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이 세상의 여왕

2019.11.18 01:3111.18

1.

헤어진 아내로부터 연락이 와서 P시로 향했다. 가을로 들어서는 어느 날, 만월의 밤이었다. 날짜와 시간을 지정한 건 서영이었다. 서영으로부터의 호출은 지난주에 왔고 그때만 해도 나는 한밤중에 웬 산골로 찾아오라는 황당한 부름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일주일 동안 옛 아내의 변함없이 어린 소녀 같은 말투와 묘하게 들뜬 어조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서영과 헤어진 후 나는 금욕적이고 바쁜 일상을 내달려 왔다. 김 부장의 단골집에 가끔 끌려갔지만 그건 일종의 업무수행일 뿐이다. 내가 외롭다는 것도 눈치챌 새 없는 하루하루였다. 밤중의 고속도로를 하릴없이 달리며, 나는 서영이 예전에 그랬듯 여전히 나를 흔들어놓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영이 알려준 주소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당혹스러웠다. 일단 P시는 서영과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서울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겨우 이런 산골짜기로 옮겨온 것인가? 여자 혼자?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혼자일 거라 가정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군가와 함께라면 왜 이 시간에 전남편을 부르겠는가? 서영은 엉뚱한 데가 있는 여자였다. 만약 누군가와 재결합했다면, 그 모씨도 그녀만큼 괴짜라야 이런 장난이 가능할 터였다. 곧이곧대로 따르고 있는 나도 좀 나사 빠진 작자겠지만. ―산길은 더이상 차가 지나갈 틈이 없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서 손전등을 꺼냈다. 우거진 나무 틈으로 난 길은 외길처럼 보였다. 내비게이션에 따르면 서영의 집은 300미터 앞 직진거리에 있었다.

숲의 어둠이 파리한 달빛을 도드라지게 했다. 초가을이 아니라 초겨울이 아닌가 싶도록 차갑고 맑은 공기였다. 머리 위로 밤하늘이 은빛으로 촉촉히 젖어가는 가운데 검게 도려낸 듯한 숲의 실루엣은 사람 홀려버릴 듯이 요사스러웠지만, 그런 감상에 취할 여유는 곧 사라졌다.

이상하게 거리감을 짐작할 수 없었다. 300미터 앞에 뭐가 있기나 한가? 벌써 지나쳐온 거 같은데? 조난되지 않을까 슬슬 걱정이 들 즈음이었다. 나무 사이로 인공적인 것이 분명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차갑게 식은 땀을 훔치며 걸음을 재촉했다.

담은 두르지 않았다. 달빛으로 그 전모를 비치는 집은 서구식 저택이었다. 외장의 색까지는 분간할 수 없었으나 삼각지붕 밑에 다락으로 보이는 창이 나 있고 박공 장식까지 되어 있었다. 그래도 ‘자연인’처럼 살지는 않는가보다 싶어 안심되는 한편, 말 그대로 주소를 잘못 찾은 듯한 위화감을 강하게 느꼈다.

초인종을 누르자 지이잉 하는 전자적인 소음과 함께 바로 대문이 열렸다. 마당 역시 숲의 일부인 양 어두웠기에 나는 손전등을 켠 채로 발걸음을 떼었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다행히 집 안은 밝았다.

“어서 와.”

서영은 혼자였다. 레이스가 달린 소매 없는 흰 원피스는 실내복인지 속옷인지 분간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그런 차림으로, 난방을 넣지 않았는지 으슬으슬 추운 실내에서도 서영은 볼에 홍조를 띠고 있었다. 곱슬곱슬 굽이치는 새까만 머리채를 내려뜨리고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이며 웃는 얼굴이었다. 마치 대학 시절 내가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던 때처럼.

“오랜만이야. 무슨 일이야?”

그러지 않으려 했는데, 지나치게 무뚝뚝한 첫인사를 하고 말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라거나 ‘집이 좋구나’라거나 꺼낼 만한 서두는 차고 넘치는데도. 서영은 다 안다는 듯 짓궂어 보이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바로 용건부터 묻기야? 하여간 네가 그러니까 여자한테 인기가 없지.”

“이 한밤중에 불려나왔는데 그럼 얼마나 대단한 용건인지 궁금하지 않겠어?”

“아저씨야, 이럴 땐 ‘잘 지냈니, 더 예뻐졌다.’ 이런 얘기부터 들어가는 게 순서라고.”

“그래, 넌 그대로구나.”

“넌 살쪘어.”

바깥에서 본 인상처럼 집 안은 넓었다. 나는 간소한 응접세트가 마련된 거실로 안내받았다. 테이블 위엔 마시다 만 와인과 치즈들, 깨끗한 새 잔이 놓여 있었다. 나는 약간 놀라서 서영의 뺨을 살폈다. 혈색이 좋아 보인다고 느꼈던 건 술기운 때문인 듯했다. 서영은 결코 술을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 와인은 숙취가 심하다며 피했었다.

딱딱한 소파에 앉으며 나는 갈등했다. 혹시 재결합 얘기라도 꺼내려는 거면 어쩌지? 그건 절대 안 될 일이다. 그러나 나는 눈앞의 서영에게, 처음 사랑에 빠지는 소년처럼 설레고 있었다. 하룻밤 정도의 관계회복은 기대하게 될 만큼.

“재혼은 하지 않았지만 혼자 사는 건 아니야.”

느닷없이, 가넷 빛깔 와인을 내 앞의 잔에 따르며 서영이 말했다. 나는 속마음을 들킨 기분으로 흠칫했다.

“혼자가 아니라고……? 동거?”

“음, 일종의. 정확히 말하자면…… 음. 돌보고 있다고나 할까.”

나는 순식간에 흥이 깨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이가 있어?”

나와 서영의 결혼 생활 중에는 없었던 옵션이다. 내 질문에 서영은 큭큭 웃으며 와인을 한모금 마셨다.

“응, 아주 예쁜 공주님이야.”

“설마…… 내 아이야?”

나는 그저 가능성을 확인하려 한다는 어조로 물었다. 의도는 그랬다는 소리다. 실제 내 목소리는 불안하게 떨리며 말꼬리를 올렸다. 3년동안 연락 한 번 없던 전남편을 갑자기 부른 이유. 마지막으로 봤을 때 서영이 어땠더라? 우리가 마지막으로 섹스한 게 언제였지? 도무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아하핫!”

서영의 탐스러운 흑발이 어깨 위로 흔들렸다.

“네 아이냐고? 하하! 뱃살만 좀 늘었지 너도 여전하구나. 세상이 네 중심으로만 도는 줄 알아.”

나는 와인을 삼켰다. 상한 기분을 드러내면 지는 것이다.

“네가 의미심장하게 구니까 한번 확인하려 한 건데 너야말로 설레발을 쳐. 그럼 뭐야. 고양이라도 길러?”

“아니. 그 애는 그런 게 아니야.”

조금씩 짜증이 치밀었다. 서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여자는 아직도 날 갖고 놀려 하나?

서영과 연애하고 결혼한 후에도 한동안은, 그런 그녀에게 끌려다니는 것이 내 기쁨이었다. 그녀의 변덕스러움, 순진함, 치기, 하고 싶은 말을 숨기고 변죽만 울리며 나를 바라보던 반짝이는 눈. 네게 할 말이 있어, 한번 알아맞혀 봐. 엉뚱한 델 짚으면 나, 상처받아버릴 거야……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 품 안에 넣어 다니고 싶던 사랑스러움이 짜증과 답답함으로 변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던가.

“운전하고 여기까지 오느라 지쳤어. 할 말 있으면 빨리 해줬음 좋겠다, 서영아.”

서영은 코웃음을 쳤다. 사락.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허벅지 선을 따라 윤기 나는 흰 옷자락이 흘렀다.

“그 애 때문이야, 널 부른 건.”

와인빛 입술이 요염한 호를 그렸다.

“너를 그 애와 소개시켜주고 싶어서.”

손가락을 까닥이고는 돌아섰다. 나는 잔을 내리고 서영이 부르는 대로 따라갔다. 희귀한 동물이라도 얻은 모양이지― 벌써 반쯤 질린 기분으로.

서영은 2층으로 향하는 나무 계단을 올랐다. 2층 복도에는 조명을 켜놓지 않아 숲에서처럼 달빛에 의존해야 했다. 흰옷이 어둠 속에서 매끄러운 광택을 뿌리며 열대어처럼 살랑거렸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나 싶을 때 흰옷의 살랑임이 멈추었다. 방문 손잡이를 쥔 서영이 나를 돌아보며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여기서부터는 비밀이야……”

서영이 문을 열었다.

방 안은 달로 가득차 있었다.

서영이 먼저 미끄러져 들어갔다. 나는 문턱에 우뚝 멈춰섰다. 눈앞이 아득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첫 전율이 물러난 후 나는 발을 내디뎠다.

방은 한 면이 베란다와 연결되었고 거기로 통하는 유리문이 활짝 열려 있어 시리고 달큰한 밤 숲의 향기로 충만했다. 창문 가장자리로 접힌 흰 커튼이 바람을 배기지 못하고 너울치는 중에, 이상하게 커다랗고 바다 무늬가 뚜렷한 보름달을 등지고 한 소녀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눈도 살짝 내리뜬 얼굴이었다. 역광인데도 그 이목구비는 희미한 빛을 발하는 것처럼 생생히 보였다. 바닥까지 늘어뜨린 달빛과도 같은 은발. 서영의 것과 비슷한 레이스 달린 흰 드레스가 나부낄 때마다 가냘픈 몸매가 어렴풋이 비쳤다.

나는 한 발짝, 한 발짝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소녀는 명화 속 처녀들처럼 고요한 얼굴에 한 점 미동도 띠지 않았다. 창백하게 연한 분홍빛 입술은 슬픔을 견디는 것처럼도, 비밀스럽게 웃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나는 한 발짝 더 다가갔고, 다시금 전율했다.

어린 시절 두꺼운 미술책 도판에서 보았던 공주― 비련에 잠긴 워터하우스의 오필리아가 거기에 있었다. 차가운 물살에 띄워진 한 송이 꽃처럼 가련한 소녀의 얼굴이 희붐하게 빛나는 가운데 고귀해 보이는 콧날이 한점 달빛을 반사했다. 소녀의 모습은 내 첫사랑이었던 물에 빠진 공주의 형상으로부터, 중학교 때 만난 보티첼리의 여신과도 같은 질감으로 점점 눈에 파고들어왔다. 그 은발은 연약해 보였으나 대리석을 조각해놓은 듯이 차분했고 빛나는 피부도 매끄럽고 단단한 느낌을 주었다. 바늘보다도 가는 세필로 사력을 다해 다듬어 놓은 듯한 연한 색의 눈썹과 나비 날개의 반짝임을 머금은 속눈썹, 무엇보다도 그 눈, 그 눈―

“달의 공주님이야.”

서영의 목소리가 내 도취를 깼다.

서영은 키득거리며 내 눈앞으로 와서 소녀의 어깨를 감쌌다.

“예쁘지? 이 아이가 내가 돌보는 애야. 이름은 세렌.”

“……잘 만든 인형이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눈앞의 소녀가 살아있는 인간일 리 없다고 내 이성이 힘껏 외치고 있었다.

“무슨 실례되는 소리야. 얜 엄연히 살아있어. 너 오기 직전에 식사까지 마쳤는걸.”

나는 소녀의 뺨으로 한손을 뻗었다가 공중에 멈춘 채 갈등했다. 내가 감히 ‘이것’에 손을 대도 되는 건가?

“세렌은 살아있어.”

내가 만지지 못한 백자빛 뺨을 서영의 손가락이 가만히 쓸었다.

“다만, 음…… 지구상의 보통 생명체와 다를 뿐이지.”

나는 팔을 거둬들였다. 눈앞의 소녀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만큼, 내게서 서영을 향해 밝히던 불꽃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또 그런 공상이야? 작작 해, 서영아. 너도 이제 젊지 않잖아.”

서영의 머리채는 아직도 짙고 풍성했다. 그러나 피부를 스쳐 지나가는 세월의 화살자국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엉뚱함이 매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연령대를 이미 오래 전에 넘겨버렸다.

천진하기까지 했던 서영의 웃는 얼굴에 한순간 금이 갔다. 제멋대로에, 주변은 안중에도 없는 주제에 서영은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어린 면까지 타인을 휘두르는 도구로 이용할 줄 알았다.

“……넌 항상 날 그렇게 바보 취급했지.”

서영이 중얼거렸다. 손가락으론 소녀의 은발을 지분거리며.

“내가 널? 말은 바로 해. 먼저 날 얕본 건 너잖아.”

“얕봐? 하. 널 우러르지 않고 대등하게 있으려 하면 그게 널 얕보는 일이 되니?”

“말다툼하러 여기까지 온 거 아니다.”

“나도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

말과는 다르게 서영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한마디 하면 서영의 페이스에 바로 말려들어갈 것 같았다.

“난…… 싸우려는 게 아니라…… 너를……”

서영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녀는 소녀의 은발로부터 손길을 거두고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넌 항상 경멸했지……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허황된 꿈이나 찾는 문학소녀 같다고. 그래, 네 말대로 난 허약한 몽상가에 현실도피자야! 하지만 너저분한 걸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게, 아름다운 걸 좇는 게 그렇게 멸시당할 일이니?”

“서영아.”

“이 애를 봐!”

서영은 난폭하게 소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아무런 동요 없는 얼굴이 정면으로 나를 향했다. 반쯤 뜬 눈이 나와 마주친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숨이 멎었다. 만화경 색이라고밖에 형용할 수 없는 눈이었다.

“세렌을 봐. 나는 틀리지 않았어. 달의 공주님이 내게 내려와줬단 말이야. 그래도 넌 확신해? 이 아이가, 세렌이― 현실에 속한 생물인 것 같니?”

“그만해!”

서영의 손이 소녀의 얼굴을 우악스럽게 덮쳤다. 마치 피부를 뜯어내 안에 있는 것을 확인시켜주려는 듯이. 나는 서영의 팔을 붙들어 소녀에게서 떼어냈다. 서영은 몸부림치다가 나를 노려보았다.

한때 사랑한 여자가 이제는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직면하기까지 찰나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 구속이 느슨해진 사이 서영은 재빨리 빠져나가 방구석으로 달렸다.

다음 순간 서영의 두 손에는 엽총이 들려 있었다.

검디검은 총구가 이쪽으로 겨누어졌다.

“윤서영!”

나는 움직였다. 내 몸으로 소녀를 총구로부터 보호하듯이.

그리고 서영이 띤 미소를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슬픈 듯한, 안도한 듯한, 만족한 듯한 입술의 곡선을.

총신이 휙 돌았다. 총구는 서영의 미소 짓는 얼굴로 향했다. 서영의 입술이 벌어져 총구를 물었다. 한껏 뻗어 방아쇠까지 닿은 팔의 근육이 우아하게 꿈틀거렸다.

그다음은 폭음이었다. 마치 현실 자체가 파열하는 듯이.

2.

“전 차장, 요즘 생각이 많네?”

하여간 김 부장은 담배 한 개비 혼자 피울 시간도 주지 않는다. 나는 얼른 미소를 꾸며 붙이고 뒤돌아보았다. 기름진 머릿결에 기름진 얼굴을 하고 김 부장이 능글능글 웃으며 손을 뻗어왔다.

아무 의미 없이 어깨를 잡혀 흔들리며 나는 부장의 얼굴에 대고 담배 연기를 뿜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화장실 다녀온다더니 뭘 뒷골목에서 사색에 잠겨 계셔?”

금요일 밤. 직장가 근처의 술집 거리는 자세 흐트러진 슈트부대들이 소용돌이치며 흘러들어가는 하수구였다. 내가 화장실에 가려 일어서기 전 김 부장은 자기에게 딱 달라붙은 정 과장에게 새로 데뷔한 아이돌의 섹스 유출캠이라는 동영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 과장은 끝내주네를 연발하며 손끝으로 부장의 휴대전화를 들어 모셨고 김 부장은 나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눈웃음을 쳐 보였다. 우리 정 과장, 결혼을 안 해서 그런지 아직 소년이야. 나는 쓴웃음으로 답했다.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고 일어섰다.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는 대리급 이하 사원들이 주식 투자 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왜, 두고 온 여친이라도 생각하나?”

김 부장의 입가를 향해 두 손으로 라이터를 받쳐 들었다. 쿠바 여행에서 사왔다는 시가에 불을 붙인 김 부장이 끈끈해 보이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내뱉었다.

“에이, 그런 거 만들 시간이 있어야 말입니다.”

“자네도 슬슬 재혼해야지?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오랫동안 가정을 안 갖는 거, 사회에 죄짓는 거야. 솔직히 전 차장 정도면 좀 대보려는 여자가 줄을 서지 않겠는가?”

“하하…… 말씀도 참. 아시잖습니까, 요즘 여자들 결혼 안 하려 하는 거. 하물며 저 같은 돌싱남이 뭐 대단하다고요.”

“그거야 잘 모르는 애들이나 거시기 말라붙은 아줌마들이 이상한 사상에 휘둘려서 그러는 거지, 진짜 여우들은 알짜를 잡을 줄 알아. 우리 3분기 신입 있잖아. 어때? 미스 정 자네 볼 때마다 눈웃음 살살 치는 게 예사롭지 않던데.”

“조카딸뻘인 어린애 낚아서 뭐하겠습니까. 맛도 없을걸요.”

김 부장의 수준에 맞춰 상대해주는 일은 언제나 피곤했다. 집이 그리웠다.

지긋지긋한 회식 자리는 이후 30분이 넘도록 이어졌다. 부장은 ‘장급’들만 따로 불러 2차를 가자고 했다. 정 과장이 게슴츠레한 눈을 빛내며 싱글벙글했다. 오랜만에 가는 김 부장의 ‘단골 가게’가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감기 기운이 있다고 둘러대며 사의를 표했다. 내 재킷 자락을 붙잡아대는 정 과장의 숱이 드문 정수리를 깨버리고 싶은 기분을 참느라 진이 빠졌다.

회사 주차장에 놔둔 차를 내버려두고 전철로 귀가했다. 내 조급함은 전철보다도 빠르게 집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세렌의 고요하게 빛나는 얼굴이 아른아른했다.

서영의 입안에서 총성이 폭발하고 그녀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쓰러졌을 때, 나는 한참 말문이 막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장난이라기엔 긴 시간이 흐른 후 겨우 “서영아……?”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검게 물들어가는 서영의 레이스 원피스가 그녀의 허벅지를 휘감아 나부꼈다. 청명한 밤의 향기를 난폭하게 소거해버린 화약 냄새, 압도적인 피와 뇌수의 냄새. 그녀가 등지고 섰던 벽에 그려진 불결한 무늬. 귀가 먹먹한 침묵. 서영의 머리는 흐트러진 머리칼로 가려져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생사를 확인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죽었다. 손 쓸 수 없이, 죽어버렸다.

세렌은 여전히 신비로운 입매를 하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나는 세렌을 안아들어 방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와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소녀의 몸은 사무실 생수통보다도 가벼웠다.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이 내게 밀착해 왔다. 세워져 있는 내 차까지 온 나는 소녀를 옆좌석에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두근거리는 내 심장의 소음과 거친 숨소리를 보름달이 듣고 있었다. 그 냉혹한 천체는 그날 밤 모든 걸 보고 있기도 했다. 내가 꽁무니를 빼고 도망치는 길까지 줄곧 따라붙으며.

그리고 3주가 지났다.

P시 산간의 저택에서 발생한 의문사에 관해서 보도하는 매체는 없었다. 세렌이, 그날의 증거가 내 방에 없었더라면 만월의 밤에 있었던 일은 기괴한 꿈으로 남았을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에 휩쓸려 무뎌져 가면서도 나는 가슴 한구석에서 혼란스러워했다.

세렌을 데리고 나온 지 열흘째 되는 날 밤, 참지 못하고 다시 P시로 향했다. 반토막이 난 달은 산자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서영의 저택은 여전히 우뚝 서 있었다. 대문도 현관문도 열린 채였다. 언제 꺼졌는지 조명이 전혀 없어 집 안에서도 손전등에 의지해야 했다. 거실에서 우리가 마신 후 그대로 두었을 터인 와인 따위가 치워져 있는 걸 발견하고 심장이 얼어붙었다. 2층, 세렌이 있었던 방은 깨끗했다. 세렌의 흔적도, 서영의 흔적도 없었다. 시체는커녕 핏자국도, 벽의 얼룩도 아무것도.

내가 조현병이라도 발병한 게 아니라면, 누군가 그 후에 이 집에 찾아와서 뒤처리를 했다는 얘기였다. 누가? 어떻게? 어째서? 그러고 보면 서영의 ‘집’ 그 자체도 기이했다. 어째서 서영은 그런 곳에, 어울리지도 않는 저택에서 살고 있었을까? 내가 기억하는 서영은 산속 외딴집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 여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에게 무슨 돈이 있어서 그런 집을 얻었단 말인가? 유산이라도 상속했나?

생각할수록 등골만 서늘해질 뿐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게는 나의 일상 속에서 숨죽이고 사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상황이 변할 때까지, 신경 끄는 게 최선이었다.

불을 끄고 나간 집 안에 어둠이 깔려 있었다. 전자식 시계가 푸르스름하게 11시 48분을 표시했다. 나는 고기 냄새가 밴 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쳐놓고 내 방으로 향했다. 영어와 중국어, 주식 따위로 가득한 책장 옆에 세렌이 앉아 있었다. 나는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세렌과 마주 보는 자리였다.

암막 커튼을 쳐놓은 방 안은 컴컴했다. 나는 은은한 은빛으로 빛나는 소녀의 윤곽에 넋을 잃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어두운 곳에서 백자처럼 매끄러운 피부가 안쪽에 도깨비불을 밝힌 것처럼 빛을 발했다. 달빛처럼 소복한 은발, 은근하게 내리뜬 만화경 빛의 눈…… 가슴이 저려왔다. 세렌의 모습은 신성하고 순수한, 언젠가 잃어버린 지극한 무언가를 기억해내라며 나를 괴롭혔다. 나는 불가사의한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믿을 수 없게도, 그녀를 보고 있기만 해도 눈물이 흘렀다. 이 3주간, 매일 밤마다 그랬다.

세렌의 빛이 훅하고 어두워졌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천정 등을 켜고 세렌에게 다가갔다. 섬세한 턱에 살짝 손을 대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여전히 백설 같은 피부였지만, 어제와 비교해서도 눈에 띄게 야위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세렌의 의자 곁에는 경장영양액 박스와 깔때기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세렌은 말라 가고 있었다. 데려오고 처음 보름 정도는 괜찮았다. 그야말로 인형처럼, 그녀의 미모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그 후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 내뿜는 빛이 미묘하게 조도가 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피부가 파리해지고 눈가가 메말라 보였다. 그러다가 며칠 전부터 세렌의 빛은 다 된 형광등처럼 가끔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서영이 역설한 것처럼 세렌은 ‘살아’있었다. 세렌의 몸을 조사해서 안 사실이었다. 물론, 나의 행위에 어떤 더러운 의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피부를 만지고, 콧구멍 아래에 손가락을 대보고, 조심스럽게 봉긋한 가슴에도 손을 대보았다. 세렌은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있었다. 다만 호흡은 미약했고 심장 박동이 느렸다. 체온도 돌처럼 차가웠다.

생명체라면, 이대로 놔두면 죽을지도 몰랐다. 초조해진 나는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경장영양액 박스와 강제급식용 깔때기를 주문했다. 그리고 세렌의 입을 벌리고 조심스럽게 깔때기를 집어넣어 영양액을 부었다. 그동안에도 세렌은 얌전히 내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진주알 같은 치아와 산홋빛 혀, 붉게 젖은 구강이 드러났다. 깔때기를 넣기 위해 손가락으로 세렌의 혀를 눌렀다. 매끌매끌하고 축축한, 살아있는 살덩이의 감촉이었다.

결과는 대참사였다. 세렌은 영양액이 목구멍 안으로 부어지자마자 경련하며 토해냈다. 그녀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살색 액체를 울컥울컥 토하는 그녀의 내리뜬 눈에 눈물마저 맺혀 있는 걸 본 나는 강제급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서영은 이렇게 말했었다. 세렌이 내가 오기 전에 식사를 마쳤다고. 그렇다면 무언가 먹기는 한다는 얘기였으나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단서를 찾기 위해 위험을 각오하고 P시의 저택을 또다시 찾기까지 했지만, 서영의 냉장고는 텅 빈 채였다. 세렌이 있었던 방에도, 다른 방에도 이렇다 할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집은 서영이 벗어 놓은 허물 같았다. 약간의 세간과 여자 혼자 쓴 사적인 물건들, 서영의 보물들이 먼지를 맞으며 바스라져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서영의 재산에 관심 없었다. 다만 옷장을 뒤져 세렌이 입었음 직한 옷가지들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옷들은 전부 흰 드레스였다.

“세렌…… 너는 뭐니? 내가 어떻게 해줘야 하지?”

소녀는 말이 없었다. 기분 탓인지 그녀의 신비로운 입매가 우울과 슬픔을 띤 것처럼 보였다.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뜨끈해졌다. 그 온도는 순식간에 부풀어올라, 폭발했다.

죽게 놔둘 거 같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건 광기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냉정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듯이, 현실적이다.

서영은 가계부를 쓸 줄 모르는 여자였다. 그녀는 돈 관리를 모두 내게 맡겼다. 번역 일을 해서 들어오는 고료도, 애초에 쥐꼬리만한 금액이나마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관심이 없을 정도였다. 세제나 종량제 봉투, 상비약품, 하루 먹을 반찬거리 따위를 마트에서 주문하는 것도 내 일이었다. 아내는 심지어 반찬이 없으면 하루 종일 집에서 굶기까지 했다.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그림을 감상하며 당치않은 솜씨로 악기를 연주하고, 특히 보석류를 사며 행복해했다. 가장 좋아하는 보석은 엄지손톱만한 문스톤이었다. 젤리처럼 맑은 중심부에 푸른 휘광이 일렁이는 최상급품인 그것을 서영은 반지로 가공했고, 가끔 자신의 기분이 내키는 밤이 되면 오르골 달린 보석함에서 꺼내 왼손에 끼었다.

‘예쁜 걸 내 몸에 걸치고 있으면 영혼이 맑아져.’

자신 곁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정원이 서영의 영역 전부였다. 한 발짝 바깥의 사정을, 이를테면 현금유동성과 가계재정의 문제 같은 것을 그녀는 상관도 이해도 하고 싶지 않아 했다.

나는 그녀의 사치벽을 누누이 타일렀다. 하지만 그녀가 알렉산드라이트를 산답시고 300만 원을 통장에서 마음대로 꺼내갔을 때, 격노한 나는 하마터면 서영을 때릴 뻔했다.

‘미쳤어?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번 달에도 연금저축 못 내면 계약해지라고 말했잖아!’

‘난 애초부터 그딴 보험 안 들겠다고 했어.’

‘연금저축 없으면 노후는 어쩌라고? 너 왜 그 나이 먹고도 현실감각이 없어! 제발 철 좀 들어라, 철 좀!’

‘또 그렇게 날 깎아내리지! 그러는 넌 나이 먹고 철들어서 룸살롱이나 다니니?!’

‘너 쓰고 다니는 돈, 다 네 서방이 룸살롱 열심히 따라다니면서 윗분들 핥아줘서 번 돈이다, 왜!’

나는 서영과 다르다. 그녀는 달을 쫓는 나비였다. 지상의 흙탕물에 구르는 내 고충을 당연하게 여기는. 나는 서영의 우아하고 비싼 날갯짓과 그녀가 내게 가하는 감정적 고통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에 이혼서류를 내밀었다. 서영은 약간의 위자료를 쥐고 담담히 물러났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생활을 보냈는지는 모른다. 나에게 세렌을 남기고 떠났다는 것밖에…….

어쨌든 나는 생각해야 한다. 세렌의 정체가 뭐든, 서영과의 관계가 뭐든 간에 세렌은 지금 내 곁에 있고 쇠약해지고 있다. 이 소녀를 죽게 해서는 안 된다. 죽음은 서영만으로도 충분하다. 현실적으로, 세렌이 죽으면 그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한단 말인가?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내가 소녀를 약취하고 살해한 것으로 오해받을지도 모른다. 그런 누명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세렌을, 이 아름다운 공주를 살려놓아야 한다…….

찌꺽. 생각에 잠겼던 내 귓속으로 생경한 소음이 파고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숨을 삼켰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세렌이 일어나 있었다.

찌걱이는 소음은 그녀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난 듯했다.

온갖 꿈결의 색들이 휘몰아치는 두 눈이 커다랗게 열려 있었다. 부드럽게 닫힌 입술이 보일락 말락 입꼬리를 올리는 듯했다. 세렌의 시선은 나의 경악한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세렌……? 움직일 수 있는 거냐?”

탐스러운 은발이 바닥면에 끌렸다. 사락 사락. 눈 내리는 소리와 함께 소녀가 다가왔다. 아름다운 공주는 천천히 두 팔을 내밀어 프릴 장식된 소매에서 빠져나온 가냘픈 손을 펼쳤다. 나는 천사의 방문을 받는 목동처럼 경이에 빠져 꼼짝하지 않았다.

세렌의 손끝이 내게 닿았다. 분홍색 입술이 분명히 움직인다. 벌어지는 입술 새로 진줏빛 치열이, 산홋빛 혀가, 그리고…… 소녀의 무게가 나를 덮쳤다. 나는 이불 위로 넘어졌다. 눈앞이 황홀하게 부예져 왔다.

“……네에, 네, 거기까지.”

세렌의 무게가 확 떨어져나갔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를 낯선 얼굴이 내려다보았다. 그가 내게서 세렌을 떼어냈음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나는 화들짝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누구지? 갑자기 언제 들어온 거야? 불청객은 세렌을 달래듯 어깨를 감싸곤 도로 책장 옆 의자에 앉혔다.

“때맞춰 왔군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전 선생.”

불청객은 어깨너머로 나를 흘깃하며 씨익 웃었다.

생전의 서영을 떠올리게 하는 짓궂은 미소였다.

3.

“아아, 가엾기도 하지. 오래 굶었구나. 옳지, 옳지…… 천천히 먹으렴.”

정신이 든 나는 눈을 좁히고 불청객을 훑었다. 아는 사람인가 싶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마주친 것도 같고, 점심시간 중국집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양반 같기도 했다. 즉 그에게는 아무런 특징도 없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았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이었다.

그는 슈트 위에 얇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주머니가 낙낙한 코트에서 말라비틀어진 덩어리 같은 것을 꺼내더니 세렌의 입에 갖다댔다. 뭐 하냐고 할 새도 없이 세렌이 입을 벌려 그것을 뜯었다. 세렌은 한순간 굶주린 짐승으로 돌변했다. 쩝쩝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아, 애가 많이 배고파 보여서 결례를 무릅쓰고 좀.”

두 덩이째, 새 덩이째를 꺼내 먹이며 불청객은 뒤늦은 양해를 구했다. 나도 뒤늦게 화가 치밀었다.

“뭐 하는 겁니까!”

“먹이고 있지요.”

“그게 아니라, 아니 먹이는 건 보면 아는데, 당신 누굽니까!”

“선생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지요.”

능청을 떨더니, 그는 침과 정체 모를 부스러기가 묻은 세렌의 턱께를 닦고 두 손을 탁탁 맞부딪쳐 털었다. 세렌을 보는 사랑스러워하는 눈길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나 불청객은 내가 그에게 화를 터트릴 기회를 앗아갔다.

“참 매력적인 여자였는데, 윤 여사는.”

그는 얌전히 눈을 내리깐 세렌 옆 책장에 기대어 다리를 꼬고 섰다. 짓궂게 빛나는 눈이 침대 가장자리에서 허리를 들다 말고 우물쭈물하는 내 쪽을 내려다보았다.

“우아하고, 섬세하고, 그리고 약한 여자였지요. 그런 여자가 아프고 보기도 안 좋은 마지막을 선택하다니, 그 심정을 헤아리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시체 치우는데 얼마나 눈물이 솟는지 몰라요.”

싸늘하게 식은 피가 돌아 두개골 안쪽을 식혔다. 이자는…… 보안장치가 된 이 아파트에 어떻게 소리 없이 들어올 수 있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자는 서영을, 세렌을 알고 있는 자였다.

“당신 누굽니까?”

아까와 같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뉘앙스는 완전히 달랐다. 불청객의 미소가 진해졌다.

“전 선생, 내가 선생을 선생이라고 부르니까, 그쪽도 나를 ‘박 선생’이라 불러주시면 좋겠습니다. 뭐, 조그마한 모임의 회원 중 하납니다. 달의 공주님들을 모시고, 귀여워하는, 그런 사교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지요.”

“달의 공주님들……? 세렌이, 세렌 같은 애가 더 있다는 소리요?”

“그렇습니다. 선생은 꽤 머리가 잘 돌아가시는군요. 마음에 듭니다.”

사람 머리꼭대기에서 노는 듯한 태도가 거슬렸지만 주도권은 저쪽에 있었다. 치밀었던 화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가라앉아 머릿속이 맑았다.

“우리 모임의 가입조건은 달의 공주님을 모시는 사람일 것. 윤 여사도 회원의 하나였지요. 즉 윤 여사로부터 이 아이를 양도받은 전 선생도 가입조건을 충족한다는 얘기입니다.”

양도받았다고……? 나는 다시 서영과의 마지막 밤을 복기했다. 느닷없이 나를 부르고, 세렌을 보여주고, 처참한 자살을 선택한 서영. 그녀의 의도가 내게 세렌을 양도하는 것이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저쪽― ‘박 선생’과 그가 대표하는 어떤 모임의 작자들은 그렇게 결론 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당신들은 내가 회원으로 가입하지 않으면 세렌을 빼앗아 가겠다는 겁니까?”

“흐음, 선생과는 정말 얘기가 빠르군요. 이거 아주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전 선생. 정확히 보십니다. 가입을 거부하신다면, 애석하지만 선생은 오늘 밤 이래로 세렌을 다신 못 보겠지요. 덤으로 감옥에서 몇 년 지내셔야 할 겁니다. 경찰이 윤 여사 살인사건 수사에 착수해서 전 선생에게 치명적인 증거를 곧 발견할 테니까요.”

허풍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거들먹거리지도 않고 협박하는 박 선생에게선 사실만을 고하는 사람 특유의 편안함이 느껴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댁들 모임이 뭐 하는 덴 줄도 모르고서 어떻게 가입을 합니까.”

여기서 박 선생은 입을 다물었다.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 설마 모임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 무슨 뇌관을 건드리는 행위라도 되는 건가?

“……달을 우러러보는 모임이었지요.”

잠시간의 침묵 후에 박 선생이 그렇게 말했다. 짓궂었던 미소의 성격이 변해 있었다. 어딘가 그늘이 느껴지는, 부드럽고 상냥한 미소에 나는 도리어 소름이 끼쳤다.

“해가 쨍쨍한 한낮에도 눈비 오는 밤에도, 우리는 달을 올려다봅니다. 광활하게 펼쳐진 쓸쓸한 우주의 한 조각에 희뿌윰하니 고고하게 빛나는 천체를 그리지요. 선생, 선생은 이 삶을 사랑하십니까?”

맥락 없어 보이는 질문에 나는 답하지 못했다.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까?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한 이 잔을 기꺼이 들이켜며 찬미가를 부를 수 있습니까? 선생의 인생은 춤이었습니까?”

“글쎄, 잘은 몰라도 댁처럼 시인은 아니었던 것 같소.”

“시인이라니 당치 않은 과대평가이십니다. 저는 그저 아무것도 되지 못한 몽상가지요.”

“…….”

“우리 모두가 그랬지요. 맞지 않는 신분을 뒤집어쓰고― 변호사, 검사, 대표이사, 존경받는 교수, 사랑받는 가장, 성실한 일꾼, 현모양처, 아니 레테르 따위 없을 수도 있지요. 그저 한 사람의 시민. 사회의 일원. 세금 꼬박꼬박 내고 투표 열심히 챙기는. 뉴스 한 줄에 일희일비하고 돈 한 푼에 숨이 들었다가 말았다가. 이 벼랑과 같은 세상 끄트머리에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지요.”

“……아내는 현모도 양처도 아니었소.”

초점 어긋난 이의제기를 박 선생은 무시했다.

“다만 조금쯤 색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가 언제나 달을 우러러보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믿을 수 없게 완벽하고 기적적으로 가까운 그 천상의 바윗덩어리가 언제나 우리들의 머리 위에 둥실거리고 있었지요. 세상은 강요합니다, 지상을 보라고. 정신 붙들어매고 이 흙바닥에 발바닥을 단단히 붙이라고요.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항상 저 달로 돌아가기를 그리워하며 우는 것을 어떡하겠습니까? 달빛이 우리의 본성인 것을요.”

“지리멸렬하군요. 요점이 뭡니까.”

“아, 이거 실례. 이야기가 빠르신 분이란 걸 깜박했습니다.”

박 선생은 짐짓 쑥스럽다는 듯이 희끗희끗한 옆머리를 긁적였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달맞이를 시작했어요. 진짜 달맞이 말입니다, 맑은 날에 자리 펴놓고서 달빛을 즐기는. 약주도 좀 놓고요. 그러다가 두 사람, 세 사람 모여들더니, 이윽고 어디 가서 동호회라고 하기에 낯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인원이 생겼어요. 우리는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어 정모를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밤에 말입니다. 슈퍼문에 블루문이 겹치던 날이었습니다. 달의 공주님들이 우리에게 내려온 것은요.”

“……? 그러니까 그게, 달의 공주가 내려왔다는 게 뭡니까.”

“말 그대로 하늘하늘, 천상에서 내려왔다는 겁니다. 아니 달로부터요. 광해로부터 자유로운 심산유곡이었어요. 아직 잘 안 알려진 경치랍니다. 그런 곳에 자리 펴고 술잔에 달 띄우면 신선이 따로 없어요.”

“댁들이 어떻게 놀았는지 관심 없습니다.” 나는 초조함을 드러냈다. “설마 댁들이 이 아이들을 납치라도 했다는 겁니까?”

“에이, 괜히 그러시네. 몇 번을 더 말해야 합니까? 달에서 내려왔습니다. 달에서 내려왔습니다. 달에서 내려왔습니다. 열 번 채울까요?”

나는 됐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딱 그날 나온 우리 회원 수만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녀들을 한 마리씩…… 아니 한 명씩 맡기로 하곤 정모에 나오지 않은 회원들을 정리했습니다. 물론 우여곡절이 있었죠. 우리 중에는 가정을 가진 분들도 있었으니, 가족분들께 비밀리에 따로 보살피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나중에는 더 큰 문제까지 발생했죠. 바로 전 선생이 방금 경험한 문제 말입니다.”

“음식을…… 먹지 않았군요.”

“뭐 천상의 존재들이니까요. 평범한 음식은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발만 동동 구르는 새 공주들은 쇠약해져갔지요. 결국 공주들 중 몇은 안타깝게 되고 말았습니다.”

박 선생의 눈썹이 내려앉았다. 입술을 꾸욱 다문 얼굴은 ‘공주들’의 죽음을 생각하며 정말로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답을 찾아냈지요― 언제나 그래왔듯이 말입니다. 의외로 답이란 건 아주 가까이에 있더군요.”

박 선생이 품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반사적으로 긴장하며 바라보는 사이 그는 웬 지퍼백을 꺼냈다. 어디에 그런 부피를 숨겨놓을 곳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투명한 비닐 너머 보이는 색깔은 거무튀튀했다. 그는 지퍼백을 내 책장 빈 곳에 내려놓고 톡톡 두드렸다.

“자, 이게 그 답입니다. 여기에 이렇게 두고 가지요. 열흘에 한 덩이 정도는 먹이셔야 합니다.”

나는 거무튀튀한 지퍼백을 노려보았다.

“……인육입니까, 그것은.”

나름대로 각오하고 던진 질문이었으나 박 선생은 파안했다.

“하하하! 선생도 참 상상력이 뛰어나시군요. 아니, 빈약하다고 해야 할까. 인육이라, 그것참 살벌한 소리를. 아닙니다. 아니에요. 안심하십시오. 그런 비윤리적인 물건이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설마 뭔지도 모를 걸 세렌에게 먹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요.”

“‘만나’라고 부릅니다. 그야말로 천상의 음식 말입니다. 아, 하지만 주의하시오, 선생. 굶주린 공주는 인간을 덮치기도 합니다. 전 선생도 아까 하마터면 공주의 먹이가 될 뻔했소. 아시겠습니까? 제가 선생의 생명의 은인인 까닭입니다.”

나는 섬뜩함과 거부감을 느꼈다. 세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잘난 척하며 선심 쓰듯 하는 박 선생이라는 작자에 대해서였다.

“회원 중에서도 덮쳐진 자가 있었나 보군요.”

“운 없게도. 아니, 운이 좋았다고 할까요? 이 아름다운 공주와 하나가 될 수 있었으니.”

박 선생은 웃음을 거두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사람 고기 맛을 본 공주를 제거해야 하는 우리들 입장도 헤아려 주시고.”

그는 손뼉을 쳤다.

“이상입니다. 너무 말이 많아 지루하진 않으셨나 모르겠군요. 자, 그럼 애 꼬박꼬박 잘 챙겨먹이시고. 다음 모임은 만나가 떨어지기 전에 열릴 겁니다.”

“무슨 모임요?”

“정모 말입니다, 선생. 이제 회원이 되셨으니 참석하셔야지요. 아, 가입신청서는 필요 없어요. 회원가입은 자동입니다. 저 아이를 양도받은 이상 자연히 선생은 우리들의 일원이 된 거죠. 왜, 탈퇴하시렵니까?”

“……아닙니다.”

“그래요.”

박 선생이 내게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달의 공주를 돌보는 모임에 함께하게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도 전 선생과 같은 분을 모시게 되어 기쁘군요.”

나는 말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메마른 손이 내 것을 쥐고 맥없이 흔들다 놓았다.

“달의 공주를 아끼고 사랑해 주시오. 그것이 우리가 하는 일의 전부입니다.”

말을 마친 박 선생은 조용히 방 밖으로 사라졌다. 몇 초쯤 뒤, 나는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거실 불을 켜고 집안을 샅샅이 돌아보았다. 박 선생의 흔적은 없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었다. 언제 들어와 어떻게 나간 것인가. 나는 뒤늦게 무언가에 홀린 기분으로 우두커니 섰다.

달에 홀린 것이리라, 말하자면.

박 선생이라는 인물의 갑작스런 방문과 강제된 ‘회원가입’이 나와 세렌의 일상에 큰 변화를 주지는 않았다. 새벽같이 출근할 때는 익명의 시민으로서, 카드 찍고 출근하고부터는 전 차장으로서, 그리고 다시 익명이 되어 퇴근길을 헤쳐 집으로 돌아오면 그저 ‘나’로서 세렌과의 수수하지만 즐거운 나날들이 이어졌다.

박 선생이 두고 간 만나가 무엇인지는 조금 꺼림칙했다. 나는 그것의 냄새를 맡아 보고 조금 떼어서 촉감을 분석해 보고 물에 불려 보기도 했다. 시중에서 파는 육포와 별다를 게 없었다. 아무래도 직접 먹어볼 생각만큼은 들지 않았으나, 고기 종류인 듯했다. 여하튼 세렌이 이것을 양식 삼아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조급해하지 않아도 만나의 정체를 자연히 알게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기다리다 보면 그들의 회합에 불려가게 될 테고 말이다.

“차장님 요즘 좀 달라지셨어요.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점심시간에 권 대리가 물어왔다. 나는 요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좌중은 놀라는 눈치였다. 일밖에 모르는 먼지 냄새 나는 홀아비라고 생각하고들 있었겠지.

“이래 봬도 소싯적에 미대 공모전 몇 개 휩쓸었던 몸이야.”

“진짜요? 아니 그런데 왜 미대를 안 가시고.”

“뭘 뻔한 걸 물어? 미대 나왔으면 내가 자네처럼 학력 좋은 젊은이들한테 차장님 소리 들으며 거들먹거릴 수나 있었겠어? 그런 거지 뭐.”

나는 이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붓을 잡았다. 세렌이 내뿜는 빛이 나를 충동질했다. 나는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리고 물감을 개어 채색했다. 내 실력은 형편없이 퇴화되어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녀의 모습을 내 손으로 종이 위에 옮기는 일 자체가 만족스러웠다.

밤에 잠이 없어지느라 체력적으로는 더 나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기분만은 언제나 평온했다. 세렌의 입가에 떠오른 신비로운 안개와 같은 표정에 항상 감싸여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좀 더 관대하고 좀 더 유연해졌다. 미꾸라지들이 분탕치는 듯한 세상만사가 애틋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름다움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믿음을 나는 회복하고 있었다. 먼 옛날, 서영을 만나기도 전에 품었던 꿈. 내가 처음부터 건조하고 현실적인 남자가 아니었음을 나는 세렌과 함께하며 기억해냈다. 내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순수하게 아름다운 것을 동경하고 그것과 가까이 있었던 시절이……. 세렌의 차고 부드러운 피부를 느끼면, 그 비단결 같은 머리채를 만지면 나는 죽은 서영을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뜬눈으로 꿈을 꾸듯 일상에 녹아들어 갔다.

그러던 중 정모의 날이 왔다.

4.

만월의 밤이었다. 박 선생이 알려준 주소를 향해 차를 몰았다. 서영을 만나러 가던 밤처럼, 하지만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질감으로 심장이 설레었다. 아름다운 세렌이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달의 공주님들과 동반 모임입니다. 댁의 아이가 오랜만에 친구들과 인사하게 해주시지요.’

세렌과 같은, 다른 존재들과 만난다는 사실이 나를 들뜨게 했다. 기대되는 동시에 나의 세렌이 다른 아이들과 같을 리가 없다는 오기 같은 것이 고개를 들었다.

서영의 저택에 가는 길과 비슷한 사유 도로를 거쳤다. 벌레 한 마리 없는 듯이 컴컴하고 조용한 흙길을 달리자, 비죽비죽 철심을 박은 담장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부지가 어찌나 넓은지 한참을 달려도 담장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직진을 고한 내비게이션이 무감하게 몇백 미터 앞, 몇십 미터 앞을 짚었다.

드디어 저택의 대문이 보였다. 웬 젊은이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속도를 줄이자 다가오더니 차창을 두드렸다. 창문을 내렸다.

“새로 오신 전 선생님이시죠? 들어가서 적당한 데 차 대시면 됩니다.”

싹싹한 태도로 그렇게 안내했다. 나는 왠지 벌써부터 ‘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다른 차들이 모여 있는 근처에 차를 대고 세렌을 안아들어 마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가스등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점점이 서 있는 아래 테이블과 의자가 놓이고 사람들이 서성이거나 앉아 있었다. 열 몇 남짓한 인원이 친한 눈치로 서로와 잡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회원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궁금해하는데 누군가 내 팔을 슬쩍 끌었다.

“잘 오셨습니다, 전 선생. 여러분, 여기 신입이 등장하셨습니다.”

박 선생이었다. 그가 사람들의 주의를 모으자 고개를 향한 회원들이 기분 좋게 웃으며 박수를 쳐 댔다. 내가 낯간지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는 새 건장한 청년이 다가와 세렌을 건드렸다.

“뭐 하는 거요!”

놀라 움츠린 내게 박 선생이 손사래를 쳤다.

“아, 공주님들은 따로 논답니다. 잠시 자기들끼리 식욕을 돋우지요.”

“식욕이라니?”

“계시다 보면 다 알게 됩니다. 자, 모셔드려.”

정중하지만 단호한 몸짓으로 청년이 내 품에서 세렌을 데려갔다. 나는 당황하여 청년이 사라지는 쪽을 눈으로 좇았다. 무언가 검은 건물이 사각형으로 우뚝 서 있었다. 저택 본관은 마당과 가까이 있었으므로 별관이거나 창고쯤 되는 듯싶었다.

일말의 불안감을 안고 나는 박 선생이 이끄는 대로 사람들 속으로 섞여들었다.

“전 선생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리저리 인사를 시킨 박 선생이 나를 마지막으로 앉힌 곳은 웬 귀부인들이 진을 친 테이블이었다. 삼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단발머리의 여자가 기품 있게 고개를 까닥했다. “서영 언니의 전남편이시라고요.”

여자들이 뜻 모를 웃음을 교환했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서영이가…… 제 얘기를 했습니까?”

“네에, 가끔요.”

뭐라고 하더냐는 질문을 할 만큼의 용기는 없었다. 그렇군요, 하고 얼버무리고 테이블에 준비된 잔을 들었다. 새콤달콤한 탄산이 입안을 적셨다. 샴페인이었다.

“서영 언니는 누구보다 기뻐했었어요…… 달의 공주를 얻었을 때.”

단발 여자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길쭉한 샴페인 잔 표면을 훑었다.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도 기뻤어요. 언니는 좀 우울해하는 기질이었잖아요? 그런 만큼 웃는 얼굴이 눈부셨지요. 하지만 언니는 결국 너무 약했어요. 달의 공주를 사랑하는 만큼 견디질 못했던 거죠.”

“견디다니…… 무엇을 견디지 못했단 겁니까?”

“후후. 뭐라고 할까요…… 상관없는 걸 말이에요.”

“상관없는 거?”

“네에,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을 말이에요.”

도통 선문답이었다. 샴페인은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탔다. 나는 끝없이 들이켰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잔이 차올랐다. 투명한 황금빛 액체에 쨍한 만월이 넘실거렸다.

이러다가 단술 따위에 취하겠다 싶은 때였다. 낮지만 육중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내 의식을 깨웠다.

“자, 여러분. 슬슬 이동하실까요? 신입 분께 오늘의 하이라이트를 선보일 시간입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휘파람을 불었다. 내 앞에 앉은 여자들이 꺄르르 환호했다. 내 등 뒤로 어깨를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돌아보기도 전에 박 선생임을 알았다.

“가십시다. 처음이시니 특등석에 앉혀 드리지요.”

그가 눈짓하는 곳에는 청년이 세렌을 데리고 간 건물이 있었다. 나는 마시다 만 샴페인을 단번에 입안으로 털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물 앞까지 이끌려가자 희미한 조명에 비친 외벽이 보였다. 건물은 창고가 맞는 듯했다. 그런데 문이 있어야 할 법한 곳이 콘크리트로 막혀 있었다. 의아해하는데 사람들의 행렬이 정면 구석으로 향했다. 계단이 나 있었다. 나는 그들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건물은 꽤 높았다. 3층 정도 높이가 됐을 즈음 작은 문이 행렬을 빨아들였다. 문 안쪽은 바깥보다도 어두웠다. 한 발짝 내디디자 이상하고 습한 악취가 물씬 풍겨왔다. 불길함에 걸음이 멈추었다.

“선생, 이쪽으로.”

박 선생은 사사건건 나를 챙겼다. 내 곁에 선 그는 내 허리를 살짝 밀며 안으로 안으로 부추겼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까지 온 거, 들어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세렌의 안위가 걱정되기도 했다.

안쪽은 발코니와 같은 구조였다. 난간에 바싹 붙어 배치된 의자들이 보였다. 의자들은 회원의 수와 비슷한 열 몇 개였다. 박 선생은 중앙의 의자를 내게 권했다.

“이게 다 뭡니까?”

의자에 앉아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무리 눈을 암적응해도 밑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음습한 냄새와, 무언가 동물 같은 것이 움직이는 기척이 전해질 따름이었다.

“곧 보게 되실 겁니다. 자, 긴장 푸시고.”

박 선생은 내 옆에 앉아 내 손등을 톡 쳤다. 사람들이 말없이 착석하는 소리가 들렸다. 옷감 스치는 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난간 아래가 노랗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어두웠던 영화관에 불이 들어오듯이.

영화관이라기보다는 대극장과 비슷한 구조였다. 아니, 커다란 우리를 둘러싼 발코니석이라고 해야 할까. 난간 아래로 사면이 철장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공간이 보였다. 그리고 점차 밝아지는 조명을 받아 어떤 형상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벌레들. 그런 감상이 들었다. 이취에 울렁거리는 속을 억누르며 난간 너머로 얼굴을 뺐다.

“헉!”

어둠에 끓어넘치고 있는 것들은 형상이 되지 못한 형상들이었다.

부품들만을 보면 ‘인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가 있었다. 팔이 있었다. 내장이 있었다. 뇌가 있었다. 치아가 있었다. 손가락이 난 혀가 바닥을 핥고 있었다. 팔에 박힌 눈알들이 제각기 뒤룩거리며 사방팔방 어지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벌어진 입에서 쏟아져나온 내장을 머리카락으로 관절을 대신하는 듯한 뼈다귀들이 그러모으려 애쓰고 있었다. 역겨움에 구역질을 하자 시큼한 칵테일이 입안까지 치밀어 올랐다. 신물을 다시 삼키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선생, 괜찮으십니까? 비닐봉지 드릴까요?”

박 선생이 내 등을 두드렸다. 나는 거칠게 그의 팔을 뿌리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게, 저것들은 도대체 뭡니까!!”

“진정하고 앉으세요.”

“뭐냐니까! 당신들 도대체……”

“전 선생.”

박 선생이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일어나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앉으시오.”

그때 나는 눈치챘다. 아직도 어둠이 짙게 깔린 주변 좌석으로부터 호기심과 냉담함이 섞인 눈초리들이 일제히 내 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차분하게 나를 주시하는 박 선생의 눈으로부터, 내 어깨를 짚은 손으로부터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제는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 안에 어느새 발을 깊숙이 집어넣어 버렸음을 깨닫게 하는 압력이었다.

어느 틈에 건장하고 무표정한 청년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슬슬 시작입니다. 자아……”

박 선생이 신호하듯 손뼉을 쳤다. 우르릉. 밑에서 육중한 철문이 움직이는 소음이 났다. 철창으로 둘러막힌 우리로 연결되는 통로가 열린 것이었다. 하늘하늘, 자박자박. 밤하늘에 매달린 아카시아 꽃송이처럼 흔들리며 등장하는 것들은, 달의 공주들이었다.

세렌을 닮은 소녀들이 천천히 오물로 가득한 우리 안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세렌!”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 내 옆에서 박 선생이 키득거렸다.

“시작하기도 전에 그렇게 좋아하셔서야, 이거 선생을 모신 보람이 있군요.”

음침한 조명보다도 환하게 빛나는 소녀들의 맨발이 더러운 살점들을 짓뭉갰다. 나는 온몸의 피가 말라버리는 기분을 느끼며 세렌을 찾았다. 저 소녀도, 그 옆의 소녀도, 그 뒤의 소녀도 모두 세렌처럼 보였다. 고요하게 내리뜬 만화경 빛의 눈이 커다랗게 열리기 시작했다. 신비로운 그늘을 드리운 입매가 씨익 치솟더니 입술이 쭈욱 열렸다. 새하얗게 빛나는 사지가 뒤틀리며 살덩이가 울컥거렸다.

소녀들은 변화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변태(變態)였다.

달빛처럼 고운 소녀의 형상이 형용하기 어려운 괴물로 변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되다 만 형상과 비교하면, 어쩌면 기능적이라는 칭찬이 가능할 법한 모습이었다. 살육자. 바닥을 보며 자연스레 벌레를 연상했던 것처럼 그런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소녀였던 것들 중 하나가 긴 비명을 질렀다. 무심코 귀를 막아버릴 정도로 새되고 끔찍한 소리였다. 그것을 신호로 괴물들도 일제히 소리를 질러댔다. 내장을 도려내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그리고, 광란이 시작되었다.

“아…… 아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엉덩이를 의자 바닥에 간신히 붙이고 앉아있는 게 전부였다. 나는 세렌이었던 것이, 세렌들이 온갖 흉악을 쏟아부은 듯한 패악을 부리며 ‘벌레들’을 포식하는 모습을 망연히 지켜보았다.

“아아, 세렌…… 아니야…… 아니야, 이런 건……”

“우리에게 달의 공주님이 내려왔을 때 말입니다.”

살육의 소음 틈으로 박 선생의 은근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공주들은 딱 그때 우리의 머릿수에 맞는 숫자로 내려왔지요. 그리고 그 이외의 것들은…… 보시는 것처럼, 아주 추악했습니다.”

“그 이외의 것……”

“공주님‘들’만 내려왔다는 말씀은 안 드렸을 텐데요. 함께 온 겁니다. 달로부터, 지극한 미의 현신과도 같은 소녀들과 형상 그 자체에 대한 모독과도 같은 버러지들이요. 우리는 놀라 우왕좌왕하면서도 아름다운 소녀들을 챙겼지요. 버러지들은, 다행히 우리에게 공격적이진 않았기에, 그 자리에 놔두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공주들이 아무것도 먹지 않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를 어쩌나 하던 차에, 호사가 기질이 풍부하던 회원 중 하나가 몰래 버러지 중 일부를…… 그 부품을 갖고 돌아갔음을 고백하더군요. 그는 시험 삼아 부품을 공주에게 주었고, 공주는 기쁘게 잘 먹어치웠답니다. 우리는 공주들이 내려왔던 곳을 다시 찾아 주변을 뒤져 버러지들을 회수했습니다. 다행히 근처 산속에서 얌전히 꾸물거리고 있었지요.

몇 번 급식을 해주며 알게 되었습니다. 공주들은 버러지들을 먹을 때 애초의 아름다움을 벗어던지는 버릇이 있더군요. 그런데 버러지들의 고기를 말려 가공해서 주면 형상의 변화 없이도 시식이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가급적이면 말린 고기를 급여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싱싱한 고기가 아닌지라, 영양적으로 한계가 있어 보였습니다. 피부가 거칠어지거나 머리가 빠지거나 하는 일이 생긴 거죠. 그래서 결국엔 세 달에 한 번 씩은 이런 식으로, 생고기를 마음껏 맛보게 해줄 필요가 있는 겁니다.”

“우욱……!”

역류하는 위액을 이번에는 억누르지 못했다. 나는 난간에 대고 토했다. 쉰내 나는 토사물이 바닥을 흘러 아래층으로 흘러내렸다. 검푸르게 번들거리는 ‘공주’의 피부에 나의 토사물이 철벅 떨어졌다. 속을 게워낸 내가 눈물로 따가운 눈을 닦자, 저 아래로부터 바르작거리고 있던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나마 꼴을 갖추고 있는 ‘벌레’였다. 강산을 뒤집어쓴 듯 액화된 피부를 늘어뜨린 그것은 어깨죽지에 붙은 머리를 쳐들고 바들바들 떨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이 없는 입이 벌어졌다. 쥐가 찍찍거리는 듯한 소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상하게 커다란 세 개의 눈은 이상하게 맑았다.

그것의 몸짓이, 비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설마…… 저것들은, 지성이 있……!”

“지성이라, 그 정의가 뭔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살육당하는 처지라는 것쯤은 자각이 있는 듯합니다. 저길 보시오.”

박 선생이 가리키는 쪽을 내 눈이 무력하게 좇았다. 넝마를 얽어 만든 듯한 커다란 몸체가 ‘공주’들의 공격에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듬성듬성한 골조로 된 몸통 안으로 작게 꾸물거리는 형상이 보였다. 새끼 원숭이가 떠올랐다. 작은 것은 큰 것의 몸 안에 찰싹 달라붙어 찢어져라 입을 벌리며 울어젖히고 있었다.

“저것도 어미라고 제 새끼를 보호할 줄 압니다.”

내 안에서 팽팽하게 긴장하던 어떤 끈이 툭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지이잉 하고 이명이 치며 마음이 가라앉았다.

“비윤리적인 고기는 아니라고 했지 않습니까.”

나의 질문에 박 선생은 조금쯤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이 마당에 별 하찮은 걸 다 신경 쓴다고 속으로 비웃었을지도 몰랐다.

“비윤리적이지 않죠. 그야, 저것들은 괴물이 아닙니까. 우리 인간 세상의 윤리 도덕과는 한치의 관련도 없는, 튀겨 먹든 구워 먹든 상관없는 찌꺼기들입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고기를 이 세상 것이 아닌 존재가 포식한다는 게 우리 같은 지상의 사람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서영이 ‘상관없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죽었다고 단발 여자는 말했다. 이것이었는가. 이 잔혹한 살육을 서영은 몇 번이나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점점 견디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저것이 새끼를 가졌다는 건…… 번식할 수도 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내버려두면 저들끼리 붙어먹고 새끼를 싸지릅니다. 쥐보다는 못하지만 아주 번식이 빨라요. 덕분에 달의 공주들이 먹이로 궁할 일은 없을 듯합니다.”

내게서 떨어져나갔던 열기가 훅하고 가슴을 치고 들어왔다. 나는 혐오와 분노를 담아 내뱉었다.

“속았어, 서영이 날 속였어! 이런 추악한 일이라곤, 알았으면 세렌 같은 건……!”

“하하하하하!”

박 선생뿐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는 진땀을 흩뿌리며 황망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높고 낮은 웃음소리가 즐거움과 경멸과, 은근한 동지 의식으로 나를 감쌌다. 사방에서 번쩍이는 사람들의 눈, 눈, 눈…….

“선생! 친애하는 전 선생! 다 압니다, 알고말고요! 우리들 사이에서 고결한 척할 거 없습니다. 윤리 도덕에 얽매이실 필요 없습니다. 자, 선생이 사랑하는 세렌을 보시오. 저기, 선생의 공주를 보라고요!”

박 선생의 억센 손가락이 내 어깨에 파고들었다. 그는 포박하듯 나를 끌어안고 억지로 아래의 한곳을 보도록 했다. 다른 것과 구별이 가지 않는 푸른 피부의 괴물이 가여운 벌레를 해체하고 있었다. 괴물은 박 선생의 열띤 외침에 반응하듯 한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부르르 경련했다. 환상의 괴수를 연상케 하는 비명이 높은 천정을 쳤다. 그리고 괴물의 배로부터, 배꼽이 있어야 할 곳 아래, 부르기도 끔찍한 말단으로부터 울컥 핏물이 쏟아졌다.

핏물을 헤치며 또 다른 검푸른 덩어리가 조금씩 조금씩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괴물이 새끼를 낳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전 선생! 선생의 공주님과의 사랑의 결실을 보는군요. 하하하! 쑥스러워하실 것 없습니다. 선생도 신체 건강한 남자이지 않습니까? 우리 모임에서는 한두 번 있는 경사가 아닙니다.”

저것은 세렌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내가, 세렌에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

나는 남자다. 홀아비다.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녀를, 돌보고, 그 피부를 느끼고, 그 머리칼을 만지고…… 그 몸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아름다운 것이 주는 위안을 최대로 느끼려는 행위가 뭐가 잘못인가.

“그래요, 선생은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상관없는 일이에요! 어차피 저건 인간이 아닙니다.”

괴물의 새끼가 땅에 떨어졌다. 괴물은 그 푸른 핏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 손으로 들어 자기 머리로 가까이 가져갔다. 냄새를 맡고 관찰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괴물은 이윽고 입을 벌렸다. 촘촘한 이빨로 가득한 입안이었다.

“보십시오. 얼마나 기특합니까? 아빠한테 폐가 되지 않게 스스로 처리해 주다니요.”

내게로 달라붙은 박 선생의 입김이 뜨거웠다. 진심으로 기특해하는 듯이, 사랑스러워하는 듯이. 그 감정을 전부 내게 온몸의 열기로 부딪히고 있었다.

“안심하십시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한밤의 꿈입니다. 얼마나 멋진가요, 우리의 공주들은. 아아, 그야말로 한밤의 꿈을 지배하는 달빛 같은 존재들입니다…….”

5.

깨어나자 집이었다.

나는 내 방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잠시 허우적거리던 나는 책장 옆에 다소곳이 앉은 소녀의 모습에 숨을 삼켰다. 세렌이 거기 있었다. 여전히, 평소대로 아름답게…… 평소가 무엇인지 이제는 모르겠으나.

꿈. 꿈인가. 그야말로 한밤의 꿈이었나. 나는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오후 아홉 시 28분을 표시하던 액정이 스와이프되며 수많은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들의 배너를 토해냈다. 날짜와 시각을 다시 확인하고 내가 하루를 통째로 자는 데 날려먹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메시지들은 무단결근한 전 차장을 찾아대고 있었다.

입은 채 구겨진 슈트 앞섶에서 시큼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토사물이 방치된 채 말라붙어 있었다. 나는 달달 떨리는 턱을 들어 세렌이 있는 쪽을 살폈다. 어두운 방에서 세렌은 어쩐지 이전보다 밝고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갔다. 암막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바깥의 소음과 찬 공기가 한 덩어리로 흘러들어 왔다. 그러나 더러운 기분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속았어……. 서영이가, 그 여자가 앙심을 품고 내게 괴물을 맡긴 거야…….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나랑은 상관없어……. 구정물과 같은 상념은 내 머릿속에서 빠질 줄을 몰랐다.

보름을 지났지만 달은 아직 둥글었다. 빛이 맑았다. 나는 시린 눈을 가늘게 뜨고 보름달을 살폈다. 달은 마냥 하얗기만 하지 않았다. 어두운 부분이 얼룩덜룩하게 존재했다. 어둠을 빛으로 지배하는 달일지라도 자신의 어두운 부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추악해.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세렌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다. 서영의 목소리였던가? 나는 헛웃음을 쳤다.

그만하자. 내일 일을 생각해야지. 일단 샤워하고, 내일 김 부장한테 깨지기 전에 먹을 우황청심환 어딨는지 찾아놓고. 음악이라도 들을까. 일단 가볍게 요깃거리를 하는 게 좋겠다. 그리고, 그리고.

세렌 같은 건 나랑 아무런 상관도 없다.

눈앞이 시커매졌다. 눈을 감자 달빛의 잔상이 아리게 깜박거렸다. 내게서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격정을 나는 손가락에서 흘러내리는 모래를 보듯 멀찍이서 바라보았다.

나는 세렌에게 다가갔다. 불가사의한 자애가 솟구쳤다.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소녀의 은발을 가만히 쓸었다. 소녀의 은빛이 기뻐하듯 환해졌다. 가엾게도, 너희는 무엇 때문에 이 지상으로 온 거냐. 더럽고 추악한 인간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천상에서 이 구렁텅이로 떨어진 거냐?

세렌의 정체는 끔찍한 괴물이다. 그래도 나는 그녀를 혐오할 수 없었다. 오히려 더한 애정이 나를 지배했다. 달 표면의 어둠으로 인해 오히려 달이 찬란해 보이는 것처럼.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어두었다. 다시 돌아온 나는 책상에 놓인 필통에서 커터칼을 꺼냈다. 검지를 조금 베자 따끔하며 피가 배어나왔다. 나는 붉은 이슬이 맺힌 검지를 소녀의 입술로 가까이 대었다.

세렌의 작은 코가 찡긋거렸다. 냄새를 맡고 있다. 창백하게 윤기 흐르는 분홍빛 입술이 벌어지고 조갯살처럼 혀가 비어져나왔다. 차갑고 축축한 살덩이가 내 상처를 핥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속죄인지, 사랑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하고 싶었다. 비참하게 유린당한 아름다운 생물에게,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존재라고 현실로부터 도려내어진 연약한 존재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을 해주고 싶었다.

세렌의 이가 내 손끝을 깨물었다. 짜릿한 고통과 함께 부드러운 희열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내게 밀착하여 열기를 뿜었던 박 선생을 떠올렸다. 사람 고기 맛을 본 공주를 처리하게 하지 말라고 말했었지……. 세렌이 먹을 수 있는 건 그 벌레들뿐이 아니다. 사람도 먹을 수 있는 거다. 세렌이 사람 고기 맛을 본다면, 사람을 먹어 삼키는 존재가 된다면 이제 아무도 이 아이가 그들과 ‘아무 상관 없는’ 존재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세렌의 입질이 격렬해져 왔다. 애정에 굶주린 어린아이처럼 나의 피와 살을 갈구해 온다. 만족스러웠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언가와 비로소 하나가 되는 감각.

나의 피와 살을 마시고 뼈로 대관(戴冠)하렴, 작은 달의 공주여.

이 추악한 몸뚱아리를 씹어 삼켰을 때 너는 한낱 한밤의 꿈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다.

너는 이 세상의 여왕이 될 테니.

비로소 환상은 현실과 일치했다. 끝없는 고통 속에서 나는 안도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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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김초코 19.11.18 04:30 댓글

    브릿G 에디터 기준 149매가 떠서 올리지만, 혹시 분량초과라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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