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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맑고 고운 사악

2019.11.30 17:4311.30

1.

 

하여간 나는 예쁜 것에 사족을 못 쓴다. 그게 내 문제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짧게 한숨을 흘리고 들숨으로 금어초의 비명을 음미했다. 잠시 정신이 흐린 사이 줄기를 너무 짧게 자르고 말았다. 갓 동강난 식물의 푸른 허리로부터 새된 방향이 흘러넘쳤다. 연분홍 꽃망울을 알알이 매단 금어초를 메인으로 한 어레인지먼트를 만드는 중이었다. 버플레움과 마트리카리아 같은 소박한 아이들을 곁들여서. 귀엽게. 그녀는 어레인지먼트가 곧 방문할 친구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7월의 막바지였다. 쏟아붓는 비가 끊임없이 땅을 갈아댔다. 낮이지만 어두운 하늘. 통유리 쇼윈도에 Closed 패널을 내건 그녀의 영역 안에서 노르스름한 조명이 꽃과 잎사귀들의 흥건한 호흡을 내리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판매용 꽃차 하나를 우려내 마시며 흰 테이블 위에서 물과 가위로 풀대궁들을 다듬었다. 너무 짧게 자른 금어초를 들고 어떻게든 살릴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때였다. 검붉은 우산 그림자가 가게 문에 어른거렸다.

친구는 몇 번이나 우산을 털고, 젖은 한쪽 어깨부터 맨팔도 쓱 훔치고는 유리문을 열어 들어왔다. 커다란 운동화를 신은 발이 웰컴 매트를 두어 번 짓눌렀다. 골프용 우산을 철제 우산꽂이에 꽂고 친구는 파리한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늦어서 미안. 기다렸지. 그녀는 친구가 늦은 줄도 몰랐다.

깨끗한 수건을 그에게 내주었다. 몸의 물기를 닦는 손등에 잔털이 오소소 솟아 있었다. 그녀는 베이지색 체크무늬 블랭킷도 내주었다.

“고마워.”

그가 그런 인사치레를 하면 정말로 다정하게 들린다. 베이지색 블랭킷이 그의 양 어깨를 감싸고 그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를 위한 컵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스테인레스제 티컵에 적당히 식은 꽃차를 따라주었다. 그는 뜨거운 것과 매운 것에 약했다.

이 친구가 전화로 지리멸렬한 상담의 서두를 뗄 때부터 그녀의 가슴속에선 불편한 느낌이, 싫은 예감이 술렁였다. 그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연인 혹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티를 낸 적이 없었다. 단지 자신이 신호를 알아채지 못한 것뿐이었던가, 전화를 끊은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 그 모습을 지켜보았더라면 서운함이나 약간의 쓸쓸함 같은 너무나도 청순한 감정의 표현만을 읽었을 것이다.

자세한 얘긴 만나서 하지 않을래? 오랜만에 너를 보고 싶어. 그렇게 말한 건 그녀였고,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아, 미안. 내일도 계속 폭우랬지. 어디 나가기 좀 그렇지? 그러나 그는 자신도 그녀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 통화로 그녀가 파악한 것은 결국, 그에게 연인 내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 사람에게 친구가 무언가 실수한 듯하다는 모호한 정보뿐이었다. 일단 오늘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일단 오늘은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 그녀는 밤 깊도록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되풀이했다.

그의 대학교가 방학이라는 소리와 그녀의 가게가 장마로 손님이 없다는 등 하나마나한 근황을 교환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누군가를 ‘그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그 사람’이 그에 비해 연상임을 직감했다. 연상의 미녀는 동년배나, 자신 같은 연하보다, 그에게 어울린다. 그녀는 금어초와 버플레움과 마트리카리아에 둘러싸여도 환한 미소를 띠고 식물을 매만지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람의 생일을 그는 오래도록 모르고 있었다. 얼마 전 생각나서 물어보았고,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고 당황했다. 그는 그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가능한 한 최고를 선물하고 싶었다. 급하게 비행기를 잡고 외국의 필립 파텍 매장으로 갔다. 손목시계를 하나 샀다. 그 사람은 가끔 시계를 찼지만 척 봐도 낡은 싸구려였다. 중고로나마 버버리의 트렌치코트 같은 걸 입는 사람인데, 그런 물건을 차고 있다면 무언가 사연이나 집착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더더욱 갈아치우고 싶었다. 자신의 선물을 그 사람의 손목에 휘감고 싶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선물을 기다리는 소녀라도 된 듯이 설레는 심정으로, 연인의 생일에 세련되게 포장된 케이스를 내밀었다.

연인은 기뻐해주었다. 그런 듯이 보였다. 그 사람은 필립 파텍 로고를 알아보았고 플래티넘으로 만들어진 장신구가 수억 대는 나갈 거라고도 인지할 터였지만 기쁨을 표하며 받아들였다. 연인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그는 뭔가 잘못됐음을 눈치챘다. 별로냐고, 혹시 마음에 안 드냐고는 무서워서 물을 수 없었다. 날렵하게 빛나는 은빛 시계를 찬 손목을 들어보이며 웃는 연인의 모습은 황홀했지만, 그래도 무언가 잘못됐다는 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어떻게 만회하면 좋을지 도저히 모르겠어...”

파리해진 얼굴은 며칠째 계속된 고민 탓일까. 그녀는 어레인지먼트를 완성하고 꽃차를 홀짝였다. 꽃송이를 통째로 우려낸 중국산 모리화차. 그녀가 아는 언니는 나은이한텐 자스민이랑 일랑일랑은 안 어울려, 라고 부루퉁하게 말한 적 있다. 그다음에 바로 아니, 너무 어울리니까, 라고 말을 뒤집었다. 그녀는 모리화차 향이 자신보다는 친구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에게서 나는 돌과 쇠의 비린내가 자스민의 감미로움과 잘 맞았다.

애초에 ‘잘못’이란 게 진짜 있는 건지, 그의 착각은 아닌지는 새삼스럽게 확인하지 않았다. 소용없는 짓이 뻔했다. 그녀는 여상하게, 너무 지나치게 비싼 선물을 준 게 문제가 아니었을지 짚어주었다. 베이지색 블랭킷에 감싸인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너무, 지나치게 비싸서? 그는 중얼거렸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려 애쓰는 듯이.

그녀의, 백나은의 친구는 결코 상식이 결여된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센스가 평범하지 않은 면이 있었다. 그는 커다란 집의 ‘도련님’이었다. 한마디로 돈이 많았다. 이 사실은 그라는 인물을 구성하는 숱한 기묘하고 비현실적인 사실들 가운데 가장 재미없는 요소였지만 여기서는 관건이 될 터였다. 그는 미륵보살이라는 닉네임으로 무당 행세를 하는 누님과 푸른 눈의 노 집사, 그밖의 식솔들과 함께 살았다. 수억원 대 사치품을 선뜻 사는 능력치고는 자신을 꾸미지 않았다. 외모에 대해서든, 품성적인 면에 대해서든. 오늘 그는 청바지에 검은 반팔 티셔츠, 운동화 차림이었고 어느 것이든 시내 쇼핑몰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그에겐 자신을 꾸밀 필요가 전혀 없었다. 나은은 인스타그램의 가게 소개 페이지에 그를 모델로 한 사진을 올리고 싶은 충동을 몇 번 느꼈고 한두 번쯤은 실제로 부탁했었다. 그는 곤란한 듯 웃으며 거절했다. 그래도 나은은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사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카르멘 루즈 리시안셔스를 들고 눈을 내리깐 옆모습. 대리석질 콧날과 뺨.

그는 스테인레스 티컵을 조심스럽게 잡고 입술로 가져다댔다. 예법을 모르는 손조차 나은의 눈에는 아름답게 비쳤다. 긴 한숨을 몰래 삼켰다.

나는 단지 최고로 좋은 걸 그 사람에게 주고 싶었고, 라고 생각을 정리한 듯 그가 말했다. 최고라고 생각한 걸 선물하긴 했지만, 나한테 그 사람의 가치는 그런 정도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너무 비싸다든가,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변명조의 칭얼거림에 가까워진다고 느꼈는지 그는 고개를 젓고 덧붙였다. 그 얘기에 따르면 연인은 ‘일하는 사람’이고 수입은 불규칙하지만 많이 벌 때는 상당히 큰돈을 만진다고 했다. 연인의 소득수준에 비해 선물이 확실히 좀 거창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인의 반응은, 그 반응이 그에게 준 느낌은 선물의 금전적 가치와는 상관없었다. 어느 정도 관계가 있더라도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나은은 친구의 ‘느낌’을 존중했다. 느낌이야말로 핵심이며 모든 것이었다. 그녀는 금어초 어레인지먼트의 세부를 조정했다. 왜? 그녀는 물었다. 왜 그렇게 느꼈어?

그의 침묵에서 곤혹스러움과 답답함이 흘러나왔다. 왜, 왜지, 하고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자문했다. 나은은 기대하고 있었다. 조금 잔혹한 기대.

그의 연인이 어떤 사람인지 나은은 잘 몰랐다. 일하는 사람이고 중고로 버버리 정품을 입고 이젠 필립 파텍을 차는 사람이란 것밖에. 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가 스스로 얘기한다 하더라도 듣고 싶지 않았다. 나은은 그가 연인과 꽤 ‘오래’ 사귀어 왔다는 것, 그런데도 연인의 생일을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는 것, 짐작할 수 없는 이유로 그가 연인의 심기를 해치고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들만으로 충분히 불쾌했다.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여왕처럼 삐졌다. 왕국의 변두리에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백성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여왕처럼. 나은은 싫었다. 그에게 연인이 있고 자신이 몰랐다는 사실이. 전혀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 왜냐하면, 왜냐하면--

자신에게 과분한 선물이 아니냐고 그 사람은 분명히 말했어. 그는 잠긴 목소리로 실타래를 더듬듯 말문을 열었다. 그랬지만 거절은 하지 않았어. 사양하지 않았어. 고맙다고, 너무 멋지다고 했어. 시계는 그가 채워주었다. 나은은 가녀리고 하얗고 미지근한 어른 여자의 손목에 집요한 뱀처럼 감기는 플래티넘 밴드의 번쩍임을 보았다. 그는 연인과 눈 마주치기가 두려워서 한참 손목만을 지분거렸다. 연인의 눈빛에서 본 것을 재확인하기가 두려워서...

“무엇을 본 거야?”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괴로움. 망설임. 일말의 희망. 그의 몸에서는 비에 젖은 바위의 기척이 났다. 자스민 향을 실은 훈김이 비릿한 그 냄새를 적신다. 조용하디조용한 풍경. 창밖엔 폭우.

그 말을 한 적이 없어. 그는 거의 속삭거렸다.

무슨 말?

그 말.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그 자신도 연인도 그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감정은 자연히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 말 따위는 불순물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사랑한다’라는 불순물에 집착하는 건 관계가 다른 불순물로 변해버리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모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이 어디서 오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나은은 생각했다. 그녀는 친구의 아픈 곳을 찌를 필요가 없었다. 내버려두면 그 스스로 헤집을 테니까. 친구는, 그는 갈색 눈을 내리깔고 은빛 티컵에 비치는 수색만 하염없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은 그때 그 순간 연인의 눈빛이고 그가 어디에서든 보게 될 것 역시 그때 그 순간 연인의 눈빛이었다.

갑자기 치명적인 통증을 느낀 사람처럼 그의 자세가 무너졌다. 커다랗고 아름다운 손에 그는 자기 얼굴을 묻었다. 나은은 어레인지먼트를 치워두고 그에게 손을 뻗었다. 괜찮니? 괜찮아. 미안. 다시 고개를 든 그가 사과했다. 사과할 일이 전혀 아닌데도. 나은은 그가 이대로 자리를 뜨는 건 아닌지 우려했다. 나은을 향하는 친구의 눈은 붉고 메말라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언제나 그랬듯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나한테 말해줄 수 있을까?”

이 친구는 주변에서 그를 파악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그리고 스스로 자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는 망설이고 두려워했다. 연인 이야기를 하기가 두려운 것이다. 먼저 상담을 청해 온 건 그이면서. 왜? 나은은 가능성들을 짚어보았다. 설마 내가 아는 사람일까?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관계? 아니면 나라서? 연애 상담 같은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나밖에 없는데도, 내가 백나은이라서 연인에 관해 털어놓기 껄끄러운 걸까?

왜?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담, 그녀는 자조했다.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물론 이 오빠는 백나은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처럼, 백나은이라는 인간에게 약하다. 약점을 잡혀 있다. 처음 만났을 때 일어난 사고 때문에— 그때 나은은 그의 손에 거의 죽을 뻔했다.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무엇보다 기가 막혔다. 자기보다 세 사이즈는 작은 여자애를 서슴없이 패다니, 뭐 저런 쓰레기같은 새끼가 다 있나 싶었다. 한마디로 그에 대한 첫인상은 개새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사과하러 온 그의 태도를 보고 호감과 흥미가 생겼다. 절박한 자기혐오. 필사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피해자’의 존엄을 회복시키려 안달하는 서툰 진심. 그는 귀여운 개새끼였다.

그와 그녀의 관계에서 그녀가 그의 목줄을 쥐고 있다면 그건 그 스스로가 쥐여준 것이다. 나은의 조그마한 손에는 사람들이 갖다바친 목줄들이 수없이 쥐여 있었고 그는 컬렉션의 하나일 뿐이었다.

“네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알지만 그래도 걱정돼.”

그가 말했다. 뭐가? 나은이 물었다. 그는 깊은 숨을 쉬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블랭킷을 벗어 옆 의자에 접어 놓고 틀어져 있던 어깨를 바로잡았다. 그러자 흠잡을 수 없이 늠름한 자세가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서도 밝히는 거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질이 변했음을 나은은 감지했다. 이 친구는 곧잘 갑자기 스위치를 바꿔 넣었다. 섬세하고 나약한 그림자가 사라지고 그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그 사람은 너도 아는 사람이야. 그리고 여자가 아니야.”

나은은 ‘그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그녀는 실룩이는 입가를 필사적으로 제어했다. 웃기거나 황당해서가 아니었다. 순수한 경련이었다.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갑자기 밀어붙여진 데 대한 반사작용.

누구... 그 사람? 정말? 그 아저씨랑...?!

나은의 머릿속에서 일화적 기억들이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지르며 재편집되었다. 친구는 주변 사람들에게 인망이 높은 편은 아니었다. 마주칠 때마다 시비를 걸어오는 동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에게 대체로 신사적이고 친절했고, 그도 ‘그 사람’에게만은 온순해지는 듯이 보였다. 그 사람의 성정이 워낙 온후해서—적어도 겉으로 연출하기로는— 문제아 취급인 이 친구와도 잘 지내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그 무난한 관계가 실은,

“연애였어?”

그녀는 무심코 소리내어 말했다. 친구의 굳건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갈색 눈망울이 나은의 동요하는 모습을 빠짐없이 담고 있었다. 나은은 정신을 차렸다.

“미안, 그러니까, 네가 걱정하는 그런 건 아닌데, 놀라서. 음. 그분도 내가 아는 분이고, 너랑 그 사람이 그런 관계란 건 전혀...”

횡설수설했지만 반쯤은 의도한 반응이었다. 여기서는 약간 흐트러져 보이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녀는 동요를 합리화했다.

쏴아아.

시끄럽다. 한순간 귀가 진공에 적셔졌다 나온 것처럼 나은은 퍼붓는 빗소리를 갑자기 예민하게 의식했다. 거슬리는 배경음은 친구의 나직한 목소리에 간단히 압도되었다.

“역시 기분 나쁜가. 미안...”

“그런 거 아냐!” 그녀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러워서 좀 놀랐다니까, 그뿐이야. 실례는 내가 했어. 얘기 계속해줘.”

친구는 투명한 갈색 눈망울로 나은을 마주 보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냉혹하게 감지될 만큼 무감동해 보이는 눈빛이었으나 나은은 거기서 신뢰를 읽었다.

그는 백나은을 신뢰한다... 어쩌면 전적인 신뢰라고 할 수도 있다. 그녀는 생각했다. 어째서 이 오빠는 나를 이렇게까지 믿을까? -- 어째서 백나은 주변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미소와 신뢰를 보낼까 — 받아들여진 적 있으니까. 전적으로. 그 자신이 정말정말 싫어하는 흉한 면을 그 자신이 극복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그 예쁜 그림을.

내가 받아들여줬는데.

도대체 뭐지. 나은은 뱃속으로부터, 뱃속의 밑바닥으로부터 검고 진득진득한 용암이 스멀스멀 넘쳐오는 감촉을 느꼈다. 그 아저씨,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너의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받아들였기에 너랑 그런... 사이가 된 거지.

있지도 않은 듯이 당연하게 있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분노가 백나은의 가냘픈 어깨를 미세하게 진동시켰다. 친구의 눈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자스민 찻잔으로 눈을 내렸다. 친구의 이야기에 맑은 찻물이 탁하게 흐려져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흐려지는 것은 그녀 자신의 눈이다.

기말의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 종강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때는 연일 쨍하고 파르라니한 하늘색이 이어지고 있었다. 문득 보고 싶어졌기에 그는 연인을 만나러 인천에 갔다. 월미도란 곳을 가보고 싶었다. 중국인 거리라는 곳도 궁금했다. 생각해보면 데이트는 거의 서울에서 했기에 인천 거리를 함께 다니는 일이 드물었다. 그 사람은 ‘여기엔 남자 둘이 다닐 만한 데가 없어.’라는 소리를 했다. 서울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니, 그나마 서울이 낫다는 평이 돌아왔다. 그로서는 알 수 없는 기준이 작용하는 것 같았다.

일찍 인천 1호선을 탄 그는 연인의 일이 끝날 때까지 청라 호수 공원을 혼자 서성거렸다. 차이나타운에 간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다행히 해가 길었다. 근대화박물관 거리의 붉은 벽돌과 샛노란 철문, 짙푸른 담쟁이덩굴 따위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연인과 함께하면 세상의 아무래도 좋을 것들이 특별한 광채를 머금고 말을 걸어온다는 게 신기했다. 하루가 밤으로 기울수록 그는 로맨틱해졌다.

생각해보면 그가 ‘로맨틱’한 기분으로 섣불리 치달아버린 것부터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그런 기분이었던 나머지 그는 으슥한 곳에서 손을 맞잡고 있던 자신과 연인에게 시비를 걸어온 사람을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아 맞다 그러고보니,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지. 마침 잘됐다.

‘보세요, 저 이제는, 사람 몸 안 부수고도 잘할 수 있게 됐어요.’

남자의 입을 막고 팔을 비틀어 보였다. 비명이 그의 손아래 억눌러 터져나갔다. 연인은 눈썹을 치켰다.

‘이제 이런 것도 할 수 있어요.’

팔을 놔주고 양손으로 머리를 잡았다. 온 신경을 손끝에 집중했다. 자신이 무슨 객기로 그런 묘기를 보였는지 다시 돌이키면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그땐 왠지 할 수 있을 거 같았고, 해도 될 거 같았다. 조금씩 조금씩, 뚜껑까지 유리로 된 잼 병을 여는 기분으로 살아있는 목을 비틀었다. 남자의 성대에서 개구리가 짓눌리는 소리가 났다. 괜찮으니까 힘빼세요, 그렇지. 그는 남자를 달랬다. 그만하라고 몇 번이나 제지하는 연인도 달랬다.

공포라기보다는 공황에 빠진 남자의 눈이 보였다. 그는 남자의 바로 등 뒤에 있었다. 거의 180도 돌아가버린 목을 하고도 남자는 살아있었고 그는 자신의 솜씨가 기뻤다. 조심스럽게 원상태로 돌려놓고 놔주었다.

‘어때요?’

그는 웃었다. 연인은 온화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잘 알았다. 잘됐구나, 완벽하게 힘조절할 수 있게 돼서. 하지만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렴.’

연인의 기분을 해쳤을 가능성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언제나와 다를 바 없는 — 확실히 약간 더 짓궂었을지도 모르지만 — 응석을 부린 셈이었다. 연인도 평소처럼 받아준 듯이 보였다. 그는 마냥 가슴넋이 간지러웠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입술이 달싹였다. 하지만 부끄러웠다.

생일이 궁금해진 것은 산 채로 목이 비틀린 남자가 거품처럼 중얼거린 한마디 때문이었다. 천천히 목뼈가 뒤틀리며 남자는 선생님, 살려주세요 선생님, 하고 주워섬겼다. 애가 있어요 쌍둥이예요 걔들이 오늘 생일이에요 선생님 제발 살려주세요. 애초에 살려서 보낼 생각이었고, 그밖에 털어놓은 신상정보 따윈 듣자마자 잊어버렸지만 ‘생일’이라는 말만은 마음에 걸렸다. 그는 자신의 생일을 몰랐다. 누님이 얻어다준 주민등록번호가 있을 뿐이었다. 자기 자신의 생일을 챙긴다는 발상이 없었기에 타인의 것에도 무감각했다. 갑작스럽게 연인의 생일을 모른다는 사실이 중대하게 떠올랐다.

아늑한 방에 둘만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연인에게 생일을 물었다. ‘내 생일? 서류상의 거, 아니면?’ 연인은 되물었고, 물론 알고 싶은 건 ‘진짜’ 쪽이었다. 연인은 조금 당황한 듯이 보였다. 이윽고 날짜를 들은 그 역시 당황했다. 그날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황급히, 하지만 최선의 선물을 준비했다. 다시 아늑한 방에 둘만 있게 되었을 때 그는 떨리는 손으로 선물을 꺼냈다.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 몇 번이나 혀로 축였다. 말하려 했다. 그러나 포장을 풀고 로고를 보고 케이스를 열며 시시각각 미묘하게 신호를 보내는 연인의 미세표정에 그의 말이 흐트러졌다.

‘나는... 그러니까 저는 당신이... 당신이 내게 주는 모든 것이 좋고... 당신에게 닿으면 행복이 뭔지 알 거 같은 기분이 드니까...’

‘정말 멋지구나.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런데 너무 과분한 선물을 받는 거 아닌가 싶네.’

‘과분하다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해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게 닿는 게 좋아요. 당신이 나를 만지는 것처럼 내가 당신을 만지는 것도.’

그는 연인의 빈 손목을 살며시 잡았다. 백금빛 시계 밴드를 감아주었다. 정성스러운 손놀림으로.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불길함을 떨치려 노력하며.

‘당신이 나를 부드럽게 만지는 것처럼 제가 당신을 만지는 것도 할 수 있어요...’

그때 연인의 피부로부터 톡 쏘는 듯한 거부를 느꼈다. 깜짝 놀라 연인과 눈이 마주쳤다가 얼른 시선을 피했다.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연인의 눈빛에서 읽어낸 미묘하지만 명확한 징후를 무시하려 애썼다. 한참이나 눈을 깜박이지 않고 부릅뜨고 있는 바람에 눈머리가 시큰거렸다.

“무엇을 본 거야?”

백나은의 목소리가 그를 재촉했다. 그의 붉어진 눈에는 고개 숙인 나은의 고요한 앞머리가 보였다. 자수를 놓듯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가느다란 손가락들도. 이 애는 정말 작구나, 그는 생각했다. 작고, 너무나도 부드럽고 무해해 보인다. 이런 몸이라면 그 사람도.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를 무서워했어.”

그는 담담했다. 감정의 통각을 차단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돌처럼. 쇳덩이처럼.

“그냥 무서워한 게 아니야. 꺼렸어. 한순간 그 사람한테 난 꺼림칙한 것이었어. 그 사람은 처음엔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압도당한 거였어. 그 사람은 경계심을 세웠고, 불쾌해했고, 결국에는.”

백나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사람은 나를 미워하고 있었어.”

그녀는 맑고 고운 눈망울을 치켜떴다.

 

 

2.

친구가 다시 폭우 속으로 떠나고 그녀는 잘린 식물 부스러기와 식어빠진 티포트 따위를 치웠다. 금어초는 다발로 만들어서 주고 싶었는데 권하기를 잊어버렸다. 그녀는 친구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일으킨 감정의 진폭을 수습할 시간이 필요했다.

연인은 아무래도, 나를 미워하게 된 것 같다. 그게 친구가 내린 결론이었다. 나은에겐 사실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그와 연인이 어떤 식으로 연애하는 관계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어떻게 사귀고 몇 년 됐는지 관계의 진전은 어디까지 된 건지 등등,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한편 무언가 알 것도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생일선물로 최고급의 물질적 애정 표현을 선뜻 내놓는, 아주 힘이 세고 아주 젊고 예쁘고, 흉포하며, 섬세한 남자. 만약 그런 사람에게 사랑받는다면 나는...

나라면 너를 무서워하지 않을 텐데. 미워하지 않을 텐데. 나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게 오만인가? 허풍이 든 자존심 같은 건가? 저 오빠가 위험한 건 이미 알잖아. 살해당할 뻔했잖아? 그래도 무섭게 느껴본 적은 없다.

그 누구도 무엇도 두려워한 적 없다곤 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등골 서늘한 섬뜩함과 이질감을 한 번도 느끼지 않았다곤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나은은 그가 귀여웠다.

세상에, 오빠! 결론까지 내리고 입을 닫은 그에게 나은은 탄식을 내질렀다.

“너 어쩜 그렇게 겁이 많아!”

“어?”

“덩치는 산만 해갖고서 왜 그렇게 소심해? 사랑하는 사람끼리 그럴 수도 있지!”

친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럴 수도... 있는 거야?”

“있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한순간 혐오하기도 하고 공포심을 느끼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계속 사랑하는 건 평범한 일이야.”

“평범한, 일이야?”

“있지, 오빠.”

나은은 흰 테이블 위로 친구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어린 비둘기를 쥐듯이.

“오빠는 음, 좀 평범하지 않잖아?”

“으... 응.”

“그, 차이나타운에서 한 짓도, 그거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기절할 만큼 무서운 짓이거든. 알고는 있어?”

“좀 심했던 것 같긴 해...”

“그분이 네 그런 면을 전부 알고 받아준다 해도, 너의 감정을, 애정을, 뭐랄까 진심 같은 걸 너무 즉물적으로... 무지무지 비싸서 숨도 안 쉬어질 거 같은 선물을 갑자기 내미는 식으로 보여줘버리면 패닉 일어날 수밖에 없거든. 막 흔들리는 게 당연한 거라고. 그렇게 밀어붙여지는 감정 자체에 거부감이 일어나는 것도 자연스러워. 솔직히 말하면 그때 오빠는 그분이 오빠를 꺼리고 미워할 만한 짓을 했어.”

“정말?”

그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이면에 안심감을 숨긴 충격을.

“즉석에서 감당할 만한 처리용량을 넘었다고 할까. 그런 거야. 그뿐이야. 플러스가 밖으로 넘쳐흐른 만큼 잠깐 마이너스가 됐던 거지. 하지만 애초에 넘치도록 가득한 건 플러스잖아.”

그녀는 귀밑으로 넘어온 옆머리를 넘기고 싱긋 웃었다.

“그분이 널 미워하게 된 게 아니야. 잠깐 꼬마전구에 불이 들어왔다가 나간 거고 네가 너무 겁쟁이라 힐끗 보인 불빛이 산불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는 입을 살짝 벌린 채 가만히 있었다. 감미로운 안도감이 그의 신경 속속들이 퍼지고 있을 터였다.

“네 그 겁쟁이 버릇을 고칠 방법이 하나 있어.”

“뭔데?”

그는 덥석 물고들었다.

“사랑한다고 말해.”

사랑을, 말로 표현해라. 그리고 마찬가지로 말로 표현하는 답을 들으라고 백나은은 종용했다. 부추겼다. 친구의 해쓱한 뺨에 점점 홍조가 돌았다. 냉혹해 보이던 눈이 소년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말하라고... 그래. 네 말이 맞아. 말하고 싶어. 할 거야.”

그는 나은의 작은 손가락에 감싸인 손을 주먹 쥐었다. 그제야 나은은 여태껏 그의 손에 닿아 있었음을 깨닫고 제 것을 거둬들였다.

친구는 훨씬 기운을 찾은 상태로 나은의 가게를 떠났다. 밖은 더욱 어둡고 천둥번개가 사방에 들끓었다. 그녀는 티포트와 컵을 씻어 개수대에 얹어놓고 도자기처럼 말그레한 뺨에 검지를 댔다. 생각했다. 나는 그와 그 망할 아저씨의 관계에 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그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연인은 정말로 그를 견디지 못하게 될 거야,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증오하게 될 거야. 위축되고 상처입을 거야. 너무 미워서, 미워서 미워서 미워서 미워서 견딜 수가 없을 거야.

그 사람은 너를 감당할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와라. 그녀의 속은 검고 투명한 주문으로 가득 찼다. 와라. 돌아와. 내게로. 다시 와서 이야기해. 무엇이 너를 부숴버렸는지 네가 무엇을 견디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 도무지 어떻게 해도 어떻게도 되지 않는 심정으로 떠돌아다니는지 내 발밑에 엎드려서 고백해줘. 나는 그런 네가 좋아. 귀여워.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

사랑한다는 말, 좋지. 언젠가 하자고 그녀는 마음먹었다. 최악의 순간에, 그가 뿔뿔히 흩어져버리기 직전에.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면 무서워할 필요도 없잖아.

처음으로 백나은은 누군가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자각하고, 인정했다. 질투도, 또한.

사랑과 질투는 그리고 그녀가 가장 강하고 사악해질 수 있는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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