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괴이학회 타오르다 by 엄길윤

2019.09.01 00:0009.01

1회차.jpg
[특집] 괴이한 거울

타오르다

엄길윤

죽고 싶다. 진짜로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나는 왜 이러고 살까? 오늘도 거울 속에 가득 들어찬 한심한 몰골을 보자 욕설부터 튀어나왔다. 사회 부적응자. 은둔형 외톨이. 모두 다 나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 말은 사실이면서 또한 사실이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내 탓이 아니니까.

한때 세상 무엇보다 편했던 방구석도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이 좁은 방에 틀어박힌 지 얼마나 됐을까. 5년? 아니면 6년?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도 모를뿐더러 내 이름 세 글자도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도 없다.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와 온라인 게임을 하다 졸리면 잤다. 그게 내가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의 전부였다.

배가 고플 땐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 다녀와야 했다. 온라인 게임 현질을 하느라 배달앱으로 음식을 시킬 돈이 없었다. 하루에 기껏 쓸 수 있는 돈이 8000원 남짓이었으니까. 무조건 새벽 3시가 되길 기다렸다. 다른 사람과 마주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놈들은 내 꼴을 보며 늘 비웃었다. 안 봐도 뻔했다. 못생긴 얼굴에 170도 안 되는 작은 키, 게다가 후줄근한 싸구려 옷까지 입고 다니니까 그렇게 보는 거였다. 남들은 부모 잘 만나서 떵떵거리고 사는데 난 이게 뭘까? 쓰레기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법이다. 내가 쓰레기라고? 아니, 이건 모두 다른 사람들 때문이었다.

힘들게 지방대를 졸업했지만 그뿐이었다. 어느 회사의 면접 자리를 가도 나보다 스펙 좋은 놈들이 수두룩했다. 모두 돈으로 산 걸 테지만 말이다. 바로 그거다. 그래서 나를 떨어뜨린 거다. 누가 봐도 나는 거지 새끼였다. 욕심에 눈이 멀어 푼돈이라도 뜯어낼 다른 사람을 뽑은 게 분명하다. 에라이, 개돼지만도 못한 놈들아. 그렇게 돈이 좋든? 왜 엄마 아빠는 돈이 없는 거야? 친척들에게 구걸을 해서라도 돈을 모았어야지. 잘해주지 못해 늘 미안하다고? 지랄한다.

이딴 삼류 그지 같은 대학을 다니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등록금이 밀렸는지 모른다. 아르바이트라도 하라는 엄마의 말에 기가 차 말도 안 나왔다. 공부는 언제 하라고? 등록금에 신경 쓰느라 학점은 늘 바닥이었다. 부모라면 자식 등록금 정도는 해결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돈만 많았다면 애초에 이런 대학을 입학하지 않았을 거고, 이렇게 살고 있지도 않을 거였다.

대학 졸업 후 몇 년이나 집에서 빌빌거리는데도 엄마 아빠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늘어놓을 뿐. 참다 참다 비굴한 부모의 얼굴이 역겨워 집을 나와 버렸다. 훔친 아빠의 카드로 돈을 찾아 이 방으로 들어왔다. 처음 며칠간은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먹고 가지고 싶은 피규어도 다 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내 돈이 바닥났다. 쫄쫄 굶다 혹시나 해서 통장을 확인해 보니 부모한테서 50만 원이 들어와 있었다. 돈은 매달 들어왔다. 그런다고 내가 고마워할 것 같아? 50만 원이 뭐야? 이런 푼돈으로는 밥 먹고 전기세 내고 인터넷 비용에다가 월세 내기도 빠듯한데 말이야. 장난치나. 모든 게 다 부모 탓이었다. 그들만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살 리가 없다. 잘나가는 직장에 다니면서 고급 차에 섹시한 여자 친구까지 있었겠지.

가만히 한숨을 내쉬자 입에서 썩은 내가 났다. 눈곱을 떼면서 거울 속 얼굴을 들여다봤다. 제대로 닦지 않아 누레진 이가 보였고 며칠 동안 감지 않은 떡 진 머리는 다 쥐어뜯고 싶을 만큼 간지러웠다. 한심하다.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먹고 싸고 또 먹고 싸고. 이 축 늘어진 뱃살 좀 봐봐. 죽어버릴까? 더는 이대로 못 산다. 지겨워. 온라인 게임 전체 서버 1위를 하기 위해서 현질을 더 해야 하는데 지금 가진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비참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돈을 구할 곳이 없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인생. 나를 이 꼴로 만든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행복하다는 얼굴로 웃고 떠들 게 틀림없었다. 도저히 못 참는다. 이대로는 너무 억울했다. 다 죽여 버리겠어! 진짜 죽여 버리고 말 거라고!

씩씩거리며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막상 나오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서웠다. 어디로 가야 할까. 뭘 하지?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내 모습을 훑어본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양 겨드랑이에 땀이 흠뻑 뱄다. 온몸이 가렵다. 어떻게든 그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한곳으로 모인 그들은 얼굴을 맞대고 깔깔거리며 웃는다. 분명히 내 초라하고 지저분한 몰골을 보고 비웃는 거다. 도로를 달리던 자동차들이 나를 향해 빵빵거렸다. 차도 없는 놈은 어서 집으로 꺼지라는 신호였다. 뭘 봐, 이 개새끼들아! 뭘 보냐고!

한마디 대꾸도 못 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여기는 어디지? 사람들을 피해 정신없이 거리를 걷다 편의점을 발견했다. 무작정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안에 들어오니 마음이 놓였다. 왜 난 이 모양일까? 확 죽어버렸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래, 죽자. 이렇게 한심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정신없이 편의점 내부를 돌아다녔다. 화가 나 온몸이 뜨거웠다.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거야, 왜? 계산대 앞의 라이터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래, 불이다. 뜨거운 불을 질러서 타오르는 불과 함께 사라지는 거다. 하지만 혼자 죽을 순 없다. 나를 무시하는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하니까. 자, 똑똑히 봐 내가 누군지 말이야. 다 같이 죽는 거야. 모조리 불에 타 죽는 거라고!

일회용 라이터 세 개와 지포 라이터 기름통을 골랐다. 기분이 좋아졌다. 실실 웃으며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점원이 얼굴을 들어 이상하다는 듯 내 눈을 쳐다본다. 깜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어, 얼마죠?”

점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라이터와 기름통의 바코드를 찍는다. 허둥지둥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행이 들키지는 않았다. 이제 뭘 해야 할까. 문 앞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사람들의 시선에 얼른 라이터와 기름통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초조하게 주머니에 넣은 손을 넣다 뺐다를 반복했다. 만약 저들이 다그치면 뭐라고 하지? 그냥 주웠다고 할까? 도망칠까?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그냥 집에 처박혀 있을 걸. 컴퓨터 앞에 멍하니 앉은 모습이 떠올랐다. 돈도 없어 현질도 제대로 못하는 한심한 그지 새끼.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잘라야지. 놈들에게 무시 당한 거 잊었어?

온몸으로 뜨거운 열이 번졌다.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아야 한다. 씩씩대며 주위를 살피다 지하철을 떠올렸다. 거기라면 사람도 많고 불 지르기도 쉬울 거다. 이미 여러 차례 큰 사건도 있었고. 뉴스에서 봤던 검게 그을린 지하철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로 거기였다! 행인들을 피해 앞으로 뛰었다. 사방을 헤매다 지하철 역을 발견하고 불을 붙일 생활 정보지를 집었다. 드디어 이 모든 걸 끝낼 때가 온 거다. 3호선 지하철 역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람이 적은 열차내로 들어와 앉았다. 바닥만 쳐다보다가 슬며시 주위를 살폈다. 앞좌석 맨 왼쪽에 젊은 여자 하나가 앉아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네다섯 명의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 꾸벅꾸벅 졸거나 창밖을 바라본다. 모두 초라한 나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맞은편 창문에 내 얼굴이 비쳤다. 쥐새끼같이 눈치만 살피는 모습이 한심하다 못해 역겹다. 꼬질꼬질한 옷차림을 확인하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지? 이를 악물고 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 기름통을 꺼냈다. 뚜껑을 열어 여자 옆의 빈 좌석에 마구 뿌렸다. 이건 다 너희들이 자초한 거라고!

다리를 꼬고 게임에 열중하던 여자가 그제야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피한다. 왠지 모를 쾌감을 느끼며 들고 있던 신문지에 불을 붙여 기름에 던졌다. 불이 기름에 닿자 불꽃이 확 피어올랐다. 좌석 위에서 손바닥만 한 불이 춤을 춘다. 이제 불이 좌석 모두를 태우고 열차 내로 번지는 일만 남았다. 막상 일을 벌이자 언제 주눅이 들었느냐는 듯 한없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이런 게 바로 주목을 받는 느낌일까? 너무 좋다. 좋아 미치겠다. 활활 타올라서 모든 걸 다 태워버렸으면 좋겠다! 난 그냥 죽으면 된다. 세상과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장렬히 전사하는 거다. 엄청 멋진 죽음 아닌가? 하지만 지하철 좌석 위의 불은 제자리에서 격렬히 춤을 추다 점점 사그라진다. 왜 다른 쪽으로 옮겨붙지 않는 거지? 왜 안타는 거냐고? 타올라라! 나를 비웃던 놈들까지 모조리 불태워버리라니까?

불이 난 걸 본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주변으로 모여든다. 그 중 남자 셋이 나를 둘러싸 내 팔과 어깨를 거칠게 붙들었다.

“뭐하는 거야, 당신?”

“돌았네. 정신병자세요? 완전 미친 사람이잖아!”

“어서 경찰에 신고하죠? 이런 놈은 가만히 놔둬선 안된다니까. 깜빵에 집어넣어야 정신을 차리지.”

그들이 쏟아 붓는 험악한 말에 덜컥 겁이 났다. 진짜로 이렇게까지 하려던 건 아니었다. 단지 답답했다. 내가 초라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대로 경찰서에 끌려가는 걸까? 감옥에 가면 끝이다. 좁은 감방에서 흉악한 범죄자들과 생활하는 걸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눈앞의 불꽃이 양옆으로 거세게 흔들린다. 마치 신이 나 온몸을 들썩이는 것 같다. 내 바람을 듣기라도 한 걸까? 손가락만 한 불꽃이 좌석 밑으로 똑 떨어진다. 불꽃은 점점 작아지면서도 내 쪽을 향해 미끄러져 왔다. 뭐지? 남자들에게 저기 좀 보라고 뭔가 이상하다고 소리를 쳤다. 그들은 콧방귀를 끼며 어디서 수작이냐고 욕을 해댔다. 앞좌석에 앉아 있다가 자리를 피한 여자는 나를 흘겨보며 경찰에 전화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나를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머리가 핑핑 돌아 휘청거렸다. 이제 그만해. 내가 잘못했어. 사과할테니까 제발!

그때였다. 다 꺼져가던 좌석 밑의 불꽃이 내 멱살을 잡은 남자의 발뒤꿈치에 달라붙었다. 발바닥에서부터 시작된 새빨간 불길이 다리를 타고 순식간에 남자의 온몸으로 번진다. 무슨 상황인지 깨닫지도 못하고 앞의 남자를 힘껏 떼밀었다. 온몸을 비틀면서 팔과 어깨를 잡고 있던 손도 뿌리치고 문으로 뛰었다. 너무 무섭다. 저 불도 무섭고 뒤에서 소리 지르는 남자들도 무섭고 감옥도 무섭고 여기에 있는 모든 게 다 무서웠다.

제일 가까운 출입문에 달라붙었다. 아직 열차가 역에 도착하지 않은 터라 모든 문은 굳게 닫힌 상태였다. 허둥지둥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 손잡이를 잡고 선 사람을 밀치며 무작정 앞으로 뛰었다. 또 다음 칸으로 넘어갈 때쯤 돼서야 열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열차를 타려고 선 사람들을 한꺼번에 떼밀고 출구로 뛰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어서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사람들 틈에 있다는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갑갑하고 두려웠다. 출구를 나와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뛰었다. 쫓아오는 이가 있을까 봐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 그저 달리기만 했다. 내가 잠시 미쳤거나 환각을 본 게 틀림없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었다.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냉장고에서 콜라 캔을 꺼내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흐른다. 방구석에 빈 캔을 던지고 그대로 이부자리로 쓰러졌다. 너무 피곤하다. 지금은 그저 자고 싶었다.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잠결에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의 함성과 비명, 사이렌 울리는 소리, 다급히 터지는 수십 차례의 총성과 차 부딪히는 굉음이 한데 뒤섞여 아우성치다 시간이 지나자 잠잠해졌다. 꿈이었나? 모르겠다. 하여튼 난 불 같은 건 절대 지르지 않았다. 너무 방구석에 오래 처박혀 있다 보니 정신이 약간 이상해졌나 보다.

쾅! 몸을 뒤척이며 다시 잠을 청하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찼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다. 누구지? 깜짝 놀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문 밖의 동태를 살폈다. 찾아올 사람도 없고, 있다고 해도 이 시간에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쾅! 쾅! 쾅! 쾅! 이번에는 아예 방문을 부술 듯 두드렸다. 대체 누구길래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낮의 일 때문에 그러나? 경찰인가? 어쩌지? 도망쳐야 하나?

살금살금 문으로 가 숨죽여 귀를 기울였다. 바로 앞에서 종이를 구깃구깃하는 듯한 묘한 소리가 나고, 그 사이로 이를 악문 사람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헉!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밖에 이상한 사람이 있다. 내가 있다는 걸 알아챘는지 다시 쉴 새 없이 문을 두드린다. 순순히 열어줘야 할까? 아니면 창문 밖으로? 창문에는 도난 방지용 창살이 처져 있어 나갈 길은 현관문뿐이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그쳤다. 뭔가 싶어 문쪽을 바라봤다. 문과 문틀 사이의 좁은 틈으로 불꽃이 날름거리며 기어들어온다.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불은 힘겹게 문 옆의 벽지에 달라붙더니 벽을 타고 나에게 다가온다. 불이 지나간 자리에 검은 그을음이 이어졌다. 이게 뭐야?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베개를 들어 불을 향해 휘둘렀다. 온몸에 소름이 좍 돋는다. 낮의 일이 현실이었다고?

불은 베개에 닿자마자 베갯니로 화르륵 옮겨붙어 베개를 잡은 내 손을 향해 타들어왔다. 화들짝 놀라 불이 붙은 베개를 이불 쪽으로 내던졌다. 불은 곧 이불 전체로 번져 활활 타올랐다. 불꽃이 이불 위에서 나를 움켜쥐려고 휘청거린다. 벽에 붙어 있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은 채로 천장으로 향했다. 위에서 내 머리로 뛰어내리려는 것이 분명했다. 어쩌지? 어떻게 하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몰랐다. 밖으로 나가봤자 갈 곳도 없었다.

매캐한 연기가 방 안 가득 퍼졌다. 콜록거리며 방문을 바라봤다. 문에는 불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불과는 달리 현관문은 쇠로 되어 있어 불이 쉽게 붙지 않는 모양이었다. 천장의 불꽃이 어느새 머리 위까지 와 일렁거렸다. 저 불을 피할 길은 오직 저 문뿐이었다. 이판사판이다! 문을 벌컥 열었다. 눈을 질끈 감고 뛰쳐나갔다. 문 바로 앞에 있던 사람이 문에 부딪혀 나동그라졌지만, 누구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어두운 거리를 정신없이 달리다 공원의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그 속에 숨어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 내가 이제껏 모아 놓은 한정판들과 쉴 곳 모두다.

거리에는 온통 불타는 사람들이 사방을 헤집고 다녔다. 마치 거대한 횃불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불에 휩싸인 여자 하나가 달아나는 성인 남자를 쫓는다. 자세히 보니 자주 가는 편의점의 여 알바생이었다. 일하는 도중이었는지 편의점 유니폼을 입은 상태였다. 얼굴이 반반해 좋아했지만, 기껏 삼각김밥이나 사는 처지라 말 한마디 걸어보지 못했다. 그 예쁜 얼굴이 화상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어서 오라고 인사를 하던 여자가 걸걸한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불길이 손을 통해 붙잡힌 사람에게로 옮았다. 온몸에 불이 붙은 남자가 펄쩍 뛰며 팔다리를 긁어대고는 여자 반대쪽으로 휘청휘청 걷는다. 여자도 다른 사람을 찾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뒤돌아섰다. 예전의 모습은 어디로 간 걸까? 불타는 사람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주위를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면 한꺼번에 달려들어 자신들을 태우던 불을 옮겼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지하철에서 한 행동을 떠올렸다. 설마 내가 낸 불이? 말도 안 된다. 그럴 리 없었다. 그 불은 멱살을 잡은 남자를 순식간에 불태웠다.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내가 정신이 좀 이상한 게 아닐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한 일이 아니다. 절대 내 탓이 아니었다.

어느새 근처의 모든 사람에게 불이 옮겨붙었다. 불타는 사람들은 일그러지고 녹아내린 얼굴로 울며 사람을 찾아다닌다. 누굴 찾는 걸까? 구석구석을 훑던 그들 중 한 명이 내가 숨은 풀숲으로 뛰어왔다. 내가 생각해도 여기가 제일 수상했다. 그래도 알아채지는 못할 것이다. 저들은 지능도 없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좀비 같은 게 틀림없었다. 순간, 놈이 불타는 손을 집어넣어 내가 숨은 풀숲 속을 더듬었다. 녹색 풀에 불이 화르륵 붙었다. 뭐야 이거! 얼떨결에 뛰쳐나와 놈들이 없는 쪽으로 뛰었다. 뒤에서 불타는 사람들이 소리치며 쫓아왔다.

“봤어? 바로 저 놈이야!”

“잡아! 저 놈을 잡아야 한다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듣고 고통스럽게 절규하며 나에게 달려왔다. 평소 먹고 자기만 해오던 터라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호흡이 가빠왔다. 자꾸 구역질이 나오고 무릎이 쑤셨다. 목이 따가워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대로 주저앉아 쉬고 싶었다. 뒤에서 놈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제발 도망가지 마! 그래야 이 모든 게 끝난단 말이야!”

대체 무슨 소리일까? 저 멀리 불타는 사람에게 쫓기는 아줌마가 보였다. 이제 한계였다. 더는 못 뛴다.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혹시 놈들이 달리기가 굼뜬 아줌마에게 붙을지 몰랐다. 한두 명도 좋고 아예 다 붙어도 좋다. 하지만 내가 가까이 가자마자 아줌마를 쫓던 놈들이 오히려 나에게 달려들었다. 이것들이 왜 나한테 붙는 거야? 저 여자한테나 붙으란 말이야! 주변을 배회하던 불타는 사람들도 모조리 나에게 달려들었다. 너무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왜 또 나한테만 그러는 거냐고! 왜?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24시간 운영하는 약국이었다. 무작정 그곳으로 달렸다. 유리문을 밀치고 안으로 뛰어드니 다 타서 숯이 돼버린 사람들이 군데군데 쓰러져 있었다. 기겁하면서도 잽싸게 들어와 문을 잠갔다. 불타는 사람들이 약국 유리문에 차례차례 부딪쳤다. 그들이 문에 달라붙어 유리를 박박 긁는다. 다행히 온몸의 근육이 타들어 가는 중이라 문을 부술 힘이 없는 모양이었다. 밀거나 잡아당겨도 문이 열리지 않자 앞에서 버둥거리기만 했다. 그들이 유리문에 바짝 달라붙어 소리쳤다.

“너 하나만 타죽으면 돼! 안 들려? 너 때문에 모두 이 꼴이라고!”

“그러니까 이 문 좀 열어줘.”

“우리 좀 살려줘! 제발, 제발 부탁이야!”

그들이 유리문을 흔들며 악을 쓰고 애원했다. 녹아내린 붉은 살점이 유리문 곳곳에 묻어났다. 문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채 소리 질렀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그들이 머리를 부여잡고 온몸을 뒤틀었다.

“머리를 송곳으로 꿰뚫는 것 같아! 불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고!”

“죽고 싶다며? 네가 원하던 거잖아. 이제 와서 왜 그러는 건데?”

어느새 그들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엄지손가락만 한 불꽃들이 유리문을 타고 안으로 기어들어온다. 펄쩍 뛰며 뒷걸음질쳤다. 약국 문과 전면의 벽 자체는 모두 유리와 쇠로 되어 있다. 불이 옮겨붙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바닥도 마찬가지였다. 유리문에서 뛰어내린 불꽃들은 돌로 된 바닥에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그라진다.

미친놈들! 욕을 내뱉다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 안에도 타죽은 사람들이 있었다. 벌떡 일어나 시커멓게 탄 사람들을 살폈다. 불안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기웃거리다가 진열대 밑에 쓰러진 사람에게서 새빨간 뭔가가 꿈틀거리는 게 보인다. 작은 불씨다. 욕지기가 확 치밀어 올랐다. 불씨는 시커먼 허벅지에서 종아리로 미끄러지더니 그 옆에 흩뿌려진 영수증 조각에 달라붙는다. 곧 손톱만 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꽃은 바닥에 떨어진 전단지와 약 봉투를 건너뛰며 나에게 다가왔다.

공포로 몸을 떨며 황급히 약국 안을 살폈다. 한쪽 구석에 분말소화기가 비치되어 있다. 얼른 소화기를 빼들고 안전핀을 뽑았다. 소화 분말액을 내리 쏟아붓자 불씨는 금방 꺼졌다. 혹시나 해서 다른 사람들의 주검에도 골고루 뿌렸다. 몇 번이나 불씨가 남았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며 소화기를 내려놓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리문 앞에 선 사람들을 살폈다. 그들은 고통에 울부짖으면서도 나만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는 믿지 못할 말을 계속 지껄였다. 증오로 가득한 눈빛들이 날 쏘아본다. 어째서? 그들과 눈을 마주치는 게 두려웠다. 계산대 뒤로 넘어가 쪼그리고 앉았다. 대체 저 불의 정체는 뭘까? 분말액으로 뒤덮인 사람들의 주검을 바라봤다. 아까 집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저들이 불에 타는 동안 옆에 있는 물건에도 불이 붙었어야 했다. 주위에는 온통 타기 쉬운 종이들과 플라스틱 통이 어지러이 널려 있다. 하지만 불은 오직 사람만을 태웠다. 그렇다. 사람이 목표인 거였다. 고개를 슬쩍 들어 다시 유리문을 살폈다. 불타는 사람들이 한 곳에 빼곡히 붙어있자 각자를 태우던 불이 이제는 서로에게로 옮겨붙는 형국이 됐다. 불길이 거세진다. 마치 캠프파이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얼굴과 팔다리의 살들이 아이스크림처럼 천천히 녹아내리다가 곧 시커멓게 타들어간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표정에는 오직 원망만이 가득했다. 얼른 주저앉아 눈을 질끈 감았다. 참혹한 모습에 속이 울렁거렸다.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이제껏 인식하지 못한 사람 타는 노린내까지 풍겨 와 구역질을 했다. 구글에서 재미로 고어 사진들을 찾아보곤 했었다. 그 사진들은 재밌었는데 이건 아니었다. 이건 너무 잔인했다.

문득 고어 사진 중에 백린탄을 맞아 타 죽은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명 중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백린탄은 사람의 몸에 붙으면 물에 담가도 잘 꺼지지 않는다고 했다. 점착성도 강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백린탄이 붙은 살을 도려내야 한다. 그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온몸으로 번져 살이 다 타들어 갈 때까지 고통에 허덕이다 죽어야 한다.

저 불은 백린탄을 닮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악독했다. 백린탄이 사람을 최대한 고통스럽고 효과적으로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저 불은 그런 끔찍한 고통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에 붙은 불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옮기게 하고 있었다. 그럼 저 불은 어떻게 생겨난 걸까? 물론 내가 만들었다. 아니, 내가 만들긴 했는데 내가 만든 게 절대 아니다. 상식적으로 불 한번 질렀다고 해서 저런 괴물 같은 불이 만들어질 리가 없다. 내 탓이 아니다.

쪼그리고 앉아 이것저것 생각하려니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팠다. 혹시 놈들이 했던 말처럼 불은 나를 노리는 게 아닐까? 방문에 붙은 불씨가 나를 향해 기어오던 것 하며 아줌마를 쫓던 불타는 사람들이 모조리 나에게 붙은 것까지, 놈들이 나 하나면 된다고 했던 말들도 심상치가 않았다. 불길에 휩싸인 사람들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게 내가 아니었을까? 불현듯 소름이 확 끼쳤다. 불을 지를 때 다 같이 죽자고 생각했다. 사람과 세상을 불태우고 마지막에는 나도 죽자고. 그게 현실이 됐다? 그래서 불이 사람들을 태우는 거고, 결국엔 내가 불타 죽어야 이 모든 게 끝난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평소에는 내가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바라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그게 이제 와서, 그리고 하필 그 순간에 이루어질 리가 없다.

유리문 앞을 서성이던 불타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먼저 시커멓게 탄 다리들이 꺾이고 바스러진 후 뒤이어 상체가 와르르 허물어진다. 그들은 쓰러진 상태에서도 증오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보며 유리문을 박박 긁어댄다. 유리문 너머에서 네가 한 짓을 똑똑히 보라는 외침이 들리다가 점점 사그라진다. 불길이 날름거리는 시커먼 얼굴들에서 유독 두 눈만이 반짝거린다. 내가 아니다. 내가 한 건 그저 라이터 기름 몇 방울 뿌리고 불을 붙인 것밖에 없다. 더구나 그 불은 금방 꺼지는 중이었다. 이제는 유리문을 긁던 팔들도 불길에 휩싸여 마른 낙엽처럼 부서진다. 수십 명의 사람이 유리문 앞에서 시커멓게 탄 채 차곡차곡 쌓인다. 붉은 살점과 검댕이 어지러이 찍힌 유리는 마치 하나의 추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참지 못하고 다시 구역질을 해댔다.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다. 뱃속에 든 걸 모조리 게워내고 나서야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밖을 보니 어렴풋이 날이 밝아왔다. 죄책감으로 머리가 아팠다. 내 책임인 건가? 난 당하기만 했는데 어째서? 피로가 몰려와 쭈그린 채로 약품 진열대에 몸을 기댔다. 환해지는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날카로운 비명에 놀라 잠에서 깼다. 밖을 살피니 어린 딸을 가슴에 안은 부모가 불타는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어느새 사방이 환해졌다. 약품 진열대 옆으로 숨어 쫓고 쫓기는 사람들을 살폈다. 가족은 한데 뭉쳐 이리저리 방향을 틀었다. 좋은 시도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사방에서 모여든 불타는 사람들이 그들을 겹겹이 에워쌌다. 더구나 아빠는 미련하게도 아이까지 안고 있어 뜀박질이 더뎠다. 우리 부모라면 아마도 나를 버리고 갔겠지. 그러고도 남을 인간들이었다. 돈도 쥐꼬리만큼 보내줬으니까. 얼마 안 가 불타는 사람들에게 붙잡힌 가족은 곧 온몸으로 불이 번졌다. 아빠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안고 있던 딸아이를 내던지고 방방 뛰었다. 엄마도 몸에 붙은 불을 끄려고 온몸을 털어대며 안간힘을 썼다. 두 사람의 다리 밑에서 불붙은 아이가 울부짖으며 땅바닥을 기었다. 가족 모두에게 불을 붙인 사람들은 다시 사방으로 흩어져 주변을 훑었다. 조금 전에 불이 옮겨붙은 가족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뿔뿔이 흩어졌다. 엄마 아빠와 반대편으로 뒹굴던 아이가 엥, 하고 긴 울음을 터뜨렸다.

더는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비록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지하철 의자에 불을 붙인 건 사실이었다.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렸다. 혹시라도 내 탓이면 어쩌지? 또 바깥 어딘가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그럼에도 불타는 사람들은 수색을 멈추지 않았다. 왜일까. 나를 찾는 거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뭐라도 해야 한다. 가만히 있다간 금방이라도 진열대 옆에 숨어 있다는 걸 들킬 것 같았다.

그때였다. 툭. 툭.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가느다란 빗방울이 떨어졌다. 바닥에 점점이 박히던 빗방울들은 이내 세찬 비가 되어 쏟아졌다. 물안개가 확 퍼지고, 쏴 하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찼다. 시원하게 퍼붓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다 유리문 밖으로 이상한 광경이 펼쳐진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 몸을 태우던 불길이 비를 맞고 꺼져드는 거였다. 새삼 소화기로 불을 끄던 게 생각났다. 맞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굶어 죽을 뿐이었다. 비를 맞고 불이 꺼진 사람들은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연기를 내뿜으며 땅으로 처박혔다. 지금이 기회다. 슈퍼든 편의점이든 찾아가 먹을 걸 구해야 한다. 어쩌면 저 비 덕분에 사람들에게 붙은 불 대부분이 꺼질지도 몰랐다. 기다리자. 비가 금방 그칠 수도 있다. 운 좋게 비가 계속 내리면 사람들을 태우던 불이 꺼질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적어도 중간에 나갔다가 쫓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기다려야 한다.

금방 그칠지 모른다는 염려와는 달리 비는 삼십 여분을 내리쏟아졌다. 밖을 살펴보니 근처를 헤매던 불타던 사람들이 모두 연기를 뿜으며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몸에 붙어 있던 불도 모조리 꺼진 후다. 일이 이렇게 쉽게 돌아갈 줄이야. 비가 세차게 내리는 때를 기다려 약국에서 나왔다. 잠시 망설이다 시끄럽게 쏟아지는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비가 내리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때였다. 중간에 비가 멈춘다 해도 불 대부분은 꺼졌을 터다. 먹을 걸 구하고 난 후 상황을 봐서 여기로 되돌아오든지 아니면 그곳에 죽치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다음 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퍼붓는 빗줄기 주변으로 안개가 짙게 깔렸다. 흐려진 시야에서도 사람들 몸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치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연기가 맘에 걸렸다. 무심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연기가 나는 건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거 아닌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맞다! 아까 약국에서도 다 타버린 사람에게 조그마한 불씨가 남아 있었다. 황급히 사람들을 훑었다. 이제 보니 쓰러진 사람들이 조금씩 꿈틀거리며 신음을 내지른다. 빗소리에 묻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 거다. 저 검은 연기! 그건 계속 타들어 가는 걸 뜻하는 거였다. 불이 사람들의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간 게 틀림없었다. 결코 꺼진 게 아니었다. 빨리 돌아가야 한다!

제자리에 멈춰 주변을 살피자마자 쓰러져 있던 사람들이 발광하며 일어섰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건 누가 봐도 함정을 파놓고 기다린 거였다. 사방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쏟아지는 비와 주변을 감싼 비안개 때문에 약국이 어느 쪽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괴성을 지르며 덤벼드는 사람을 피해 뛰었다. 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이 자꾸 시야를 가렸다. 무섭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쪼그리고 있던 터라 다리가 뻐근했다. 제대로 발을 내뻗을 수 없어 비틀거렸다. 갑자기 현기증이 돌아 까딱하면 흙탕물을 구를 뻔했다. 빨리 어떻게든 해야 한다. 심장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길가에 세워진 1톤 트럭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무작정 트럭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그곳에서 몸을 움츠리며 떨었다. 불타는 사람들이 트럭 밑으로 들어온 걸 봤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요동쳤다. 사방에서 시커멓게 탄 발들이 모여들었다. 트럭 바로 앞에 불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괴성을 내지른다.

“찾아, 지금이라도 살고 싶으면 잡으라고!”

너무 긴장한 나머지 팔로 트럭 밑을 건드렸다. 둔탁한 쇳소리가 울렸다. 마치 천둥이라도 친 것 같은 굉음이었지만 그 소리는 쏟아지는 빗소리에 금방 파묻혔다. 트럭 아래로 방방 뛰는 시커먼 발들이 보였다. 저들도 빗줄기와 안개 때문에 내가 기어들어온 걸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주변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이내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심호흡을 하며 이를 악물었다. 일단 한숨을 돌렸지만 트럭 밑이 너무 좁아 갑갑했다. 언제까지나 이곳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온몸이 젖어 점점 추워질 게 뻔했다. 뒤범퍼와 바퀴 사이에 난 틈으로 주변을 살폈다. 어디에도 슈퍼나 편의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그래, 이 비를 이용하자. 근처에 몸을 비집고 들어 갈 만한 장소를 찾다가 50미터 쯤 떨어진 거리에 승합차를 발견했다. 저기 말고는 딱히 숨을 곳이 없다. 주위에 불타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난 후 트럭에서 기어나왔다. 퍼붓는 비를 방패 삼아 죽을힘을 다해 내달렸다. 이런 식으로 장소를 옮기다 보면 뭐라도 나올 것이다.

승합차 앞에 도착하자마자 냉큼 차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바닥에 몸을 바짝 붙인 채 마음을 졸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들켰으면 어쩌지? 주변은 빗소리 빼고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위를 살폈다. 트럭과 승합차 사이보다 더 먼 거리에 조그마한 슈퍼 하나가 눈에 띄었다. 드디어 찾았다! 언제 이 비가 그칠지 모른다. 어차피 슈퍼에 들어가기만 하면 끝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슈퍼로 냅다 뛰었다. 아직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슈퍼에 도달하자마자 닫힌 문을 힘껏 밀었다. 덜커덩 소리와 함께 문이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잡아당기고 다시 밀어 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주위를 살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러고 있다가는 곧 발각될 것이다. 주위에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다시 되돌아가기에는 먼 거리였다. 온 힘을 다해 문 손잡이를 잡고 흔들었다. 미친 듯이 문을 잡고 늘어지자 위쪽 잠금쇠가 부서지며 문이 벌컥 열렸다.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을 잠그려고 잠금쇠를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이미 부서진 터라 계속 헛돌 뿐이었다. 불타는 사람들에게 들킬까 싶어 더 어쩌지 못하고 문 앞에서 물러났다. 아무도 없는 슈퍼 안은 다행히도 따뜻했다. 바로 음료수 냉장고로 달려가 콜라병을 빼들고 계산대 밑으로 숨어들었다. 쪼그리고 앉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꺼억.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거의 한 병을 다 비우고 출입문을 바라봤다. 겉으로 보기에는 잠긴 것 같아도 누가 마음만 먹는다면 쉽게 열고 들어올 수 있다. 매장 내 뒤쪽에 창고가 있지만, 그곳에 있다가는 혹시 불타는 사람이 들어와도 발견하지 못할 거였다. 차라리 이렇게 밖을 살필 수 있는 계산대 밑이 안전했다. 그들에게 들키지 않기만을 비는 수밖에 없었다. 웅크리고 있던 다리를 쭉 폈다. 앞으로 오랫동안 이곳에 있어야 할 터였다.


눈을 비비며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가물가물하다. 시간은 어느새 4시간이 지났다. 이게 차라리 악몽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틈틈이 따로 조리할 필요가 없는 빵이나 소시지 같은 걸 먹었다. 캔 커피도 벌써 4개나 마시고 창고로 가 용변도 봤다. 그 외에는 멍하니 앉아 있거나 꾸벅꾸벅 조는 게 전부였다. 아무리 피곤해도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혹시 지금쯤이라면 불타는 사람들이 다 사라지지 않았을까? 바깥은 이미 비가 그친 지 오래였다. 혹시나 해서 노을이 지는 출입문 밖을 살폈다. 검은 연기를 내뿜는 사람들이 전보다 더 다급하게 나를 찾고 있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얼른 계산대 밑으로 고개를 숙였다. 언젠가는 이곳으로도 찾아올 것이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주변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슈퍼 안은 형광등이 켜져 대낮처럼 밝았다. 아까보다 안이 훨씬 잘 보이는 것이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계산대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대로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불에 타 사라지는 게 아닐까? 몇 날 며칠을 혼자 있으니 외로웠다. 사람이 보고 싶었다. 이제껏 쭉 혼자 지내왔는데 왜 이제야 외로움을 느끼는 걸까? 돌이켜보니 집에 틀어박힌 동안에도 일종의 인간관계는 맺고 있었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나 온라인 게임을 수도 없이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더 이런 괴로운 시간을 견뎌야 하는 걸까?

긴 한숨을 몰아쉬는 순간, 출입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숨을 멈추고 몸을 움츠렸다. 곧이어 문이 열렸다. 두세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의 거친 발걸음 소리가 뒤따랐다. 천장으로 검은 연기가 닿았다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들이다! 계산대 밑의 비닐봉지를 넣는 조그만 틈으로 파고 들어갔다. 자꾸 숨이 거칠어지고 손발이 떨렸다. 이러다가 들키고 만다. 온몸을 부여잡고 이를 악물었다. 제발 그냥 나가기만을 기도했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다급한 뜀박질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혹시나 나를 발견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될까 두려워 눈을 꼭 감았다. 빨리 가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치며 울었다. 한동안 그들의 고통 섞인 숨소리와 한숨이 매장 내를 맴돌더니 끝내 그들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울부짖으며 밖으로 나갔다. 한참이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눈물이 나왔다. 내부에 가득 찬 검은 연기가 마치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내 탓이라고? 나도 물러서지 않고 그 연기를 올려다봤다. 절대 내가 그런 게 아니었다.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깨어나 보니 아침이었다. 온몸이 쑤셔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목이 탔다. 무심코 음료수를 찾아 냉장고 문을 열다 불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계산대 밑으로 달려왔다. 조마조마해하며 밖을 살폈다. 다행히도 불타는 사람들은 주변을 훑을 뿐 이쪽엔 관심도 없었다. 더구나 그 수가 많이 줄었다. 군데군데 시커멓게 탄 사람들의 주검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 결국, 다 타버린 거였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그럼 불타는 사람이 재가 될 것이고, 난 이렇게 고통받으며 숨어있지 않아도 된다.

한동안 계산대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다시 그들의 수를 세었다. 방금 한 명이 숯이 돼 쓰러졌으니 밖에는 총 11명이 있는 셈이었다. 기다리는 게 너무 지루했다. 빨리 저들이 불에 타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왜 이렇게 안 죽는 걸까? 무슨 좀비도 아니고. 그때 불타는 사람들이 없는 골목 쪽에서 불이 붙지 않은 사람 하나가 절뚝거리며 뛰어왔다. 이제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한쪽 다리를 접질린 모양이었다. 뒤뚱거리며 뛰는가 싶더니 균형을 잃고 바닥을 뒹굴었다. 얼굴이 긁혀 볼에서 피가 흘렀다. 소년은 벌떡 일어나 차 옆에 숨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머리는 자다가 일어난 듯 부스스하고 온몸이 시커먼 흙먼지로 뒤덮였다. 불타는 사람들을 피해 여기까지 온 게 분명했다. 다리를 다쳤는데도 용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주위의 불타는 사람들도 아직 소년을 발견하지 못했다. 얼마 만에 보는 멀쩡한 사람인가? 누군가가 있다는 게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이곳에 슈퍼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소년은 발을 동동 구르다 차 밑으로 굴러 들어갔다. 아마 이 근처에서 나를 제외한 유일한 생존자일 것이다. 이쪽으로 부를까 생각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그럼 내가 더 손해였다. 들킬지도 모르고, 오는데 성공한다 해도 귀중한 식량을 낭비할 거였다. 어차피 소년도 지금은 안전하게 숨어있는 상태였다.

소년을 발견한 건 나에게는 이득이었다. 외롭다고 느낄 때마다 차 밑의 소년을 살폈다. 그럼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적어도 난 소년보다는 처지가 나았다. 그게 커다란 위안이 됐다. 소년은 몸을 덜덜 떨며 차 밖으로 나왔다가 불타는 사람들을 피해 다시 기어들어가곤 했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더구나 다리를 다쳐 멀리 가지도 못했다. 이제 곧 모든 사람이 불에 타 쓰러질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 주변을 배회하며 나를 찾아 여기저기를 뒤지던 사람들도 이제 9명으로 줄었다. 소년이 차 밑에서 울먹이는 게 보였지만,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주변을 수색하던 불타는 사람들이 한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근처에서 제일 높고 큰 빌딩 쪽이다. 9명의 사람이 모두 그 빌딩 밑에 서는가 싶더니 사방에서 불타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수백 명은 족히 넘을 정도로 거대한 행렬이었다. 그들이 빌딩을 빽빽이 에워쌌다. 고통스러운 비명과 신음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대체 이 많은 사람이 어디에서 온 걸까? 숨이 턱 막혔다. 여긴 서울 한복판이었다. 즉, 인구수가 어마어마하다는 이야기였다. 그 사람들이 모두 불에 타 검은 재가 됐을 걸로 생각한 건 나의 엄청난 착각이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불타는 사람의 전부인 줄만 알았다. 탄식이 절로 나왔다.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욕설을 내뱉는 사이 빌딩을 둘러싼 수백 명의 사람이 온몸을 떨었다. 겁을 먹은 얼굴들이 미쳐 날뛰며 소리쳤다.

“안 돼, 제발 그러지마!”

“살려줘! 부탁이야. 찾을 게! 찾으면 되잖아!”

일순간 사람들을 태우는 불이 거세게 타올라 하나의 커다란 불꽃을 만들었다. 마치 핵폭발 후 피어오르는 거대한 버섯구름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 위로 솟은 불은 빌딩 밑 부분부터 집어삼키더니 시커먼 연기를 토해내며 위로 올라갔다. 빌딩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빌딩 밑의 사람들은 순식간에 까맣게 타 재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지던 비명들이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수백 명의 사람이 말 그대로 재만 남았다. 소년도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낌새를 눈치채고 절뚝이며 차 밖으로 나왔다.

무슨 속셈일까?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 상황을 주시하자. 불은 빌딩 곳곳을 훑으며 위를 향해 타들어갔다. 겨우 저 건물 하나를 태우려고 수백 명의 사람을 이용했단 말인가? 빌딩이 타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년도 불길에 휩싸인 빌딩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제 더는 계산대에 숨어 있을 필요가 없었다. 뻐근한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쫙 켰다. 온몸의 관절이 풀려 시원했다. 덩달아 기분도 좋아졌다. 불타는 사람들이 사라졌으니 이제 상황 종료였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가로수 잎이 흔들리고 소년의 머리도 바람결에 흐트러졋다. 빌딩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가 휘청거리며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불타는 빌딩에서 조그마한 불씨들이 떨어져 나와 바람을 탔다. 수천 개의 작은 불씨들이 하늘을 붉게 뒤덮었다. 그 광경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상황이 심상치가 않았다. 이제껏 불타는 사람들만 나를 쫓아온 게 아니었다. 현관문에서의 작은 불꽃과 약국에서 사람에게 남은 불씨가 나를 향해 기어오던 게 떠올랐다. 그 모든 것의 근원은 불이었다.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끝난 게 아니었다. 저 불씨들을 통해 아예 이 근처를 모조리 태우려는 거였다. 빨리 달아나야 한다!

슈퍼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나를 발견한 소년이 엉거주춤 서 얼빠진 얼굴로 쳐다봤다. 불씨들은 바람을 타고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바람까지 이용하는 모습에 기가 찼다. 잡히면 끝장이었다. 소년을 지나쳐 빌딩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억척스러운 손길이 내 팔을 잡았다. 어느새 소년이 절뚝이며 뛰어와 나를 잡고 늘어졌다. 빨리 도망가야 하는데 놓아주지 않았다. 거지처럼 울고불며 매달렸다. 이게 미쳤나! 발로 소년의 복부를 걷어찼다. 억! 하고 몸을 굽히며 고꾸라진다. 이제 됐거니 싶어 뒤를 돌자 이번에는 엎어진 상태로 내 발목을 움켜쥔다. 나를 올려다보며 도와달라는 말을 웅얼거렸다.

놔! 놓으라고! 다른 쪽 발로 녀석의 머리를 정신없이 밟아 댔다. 고무처럼 말랑말랑한 감촉이 발바닥에 전해졌다. 밑에서 아프다고 소리를 지렀다. 알게 뭐람! 계속 밟아대자 발목을 쥔 손아귀의 힘이 느슨해졌다. 그 틈에 손을 뿌리치고 뛰었다. 뒤에서 섬뜩한 비명과 함께 전과 똑같은 말이 들렸다. 나만 죽으면 이 불도 사라진다고? 서둘러 소년을 돌아봤다. 수십 개의 불씨가 소년에게 들러붙어 온몸으로 붉게 번졌다. 소년이 원망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며 울부짖었다.

“끝까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너 하나면 돼, 당신만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고!”

소름이 확 끼쳤다. 허겁지겁 고개를 돌리고 다시 뛰었다. 수많은 불씨는 나를 쫓는 와중에 건물들에 내려앉기도 하고 가로수에도 달라붙었다. 사방으로 붉은 눈이 내렸다. 가로수가 활활 타오르고 건널목에 걸린 현수막에 불이 붙었다. 불씨가 점점이 박힌 건물마다 연기가 치솟는다. 건물 옆면에 붙은 간판들이 불에 타 하나둘씩 밑으로 추락했다. 내가 지나간 곳마다 불씨가 들러붙어 불을 일으켰다. 불타는 빌딩에서는 끊임없이 불씨가 쏟아졌다. 이제야 깨달았다. 저 불은 나를 잡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거였다. 공포에 사로잡혀 불타오르는 도시를 돌아보았다. 새벽에 자주 보던 사거리의 주유소에서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는다. 땅을 뒤흔드는 충격파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불길에 휩싸인 도시 여기저기에서 연쇄폭발이 일어났다. 어느새 하늘을 뒤덮은 수많은 불씨가 눈앞까지 날아들었다. 온몸이 떨렸다. 살고 싶었다.


불타는 도시를 뒤로 한 채 뛰고 또 뛰었다. 벌써 수십 개의 빌딩과 아파트가 불에 타 으스러졌다. 타오르는 건물들의 잔해 위를 다시 거대한 불길이 뒤덮는다. 하늘 높이 치솟는 불길 사이로 수많은 불씨가 나를 쫓으며 내 뒤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었다. 세상이 무너진다. 땅이 움푹 꺼지고, 그 속에서 불타는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기어나온다. 내가 지나온 길에 남은 건 오직 불뿐이었다. 눈앞으로 사람이 사라진 텅 빈 대로가 펼쳐쳤다. 그랬다. 이건 세상의 종말이었다.

쫓아오는 불길을 피해 달아났다. 나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세상 모든 것이 불에 휩싸여도 나만 아니면 되는 일이었다. 살고 싶다. 간절히 살고 싶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죽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해망재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 by 해망재 2019.09.15
이나경 같이 온다 by 이나경 2019.09.15
괴이학회 올무가지 by 배명은 2019.09.15
지현상 고양이들이 우는 밤에 by 지현상 2019.09.01
赤魚 끝내 비명은 by 赤魚(김주영) 2019.09.01
괴이학회 타오르다 by 엄길윤 2019.09.01
노말시티 고양이는 야옹 하고 운다 2019.09.01
곽재식 이상한 안시객 이야기 2019.08.31
pilza2 2041 요정 이야기 -리라젤편- 2019.08.01
너울 카카오톡 시대의 사랑법 2019.08.01
노말시티 천둥 아이 2019.08.01
amrita 개천절 블루스1 2019.08.01
곽재식 가장 무서운 집 사건7 2019.07.31
pilza2 2041 요정 이야기 -현아편- 2019.07.01
이나경 누나 노릇 2019.07.01
너울 작명의 어려움2 2019.07.01
amrita 비내리는 2호선 2019.06.30
곽재식 멋쟁이 곽 상사6 2019.06.30
해망재 죽은 사람의 관 위에 열 여섯 사람 2019.06.01
이나경 16개월 동안 2019.06.01
Prev 1 2 3 4 5 6 7 8 9 10 ... 40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