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상실

2009.10.27 02:0410.27

오늘도 변함없이 초겨울의 추위는 건조한 도시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난 능숙한 몸짓으로 잔뜩 웅크린 채 넓은 찻길 옆에 외로이 놓여 진 벤치에 누워 구멍 난 신문지를 움켜쥐었다.
드문드문 검게 얼룩지고, 눅눅한 향기가나는 벤치였지만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처음엔 거북했던 신문지의 쾨쾨한 냄새와 벤치의 눅눅함이 섞여 나름 은은한 향기로 느껴졌다.
이곳에서 지낸지 며칠이 지났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과거,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였을 때, 난 내가 이런 비참한 생활을 반복하며 살 거라곤 꿈에서 조차 생각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예전엔 그렇게 낭만적이었던 도시의 밤하늘은 지금의 나에게 있어 그 특유의 우울한 로망이나, 어둠에 대한 본능적 호기심을 느끼게 해주는 감성적인 것이 아니었다. 검게 칠해진 먹물위로 소수의 빛나는 별들은 초겨울로 접어든 을씨년스런 도시의 적막감속에서 한낱 의미 없는 장식품에 불과해 보이기 시작했고, 자연을 향한 신비로운 동경, 아니 일말의 호기심조차 흐릿한 안개와 매캐한 매연으로 침체된 지 오래였다. 내 마음속엔 삶에 대한 희망이나, 긍정 또는 믿음이라는 추상적 세포들은 지독한 염세적 세포들로 물들여졌다.
한때 날 이렇게 만든 사회를 향해 소리쳐도 보았다. 있는 욕 없는 욕 다해가며 미친 듯이 울부짖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 오싹하리만큼 냉정한 사회에선 나란 존재는 그저 벌레만도 못한 패배자였다.
공부에 대해 그리 흥미를 갖지 않았던 나는 지방의 그저 그런 대학에 입학하고 지독한 실업난에 허덕이다 군대 제대 후 26살에 겨우겨우 작은 기업에 취직했다. 취직에 성공하자 난 마음속으로 난 행운아라고, 선택받은 사회의 구성원이라고 철없이 외쳐댔었다. 물론 얼마안가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약육강식의 사회, 그 속에 존재하는 경쟁구도는 내가 살아 숨 쉴 수 있는  곳이 되지 못했다. 잔인한 사회구조 속에 적응하지 못한 나에겐 터무니없는 구실로 인한 직장상사의 영양가 없는 잔소리도 속으로 욕 몇 마디를 중얼거리며 흘려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상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단어들이 나의 자존심을 짓밟으며 다가왔고, 동시에 목이 꽉 막혀와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더군다나 심한 어지러움에 퇴근을 하던 중 눈앞이 흐릿해지며 기절한 적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사회부적응이 극에 달한 나는 더 이상의 고통을 견뎌내지 못한 채 결국 회사를 나왔다. 회사를 나오자마자 느낀 감정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내 존재자체가 소멸되어가는 공허감. 그리고 그것을 한층 더 부각시켜주는 삭막한 도시의 풍경. 모든 것을 잃은 나의 마음과는 반대로 변함없는 도시의 모습은 내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어디를 가야하지? 문득 의문이 생겼다. 비어버린 머릿속을 헤치며 허망감을 달래줄 행선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얼마안가 그것이 헛된 짓이란 걸 깨달았다. 나를 위로해줄 곳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어느 것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에겐 어떠한 위로도 될 수 없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의 엔진소리와 회색의 건물을 베어가는 매서운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난 썩 유쾌하지 않은 회상 속을 더듬는 행위를 그만두고 삶의 권태와 존재의 이질성에 지쳐버린 몸을 벤치위에서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적당히 뒤척였다. 바람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오고 있다. 눈앞의 옅은 가로등 빛도, 그 위를 떠도는 작은 날벌레들도.......

길을 걷고 있다. 누구인가? 나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일 수도 있다. 꿈속을 걷는 자를 자각하는 것이 나이며, 그의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의 희미한 진동과 심장의 조그만 고동소리를 느낄 수 있는 게 나였기 때문이었다.
그와 나사이의 묘한 정체성의 모순 속에서 그는 어둠 속을 끊임없이 걷고 있었다. 어둠은 고요했고, 그는 침묵했다. 나의 의식은 꿈이라 인식되는 이 공간 주위를 계속해서 맴돌았지만 어둠과 그의 소름끼치는 정적은 그런 나의 의식을 말없이 짓누르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어느덧 느려지고 있었다. 동시에 무거운 정적을 유지하던 어둠이 내 의식을 해방하며 조금씩 분열해갔다.
어둠이 갈라진 틈에선 마음마저 따뜻하게 만드는 신비로운 빛이 흐르고 있었다. 옅은 회색으로 빛나는 그 빛은 걸음을 멈춘 그의 전신을 감싸고 조심스럽게 흔들거리며 이를 바라보던 나의 의식을 점차 알 수 없는 황홀경에 빠져들게 했다.
순수와 순결, 앳된 희망과 용기. 그리고 천진무구함이 꿈속을 더듬으며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빛. 그것은 마약과도 같은 쾌락과 탄생의 신비, 그리고 아이의 동심을 담은 구처럼 보였다. 그 순간, 빛으로 장악된 꿈속어딘가에서 그의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빛은 무엇이 두려운지 방금 전까지 아름답게 흐늘거리던 몸짓을 경직된 자세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가 나타났다. 눈동자는 비어있고 그의 주변은 빛조차 다가갈 엄두가나지 않는 공허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어있다. 빛이 사그라진다. 그리고 그 사그라진 빛의 뒤를 이어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빛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의 긴박한 심장소리가 울리듯 들려온다. 무언가를 향한 끝을 알 수 없는 갈망, 그리고 극에 달한 열정과 욕망이 그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붉은 빛. 그것은 농염한 자태로 그를 유혹하고 방황하게 만들고 있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피 눈물을 흘리고 있는 환상마저 보이게 만드는 강렬한 붉은 빛이 그의 눈을 넘어 팔과 다리, 몸 전체를 물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은 공허가 붉은 빛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열정이 사그라진다. 진한 욕망이 희석되어 사라지고 있다. 그의 눈은 다시 공허로 가득 찬다. 이제 순수한 회색의 빛도, 유혹적인 붉은 빛도 없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꿈은 어둠으로 채워지며 내 의식의 영역까지 검게 물들였다. 의식은 희미해지고, 그가 사라진다. 어둠이 흔들리고 꿈이 무너진다.
그리고 정적이 찾아왔다.

대략 오전 4시쯤 됐을까? 아직 거뭇거뭇한 하늘의 전경이 힘없이 뜬 두 눈에 놓여졌다. 잠들기 전까진 그나마 있던 조그만 별들이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새벽바람은 더욱 차갑게 변해있었다. 온몸이 추위로 인해 덜덜 떨려왔고, 단지 신문지 몇 장으로 추위를 막기엔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난 누워있던 벤치에서 일어나 자동차 한 대, 그 흔한 사람의 형체도 보이지 않는 텅 빈 도로를 따라 무력한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도로를 따라 비틀비틀 걸어갔다.
자줏빛 가로등 불빛은 여전히 허전한 도시를 비추고 있었다. 꺼질 듯 흔들거리는 빛이 위태로운 모습을 끈기 있게 유지하는 것을 보면 왠지 모르게 안쓰러운 느낌마저 들었지만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의지가 느껴졌기에 타락한 나의 의지로는 어떤 충고도, 있어 보이는 위로의 말도 건넬 맛이 나지 않았다. 사고를 할 수 없고, 감정도 없는 사물이며, 물리적 작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빛나는 가로등임에도 불구하고 난 추악한 내 자신을 가로등과 비교하고, 욕하며 열등감에 휩싸였다. 내 자신을 깎아내리는 행위였지만 현실이 그러하듯, 난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얼마쯤 걸어가니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거리 끝에 키 큰 나무 한그루가 보였다. 그쪽은 필시 작은 공원이 있는 곳. 6~7시 정도엔 간편한 추리닝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 차는 곳이다. 얼마 전에 난 그 시간대에 저곳을 간적이 있었다. 공원 한 가운데에 운동을 하고 목이마른 사람들을 위한 식수대가 설치되어있었기에 가끔 목이 마를 때면 갔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도착하니 역시 20대 후반에서 많게는  80대까지, 남녀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가벼운 조깅을 하고 있었다. 난 무덤덤하게 그들을 지나 식수대를 향해 걸어갔고 식수대에 도착하자 아무런 느낌 없이 물을 틀고 세차게 흘러나오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운동을 하고 있었고,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초라한 나를 향해 시선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한 상황이었지만, 나의 기분 탓이었는지 그들과 나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는듯했다. 그들은 활력이 있었고, 바다처럼 넘실거렸다. 의욕이 있었고 의지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이 경계하고 도는 중앙엔. 하나의 무인도가 있었다. 푸른 초목도 나지 않은 황량한 공간. 생명의 기운마저 시들어버린 그곳은 열정적인 색으로 도배된 그들의 바다와는 다르게 짙은 흑백으로 칠해져있었다.
무인도는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투명했고, 나약했다. 그리고 무른 땅덩어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적막감속으로 가라앉듯이 천천히 내려앉아가고 있었다.
바다는 그런 무인도를 보지 않았다. 아니 인식하지 않았다. 그 흔한 동정의 눈길도 없었다. 마치 백지처럼, 그곳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인도는 바다를 바라봤다. 그리고 동경했다. 그러나 침몰해갔다. 막을 순 없었다. 아니, 무인도 그 자체가 그럴만한 의지를 쥐고 있지 않았다. 당연한 원인의 당연한 결과. 무인도는 지금까지도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공원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은 없었다. 난 터벅터벅 식수대 쪽으로 걸어갔고, 물을 틀어 머리까지 띵하게 만드는 차가운 물을 들이켰다. 정신이 맑아지고 있었다. 흐릿하던 시야도 어느덧 또렷하게 변해갔다. 난 물을 다 마신 후, 뻣뻣한 몸을 왼쪽, 오른쪽 번갈아가며 틀어주고, 멍하니 공원을 둘러보았다. 이제 어디를 가야하지? 아, 끼니를 때워야지. 우선 먹을 걸 찾아야했다. 이 근처,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지하철역에 그들이 살고 있다. 나와 같은 자들, 침몰하는 섬.
난 그들이 싫었다. 그들은 나보다 더욱 깊은 심연을 향해 다가간 자들이며 도달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과 같이 있다 보면 나의 침몰이 더욱 빨라지는 것처럼 느껴졌고, 자아의 투명성은 더욱 짙어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언제나 그들 나름대로의 식량이 있었다. 구차한 구걸로 벌어들인 소량의 돈으로 구입한 요깃거리들. 그것을 얻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싫어도 그들에게 가야했다. 아직 나에겐 구걸할 용기조차 없기에.

지하철역 안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워낙에 바깥이 추웠기 때문일까? 지하철역 안에 들어서자마자 약간의 열기마저 느껴졌다.
난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들을 찾기 시작했다.
검은 때가 묻은 옷을 입은 사람들, 며칠 째 감지 않은 덥수룩한 머리와 지저분한 수염이 가득한 사람들. 그들을 찾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 오랜만이야, 젊은 친구.”
나를 향해 노란 이를 드러내 보이며 그들 중 한사람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의 이름은 모른다. 단지 그는 자기 자신을 박 씨라고 불러주길 원할 뿐.
내가 박 씨에게 다가가자 박 씨 이외의 사람들이 시야에 잡혔다. 그들은 지하철역 구석에 신문지를 깐 채 엎드려있거나 앉아있었다. 그중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빨간 화투를 가지고 10원짜리 판을 벌이며 놀고 있었고, 몇몇은 아직도 자고 있는지 가끔 흔들거리는 몸에선 작은 숨소리만 들려왔다.
“오랜만이긴요, 얼마 전에도 본거 같은데.”
이렇게 말한 난 그의 말에 자연스레 대답하며 옆에 놓인 오징어와 땅콩 몇 개를 손에 쥐었다.
“자네는 문제가 있어.”
그가 뜬금없이 말했지만, 난 그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며 딱딱한 건 과류를 씹어 삼켰다. 하지만 그런 나의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다른 사람들과 좀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지. 아무리 우리 같은 사람들 이라고 해도 많이 알아두면 나쁠 건 없어.”
이렇게 말한 박 씨는 자기에게 전혀 시선을 던지지 않는 나를 한번 조용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어둠에 쌓인 철도 구석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김 씨가 안보인지 5일째야.”
난 그의 축 늘어진 말투에 의아함을 느끼며 그에게 시선을 옮겨 입을 열었다.
“김 씨요?”
“그래. 그 키 작고, 어리벙벙하게 생긴 사람, 워낙에 마음씨가 착해서 다른 사람이 놀려도 뭐라 안하고 웃기만 했었는데.”
“뭐 안보일수도 있는 거죠.”
나의 툭 내뱉는 말에 박 씨는 생각에 빠진 듯 침묵을 유지하며 어둠만을 주시했다.
고작 한사람의 부재가 박 씨에겐 내가 모르는 어떤 의미가 있었던 걸까? 박 씨가 보이는 행동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요즘 노숙자들만 노리는 장기매매가 성행한다는 소문이 있어.”
“아.”
박 씨는 김 씨의 부재이유가 장기매매에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요.”
난 대충 손을 상하로 흔들어대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였지만, 박 씨는 여전히 심각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도 조심해.”

오전 7시. 텅 비어있던 도시에 조금씩 사람들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양복을 쫙 빼입은 중년남성, 교복을 차려입은 앳된 학생과 옅은 화장과 함께 한껏 멋을 부려 입은 젊은 여성.   그들은 하나같이 바쁜 얼굴을 한 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덧 아스팔트 위의 차들은 그 수량을 늘려갔고, 그 속에서 울리는 엔진소리는 더없이 커 가져갔다.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온 나는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일사불란한 아침의 풍경에 가벼운 현기증이 일어났다. 어서 여기를 벗어나야겠다. 지하철역이 아닌 곳으로, 공원이 아닌 곳으로,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난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주위의 사람들을 경계하며 되도록 구석진 곳을 향해 뛰다시피 걸어갔다. 그렇게 계속해서 걷다보니 회색 빌딩 숲 사이, 아침 해를 받지 못한 어두침침한 골목길이 눈에 띄었다. 난 그쪽으로 몸을 틀어 진한 화장품 향기가 나는 여성의 옆을 지나 어둠속으로 몸을 숨겼다.
골목길에 들어서니 아침의 태양이 내리쬐는 도시의 한복판보다는 훨씬 마음이 안정 되가는 게, 거북하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 골목길 안에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곳저곳 얼룩진 벽들이 즐비한 골목길은 쓰레기 썩는 냄새가 진동했지만 이미 그런 것에 익숙한 나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들어온 방향과 반대되는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내가 그쪽으로 점점 다가갈수록 들어왔던 입구 쪽에서 새어나오는 갖가지 소음이 줄어드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빛이 가까워졌다. 이제 몇 걸음만 걸어가면 된다. 그러면 저 소란스런 활력의 도시와 썩어가는 어둠속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발을 내딛을 수 있다.
툭.
무언가가 끊어진 소리가 들려왔다.
난 출구를 몇 발자국 둔 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환청이었나? 이번엔 몸을 아예 틀어 어느 새 조그마해진 입구를 주시했다. 달라진 건 없었다. 그저 처음과 같이 밝은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것 밖에는.
몸을 돌렸다. 사소한 것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어서, 어서 이곳을 나가 새로운 장소를 받아들여야했다.
그 순간.
툭.
이번엔 끊어지는 소리가 더욱더 선명히 내 뒤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난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터져 나오려는 호기심을 꾹꾹 누르며 이를 악물고 한 걸음을 내딛었다. 이제 두 발짝 거리.
뚜벅.
한 걸음을 다시 내딛었다.
툭.
끊어지는 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무시하며 느릿느릿 발을 내밀었다.
“......”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 내 몸은 반대편세계에 내놓아져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내가 걸어온 골목길은 그리 길지 않은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둠에 쌓여있었다. 불과 몇 걸음전만해도 들어온 입구가 훤히 보였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동안 멍하니 골목길을 바라보던 난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 다른 건 없었다. 골목길을 들어서기 전의 풍경처럼 회색의 건물이 이곳저곳 배치되어있었고, 검은 아스팔트의 길이 지상을 도배하다시피 깔려있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다르게 느껴진다. 뭐랄까, 결핍....... 이라고 해야 할까?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여기엔 없었다.
난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며 걸음을 옮겨갔다.
저 멀리 자동차가 단 한 대도 지나가지 않는 허무한 사거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엔 무언가가 쓰러져있다.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엔 너무 작았다. 그렇다고 종잇조각이나 비닐봉지 같은 잡다한 쓰레기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보기엔 그것은 볼륨감 있게 부풀어 올라있었다. 그것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니 동그란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먼저 눈에 뜨인 사실은 하얀색이란 것이었다. 구석구석 진갈색의 얼룩이 묻어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하얀색이 강하게 표현되어있었다. 그것과 나 사이가 더 가까워지자 비로소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개.
하얀 개였다.
차에 치인 걸까? 붉은 혀를 내밀고 싸늘히 식어있는 개는 어떠한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난 나도 모르게 개를 향해 조금 씩 다가갔다. 눈이 보인다. 초점이 없었다. 그저 깊은 공허가 그 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조용히 바라봤다. 그 개의 공허를, 빈 눈동자를.
“아.”
조그만 탄식이 나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결핍에 대한 순간적인 인식.
그랬다. 이 도시는 공허했다.
사람이 없었고, 움직임이 없었다. 건너오기전의 도시와는 다르게 오감마저 마비시키는 지독한 공허가 깔려있었다.
생명이 사라졌다. 활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원하던 세계였지만 막상 정면으로 대하고나니 왠지 모를 두려움이 앞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다. 숨이 거칠어졌고, 활력의 세계에서 느꼈던 현기증이 다시 한 번 되살아났다. 그러나 묘하게 다르다. 이곳에서 느끼는 고통과 그곳과의 고통은. 뭔가가 부족하고, 생소했다.
“저기요!”
불현 듯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늘고 높은 음성, 이것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난 깜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고, 나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짧은 단발의 여자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작은 얼굴에 붉은 입술, 약간 멍한 눈에 짧은 단발머리.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의 옷을 입은 여자에게선 성적인 매력보단 꿈속을 헤매는 듯, 몽환적인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따라와요.”
그녀가 나에게 손짓했다.
거부 할 수 없었다. 결핍의 도시에서, 생소한 두려움을 잊고 공허를 채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서일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난 어느새 그녀의 손을 붙잡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이끈 곳은 작은 술집이었다. 나무로 디자인해서 그런지 일반적인 술집의 퇴폐적인 느낌보단 마치 분위기 있는 카페에 온 듯, 아늑한 느낌이 드는 장소였다.  
지독한 술 냄새도 풍기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내 옆옆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두 남자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없어 아늑한 분위기가 깨질 거라는 염려는 없어보였다.
“이거 마셔보세요.”
그녀는 노란 액체가 담긴 유리컵을 한잔 건네며 씨익 웃어보였다.
난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컵을 받아들고는 한 모금 입에 물며 조용히 목뒤로 삼켰다. 칼칼한 액체의 느낌이 혀끝까지 타고 올라왔지만,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순간적인 불쾌함에서 벗어났다.
“나를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뭐죠?”
난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하였고 그런 나를 한번 흘끗 본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말하였다.
“왠지 그러고 싶었어요. 아니, 당신이 제발 날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랬어요.”
“무슨 뜻입니까?”
“아니, 기분 나빠 하지마세요, 그냥 제 느낌이 그렇다는 거니까요. 그래서 데려 온 거고.”
“이해가 안돼요, 보시다시피 전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당신에게 술값도 지불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의 이해가 안 간다는 말투에 그녀는 두 팔을 턱 밑으로 괴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조용히 말하였다.
“특별히 값을 바라고 데려 온건 아니에요. 당신도 생각이 있으면 그 정도는 유추해 낼 수 있을 텐데요.”
그녀의 톡 쏘는 말에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 했다. 그저 한 모금, 노란 액체를 들이키는 수밖엔.
“이곳은 어딘지 알아요?”
그녀가 화제를 바꿔 물어왔다.
“모르겠어요. 단지 공허하다는 것밖엔.”
난 그녀의 말에 덤덤히 대답하고는 노란 액체를 다시금 들이켰다.
“공허만이 아니에요. 이곳은 공허를 넘어 또 다른 공허가 자리 잡고 있어요.”
무슨 말이지?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공허를 넘어 또 다른 공허라니?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의 의미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희미해서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나는 약간 취기가 곁들어진 짜증스런 말투로 말하였고, 그녀는 “이해할 필요 없어요.” 라고 짧게 대답하며 나의 불평을 일축했다.
“그냥 당신이 원한 곳이라고 생각하세요. 이곳은 당신이 선택해서 걸어온 곳이고 종착점이니까.”
“종착점?”
“그래요, 종착점.”
종착점이라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가 끝이라는 겁니까?”
“끝이 아닌 끝이죠.”
“도대체 무슨 말을.......”
난 그녀의 흐지부지한 말에 울컥 화를 내며 말하려는 찰나.
“현실과의 끝, 새로운 시작으로의 출발.”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심장을 파고 들어왔다.
“그럼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겁니까?”
“그거야 모르죠. 당신은 애초부터 현실을 거부했으니까.”
그녀의 말이 긴장감으로 마비된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현실을 거부하다니. 그런 말 도안돼는.”
“이제 와서 변명해도 늦었어요. 당신은 이미 이곳에 있으니까.”
이렇게 말한 여자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구석으로 다가가 술 한 병을 손에 든 채 내 쪽으로 걸어왔다.
“한잔 더?”
난 어느새 비어버린 술잔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녀를 향해 시선을 옮겨갔다.
“아니, 그만하죠.”
이렇게 말한 나는 갑자기 불쾌한 느낌에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의 인사에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손에 든 병을 흔들어대며 비어버린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
난 그녀에게 시선을 떼고는 출입문을 열었고, 어느 익숙한 골목길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아까 내가 걸어왔던 곳이었다.
활력의 도시와 공허의 도시와의 경계.
내가 여자의 손에 붙들려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어째서 깨닫지 못했을까? 난 떨리는 몸으로 천천히 술집을 나와 골목길에 발을 내딛었다.
양 갈래로 놓인 길.
난 정확히 그 중앙에 서있었고,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자.
나의 검은 삶의 자취가 골목길을 가로질러 놓여있었다. 그러나 공허의 도시로 가까워질수록 끊어질 듯이 가늘고 위태롭던 그림자가 점점 격차를 벌이며 끊겨져 있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있다. 사지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견딜 수 없는 두려움에 눈앞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난 급히 끊어진 그림자를 향해 뛰어갔고 끊어진 부분을 잇기 위해 어설픈 동작으로 그림자를 움켜잡았다. 그러나 이미 너무나 벌어진 그림자의 격차는 그것을 매듭짓기엔 무리였고, 더 이상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방금 내가 나왔던 술집에서 두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찰나의 순간, 그 둘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미 늦었어.”
그들이 조용히 나직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자네도 조심해’
난 손에 쥐고 있던 그림자를 뿌리치고는 그들을 피해 공허의 도시 쪽으로 달려갔다. 잡히면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그저 살기위해,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삶의 의지가 가슴속에서 미친 듯이 터져 나왔고, 주체 할 수 없는 떨림에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빛이 보인다. 골목길을 빠져나왔고, 나를 뒤쫓아 오는 그들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져갔다. 그리고 난 공허의 도시로 돌아왔다.
난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를 쫓는 그들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난 멈출 수 없었다.
끔찍한 상실.
이제껏 난 나를 잃어갔다. 나를 버려갔다. 나를 인지하지 않았다. 내 존재를 거부했고, 알량한 자존심에 현재를 망각했다. 불우한 염세적 사상만을 되뇌며 살아갔고, 현실에 대한 부적응을 의지 없이 수긍했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변명했고, 자기합리화에 허우적거렸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난 계속 달렸다.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덧 사거리에 다다르자 하얀 물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 위에 버려진 동물.
공허의 도시에 낙오된 삶.
차에 치어 죽은 걸까? 아니, 내가 본 것이 정말 개였을까? 이미 모든 것을 왜곡했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확인해야겠다. 하얀 물체를. 그리고 벗어나야했다. 이 세계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부터.
숨이 차오른다. 그러나 하얀 물체를 향해 다가갈수록 난 알 수 없는 끌림에 체력이 한계에 도달했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안가 하얀 물체의 정체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개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그가 입은 누추해진 옷에서부터 며칠 째 씻지 않아 지독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에게 더 다가갔다. 그리고 얼마안가 그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니, 나를 볼 수 있었다.
붉은 혀가 입 밖으로 내밀어져 있다. 그리고 머리에선 걸쭉한 피가 검은색 아스팔트를 붉게 물들이며 흐르고 있었다.
뚜벅, 뚜벅, 뚜벅.
내 등 뒤로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한건했네.”
두 사람 중 통통하게 생긴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러게, 얜 좀 젊어서 장기도 비싸게 팔리겠어.”
이렇게 말한 두 남자는 멍하니 서있는 내 곁을 지나 나의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그 후 능숙한 솜씨로 시체를 들어 올리더니 어디선가 다가오는 차를 기다리고는 차가 가까이 다가와 멈추자 급히 트렁크를 열어 내 시체를 던져 넣었다.
“어서가자고.”
차 안에선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두 남자는 여자의 말이 명령이라도 되는 듯이 급히 차에 올라탔고, 이내 두 남자를 태운 차는 저 멀리 사라져갔다.
공허의 도시.
그곳엔 나의 의식이 남아있었다.
정적 속에서, 침묵 속에서.
그리고 상실 속에서.  


sunn8563@naver.com
댓글 4
  • No Profile
    안단테 09.10.31 14:03 댓글 수정 삭제
    그 유명한 88만원 세대를 연상시키는 주인공의 암울한 일상과 개란 인식이 실제로는 나의 시체였다는 사실로 이어지는 흐름이 인상적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한민호 09.11.01 21:17 댓글 수정 삭제
    우왁 짱잘쓰셨심 님이 최고인것가틈333
  • No Profile
    9crime 09.11.08 18:26 댓글 수정 삭제
    안단테 님 // 핫,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민호 // 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됨. 그리고 님도 글 좀 올려여.
  • No Profile
    한민호 09.11.08 18:42 댓글 수정 삭제
    글이야 백만개쯤 올려드리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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