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너머

2019.12.31 18:2512.31

한 없이 긴 하얀 팔
 
 처음부터 끝까지 죽 쓰자고 마음먹었지만 어디가 처음인지 분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잠시의 망설임 끝에, 다혜가 담배 두 갑을 미끼삼아 나에게 상담을 요청한 때부터 적는다. 과방 소파에 길게 누워있던 내 앞에서 다혜가 더듬더듬 꺼낸 이야기의 시작은 이러했다 - 지난 학기 때 같이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 있는데, 왠지 자꾸 눈이 갔다는 것이다.
 
"예뻤어?"
"그런 거 같기도... 아니, 그보다는 말 그대로 눈이 갔어요. 멋없는 구식 헤드폰을 언제나 끼고 다녔고. 덥수룩한 머리는 빗질도 안한 듯 한 산발인데 그게 또 꽤 잘 어울렸구요. 매점에서도 복도에서도 도서관 앞에서도 이상하게 눈에 띄었지는데, 그래서 같은 수업에서 만났을 때는 어쩐지 반가웠어요.
기말 끝나고 잠깐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다음 학기에 성의 사회학 듣는다니까 자기도 그 수업 듣는다면서 좋아하더군요. 그런데 막상 개강하고 나니 보이지 않는 거예요. 워낙 대형 강의라 출석도 안 불러서 출석부에 이름이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개강하고 이주일 쯤 지난 후였어요. 그 주 발표 팀원 명단에 그 애 이름이 있더군요. 잠시 후 그 이름을 가진 학생이 나와서 발표했어요. 그 동안 못 알아본 건 당연했어요. 스타일이 완전히 바뀌었던 거예요."
"어떻게 ?"
"아주 많은 스타일. 그러니까.."
 
다혜가 주저하는 사이 나는 대강 짐작하고 말을 이었다.
 
"어깨를 넘는 단정한 생머리에 참한 귀걸이에 가는 목걸이. 튀지 않는 화장. 그런 거?"
"아, 네. 맞아요."
"사학년 발표에 알맞은 의상이네"
"네, 전에도 비슷한 경우를 봤어요. 원래 긴 금발 머리에 힙합 풍의 옷을 입고 뛰어다니던 친구가 있었어요.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나고 나니 그냥 갈색 생머리에 단정하게 지나가더군요."
 
종종 있는 일이었다. 졸업이나 취업 전후까지 기간을 넓힌다면 나는 그런 사례를 몇 개든 이야기할 수 있다 .
 
“그렇지만 이상했어요. 다른 사람처럼 확 달라진 모습도 놀라웠지만, 왜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까, 설마 그 애도 날 못 알아보는 걸까, 그게 가장 의문이었죠. 수업을 마치고 말을 붙여 볼까 했지만 그 애는 강의가 끝나자마자 전화를 하며 밖으로 나가더군요.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거랑 귀신인지 괴물인지와는 무슨 관계야?
 
"음, 며칠 전의 일이에요. S관 독서실 있잖아요, 다음 날 중간고사 대체 퀴즈가 있어서 거기서 밤 샐 생각이었어요. 잠 깰 겸 커피나 마시려고 나왔는데 복도에 그 애가 있었어요. 복도 끝 문을 열고 계단실로 나가고 있더군요. 담배를 피우려는 게 아닐까 했어요. 천천히 닫히는 문을 보고 있다가 저는 한번 말을 붙여보기로 결심했어요. 그런데 계단실에는 아무도 없더군요.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발소리만 희미하게 들렸어요. 시계를 보니 거의 자정이었지요. 저는 천천히 발을 옮겼어요.
S관 오른 편 날개 지하로는 처음 내려갔어요. 복도 양옆으로 문들이 죽 있더군요. 복도 저 끝에서 어떤 문 하나가 열려 있었어요. 그 방으로 들어갔나 싶었죠. 하지만 저는 더 이상 따라가지 못했어요."
"왜?"
 
다혜는 잠시 입을 멈추고 숨을 쉬었다.
 
"보았거든요. 그......"
"그...?"
"길게 내밀어진 흰 팔이요."
 
나는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그 애 팔이 길었다고?"
"그게 아니예요. 계속 따라갈까 말까 고민하면서 저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어요. 그때 그 방에서 아주 길고 하얀 손이 나왔어요. 사람의 팔이 아니었어요. 문을 닫으려고 나온 사람의 팔이라면 몸통이 따라 나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 팔이 그냥 끝없이 길게 나와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어요. 저는 움직일 수도 소리를 낼 수도 없었어요. 그렇게 잠깐 서 있다가 움직이지 않는 발을 가까스로 천천히 움직여 독서실로 돌아갔지요.
우리가 같이 듣는 수업은 다음날이었어요. 나는 수업 시간에 그 애를 찾으려 했어요. 하지만 좀처럼 찾을 순 없었지요. 다들 비슷비슷해 보이는 모습 속에 그 애는 파묻혀 있었으니까요. 뭔가 절박한 기분이 들어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밖으로 뛰어나가는데, 가장 앞자리에 앉아있는 그 애를 보았어요.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노트에 마지막 필기를 끝마치고 있더군요. 저는 무서워졌어요. 무언지 모를 것이, 모든 것이."
 
다혜는 갑작스레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그게 끝이에요."
"할 이야기 더 있는 거 같은데"
"별로. 그 다음은 그냥 바보 같은 이야기예요. 나는 무서워져서 가방을 싸서 그대로 강의실을 뛰쳐나왔어요. 다시 돌아가지 않았지요. 그게 다예요. 언니, 혹시 아는 거 없어요? 언니도 예전에 지하에서 비슷한 것을 보았다고 들었어요."
 
 
 
길 잃은 개
 
인문대와 상경대가 같이 쓰는 S관은 6년 전에 지어졌다. 한국의 신축 빌딩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S관 역시 번뜩이는 철근과 유리를 온 몸에 두르고 있다. 통유리의 반사광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그 건물의 이름은 협찬재벌그룹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예전 그 자리에는 그저 인문관이라 불리던 고딕식 건물이 있었다. 일제시대부터 있던 건물이라 했다. 미로처럼 휘도는 좁고 긴 복도와 계단살이 빼곡한 나무 층계를 가지고 있었다. 창문이 온통 푸른 나무 그늘로 가리워져 건물 안쪽은 늘 서늘하고 어둑했다. 오랜 세월 학생들이 밟고 지나간 돌바닥은 닳아 매끈거렸다. 중앙 홀에서 휘익 미끄럼을 타면 계단 앞에서 현관 나무문까지 한 번에 미끄러져 갈 수 있었다. 그 건물은 오래된 만큼 많은 전설을 품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두운 인문관 지하에서 맨발로 걸어 다닌다는 흰 옷의 소녀 이야기를 수근거리기도 했다. 내가 학교에 들어온 두 번째 해에 그 건물은 헐렸다.
 
그리고 많은 비산먼지와 함께 새로운 건물이 솟아올랐다. 삐걱이는 나무 층계 대신 부드럽게 열고 닫히는 승강기를 갖추고, 밖으로 밀어 여는 쇠창 대신 환한 천창을 갖추고, 녹색 천의 게시판 대신 협찬사의 로고가 선명한 평면 PDP를 갖춘 채 새 건물은 문을 열었다. 투명한 회전문을 통과하면 석조바닥의 라운지가 사람을 맞이했다. 아니, 이 문장은 정확하지 않다. 라운지의 오만한 태도는 '맞이'라는 단어의 어감과 어울리지 않았다. 건물의 한가운데를 휑하니 비어서 만든 높은 천장의 라운지는 실제보다 훨씬 넓고 거대해 보였다. 매끈한 벽과 바닥은 소음을 난반사했다. 방문객들은 건물 안 가득한 빛과 소리의 홍수 속에서 미아처럼 주눅이 들곤 했다.
 
나는 발길을 멈추고 문가에 서서 S관 라운지를 바라보았다. 중앙냉난방 장치가 된 이 건물은 모든 소리와 공기들은 자기 안에 가두었다. 이 환하고 폐쇄적인 건물 어디에도 유령이나 괴물이 깃들 여지는 없어 보였다. 옛 인문관에 숨겨져 내려오던 전설 하나가 길을 잘 못 잃고 신관 안으로 섞여 들어간 것이리라. 나는 다혜를 찾아 건물 안 바글거리는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5분 뒤 다혜와 나는 지하 복도에 서 있었다.
 
"팔이 뻗어 나온 곳이 어디야?"
"음.....여기 쯤이었던 것 같아요."
 
신관 오른쪽 날개 지하에는 단대 동아리 방과 과방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천장 가까이에 붙은 작은 환기창으로 햇빛이 힘없이 너풀거리며 들어왔다. 지하의 습기 탓인지 공기는 어딘지 축축했다. 벽은 부분부분 벗겨져 있었고, 지저분한 천장에는 먼지 낀 파이프들이 지서가고 있었다. 바로 한 층 위의 결벽증적인 라운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다혜는 노문과 과방과 '울타리'라는 정체불명의 동아리방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어디였는지 확실치 않아?
"잘 모르겠어요. 여기인 거 같기도 하고."
 
문에 붙은 간유리 안쪽은 어두웠다. 나는 동아리 방문을 열고 전등스위치를 눌렀다.
 
"어, 이건 뭐야?"
 
깜박이는 형광등빛 속에서 낯선 사물들이 언듯 보였다.
 
"괜찮아요?"
"걱정 마, 괴물 같은 건 없어."
 
불을 켜고 바라본 그 방은 이상한 파티 직후의 방 같았다. 벽은 온통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바닥에는 톱밥이 가득했다. 한쪽 벽에는 삐뚤삐뚤한 손 글씨로 '길 잃은 개' 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반대편 벽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큰 구멍이 나 있었다. 옆 방과의 사이에 세운 합판 벽을 둔기로 때려 부순 듯 했다. 한구석에는 플라스틱 크리스마스 트리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무언가 적혀 있는 천과 깃발들이 방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나는 다가가 천에 적힌 글자들을 읽으려 했다. 한 구절은 러시아 알파벳으로 적혀 있어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옆의 깃발에는 '어둠의 벽,/ 밤의 감옥은/ 태양이 퍼붓는 총구 밑에서 분쇄되었다/ 빛과 시가 뒤범벅되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비춰라' 라는 글이 써 있었다. 이게 무슨 뜻 같냐고 물으려는 찰나 다혜가 빠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다혜의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방과의 사잇벽 구멍을 통과하여 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길고 붉은 머리칼. 호리호리한 몸에는 단순한 디자인의 하얀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흰 쇼올이 드러낸 어깨 위에서 반짝거렸다. 나는 옛 인문관 지하에서 출몰했다던 흰 옷의 소녀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누구세요?"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그 또래 특유의 불분명한 발음이었다. 그 현실감에 힘입어 나는 말했다.
 
"아, 노문과 복수전공생들인데, 과방 찾다가 잘못 열었네요."
 
붉은 머리의 여자는 그 거짓말을 믿는 것 같았다.
 
"아, 저 쪽 분 강의실에서 본 기억 나네요. 현대시의 이해 시간에."
"네, 안녕하세요."
 
다혜는 허둥거리면서 인사를 했다.
 
"누구야?"
 
또 한 명이 구멍 너머 머리를 들이밀었다. 먼저 들어왔던 학생의 원피스와 맞춘 듯한 디자인의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둘의 첫인상은 어딘지 닮은 것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둘은 전혀 닮지 않았다.
 
"이수? 손님들이 와 있어."
"손님들? 길 잃은 개에 참여하시려고?"
 
조금 껄렁한 말투였다. 나는 대답 없이 그 학생을 쳐다보았다. 다혜가 노려보지 말라면서 나에게 작게 주의를 주었다. 이수라고 불린 이는 낯선 얼굴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걸어와 방 구석 세면대 앞으로 가더니 거울을 보면서 앞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다. 이수는 머리를 자르며 노래하듯 말했다.
 
"그러면 그대는 배수구의 플룻으로 야상곡을 연주할 수 있는가? "
 
 
어리디 어린
 
그들의 기이한 언행의 출처를 나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날 이수가 한 말은 마야코프스키의 시 한 구절이라고 했다. 그 붉고 검은 방은 더 이상 울타리라는 이름의 동아리 방이 아니었다. 그 사회과학 동아리는 신입을 모으지 못해 일 년 전에 사라졌고, 빈 방을 그 노문과 과모임 '원심분리기'가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임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혁명기 러시아 문학-영화 동호회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기실 그 모임 멤버들이 다른 노문과 학생들에 비해 관련 책이나 영화를 진지하게 보거나 연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가장 적절한 설명은 그들이 소극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리라. 토익 학원과 스펙 용 현장으로 달려가는 다른 학생들을 조소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키노 아이 선언문을 읽는 연극 말이다.
 
그 방의 야단스러운 인테리어 역시 1920년대 러시아 문학카페 '길 잃은 개'를 본딴 것이라 했다. '원심분리기'라는 명칭도 당시 러시아 미래주의 시단 중 한 파의 이름을 빌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러시아의 '원심분리기' 모임에 대해 잘 모르는 듯했다.
 
“어쨌든 멋진 이름이잖아요, 안 그래요?”
 
원심분리기 아이들의 외모는 눈길을 끄는 편이었다. 특히 원심분리기 방에서 처음 마주친 이수와 리가 그러했다. 때론 그들의 얼굴이 평범했다면 어떠했을 지 궁금해진다. 모든 것이 아주 같진 않았으리라.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들을 한 번 씩 돌아봤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인파 속에서 걷고 있을 때는 실제보다 더 커보였다.
 
이야기는 한 달 후, 리가 출연한 독립영화의 상영 날로 흘러간다. 소규모영화제에 걸린 그 영화는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아트하우스 영화이고 싶어하는 학부 졸업 작품처럼 보였다. 리의 얼굴 클로즈업 샷이 유달리 많은 것이 눈에 띄었지만, 그조차 딱히 효과적이지 않았다.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스크린 앞에 앉은 리가 더 인상적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없는 검은 깃털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소매 없는 검은 모피 재킷을 걸친 채 였다. 리가 걸어 나오자 원심분리기 멤버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몇 안 되는 관객들은 어리둥절해했다.
 
극장 밖 거리로 나가자 찬 공기가 손과 얼굴을 휘어 잡았다.
 
“겨울의 밀림이네.”
 
이수가 중얼거렸다.
 
“빠스쩨르나크죠?”
 
지서가 말을 걸었다. 지서는 유일한 일학년이었고, 네 명의 선배들을 열정적으로 좋아했다.
 
“응, 1905년의 포에마. 선배, 영화 어땠어요?”
 
그 질문은 나에게 향한 것이었다.
 
“글쎄, 감독이 ‘잔다르크의 수난’을 좋아한다는 것 밖에 모르겠어.”
 
내 대답에 다 같이 웃었다. 20년대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가져온 그 작품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 영화의 느린 속도에 기겁했다. 빨리감기를 눌러보아도, 클로즈업된 마리아 팔코네티의 얼굴은 정상속도와 거의 똑같은 느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역시 초기 영화는 러시아 영화 뿐이라고 그들은 함부로 단언했다.
 
“그래도 팔코네티보다 리 선배가 더 예쁘지 않아요?”
 
지서가 말하자, 경이 키 큰 지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연하지. 얘는 리의 팬이잖아?”
 
지서는 볼이 달아오른 채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애써 뻔뻔스러운 태도를 가장하며 말했다.
 
“그거야 당연하잖아요.”
 
하지만 그 말은 너무 작아서 바로 옆에 있던 내 귀에만 스칠 정도였다. 가엾어라. 나는 휘파람을 불며 지서의 팔을 잡았다.
 
“방향이 잘못 되었어.”
“네?”
“안나의 집으로 가기로 했잖아. 반대쪽으로 가야한다고.”
 
우리가 들어간 아파트는 텅 비어 있었다. 안나의 가족들은 어제 이미 이사를 갔다. 이 집에 세들어 오는 사람들은 내주에야 들어온다고 했다.
 
“벽지도 내일 새로 바르기로 했으니까, 오늘은 마음껏 놀아도 돼.”
 
안나는 가방 속에서 보드카를 꺼내며 말했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사온 긴 양초들을 모두 꺼내어 불을 붙였다. 마지막으로 신촌역 중앙 아시아 음식점에서 포장해온 청어 샐러드와 수프들을 꺼냈다.
 
“차가운데.”
“수프는 괜히 가져 왔나 봐, 시모바르도 없는데.”
 
그때 안나가 베란다에서 무언가를 질질 끌고 왔다. 원통형의 전기 난로였다.
 
“버린다 하길래 여기 베란다에 놓아달라고 했어. 오늘 우리가 쓴다고. 잘했지?”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술을 한 잔 씩 했다. 원심분리기 멤버들과 함께 하는 세 번째 술자리였다. 그들은 이미 내가 같은 일원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몇 해 전 나는 베르토프의 노트의 애독자였다. 그의 영화보다 그의 일기와 메모들이 더 좋았다. 십대 시절 몇몇 또래들이 일본 소설 속 문구를 프로필에 적어두었던 것처럼 나는 그의 선언문 구절들을 노트 앞장에 적어두곤 했다. "혁명이라는 암초에 걸려 찢어져 열린 영화의 배 속에서......" 식으로 시작되는 구절들 말이다. 덕분에 원심분리기 멤버들의 대사와 행동들이 어디서 따온 것이지 대강 알 수 있었다.
 
“무슨 생각해요?” 술병을 들고 가던 이수가 말했다.
 
“너희 처음 만났을 때.”
“그때 난 보자마자 선배가 마음에 들었죠.”
“안 그래 보였는데.”
“그야, 쑥스러웠거든요.”
 
이수가 웃으며 지나가자, 내 옆에 앉아 있던 경이 말을 붙였다.
 
“자, 이제 슬슬 솔직히 말해 봐요. 이수랑 리 만났을 때 우리 방에서 뭐하고 있었어요?”
“알잖아. 다혜가 너희 모임 들고 싶다고 같이 가자 했어."
"에이, 이제 그냥 말해도 괜찮아요. 뭔가 찾고 있었지요? 우리도 알아요. 소문도 퍼지고 있 고."
"무슨 소문?"
“우리 방에서 괴물인지 유령인지 나오다던데."
"진짜 나와?"
"그거 찾으러 온 거 아니었어요?"
"너희가 낸 소문인 줄 알았는데? 그편이 재밌으니까."
"아, 선배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해요."
“쉿, 조용히.”
 
이수가 저쪽에서 입에 손을 대었다. 안나가 블록의 시집을 꺼내 소리 내어 읊기 시작하자, 이수는 가방에서 매직을 꺼내 벽에 받아 적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영원한 감금은 두렵지 않고
우리에게 좁은 벽들은 감지되지 않네,
그리고 경계에서 경계까지
우리는 충분히 전율하고
우리는 충분히 변화할 것이니...!
 
그것을 신호로 모두 다 벽에 달라붙었다. 나도 펜을 잡고 벽으로 갔다가 무엇을 써야 할 지 몰라서 손을 우두커니 내렸다. 나는 베르토프가 인용한 시들, 베르토프가 좋아했을 법한 시들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구절들은 너무 멀었다. ‘......전기와 공산주의에 의해 풍부해진 새로운 미래의 삶의 방식’ 이라고 차마 적을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벽지에 빼곡히 적고 있었다. 이수의 유려한 글씨체는 ‘배고픈 군중의 머리처럼 / 1916년이 혁명의 면류관을 쓰고 / 다가온다 / 두 눈을 뽑힌 사람들에게’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때 이 모든 것이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릴리아가 곧 온대.”
 
이수가 말했다. 리의 본명은 윤일리라 했다. 이수는 사촌동생인 그녀를 온갖 애칭으로 불렀다. 릴리, 릴리아, 릴리카, 릴레티카, 릴리노체크.
 
“언제?”
“종로에서 출발하니까 삼십분 쯤 후에?”
“애인이 금방 놓아주었나 보네.”
“리한테 애인이 있어?"
"왜, 그 감독이랑 데이트 하는 사이 아니야?"
"데이트는 그 영화의 어리버리한 연출부 스탭이랑 하고 있지. 하지만 어느쪽도 릴료노크의 애인은 아니야."
 
나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앉아서 술을 더 마시는 것을 선택했다. 그때 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 앉아서 뭐해요?”
“혼자 마시는 술은 세계를 푸른 불꽃으로 -”
“그건 누구 인용이죠?”
 
정신을 차려보니 내게 말 건 것은 리가 아닌 이수였다. 둘의 목소리는 거의 비슷했다. 저쪽에서 안나가 대신 답했다.
 
“아흐마토바 아니야?”
 
아마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 말도 아닐 것이다.
 
“지금 리, 거의 다 왔다는데, 술이랑 안주 더 사온다니까, 나가서 짐 좀 들어줄 사람?”
 
지서가 나가자, 이수는 ‘릴리카의 환대를 위해서’ 라며 노트북을 켰다. 이수가 리와 함께 편집한 영상물을 틀기 위해서였다. 곁에 있던 나는 얼결에 프로젝터 연결을 돕기 시작했다.
 
“선배 원래 영화 동아리였죠?”
“응.”
“영화 계속 하고 싶은 생각 없어요?”
“전혀.”
“음, 난 졸업 후에 러시아에 가서 영화 공부 하고 싶어요.”
“왜 하필 러시아?”
“전공 살려야죠.”
 
이수는 씩 웃으며 버튼을 눌렀다. 빈 벽 위에 영상이 돌아가자 아이들은 환성을 보내며 벽으로 시선을 보냈다.
 
나는 찬 바람을 쐬기 위해 베란다로 나갔다. 아파트 주차장을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는 리와 지서가 보였다. 리는 지서에게 가볍게 키스를 하고 그대로 걸어 나갔다. 지서는 걸음을 멈춘 채 삼사십 초 가량 머뭇거리다가 발을 빨리 했다. 나는 담배를 피우며 속으로 지서에게 애도를 표했다. 유리문 안쪽에서는 음악에 섞여 원심분리기 멤버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유리 너머로 벽에 새로 추가된 옛 시들이 보였다.
 
...외경스런 미래의 환상.
모든 것이 멀리서 일어나 온다.
수 백년의 사상, 꿈, 그리고 세상.
그리고 끝없이 펼쳐질 미래까지도...
 
바로 그 옆에는 다른 시가 적혀 있었다.
 
이 곳은 당신이 찾는 도시가 아니다
이 밤은 당신을 위한 밤도 아니고...
 
마지막 것은 누구의 시인지 알 수 없었다.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면서 베란다 위를 서성거렸다. 그러나 곧 현관문이 열리면서 리와 지서가 들어왔고, 아이들은 유리문을 열고 내게 들어오라고 손짓해 불렀다.
 
그날의 술자리에 대해서는 더 길게 적을 필요가 없으리라.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밤이었다. 그 멤버들은 떠들썩한 술자리를 좋아했고, 술을 마시다 말고 벌이는 즉석 낭독회나 안나의 기타에 맞춰서 다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세련된 태도를 취하며 현 보수 정권에 대한 냉소적인 언급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친환경 브랜드와 해외 여행과 혁명 예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이수는 무어라 중얼거렸다. 신자유주의가 길들인 자의식에 벗어난, 무언가 다른 종류의 예술을 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나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수는 무얼 느꼈는지 말했다.
 
"어, 나도 알아요. 우리 철없는 거 당신이 안다는 거"
 
그리고 이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택시 창에 머리를 박고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혹은 졸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질주하는 택시 창 밖 너머 전광판들이 수면 위에 무딘 칼날을 드리우고 있었다. 올라가는 미터기의 금액을 한 눈으로 보며 나는 이수를 한강물 속에 처박고 싶었다. 아직 나도 어린 탓이었다.
 
 
유령들
 
어린 시절 옛 인문관에서 미아가 되었던 적이 있다.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서늘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던 것을 기억한다. 나와 같은 대학을 다녔던 어머니가 행정실에서 서류들을 확인하는 동안 나는 슬쩍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두 시간 후, 경비실이 떠나가라 울고 있던 나와 다시 만나기까지, 어머니 역시 대성통곡을 하며 캠퍼스 안을 헤맸다 한다. 인문관에서 실종되었던 그 두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 인문관 밖에서의 학교 정경은 비교적 선명히 머리 속에 남아있다. 특히 집회 직전, 사람들로 가득한 광장을 지날 때의 풍경이 생생하다. 깃발 아래 앉아 있던 어머니의 후배들은 내 등에 맨 유아원 가방에서 불법 유인물들을 꺼내면서 내 볼에 입 맞추고는 귀엽다며 까르르 웃어대었다.
 
당시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며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있던 광장은 내가 입학할 즈음 야외 영화제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학생들은 광장에 스크린을 걸고 금지된 영화를 틀었다. 영화를 보기 위해 한데 모여 눈을 반짝이고 있던 사람들은 곧 흩어졌다. 더 이상 정치적인 이유로 금지되는 영화도 없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개봉되지 않은 영화라 하더라도 쉽게 다운받아 각자의 방에서 볼 수 있었다. 광장의 야외 스크린은 내려졌다.
 
이후 광장도 곧 사라졌다. 이것은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다. 지금 그 광장의 절반은 주차장이 되어있고 나머지 절반에는 고층 글로벌센터가 올라서 있다. 언제나 스크린에 그림자를 드리우던 꽃나무의 자리에는 협찬 재벌그룹 총수의 이름을 딴 현판이 빛나고 있다. 그 나무는 몇 년 전 노동운동가였던 학교 선배의 장례식 때 그를 기리며 심겨졌다 했다. 그래서 우리는 스크린을 걸 때 이리저리 뻗치는 그림자에 애를 먹으면서도 그 나무에 대해 대놓고 불평하지 못했다. 그 나무와 함께, 나무 밑에서 영화운동의 역사를 말해주던 선배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영화광이라고 착각했던 나는 더이상 영화를 보지 않는다.
 
 
신관 지하의 길고 흰 팔 이야기에 얽혀 들어간 이후 나는 몇 번 예전 인문관의 꿈을 꾸곤 했다. 녹색 그늘이 드리워져 아늑했던 낮의 건물이 아니다. 늦은 밤의 어둑한 복도. 그 속을 기어 다니는 얼굴 없는 유령들. 거기서 흰 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걸어오곤 한다. 나는 오랜 친구처럼 반갑게 다가가 그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그 여자아이는 인사처럼 내 얼굴을 깨문다.
 
 
 
“아, 지겨워.”
 
리는 하품을 했다.
 
“그래서, 자꾸 감정놀이를 하는 거야?”
 
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 말야....”
 
나는 할 말을 찾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선배는 늘 말을 하다 말더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했으면 좋겠어.”
“지서에게 그러는 거 아냐.”
“그게 전부예요?”
“일단은.”
“선배는 좀 이상해요.”
“뭐가.”
“선배는 우리를 싫어하지요?”
 
놀라서 리를 바라보았다. 리는 별 말 하지 않았다는 듯 나무 테이블 위에 길게 엎드린 채 손톱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도 아무 말 없이 옆에 있는 잡지를 주워들었다. 옆에 기대 놓여 있던 주황색 깃털 펜이 굴러 떨어졌다. 얼마 전에 이수가 홍대 앞에서 사온 것이었다. 요즘 이수는 시인처럼 행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적어도 이수를 싫어하는 건 알아요.”
 
리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답했다.
 
“안 싫어해.”
“의외다.”
 
나도 의외였다.
 
“사실 나는 이수가 가끔 싫어요. 선배도 나랑 같은 이유일 거라 생각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나는 모르지.”
“간단히 말해서, 이수의 부모님은 의사이고 외할아버지는 지역 유지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달라요. 무엇이든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이수도 곧잘 하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에요. 그 애는 잃을 것이 많거든. 윗세대를 무시하는 척 하는 건 그냥 취미이고, 그애는 자기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나갈게요”
 
리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나는 리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테이블에 흩어진 화장품들을 파우치에 그러모으는 손, 지갑을 낚아채듯 잡는 손, 자신의 목덜미처럼 창백한 손, 문득 그 손이 멈추었다.
 
“선배가 부모님이나 집안 이야기 하는 거 들은 적 없어요. 나도 그런 거 눈치 챘어요? 우리 아버지, 영영 다시 안 봤으면 좋겠어요.”
 
나는 웃었다.
 
“나도 그런데.”
“와.”
 
리는 마주 웃었다.
 
“지금 아버지 어디 계세요?”
“몰라. 어디 있겠지. 어머니는 재혼하셨어. 젊었을 때 여기 다니셨대.”
“이 학교?”
“응.”
“어머니는 어떤 분?”
“멋진 분이었던 거 같아. 미대였고 민중 미술 했다고 들었어.”
“그렇구나.”
 
리는 방을 가로질러가 기타를 잡았다. 몇 소절을 가볍게 튕기더니 잠시 뒤 말했다.
 
“그런데 난, 그랬던 어른들 불편해요.”
“왜?”
“싫어요.”
“왜?”
“모르겠어요.”
 
리는 이상할 정도로 순진한 태도로 말하고 있었다. 평소 리는 다소 차갑고 영리한 인상이었다.
 
“혁명 예술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좋아해요. 발음이 멋있잖아.”
 
리는 일어나 기타를 버리고 내 곁에 털썩 앉았다.
 
“나는- 그냥- 지금이 지겹게 텅 빈 시기라고 생각해요. 남루하고 평범한 악덕들이 가득한 시대라고 이수가 말했지요. 내가 아는 친구는 너무 지루해서 하루에 세 명에게 고백을 했대요. 잠깐 삶이 흥미진진해지긴 했다고 하죠.”
“그거 네 이야기 아니야?”
“글쎄요.”
 
리는 살짝 웃었다.
 
“그런데 선배는 어떤 사람인가요?”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선배는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
 
나는 말이 없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리와 있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난 선배가 말이 없어서 좋아요."
 
리는 계속 중얼거렸다. 툭툭, 끊어지는 어조였다.
 
"이수와 나, 닮았어요?"
"아니."
"그래요? 많이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리는 거의 소곤거리듯이 목소리를 낮춰 말하고 있었다.
 
"선배에게만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나랑 이수는 사실 자매예요. 사촌인 척 하고 있는 것 뿐이예요. 우린 같은 어머니를 가지고 있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문 앞에서 마주친 이수의 쇄골 근처에서 리의 붉은 머리카락 한 가닥이 반짝였던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없어
 
기말이 다가온 밤, 나는 늦게까지 과방에서 과제를 하고 있었다. 곁에서 다혜도 교양수업 교재 앞에서 진을 빼고 있었다.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
“성적 장학생도 그런 말을 하네.”
“수업 안 듣고 교재만 보니까 뭐가 중요한 지도 모르겠어요.”
 
그즈음 다혜는 이미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부럽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다혜는 창백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그녀는 외삼촌의 회사를 지긋지긋해했다. 그러나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듯 이 시기의 취업은 드문 행운이었다.
 
다혜는 책을 덮고 기지개를 펴며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에 비친 얼굴이 흡사 유령 같았다. 창 너머 어두운 나무 사이로 S관의 기업 로고가 푸르게 빛났다.
 
"언니, 저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무서운 일.”
 
나는 장난치듯 말했지만, 다혜는 웃지 않았다.
 
"레포트 잘 되어가요?"
"아니."
"그러면 잠깐 음료수 마시러 갈래요?"
 
어두운 휴게실에서 음료수 자판기만 혼자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버튼을 눌렀다. 언제나처럼 내 몫의 데자와와 다혜 몫의 레모네이드였다. 캔을 따서 다혜에게 넘겨주었다.
 
"어제도 원심분리기 애들과 술 마셨다면서요?"
"응."
"어땠어요?”
 
나는 어제 나눈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그냥 평범했어."
"평범한 애들처럼은 안 보이던데."
 
다혜는 심상하게 중얼거렸다. 잠깐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괜히 언니만 끌어들여 놓고 나는 발을 뺀 것 같아서 미안해요."
"신경 쓰여? 취직하고 바쁜 거 아는데, 뭐.”
 
다혜는 어리광 부리듯 말했다.
 
“하나도 신경 안 쓰여요. 언니는 나에게 아무 말도 안 해주는걸.”
“말해 줄 게 없으니까.”
“예전에 인문관 지하에서 무얼 봤는데요?”
"나중에. 정리되면 말해줄게. 지금은 아니야.“
"매번 그런 말."
 
다혜는 무언가를 곰곰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언니, 대신 부탁이 있어요."
"뭔데?"
"내가 긴 팔을 본 건 딱 이 시간이었어요. 그 이후로는, 무서워서, 언니랑 같이 간 것 말고는 S관 지하로 간 적 없어요. 지금 같이 가지 않을래요?"
"문 잠겼을 텐데."
"개구멍을 알아냈어요. 언니. 그러니까."
 
나는 다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날 봐요?”
“아냐.”
“나, 혹시 이상해요?”
“아니-.”
 
흰 팔에 대한 다혜의 집착은 일종의 도피처럼 보였다. ‘내가 운이 좋은 걸 알아요’ 다혜는 종종 그렇게 말하곤 했는데, 그때의 표정은 지극히 불운해 보였다. 다혜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딱히 낙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언니들처럼 살게 되리라. 손꼽아 월급날을 기다리며 머리를 하고 맛집 찾아 가고 몇 해 뒤엔 결혼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부모님이 소개해준 남자들을 두어 번 만나 보기도 했다. 상대의 부모님은 다혜의 부모님과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 지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라고 했다. 이후로 앞으로 부모의 아파트보다 넓은 곳에서는 살지 못하리라. 그래서 다혜는 말하곤 했다. “나쁘지 않아요. 더 뭘 바라겠어요? 난 행운인걸요. 얼마나 좋아.”
 
그리고 지금 다혜는 매달리듯 나를 바라보며 휴게실에 서 있었다.
 
나는 빈 캔을 쓰레기통으로 던지며 말했다. 그래, 가자.
 
다혜가 말한 개구멍은 배기관 때문에 경첩이 완전히 닫히지 못하는 화장실 청소용품 보관소 창문이었다. 그 아래 도랑물이 하얗게 얼어 있었다. 그 창문의 틈새는 너무 좁고 위험해서 나만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다. 다혜는 아쉬운 표정으로 건물 밖에 남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어두웠다. 나는 벽을 짚으며 내려갔다. 아래쪽에서 희미한 불빛과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쩌면 지서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서는 밤늦게까지 붉은 벽과 톱밥의 동아리 방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 독특하게 치장한 방과 그 방의 선배들을 지서는 즐겁게 쳐다보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서와 다혜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원심분리기 방으로 내려가는 나 자신도 어쩌면 다르지 않으리라. 우린 모두 현혹되고 싶었다. 낯선 것에, 예외적인 것에, 여기가 아닌 것에, 그러나 끝내 안전하게.
 
나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다혜가 원할 만큼 충분히 복도에 서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다혜가 물었다. 어땠어요? 나는 다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볼이 찬 바람에 붉게 터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아무 것도 없었어. 아무 것도.
 
 
불면
 
다혜를 먼저 돌려 보내고 나는 학교에 혼자 남았다. 레포트가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아주 급한 것은 아니었다. 텅 빈 과방에 앉아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차가웠지만 담배가 필요했다. 오랜만에 이 시간에 앉아 있는 과방이었다.
흰 팔 이야기를 처음 듣던 당시 나는 말 그대로 과방에서 살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안양의 이모 댁에 묵고 있었지만 그 곳에는 옷가지 등을 가지러 한 달에 서너 번만 들를 뿐이었다. 나는 과방의 간이 침대에서 잠을 자곤 했다. 샤워실에서 씻었고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나쁜 생활은 아니었다. 지각할 염려 없이 몸이 편했고, 껄끄러운 친척들과 부대낄 필요 없어 마음이 편했다. 유일한 문제는 겨울이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담요를 뒤집어 쓰고 전기난로를 켜도 새벽이면 꽤 쌀쌀했다. 그즈음 다혜와 친해진 것은 말 그대로 행운이었다. 다혜의 복층 오피스텔은 넓고 쾌적했다.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 다혜는 종종 물어보았다.
 
- 언니 학교에서 원심분리기 애들과 늘 같이 있지요? 그 애들이 뭔가 말하지 않던가요?
 
다혜는 원심분리기 아이들이 흰 팔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거의 확신했다. 그 멤버들은 적극적으로 그런 암시를 흘리고 있었다. 지서가 처음 흰 팔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서 방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의 반응도 그러했다.
 
“이 방에 비밀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지서의 첫 말에 경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이야기를 이제 들었니?”
 
이수가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지서는 신중하게 답했다.
 
“음,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뭔가 잘못 본 거 아닐까요? 저 여기서 가끔 밤 새는데 한 번도 수상한 거 본 적 없어요.”
“수상하기는 이 방 자체가 수상하지. 저 벽을 부순 것은 아무래도 과했다고 봐.”
 
경의 말에 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과할 수록 멋진 거야. 어쨌든 지서, 너는 잘못 생각하고 있어. 이 방에선 정말로 이상한 일이 일어나거든. 아니, 이 건물 자체가 이상해. 예전에 이 자리 있던 건물에도 유령 이야기가 많았어. 그렇죠, 선배?”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이 건물에 어떤 비밀이 있는 건데요?”
“그건 몰라.”
 
리는 이수에게 눈웃음을 보내자, 지서가 말했다.
 
“선배들 알고 있지요?”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해?”
 
아니라고 말하는 리의 말투는 반대의 뜻을 암시하듯 했다. 나는 지서와 함께 있을 때의 리에게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난 그냥 지서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에요’ 라고 리는 말했다. ‘원하는 건 뭐든 들려주고 싶어요. 귀엽잖아.’ 나는 할 말이 없이 고개를 돌렸다. 리는 덧붙였다. ‘선배는 그런 거 못하죠?’
 
리가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학교를 오래 다니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의 내 태도 때문이리라. 그렇게 물을 때의 후배들은, 내가 장기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든지, 뜻한 바가 있어 대학로 연극판에 있었다든지, 아니면 절이나 수도원, 하다못해 교도소라도 다녀왔기를 바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원하는 어떤 이야기도 들려줄 수 없었다. 하지만, 언니는 취직 안 할 건가요, 라는 식의 질문에 대해선 나름대로 대처할 수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술만 드시면 하시던 말이 있거든. 넌 절대 회사원이 되지 마라. 회사는 사람을 갉아먹는 곳이다. 난 아버지 말씀은 거의 모두 안 들었지만, 그 말만은 들을 생각이야.’ 그 장난 같은 대답을 들었을 때 리는 허리가 휘어지도록 웃었다. 리는 종종, 선배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라고 말했다.
 
“우리, 아닌 거 같은데, 은근히 비슷한 게 많지 않아요?”
 
나는 리의 그 말에 마주 미소지어줄 줄 알았다. 그 즈음 리는 나에게 신기할 정도로 솔직한 태도로 대하곤 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마지막 이 주 동안 우리는 자주 만났다. 학교 후문에 있는 조용한 술집들에서 책을 읽을 때가 많았다. 어두침침한 불빛 아래서 다른 나라에서 쓰여진 백 년 전 시들을 읽다가 서로의 집으로 자러 갔다. 리가 문학에 별다른 조예가 없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요? 이수는 예전 러시아 원심분리기 멤버들처럼 시와 산문을 묶은 작은 책자를 만들자고 했어요. 벽지 뒷면에 인쇄하고 선언적인 문구를 가득 넣어서. 우리의 다른 일처럼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하면 되지.”
“이번 학기 끝나면 이수는 어학연수를 가요. 다녀와서는 아버님 권유대로 로스쿨 준비한다고 하더군요.”
“아, 그럴 것 같더라.”
“잘 하겠지요. 은근히 성실하고, 성적도 좋고.” 리는 작게 웃었다. “그런데 어학연수 간다 하면서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요? ‘언제나 그렇듯이 노예가 되어드리지’라고. 참 이수답죠?”
 
그 가을, 원심분리기 멤버들은 많은 계획을 세웠다. 거의 대부분 술이 깸과 동시에 사라지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들이 원심분리기 방에서 왁자지껄하게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벽에서는 옛 무성영화들이 배경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가끔은 함께 영화를 찍자고 했고, 가끔은 게릴라 연극 공연을 기획하기도 했다. 그런 자리에서 리는 즐거워 보였지만 나와 둘이 있을 때는 다르게 말했다.
 
“선배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쟤네들, 어떨 때는 견딜 수 없다고.”
 
그건 이상한 말이었다. 리는 원심분리기의 아이돌이나 마찬가지였고, 스스로도 그 역할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홍콩에 쇼핑하러 갈 계획을 세우면서 자본의 모순 운운하는 안나라던지, 엄마 카드로 여행 두어 달 다녀오고 가난한 방랑 예술가처럼 행동하는 이수라던지.”
“너는 애인 카드를 쓰면서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리는 웃었다.
 
“차라리 그게 윤리적이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 선배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을 절반도 못 알아들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괜찮지 않아요? 자기가 하는 말을 모른다는 건 알고 있잖아. 적어도 난 그래. 그걸로 안 되나요?”
 
리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는 사이 과방은 찬 기운으로 가득했다. 어느새 시계는 새벽 두 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늦게 들어가니 먼저 자라고 다혜에게 문자를 했다. 그리고 조금 전 원심분리기 방에서 엿들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려 애썼다.그래, 언젠가 리는 말했었다.
 
“난 거짓말을 잘해요. 방법은 간단해요- 스스로 자기 말을 믿으면 되는 거예요."
 
그때 리의 표정은 전에 없이 성실해 보였다.
 
 
거짓말
 
"오랜만이다. 그동안 바빴어요?"
 
리는 방에 혼자 앉아 색지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천장에 붙은 가느다란 창에서 햇빛이 쏟아져 리의 손 위에서 반짝거렸다. 그녀가 늘 끼고 다니는 L.Yu.B라는 이니셜 반지였다. 마야코프스키의 연인 릴리 브릭이 이와 같은 반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너희, 자매라는 거 거짓말이지?"
 
리의 손이 멈추고 눈이 내 얼굴에 멈추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아챈 듯 했다. 예상 외로 선선히 대답이 나왔다. 네. 그래요. 리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환각을 걷어내는 산문적인 말투로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준비한 거짓말을 내놓았다.
 
"알바하는 매장에 이수의 어머님이 오셨어. 자기 딸도 같은 학교라고 반가워하시더라. 몇 마디 더 하다가, 이수에게 같은 학교 다니는 사촌 같은 건 없다는 걸 알았지.”
"오래 가는 비밀 없다더니. 재미없다."
 
말과 달리 리의 태도는 꽤 재미있어 보였다.
 
"왜 그런 식으로 말했어?
"그 편이 낭만적이니까."
"글쎄, 출생의 비밀 같은 건 진부하지 않나. 게다가 러시아 문학도 아니고 일본 만화 같은 데. 사촌 자매라니."
"인정해요. 즉석에서 만든 얘기라 조잡하다는 것도. 일본만화라, 뭐, 영향 받았을 수도 있 죠. 전공도 만화 좋아해서 선택한 거니까."
"무슨 말이야?"
“나 일본학 전공이잖아요. 몰랐어요?”
 
리는 웃었다. 볼에 보조개가 움푹 들어갔다.
 
"노문과라며?"
"나 러시아 알파벳도 모르는 거 눈치 못 챘어요? 이수가 노문과니까 끼어든 것 뿐이에요."
 
나는 마주 웃었다.
 
"그래서 네가 그렇게 싫었구나."
"네?"
"네 이름은 좋지만...... 아, 그 이름도 가짜 아니야?"
"당연히 호적에 올라간 이름은 아니죠. 내가 지은 이름이지. 그걸 가짜라고 할 수 있나?"
"네 얼굴도 좋은데 말야, 넌 싫었어. "
"늘, 내내?"
"응, 처음부터 지금까지."
 
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단지 입술만으로 곱게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크게 뜨여진 눈에는 아무 감정이 비추어지지 않았다.
 
"모두 거짓말이지?"
"뭐가요?"
"이 방의 괴물에서부터 네가 나에게 한 이야기 전부."
"내가 무슨 말을 한들 뭘 믿겠어요?"
 
리는 거꾸로 매달린 크리스마스 트리 쪽으로 걸어갔다. 리는 트리의 플라스틱 잎새 하나를 뚝뚝 부러뜨리면서 말했다.
 
“원심분리기 놀이는 너무 오래했어요. 이제 녹색램프 모임을 열면 어떨까요. 기삐우스의 살롱처럼 동양풍 쿠션을 잔뜩 갖다놓고 수요일마다 모이는 거죠."
“또 베끼는 것?”
“우리가 그것 말고 또 뭘 하겠어요?”
“그 말은 진심이야?”
“네?”
“그 말도 멋있어 보이려고 하는 거 아니냐고.”
 
리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려 애썼다.
 
"그거 알아요? 언니가 지금 이러는 거 하나도 안 멋있어요."
 
그때 문이 열리고 이수가 들어왔다. 자주 입던 노란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노란 블라우스를 즐겨 입던 시인 마야코프스키에 대한 경의의 표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수!"
 
리는 이수에게로 달려갔다. 이수의 목에 팔을 두르고 무어라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밖으로 나왔다. 찬 공기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흐릿하게 그들의 모습이 창문을 넘어 눈 속으로 흘러 들어왔고 나는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 꼭 1920년대 러시아일 필요는 없었어요. 70년대 미국 페미니스트들의 흉내를 내도 좋았지요. 새롭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상관없었어. 지겹지만 않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만약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이 펑크였다면 브래지어 더미 위에 불을 지르고 다이어트 식품가게에 스프레이로 슬로건을 적었겠지요. 하지만 우리 취향은 좀더 고전적이라서.
 
-그보다는 좀더 겁이 많아서였겠지?
 
리는 입을 벌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먼지
 
그 이후 나는 원심분리기 방에 가지 않았다. 그 즈음 이미 녹색램프 방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다혜는 더 이상 그 방의 수수께끼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빴고 쉽게 피로해했다. 휴일에는 하루종일 잠을 자거나 소개팅한 남자와 가로수길에 가거나 인터넷쇼핑을 했다. 그녀는 내가 왜 이 방으로 들어왔는지 천천히 잊어가고 있었다.
 
"원심분리기 말야...."
 
오랜만에 그 이름을 입에 올리자 다혜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아, 그 이상한 애들 말이지요.“
 
나는 놀랐다. 감히 멋있다고 말 못할 뿐, 다혜는 원심분리기 멤버들에게 내심 호감이 있었다고 생각해왔다.
 
"음, 그래, 그렇긴 하지.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할 줄 몰랐는걸."
"왜요?"
“적어도 그 애들의 방에 대해선 관심있을 줄 알았어."
 
다혜는 하품했다.
 
"글쎄요, 지금은 피곤해요. 내일은 8시까지 출근해야 해요. 나중에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다혜는 곧 잠들었다. 나는 뒤척이다가 알바를 좀더 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이 방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다혜는 원심분리기 애들에게 냉정해진 이유를 말해주었다. 졸업식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지하로 내려갔다가, 자기가 방을 착각한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흰 팔을 본 장소는 원심분리기 방이 있던 왼편 복도가 아니라 오른쪽 복도였다고 했다.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그런데 걔네들은 왜 자기 방에 무슨 비밀이 있는 것처럼 말했을까요?”
“아무래도 그 편이 더 재밌으니까-.”
 
능히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나 역시 다혜 앞에서 옛 인문관 지하에서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분위기를 잡았지만, 그건 그냥 사소한 장난이었다. 어린 시절 이 학교에서 길을 잃었을 때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나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 것도 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옛 인문관의 유령 이야기를 완성시킨 것은, 몇 해 전 영화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찍었던 35mm필름 영화였다. 소수의 실험영화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필름으로 영화를 찍지 않는 시대, 우리들은 이상한 고집처럼 필름에 매달렸다. 그러나 결과는 어디에 내놓을 만한 수준이 아니어서 동아리제 기간에 두어 번만 상영했던 작품이었다. 학교 건물의 유령이 이 건물의 역사를 증언해주는 내용의 필름은 캐비넷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지만, 그 필름 속의 유령 이야기는 천천히 학교 안에 퍼졌다. 나는 그것을 내버려두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원심분리기 멤버들을 본 적이 있다. 멀지 않은 곳을 걸어가는 그들을, S관 앞 벤치에 앉아 바라보았다. 그들의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머리를 짧게 자른 리는 검은 타이즈를 신고 백색 털코트를 입고 커튼 고리 같은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 리의 캐릭터는 무엇일까, 라고 나는 열없이 생각했다. 지서 대신 신입생처럼 보이는 아이 한 명이 옆에 있었다. 그 아이의 반짝이는 표정 역시 낯익은 것이었다.
 
지서와는 중앙도서관 앞에서 한 번 마주쳤다. 원심분리기 멤버들과 더 이상 함께 하지 않는 듯 했다. 우리는 담배 한 대를 같이 피웠다. 나는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고 근처 논술 학원에 운좋게 파트타임 직을 얻었다고 말했다. 지서는 방학 동안 구청에서 알바를 했고, 마지막 날 구청에서 알바생들을 대상으로 열어준 취업 특강이 지루했지만 퍽 유익했다고 말했다. 이후 지서와 따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출구
 
이제 이야기는 끝을 향해 간다. 그날 있었던 일을 나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모든 기억은 토막나있다. 며칠 비가 온 후라 드물게 하늘이 새파란 아침이었다, 라고 기억한다. 그러나 오후에는 다른 비가 내렸다, 고 기억한다. 그 뿐이다. 그러나 더 이상 자세히 적지 않아도 내가 전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미 SNS에 나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S관이 무너지고 있어. 건물이! 타임라인 보라구, 영상 찍어 올렸잖아. "
 
나는 핸드폰에 대고 소리 질렀다.
 
"부실공사, 아직도 그런 말을 해? 부실공사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알잖아. S관 밑에 길고 하얀 팔이 살고 있잖아. 걔네가 무언지는 몰라. 하지만 걔네가 일어서고 있어."
 
다혜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말했다.
 
- 선배, 미쳤어요? 쇼크 받았나 봐요.
 
"너도 봤잖아. 처음에 네가 보고 나에게 이야기했잖아!"
 
다혜는 말했다.
 
- 헛 걸 본 거겠죠. 선배도 그렇게 생각했잖아. 선배도 사실 내 말 하나도 안 믿었잖아요. 솔직히 말해 봐요. 내 방 와서 살려고, 방세 아끼려고 믿는 척 했던 거잖아.
 
나는 띄엄띄엄 말했다.
 
"아니, 그래,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정말로 하얀 팔이 있다니까. 우리를 다 집어삼키려는!"
 
 
이제 더 무엇을 써야 할까, 나는 이 이야기의 끝을 알지 못한다. 지금 나는, 그날 붕괴된 건물 안에서 갈겨 썼던 글을 바라볼 뿐이다. 그때 내 앞 3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시멘트 벽에 깔려 찢겨진 다른 학생의 다리가 있었다. 그 곳에서 할 수 있던 일은 침묵 속에서 비관에 빠져들거나 잠을 자거나 이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는 일 밖에 없었고,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나는 잠을 자고 싶지 않았고 부서진 프린터 옆에는 A4박스들이 가득했다.
 
 
‘나는 사람들을 헤치며 달렸다. 축제의 가도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을 밀치면서 나는 그들에게서 모두 같은 냄새가 나고 있음을 눈치챘다. 달리는 인파 속에서 나는 몇 명의 낯익은 그림자를 보았다.
"안나! 리!"
손을 잡고 걷고 있는 안나와 리 같았지만, 사람들의 벽이 다시 가로막았다. 우리는 아무 것도 믿지 않았다. 모두 다 치기였고 장난이었다. 아무도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도 진심으로 고민하지 않았다. 지루한 일상을 견뎌내 줄 로맨틱한 장난이었을 뿐이다. 안나 아흐마또바인양, 릴리 브릭인 양, 연극의상같은 포즈를 어깨에 두르며 단지 물비린내같은 권태를 지나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린 모두 포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 값을 지금 치루고 있는 것이다. 지렁이 비 속에서 나는 고개를 손에 묻었다. 몇 명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걷고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피가 아스팔트 위에서 울부짖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쏘아보았다.
 
 
단 하나의 문장.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문장을 찾아서. 그럼에도 내게 이 마지막 순간에 오는 것은, 끝내 리의 붉은 머리카락. 젖은 목 위에 흩어져 붙어 있을 그 붉은 머리카락. 내 눈 속에서 언제나 맴도는 그 머리카락의 색깔은 물론 염색약의 것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같은 염색약을 쓰더라도 그녀와 완전히 같은 빛깔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단 한번 해지는 바다에서 보았던 어두운 붉은 구름의 빛깔. 나는 그것을 원했다. 단 하나의 문장이 아니라 그 빛깔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던, 그 창백한 목덜미를. 아냐,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어.
 
 
나는 지금 부서진 컴퓨터실 한 구석에서 이 이야기를 쓰고 있다. 나는 왜 이것을 쓰나, 나는 모른다. 지금 전 세계가 지렁이비의 광기 속에서 미쳐 돌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건 다만 오늘 하루의 환각일 지도 모른다. 오늘이 세계의 마지막이고 이 이야기를 읽을 사람이 나 뿐일지라도 나는 이 글을 쓸 것이며, 써야 한다고 느낀다. 나는 나의 시각으로 현실을 정돈한다. 거기서 나는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자, 그럼 손을 계속 달리게 하면서 스스로에게 묻자. 나는 여기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가. 무엇을 원했는가. 확실한 것은 지난 시대의 마야코프스키와 베르토프에 대한 탐닉은 다만 탐닉이라는 것이다. 이곳을 어떻게 달아나야 하는가. 나는 아직도 답을 찾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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