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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이학회 올무가지 by 배명은

2019.09.15 00:0009.15

2회차.jpg
[특집] 괴이한 거울

올무가지

배명은

의식이 부유한다. 어두운 공기 속을 떠돌며 아직은 자리를 잡지 못해 길게 꼬리를 남긴다. 덜컹덜컹. 조금 더 선명해지는 어둠에게서 멀어지려고 안간힘을 쓸 때마다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리고 선득하게 느껴지는 통증. 뒤통수가 욱신거리고 목이 얼얼했다. 손을 들어 목을 만지고 싶었지만 팔은 움직이지 않는다. 답답했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희수는 눈을 떴다.

분명 눈을 떴다. 그러나 보이는 거라곤 어둠뿐이다. 숨을 몰아쉬며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귓가에서 빳빳한 질감의 비닐이 부스럭거렸다. 눈앞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내려고 발악했다. 그럴수록 무언가가 몸을 옥죄었다.

어두운 골목을 돌아 현관불빛이 깜박이는 연립주택으로 걸음을 옮겼던 기억이 났다. 계단을 오르는 기억에 맞춰 몸이 밑으로 쏠렸다.

‘여긴 어디지?’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어둑한 거실에 서 있는 그림자.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녀의 입을 틀어막는 두툼한 손.

‘여긴 도대체 어딘 거야?’

반항하는 그녀의 목을 움켜쥐던 축축한 손. 뒤로 넘어가는 시야.

어디선가 자동차 경적소리가 났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숨을 고르고 주위를 살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부스럭대는 소리에 자신이 비닐에 싸여 있다는 걸 알아챘다. 바닥은 딱딱했지만 엔진소리가 들렸고 이동 중인 듯 몸이 흔들렸다.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몸을 말고 있는 비닐의 틈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팔이 빠지자 머리끝까지 덮은 비닐을 걷어낼 수 있었다. 탁하지만 시원한 공기를 한껏 마셨다.

손등으로 땀을 닦아내고 손을 뻗었다. 얼마 못가 만져지는 차가운 철제 천장. 까슬까슬한 바닥의 감촉. 트렁크 안에 갇혔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울음소리도 죽였다. 그가 알아차릴까봐 무서웠다. 그 남자는 희수가 죽은 줄 아니까. 그녀는 좁은 공간에서 자신을 감싼 비닐을 모조리 벗겼다. 손으로 더듬어 무기가 될 만한 걸 찾는다. 다리 쪽에서 뭉툭하고 묵직한 뭔가가 잡혔다. 이제 차가 멈추길 기다렸다.

딱히 계획이란 게 있지는 않았다. 트렁크가 열리면 휘두르고 도망친다. 이게 다였다. 그러나 남자는 이 모든 걸 준비했다는 사실에 눈물만 났다.

희수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목을 조르던 익숙한 그 손을 안다. 늘 자신을 때리던 그 손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쏟아지는 폭력에 벗어나기 위해 여러 번 헤어짐을 고했지만 남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용서를 바라고 울면서 동정을 바라고 자신의 손목을 그으며 죄책감을 바랐다.

트렁크 안에서 희수는 작은 무기만 붙든 채 자신을 끌어안았다. 어쩌면 영원히 그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던 차가 멈췄다. 희미하게 들리던 다른 차들의 소음도 사라졌다. 희수는 고개를 들어 급히 눈물을 닦았다. 차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흠칫 놀란다. 잔돌을 밟는 무거운 발소리가 들리고. 딸깍. 트렁크 문이 열린다. 그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안으로 새어 들었다. 밖을 살펴 볼 새도 없이 거대한 남자의 몸이 드러난다.

그 존재감으로 몸이 굳었다. 피가 한꺼번에 빠져나간 느낌이다.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죽을 거야. 그 생각에 무기를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모든 건 다 무의미한 저항일 뿐.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남자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무기를 휘둘렀다.

‘그래도 괜찮아? 그렇게 순순히 남자에게 잡혀 죽어 어딘지도 모를 곳에 파묻히는 결과가?’

스스로의 질문에 고개를 흔들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희수는 다시 손에 힘을 줬다. 눈도 깜박

“악!”

갑작스런 공격에 남자가 머리를 붙들고 넘어졌다. 희수는 트렁크에서 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년이.”

바닥을 뒹굴던 남자가 희수를 노려봤다. 희수가 다시 무기를 휘둘렀다. 남자는 재빠르게 피하며 발로 그녀의 손을 찼다. 땡그랑. 손에 들고 있던 무기가 저 뒤로 굴러갔다. 희수는 뒤돌아 뛰었다. 어기적거리며 일어난 남자가 제 손에 묻은 피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어딜 도망가! 너 거기 안서?”

“살려주세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텅 빈 도로를 따라 올라간 그녀는 끝없이 어둠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보았다. 사방엔 나무였고 자신을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렇게 판단한 그녀는 도로 옆 난간을 넘어 가파른 산길로 내려갔다. 남자가 쫓아오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희수야! 기다려봐!”

아까와는 전혀 다른 톤으로 부르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 목소리를 믿었던 지난날이 스쳐지나갔다.

“아아악 살려주세요!!”

“거기 서라고!!!”

남자의 소리가 커지자 두려움도 덩달아 커졌다. 그에게 잡히면 죽는다. 도로에서 멀어질수록 어두워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멈출 수 없었다. 두 팔을 뻗고 앞을 가늠했다. 그렇다고 모든 걸 제때 피하지 못했다. 나무를 붙들어도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온몸이 찍혔다.

거친 숨소리에 섞여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헐떡이는 남자의 숨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소름이 끼쳤다.

“제발, 살려...”

큰 돌에 발이 걸렸다. 몸이 잠깐 붕 뜨는가 싶더니 낙엽으로 가득한 바닥을 굴렀다. 검은 허공이 보이다가 갑자기 등장하는 나무에 이리 저리 부딪혔다. 겨우 멈췄을 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저 멀리서 남자가 낙엽을 밟는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희수는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를 절뚝거렸지만 아픔보다 뒤에서 다가오는 존재가 더 무서웠다.


얼마나 달렸을까. 큰 보름달이 떨어지는 나뭇잎 사이로 보였다. 어두운 숲속에서 남자와의 사이가 벌어졌고 어느 순간 남자의 존재가 사라졌다. 그 사실을 알아차렸어도 방심하지 않고 달렸다. 어디로 달리는지 몰랐고 오로지 그에게서 숨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달릴수록 짙은 숲의 냄새가 폐부에 가득 찼다.

커다란 소나무를 돌아 그 밑으로 내려갔다. 완만한 내리막길을 지나자 앞을 가린 덩굴에 발이 묶였다. 잔가시가 발목을 할퀴었다. 팔로 덩굴을 걷어내다가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잡았다.

바스락. 찢겨진 비닐의 끝은 머리 위에서 저쪽으로 이어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허공을 더듬다가 차가운 빛을 내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철제를 발견했다. 균등하게 자리한 철로 된 구조물. 그건 비닐하우스였다. 오래되어 비닐은 갈가리 찢겨졌어도 근처에 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희수는 다시 뛰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빛이 반짝였다. 분명 어둠뿐이던 곳에 불빛이 일렁였다. 남자 일수도 있었기에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아니라 해도 가까이에 있을지 몰랐다. 신중해야 했다. 빛을 향해 뛰다가 미끄러져 휘청거렸다. 바로 옆에 나무를 붙들어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빛이 사라졌다. 당황해서 달려가니 어둠에 묻힌 낮은 건물들이 나왔다.

낮은 담은 허물어졌고 문짝은 떨어져 나갔다. 마당으로 들어가자 집기들이 발에 채였다. 어질러진 마루에 이르자 한기가 끼쳤다.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는 곳. 희수는 다른 집으로 향했다. 그곳 또한 마찬가지다. 수풀이 집안으로 침투했고 황량한 바람만이 머물렀다.

허탈했다.

‘아니야. 불빛을 봤잖아. 잘 찾아보면...’

다른 집이 있는지 찾아보려고 할 때 인기척이 들렸다.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버석거리는 소리를 죽이려고 애써본다. 움푹 파인 공간에 몸을 숨겼다.

수풀을 치대는 바람소리가 났다. 지척에서 비딱하게 열린 문이 끽끽 울었다. 밤벌레 소리에도 흠칫 몸을 떤다. 바닥을 뒹구는 낙엽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스락바스락. 저 밑에서부터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작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자신에게로 곧장 다가온다. 심장이 덜컥거렸다.

“언니 여기서 뭐해?”

의외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 고개를 들자 밝은 빛이 눈에 들어왔다. 불빛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그 앞에서 열 살 정도의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희수를 바라본다. 검은 원피스를 입은 아이가 큰 두 눈을 빛냈다.

"길을 잃은 거야?"

한걸음 앞으로 다가오며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다쳤어? 피나."

아이가 자신의 통통한 볼을 가리켰다. 희수는 홀린 듯이 그 행동을 따라했다.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느낌에 손을 떼어 보니 손끝에 붉은 피가 묻어났다.

"여기도."

어느새 다가온 아이가 희수의 이마를 만졌다. 뜨거운 체온이 이마에 머무르다가 물러났다.

"아프겠다."

바람이 불었다. 일제히 나뭇잎들이 움직였다.

"희수야!"

멀지 않은 곳에서 남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희수는 화들짝 놀라 아이의 손을 잡고 뛰었다. 따라 뛰는 아이가 뒤를 돌아봤다.

"언니 친구야?"

"아니야! 저 사람은..."

이 아이한테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이의 까만 눈동자가 희수를 올려다보았다. 몇 번 눈을 깜박이더니 고개를 끄떡인다. 뭐가 재밌는지 까르르 웃는다.

"아아, 숨바꼭질 하는 거구나! 나도 알아 숨바꼭질. 예전에 애들이랑 했었어."

"여기 말고 다른 집들이 있니?"

"숨을 데가 필요한 거지? 그럼 우리 집으로 가. 거기 창고라면 못 찾을 거야."

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남자가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못갈까. 아이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대신 우리 할머니한테도 들키면 안 돼. 알았지? 할머니 무섭단 말이야."

희수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가 손을 잡아끌었다. 손전등 불빛이 저만치로 앞섰다. 익숙한 길인 듯 온통 수풀과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곳을 거침없이 뛰었다. 자신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지다가 평지가 나타났을 때 아이는 멈췄다. 서로의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주위는 고요했다. 손전등으로 앞을 비추자 그곳에 갑자기 튀어나온 것처럼 창고가 나타났다. 낡을 대로 낡아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창고는 군데군데 금이 갔고 귀퉁이엔 구멍이 났다. 나무틀로 된 창은 유리가 깨져 그 자리를 비닐이 대신했다.

아이는 그곳으로 향했다. 창고 주위는 잡초가 무성했다. 손등에 거슬거슬한 잡초가 스쳤다. 아이가 조심히 양철 문을 열자 후텁지근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안으로 들어가자 마른 풀냄새가 진하게 났다. 양옆으로 나무 지지대를 세우고 그 위에 얇은 판을 얹어 풀과 그 뿌리를 널어놨다. 천장마다 새끼줄로 잎들을 엮었고 어떤 거는 검게 변하거나 누렇게 변한 것들도 있다. 그 종류를 알지는 못하겠으나 약초나 나물이라고 짐작했다.

사람 한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통로로 걸어 들어가자 그 끝에 공간이 나왔다.

"여기에 숨으면 모를 거야. 할머니는 눈이 잘 안보이니까 소리만 내지 않으면 돼."

자꾸 할머니한테 들키면 안 된다고 하자 그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아이는 할머니가 아주 무섭다고 했다. 엄하신가 보구나. 사람들한테 경계심도 있고.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까? 그러나 힘없는 할머니와 이 아이까지 위험에 빠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는 약자한테 한없이 강한 사람이니까.

"혹시 집에 전화는 없니?"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밑에 집 여은이네엔 있었는데 이사가버려서..."

"다른 어른들은 없니? 다른 집은? 친구는?"

아이는 연방 고개를 흔들었다. 큰 두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친구들은 다 도시로 이사가버렸는걸. 나도 할머니한테 가자고 했는데 할머니는 천지세상 우리뿐이라 갈 데가 없다고 그랬어. 우리가 있을 곳은 이곳뿐이라고. 이제 여기엔 우리밖에 없어."

희수는 벽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막막했다.

"언니 아파?"

아이가 희수의 팔을 잡고 걱정스레 물었다. 온몸이 아팠지만 희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쉬면 좀 나을 거야."

해가 뜨면 어떻게든 이 산을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를 마주 봤다. 아이는 여전히 자신을 걱정하는 눈치다.

"이름이 뭐니?"

"정윤지."

"예쁜 이름이네. 몇 살이야?"

"8살."

생각보다 어려서 좀 놀랐다.

"학교는 여기서 다니는 거야?"

윤지는 고개를 저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자신의 손에 두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잠시 멈칫거리더니 속삭인다.

"학교 안 다녀. 여기서 멀거든. 할머니가 한글이랑 산수 알려줘. 바보 아니야. 덧셈 뺄셈도 하고 구구단도 외워."

"벌써 구구단을 외운다고? 정말 똑똑하네. 언니는 그때 내 이름도 못썼어. 그래서 엄마한테 많이 혼났는데."

말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엄마를 떠올리자 목에서 뜨거운 뭔가가 치밀었다. 눈가가 시큰해져서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렸다.

"괜찮아. 잠시 목이 따끔거렸어."

"언니 목마르지? 내가 물 가지고 올게. 기다려."

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지가 나가자 눈물이 뚝 떨어졌다. 자신이 왜 이렇게 됐으며 이런 상황에서 다시 평소처럼 엄마를 만나 마음껏 부를 수 있을지. 그걸 몰라서 절망스러웠다.


창고 안에 숨어든 귀뚜라미가 울었다. 그 소리와 함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언제 잠이 들었을까. 눈물이 굳어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떴다. 그리고 머리맡에 둔 손전등을 켰다. 환한 불빛에 어둠이 물러나고 모든 소리가 멎었다.

‘너무 오래는 켜지마. 할머니한테 들킬 수 있으니까.’

손전등을 두고 가며 윤지는 경고했다. 불을 끄고 뒤척였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여기저기 욱신거렸다. 끙 소리가 절로 났다. 탁한 비닐 창에 달빛이 비춰들었다. 뿌연 달빛을 받은 끊어진 거미줄이 흐느적거렸다. 숨죽였던 귀뚜라미가 다시 울었다. 문 쪽에서였다. 일정하게 이어지는 소리에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진다.

탁탁탁. 뭔가가 기어왔다. 쥐인가? 아니 그보다 움직임이 더 컸다. 냄새를 맡으며 조심스럽게 희수의 옆을 더듬는다. 역한 냄새가 풍겼다. 눈을 뜨고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달그락달그락. 그건 윤지가 가지고 온 그릇을 탐냈다.

물을 가지고 온 윤지는 뿌연 국에 밥을 말아서 가지고 왔다. 이 시기에 많이 먹는 고깃국인데 자기는 이게 제일 맛있다고 권했다. 하지만 생각이 없던 희수는 배고프면 먹겠다며 옆으로 치워뒀었다. 근데 그걸 끌어다가 허겁지겁 먹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까지 닥닥 긁어먹다가 일순 멈췄다.

밖에서 다리를 끄는 소리가 났다. 점차 가까이로 다가와 밖을 서성거렸다. 그릇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니야,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닐 거야. 그건 아니야."

희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짐승일거라 생각했던 것이 말을 했다. 잔뜩 갈라진 낮은 목소리. 그건 사람이었다. 절뚝이는 발소리가 뒤편으로 사라졌다.

"어쩌지? 어쩌지?"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짧은 숨을 들이켰다. 비닐 창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옆 존재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몸을 부르르 떨더니 짧은 비명을 질렀다. 안절부절 못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날 봤어! 도망가야, 아니야. 그냥 이대로 있어! 늘 그랬듯이!"

중얼중얼. 수풀에 스치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이 점점 빨라졌다. 금방이라도 창고 문이 열릴 것 같았다. 다리를 달달 떨기만 하던 그가 상체를 숙여 희수의 귀에 속삭였다.

"도망쳐야 해. 너도 어서 도망쳐!"

말을 멈추고 그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창고를 내달려 밖으로 튀어나갔다.

"아아아악!"

내지르던 비명이 멀리까지 이어지더니 이내 끊겼다.

동시에 희수는 눈을 떴다. 그제 서야 몸이 움직였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태연히 귀뚜라미는 울었고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꿈이었나? 흐릿한 두 눈을 부비며 손전등을 잡았다.

불을 켤까? 꿈이라고 단정한들 쉽게 불을 켤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경고하던 이는 누구였나? 절뚝이며 창고를 배회하던 존재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더욱 혼란스러웠다. 꿈이다. 두려움이 만들어낸 꿈. 현재 자신이 쫓기고 있어서 이런 꿈을 꾸는 것이리라.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훤히 모든 상황을 인지하지 않았는가? 말도 안 되지. 혹시라도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귀를 기울였다.


해가 뜨고 주위 사물이 식별이 될 때까지 아무런 소리도,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뻑뻑해진 눈을 끔벅이던 희수는 바닥에 뒹구는 그릇을 봤다. 그 주위로 너저분하게 음식이 쏟아졌다.

‘저것도 내가 한 걸까? 잠결에?’

꿈이라고 단정해보지만 자꾸 귓가에서 목소리가 맴돌았다. ‘도망쳐!’ 희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고를 빠져나오자 여린 햇살에 눈이 부셨다. 이슬을 잔뜩 머금은 수풀에 바짓단이 금세 젖어들었다. 산새들이 여기저기서 지저귀고 붉고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반짝였다. 바람이 한차례 불어 수풀을 쓸고 나뭇잎을 떨군다. 차가운 공기 중에 나무 타는 냄새가 났다. 여러 그루의 밤나무 밑으로 낮은 집이 보였다. 낡았지만 집주변은 깨끗했고 그곳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람이 사는 곳. 윤지의 집이었다.

조심히 산길을 내려갔다. 좁았던 오솔길이 넓어지고 닭장이 나왔다. 그 안에서 여러 마리의 닭이 무청을 뜯어먹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닭장 옆에 잔뜩 쌓인 장작더미를 지나 마당으로 갔다.

집안은 조용했다. 감나무 밑 평상엔 붉은 고추가 널렸고 수돗가 대야엔 벚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물밑에 가라앉았다. 바가지로 물을 떠 마셨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마루에 손전등을 내려놓았다. 이대로 윤지에게 고맙다는 말없이 떠날 생각이다. 남자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처럼 이 연기를 보고 이집으로 올 것이다.

희수는 장작이 거의 꺼진 아궁이를 봤다. 가마솥에서 연기가 폴폴 났다. 연기에 눈이 매웠다. 손으로 연기를 내저으며 반쯤 열린 뚜껑 안을 본다. 뽀얀 국물이 보글보글 피어올랐다. 고깃국의 냄새를 맡자 배에서 소리가 났다. 먹어도 될까. 조금만 먹고 갈까.

국자를 들어 옆에 있는 그릇에 국물을 옮겨 담는다. 뼈가 걸려 올라오고 비계가 적은 살코기를 휘저었다. 그리고 자잘한 뼈에 붙은 살을 꺼내본다. 여러 개의 작은 뼈가 길게 이어진 그 끝에 불은 살가죽.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희수는 짧은 비명을 지르고 국자와 그릇을 내던졌다.

오그르르 하며 국이 끓어올랐다. 뼈와 살들이 국위로 나타나다가 사라졌다. 두툼한 혀와 익어버린 눈과 흐물흐물한 귓바퀴. 희수는 구석으로 달려가 토악질을 했다. 방문이 열리고 윤지가 나왔다.

“언니?”

막 잠에서 깬 아이가 희수를 보고 달려왔다.

“왜 여기로 왔어? 지금 오면 안 돼. 할머니가 온단 말이야.”

윤지가 희수의 팔을 끌었다.

“어서 도망가. 빨리.”

“누구쇼?”

어느새 대문으로 들어온 노파가 희수를 보고 물었다. 윤지가 깜짝 놀라 희수의 허리를 안았다. 왜소하고 깡마른 체구의 노파는 매서운 눈초리로 윤지를 본다.

“저기, 길을 잃었어요. 마을로 가는 길이 어딘지 여쭈려고요.”

자꾸 가마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신경이 쓰였다. 그 안에 있는 것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끓어오르는 눈과 코와 입이 하나로 모였다.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벌린 입에서 꿀렁거리며 허연 국물이 뿜어졌다.

‘도망쳐야 해. 너도 어서 도망쳐!’

몸이 움찔거렸다. 희수는 노인이 버티고 선 대문을 봤다. 도망칠 수 있을까? 입을 꾹 다문 노파가 눈을 또륵 굴리더니 히죽 웃었다. 군데군데 이빨이 빠져나간 사이로 검붉은 혀가 보였다. 낄낄낄.

“길을 잃었다고? 허긴, 가을이면 다들 그러더라고. 다행이도 말이지.”

“...네?”

“아가씨한테 다행이란 말이야. 내가 마을로 가는 길을 알거든. 밥이나 먹고 감세. 얘 윤지야. 손님 힘드시게 하지 말거라. 다 커서 어리광은.”

노인은 허리에 팔을 두고 절뚝거리며 천천히 부엌으로 향했다. 희수를 올려다본 윤지가 주저하더니 할머니한테 갔다.

“아, 아니요. 저는 생각이 없어서요.”

그렇게 말하며 희수는 대문을 흘깃거렸다. 절뚝이는 노인의 모습에 창고를 서성거리던 발걸음이 생각났다. 지금이라도 도망치면 저 노인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자 노인이 뒤를 돌아 희수를 봤다.

“그럼 차라도 대접하리다. 이것도 인연인데 집에 온 손님을 대접 하나 없이 보낼 순 없잖소? 자꾸 거절하지 말고. 윤지야, 언니 앉게 방석 좀 내오너라.”

“...응.”

아이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노인이 마루로 가서 희수를 향해 손짓했다.

“이리 오시오.”

절뚝거리는 노인이 자신을 붙잡을 수 있을까? 희수는 손짓을 바라보며 갈등하다가 권하는 자리로 갔다. 모르는 척 해. 가마솥에 무엇이 있는지. 노인이 희수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희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윤지가 방석을 들고 와 마루에 놓았다. 방석 위에 앉자 노인이 부엌으로 가며 말을 걸었다.

“어쩌다가 이 산속에서 길을 잃었소?”

“...어떤 남자를 피해서요.”

“남자?”

희수는 대문 너머를 봤다. 저기 어디서 보고 달려오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그 사람이 절 죽이려고 해서. 그래서...”

산등성이를 눈으로 훑던 희수는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에 입을 다물었다. 찻잔과 주전자를 가지고 나온 노인도 산등성이를 봤다.

“그 자가 저기에 있소?”

“위험한 사람이니 조심해야 해요.”

마루에 올라온 노인이 주전자에서 뜨거운 물을 따라 찻잔을 희수에게 건넸다.

“그리하리다. 윤지 너는 일어났으면 세수 먼저 하지 않고. 아이고, 손님 앞에서 아직도 잠옷차림이야.”

윤지의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노파의 손이 나무껍질 같았다. 그 손에 침을 묻혀 아이의 볼에 묻은 자국을 문댄다. 아이가 아프다며 칭얼거렸다. 엷은 초록빛을 띈 차를 마시지도 못하고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조금이라도 마셔 보시오. 내가 가을 초입에 딴 야생화인데 향이 좋지. 먹고 죽지는 않소.”

희수는 차에 코를 대었다. 노인의 말대로 차에서 꽃향기가 났다. 조심스럽게 차를 마셨다. 뜨거운 기운이 몸속으로 스며든다. 노인이 한숨을 쉬며 바람 불어 떨어지는 낙엽을 본다.

“이제 곧 겨울이 올 텐데 올해도 잘 지낼까 걱정이오. 이곳 겨울은 유난히 길어 혹독하다오. 늘 준비한다 해도 모자라거든.”

“겨울 준비요?”

“식량이 제일 문제지. 농사를 지어도 부족한 게 있다오. 그래서 무조건 보이는 족족 준비를 해야 해.”

“나도 마실래.”

윤지가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노인이 그 손을 쳐냈다.

“어디서 버릇없이 손님 차를.”

놀란 윤지가 울먹거리자 희수가 손을 흔들었다.

“아니 괜찮아요.”

움직이던 희수는 눈앞이 어지러워 휘청거렸다. 곧 몸에 힘이 풀리고 마루에 쓰러졌다.

“언니!!”

윤지가 달려왔다. 희수의 눈이 노인을 올려다본다.

“우리가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원망 마오.”

노인의 모습이 가물거렸다. 살려주세요. 란 말이 입에서 맴돌았다.

“죽이지 말라고. 할머니 나빠. 내가 구한 언닌데 왜 죽이려고 해?”

“할머니가 먹을 거에 잔정 주지 말랬지!”

아이가 소리 높여 울었다.

“그만 울어라. 할미가 너 좋아하는 소시지로 만들어줄 테니까.”


희수는 골목길을 걸어 연립주택의 현관을 지났다. 누가 갈았는지 깜박거리던 전등이 밝게 빛났다. 계단을 올라가 집 앞에 섰다. 비밀번호를 누르자 띠릭 하는 소리가 났다. 당연하게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려고 하다가 잠시 멈칫거렸다.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이 안에 무엇이 있을지도 몰랐다. 잠시 주저하다가 문을 연다. 끼이익.

차가운 뭔가가 얼굴에 닿자마자 사라졌다. 발밑으로 낙엽이 굴렀다. 찬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복도에서 드리운 빛 사이로 눈발이 날렸다.

어두운 거실 저편에 숲이 있다. 창백한 햇빛에 수북이 쌓인 눈이 반짝거렸다. 집안으로 천천히 들어가자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거실바닥에도 눈이 덮여 있었다. 신발을 신은 채로 걸어 들어가자 발밑에서 뽀드득 뽀드득 눈이 뭉개졌다.

“언니!”

숲 저편에서 두툼한 패딩을 입고 털모자를 쓴 윤지가 희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마주 흔들던 손이 멈칫거렸다. 그늘진 나무 뒤로 거대한 몸집이 보였다. 그다. 나무 뒤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를 훔쳐보고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희수는 뛰어가 윤지의 손을 붙잡았다. 아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본다. 희수는 나무 뒤에서 얼굴만 내밀은 남자를 노려봤다. 검은 그림자가 진 얼굴에서 유독 작은 두 눈이 번뜩였다. 퍼런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가 몸을 펴자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후드득 떨어졌다. 희수는 아이를 데리고 뛰었다.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알았다. 숨바꼭질 하는 거지?”

“그래. 뛰는 거다.”

“응!”

그들은 함께 눈길을 달렸다. 양옆으로 쭉 펼쳐진 하얀 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아이의 발개진 두 볼이 사랑스러웠다. 신이나 목청껏 웃자 흩어지는 은빛의 눈이 반짝반짝. 뒤에서 남자가 쫓아오는데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내리막길 끝에 웅크리고 있는 하얀 창고가 보였다.

“저기까지!”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기까지!”

푹푹 쌓인 눈을 밟고 달려가 창고 문을 열었다. 먼저 윤지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 뒤를 희수가 뛰어 들어갔다.

하아, 하아. 창고 안은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희수와 아이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아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앞이 보이지 않아 손을 뻗어 주위를 더듬는다.

“윤지야 어디 있어. 잘 안 보여.”

“언니 여기야 여기!”

저쪽에서 아이가 말했다. 툭. 천장에 걸린 뭔가가 어깨를 쳤다. 다른 게 팔을 치고 대롱거리다가 머리를 친다. 생각보다 많이 매달린 것들의 사이를 지난다. 눈을 몇 번이나 깜박였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빨리 빨리.”

“그래 알았어. 갈게.”

쓰읍. 귓가에 스치는 뭔가가 입맛을 다셨다. 몸을 움츠렸다. 손으로 허공을 몇 번 더듬은 다음 바로 옆에 매달린 걸 잡을 수 있었다. 반질거리고 딱딱한 곳을 지나쳐 울퉁불퉁한 표면을 더듬고 축축하고 버석버석한 둥그런 무언가. 손으로 눈을 부비고 앞을 보려고 애쓴다. 희뿌옇게 진 이물질을 몇 번이나 눈을 깜박여 없앴다. 보다 선명한 시선으로 붙잡은 걸 보았다.

작고 둥그런 덩어리 같다. 군데군데 하얀 곰팡이가 꼈고 그 밑으로 갈색과 회색이 드러났다. 일부러 고기를 삭히는 건가? 고개를 디밀어 더욱 자세히 보았다. 길쭉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새끼줄로 묶었고 둥그런 밑 부분은 딱딱하다. 갈색의 거죽은 뼈에 말라붙었고 위쪽 곰팡이 부분에 균열이 있다.

“대체 이건 무슨 고기야?”

호기심에 윤지에게 묻는다.

“가을에 잡아서 맛있는 거야.”

뒤쪽에서 윤지가 대답했다. 문득 하얀 고깃국이 떠올랐다. 윤지가 참 좋아한다던.

곰팡이가 꿈틀거렸다. 쩝쩝. 그 안에서 소리가 났다. 놀란 희수가 그걸 붙든 손을 놓았다. 그 틈이 벌어지고 거대한 검은 벌레가 기어 나왔다. 그리고 그 밑 회색의 가죽이 양 옆에서 툭툭 뜯어지더니 퀭한 어둠이 드러났다. 그건 뒤집어진 사람의 머리였다.

“아...아아악!”

재빠르게 물러나는 희수의 머리와 어깨에 묶어 삭히던 둥그런 머리와 팔, 다리가 부딪혔다. 소리를 지르며 희수가 넘어졌다. 천장을 올려다보자 매달려 흔들리던 것들이 일제히 그녀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아아악!”

희수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떴다.

“언니!!!”

옆에 있던 윤지가 희수를 안았다.

“언니 죽은 줄 알았어.”

희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주위를 보았다. 식기가 놓인 찬장과 그 옆으로 짚과 장작더미가 보였다. 반대편엔 아궁이와 가마솥이 있는 걸 보니 자신이 부엌 바닥에 있는 걸 깨닫는다. 희수는 윤지가 자신에게 안겨 울고 있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몸을 뺐다. 손과 발이 묶여 제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아이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언니 미안해. 할머니가 그래서 미안해. 나는 싫다고 했는데도 할머니는 안 된다고 했어. 나는 언니 먹기 싫어.”

희수는 자신을 묶은 밧줄을 풀려고 애썼다.

“언니 미안해.”

아무리해도 풀리지 않자 그제 서야 앞에서 울고 있는 윤지를 본다.

“윤지야. 윤지야. 울지 말고 언니 봐. 언니 화 안 났어. 그러니까 이거 좀 풀어줄래?”

희수의 말에 윤지가 눈물을 닦았다.

“안 돼. 할머니가 그러면 혼날 거랬어. 부지깽이로 때린다고.”

“윤지야. 윤지는 언니 먹기 싫다고 했잖아. 그렇지? 어제도 언니 구해주고 그랬잖아. 응? 나는 윤지한테 너무 고마웠는걸. 다시 그래줄 수 있겠니?”

아이가 잠시 멈칫거렸다. 그리고 밖을 봤다. 노인은 어디에 갔는지 집에 없는 눈치였다. 아이가 희수에게 다가와 밧줄을 풀었다.

“고마워 윤지야.”

“언니 꼭 도망 가야해. 잡히면 안 돼.”

“응.”

작은 손이 밧줄을 풀자 희수는 윤지를 끌어안았다.

“정말 고마워.”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옆에서 아이가 부축했다. 그들은 부엌을 나갔다. 오후의 햇살이 점차 저물고 있었다.

“저쪽으로 가야해.”

아이가 이끄는 대로 달렸다. 길도 나지 않은 곳으로 갔다. 어디가 어딘지 몰랐다. 사방은 온통 나뭇잎을 떨구는 나무뿐이다. 앞서 뛰는 아이를 따라간다. 아이의 긴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저 멀리에 밤에 보았던 버려진 집들이 보였다. 아이가 멈췄다. 가쁜 숨을 쉬며 희수를 돌아본다.

“저기를 가로 질러 계속 가면 돼.”

“응.”

“잘 가.”

아이가 안녕을 고했다. 뒤돌아 내려가다가 희수는 멈췄다.

“같이... 가자.”

희수가 손을 내밀었다. 이런 곳에 아이만 두기 싫었다. 희수의 손을 빤히 보던 아이가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 세상천지엔 나랑 할머니뿐이야.”

아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희수가 손을 내렸다.

“안녕.”

“잘 있어.”

희수는 돌아섰다. 그리고 아이가 알려준 방향으로 뛰었다.

내리막을 내려서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졌다. 숨을 몰아쉬며 일어났을 때 길목에 노파가 서있었다.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모습이었다. 뒷짐을 진 손에 낫이 들렸다.

“안 그래도 아이 앞에서 해체하는 모습을 보이기 그래놔서.”

이유를 말하는 얼굴에 표정이 없다. 바람에 뻗친 잿빛 머리카락이 나풀댔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도시로 가면 되잖아요. 윤지도 학교에 갈 수 있고! 좀 더 사람답게 살 텐데. 대체 왜...?”

“사람답게? 돈 없는 노인과 아이가 그곳으로 가봤자 뭘 하겠나? 늙은이가 어디서 돈을 구해 먹고 살까? 어디 손이라도 빌면 돈이라도 주는 세상인가? 굶어 죽기밖에 더해? 적어도 이곳에선 농사를 지을 수 있고 그걸로 먹고 살아. 물론 겨울에 사람 고기를 먹지만 그게 뭐?”

“그럼 윤지는요? 할머니 죽으면 윤지는 어떻게 해요?”

노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자네가 생각할게 아니지.”

뒷짐 진 손을 천천히 풀자 저무는 햇살에 낫이 번뜩였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희수는 있는 힘껏 도망쳤다. 수풀을 헤치고 낙엽 무더기 위를 달렸다. 뒤를 돌아보자 노인은 더 이상 절뚝이지 않았다. 빠르게 달려와 희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갈퀴 같은 손이 금방이라도 뒷덜미를 잡아챌 것 같다.

희수는 나무를 붙들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멈추지 못한 노인이 바닥에 미끄러졌다. 희수는 안간힘을 써서 산길을 올라갔다. 그리고 큰 소나무를 휘돌 때 갑자기 튀어나온 남자의 팔이 희수의 허리를 잡아챘다.

“아악!!!”

“야 내가 널 포기 할 줄 알았어?”

몸을 바르작거리는 희수의 허리를 더욱 옥죄며 남자가 히죽였다.

“이거 놔!”

“그럴 리가 있나? 절대로 못 놔주지.”

그가 희수의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우리 예쁜 희수, 더 이상 도망 못 가게 할 거야.”

두툼한 손이 그녀의 입술을 훔치다가 천천히 목을 향했다. 희수가 그 손을 물어뜯었다.

“악!”

남자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에 희수는 그의 머리를 들이 받았다. 전날 다친 상처 자리라 고통이 상당한지 남자의 손이 풀렸다. 희수가 도망치려고 할 때 남자가 그녀의 팔을 잡아 휘둘러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희수는 나무 둥치에 머리를 호되게 부딪쳤다.

남자가 머리에서 손을 떼자 피가 묻어났다.

“아이 씨발. 미쳤냐?”

그가 이를 악물며 쓰러진 희수에게 발길질을 했다. 아니 하려고 발을 옮기는데 발목에 뭐가 걸렸다. 굵은 철사 줄이 어느새 그의 발에 묶였다. 누가 쳐 놓은 덫이었다.

“이게 뭐야?”

그게 힘을 주어 덫을 끊으려고 했지만 철사는 점점 조여들었다.

“이씨. 별게 다...”

그가 허리를 숙였다. 뭉툭한 손으로 철사를 잡아당겼다.

희수는 일어나 도망치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남자를 본다. 그가 짧은 욕과 함께 허리를 숙였다. 그 뒤로 노인이 달려와 낫을 치켜드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의 비명과 함께 희수는 정신을 잃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희수는 눈을 떴다. 산등성이 너머로 붉은 빛이 사라지고 있다. 후드득 떨어지는 낙엽이 바닥에 닿자마자 굴렀다. 희수는 옆의 나무를 붙들고 일어섰다. 붉은 피가 사방에 남겨지고 피에 절은 철사 줄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곳엔 그녀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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