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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경 같이 온다 by 이나경

2019.09.15 00:0009.15

2회차.jpg
[특집] 괴이한 거울

같이 온다

이나경

1.

몇 년 전에 저는 을지로에 있는 금융회사에 다녔습니다. 꽤 괜찮은 곳이었습니다. 업무 강도가 세긴 해도 그만큼 연봉도 높았고 사람들도 좋았어요.

거기서 친구를 만났습니다.

선우창은 제 중학교 동창입니다. 사실 학창시절엔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냥 친구들끼리 뭉칠 때 간간이 어울리는 정도였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성씨가 선우이고 이름은 외자였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다들 그를 우창이라고 불렀지요.

우리는 건물 안에서는 좀처럼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부서가 다르다 해도 오가며 스칠 법도 한데 말이에요. 반면 흡연 구역에서는 지나치게 자주 만났습니다. 사람마다 담배가 당기는 시간이 엇비슷해서인지 아니면 운명적으로 이끌려서인지, 하여간 제가 열 번 나오면 일고여덟 번은 우창도 나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담배 친구였습니다.

우창은 또래보다 일찍 결혼한 편으로 그때 이미 5년차 유부남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이 결정되자마자 식을 올렸다고 해요. 상대는 다섯 살 연상의 교회 누나이고, 현재는 맞벌이 중이며, 자식은 없었습니다. 듣자하니 딱히 아이를 원하지도 않는 듯했어요.

저로 말하자면 결혼은커녕 연애도 변변찮은 상황이었습니다. 실은 제가 또래보다 5년쯤 늦게 취업했거든요. 졸업을 미루며 개인 사업을 했다가 잘 안 풀려서 그렇게 됐습니다. 연애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게 열의를 가진 것도 아니어서, 어떻게 보면 제가 결혼한 건 가히 기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각설하고, 그날도 우리는 만났습니다.

“왔어?”

우창이 ‘왔어’라고 하는 것인지 ‘What’s up’이라고 하는 것인지 저는 언제나 헷갈렸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이번 달 내내 야근하게 생겼다. 너희는 안 바빠?”

“우리야 늘 똑같지 뭐.”

우창은 얼버무리듯 대답했습니다. 업무 얘기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거든요. 그는 상사나 동료의 뒷담화를 즐기는 부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일 얘기를 꺼릴 뿐 과묵한 건 결코 아니어서, 연예계 가십이나 정치 이슈, 최신 개봉 영화, 웹툰, 인근 맛집, 여행 계획 등등 오만 가지 주제로 수다를 떨었습니다.

그 중엔 꿈 얘기도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창은 간밤에 꾼 꿈이 어쨌네 저쨌네 하는 이야기를 퍽 즐겨 하는 편이었어요. 실없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담배 한 대 태우는 동안의 이야깃감으로는 그만한 게 없기도 하지요.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습니다.

“…바로 거기서 캥거루를 본 거지. 하도 놀라서 그만 깨버렸어.”

우여곡절 끝에 탄 비행기 옆 좌석에 캥거루가 앉아 있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개꿈이었으나 우창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일단 캥거루는 상서로운 짐승이야. 게다가 비행기라는 건 상승과 하강을 동시에 상징하는데 꿈에선 아직 이륙 전이었단 말이지. 몸을 옭아매는 안전벨트를 하지 않은 것도 의미심장하고…. 종합하면 대체로 길몽이 아닐까 싶은데.”

이처럼 그는 자신이 꾼 걸 해석하곤 했습니다. 풀이가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적당히 기분 전환만 되면 그만인 것이지요.

저라고 물론 듣기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주로 맞장구를 쳐주었지만 그날은 저도 마침 얘깃거리가 있었어요.

개인차가 있겠지만 저에게 꿈이란 이를테면 프랑스 영화와도 같아서 상영 중에는 그럭저럭 즐기다가도 끝나고 나면 당최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성질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꿈은 다음날 오후가 되도록-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건 분명 드문 일이었어요.

“들어봐. 내가 꿈을 꿨는데….”

저는 담배를 한 모금 빤 뒤 꿈에서 본 것들을 묘사했습니다.

2.

꿈에서 저는 낯선 동네를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거리는 버려진 묘지처럼 한적했고 건물들은 비석처럼 세워져 있었지요. 짠내가 바람에 실려와 근처에 바다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습했습니다.

그곳에서 오후 나절을 지내는 동안 저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행인은 없었고 차도 다니지 않았으며 상가마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예 사람이 살지 않는 건 아닌 듯했습니다. 그보다는 제가 오기 직전에 황급히 자리를 비웠거나 숨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는 그야말로 관광객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주변을 탐색했습니다. 기괴하게 자란 나무, 한쪽 벽면이 무너진 건물, 돌을 깎아 만든 흉측한 조각상을 보았습니다. 광장의 분수대는 메말라 있었고 버려진 자전거들이 녹슬어 있었어요.

무엇보다 덩굴이, 이름 모를 식물의 덩굴손이 어디에나 뻗어 있더군요. 담장을, 정류장 벤치를, 신호등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건물 안이나 지하 수로로도 이어져 있었지요. 무수한 갈래가 혈관처럼 연결돼 있었습니다.

요컨대 마을 전체가 덩굴의 영역이었습니다. 뱀처럼 생긴 꽃이나 올빼미처럼 생긴 나비처럼, 어쩌면 이곳은 식인 식물이 마을의 형상을 한 채 이방인을 유인하는 게 아닐까, 느슨한 덩굴들이 불시에 수축해 저를 옭아매지 않을까, 하고 신경이 쓰였습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지만요.

휑뎅그렁한 주택가를 지나자 숲이 나왔습니다. 인공 숲인데도 규모가 작지 않았어요. 어쩐지 안쪽에서 수선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어린이 여럿이서 시시덕대는 소리가 나는 듯했지요. 이에 이끌려 숲 그늘로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

수풀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라 걷는 동안에도 저는 자꾸만 발이 걸리거나 가지에 찔렸습니다. 주렴처럼 드리운 덩굴은 시야에 방해가 됐고요.

그러다 마침내 작게 트인 공터를 발견했습니다. 역시나 아무도 없었지만 공터 가운데에 어째서인지 그네가 설치돼 있었습니다. 붉은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녹슬고 낡은 철제 그네였어요. 기묘한 광채가 그것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네를 보자마자 저는 저걸 타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동시에 절대로 타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지요.

문득 일대가 고요해진 걸 깨달았습니다. 부자연스러운 정적이었어요. 산만하게 바스락거리던 나뭇잎의 움직임이 멎었습니다. 가까운 듯 멀리서 시종일관 시시덕거리던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고요. 남은 건 오직 제 거친 숨소리뿐이었습니다.

삐걱.

그네의 사슬이 내는 마찰음이었습니다. 미풍조차 불지 않았으니 스스로 움직인 것이겠지요. 삐걱. 관절을 꺾는 것처럼, 흡사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저를요. 삐걱. 그 소리는 저를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삐걱. 삐거걱.

공터엔, 그리고 그 주변엔 아무도 없었지만 누군가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한 명이 아니었어요. 숲 바깥에서, 구름 위에서, 심지어 내 바로 옆에서도, 수백수천 쌍의 눈이 저를 주시하고 있었지요.

삐걱.

어느새 저는 그네 앞에 섰습니다. 어서, 어서, 하는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어요. 저는 얼마간 망설였으나 결국엔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철로 된 사슬은 소름 끼치도록 냉담하더군요. 그넷줄을 그러쥔 손이 불에 덴 것처럼 따끔거렸습니다.

제가 자리를 잡자 누군가 제 등을 거칠게 떠밀었습니다. 그때부터 모든 게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 같았어요. 빠르게 스쳐가는 시선들, 비명들, 그리고 구역질나는 악취…. 저는 끝 모를 나락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영원 같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3.

“그네 탄 꿈이네?”

요약하면 그렇긴 하지요. 그러나 필설로는 다할 수 없는 불유쾌하고 께름칙한 정서가 서려 있었습니다.

우창이 말했습니다.

“우선, 남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는 건 현재 네가 자신감을 많이 잃은 상태임을 뜻해. 요새 바쁘다며? 업무 과다로 의기소침해진 게 꿈에 반영됐겠지.”

“그런가?”

“그네는 응당 네게 할당된 업무일 테고.”

그는 제법 전문가처럼 진단했습니다.

“꿈이라고 다 똑같은 게 아니야. 미래를 풀어가는 실마리가 되는 꿈이 있는가 하면 단순히 현재 상태를 전시할 뿐인 꿈도 있거든. 빈도로 따지면 후자가 훨씬 잦아. 그런 게 소위 말하는 개꿈이야.”

“으응, 이것도 그냥 개꿈이었나 봐.”

저는 내심 실망했습니다. 하여 딴에는 항변한답시고 투정을 부렸겠지요.

“그런데 묘한 건, 희한하게도 내가 꾼 꿈 같지가 않더라는 거야. 흡사 남의 꿈을 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달까.”

“자세히 말해봐.”

“글쎄, 이걸 어떻게 설명하나…. 말하자면 꿈에서 나는 각본대로 연기하는 배우였어. 누군지는 몰라도 감독이 따로 있었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사람이 내 연기를 관찰하고 있었던 거야.”

“그건… 심오한걸?”

우창이 말했습니다.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그는 제 꿈이 비범하다고 인정하기를 주저하는 듯했어요. 그래도 개꿈으로 결론지어졌을 때보다는 기분이 나아지더군요. 우리는 다 타고 필터만 남은 담배를 휴지통에 던져 넣고는 각자 사무실로 흩어졌습니다.

그날 저녁에 작은 사고를 당했습니다. 옆자리 직원이 의자를 당겨 앉다가 제 발등을 찧은 것이었어요. 하필 그때 다가간 제 잘못인지 하필 그때 의자를 움직인 그녀의 잘못인지 하필 그때 회의하자고 집합시킨 팀장 잘못인지, 끝내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습니다. 누가 잘못했건 피로 물든 건 제 발등이었지요.

4.

다음날 아침에 휴대폰을 확인하니 우창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습니다. 번호야 진즉에 알려줬었지만 실제로 연락이 온 건 처음이었어요.

<찜찜해서 검색해봤는데 이런 게 나왔어>

밑에는 인터넷 주소가 길게 링크돼 있었습니다. 지식iN 페이지로, 제목은 ‘그네 탄 꿈 해몽해주세요’였어요.

거기에는 제가 말한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제법 상세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소소한 디테일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저는 글을 올린 사람이 저와 같은 장소에 있었다고 확신했어요. 마을 광장에 세워진 종탑이랄지, 폐쇄된 동물원이랄지, 담장 위에 무수히 늘어놓여 있던 헝겊 인형이랄지 등등은 저도 본 것들이었거든요.

글 작성자는 텅 빈 주택가를 지나 외딴 숲 공터의 그네를 탔습니다. 뿐만 아니라 발가벗겨진 기분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 공간 바깥의, 그러나 아주 바깥은 아닌, 마치 유령과도 같은 존재를 자꾸 의식했다는 것이에요. 저와 표현은 달랐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됐습니다.

질문이 올라온 뒤 1년 하고도 4개월 동안 댓글은 세 건이 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순서대로 훑어보았는데 썩 믿음이 가는 답변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의견들이 중구난방이었어요. 누구는 길몽으로 진단했고, 누구는 흉몽이라 단언했으며, 누구는 ‘심리적으로 대단히 위축돼 있다는 방증’ 운운하며 개꿈 취급했지요.

제 감상을 말하자면, 얼치기들이 뭣도 모르면서 심심풀이로 끼적인 걸로밖에 안 보였습니다. 한편으로는 해몽이라는 게 다 이런 식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즉 꿈에 좋고 나쁨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이후에 겪는 일은 꿈과 무관한 것이라고, 만약 꿈이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손 치더라도 그건 꿈 자체의 위력이라기보다는 자기 암시의 결과라고, 따라서 좋다고 믿으면 좋은 것이요 나쁘다고 믿으면 나쁜, 마음먹기에 따라 이롭고 해로움이 정해지는 것이라고, 그러니 남들 말에 휘둘릴 것 없이 그냥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게 좋겠다고 말이에요.

우창은 흡연 구역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를 보자 그는 비로소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뭐야? 걸음이 왜 그래?”

“의자에 찧었어.”

제가 상처 부위를 보여주자 그는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내가 보낸 건 읽어 봤어? 번호 아직 그대로지?”

“응. 아침에 봤어. 진짜 희한하더라. 어떻게 꿈이 그렇게 똑같을 수 있지?”

“그 꿈 말인데, 진짜로 너도 꾼 거 맞지?”

우창이 물었습니다.

저는 무슨 그런 질문이 다 있나 싶었으나 곧 의도를 알아차렸어요. 그는 제가 인터넷에서 미리 그 이야기를 읽고 자기를 골리는 게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이었지요.

“물론이지.”

그렇게 말하며 저는 안경 낀 그의 얼굴에 연기를 훅 뿜었어요. 그는 한 걸음 물러났습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뭐를?”

“댓글들도 읽어봤을 거 아니야. 해석이 분분하던데…. 네 생각엔 좋은 꿈 같아?”

꿈에 좋고 나쁨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저는 그런 것들을 말함으로써 그를 언짢게 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대답했지요.

“네 말마따나 개꿈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우창은 제 심중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한동안 저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말했어요.

“호열이 너, 그 꿈 나한테 팔래?”

저는 당황했습니다. 누구라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꿈을 팔라고…?”

“솔직히 너는 길몽이니 흉몽이니 하는 거 잘 안 믿지? 효과를 본 적도 없을 테고.”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니 그가 피식 웃었습니다.

“최면에 잘 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어도 안 걸리는 사람이 있잖아? 꿈도 마찬가지야. 꿈의 영향을 잘 받는 체질이 따로 있어. 바로 내가 그래.”

확실히 꿈에 관한 것이라면 그에겐 심심풀이 이상이었습니다. 만나서 얘기해도 될 걸 새벽에 대뜸 메시지를 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그럼 너는 이게 좋은 꿈이라고 생각하나보지?”

“적어도 개꿈은 아닌 것 같아. 다른 사람도 같은 꿈을 꾼 걸 보면 확실히 뭔가 있어.”

“하지만 흉몽일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때 저는 회의실에서의 사고를 떠올리고 있었어요.

“그렇긴 한데…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셈이지.”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지만 꿈을 사겠다는 건 진심인 듯했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길몽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라도 찾은 걸까? 혹시 나는 큰 기회를 앞에 두고도 몰라보는 걸까? 그러자 발등이 욱신욱신했습니다. 마치 위험 경보처럼.

사실 오래 뜸들일 것도 없었습니다.

“알았어. 난 모험은 안 할래. 돈은 됐으니까 거저 가져가. ‘내 꿈 사가라’, 이렇게 말로 하면 되나?”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야.”

우창은 값을 제대로 치르고 넘겨받아야 한다고 우겼습니다. 가격은 파는 사람 마음이라면서요. 극구 사양해도 막무가내여서 그럼 아예 100만원쯤 불러 그를 난처하게 해볼까 했는데, 정말로 그 값에 사겠다고 나오면 도리어 제가 난처해졌겠지요.

“3만원이면 적당하려나? 그것도 비싼가?”

제가 말했습니다. 그 정도 액수면 부담이 없겠다 싶었고, 그 돈으로 나중에 그에게 점심이나 한 번 살 생각이었어요.

“좋아.”

우창이 지갑을 꺼내 만원짜리 석 장을 내게 건넸습니다. 거래가 성사됐어요.

5.

우창이 말하기를, 꿈을 사고팔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파는 사람은 자신이 꾼 내용을 사는 사람에게 빠짐없이 전달해야 해요. 즉 거래 쌍방이 꿈의 내용에 대해 확실히 인지해야 한다는 거예요.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는 당연히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둘째로, 실질적인 거래가 이루어져야 해요. 이 경우 파는 사람이 금액을 정하는데, 사는 사람은 이를 흥정해선 안 됩니다. 안 될 것이야 없겠지만 부정 탈 일은 지양하라는 것이겠지요.

셋째로, 한번 산 꿈을 다른 사람에게 되팔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자신이 산 금액보다 낮게 불러선 안 돼요. 반면 꿈을 되살 수는 없습니다. 또한 새로 사는 사람에게 이전 거래 명세서를 넘겨야 해요.

“낮게 부르지 말라니? 그 반대 아니야? 중고품이니까 더 싸게 팔아야지.”

우창이 설명했습니다.

“원래 규칙이 그래. 꿈 거래소라는 데가 있거든. 거기선 기본 천만원부터 시작해. 진짜 영험한 건 수십억에 팔린 적도 있대. 여러 사람 거치는 동안 가격이 그렇게 뛴 거야. 거래 명세서에는 이전 소유주들이 누군지 나오잖아? 그걸 보면 그 값에 팔리는 걸 납득할 수밖에 없대. 다들 어마어마한 재벌이나 권력자들이라서.”

“농담이지?”

“진짜야.”

그가 계속 말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봐. 가격이 점점 오르기만 하면 어느 시점부터는 우리 같은 서민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가격까지 치솟지 않겠어? 결국 좋은 꿈-엄밀히 말하면 좋다고 보증이 된 꿈-을 사는 건 이미 성공한 사람들뿐이야. 딱히 꿈이 아니더라도 원래 승승장구하던 사람들 말이야. 애초에 그런 사람들이라 꿈을 가진 건데, 꿈을 가져서 그만큼 성공한 것처럼 여겨지는 거야.”

제가 끼어들었습니다.

“그 말은 결국 꿈에는 좋고 나쁨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아냐. 꿈에는 힘이 있어. 그러니까 나도 너한테 샀겠지. 다만 효력 대비 적정 가격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몰라. 나는 수십억짜리 꿈에 실제로 그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반대로 너한테 3만원 주고 산 꿈이 3천만원어치 행운을 가져다줄 수도 있고…. 뭐, 그런 얘기야.”

저는 제가 걱정하던 걸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발등을 다친 게 꿈 때문이라면, 이게 흉몽이었던 건 차치하고, 네가 꿈을 사봤자 아무 효력도 없는 거 아니야?”

“네가 다친 게 꿈 때문이라는 증거는 없어. 안 그래?”

저는 당황했습니다.

“그야 물론 그렇지만.”

“꿈 거래에는 불문율이 있어. 이게 약간 편법이라면 편법인데, 무슨 일을 겪든 꿈과는 관련이 없다고 치는 거야. 기왕에 발생한 효력을 모르는 체하면 다음 사람한테 효력이 넘어간다고.”

“좀 치사한 방법인데.”

“요령이 좋은 거지.”

“알았어. 효력이 넘어갔다고 쳐. 그것도 문제야. 내 꿈이 흉몽일지도 모르잖아.”

“다시 말하지만 꿈 때문이라는 증거는 없어. 복이 들어오기를 바라야지.”

“아….”

저는 점점 더 확신했습니다. 길흉을 결정하는 건 자기 암시라고 말이지요.

우창이 말했습니다.

“또 한 가지. 꿈의 수명은 1년으로 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1년이면 결판이 난다는 얘기야. 실제로 그런지는 몰라도 암묵적인 룰이 그래. 그런데 꿈을 다른 사람한테 팔면 그때부터 새로 1년을 매기는 거지.”

“나 원. 이런 건 어디서 배우는 거야?”

“예전에 꿈 거래소에서 꿈을 산 적이 있거든.”

교회 사람한테서 소개 받았다고, 무려 100만원짜리 꿈이었다고 했습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는 진지했습니다.

“그래서 어땠어? 본전은 찾았어?”

“본전?”

우창은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피식거렸습니다. 하기야 다시 팔기만 했어도 손해는 안 봤겠지요.

“그럼 아까 내 꿈 산다고 했을 때 얼마까지 낼 의향이 있었어?”

“10만원.”

“아….”

저는 그에게 점심 사려던 계획을 취소했습니다.

6.

상황이 복잡해진 건 다음날부터였습니다.

곧 죽어도 자기한테는 잘못이 없다던 옆자리 직원은 내심 신경이 쓰였는지 제 자리에 와서 기웃거리며 이것저것 묻더군요. 그러더니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보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친구 중에 괜찮은 애가 있는데, 그 친구를 제게 소개해주고 싶다고요.

앞서 말했듯 당시 저는 연애에 딱히 열의는 없었는데요, 그렇다고 관심이 아주 없진 않았고 무엇보다 주선자의 체면을 구기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조심스레 승낙의 의사를 밝혔지요. 저는 아마 누군가의 대타였던 모양으로 바로 주말로 약속이 잡혔습니다.

이 부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소개받은 여자가 마음에 들었고 그녀도 제가 싫지 않았는지 이후에도 우리는 몇 번 더 만났다는 정도만 말씀드리지요.

아무튼 처음 만난 그 날 밤에, 상대와 헤어진 뒤 저는 달빛 비치는 길을 묵묵히 걷고 있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에 발등이 찢어지지 않았더라면 여자를 소개받지도 않았을 거라고요. 제가 다친 게 진정 꿈 때문이라면 그녀를 만난 것도 마찬가지로 꿈 때문이겠지요. 당시는 그 여자와의 미래에 관해 낙천적이었으므로 저는 소위 ‘그네 꿈’이 흉몽은커녕 대단한 길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제가 이미 꿈을 팔았다는 거지요. 상식적으로는-여기서 상식을 들먹이는 게 우습긴 하지만-사고를 당한 것까지만 꿈에게 책임을 물을 일이고, 다음에 여자를 만나건 결혼을 하건 그런 것들은 꿈과 하등의 관련도 없다고 여기는 게 마땅하겠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관련이 없을까요?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제가 어림짐작한 꿈의 매매의 역사에 대해 짧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현실에서 무슨 일을 겪은 나중에야 그 전에 꾼 꿈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깨달았을 겁니다. 그런 사례가 충분히 쌓이자 앞서 꾼 꿈의 길흉을 따질 수 있게 되었겠지요. 그렇다는 건 앞날을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이고, 거꾸로 말하면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이러한 발상은 어느 혁명가에 의해 획기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는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고 믿었어요. 꿈이 미래의 방아쇠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겠지요. 꿈을 사고팖으로써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거예요. 우창이 꿈에 힘이 있다고 말한 건 아마 이 얘기일 겁니다.

정리하자면, 세상만사는 이미 다 정해져 있으며 제 미래에도 몇 가지 계획들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그것들이 온전히 구현되기 전에 제가 그만 꿈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돌기 시작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갑자기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멈춰 설까요?

어릴 적에 본 농구 시합 얘기입니다. 10번 선수가 슛을 하여 공이 포물선을 그리는 중에 종이 울려 시합이 끝났습니다. 그래도 날아가던 공이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공은 손을 떠난 순간 정해진 대로 그물로 빨려 들어갔어요. 역전승이었지요.

꿈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발등을 다친 뒤 꿈을 팔았어도 뒤이어 계획된 과정들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역전승을 거두는 겁니다. 소개팅 말이에요.

저는 우창을 만나면 주말 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줄 계획이었습니다. 네가 사간 꿈이 흉몽이 아니라 길몽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해줄 생각이었어요. 애프터서비스 차원에서요.

그런데 우창은 한동안 흡연 구역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시간이 엇갈렸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어요. 그래서 금요일 오후에 우창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별 일 없느냐고요.

퇴근길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우창이었어요.

“하도 안 보여서 죽은 줄 알았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실은 지난 주말에 사고가 나서 입원해 있어.”

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사고라니…?”

“아, 별 건 아니고.”

우창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신호를 어긴 오토바이에 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엉덩이뼈에 금이 갔다고요.

“그러면 역시 그….”

“꿈 얘기하려는 거지? 아니야. 그 반대야. 좋은 꿈이었어.”

우창이 말했습니다.

“로또 사가는 길에 사고를 당한 거거든. 월요일에 맞춰봤는데 3등 당첨됐더라. 병원비는 어차피 보험 처리 될 테고. 이 정도면 남는 장사 했지.”

그가 킬킬거렸습니다. 진짜로 웃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7.

일전에 본 지식iN 페이지의 댓글 중에는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흉몽이에요. 우리 형도 그런 꿈 꿨었는데 사고 당해서 죽었어요. 님도 조심하세요.’

당시엔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흔하디흔한 악플로 치부했지요. 하지만 돌이켜보면 저도 발등을 다치지 않았겠습니까? 거기다 우창의 입원 소식까지 듣고 나니 새삼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그 페이지에 접속해 답변자의 프로필을 찾아보았습니다. 프로필 페이지에는 1:1 질문 버튼이 있거든요. 답변자의 형이 겪었다는 사고에 대해 자세히 물을 셈이었지요.

그런데… 없었습니다. 1:1 질문 버튼이 없었어요. 아마 답변자가 질문을 받지 않겠다고 설정한 모양이었습니다. 기본 설정을 굳이 막아놓은 것입니다. 역시 악플러라서였을까요?

저는 지식iN에 제가 꾼 꿈의 내용을 정리해 올리기로 했습니다.

제목은 ‘그네 탄 꿈 해몽해주세요’라고 붙이되, 내용도 원래 있던 글과 유사하게 정리하되, 몇몇 이야기를 추가했습니다. 그런 뒤에 그 악플러가 댓글을 달기를 기다렸어요. 업무가 바빴으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옆자리 직원이 정신 좀 차리라고 핀잔을 줄 정도였지요.

그러다 댓글이 달렸습니다. 기다리던 글은 아니었습니다. ‘질문하신 분이 그네를 몹시 타고 싶으셔서 그런 거예요’라는 답변이었어요.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다른 댓글이 달렸습니다. 그 역시 엉뚱한 답변이었어요. 악플러였습니다. ‘해몽 타령할 시간에 공부나 해라, 책이나 한 글자 더 읽어라’라더군요. 관점에 따라서는 악플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그 댓글 아래로 반박하는 대댓글이 달렸고 거기에 또 대댓글이 달리더니 자기들끼리 시비가 붙었습니다. 그것들은 그것들 나름대로 흥미로웠으나 여전히 제가 기다리는 답변은 따로 있었지요.

불의의 사고로 형을 잃은 답변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답변자가 나타났습니다.

‘혹시 종탑에 뭐라고 쓰여 있었습니까? 기억하신다면 그게 무엇이었는지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말고 1대1 질문으로요.’

질문 글을 올린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답변자 역시 그 꿈을 꾼 모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도 나처럼 사고를 당했을까? 나처럼 전전긍긍하고 있을까?

곧 알 수 있겠지요. 저는 허겁지겁 퀴즈에 답했습니다. 정답을 아는데도 손이 벌벌 떨리더군요.

꿈에서 본 종탑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생활에서 보기 드문 건축물이지만 제 눈길을 끈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요, 광장을 지나는 중에 불현듯 뎅, 하고 울렸기 때문입니다. 낮고 묵직한 종소리가 불안하게 진동했어요. 고개를 들어 종탑을 보았으나 종지기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아무튼 그때 종탑에 쓰여 있는 것을 저는 또렷이 기억합니다. 거기엔 ‘11’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숫자 11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알파벳 II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것들을 답변자(또는 질문자)에게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 뒤에 다시 연락을 기다렸지요. 그가 제 궁금증을 해소해주기를 바라면서요.

그날 자정 가까운 시각에 휴대폰이 진동했습니다. 화면엔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어요. 보통은 스팸전화로 여기고 무시했겠지만 그때 저는 어쩐지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육감 같은 걸 믿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만큼 배짱이 좋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받았어요.

“여보세요…?”

“임호열 씨 되십니까?”

남자가 여자 흉내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여자가 남자 흉내를 내는 것 같기도 한 희한한 목소리였습니다. 그(녀)가 제 이름을 불렀어요.

“누구시죠?”

“낮에 종탑에 관해 물었던 사람입니다.”

“네에….”

제 이름은 어떻게 알았으며 전화번호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저는 이상한 걸 알면서도 수긍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했을 테니까요.

“혹시 꿈을 꾸신 후에 어디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마, 맞아요. 발등을 다쳤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심하게 다친 건 아니지만 이게 아무래도 꿈 때문인 것 같아서요. 혹시 그쪽 분께서도 사고를 당하셨나요?”

“그런 건 아닙니다. 저는….”

상대는 조금 뜸을 들인 뒤 다시 말했습니다.

“저는 임호열 씨가 꾸셨다는 그 꿈을 사고 싶어서 연락을 드린 겁니다. 늦은 시간에 실례가 될 걸 알면서도 걸었습니다. 이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그건 괜찮지만 제 이름이랑 번호는 어떻게 아셨는지….”

“그런 걸 알아내는 걸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있어요. 불법이지만 급할 때에는 요긴합니다.”

그(녀)는 그러더니 말실수라도 한 양 황급히 얼버무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꿈을 저한테 팔아 주셨으면 하는데요, 원하시는 금액을 말씀해주시면 당장 내일 아침에라도 모시러 가겠습니다.”

태도를 보아하니 꽤나 급한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팔 수 없었습니다. 이미 친구에게 팔았으니까요.

“죄송하게 됐습니다만 그 꿈은 벌써….”

“10억까지는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

“네?”

“10억까지는 저희가 맞춰드리겠습니다.”

“10억…? 10억원이요?”

“저희 사장님께서 야금야금 간 보는 걸 싫어하셔서요. 여기에 조건을 붙이자면 지식iN에 올린 글은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저희 거래 내용을 다른 데서 발설하시는 것도 곤란하겠고요.”

“잠시만요.”

제가 간신히 말했습니다. 현기증이 일었어요. 사장이라는 자가 불길한 꿈을 사려는 이유는 짐작도 안 가고 짐작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아무튼 꼭 사겠다면야 저는 우창을 소개할 생각이었습니다. 물건이 벌써 팔렸으니 그리로 가서 귀찮게 하라고요. 그런데 10억원 얘기를 들은 순간 그만 머릿속이 새하얘진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마침내 대답했을 때, 저는 제 목소리가 퍽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그날은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플 정도로 심장이 쿵쾅거렸습니다. 한 번에 10억원을 번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입니다.

8.

과연 아침에 저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따라가 검정색 대형 세단의 뒷좌석에 앉았습니다. 저는 회사에 연락해 하루 쉬기로 했어요.

서울을 벗어나 신도시에 도착할 때까지 기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딱히 할 말이 없었으므로 가만히 눈만 끔뻑거리다가 깜빡 졸다가를 되풀이했지요.

그러다 도착한 곳은 재벌그룹 계열의 건설사였습니다. 로비에서 기다리던 직원이 저를 건물 꼭대기 층으로 안내했습니다.

사장실 문을 열자 제 또래보다 서너 살쯤 많아 보이는 남자가 소파에서 일어나 저를 반겼습니다. 사장이라길래 여우 같은 늙은이일 거라고 막연히 짐작했었는데 정반대로 호랑이 같은 사내가 나와 내심 놀랐습니다. 그나저나 낯이 익은 얼굴이었는데, 아마 뉴스에서 몇 번 봤기 때문이겠지요. 재벌가 3세인가 4세인가를 다룬 뉴스였을 거예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사장은 두툼한 손으로 제 손을 힘 있게 쥐었습니다. 저는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위축되더군요. 아니, 이유가 없진 않았지요. 저는 그를 상대로 사기를 칠 작정이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그건 사기였습니다.

‘꿈 내용을 전하고 돈만 받으면 끝이야. 그게 사실은 알맹이가 빠진 빈껍데기라는 걸 어떻게 알겠어?’

또한 우창의 말도 떠올렸습니다.

‘비싼 꿈을 사는 사람은 딱히 꿈이 아니어도 승승장구하는 사람이야. 설령 가짜 꿈을 사더라도 뭔가 호재가 있을 만한 사람 말이야.’

그러니까 사장이든 회장이든 사기를 간파하지 못할 거라고, 결코 증명할 수 없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제 꿈이 통상적으로 거래될 법한 유형이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불행해지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게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그런 꿈을 사려 할까요? 복에 겨운 재벌 3세요?

제가 물었습니다.

“외람된 질문이지만 사장님께서는 제 꿈을 왜 사려고 하십니까? 좋은 꿈이 아닌데요.”

사장이 호탕하게 웃더군요.

“하룻밤 만에 마음 바뀐 거예요? 10억으론 부족해요?”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그냥 이해가 안 돼서요.”

그는 거래를 마치면 얘기해주겠다고 했습니다. 행여나 계약이 파기될까봐 그렇게 말한 것이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대체 어떤 사연이 10억원을 거절할 변수가 될까 싶었어요. 사기꾼이 사기를 당할까봐 걱정하는 꼴이라니 우습지 않습니까?

사장도 꿈 거래소의 규칙에 대해 잘 아는 듯했어요. 제가 계약서에 서명하자 사장은 전화를 걸어 직원을 불렀습니다. 잠시 후 여행용 캐리어가 운반되었습니다. 거기엔 5만원권으로 10억원어치가 들어있었어요. 직접 세본 것은 아니지만 얼마쯤 모자라도 개의치 않을 부피였습니다.

거래가 성사됐습니다. 사장도 흡족한 눈치였습니다. 그만큼 제 찜찜함도 그늘을 짙게 드리웠지요.

“그럼 지금부터는 여흥 삼아 몇 마디 해볼까요.”

사장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룹 창업주인 회장의 이야기였습니다.

“아시겠지만 제 할아버지가 이걸 다 물려주셨어요. 혼자서 다 일궈내신 거예요. 물론 큰아버지랑 우리 아버지가 물려받은 다음에 그룹이 많이 성장하긴 했지만 맨땅에서 시작해 성공한 것에 댈 바는 아니지요. 무엇보다 아버지 때에는 호황이었으니 시기를 잘 탄 것도 있고.”

그러면서도 그는 좋은 것만 물려받은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유전병까지 물려받았다는 것이었어요.

“이게요, 어렸을 적에는 몰라요. 장성한 뒤에, 그러니까 어른 구실이나마 할 즈음에 비로소 증상이 나타나거든.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고생하는 거지 뭐. 사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요. 나만 봐도 그래. 아픈 것처럼은 절대 안 보이잖아. 안 그래요?”

“엄청 건강해 보이세요.”

“말도 마요. 속은 아주 엉망이야.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오장육부가 끊어질 듯 괴롭거든. 원인도 모르지, 고치지도 못하지, 그러니 우리끼리는 이게 무슨 저주가 아닌가 하고….”

“저주요?”

“저주라는 건 말이 그렇다는 거고.”

사장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할아버지가 묘한 얘기를 하시더라고. 자기가 꿈을 꿨대. 근데 그 꿈이 뭐였냐면… 바로….”

그가 제게 턱짓을 하더군요. 대신 말해보라는 신호로 알아듣고 제가 말했습니다.

“그네 타는 꿈이었군요.”

“그렇지. 빠릿빠릿하시네.”

회장이 병을 얻은 건 그 꿈을 꾼 뒤였다고 합니다. 꼭 그 꿈 때문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 그런 의심이 들 만큼 꿈이 생생했대요.

물론 그것은 여전히 제 의문에 대한 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꿈을 사장님께선 왜…?”

사장이 말했습니다.

“들어봐요. 꿈 얘기는 어릴 적에 들은 거라 나는 사실 별 생각 없었거든.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인 건 몇 년 안 됐어요. 사업 맡은 뒤로 별의별 인간들이 다 꼬이더라고. 큰일 하려면 미신도 무시하지 말라고 우리 아버지가 그러긴 했지만 상식적인 인간 만나기가 더 어려울 줄 누가 알았겠냐 이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꿈에 대해 박식한 사람도 있었어요.”

바로 꿈 거래소의 관계자였습니다. 재계 유력인사들과 두루 친분이 있대서 만나긴 했는데, 그때까지는 사장도 저처럼 꿈의 효력에 관해 별로 믿음이 없었다고 해요. 그런데 하루는 그 사람이 찾아와 반강제로 꿈을 사게 한 것입니다. 희귀한 꿈을 하나 확보했는데 특별히 첫 거래로 드리겠다고, 이건 무조건 사셔야 한다고, 어차피 가격은 오르기만 할 테니 미리 살수록 이득이라면서요.

꿈 거래소라는 건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중개인들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사이트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거기에 매물이 올라오면 중개인들이 개별적으로 거래 대상을 찾는 것이지요.

“큰 거 한 장 달라는데, 점집 가서 부적 쓰는 데도 그 정도는 들잖아요? 그래서 버리는 셈치고 샀지 뭐.”

크다는 게 서민 기준인지 재벌 기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막연히 1억원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고, 꿈을 산 뒤에 큰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겠지요.

“일이 잘 풀린 것도 신나는데 뜻밖의 보너스가 있더라고. 꿈의 값이 겅중 뛰어 두 배 가격에 팔았거든.”

그런 식으로 서너 번쯤 더 이득을 본 뒤에 사장은 관계자를 완전히 신임하게 됐습니다. 관계자는 비싸고 좋은 매물이 올라올 때마다 사장에게 연결했겠지요. 그 사람이야 중개료로 쏠쏠하게 챙겼을 테니 윈윈인 셈이지요.

하루는 문득 할아버지의 꿈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날 마침 관계자가 찾아왔길래 사장은 이러저러한 사연을 들려주었다고 해요. 혹시나 나도 우리 할아버지처럼 나쁜 꿈을 꾸면 어떡하느냐, 그런 걸 미리 팔아버리면 위험을 모면할 수 있느냐, 라고 물었지요.

“그네에 관한 꿈도 여러 종류가 있으니 더 자세히 말해보라네. 하지만 내가 꾼 것도 아니고 어렸을 적에 들은 거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있어야지. 그랬더니 다음번에 올 때에는 전화번호부처럼 두꺼운 책을 가져와서는 내 앞에 펼치더라고. 그게 지금까지 분류된 꿈을 정리한 사전이래요. 아닌 게 아니라 ‘그네 꿈’도 여덟 개쯤 있더라고.”

사장은 그 여덟 개의 ‘그네 꿈’ 가운데 하나를 골랐습니다. 종탑이나 인공 숲, 담장 위의 인형 따위를 들은 기억이 나더래요.

“정말로 이게 맞아요?”

관계자는 몇 번이고 되물었답니다.

그것은 흉몽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길몽도 아니었지요.

관계자가 말했습니다.

“이건 세계적으로도 아주 드문 유형이에요. 귀한 만큼 효력도 확실한데요…. 회장님께서 꿈을 꾸신 뒤로 아프기 시작하셨댔지요?”

사장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좋은 일은요? 좋은 일은 없었어요? 이 꿈이 지독한 게, 길흉이 늘 쌍으로 나타난대요. 순서나 간격은 정해져 있지 않고요.”

“좋은 일이라면….”

사장도 그제야 깨달은 겁니다. 자기 할아버지 사업이 언제부터 번창하기 시작했는지를요.

저는 발등을 찧고 소개팅 기회를 얻었습니다. 우창은 오토바이에 치인 뒤 로또에 당첨됐고요. 회장은 유전병을 얻었고 대대로 물려줄 가업을 일구었지요.

사장이 제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꿈을 얼마나 찾았나 몰라요. 온 종일 ‘그네 타는 꿈’만 검색하는 직원을 따로 둘 정도였다니깐. 솔직히 예전에도 찾긴 했는데, 하나는 미쳤고 하나는 사고로 죽었대. 도저히 거래할 상황들이 아닌 거지. 그러다 임호열 씨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어. 그깟 10억원이 대수겠냐고.”

저는 그가 찾았다는 사람들이 지식iN에 글을 올린 작성자와 댓글 작성자일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이 꿈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는 나도 몰라요. 그 사람들처럼 미치거나 죽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거꾸로 병이 나을 수도 있잖아요? 이 꿈이 우리 가문에 병을 주었다면 도로 가져갈 수도 있지 않겠냐 이거야. 말하자면 나는 승부를 보려는 거예요.”

“하지만 병이 낫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불행이….”

그가 제 말을 끊었습니다.

“어허, 그야 나도 어떤 불행이든 맞바꿀 각오는 돼 있지.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는 것도 있고.”

“준비요?”

“거창한 건 아니고, 쉽게 말해 불행을 자초한다고 할까. 내가 원하는 걸로.”

그때 저는 사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년 후 뉴스에서 그를 봤을 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어요.

9.

수중에 10억원이 있었지만 저는 감히 그 돈을 쓸 엄두를 못 냈습니다. 얄팍한 사기극이 들통 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거든요. 나중에 목숨이라도 구걸하려면 원금을 보전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어요.

괴롭거나 불안할 뿐 제 생활에 별다른 사건은 없었습니다. 따분한 하루하루가 이어졌어요. 여느 월급쟁이들처럼요.

소개팅 때 만난 여자와는 인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누굴 만날 정신이 아니었거든요. 때문에 옆자리 직원이 다른 친구를 소개해주겠다고 한 것도 거절했지요. 아내를 만난 건 그보다 후의 일입니다.

‘그네 꿈’의 진정한 소유주인 우창으로 말하자면, 말하기 조심스럽습니다만, 그 뒤로도 꿈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사건이 있었어요.

퇴원한 지 얼마 안 돼서 우창은 저를 불렀습니다. 복권 당첨금으로 식사 대접을 하겠다면서요. 그는 병실에서 복권 번호 맞춰본 얘기를 무슨 무용담처럼 들려주었습니다.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는데….”

저는 내내 신경이 쓰이던 것을 결국 묻기로 했습니다. 말실수를 하지 않으려 조심하면서요.

“꿈이라는 게 눈에 보이는 게 아니잖아? 누군가 가짜로 꿈을 꾼 척하면서 팔면 어떡해?”

“뭘 어떡해?”

“그건 사기잖아.”

“그래서 거래 명세서를 쓰는 거지. 그게 보증서 역할을 하니까.”

“하지만 첫 거래에는 그런 게 없잖아. 예를 들어서 내가 너한테 꿈을 팔았잖아? 그런데 다른 사람한테 또 팔아도 그 사람은 내가 사기를 치는지 알 재간이 없지 않느냐 이 말이야.”

“갑자기 뭐야? 누가 사겠대?”

우창이 장난스럽게 물었습니다. 제가 벌써 팔아치웠으리라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냥 궁금해서 그래.”

제가 말했습니다.

“네가 말한 꿈 거래소 같은 데서는 비싸게 팔린다며. 누가 작정하고 사기를 치려면 못 할 것도 없겠다 싶어서.”

“꿈의 유효 기간이 1년인 데에는 이유가 있어. 1년이 지나면 환불을 요구할 수 있거든. 물론 요구한다고 다 들어주는 건 아니고, 거래소 사람이 조사를 해서 정말로 이렇다 할 효력이 없었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만 환불이 이루어지는 거야. 전액도 아니야. 구매 금액의 70퍼센트였나? 게다가 조사비도 요구하는 측에서 부담해야 하니까 어지간히 손해 본 게 아니면 그냥 넘어가는 게 낫지. 꿈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부적이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 무당 찾아가서 부적 환불해달라고 안 하잖아?”

“70퍼센트?”

저는 그래도 3억은 건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살해당하지 않는다면요.

“아, 그렇지.”

우창이 덧붙여 말했습니다.

“효력을 논하기에 앞서 근본적으로 하자가 있다면 당연히 전액 환불이야. 꾸지도 않은 꿈을 꿨다고 속이거나 같은 꿈을 여러 명에게 파는 경우겠지.”

저는 문득 오싹해졌습니다. 저만 입 다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어요.

“우창아, 너 그 꿈 다시 팔 거야?”

그가 만일 거래소에 팔기로 하면, 그래서 관계자 눈에 띈다면, 사장은 그 꿈을 또 사들일까? 희박하지만 가능성은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우창에게 입단속 값으로 5억원쯤 줄까? 그보다 저렴한 다른 방법은 없을까? 머리가 터질 것 같았습니다.

“뭐야, 진짜로 사기라도 치려고 그래? 거래소 같은 데다 팔겠다고 나서지 마. 거기는 이런 거 취급 안 해.”

“그, 그래.”

저는 가슴을 쓸어내렸어요.

우리는 한동안 담배 친구로 남았습니다. 수술 후유증 때문인지 오래 서 있기가 불편하다면서도 담배는 꿋꿋이 피우더군요.

그러다 몇 달이 지났을 때 사고가 있었어요. 아니, 좋은 일이 먼저였지요.

“사실 나랑 우리 와이프는 늘 아이를 원했어. 그런데 뭐가 문제인지 안 생기더라. 시험관 시술도 몇 번 해봤는데 안 됐어. 그래서 돈만 날리는 것 같아 거의 포기했었거든.”

우창이 말했습니다.

“그러다 꿈도 샀겠다, 마침 공돈도 생겼겠다, 해서 시험관 시술이나 한 번 더 해보기로 한 거지. 호열아, 네 꿈 덕에 나도 이제 아빠 되게 생겼다.”

“정말이야?”

“봐봐. 온통 시커메서 난 모르겠는데 아무튼 있대.”

그는 초음파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더군요.

“한 가지만 말할게. 아기 생긴 게 꿈 때문이라는 증거는 없어.”

우창이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그가 좋아하니 저도 좋았어요. 하지만 저는 금세 웃음을 거두었습니다. 기쁜 일이 생겼다는 건 곧 나쁜 소식이 노크한다는 뜻이니까요. 새 생명이 생겼다면 이번엔….

“너 이제부터는 진짜로 매사 조심해야 돼. 안전이 제일이야.”

저는 그렇게밖에 경고할 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돼서 우창의 집에 불이 났습니다. 전해 듣기로 그는 아내가 친정에 쉬러 간 동안 누워서 담배를 피우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고 해요. 담뱃불이 이불에 옮겨 붙었지요. 집은 완전히 타버렸고, 우창은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 무렵 꿈의 가짜 소유주인 사장에게도 일이 있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스스로 일을 낸 거예요.

그의 회사가 지은 병원의 별관 건물이 무너졌습니다. 안에 있던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어요. 부실시공이 원인으로 밝혀졌습니다.

저는 그를 뉴스에서 보았습니다. 검찰에 출두하는 그는 분명히 웃고 있었어요. 그 미소의 의미를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재앙이 닥쳤으니 곧 그만한 보상을 받기를 기대하는 것이었지요. 사고는 다분히 의도된 것이었습니다. 거기 있던 사람들을 제물로 삼은 거예요.

보상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애초에 꿈을 갖지 못했으니까요. 설혹 소원이 이루어져서 불치병이 씻은 듯 낫더라도 그건 꿈과 무관한 기적이겠지요.

저로 말하자면, 붕괴 사고 이후에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저는 어쩌면 사고를 막을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꿈을 팔지 않았더라면요. 꿈 얘기를 인터넷에 올리지 않았더라면, 아예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말이에요. 10억원이 발하는 광채에 그만 눈이 멀어 사기를 쳤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안 그랬을 겁니다. 정말이에요.

물론 나쁜 건 사장입니다. 옆에서 부추긴 꿈 관계자도 나쁘고요. 무엇보다 지독한 꿈을 꾼 그룹 창업주가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겠지요. 그 참사에서 제 꿈은 아무 역할도 안 했어요.

제 꿈은 저를 위한 계획을 따로 준비했습니다. 예컨대 발등을 다치는 일이라든가, 또는….

시간이 흘러 저는 자책하기를 멈추었습니다. 제 생활은 차츰 원래대로 되돌아왔어요. 아니, 그 이상이었지요. 적당한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새로 옮긴 직장도 마음에 들었으니까요.

그러는 동안에도 10억원을 여전히 저희 집 옷장 안 깊숙이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걸 한 푼도 쓰지 않았어요. 영원히 쓰지 않을 작정이었어요.

얼마 전에 처남이 찾아왔습니다. 곤혹스레 머뭇거리길래 채근했더니 돈이 필요하다더군요. 급해서 사채를 쓴 게 이자가 많이 붙었다면서요.

“갚을 돈이 얼마나 되는데?”

“거의 1억쯤 돼요….”

“큰 거 한 장 필요하다는 거지?”

무심결에 저는 꼭대기 층의 호랑이 같은 사장을 떠올렸고, 그에게 받은 여행용 캐리어도 떠올렸어요.

“알았어. 마련해볼게.”

저는 그 돈을 쓰기로 했습니다. 찜찜하게 처박아두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졌어요. 새삼 무슨 일이야 생길까 싶기도 했고요. 그냥 얼른 써서 없애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10억원을 받은 일에 대해 그동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건 제가 번 돈이었어요. 떳떳하지 못할지언정 품을 들인 노동의 대가였지요.

관점에 따라서는 그러나 그것이 불로소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몇 마디 주절거려놓고 노동의 대가라니, 터무니없지요. 그저 금전 운이 좋았던 거예요. 복권에 맞은 거나 마찬가지지요.

비로소 저는 이해했습니다.

제가 그 꿈을 꾼 순간 미래가 결정된 것입니다. 중간에 꿈을 처분했어도 추후에 일어날 일들에는 아무 영향을 못 끼쳤어요. 아니, 처분조차도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저에게 10억원을 선사하기 위한 계획 말이에요. 이어서 밀려올 불행은 제가 그 행운을 누리기만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겠지요.

관계자가 그랬지요. 이 꿈을 꾸면 길흉이 쌍으로 나타난다고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같이 온다고요. 순서나 간격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요.

나쁜 일이 일어난 시기는 아마도 제가 10억원을 거머쥔 시기와 엇비슷할 듯싶습니다. 어쩌면 그보다 이를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제가 즉각 돈을 써버렸다면 어땠을까요? 제 몸에 자라난 암세포를 조기에 발견했을까요? 그랬다면 미리 손을 써서 지금쯤 완치가 됐을까요? 그랬다면 그걸로 끝이었을까요? 아니면 또 다른 횡액이 저를 무자비하게 들이받았을까요?

그래요, 지금 이러는 건 아무 짝에도 소용없습니다. 어쨌든 오늘 저는 폐암 선고를 받았으니까요. 말기라고 하니 이제는 너무 늦었지요.

너무 늦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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