안에는 뭐가 있을까.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다. 해석은 제각각이었다. 메시아의 현현이라며 기도를 하고 죄를 고백하라는 사람과 외계인의 침공이라는 사람과 행성 충돌이라는 사람과 별별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 구미에 당기는 주장을 믿었다.

정부는 혼란을 막기 위해 그 구역을 격리하려 했지만 전 세계에서 몰려든 카메라를 막을 순 없었다. 정부는 방호복을 입은 과학자들과 군인들을 투입시켜 조사하게 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핵미사일을 겨누고 권력자의 책상 위에 버튼을 놓아두었다. 조사단은 파란 공에서 분출되고 있는 어떤 것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현재의 과학으로는 알 수 없는 성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몇몇 과학자들은 푸른 공이 과학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킬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고 다수의 과학자는 무지(無知)를 두려워했다.

푸른 공은 3일간 꿈쩍하지 않았다. 푸른 공의 표면을 떼어내 분석하기 위해 과학자와 군인 그리고 장비를 짊어진 기술자들을 투입했다. 그들이 20미터쯤 접근하자 공에서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짐승의 포효 같았다.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쳤고 총을 든 군인마저 총부리를 거두고 냅다 달렸다. 그 군인들은 징계처분을 받았다.

푸른 공으로 인해 몇몇 사람들이 난리를 쳤지만, 대부분은 별일 아니라는 듯 관성에 몸을 맡긴 채 직장과 학교에 갔다. 하지만 푸른 공의 포효가 방송을 통해 전해지자 출석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비상식량과 각종 구호 물품들이 불티나게 팔렸고 건설사에는 벙커를 지어달라는 부호들이 줄을 섰다.

정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조사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각종 장비와 인력을 투입해도 푸른 공에서 티끌 하나 떼어낼 수 없었다. 7일 뒤 푸른 공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땅을 울리며 공이 흔들렸다. 흔들림이 점점 강해지다가 쩍, 하고 계란이 깨지듯 푸른 공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들이 공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그들은 우리가 책이나 영화에서 보던 공룡과 똑같았다. 다만 영화처럼 거대하진 않고 코끼리 정도의 크기였다. 다양한 공룡들이 푸른 공에서 나왔고 무리 중에 제일 앞에 선 붉은 눈의 티라노사우르스가 말했다.

“드디어 돌아왔다. 우리는 오래전 이곳 지구에서 빙하기의 추위를 피해 다른 행성으로 피신했다. 그 행성에서 우리는 더욱 진화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제 지구는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떠난 사이 지구를 점령한 인간들에게 우리가 제시할 선택지는 두 가지다. 복종 혹은 멸종.”

붉은 눈의 티라노의 말이 끝나자 나머지 공룡들이 발을 구르며 소리를 내질렀다. 그 커다란 소리는 날아가던 새도 떨어트릴 정도였다. 그 모습을 생중계로 바라본 지구 대부분의 사람 그러니까 핵미사일 버튼을 가진 권력자나 글로벌 대기업을 가진 부호나 쓰레기통을 비우던 청소부나 면도를 하던 이발사까지 모두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압도당하는 느낌. 이게 대체 뭔 일인가. 꿈인가 생시인가.

이제 푸른 공에 대해 지구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했다. 세계 주요 국가의 정상들이 화상 전화기 앞으로 모여 의견을 주고받았다. 당장 그곳에 핵미사일을 날립시다. 아니, 그럼 그 주변의 국민들은 어떻게 합니까. 저로서는 다음 대선에 큰 약점이 됩니다. 지금 다음 대선을 걱정할 때입니까. 저들은 얼마나 강할까요. 겉보기에 별것도 없어 보이는데 일단 군대를 투입해보죠. 저들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있을까요. 그냥 지금 방심할 때 핵을 먹입시다. 이봐요. 전쟁에 미쳤습니까? 일단은 대화를 시작해서 평화롭게 해결할 방법을 찾아봅시다. 저들이 말하는 걸 보면 대화할 의지라고는 없어 보이는데요. 저들은 우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본때를 보여줍시다. 핵미사일 버튼을 가진 권력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 어쩜 좋담.

만약 그때 권력자가 과감하게 핵미사일 버튼을 눌렀다면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력자는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린 채로 한참을 망설였고 결국 찾아낸 답은 군대 투입이었다. 군대가 총과 포탄을 겨누고 다가오자 공룡들은 눈을 감았다. 그 행동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결과를 놓고 보자면 아마도 ‘결국 귀찮은 방법을 선택하는 군 인간.’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그들에게 쏜 첫 총알은 메이플 시럽을 잔뜩 뿌린 팬케이크와 맥도날드 치즈 버거를 좋아하고 서핑을 취미로 가진 폴 대위의 총알이었다. 그의 총알은 날아가 티라노의 허벅지 피부에 닿자마자 다른 방향으로 꺾여 날아갔다. 티라노의 피부를 뚫을 것이라 여겼던 총알은 곧 아빠가 될 예정이었던 류헤이 하사의 왼쪽 눈을 관통했다. 폴을 시작으로 군인들이 총과 포탄을 난사했고, 그 모든 총알과 포탄은 그들의 피부를 뚫지 못했으며 애꿎은 군인들의 연한 살만 찢어놓았다. 육군 한 개 연대 전원 사망. 붉은 눈의 티라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구에 있는 동안 우리는 모든 것을 파악했고 두 가지 결론을 냈다. 첫째, 인간종족은 우리보다 매우 열등하며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는다. 둘째, 지구는 아직 수명이 많이 남은 행성이지만 인간이 그 수명을 갉아먹고 있음으로 인간의 개체 수를 알맞게 조정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다. 복종 혹은 멸종.”

붉은 눈의 티라노가 신호하자 푸른 공이 빛을 내며 떠올랐다. 푸른 공이 작은 점이 될 때까지 날아올라 팽이처럼 돌았다.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며 굉음을 냈다. 푸른 공으로 번개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수많은 번개가 푸른 공으로 빨려 들어가고 쉬지 않고 천둥이 몰아치는 광경을 입을 벌리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뒤 지구가 방전됐다. 코딱지만 한 전구 하나 밝힐 전력도 남지 않았다. 배터리나 발전기도 전부 먹통이었다.

“21일의 기간을 주지.”

권력자가 성급히 핵미사일 버튼을 눌렀으나 핵미사일은 작동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는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의 손에 죽었다. 권력을 이용해 비서를 여러 차례 침대로 불러들인 결과였다. 통신이 끊기자 타지에 자식을 보낸 부모들이 전화기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인큐베이터에 있던 아기나 생명 연장 장치를 한 환자들이 차례대로 죽었다. 게임방과 도박장에선 욕설이 난무했고 냉동실에 진열된 아이스크림 케이크들이 뭉개지며 녹았다. 교도소의 문이 일제히 열렸다.

죄수들이 교도관들을 죽이고 탈옥했고 군인들이 상급자를 총살하고 탈영했다. 부자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경호원에게 죽임을 당하고 재산을 모두 빼앗겼다. 많은 것을 쥐고 있던 사람들은 도망쳤고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은 쫓았다. 사람들을 사냥하고 여자들을 찾아 강간하는 패거리들이 생겼다. 누군가는 벙커에 숨어 남은 식량을 계산하며 『죄와 벌』을 읽었고, 누군가는 십자가 앞에 모여 다 같이 자살을 했고, 대한민국 충북 괴산의 깊은 산골에서 살던 최덕배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고추를 따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상황을 혼돈의 카오스라 불렀다.

 

혼돈의 카오스 덕분에 [B-12]는 깨어날 수 있었다. [B-12]는 피닉스 연구소 건물 지하 연구실에 있는 캡슐에서 영면(과학자들의 표현에 의하면) 중이었다. 먼저 피닉스라는 연구소를 설명하자. 피닉스는 불로불사를 꿈꾸는 권력자 100명이 모여 만든 연구소다. 창립 방향에 맞게 피닉스는 각지에서 유망한 과학자들을 모아 각종 비인간적인 실험을 했다. 개의 눈을 인간에게 이식하거나 돼지의 자궁에 배아를 키워본다거나 두 인간의 머리통을 바꿔 달아본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물론 실험에 사용되는 인간들은 세계 각지에서 데려온 연고 없는 고아들이었다.

도쿄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지만 아버지의 도박 빚과 어머니의 췌장암 수술비를 벌기 위해 피닉스에 온 사쿠라는 지구 최강의 생명력을 자랑하는 아주 작은 생명체 물곰(Water Bear)을 주목했다. 물곰은 원자 운동이 거의 정지 상태에 이르는 영하 272도에서도 뇌 손상 없이 견디고 영상 151도에서도 살 수 있었다. 또한 가장 깊은 바다의 수압보다 6배나 강한 압력도 견딜 수 있고 강력한 방사선이나 진공에서도 맨몸으로 생존이 가능했다. 사쿠라는 물곰에게서 자신을 보호하는 독특한 유전자 D섭(Damage suppressor)을 발견했다. 사쿠라의 D섭 발견은 인간에게 다양한 유전자를 이식하고 합성하는 프로젝트인 ‘신의 유전자’에 곧장 적용됐다. 그 프로젝트에서 D섭 유전자를 받은 12명 중 하나가 [B-12]였다.

그들은 D섭 유전자를 이식한 12명을 캡슐에 영면시켜놓고 영양분을 관으로 주입해 성장시키다가 필요할 때마다 차례대로 캡슐에서 꺼내 사용했다. 지금까지 10명이 폐기되었다. 9명은 실험과정에서 사망하였고 1명은 2년 차 연구원 테드 창이 캡슐 조작을 잘못하는 바람에 영양 부족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아무도 테드 창을 꾸중하지 않았는데 영양 부족으로 사망한 것 자체가 실험 실패로 간주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는 [B-12]만 성공한 셈인데 혼돈의 카오스 때문에 [B-12]가 깨어났을 때 [B-11]은 죽어있었기 때문이다.

혼돈의 카오스 이후 피닉스의 연구원들은 모두 도망갔고 연구소는 엉망진창이었다. 비커나 스포이트, 모니터, 컴퓨터 등의 물건들은 죄다 깨지고 부서졌고 총알 자국과 시체가 즐비했다. [B-12]는 직원들의 책상을 뒤져 신문과 잡지 그리고 그들이 남긴 메모와 일기를 읽고 현재 상황을 파악했다. [B-12]는 실험실을 빠져나가다 자기도 모르게 문고리를 종잇장처럼 구겨버렸다. [B-12]는 생각했다. 나는 뭐지?

 

하나둘씩 인간들은 복종을 선택했다. 공룡들은 복종을 맹세한 인간의 볼에 탁구공만 한 비늘을 하나씩 심어주고 특정한 공간에 넣었다. 그 공간은 어떤 에너지로 이루어진 벽으로 나뉘었는데 그 벽은 닿는 모든 걸 태워버렸다. 공룡들은 그 공간을 케이지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케이지를 인간들이 바라던 파라다이스나 천국이라고 칭송했는데 밭과 농장은 자동화 시스템을 통해 운영되어 식량을 얻기 위한 노동이 필요 없었고 모두에게 잘 수 있는 숙소와 깨끗한 옷이 제공됐기 때문이었다. 의식주뿐 아니라 당구장 족구장 게임방 테니스장 골프장 술집 카페 수영장 스키장 헬스장과 같은 취미 공간도 있었다. 다만 책을 읽거나 연구나 토론 같은 행동들은 금지되었다.

케이지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첫째, 다른 인간을 죽이거나 상처 입히지 말 것. 규칙을 어긴 인간은 거머리가 가득 있는 수족관에 손발을 묶은 채로 넣어두고 거머리에게 피를 빨리며 서서히 죽는 모습을 모두가 볼 수 있게 했다. 여자나 아이들도 자유롭게 밤거리를 돌아다녔고 존댓말과 공경, 예의, 존경 같은 개념들은 사라졌다.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누구나 하고 싶은 데로 살았다.

둘째, 가족을 이루지 말 것. 결과적으로 이 규칙은 인간에게 자유로운 섹스를 선사했다. 케이지에서는 원한다면 누구나 낙태를 할 수 있었고 출산을 하더라도 출산이 가족으로 연결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육아는 이제 여성의 몫이 아니었다. 태어난 아이들은 육아실에서 길러졌다. 모두 분유를 먹었다. 모유 수유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여성의 젖가슴은 오로지 성적으로만 사용됐다. 따라서 섹스에는 티끌만 한 책임감도 따르지 않았다. 즉 섹스는 놀이일 뿐이었다. 발정 난(공룡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들은 아무 데서 아무하고 섹스를 했다. 아무도 자신의 나체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브래지어나 수영복 같은 물건은 사라졌다. 하지만 규칙에 따라 남녀가 연속으로 7일 이상 함께 지내거나 몰래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경우 굶은 쥐가 가득한 방에 서로를 바라보게 묶어 서로가 갉아 먹혀 죽는 모습을 바라보게 했다.

셋째, 소유하지 말 것.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다. 밤이 되면 숙소 건물의 아무 방에 들어가서 잤고 배가 고프면 배식 건물에 들어가서 먹었다. 모든 옷에는 주머니가 없었고 더러워진 옷은 세탁건물에 벗어놓고 새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됐다. 나만의 것은 없지만 모든 것이 내 것이자 우리의 것이었다. 규칙을 어겼을 땐 빛 한 줌 들지 않는 독방에서 홀로 굶어 죽게 했다.

넷째, 집단을 만들지 말 것. 5명 이상의 인간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거나 48시간 이상 함께 있어선 안 됐다. 규칙을 어긴 인간들은 손가락 발가락을 한마디씩 잘라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놨다.

다섯째, 노동할 것. 케이지에서 생활하는 인간은 17세부터 55세까지 일일 5시간씩 주 4일 일해야 했다. 단 임신한 여성은 임신한 순간부터 출산 이후 12개월까지 노동을 부여받지 않았다. 그 외의 인간은 원하는 시간에 노동 관리실로 가면 할 일을 줬다. 나이나 성별, 건강에 따라 그때그때 노동이 지급됐고 같은 노동을 계속해서 시키지 않았다. 케이지는 자동화되어있기 때문에 인간의 노동은 더 이상 필요치 않지만 설거지, 숙소 청소, 빨래 개키기, 도로 청소, 가축 사료 주기 같은 단순노동을 만들어 인간에게 부여했다. 노동하지 않은 인간은 멈추면 전기충격이 오는 쳇바퀴에 넣어 죽게 했다.

공룡들은 인간이 밀집해있는 곳마다 화면을 띄워 케이지를 보여줬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공룡에게 비늘을 받고 케이지로 들어갔다.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케이지야말로 마르크스가 꿈꾸던 이상향이라고 여겼다. 상대적으로 못 사는 국가의 국민들이 빠르게 복종을 선택했는데 대표적으로 조그만 독재정권 국가는 머리에 총알구멍이 난 국가원수와 22명의 권력자를 제외하고 전 국민이 비늘을 받고 케이지에 들어갔다. 복종한 인간들이 늘어감에 따라 케이지의 영역이 빠르게 늘어갔다. 혼돈의 카오스 이후 12일 동안 인류의 13%가 사망했고, 18%가 비늘을 받고 인간 우리에 들어갔다.

 

[B-12]는 복도에 쓰러진 연구원 샤힌의 옷을 입고 피닉스에서 나왔다. 연구소 주변엔 구불구불한 2차선 도로 외에는 푸른 숲뿐이었다. 키 큰 나무들 때문에 대낮에도 어두컴컴했다. [B-12]는 길게 난 도로를 따라 걸었다. 걷고 걸어도 사람이나 마을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틀쯤 걸었을 때 마을이 나왔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을 안쪽 광장에 모닥불에 통돼지를 굽고 있는 패거리가 있었다. 8명의 남자와 4명의 여자는 총과 칼과 도끼를 들고 있었다. 그들이 [B-12]를 발견하고 주위를 감쌌다. [B-12]는 가만히 있었다. [B-12]가 겁먹었다고 생각한 노란 머리 남자가 [B-12]의 성기를 잡고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 사내구실은 하겠어?”라고 말했다. [B-12]는 그저 가만히 그들이 길을 비켜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B-12]를 놔줄 리가 만무했다. [B-12]가 가만히 있자 노란 머리 남자가 [B-12]의 바지춤에 오줌을 갈겼다. 패거리들이 배를 붙잡으며 웃었다. 여전히 [B-12]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화가 난 노란 머리 남자가 [B-12]의 가슴에 칼을 쑤셔 넣었다. 칼이 박힌 자리에선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칼이 [B-12]의 몸에서 스르륵 빠졌다.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그 모습을 본 한쪽 귀 없는 남자가 도끼로 [B-12]의 어깨를 내려쳤다. [B-12]가 어깨에 힘을 주자 도끼는 [B-12]의 몸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등 뒤에서 발사된 총알이 어깨에 박혔다. 박힌 총알이 스르륵 빠져나오고 상처가 아물었다. 대머리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자 모두 우르르 도망갔다. [B-12]는 패거리가 남기고 간 통돼지를 먹었다.

[B-12]는 걷고 또 걸었다. 길이 있으면 길을 따라 걸었고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서 걸었다. 같은 곳을 빙빙 돌 때도 있었고 먼 길을 돌아가거나 되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끊임없이 걸었다. 배고프면 뭔가를 먹었고 졸리면 누워 자고 힘들면 쉬고 걸었다. [B-12]의 머릿속엔 두 가지 생각뿐이었다.

나는 무엇일까?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B-12]는 깨어나기 전의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조각조각의 희미한 감각들만 어지럽게 흩어져있었는데 치마에 그려진 노란 꽃의 이미지, 비린내 나는 골목에 앉아서 쐬던 햇볕의 따스함, 지붕 위에 앉아 나를 노려보던 까만 고양이의 눈동자, 뜨거운 공기와 혀 위에서 녹아내리던 얼음의 차가움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처마 밑에서 무릎을 끌어 앉고 앉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느꼈던 감정은 다른 것들에 비해 조금 더 선명했다. [B-12]는 이것들이 내 것인지 내게 심어놓은 데이터인지 알 수 없었다.

[B-12]는 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대부분은 [B-12]에게 무기를 겨눴다. 그리고 [B-12]를 공격했다. [B-12]를 공격한 사람들은 무기를 집어 던지고 도망갔다. 하지만 김우민은 달랐다. 김우민은 [B-12]의 배에 식칼을 꽂았으나 [B-12]가 죽지 않는 것을 보고 울며 절했다. 김우민은 식당 주방장이었는데 혼돈의 카오스 때 아들처럼 아끼던 직원에게 아내를 잃었다. 김우민은 오만한 인간에게 노한 신이 공룡들을 보내 벌을 내리는 중이라 믿었다. 김우민은 잔혹한 얼굴과 선량한 얼굴을 동시에 가진 신은 엄한 벌을 내리는 동시에 구원의 길을 열어줄 것이라 생각했고 [B-12]가 신이 보낸 구원자라 믿었다. [B-12]의 발걸음을 따라 걷게 된 김우민은 [B-12]의 식사를 챙겨주고 잠자리를 봐줬다.

다음으로 함께 걷게 된 사람은 미나였다. 미나는 [B-12]과 김우민이 잘 곳을 찾기 위해 들어간 건물에 청년 패거리와 함께 있었다. 그 패거리도 [B-12]를 찌르고 때리다가 도망갔고 패거리가 있던 자리엔 미나 홀로 남아있었다. 미나는 하숙집을 운영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혼돈의 카오스 이후 하숙생들이 어머니를 처참하게 살해했다. 다락에 숨어있던 그녀는 어머니를 죽인 하숙생 패거리에게 잡혀 노리개 역할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김우민이 왜 함께 도망가지 않았냐고 묻자 미나는 “누가 됐든 강한 사람 옆에 있는 게 유리하니까.”라고 대답했다. 매일 밤 그녀는 [B-12]의 품을 파고들었고 [B-12]는 대부분 거절했으나 가끔 잠자리를 가졌다.

그들은 고인돌과 공룡 화석으로 유명한 도시에서 공룡들이 송출하는 화면을 봤다. 케이지에서 맘껏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는 인간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화면 오른쪽 위에는 빨간 글씨로 복종까지 남은 시간이 32:18:19에서 카운트되고 있었다. 화면 속 인간들은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모습이었다.

“오빠, 우리 저기 구경하러 가볼까?”

미나가 [B-12]의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 반면 김우민은 질색했다.

“저곳은 분노한 신이 인간에게 내린 지옥이야! 구원자님 부디 저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B-12]가 미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나가게 될지도 모르지.”

미나는 [B-12]를 오빠라고 불렀고 김우민은 구원자님이라 불렀다. 갑자기 [B-12]의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져 미나의 발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놀란 미나가 소리를 지르며 뒷걸음쳤고 김우민은 입을 틀어막고 돌처럼 굳어있었다. 등 뒤에서 까맣고 펑퍼짐한 옷을 입은 사내가 단칼에 [B-12]의 머리를 벤 것이었다. 그는 기척을 숨기고 접근하여 단칼에 머리를 벨 정도로 무예에 숙련된 사람이었다. [B-12]는 머리에서 몸통을 재생할지 몸통에서 머리를 재생할지 고민하다가 덜 귀찮은 쪽을 선택했다. 순식간에 잘린 목 위로 머리가 재생됐다.

“하하하!”

검은 옷의 사내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칼을 높이 들어 [B-12]의 몸통을 노렸다. [B-12]가 몸에 힘을 줬다. 그러자 사내의 칼이 튕겨 나갔다. 이번엔 검 끝으로 [B-12]를 찔렀으나 또다시 칼은 튕겨 나갔다. 사내가 칼을 칼집에 넣고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저는 백두산에서 온 대호라고 합니다. 당신의 소문을 듣고 뒤를 밟았습니다. 저는 언젠가 반드시 영웅이 나타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군요.”

대호가 자신의 칼을 양손으로 들어 [B-12]에게 내밀었다.

“저를 당신의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거절할 생각이시라면 이 칼로 제 목을 가져가시지요.”

“스승이라니. 나는 당신에게 가르칠 것이 없는데요?”

대호가 또다시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스승이란 눈빛 한 번 숨소리 한 번으로도 가르침을 주는 것이지요. 깨달음을 얻어가는 것은 제자의 몫입니다.”

[B-12]는 칼을 대호에게 돌려줬다. [B-12]의 길에 합류하게 된 대호는 [B-12]를 스승님이라 부르고 김우민과 미나를 사형이라 부르며 깍듯하게 대우했다. 김우민은 그런 대호를 불편해했지만 미나는 재미있다는 듯 대호를 부려먹었다. 대호가 합류한 이후로 어쭙잖은 공격은 [B-12]가 나서지 않아도 대호 선에서 해결됐다. [B-12] 일행이 도시를 지나 산속을 걸었다.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사람이라곤 찾기 힘든 첩첩산중이었다.

“구원자님 죄송하지만 하나만 묻겠습니다. 오늘 저녁 식사와 잠자리는 어떻게 하실 계획이신지?”

[B-12]는 아무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말이 없었다. 미나가 나서서 말했다.

“아저씨, 왜 이렇게 걱정이 많아. 오빠가 알아서 하겠지.”

“사형, 내가 산 생활은 오래니 걱정하지 마시오. 해가 지거든 적당한 자리를 찾아 불을 피워 드리겠소.”

언덕을 넘자 저 멀리 조그마한 옥수수밭 옆에 집 한 채가 나타났다.

“이것 봐. 오빠는 다 계획이 있다니까.”

김우민은 구원자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어리석은 질문을 한 자신을 꾸짖었다. 낮은 울타리가 둘러싸고 있는 오래된 집이었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역한 냄새가 풍겨왔다. 마당 한쪽에 위치한 닭장에 있는 닭 사체들이 썩어가며 풍기는 냄새였다. 그 옆에 작은 개집에 흰 개가 아사 직전의 모습으로 묶여있었다. 미나가 다가가자 개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힘없이 꼬리를 흔들었다. 미나가 얼른 물을 한 대접 퍼서 주둥이에 부어줬다. 흐리멍덩했던 개의 눈빛에 조금씩 생기가 찾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니 더욱 짙은 악취가 풍겼다. 거실에 여러 명의 자식과 그 자식의 자식들과 찍은 노부부의 사진이 곳곳에 걸려있었다. 집을 둘러보던 김우민이 소리를 질렀다. 안방에 노부부가 목을 매고 매달려있었다. 부패한 시체 밑에는 시꺼먼 물이 고여 있었다. 김우민은 문을 단단히 닫았다.

노부부의 집에는 생수와 부탄가스와 버너가 있었다. 게다가 다양한 캔과 레토르트 식품과 조미료가 있었다. 김우민이 요리 실력을 발휘해 사골국물에 각종 햄과 베이크드 빈을 넣고 부대찌개를 끓였다. 일행이 거실에 둥글게 앉아 김우민이 만든 음식을 먹었다. 미나 옆에 엎드린 개가 미나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오빠, 근데 오빠는 이름이 뭐야?”

미나의 말을 들은 김우민과 대호가 이름 한 번 묻지 않은 자신들의 무심함에 뜨끔했다. 그리고 내심 궁금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름은 없어. 그냥 [B-12]로 불렸을 뿐이야.”

예상치 못한 대답에 셋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B-12]만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먹었다. 미나가 적막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가 이름 정해주는 건 어때?”

김우민과 대호가 맞장구를 쳤다. [B-12]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기대하며 귀를 기울였다. 미나와 대호가 철수, 제임스, 지존, 료이치, 청용, 지원, 불사왕 등 여러 이름을 제시했다. 하지만 마땅한 이름이 없었다. 조용히 지켜보던 김우민이 입을 열었다.

“천수 어때? 아들 낳으면 지어주려던 이름인데.”

대호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늘에서 내려준 인물 혹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천 개의 손을 가진 천수관음을 뜻하는 이름이군요. 좋은 이름이오.”

“내 첫사랑이랑 같은 이름이네. 나도 좋아. 오빠는 어때?”

모두의 시선이 [B-12]를 향했다. [B-12]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일행이 길을 나섰다. 밤사이 기운을 차린 개가 미나 뒤를 졸졸 따랐다. 미나가 개의 이름을 해피라고 지어줬다. 해가 산 중턱에 걸릴 때쯤 구불구불한 산길에서 빠져나와 큰길로 접어들었다. 많은 사람이 한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무기를 들고 무리 지어 다니던 놈들과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대호가 짐을 가득 짊어지고 걷는 남자에게 물었다. “다들 어딜 그리 가는 게요?” 남자가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거대하고 푸른 공이 둥둥 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으니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치고 남자가 서두르며 앞서갔다. 미나가 푸른 공을 가리키며 물었다.

“천수 오빠, 우리도 저기로 갈 거야?”

“글쎄.”

걸을수록 길에 사람들이 더욱더 많아졌다. 길가에 다친 사람들이나 노인들이 누워있기도 하고 등에 업혀 가거나 유모차나 휠체어를 타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간혹 시체가 나타나기도 했다.

순백색의 크고 웅장한 건물과 그 위로 푸른 공이 우아하게 떠 있었다. 공룡들이 만들어낸 압도적인 광경이 사람들을 주눅 들게 했다. 사람들이 건물로 들어가 비늘을 수여 받았다. 그리고 소독과 환복을 하고 두 시간의 교육을 받은 뒤 케이지로 입실했다. 천수 일행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사람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과 투명한 벽 너머의 세상을 바라봤다.

수영장에서 물장구를 치며 노는 청년들과 선베드에 누워 맥주를 손에 쥔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남자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피자를 먹는 여자. 길을 걷는 사람들 사이에 쳇바퀴 위에서 뛰는 남자와 그 옆 벤치에서 섹스를 하는 두 남녀. 공을 쫓아 뛰어가는 아이와 담배를 피우는 노인 위로 피를 흘리며 거꾸로 매달려 있는 다섯 남자. 저 멀리 거대한 플라타너스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스승님, 저곳이 극락세계입니까? 지옥입니까?”

“이봐, 대호. 저런 곳이 신께서 준비하신 천국이라면 난 신을 믿지 않겠네. 저곳은 분명히 지옥이야.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잔혹한 지옥!”

김우민이 머리를 움켜쥐고 좌우로 흔들었다. 미나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렇지만 몇 가지 규칙만 지키면 걱정 없이 살 수 있잖아.”

“바로 저 사탄의 규칙들이 영혼을 더럽히는 거라고! 구원자님 그렇지 않습니까?”

천수는 말이 없었다. 천수는 아직도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해피가 꼬리를 흔들며 천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자 사람들이 헐레벌떡 뛰었다. 서서히 닫히는 문을 본 사람들은 애인을, 부모를, 아이를, 친구를 내팽개치고 뛰었다. 아이를 안고 뛰던 한 여자는 아이를 안으로 밀어 넣고 문에 깔려 몸이 반 토막이 났다. 문이 닫히고 거대한 화면이 생겼다. 화면에 붉은 눈의 티라노가 나타났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났다. 지금부터 복종하지 않은 인간들을 섬멸하도록 하겠다.”

붉은 눈의 티라노의 말이 끝나자 화면이 사라지고 거대한 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 랩터(벨로키랍토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침을 질질 흘리며 헐떡이는 랩터를 본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대호는 칼을 뽑아 들고 김우민과 미나는 다리를 덜덜 떨며 천수 뒤로 바짝 붙었다. 해피가 오줌을 지리며 미나의 다리를 긁자 미나가 해피를 들어 품에 안았다.

“오, 오빠! 어떻게 할 거야?”

미나가 놀라 물었다. 천수가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앞으로 가야지.”

랩터 한 마리가 주둥이를 벌리고 천수를 향해 달려왔다. 대호가 칼로 막아보지만 랩터의 이빨에 칼이 나뭇가지처럼 부서졌다. 랩터가 천수의 머리통을 물었다. 랩터의 이빨이 부서졌다. 천수가 앞으로 나아가자 랩터가 뒷걸음질을 쳤다. 다른 랩터들이 천수에게 달려들었으나 이빨이 부서진 채 도망갔다. 천수를 앞세운 일행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던 트리케라톱스가 일행을 보고 놀라 물었다.

“너희는 뭐야? 어떻게 들어왔지?”

“이분은 너희를 처단할 구원자이시다.”

김우민이 큰 뿔을 가진 트리케라톱스에게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트리케라톱스가 옆에 있던 랩터에게 소곤대니 랩터가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다시 일행에게 물었다.

“이봐, 원하는 게 뭐야?”

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뒤에서 미나가 “그냥 다 죽여 버려. 오빠.”라고 속삭였지만 천수는 가만히 있었다. 곧 사라졌던 랩터가 돌아와 트리케라톱스에게 귓속말을 했다. 트리케라톱스가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대장에게 안내하지. 따라와.”

일행은 트리케라톱스의 좌우로 움직이는 꼬리에 맞지 않게 조심하며 뒤따라 걸었다. 잠시 후 광활한 평야가 나왔다. 그곳에 붉은 눈의 티라노와 브라키오사우르와 안킬로사우르, 스테고사우르스 등 여러 공룡들이 있었다. 붉은 눈의 티라노가 일행에게 다가와 말했다.

“거기 너, 인간이 아니군?”

붉은 눈의 티라노가 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호가 대신 대답했다.

“이분은 우리를 구해줄 시대의 영웅이오.”

티라노는 대호의 말을 무시하고 주둥이를 천수에게 가까이 들이밀며 말했다.

“인간 편에 서서 우리와 맞서려는 건가?”

“나는 그저 길을 따라 걸을 뿐이야.”

“왜지? 왜 우리에게 맞서려는 거야? 케이지는 인간에게는 최고의 공간이야. 케이지에 있는 인간들은 아주 행복해한다고.”

천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김우민이 소리쳤다.

“케이지는 지옥이야!”

붉은 눈의 티라노가 시선을 김우민에게 돌렸다. 겁먹은 김우민이 천수 뒤로 더욱 바짝 붙어 섰다.

“거기 인간, 우리는 생존이란 과업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줬어. 게다가 평등한 환경을 통해 시기와 질투, 상대적 박탈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사라지게 했지. 폭력과 정치를 없앤 건 또 어떤가. 케이지는 인간이 그토록 원했던 모두가 잘 먹고 잘사는 꿈의 공간이라고.”

붉은 눈의 티라노가 하얀 이빨을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케이지에서 살기도 당신들에게 죽기도 싫소.”

대호의 말에 붉은 눈의 티라노가 침을 흘리며 웃었다.

“재미있는 인간이군. 이봐, 너희에겐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없어. 선택이란 건 강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지.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우리에게 자비를 구걸하라고.”

대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떨지 않고 서 있는 것뿐이라는 것을, 붉은 눈의 티라노가 포효라도 내지르면 오줌을 지리며 주저앉게 할 거대한 공포가 자신 안에 있음을 알았다. 뜨거운 분노가 치밀었다.

“대체 왜 케이지가 싫다는 거야. 우리가 케이지에서 인간을 키우는 것과 너희가 늑대를 길들여서 개로 만든 것과 뭐가 다르지?”

미나의 품에 있던 해피가 컹컹 짖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나에겐 인간과 저 개가 별반 다르지 않아.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해. 우리가 너희를 식용이 아니라 관상용으로 여긴다는 걸.”

“비켜줘.”

천수가 말했다. 붉은 눈의 티라노의 시선이 다시 천수를 향했다.

“난 네 뒤에 있는 인간들을 죽일 셈이다. 넌 어떻게 할 테냐?”

“길을 막지 마.”

“말이 통하지 않는 놈이로군.”

붉은 눈의 티라노가 일행 뒤에 있던 트리케라톱스에게 눈짓을 보내자 트리케라톱스가 커다란 꼬리를 미나를 향해 휘둘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땅에 처박혔다. 고장 난 인형처럼 팔다리가 제멋대로 꺾였다. 품에 안고 있던 해피는 조금 더 멀리 날아가 떨어졌다. 공룡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김우민은 주저앉았고 대호는 선 채로 오줌을 지렸다. 천수는 가슴 깊숙한 곳이 저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 대화할 마음이 생기나?”

붉은 눈의 티라노가 미소를 품고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비켜주지 않으면 지나가겠어.”

천수가 옆으로 가려 하자 붉은 눈의 티라노가 막아섰다.

“어이, 내가 그까짓 랩터랑 같아 보여?”

붉은 눈의 티라노가 순식간에 커다란 주둥이로 천수의 반 토막을 뜯어냈다. 붉은 눈의 티라노가 우물우물하다 천수의 상반신을 뱉고 “더럽게 맛없군.”이라 말했다. 붉은 눈의 티라노와 다른 공룡들이 더 크게 웃었다. 천수의 하반신에서 상반신이 재생됐다. 천수를 발견한 공룡들이 하나둘 웃음을 멈췄다. 계속해서 웃던 붉은 눈의 티라노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공룡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해 있었다. 그곳에선 멀쩡한 천수가 붉은 눈의 티라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눈의 티라노가 주춤거리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천수가 앞으로 한 발을 내딛자 붉은 눈의 티라노가 꼬리로 천수를 후려쳤다. 천수를 갈긴 꼬리는 뼈가 으스러져 죽은 뱀 마냥 축 처졌다. 눈이 뒤집힌 붉은 눈의 티라노가 주둥이를 힘껏 벌리고 온 힘을 다해 천수를 깨물었다. 산산조각이 난 이빨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고 뼈가 바스러진 턱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바보처럼 주둥이를 벌린 붉은 눈의 티라노가 뒷걸음질 치다가 먼지를 일으키며 도망갔다. 다른 공룡들도 마찬가지였다.

공룡들이 지구에서 떠났다. 이 순간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셋뿐이었다. 전구들이 하나둘 불을 밝히고 케이지의 투명한 벽이 사라졌다. 천수가 발걸음을 내디뎠다. 김우민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주저앉아 있었고 대호는 강해지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으므로 스승을 따라가지 않았다.

공룡이 떠난 뒤 세계는 서서히 활기를 되찾았다. 전과 같은 형태의 국가가 다시금 생겨나는 반면 케이지의 삶의 방식을 계승하는 국가도 생겨났다. 사람들은 삶에 대해 더욱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대호는 다시 산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자기 안에 있던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차갑고 단단한 금속성으로 바뀌는 과정과 거기서 느꼈던 감정과 깨달은 것을 글로 남겼다. 대호의 책은 오래도록 널리 읽혔다.

김우민은 식당을 다시 열고 아내를 새로 맞아 아들을 낳고 가족을 돌보며 살았다. 훗날 김우민의 아들 김천수에 의해 천수의 여정을 담은 글이 처음으로 쓰였다. 그 글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퍼지면서 목격담과 각종 이야기가 덧붙여져 두꺼운 책이 되었다. 그 책은 사람들의 마음과 믿음을 이끌어내는 힘을 발휘하며 하나의 종교를 만들었다.

천수라 불리던 그는 죽지 못해 끝없이 길을 걸었다.

홍청망청

좋은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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