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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경계 (Border)

2009.09.28 15:3709.28

이 길은 평소 다니지 않는 길이다.
길이 좁아서 지나가기 불편한 것도 있었지만 정작 사람들이 없는 이유는 악취 때문이다. 번화가에서 벗어난 한적한 동네. 그 안에서도 이 골목길은 산과 담벼락을 하나 두고 마주 닿아 있어 인적이 드물었다. 그 때문인지 사람들이 버린 온갖 쓰레기들이 가뜩이나 좁은 골목을 꽉 막힌 혈관처럼 답답하게 만들었다.

굳이 지저분한 길로 한참을 돌아가려는 이상한 녀석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택가 가운데로 시원하게 뚫린 길을 이용했다. 그래. 이 길은 비유하자면 죽은 길이 된 것이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어둡고 불쾌한 장소. 그런데 나는 어째서 그런 길을 택한 걸까?

손목을 들어 시간을 바라보았다. 오후 10시 24분.

“역시 이런 걸 보기엔 좀 이른 시간인데…”

전봇대에 등을 기대고 주저 않은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주정뱅이처럼 앉아 있었다. 얼핏 보면 술 취한 젊은 여자가 길거리에 쓰러져있는 느낌. 하지만 그건 아니다. 여자는 죽어 있었으니까. 가로등의 노란 불빛 아래로 붉은 피가 고여있다.

굳이 가까이 가서 살펴보지 않아도 살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시간을 머리 속에 담은 뒤, 천천히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

‘어째서, 나는 이 길을 택한 걸까?’

이건 후회의 목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감정. 희열-
그래. 이것은 분명 누군가가 내게 보낸 선물 같은 것이리라.

“아아. 정말 이 길로 오길 잘했어.”

나는 기쁨을 죽이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만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다시 한번 생각한다. 이건 꿈이 아니라고.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돋았다.

적성 검사를 할 때 가장 힘든 것은 취미를 적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음악이나 영화감상, 독서 같은 평범한 취미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결국 무엇을 적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사진감상이라고 적어 냈다. 물론 거짓말은 아니다. 나는 사진 감상을 정말 좋아하니까. 단 평범한 사진이 아닌, 죽은 시체의 사진이지만.

누군가는 역겨운 취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애당초 취미라는 게 뭔가? 자신이 순수하게 즐길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니야? 게다가 시체 사진을 본다고 해서 딱히 내가 살인자가 되겠다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누가 들어주지도 않는 이야기를 투덜거리며 전봇대 앞에 섰다. 한동안 다른 사람들이 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버려진 골목길. 이런 환상의 장소에서 실제 시체를 만났다. 이건 두 번 다시 없는 진귀한 경험이다. 나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머리 속에 담기 위해 신중히 여자를 살폈다.

체구를 보니 나이는 아직 어려 보인다. 나와 같은 고등학생? 아니, 중학생일지도 모르겠다.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입은 듯한 흰색 원피스는 나트륨등에 물들어 오렌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얼굴을 살펴보고 싶은데 고개가 푹 숙여진 채다. 왠지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아 꺼려졌지만, 그건 시체를 직접 본다는 호기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손을 감쌌다. 마치 검시관이 된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소녀의 이마를 들자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소녀의 입가에는 피에로처럼 붉은 피로 입이 길게 그려져 있다.

“피에로 …”

시체 사진을 모으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살인 사건이다. 매일 모든 신문과 일간지에 난 살인 기사를 스크랩하다 보면 어지간한 형사 뺨칠 정도로 많은 사건을 알게 된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피에로 살인 사건>. 희생자의 얼굴에 피에로의 얼굴을 그려 놓는다는 기괴한 연쇄살인이었다. 사건 현장이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주의 깊게 본 기억이 있었다. 아직 2건 밖에 일어나지 않았지만 희생자의 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독특한 퍼포먼스 때문인지 모든 언론이 이 사건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냥 시체가… 아니야.”

로또에 맞은 사람이 어떤 기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나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도무지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누군가 소리를 듣고 온다면 귀찮아질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소중한 기회를 그딴 일로 망칠 수는 없었다. 심장은 흥분으로 뜨거웠지만 머리 속은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언제까지 현장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들키기 전에 기록을 남겨야 한다. 이 아름다운 작품의 기록을…

나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희생자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소녀의 얼굴은 물론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피부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대고 정교하게 찍었다. 산에서 보물상자를 발견한 기분이 이럴까? 나는 보물상자에 금화를 주워담듯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소녀의 모든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소녀의 죽음이 고스란히 카메라 메모리로 옮겨갔다. 이 과정은 매우 신속하고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살인기사에서 본 다른 범인들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때는 경찰이 되기 위해 현장 감식도 공부한 몸이다. 물론 동기는 시체를 많이 보기 위해서였지만…

시체를 발견하자마자 이미 머리카락을 멀리서 한번 털어냈다. 시체를 만진 건 머리를 들어올린 것이 한번. 그것도 종이로 손을 감싸고 이마에 댔기 때문에 지문이라던가 얼굴에 흔적이 남아있을 우려는 없었다. 물론 바닥에 고인 피는 신중히 피했기에 시멘트로 뒤덮인 골목길에 발자국이 남을 우려도 없다. 그래도 나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혹시 남아있을지 모를 내 흔적을 지우기 위해 시체 주변의 바닥을 샅샅이 살폈다.

“뭐지?”

시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손톱크기의 플라스틱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주변이 어두운 탓에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한 걸까? 나는 바닥에 떨어진 조각을 주워 가로등에 비춰보았다. 손톱크기의 푸른색 플라스틱. 무엇인가의 파편 같았다. 이거… 어딘지 낯이 익다.

플라스틱을 뒤집어 보니 피가 묻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슥 닦아내니 음각으로 새겨진 영어가 보인다.

“KIM S…”

기억났다. 이건 명찰이다. 그것도 우리학교 명찰. 어째서 우리학교 명찰이 여기에 떨어져 있는 거지? 게다가 한쪽만 피가 묻어 있는 걸 보면 분명 사건 직후에 떨어진 것이었다. 혹시 나머지 조각이 떨어져 있나 주변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아쉽게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한쪽의 파편은 아무래도 쓰레기 더미 속에 파묻힌 것 같다.

명찰의 나머지 한 쪽을 찾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된 것 같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서둘러 골목을 빠져 나왔다. 흥분과 긴장으로 가슴이 계속해서 두근거렸다. 나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짜릿함을 느끼며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네모난 플라스틱 조각이 손 끝을 찔렀다. 입가에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보너스가 생겼네.”

나는 어둠에 잠긴 골목길을 벗어나며 혼자 키득거렸다.

* * *

“야! 어제 뭘 했길래 그렇게 꾸벅꾸벅 졸아?”

깜짝 놀라 깨어보니 태광이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다.

“아니. 그냥… 좀.”

“너 또 시체 사진 보다 잤냐?”

“야! 학교에선 말하지 말라니까.”

윤태광.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유일하게 사귄 친구다. 다른 친구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학교에서 유일하게 내 취미를 알고 있는 녀석이라 내게는 조금 각별하다. 중학생 때 실수로 내 취미가 알려져 1년간 호되게 고생한 후로는 누군가에게 내 취미를 말한 적 없다. 함께 공유할만한 취미도 아니고, 무엇보다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흐응. 뭐 그렇게 이상한 취미도 아닌데…”

살인기사를 스크랩하고 시체사진을 모으는 것이 취미라고 말했을 때 녀석의 반응이었다. 태광이는 체격도 좋고 얼굴도 잘생겨서 반에서 인기가 좋다. 성격도 느긋하고 어딘지 어른스러운 면이 있어서 친구도 많고… 따지고 보면 어두침침한 나와 겹치는 부분은 하나도 없다. 어떻게 2년 만에 이렇게 친한 사이가 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걸 말해야 하나…’

나는 교복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태광이를 창가 쪽으로 불렀다.

“잠깐 이리와 봐.”

“뭐야, 어디서 새로운 시체사진이라도 구한 거냐?”

참고로 말하자면 태광이는 시체사진을 보는 걸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태광이의 반응 자체가 ‘흐응~’ 이라던가 ‘그래?’ 라는 식의 다소 밋밋한 것들이 많아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도 많다. 이런 중립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어 친해진 거긴 하지만. 어쨌든 이 녀석은 적어도 다른 아이들처럼 내 취미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보면 깜짝 놀랄걸?”

다음 시간은 체육 시간이라 대부분의 아이들은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가 있었다. 나는 창가 쪽으로 몸을 돌리고 휴대폰 사진 폴더를 열어 태광이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흐응…”

역시나 속내를 알 수 없는 밋밋한 반응. 나는 조금 조바심이 나서 설명을 추가했다.

“피에로 살인사건이야.”

굳이 다른 설명은 필요 없었다. 태광이는 이미 머리를 굴려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있을 테니까. 내 예상이 맞았는지 녀석은 휴대폰 폴더를 덮고서 나를 마주보고 앉았다. 눈빛이 조금 진지해져 있다.

“어떻게 할거야?”

“음… 딱히 어떻게 할 생각은 없어. 경찰에 알린다고 해서 뭔가 바뀌는 것도 없을 테니까. 내가 범인을 본 것도 아니고… 나는 단지 사진을 얻은 것만으로 만족할 뿐이야.”

“…… 다행이네.”

“응? 뭐가?”

“범인하고 마주쳤으면 어쩔 뻔 했어? 아마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걸?”

“… 그렇네.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오싹해진다.”

순간 어두운 골목길 너머로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가 떠올랐다. 그 모습이 두렵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 얼굴이 너무 보고 궁금해졌다. 도대체 이런 살인을 저지르는 녀석은 어떻게 생겼을까? 살인자의 얼굴은 시체 사진을 보는 것보다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 참, 그리고 재미있는 게 있어.”

나는 태광이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이고서 어제 주운 명찰 조각을 꺼내 보였다.

“이게 뭐지?”

“사건 현장에서 주운 거야. 뭔지 알아보겠어?”

순간 태광이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자식, 역시 놀라는 군.

“명찰… 이잖아.”

“응. 우리학교 명찰. 희생자의 피가 굳기 전에 그 위에 떨어졌어. 뭐라고 생각해?”

태광이 잠시 침묵에 잠겼다.

“… 범인”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어째서 명찰이 그런 곳에 떨어져 있을까? 단순히 예전에 누군가 버리고 간 게 아닐까? 아니다. 그렇다면 명찰 전체가 피로 뒤덮여 있어야 했다. 한쪽 면에만 피가 묻어 있다는 건 피가 굳기 전에 그 위에 떨어진 것. 즉 희생자가 죽은 직후 그 자리에서 떨어트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좀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희생자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태광이 명찰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묻는다. 물론 그것도 이미 생각한 바였다.

“응. 보통은 그렇겠지. 그래서 오늘 학교 오기 전에 신문을 샅샅이 뒤져봤어. 역시 유명한 사건이라 바로 기사가 났더라고. 희생자는 화전여고 1학년. 우리 학교가 아니야.”

녹색으로 테두리가 그려진 플라스틱 명찰. 그건 우리 학교 고유의 이름표였다. 태광이는 명찰에 새겨진 글자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꽤 흥미를 느낀 표정이었다.

“그래서, 이 녀석을 찾아보자는 거지?”

“응. 궁금해서 어제 한숨도 못 잤어. 도대체 어떤 녀석이 그런 작품을 만드는 걸까 하고.”

“만약 찾으면 어떻게 하게?”

“아까도 말했지만, 뭔가 어떻게 할 생각은 없어. 단지 보고 싶을 뿐이야. 관찰하고 싶을 뿐이라고. 궁금하지 않아? 도대체 어떤 녀석인지…”

얼굴로 열기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조금 흥분해 있었다.

“재미있겠네.”

태광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어라? 나 이 녀석이 웃는 거 처음 본다. 2년이나 친구로 지내면서 웃는걸 처음 보다니… 이 녀석도 참 웃음에 인색한 것 같다. 그렇게 쉬는 시간이 끝났고 우리는 방과 후 옥상에서 남은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내 개인적인 취미가 다른 아이들에게 밝혀지는 것도 싫었지만, 무엇보다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다른 녀석들 때문에 망쳐질까 봐 걱정되어서 이 이야기는 철저하게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기로 했다.

오후 수업은 더디게 흘렀고, 하늘이 푸른 색에서 오렌지 빛으로 바뀔 무렵 나는 옥상에서 태광이를 기다렸다.

‘이 중에 있단 말이지…’

나는 운동장 아래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분주하게 돌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마치 개미 같다. 이 중에 내가 찾는 녀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살인자를 만나면, 난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어제 밤부터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단지 보고 싶다. 어떤 얼굴로 어떤 표정을 짓는지.

“오래 기다렸냐?”

태광이 노트를 들고 나타났다. 평소와 같은 흐느적거리는 몸짓에 나마저 의욕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몸짓과는 반대로 녀석의 눈빛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거 봐봐. 내가 대충 추려온 거야.”

태광이 펼쳐 보인 노트에는 여러 개의 이름이 쭉 써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는 이름도 보인다. 전부 우리 학교에 다니는 녀석들이다.

“명찰에 써져 있는 이름에 해당하는 아이들 명단이야. 다행히 그렇게 많지는 않더라.”

나는 주머니에서 명찰 조각을 꺼내 햇빛에 비춰보았다. 담녹색의 플라스틱이 반짝였다. 명찰에는 ‘KIM S’ 까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마 ‘김수한’이라든가 ‘김성진’ 같은 이름의 앞 글자일 게다. 태광이 적어온 이름은 전부 김씨 성의 S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의 것이었다.

“아 참, 그리고 이것 말인데…”

나는 명찰을 태광이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이 이름 부분… 글자체가 달라.”

태광이 자신의 명찰을 꺼내 비교해보자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태광이와 내 명찰의 글자는 고딕체로 되어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주워온 명찰 조각은 명조체로 이름이 적혀있었다.

“올해 교복회사가 바뀌었잖아.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아마 올해 들어온 신입생부터 글자체도 달라진 것 같아.”

태광은 가만히 두 개의 글자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해보지 않아도 돼. 네 말대로 글자체가 바뀌었다고 들었거든.”

“누구한테서?”

“양미리.”

양미리라면, 그 귀여운 1학년 녀석인가? 태광이 이 녀석!

“뭐야, 너 그 녀석하고 사귀는 거야?”

“… 이래서 말 안 할라고 했는데. 그냥 서클이 같으니까 가끔 이야기하는 거야.”

“쳇. 혼자 연애하기 없기다.”

“봐서.”

태광이의 말이 맞는다면 2,3학년은 일단 용의 선상에서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일이 좀 쉬워지겠는걸?

“그럼 일단 2,3학년을 빼보자.”

태광이가 볼펜을 꺼내 노트에 적힌 이름을 슥슥 지워가기 시작한다. 처음엔 한 페이지 정도 적혀 있는 이름들이 순식간에 몇 개로 압축되었다. 근데 이 녀석 어떻게 누가 몇 학년인지 알고 있는 걸까?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했지만 보나마나 ‘어쩌다 보니…’ 라든가, ‘그냥…’이라고 답할 것 같아서 관뒀다. 태광이는 가끔 남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에 있어 특출 난 능력을 발휘할 때가 많았으니까. 생물시간에 개구리 해부를 할 때도 거의 전문가수준으로 깔끔하게 끝내서 선생님의 극찬을 받은 적도 있고, 대입용 수학 문제를 능숙하게 풀기도 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서 조용한 반면, 녀석은 자신의 능력을 숨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아니야. 어쨌든 남은 건 단지 세명이네?”

“응… 그런데 이 세 명…”

태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전부 여학생이야.”

* * *

다음날 우리는 재빨리 점심을 먹고 도서실에 모였다. 흔히 도서실은 조용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점심 시간의 도서실은 관리하는 선생님이 없어 아이들의 수다로 시끌시끌했다.

“김사랑. 육상부에 덤으로 4반의 반장이고… 운동은 물론이고 머리도 좋아서 반에서 인기가 많아.”

노트에서 남은 이름은 전부 3개. 태광의 말대로 전부 1학년 여학생의 이름이었다. 어린 여자가 살인을 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리스트에 남은 세 사람을 하나하나 조사해보기로 했다. 그 첫 번째 대상은 1학년 4반 김사랑이었다. 김사랑이라면 나도 알고 있는 녀석이다. 1학년 입학식 때 반 대표로 나와 입학소감을 발표한 예쁘장한 여자아이였으니까. 아마 우리 학교에서 모르는 녀석이 없을 정도로 인기인일 게다.

“일단 프로필만 들어서는 리스트에서 지워도 괜찮을 것 같은데?”

태광의 말에 나는 반박했다.

“아니야. 이렇게 반듯한 녀석일수록 뭔가 비틀어진 게 있을지 몰라.”

“비틀어지다니?”

“아, 그건 그냥 살인자들의 이야기를 읽다가 생각해낸 거야. 맨 정신으로 간단히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해. 난 죽은 사람들의 사진을 좋아하지만 직접 내 손으로 시체를 만들 생각은 전혀 들지 않거든. 그건 도덕심일지도 모르고, 혹은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마음일지도 몰라. 살인은 일종의 자기파괴 행위이기도 하니까. 살인을 한다는 건 정상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거야.”

“흐응.”

태광은 언제나처럼 흐릿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인다. 공감하는 건지, 아니면 전혀 귀담아 듣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그런 녀석들은 뭐랄까. 인간으로서의 축이 뒤틀린 게 아닐까 생각해. 비정상하고는 달라. 틀렸다는 말보다는 다르다는 게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럼 어쨌든 김사랑은 일단 리스트에 남겨둘게.”

“아 참, 다른 두 아이의 프로필도 알아?”

“응. 세 명밖에 안돼서 미리 알아봐뒀지. 현재로서는 리스트 두 번째 적힌 김서진이라는 아이가 많이 수상해.”

“수상하다면 어떤 점이?”

“무서운 아이…라고 하더라고. 김서진도 김사랑과 같은 반이거든. 마침 미리도 4반이잖아. 그래서 두 사람에 대해서는 자세히 들을 수 있었지.”

“무섭다?”

“키도 크고 예쁜 아이라고 하는데, 영 말이 없나 봐. 보통 여자아이들이라면 억지로라도 그룹을 만들고 함께 지내려고 하는데, 얘는 영 친구 만들 생각이 없는 것 같데. 그냥 말수가 적은 게 아니라 누군가 다가오는 걸 거부하는 느낌이랄까. 이야기를 듣고 궁금해져서 4반을 찾아가봤거든. 직접 가서 보니 닮았더라.”

“누구하고?”

“너.”

순간 김서진이 어떤 아이인지 정확하게 그려졌다. 분명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유가 명백히 있을 것이다. 그것이 축이 뒤틀린 건지, 아니면 나와 같이 단지 어울리기 힘든 취미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어쩌면 살인자가 될 수도 있었을까?”

스스로에게 묻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대답은 태광이 대신해주었다.

“아니. 넌 절대 살인자가 될 수 없을 거야. 그건 내가 장담하지.”

“어떻게 알아?”

“그냥.”

태광이 다운 흐릿한 대답이었지만 그의 말에는 묘하게 신뢰가 갔다. 이런 게 친구겠지.

“얘는 어때?”

나는 리스트의 마지막에 적힌 김소연이라는 이름을 가리켰다. 태광은 한 쪽 눈을 찡긋 감더니 손가락으로 내 뒤편을 가리켰다. 태광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도서실 한쪽 구석에 얌전히 앉아 책장을 넘기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검은색 생머리를 양 갈래로 곱게 땋았다. 한눈에 봐도 얌전한 소녀 같은 이미지. 책을 읽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몰랐지만 자세히 보니 안경을 썼다. 도서부의 여자아이라면 아마 이런 느낌이겠지? 싶을 정도로 전형적인 얌전한 소녀의 얼굴이다.

“흐음. 아닌 것 같네.”

“그렇지?”

“하지만 아닌 것 같다는 건 이유가 안되니까. 섣불리 리스트에서 지울 수는 없어.”

“그건 나도 동감이야.”

태광이는 펜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나를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였다.

“참고로 셋 다 명찰은 잘 차고 있더라.”

“벌써 새로 샀겠지.”

뭔가 김이 팍 새는 느낌이었다. 누군가 명찰을 차고 있지 않았다면 그 녀석을 의심했을 텐데. 역시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으려나 보다.

“그럼 남은 건 직접 확인해보는 수 밖에 없겠네.”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노트를 접고 도서실을 나오려는 순간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돌려보니 소연이라는 아이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안가?”

옆에 있던 태광이 재촉하는 통에 시선이 흐트러졌다. 다시 소연을 바라보니 고개를 숙이고 책에 열중해 있다. 아까 느낀 시선은 뭐였지? 나는 그 시선에 담긴 의미를 곱씹으며 교실로 돌아왔다.

* * *

“선배예요? 나를 부른 게?”

태광이에게 모든걸 맡길 수는 없었기에 직접 만나는 건 나눠서 하기로 했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면 뭔가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역시 태광이 이외의 사람을 대하는 건 조금 벅찬 일이다.

“으…응.”

“뭐야. 선배가 불러놓고 부끄러워하기에요?”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가 싱긋 웃는다. 뒤로 길게 묶은 포니테일도 그렇고, 귀 밑으로 내려온 찰랑거리는 머리도 그렇고 정말 인형같이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런 밝고 건강한 소녀와 눈을 마주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소녀의 얼굴을 피해 시선을 아래로 돌리자 봉긋한 가슴위로 김사랑(KIM SA-RANG)이라는 명찰이 보인다.

“내 이름은…”

간신히 용기를 내서 이름을 말하려고 하는데, 사랑이 먼저 입을 연다.

“알아요. 태광 선배 친구죠?”

내 이름 따위는 알 필요 없는지 사랑은 짧게 손을 내젓고 말을 이었다.

“대충 이야기는 들었어요.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하면 될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한담.”

말은 비꼬고 있었지만 표정은 발그스레 상기되어 있었다. 잠깐,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태광 선배가 얼마 전부터 자꾸 제 얘기를 묻고 다닌다는 건 들었어요. 아이 참. 태광 선배정도면 그냥 말해도 OK했을 텐데. 이렇게 친구까지 보내다니.”

이 녀석.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싶었다. 하지만 말을 이어가기엔 좋은 찬스였다.

“뭐… 알고 있다면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네. 하하하.”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궁금한 걸 얼른 물었다.

“너 사흘 전 밤에, 혹시 대석동에 있었니?”

대석동이라면 우리 집이 있는 곳이다. 정확히는 그 날 시체를 만난 골목길이 있던 동네지만. 내 질문에 사랑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대석동? 그게 어디 있는 동네예요? 사흘 전이라면… 홍대 클럽에 간 날인데… 근데 그건 왜 물어요?”

“아니, 태광이가 우리 동네에서 너랑 닮은 애를 봤다고 해서. 그 녀석이 그렇게 보여도 엄청 질투도 많거든. 너랑 닮은 애가 다른 남자랑 지나가는 걸 본 모양이야.”

“헤에. 아직 고백도 안 했는데 질투하는 건가. 사흘전이라면 확실해요. 그 왜 뉴스에도 나온 사건 있잖아요. 그 피에로… 그날 클럽에서 놀고 나서 다음날 친구하고 그 사건 얘기하면서 완전 무섭다고 얘기한 기억이 있거든요.”

나는 그 사건이 대석동에서 난 사건이라는 걸 사랑이 생각해내기 전에 얼른 자리를 피했다. 사랑은 태광이 곧 자신에게 고백할 거란 생각에 잔뜩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 나중에 좀 곤란하겠지만 그쯤은 녀석이 잘 알아서 하겠지. 나는 김사랑의 이름을 노트에서 지웠다. 사랑의 친구들을 만나 알리바이를 확인해 보면 알겠지만 녀석은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쿵!”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달려 나온 사람과 머리를 부딪혔다. 애초에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던 내 잘못도 있었지만 앞도 안보고 뛰어들다니 이 녀석도 어지간히 덜렁거리나 보다. 노트를 주운 뒤 나와 부딪힌 상대를 보니, 공교롭게도 도서관에서 본 얌전한 소녀. 김소연이다.

“괜찮니?”

일단 쓰러진 아이는 일으켜줘야 할 것 같아 손을 내밀었다. 소연은 아직 정신이 없는지 어리둥절해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이 든 듯 ‘아앗’ 하고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나는 주변에 흩어진 책을 주워 소연에게 건네주었다. 살인자의 심리학, 우울과 몽상, 살인의 역사 등 전부 검은 표지의 특이한 책들이었다.

“앗!”

소연이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소연이 들고 있던 책도 그렇고, 지금 놀라는 모습도 조금 이상해 보였다. ‘혹시 이 녀석이?’ 라는 생각이 스물스물 기어올랐다.

“감사합니다.”

소연이 고개를 숙이자 양 갈래로 땋은 머리도 휙 하고 앞으로 넘어왔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스물스물 기어오른 의심이 조금씩 흐려져 간다. 아, 이런 감정에 넘어가면 안되는데.

순간 수업 종을 알리는 벨 소리가 들렸고 소연은 책을 안고 후다닥 교실 쪽으로 달려갔다. 소연에게도 사흘 전 밤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는데 지금은 무리인 듯 싶었다. 일단 계기가 생겼으니 다음엔 물어보기 편하겠지. 나는 그것을 작은 소득으로 삼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교실로 들어간 줄 알았던 소연의 목소리가 등뒤로 들려왔다.

“저기…”

고개를 돌려보니 소연이 책을 양손으로 안고서, 왠지 쭈뼛거리고 있었다. 뭔가 할말이 있는 눈치였다.

“뭐야. 수업 종 울렸는데 여기서 뭐하냐?”

태광이었다. 녀석도 어디선가 농땡이를 피다가 급히 교실로 들어가는 듯했다. 다시 소연을 바라봤더니 소연은 어느 샌가 교실 안으로 들어간 듯 보이지 않았다. 뭔가 할말이 있는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아니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교실로 돌아왔다.

* * *

주변의 친구들은 나와 태광이 친한걸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다. 어둡고 음침한 나와, 밝고 매력적인 태광이. 아무리 봐도 잘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어떻게 친해진 건지 궁금해한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직접 물어오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그 이유를 알려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건 내 비밀스런 취미와도 관련되어 있으니까.

먼저 말을 건 쪽은 태광이였다. 2학년에 올라오고도 친구 하나 없이 외톨이로 있던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뭐해?”

체육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힘이 남아도는 녀석들은 축구나 농구를 하고 나머지는 그냥 알아서 쉬는 중이었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나무 그늘에 앉았다. 물론 그늘에서 쉬려는 이유는 아니었다. 나무 주변에는 죽은 것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매미라든가 작은 새들의 시체를 찾고 있는데 태광이 말을 걸었다.

“나무 밑에 보물이라도 있는 거야?”

“찾고 있어.”

“보물을?”

같은 반의 태광이는 빛나는 존재였다. 아이들 틈에 서있어도 이상하게 눈에 띄는 아이. 게다가 뭔가 우쭐대려고 하지 않는 점이 좋았다. 오히려 자신의 특별함을 애써 감추려고 하는데도 그 빛이 새어 나와 친구들이 다가오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내가 음침하고 어두운 어둠이라면 녀석은 자가 발전하는 태양열 발전소 같았다.

“죽은 것들”

평소 같았으면 애초에 대꾸하지 않았거나, 대충 돌려서 얘기했을 텐데 나도 모르게 진심을 내뱉고 말았다.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지만… 어차피 황당해하면서 돌아갈 거란 생각이 들어 그냥 고개를 돌렸다.

“흐응. 그렇구나.”

부정도 긍정도 아닌, 애매한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내 취미를 듣고 이런 반응을 보인 건 그가 처음이었다. 그 후에 갑작스럽게 친해진 건 아니다. 태광이가 먼저 말을 걸고 나는 그 말에 거짓없이 답하는 게 한동안 반복 되었다. 어째서 이런 인기 있는 녀석이 나한테 관심을 갖는지는 궁금했지만, 일단 그가 싫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에게는 거짓없이 이야기하게 되었고 그것이 정말 즐거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솔직하게 취미를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1학기가 끝날 무렵 용기를 내서 시체 사진 한 장을 학교로 가져와서 보여줬다. 사진을 보여줬을 때의 반응은 처음 운동장에서 들었던 것과 같았다.

“흐응. 시체 사진이네.”

좋다든가, 나쁘다는 판단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를 이해해줄 뿐.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내가 태광과 친구가 된 가장 큰 이유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태광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그냥, 옛날 생각.”

“뭐야 영감같이. 그나저나 진도는 많이 나갔어?”

“김사랑은 만나봤는데 알리바이도 있고 의심도 전혀 들지 않더라. 같은 반의 김서진은 나중에 만나기로 했어.”

“이번에도 나랑 엮으려고?”

무덤덤한 녀석이지만 지난 번 김사랑에게 고백하는 것처럼 이야기한 탓에 제법 시달림을 받은 모양이었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는지 태광은 내 어깨를 툭 치고 돌아섰다.

“아 참, 도서실에서 봤던 소연이 말인데…”

“응? 그 애가 왜?”

나는 소연이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말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도서실에서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봤다던가, 교실 앞에서 뭔가 말하려다가 사라진 건 분명 의심 가는 일들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뭔가가 있다고 말하기엔 너무 사소한 일들이었다.

“아냐. 어쨌든 뭔가 알게 되면 너한테도 알려줄게.”

“싱겁기는. 참, 내일은 집에 일이 있어서 학교에 못나올 거야”

“일? 무슨 일인데?”

“그냥 집안 일이야. 어쨌든 큰 사고는 치지 말라고.”

태광이 손을 저으며 교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빈 운동장을 바라보다 가방을 챙겨 교실을 빠져 나왔다.

* * *

사고사한 시체와 살해당한 시체를 비교해보면 사고사한 쪽이 훨씬 더 처참하다. 신체의 일부가 없는 것은 보통이고 머리가 으깨지거나 내장이 튀어나오는 것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심한 경우는 인간의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형”되는 경우인데 자동차나 열차 사고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어쨌든 시체의 훼손 여부만 놓고 보면 사고사 쪽이 훨씬 임펙트가 있다. 하지만 살해당한 시체들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마치 검은 오라가 시체를 둘러싼듯한 섬뜩한 느낌…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얼굴에서 보인다. 지독한 공포와 증오로 일그러진 눈은 단순한 고통 이상의 끔찍한 무엇인가를 본 것이다. 그런 사진들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어떤 눈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지는 것이다. 어떤 녀석이길래, 사람을 이렇게 공포로 몰아넣어 찌르고 잘라내는 것일까? 나는 그 궁금증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다.

리스트에 남은 마지막 소녀, 김서진과 만나기로 한 건, 늦은 밤의 공원이었다. 딱히 으슥한 장소를 고르려고 한 건 아닌데, 그녀 쪽에서 이런 장소를 선택했다. 어째서 이런 장소를 고른 걸까? 조금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역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는 법. 나는 주머니에 든 명찰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기다렸다. 공원 맞은 편의 신호등이 빨간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긴 머리의 소녀가 머리를 찰랑거리며 공원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여기야.”

어색하게 손을 내밀며 그녀를 불렀다. 처음 그녀에게 뜬금없이 만나자고 했을 때 당연히 거절당할 것 같아 걱정했는데, 예상외로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다. 일이 너무 쉽게 진행되어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꺼낸 말을 집어 넣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네는 폼이 조금 어색하다.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 그리고 동양인형 같은 새까만 눈동자가 어우러져 그녀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미인이긴 하지만 왠지 어두운 구석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서… 괜찮아?”

시간은 오후 9시가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공원 곳곳에 가로등이 있었지만 그래도 빛보다는 어둠이 많아 음침함이 감돌았다. 개를 데리고 산책 하는 사람들과 벤치에 앉아 귓속말을 속삭이는 연인들이 간간이 보이기는 하지만 역시 고교생 두 명이 이야기 하기에는 조금 꺼려지는 장소인 듯 하다.

“이쪽으로 가면 제가 좋아하는 장소가 나와요.”

다분히 내성적 일거라 생각했던 그녀가 오히려 앞장서서 걷자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찰랑거리는 뒷머리를 따라 조금 걷다 보니 무지개 빛으로 빛나는 분수대가 나타났다.

“분수에서 쏘아 보내는 물에 불빛을 비춰 무지개처럼 만든 거래요.”

그녀가 일곱 색깔로 빛나는 분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공원 안에 이런 예쁜 장소가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한동안 넋을 놓고 분수대만 쳐다보았다. 분수대에서 튕긴 작은 물방울들이 기분 좋게 얼굴을 적셨다.

“선배가 먼저 말 걸어줘서 좋았어요.”

분수대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변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볼이 살짝 빨개진 것 같았다. 어라? 이 분위기… 뭐지?

“선배도 저쪽 사람이죠?”

난데 없는 그녀의 말에 순간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응? 저쪽 사람이라니?”

그녀는 자리에 앉아 가방을 무릎에 올리고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는, 이 세계에는 이쪽 사람과 저쪽 사람. 이렇게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쪽 사람은 우리가 흔히 보는 평범한 사람들. 마치 초식공룡처럼 가만히 누군가 주는 것을 받아 먹으며 한가하게 살아가고 있죠. 얼핏 보면 그들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건 단순히 생각이 없는 것뿐이에요.”

내가 묻고 싶은 것과는 조금 핀트가 어긋났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흥미를 느껴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그럼 저쪽 사람은?”

“저 쪽 사람은 전혀 달라요. 절대 일반인들과 섞일 수 없죠. 개중에는 억지로 일반인처럼 살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자신의 본질을 깨닫고 돌아올 수 밖에 없어요. 이쪽 사람들이 초식공룡이라면 저쪽 사람들은 육식공룡이에요. 그들은 이빨을 지녔으니까요.”

“이빨이라.”

그녀의 생각은 내 생각과도 많이 비슷했다. 나는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같은 인간이지만 전혀 다른 구조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보통 인간들은 갖고 있지 않은 특별한 것을 갖고 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빨”이 될 수도 있겠군. 그래… 모든 것을 물어 찢는 날카로운 이빨…

“음… 아쉽지만 난 저쪽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이빨을 떠올린 순간, 태광의 말이 떠올랐다. ‘너는 살인자가 될 수 없어.’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저쪽 사람이 아니라는 말에 그녀의 어깨가 쳐지는 것이 보였다. 뭔가 내게서 엄청난 말을 기대한 걸까? 그나 저나… 그녀의 이야기는 묘하게 어둡고 자기만의 망상에 빠져 있었다. 어쩌면… 이 녀석이?

“하지만 너는 이빨을 가졌다는 거야?”

나는 주변을 살짝 곁눈질해보았다. 가까운 벤치에 한 쌍의 연인이 있었다. 적어도 – 이곳에서 살해당할 위험은 없겠군.

“네. 아주 날카로운 이빨이 있어요. 하지만 이걸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빨이라… 언제 그걸 느끼는데?”

“그냥 자주요. 경멸이 담긴 시선을 볼 때, 아득한 증오가 가슴에서 조금씩 짙어져요. 순식간에 입에 커다란 이빨이 돋아난 느낌이 들고 그걸로 그들을 찢어놓고 싶거든요.”

아아… 그것이라면 알고 있다. 이 아이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그건 저쪽 사람이 아니라, 이쪽 사람이란 증거이기도 하다. 확실히 이 아이와 나 사이에는 교집합이 있다. 그녀는 아마 그걸 느끼고 나를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그건 나도 그래.”

내 동의에 그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진다. 이 아이는 죽음의 본질에 대해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많이 생각한 것뿐이다. 상상 속에서는 온갖 끔찍한 일을 저질러도 결코 도덕의 잣대를 넘지 않을 아이였다. 그것은 나와 완전히 같았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내 욕구의 일부분을 인정해줌으로써 그 스트레스를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이 아이는 자신의 어두운 욕망에 짓눌리면서도 그것을 해소할 “취미”를 아직 못 찾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저쪽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야. 그 쪽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두운… 축이 뒤틀린 사람들이니까.”

애초에 알리바이를 확인하려 했건만, 우리들은 그 후 전혀 다른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래 전 내가 고민했던 일들… 마음 속 어두운 생각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그 아이가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왠지 동질감이 생겨났다. 마치 여동생에게 삶의 요령을 가르쳐주듯,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나는 어두운 생각들을 다독일 수 있는 방법들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역시 선배는 저하고 같았어요!”

“뭐어… 그런 셈인가?”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눈도 초롱초롱한 것이 어째 아까 봤던 그 사람이 맞나 싶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입을 오물오물 거리더니 마침내 상상도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귀어주세요!”

뭐야. 어째서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러가는 거냐. 나는 바로 손사래를 쳤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그녀를 거절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사실… 그녀와 함께라면 나도 마음이 편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 닮아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쪽이 훨씬 좋을 테니까.

조금 흥분한 그녀를 간신히 다독이고, 일단 오늘은 돌려보내기로 했다.

“저기, 혹시 말이야. 지난 월요일 밤에 뭐했는지 기억나?”

“월요일이요? 흐음. 평소처럼 밤 거리를 돌아다니지 않았을까요?”

“밤 거리?”

“이 공원도 그렇고, 어둠에 물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게 취미거든요.”

이런 이런. 이 아이가 우리 동네에 살았더라면 분명 나 대신 시체를 발견했겠군. 나는 나와 비슷한 그녀에게 다시 한번 놀라며 작별을 나누었다. 그녀에게는 이빨이 없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는 그녀는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단지 취미가 조금 다를 뿐인… 하지만 여러 가지를 비교해봤을 때 가장 의심되는 사람인건 변함없었다. 일단 알리바이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이 생각은 다음날 아침 확실하게 틀렸음이 밝혀졌다. 그녀의 알리바이가 생긴 것이다. 바로 나로 인해서.

* * *

“피에로 살인, 4번째 희생자 발생.”

다음 날 아침, 신문과 뉴스에서는 피에로 살인의 4번째 희생자 얘기로 온통 도배가 되었다. 범행시간은 오후 10시. 그때 서진이는 나와 공원에서 함께 있었다. 이로 인해 그녀가 범인일 가능성은 제로가 되었다. 나는 안심이 되면서도 덩달아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지?’

그때 머리 속에 김소연이라는 이름이 지나갔다. 도서관의 얌전한 여자아이. 너무나 당연히 아닐 거란 생각에 나도 모르게 가볍게 넘겨버린 아이였다. 알리바이가 있는 김사랑과 어제 공원에서 만난 서진이는 이제 용의 선상에서 제외해도 된다. 그렇다면 남은 건 김소연, 한 명 뿐이다. 나는 서둘러 학교로 향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볼 수 있는 것이다. 진짜 살인마의 얼굴을.

급하게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실으려는데 신발장에서 쪽지 하나가 떨어졌다.

<옥상으로 오세요. 할 이야기가 있어요. 소연>

의심할 여지가 없는 소연의 메시지였다. 나는 쪽지를 쥐고 옥상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태광이를 데려갈까 했지만 오늘은 학교에 오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 옥상이라… 왠지 학교에서 살인을 저지른다면 옥상이 적합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김소연은 체구가 작으니, 칼을 들고 있더라도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은 내 유희에서 시작된 것이다. 굳이 파헤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을 단순히 내 호기심, 그 이유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 유희의 결과가 어떻게 끝나더라도, 나는 그 결과에 만족할 수 있다. 나는 계단을 오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계단이 5층에서 끝나고 옥상으로 향하는 철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급하게 계단을 올라온 탓인지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아니다, 이것은 몸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지나치게 흥분해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시체사진을 볼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생생한 흥분. 내가 그 시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스쳐갔다.

끼이익.

낡은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을 열자 밝은 햇살이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어둠 속에 있다가 빛으로 뛰어든 느낌이다. 찡그렸던 눈을 천천히 뜨자 주변의 사물이 또렷하게 보인다. 새 하얀 바닥과 철조망이 보인다. 옥상을 휘감는 바람은 언제나처럼 강렬하다. 그 바람 사이에 평소에는 느낄 수 없는 묘한 냄새가 베어있다.

‘피 비린내.’

“이런,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태광의 목소리였다. 어라… 어째서 이 녀석이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고개를 들어 태광을 바라보았다. 왠 일로 눈이 가늘게 휘어져 있었다.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태광의 어깨 뒤. 벽에 기댄 듯 앉아있는 여자아이. 소연이었다.

“흐음. 이 아이가 옥상에 온건 역시 너를 만나기 위해서였나? 아쉽지만 이미 늦었어. 어쨌든 이제 마지막을 완성할 참이니까 잠깐만 기다려줘.”

태광이 몸을 돌린다. 그리고 천천히 벽에 기대있는 소연에게 다가간다. 소연이 앉아있는 바닥은 어느새 새빨간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 없이 순수하게 과다출혈로 사람을 죽이는 것. 이것은 전형적인 피에로 살인의 방법이었다.

“처음엔 말이지. 어떻게 해야 하나 많이 고민했었어.”

태광은 중얼거리며 바닥에 고인 핏물을 손가락에 꾹 찍어 발랐다. 그리고서는 천천히 소연의 얼굴을 들어 그녀의 입가에 웃는 모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전시 목적의 살인이었으니까. 누가 발견해도 상관없었지만 네가 발견할 줄이야. 우연이라는 게 참 재미있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순간 주마등처럼 태광이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시체 사진을 보고도 전혀 비꼬거나 놀라지 않았던 건 그게 너무나 시시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건 정말 다행이었어. 명찰을 발견한 거 말이야. 네가 보여준 명찰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내 명찰도 아니고, 피해자의 명찰도 아닌… 제 3자의 명찰. 그건 누구의 것일까?”

아아.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장에 떨어져 있던 명찰은 범인의 것이 아닌… 제 3자의 것. 즉… 목격자의 것이었다.

“누군가 내 범행을 봤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찾아보기로 했지. 정말 내 얼굴을 봤다면 경찰에게 말하기 전에 어떻게든 찾아야 했거든. 근데 그 역할을 다행히 네가 맡아준 거지. 아무래도 혼자였다면 힘들었을 테고, 게다가 내가 나섰다면 나중에 의심 받을지도 몰랐어. 하지만 네가 나서준 덕분에…”

“모든 의심은 내게 돌려진다. 하지만 난 사건에 대해 알리바이를 갖고 있다… 는 건가.”

허탈하게 내뱉는 내 말을 듣고 태광이 씨익 웃는다. 이렇게 많이 웃다니. 오늘은 녀석에게 정말 즐거운 날인가보다.

“역시 똑똑한 녀석이네.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마음에 들었어. 그 모습이 흥미로웠거든. 어둠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빛 쪽에 서있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함이…”

소연은 이미 죽었다. 태광은 창백한 소연의 얼굴에 웃는 입을 완성하고 천천히 뒤돌아 섰다. 내가 그토록 기대했던 살인자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서 증오라던지, 어둠의 그림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평소의 태광이었다.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태광이 내게 다가와 얼굴을 슥 내민다. 그의 손에는 아직 죽은 소연의 피가 묻어 있었다.

“이게 살인자의 얼굴이야.”

씨익- 하고 태광이 이빨을 보이며 웃는다. 이빨… 태광에게는 이빨이 있었다. 어쩌면 나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알면서… 알면서 계속 함께 있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진짜 이빨이 없는 나는, 그렇게 녀석을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 * *

그렇게, 그 해 여름은 끝났다.
옥상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으로 학교는 여름 내내 난리가 났다. 경찰이 들이 닥치고, 기자들이 몰려들어 닥치는 대로 헤집고 다녔다. 애초에 경찰 수사는 핀트가 어긋나 있었고 용의선상에 학생은 아예 없었다. 선생들 중 몇 명이 경찰에 불려갔으나 금방 풀려났다.

죽은 소연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나는 태광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용의자가 됐다면 취조를 못 견디고 태광에 대해 밝혔을지도 모르지만, 태광의 용의주도한 계산 덕에 나는 초반에 한두 번 이름이 거론되었을 뿐 그 후 어떤 의심도 받지 않았다.

살인 사건이 있던 당일, 학교를 아예 나오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었기에 태광이 의심받는 일도 없었다. 몇 일 후 태광은 다른 학교로 전학 갔다. 끔찍한 살인사건이 있던 터라 꽤 많은 아이들이 학교를 떠났기에 그의 전학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치 폭풍처럼, 여름이 지나가고 어느새 학교는 정상을 되찾았다. 소연의 죽음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이슈였지만 그것은 피에로 살인사건의 하나로서 이야기될 뿐이었다. 결국 범인은 학교 밖의 누구였는데, 그가 학교 옥상을 대담하게 범행 장소로 골랐다는 식이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웃었지만 결코 내색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서진이와 사귀기 시작했다. 처음 공원에서 이야기했을 때만해도 너무 닮아서 오히려 걱정이 되는 느낌이었는데 막상 사귀고 보니 참 편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에게 취미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나만의 비밀이었고, 그 비밀에는 태광이의 이야기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진이와 함께 지내며 내게 이빨이 없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나는 진짜 살인자의 얼굴을 본 적 있다. 그것은 섬뜩하리만치 일상적인, 그러니까 애초에 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무감각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내가 절대 알 수 없는 뒤틀린 축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을 어렴풋이 본 것만으로도 나는 그와 내가 전혀 다른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거울을 통해 살펴본 내 얼굴에는 그 뒤틀림이 없었다. 나는 이빨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날, 옥상에서 태광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다. 두 번째 듣는 이야기였다.

“다행이야.”

하지만 그 뒷말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너를 죽이지 않게 되어서.”

그건 나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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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436 단편 승진과학 혁명14 김몽 2009.10.22 0
1435 단편 엽편) 긴 밤 DOSKHARAAS 2009.10.21 0
1434 단편 나방과 유화등4 안단테 2009.10.16 0
1433 단편 Bon Voyage, Monsieur Lupin! Mothman 2009.10.15 0
1432 단편 내가너를무심히바라본다 yzombie 2009.10.15 0
1431 단편 Gryphonman # 1 Mothman 2009.10.14 0
1430 단편 무림괴수 Mothman 2009.10.14 0
1429 단편 소원 cena 2009.10.04 0
1428 단편 우아한 생활인2 세이지 2009.10.02 0
단편 경계 (Border) 하로리 2009.09.28 0
1426 단편 Concept Black, Prologue LeftHander 2009.09.27 0
1425 단편 새와 태양, 거인, 그리고 용 Mr.Jones 2009.09.26 0
1424 단편 붉은 눈, 검은 혀4 박하 2009.09.17 0
1423 단편 그녀의 이름은 라돈1 Mothman 2009.09.15 0
1422 단편 그림자 숲. 고담 2009.09.10 0
1421 단편 손은 낚아챈다 메이 2009.09.09 0
1420 단편 소녀시대에게10 우상희 2009.09.09 0
1419 단편 기던 용4 호워프 2009.09.08 0
1418 단편 책도둑 냠냠 2009.09.06 0
1417 단편 발사통제관 역습의 김달삼 2009.09.0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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