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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포획

2020.01.31 10:3901.31

  삐- 삐- 삐-

  휴대폰 알람이 요란하게 울린다. 소리로 보아 ‘안전 안내 문자’다. 나는 휴대폰을 확인한다.

 

  [강원도청]도내 아프리카돼지열병 확산 방지를 위해 야생멧돼지 총기사용 포획이 실시됩니다. 도민께서는 산행시 안전에 유의하시고 총기포획 강화방안에 협조 바랍니다.

 

  그래 알았어, 알겠다고. 이 미친놈들아. 근데 나는 이미 얼마 전부터 하고 있다고. 미칠 듯이 내려오는 저 씨발 것들을 겨우겨우 없애는 중이라고. 내가 신고했잖아. 너무 많이 내려온다고. 나 혼자서는 역부족이라고 도와달라고 말했잖아. 그땐 무슨 지랄 맞은 신고 절차 어쩌고저쩌고 위치가 어쩌고저쩌고 떠들어 대더니 이제야 뭘 한답시고 깝치고 있어. 그래서 여긴 언제 올 건데. 아무 연락도 없고 이딴 문자 하나 달랑 보내다니. 산행 같은 소리 하네. 나 산에 살아. 이 미친놈들아.

  곧 날이 저문다. 멍청하게 문자 하나에 역정 내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서둘러 요기를 하고 준비를 마쳐야 한다. 새카만 멧돼지를 포획할 준비를.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굴러오는 것을 멈출 준비를.

  오늘따라 입맛이 없어 작은 감자마저도 거의 안 먹다시피 한다. 나는 대충 치워놓고 겉옷을 입는다. 겹겹이 몸을 감싸야 한다. 검은 것을 마주하면 몸이 떨린다. 추워서 떠는지 두려워서 떠는지 알 수 없다. 아니, 사실은 둘 다다.

  개조한 공기총을 꺼내 든다. 탄창을 넉넉히 챙긴다. 사실 탄이 충분치는 않다. 그렇다고 적당히 챙길 수는 없다. 한 번에 두 마리가 동시에 내려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그 어둠을 혼자서 오롯이 버텨내야 하기 때문이다. 총기 장착용 야시경도 잊지 않는다.

  살며시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간다. 눈이 밤의 어둠에 적응할 때까지 잠시 기다린다. 내가 감자밭 구석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참호가 보인다. 그곳으로 향한다. 멧돼지가 출몰하는 경로를 바탕으로 만들었기에 현재로선 최적의 장소다.

  나는 긴장한다. 곧 출몰 시간이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한다. 저 두 잣나무 사이로 그것이 나타날 것이다. 또다시 한 마리가 같이 온다면 그것의 뒤를 따라오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번처럼 그것들이 감자밭 중심쯤에서 횡대로 섰을 때 사격하면 된다.

  누군가가 지금 당장 나를 보고 있다면 내가 자신만만해 한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내 겉모습일 뿐 나는 분명히 두렵다. 멧돼지들이 행하는 일정한 패턴이 있어 여태껏 대응해 왔지만 나는 지쳐가는 중이다.

 

  야시경의 눈을 통해 잣나무 사이에 있는 검은 것이 보인다. 다행이랄까, 하나인 듯하다. 그래도 역겹다. 나는 참고 적정 거리까지 올 때를 기다린다. 하지만 오지 않는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고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만 하고 있다. 야시경으로 보이는 그것의 안광이 오늘따라 유난히 흐리다.

  이런 씨발! 나는 입 밖으로 소리치는 것만은 겨우 막으면서 방아쇠를 당긴다. 멧돼지가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곧장 나를 향해 달려왔던 것이다. 탕! 꿈틀거리는 그것에게 총알 하나를 더 박는다. 그럴 필요가 없고 탄도 아껴야 하지만 이미 나는 흥분한 상태다.

  어둠 속에서 마음을 가라앉혀 본다. 흥분해 봤자 나한테 좋을 게 전혀 없다. 저것들은 큰 움직임과 소리에 득달같이 달려든다. 그렇게 된다면 멧돼지 패턴은 깨지는 것이고 내가 맞서기 버거워진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 곧 출몰 종료 시간이다. 오늘 더 나타나려면 지금까지 보건대 기껏해야 두 마리 정도다. 나는 스스로를 다잡고 다시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패턴은 이미 깨져 있었다. 검은 바윗덩어리가 마치 누가 집어던진 것처럼 나한테 날아온 것이다. 몸이 조금 떨린다. 추워서 이러는 게 아닌 듯하다. 나는 아까 챙긴 탄창을 재차 확인한다.

  시계를 본다. 종료 시간이 훌쩍 넘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있다가 갈 계획이다. 새로운 패턴이 생긴다면 익혀야만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문자 보낸 미친놈들은 안 올 거다. 이 깊은 산골에 사는 나를 못 찾는 게 아니라 안 찾을 거다. 확신이 든다. 항상 보여 주기 식이니까. 지랄. 더 생각하기도 싫다.

  자정이 됐다. 이때까지 어떤 놈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철수하기 전에 야시경으로 주위를 재차 살핀다. 아무것도 없다. 오늘은 정말 찝찝한 날이다. 광기 어린 멧돼지 한 마리뿐이었다. 아프리카돼지열병 증상에 방방 날뛰는 증세는 없는 걸로 안다.

  참호에서 나오는데 적막 가운데서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잣나무의 낙엽과 떨어진 열매를 밟는 소리다. 야시경에 눈을 대고 확인한다. 두 마리가 있다. 그런데 원래 통로에서 떨어진 위치다. 완전히 새로운 패턴으로 변경된 걸까, 아니면 새로운 패턴이 추가된 걸까. 지금은 알 수 없다.

  나는 침을 겨우 삼키면서 참호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정확한 조준을 하려면 총기 거치대가 필요하다. 후. 하마터면 발이 꼬여 넘어질 뻔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사격 자세를 취한다. 검은 것들을 지켜보면서 쏴 버릴 준비를 한다. 집중해야 한다. 두 마리가 동시에 아까처럼 달려올지도 모른다.

  근데 조금 이상하다. 저 두 놈은 안 움직이는 것은 아니고 적당히 어슬렁거리고 있다. 당연히 그건 그럴 수 있지. 모두가 판박이처럼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예민한 탓이다. 어쨌든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쏠 거다. 나는 기다린다.

  멧돼지들이 나를 향해 몸을 틀고 있다. 다행히 내달리려는 움직임은 없어 보인다. 어? 저게 뭐지. 한 놈의 눈 한쪽이 없다. 그 위에 귀 한쪽도 없다. 찢긴 듯하다. 내 쪽으로 오는 줄 알았는데 다시 몸을 튼다. 이번엔 다른 놈 배 대부분을 길게 가로지르고 있는 상처가 보인다. 삐뚤빼뚤하고 굵은 두 줄이 살을 깊숙이 파고 들어간 것 같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때문이라고 하긴 힘들다. 저것들을 유심히 보고 있자니 목적지가 있는 게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듯하다.

  검은 것들은 방아쇠를 당기기에 애매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사실 위치보다는 상처가 신경 쓰여 나를 주저하게 만든다. 이상한 감정이 든다. 미친 제정신이야? 저 바윗덩어리에 깔려 죽을 뻔했잖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으면서 마음을 다시 잡는다.

  이제 됐다. 최적의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눈알이 빠졌건 귀가 찢어졌건 뱃가죽이 뚫릴 뻔했건 내 알 바 아니다. 멧돼지들이 판치면 나는 살 수 없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다.

 

  잠깐. 씨발 대체 몇 마리야? 뭔 일이야? 방금 나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두 마리였던 멧돼지가 순식간에 거의 열 배 이상 불어나 있다. 검은 것들은 원래부터 잣나무 숲속에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탄도 탄이지만 무작정 갈기는 것은 자살행위다. 119에 전화라도 해야 하나. 제기랄, 한다 해도 저것들한테 나 여기 있다 알려주는 꼴이고 무엇보다 수중에 휴대폰이 있지도 않다. 겨우 집에 들어가서 신고한다? 그 사람들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여기다 저기다 알려주다가 시간 다 간다. 대응만 늦어진다.

  나는 극도로 숨죽이고 웅크린 채 야시경의 눈으로 멧돼지들을 살핀다. 몇몇이 이상하다고 느낀다. 달빛을 가리던 구름이 걷혀서 내 눈으로는 더 넓은 범위를 살핀다. 번갈아 가면서 보다가 이제야 공통점을 발견한다. 모든 멧돼지가 만신창이다. 꼬리는 많은 수가 없거나 끊어져 있다. 뒷다리가 모두 잘려 나가 엉덩이를 질질 끄는 것과 그 반대의 것이 있다. 두 눈 위로 정확히 두 줄이 그어져 앞을 못보고 여기저기 부딪히는 것이 있다. 코끝이 잘렸거나 귀가 아예 없는 것도 물론 있다. 온몸에 두 줄이 겹겹으로 새겨져 과연 살아있는 게 맞는지 의심 가는 것도 있다. 아까 그 두 마리는 무척이나 양호한 편인 것이다.

  서로 그랬을까? 설마. 그건 아닌 거 같다. 저렇게 할 수도 없다. 호랑이? 그것도 아닌 거 같다. 발톱이 다섯 갠데 저 두 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그럼 곰? 그것도 마찬가진데 무슨. 그리고 행여나 걔네가 저렇게 상처를 내놨다고 한들 그냥 놔두진 않았을 것이다. 잡아서 뜯어 먹었겠지.

  근데. 곰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라고 해서 안심할 상황인가. 아니지. 정신 차리자. 결과엔 원인이 있는 법이다. 검은 것들은 왜 저렇게 됐나. 주위를 둘러보지만 전혀 알 수가 없다. 추측조차 할 수 없다. 아, 그래. 다시 돌아가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은 아니라고 한다면 거기서 변형된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인지 모르겠다. 만약 그게 맞는다면 저 몰골의 멧돼지들은 순간 갑자기 좀비처럼 달려올지도 모르겠다. 손이 떨려 총기도 떨린다.

  달빛이 더 선명해진다. 멧돼지 무리는 여전히 똑같은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다. 잠깐. 지금껏 괴이한 점들이 많았지만 이것을 넘는 건 없다! 바로 소리다. 울음소리. 저것들은 왜 저토록 조용한가. 무슨 이유로 침묵을 지키고 있나. 내게 달려오다가 죽은 그놈이나 거의 사체가 된 저놈들은 어쨌거나 저 지경이 될 때까지 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것일까. 숲속 새소리도 오늘은 유독 약하다. 나는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어떤 계획을 세워서 대응해야 하나. 어떤 것이든 정말 떠오르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 바람 소리 안에서 잣나무 낙엽과 열매를 밟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도 들리기 시작하는 듯하다. 낯선 소리다. 흐르- 후-, 흐르- 후- 분명히 후루룩거리는 새소리와는 다르다. 소리는 규칙적으로 들린다. 마치 호흡하는 듯이. 바람을 타고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 같다.

  잣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모두가 비슷한 움직임으로 흐늘거리고 있는데 독특하고 독립적인 움직임이 있다. 나무는 아니다. 나무는 저렇게 흔들리지 않는다.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거다. 나는 반복해서 야시경에 눈을 붙였다 뗐다 한다.

  한참을 봤지만 소득이 없다. 실체적인 무엇인가가 보여야 하는데 찾을 수가 없다. 흐르- 후-, 흐르- 후- 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이내 소리는 더욱 커지고 그 움직임은 상처 입은 멧돼지 무리 가까이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검은 것들은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멧돼지들은 소리를 내지 않는 게 아니라 내지 못한 채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존재인가. 내가 맞설 수 있는 존재인가. 멧돼지뿐만 아니라 그것도 없애야 내가 산다. 며칠 전엔 멧돼지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게 유일하진 않은 것이다.

 

  분명하다. 움직이는 저것은 지금 이곳의 최상위 포식자다. 나도 공격한 뒤 잡아먹을지 어쩔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대비해야 한다. 집으로 가야겠다. 가서 탄창을 있는 대로 챙기고 칼이나 그래, 도끼가 있었지. 하여튼 가서 모조리 다 챙겨야겠다. 119에 전화도 해야겠다. 나는 천천히 발을 뗀다.

  저편에서 끽! 하고 짧게 한 번 멧돼지 소리가 난다. 침묵하던 검은 것이 마침내 소리를 낸 것이다. 저항하려는 거치곤 아주 짧고 적긴 해도 말이다. 우드득, 소리가 나고 무엇인가가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다. 묵직하다. 급히 참호에 몸을 숨긴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진 물체는 참호 근방까지 굴러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무엇인지 살핀다. 깨진 바윗덩어리라 여기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멧돼지다. 뒷다리가 없고 머리도 없는 멧돼지 고기다. 저항은 무슨. 뒈지는 소리였다. 저것은 나도 찢어발겨 마음에 드는 부위만 먹고 저렇게 버려 버릴 것이다.

  젠장. 그래도 발버둥은 쳐봐야겠지. 생각을 해. 묘수를 떠올리라고. 같잖은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일단 저게 멧돼지를 다 먹어 치울 때까지 숨어서 기다리자. 그리고 난 뒤에 총으로 갈겨 버리자. 어찌 됐건 한 놈뿐인 거 같으니. 이 도박 같은 방법밖에 없다.

  참호에 최대한 나를 숨긴다. 맨 위층 모래주머니 사이 틈을 벌려 곧 고기가 될 멧돼지들 옆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동선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한참이 지나고 드디어 겨우 움직임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멧돼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지독히 검은 실체다. 잣나무들에 가려 정확한 실루엣을 파악하긴 힘들지만 키라고 해야 하나 높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대략 큰 잣나무만 한 듯하다.

  그 실루엣 바깥으로 새롭고도 비교적 작은 실체의 움직임이 보인다. 길고 얄팍한 나무줄기 형태의 것이 180도 회전하면서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는다. 아니, 나무줄기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부드럽게 휘어지며 솟아올랐다. 하늘을 향해 솟은 그것의 끝에는 두 개의 뾰족하고 길고 긴 칼날 같은 게 붙어 있다. 잣나무의 끝과는 당연히 다르다. 그것은 미동도 없이 서 있다가, 어? 놓쳤다. 동시에 끽! 소리가 난다.

  뒤늦게 야시경을 통한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 역시 예상대로 멧돼지가 맞긴 한데⋯⋯. 멧돼지는 그것의 칼날에 관통당해 들어 올려지는 중이다. 멧돼지는 잣나무 뒤로 숨겨졌다가 또다시 우드득, 소리가 난 직후 머리가 날아간 채 모습을 재차 드러낸다. 고깃덩어리가 된 멧돼지는 칼날에서 빠지면서 저만치 날아간다.

  그것은 목적대로 움직였다.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가 삽시에 멧돼지를 내리꽂았다. 그러고는 어딘가로 가져갔다. 입이다. 그것은 포식자의 팔인 것이다. 팔이 하나일 리는 없을 테고 두 개가 달렸다면 저 큰 칼날은 네 개. 스치기만 해도 나는 조각날 것임이 틀림없다. 절대 가까이 다가가선 안 된다. 총을 갈겨서 날아가는 총알이 저것 급소에 맞기를 바랄 뿐이다. 급소가 있다면 말이다.

 

  나는 약간은 체념한 채로 참호 깊숙이 몸을 넣는다. 잠시 관찰을 멈추고 굳은 몸을 풀기를 시도한다. 잘 되진 않는다. 대신 소리는 집중하고 있다. 그래야만 하니까. 그저 저것이 얼른 포식을 끝내기만을 기다린다.

  끽 끽! 멧돼지 죽는 두 소리가 시간차 거의 없이 난다. 이내 우드득 우드득, 두 소리도 이어서 들린다. 이제 날려 버리겠지. 참호 벽에 몸을 바짝 붙인다. 아니다. 다시 끽! 소리가 나고 우드득, 소리가 들린다. 그래, 어서 처먹어라. 모두 남김없이. 다 니 거야. 소리가 몇 번씩 더 이어진다.

  일순간 잠잠해졌다. 나는 다시 모래주머니 사이로 총구를 들이밀며 경계에 나선다. 어렵지 않게 검은 실체를 포착한다. 여전히 나무들 사이에 제 몸을 숨기고 있지만 팔의 칼날을 보면 어느 정도 위치를 알 수 있다. 근데 저건 대체 뭘까. 잠깐. 칼날이 둘 넷 여섯 여덟⋯⋯. 몸뚱아리가 어떻길래 팔이 저렇게 달린 거지. 이런 씨발. 한 마리가 아니잖아.

  여러 팔들이 위로 올라갔다가 땅을 향해 휙 내려가고 재차 올라온다. 잠시 뒤 머리 없는 멧돼지 잔해들이 더 높이 딸려 올라온다. 머리만 먹는 놈들이구나. 내가 죽는다면 저렇게 죽는 거구나. 곧 팔의 주인들이 하나같이 팔을 크게 휘두른다. 덩어리들이 이번에는 더욱 큰 포물선을 그리며 여기저기로 날아간다. 그중 하나가 어, 어, 씨발! 덩어리에 맞아 죽을 뻔했다. 참호 벽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방아쇠까지 거의 당길 뻔했다.

  내가 여기 숨어 있는지 아나? 아니겠지. 안다면 덩어리 전부를 죄다 나한테 던졌겠지. 아니면 이미 내 앞으로 와서 내 목을 쳐 버렸을 거다. 얼마나 빠른진 모르겠지만. 탄창 개수를 확인한다. 그냥 적당히 가서 갈겨 버릴까. 멧돼지들이야 반병신에 거의 반이 죽었는데. 아닌가? 이제 저것들 때문에 내가 멧돼지를 만만하게 보네. 미친. 치여서 죽을 뻔했잖아. 돌아버리겠다 진짜. 어째야 하는 거야.

  모르겠다. 일단 멧돼지 고기 다 먹어 치울 때까지 기다린다. 기다렸다가⋯⋯. 도망! 그래, 도망치자. 지름길도 알겠다 죽도록 뛰자. 아니 멍청하게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저것들은 팔만 빨리 휘두르지 전체 움직임은 그렇지 않다. 승산이 있다. 살 수 있는 거라고!

  어디선가부터 아까 들은 적이 있어 낯익은 소리가 들려온다. 멧돼지. 멧돼지 뛰는 소리다. 점점 커지는 듯하다. 아닌가? 뭐야? 곧바로 몸을 돌려 전방을 살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씨발! 너넨 또 뭐냐고! 몇 마린지 모르겠다. 게다가 몸 성한 것들이다. 집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젠장,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또 어디선가부터 발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갈수록 크게, 많이 들린다. 멧돼지 무리가 몰려온다. 온 사방으로 몰려간다. 나 때문이 아니다. 멧돼지들은 도망치는 중이다.

  탕! 탕! 쏠 수밖에 없었다. 시야에 없던 놈들이다. 손이 떨린다. 나는 이제 좆됐다. 멧돼지도 멧돼지지만 저 칼날에 노출된 것이다. 멧돼지 떼가 날뛰기 시작한다. 모조리 다 나한테 달려올 줄 알았는데 집 앞 텃밭에서, 풀밭에서, 감자밭에서 우왕좌왕 날뛰기만 하고 있다.

  그런 멧돼지들을 여기저기서 포위하면서 다가오는 실체가 있다. 두 팔이 아닌 세 팔을 마구 휘두르는 저 검은 무리의 칼부림에 멧돼지들의 눈과 귀와 코와 다리와 꼬리가 잘려 나간다. 저것들은 저렇게 먹이를 반쯤 죽여 놓은 뒤에 머리만 씹어 삼키고 버려 버리는 것이다.

  도망쳐야 하는데, 미친 듯이 달려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예상대로 검은 실체의 기동력은 낮다. 나는 그저 뛰기만 하면 되는데 머릿속에서 또 다른 내가 외치고 있다. 내 차례가 다가온다, 내 차례가 다가온다.

  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멧돼지 몇 마리가 운 좋게 빠져나간다. 나는 또 다른 나의 입을 틀어막고 달릴 준비를 한다. 셋을 세고 나서 달릴 것이다. 하나, 둘⋯⋯. 순간, 다리가 으스러지듯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만다.

  몇몇 실체가 땅속에서 돋아나듯 곧추서더니 셀 수도 없이 서로 엉킨 다리를 꿈틀대자마자 도망친 멧돼지 바로 뒤에 다다랐다. 팔은 닿기도 전에 하늘로 솟아 있었으며 닿음과 동시에 멧돼지를 내리꽂았다. 탈출구는 없는 거다. 우드득, 우드득, 우드득,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멧돼지 고기 한 덩어리가 참호 속으로 들어왔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오줌을 지리는지 바지가 젖고 있다. 침도 흐른다.

 

  나는 흠칫거린다. 뺨 위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끽! 멧돼지 죽는 소리와 우드득, 멧돼지 머리 씹는 소리와 솨- 비 내리는 소리가 한데 섞여 귓속을 파고든다. 참호 깊은 곳에서 몸을 더욱 웅크린다. 머리통 날아간 멧돼지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덮칠 것만 같다. 아니, 이것보다 지독히 검은 놈이 이미 팔을 하늘로 쳐든 채 나를 내리꽂으려 하고 있겠지.

  허무하다. 이렇게 벌벌거리기만 하다가 그냥 죽어버리는 건. 아무리 덧없는 인생이었어도 이건 아니다. 뒈질 땐 뒈지더라도 총이라도 갈기자. 적어도 멧돼지처럼은 안 죽는 거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면서 위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칼날은 보이지 않는다.

  천천히 몸을 전방으로 다시 돌린다. 바로 앞에 그것이 있다. 내가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다. 눈이란 게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다. 나무줄기와는 거리가 먼 세 팔은 밑으로 내려놓았고 얽히고설킨 수십 가닥의 다리는 땅에 흩트려 놓았다. 비를 맞는 몸 가죽이 보인다. 여전히 암흑 같은 검정으로 표면이 매끄럽다. 꿈틀거리는 몸 가죽을 보니 역겹다. 온몸으로 비를 마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꾸물거린다.

  내 앞에 이것이 세 팔을 들어 올린다. 세 쌍의 칼날에는 벌써 멧돼지가 한 마리씩 꽂힌 상태다. 그리곤 포획물을 꿀렁대는 검정 원기둥 같은 제 몸통 상단 어딘가로 가져간다. 입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안 보인다. 한 팔이 먼저 무작정 그곳에 멧돼지를 들이민다. 그곳이 순식간에 넓고 크게 부풀면서 먹잇감 머리를 감싸자마자 우드득, 그대로 자른다. 잘린 머리는 검은 실체의 몸통을 조금씩, 조금씩 벌리면서 아래로 내려간다. 똑같은 포식 장면이 두 번 더 반복된다. 멧돼지 고기들이 저 멀리 날아간다.

 

  비는 그치지 않는다. 너무 춥다. 나는 아직도 어정쩡한 사격 자세를 취하고 부르르 떨면서 서 있다. 눈앞에 이것은 포식 뒤로 미동도 없다. 주위에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언제 칼날로 나를 관통시킬지 모른다. 적어도 총이라도 갈겨 보기로 했잖아. 이 새끼야. 병신같이 죽지 마. 나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제대로 건다.

  양손에 힘이 빠진다. 총을 떨어트린다. 또 다른 검은 무리가 주위를 꽉 메우고 있다. 저편 잣나무 숲속을 빈틈없이 채운다. 저 너머 산등성이가 산불에 모조리 타 버린 것처럼 검게 변한다. 내 시야는 끝 모를 어둠으로 가득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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