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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손은 낚아챈다

2009.09.09 10:4609.09

 눈을 떴을 때 나는 철창에 갇힌 채였다. 철창 한 면에는 기다랗고 네모난 통이 단단하게 달렸고 통 아래쪽으로 동그랗고 작은 물체가 볼록 튀어나왔다. 그 옆으로 물통이 보였다. 최대한 몸을 웅크려도 낯선 자들과 부대낄 수밖에 없던 그곳에 비해 여기는 공간적으로 아늑했다. 서늘한 바닥 온도와 육중하게 내려앉은 공기에 묵직해진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손을 뻗어 쇠창살을 쥐었다. 쇠창살은 손이 겨우 드나들 만큼 촘촘했고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문은 자물쇠가 굳게 물린 채 입을 닫고 침묵했다. 나는 변함없이 탈출을 꿈꿀 수 없는 곳에 홀로 있었다.
 순간,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물러섰던 나는 천천히 소리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갇힌 철창과 조금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철창이 보였다. 그 철창도 내가 갇혀 있는 철창과 같은 구조였다. 거기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를 처음 본 건 이틀 전이었다. 그녀는 우리보다 먼저 잡혀왔고 그곳엔 그녀 말고도 몇몇이 더 있었다. 초췌한 얼굴에 얼룩진 눈물자국, 잔뜩 움츠러든 몸을 가진 그들은 공포에 떨었다. 시한폭탄 같은 긴장을 품은 그곳에서 그녀는 단연 돋보였다. 허름하게 말라버린 눈동자와 매끄럽게 굳은 표정을 한 그녀는 바르르 떨리는 양손으로 습관처럼 뺨을 긁어댔다. 잠시도 쉬지 않고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데 그녀의 말을 들은 동생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다 사라졌어. 죽을 거야, 모두.”
 나는 동생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철창 한편으로 물러나서 웅크리고 앉았다. 그녀가 뺨을 긁을 때마다 뺨에서 스멀거리며 음산함이 떨어져 내렸다. 동생의 눈물이 살 속으로 스며들었다. 눈물은 뜨거웠고 그 강렬한 온도는 지켜달라는 애원 같았다. 나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끝없이 말해 주었다. 우리는 꼭 끌어안은 채 밤을 지새웠고 날이 새도록 우리를 잡아온 자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그곳에서와 조금 달랐다. 온몸이 자유로운 나와 달리 그녀의 양손은 가죽 밴드가 감겼고 밴드에서 시작된 가는 줄이 네모난 통이 달린 철창 면으로 이어져 괴기했다. 뺨을 긁는 그녀의 손을 따라 긴 줄이 춤추듯 흔들렸다. 흔들리는 줄이 그녀의 그림자 위로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그림자는 줄에 꽁꽁 묶인 형상으로 변했다. 줄에 묶인 그녀의 그림자는 암울했다. 왜 그녀와 나만 이곳으로 옮겨진 걸까? 동생은 괜찮을까? 잔뜩 겁에 질린 채 나를 찾으며 계속 울 텐데. 그들이 동생을 위로해 줄까? 언니는 괜찮을 거라고 곧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줄까? 어쩌면 아무도 동생에게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시 시끄럽다고 윽박지르거나 때리지는 않을까? 그들과 맞서기에 동생은 너무 작고 어렸다. 당장 여기서 나가고 싶었다. 초조해서 가만히 서 있기 힘들었다. 내가 우왕좌왕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변함없이 뺨을 긁었다. 두 뺨이 벌게지도록 긁어대는 손동작과 경련하듯 떨리는 손, 중얼거리는 입술의 기계적인 움직임을 멍하게 보았다. 묘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모든 게 바뀌었는데, 동생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내 앞에 닥칠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오직 그녀의 행동만은 예측 가능했다. 그녀는 십분 뒤에도, 한 시간 뒤에도 중얼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뺨을 긁을 것이다.
 분명히.

 뺨을 긁던 그녀의 손이 얼어붙은 듯 멈췄다. 무언가의 기척을 느끼기라도 한 걸까? 나는 숨을 삼키며 긴장했다. 천천히 손을 내린 그녀가 좌우를 훑어 보더니 갑자기 정면으로 내달렸다. 앞으로 뛰어나가던 그녀의 몸이 튕기듯 뒤로 당겨지며 바닥에 뒹굴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나왔다.
 “괜, 괜찮아요?”
 벌떡 일어난 그녀는 가는 줄이 연결된 손목을 내려다보며 씩씩거렸다. 그녀는 줄을 힘껏 잡아당겨 끊어보려고 했지만, 줄은 생각보다 튼튼했다. 줄을 팽개친 그녀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뺨을 거의 찢어 낼 거 같이 긁어 내린 그녀는 줄이 연결된 철창 쪽으로 달라붙더니 쇠창살을 흔들며 괴성을 질렀다. 붉은 잇몸 사이로 하얀 이빨이 날카롭게 빛났다. 우리가 가진 몇 안 되는 무기 중 하나였다. 철창을 자지러지게 흔들며 풀어달라고 소리치던 그녀의 절규는 곧 거친 욕으로, 의미 없는 소리로 변해갔다.
 그녀의 행동은 내가 갇혔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나는 숨어서 지켜보는 꺼림칙한 시선을 느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어!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얕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몸을 꼿꼿이 펴려 했지만 나는 망연히 주저앉아 버렸다. 간신히 눈물을 삼켰다. 나를 감시하는 자에게 눈물까지 보이는 건 최악이다.
 그때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이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곧 저렇게 미칠까? 내가 미치고 나면 나는? 동생은 어떡하지? 나는, 도대체 나는? 미치지 않고 살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울음이 새어나왔다.

 얼마나 버틸까? 글쎄요, 한 하루 정도.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실소했다. 그는 여전히 물렀고 아직 감상적이었다. 철창에 달라붙어 소리지르는 미친 것과 주저앉아 우는 어린 것을 보며 나는 씩 웃었다. 내기할까? 내기요? 그래, 저기 우는 어린 게 얼마나 버티나. 나는 하루도 못 간다에 건다. 너는? 저는, 글쎄요. 하루는 갈 거 같은데요. 내기에서 지는 사람이 다음 걸 낚아채오기 어때? 네? 저, 저는 아직 잘 못하겠어요. 너도 이제 슬슬 혼자 해 볼 때가 됐어. 주저하지 말고 한 번에 휙 낚아채면 돼. 나는 그 앞에서 낚아채는 시범을 해 보였다. 허공을 움켜쥔 내 오른팔에 감긴 붕대를 쳐다보며 그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붕대에 고정된 시선에 기분이 나빠진 나는 재빨리 손을 내렸다. 꽉 다문 주먹에 힘을 주며 나는 철창을 노려보았다. 새파랗게 어린 게 감히 덤벼? 곧 철저하게 알게 될 것이다. 누가 위에 있는지.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있지 마, 다음은 동생이란 걸.

 지치지도 않는지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뺨을 긁었고 나는 철창 한가운데에 웅크리고 앉았다. 갈라 터진 땅바닥처럼 목이 말랐다. 껄끄러운 목구멍으로 침을 삼켰다. 입안에서는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처음 그곳에 갇히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달아날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머리가 터질 듯 복잡한데 동생은 배고프다면 보채기 바빴다. 다들 자기 몸만 챙기면 되는데 나만 동생 몫까지 걱정해야 했다. 도대체 이 상황에서 나한테 뭘 어쩌라는 걸까? 너만 배고픈 거 아니야. 좀 조용히 해! 쌀쌀한 내 대답에 주눅이 든 동생이 입을 다물었다. 동생이 입을 다물자 철창 안은 고요했다. 그러다 갑자기 주위가 술렁거리더니 한 남자가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싸늘한 표정의 남자가 철창 앞에 서자 일순 긴장이 흐르고 사방이 착 가라앉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불안과 두려움에 나도 몰래 동생을 꼭 끌어안았다. 찰싹 달라붙은 동생의 작은 손이 단단하게 내 몸을 붙잡는 게 느껴졌다. 철창 밖의 남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그는 차갑게 웃으며 철창문을 열고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저항할 틈도 없이 목덜미를 낚아챈 남자는 나를 철창 밖으로 끌어냈다. 동생과 나는 악착같이 서로 붙들었다. 남자는 동생을 떼어 내 철창 안으로 내동댕이치더니 철창문을 닫았다. 동생이 철창에 달라붙어 울었다. 나는 어떻게든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발버둥치다가 남자의 팔을 물어뜯었다. 비명을 지르던 남자는 무언가 날카로운 것을 내 몸에 찔러 넣었고 바로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 보니 여기였다.
 입 안에 감도는 남자의 피 맛이 내게 자신감을 주었다. 나는 지켜보는 시선을 맞받아치며 노려 보았다. 나는 손 놓고 당하지만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내가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갈라진 머리통을 봤어. 안이 텅 비어서 휑하더라. 킥킥. 다 사라졌어. 죽을 거야 모두.”
 그녀는 계속 저 말만 했다. 처음에는 등골이 서늘했지만 이제 지겨웠다.
 “닥쳐! 그냥 겁주려는 거야.”
 “갈라진 머리통을….”
 “시끄러워! 그래, 넌 그들과 한패야. 모두를 겁줘서 아무것도 못하게 하려는 거야. 난 안 죽어. 절대 안 죽어!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 않아 절대! 넌 네 뺨이나 긁으면서 죽어버려!”
 씩씩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그 뒤로 한참 욕을 퍼부었다. 그녀는 아랑곳없이 제 뺨만 긁어댔다. 한쪽 뺨에서 기어이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피를 보자 입속으로 비릿한 피 맛이 다시 퍼져 나갔다. 살점의 물컹한 감촉과 입 안으로 흘러들어오던 뜨거운 피의 끈적끈적한 느낌이 떠오르면서 구역질이 났다. 구역질을 참으며 나는 무언가 이상한 걸 탔을지도 몰라 마시지 않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빈속에 물이 들어가자 뭔가 씹어먹고 싶은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착실하게 배는 고팠다.
 기계처럼 움직이던 그녀가 기다란 통 쪽으로 다가갔다. 통 이쪽저쪽을 잠시 기웃하던 그녀는 원하는 걸 찾았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통 아래 튀어나온 작은 부분을 눌렀다. 그녀의 행동은 자연스러웠고 또 익숙해 보였다. 촤르륵 소리와 함께 먹을 게 통 속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허겁지겁 음식을 주워 먹었다. 음식을 씹는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파고들었다. 참을 수 없는 허기에 나는 통 쪽으로 다가가 불룩 튀어나온 부분을 눌러보았다. 통 쪽에서 촤르르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얻은 걸 나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나는 조금 들떴다. 뒤이어 음식이 나왔다. 나는 달려들어 그것을 움켜쥐었다. 한 입 베어 먹으려는 순간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라 손에 쥐었던 음식을 떨어뜨렸다. 고통에 찬 그녀가 온몸을 뒤틀면서 바닥 위를 뒹굴었다. 처참한 괴성과 기괴한 몸의 형상에 전신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얼어붙은 채 나는 신음을 흘렸다. 경련을 일으키던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그녀는 잠시 철창 밖 허공을 노려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집어들더니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억척스러운 그 태연함에 주저하던 나도 조심스럽게 음식을 집어들었다. 손에 든 걸 다 먹어치운 그녀는 다시 한 번 버튼을 눌렀고 먹을 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직 허기가 가시지 않았던 나도 버튼을 눌렀다. 통에서 먹을 게 떨어진 그 순간 처절한 비명이 다시 터져 나왔다. 온몸이 뒤틀린 그녀가 입에 든 걸 토해내며 바닥을 기었다. 숨을 헐떡이며 나는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주위를 살폈다. 그때였다. 그 줄이 보인 건.
 손목에서 뻗어나온 가는 줄은 그녀의 철창을 지나 내 버튼이 달린 근처 어딘가로 이어진 거 같았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그녀의 시선도 어느새 줄을 따라 내 버튼 쪽을 노려보았다. 우리는 확신했다. 내가 버튼을 누르면 무언가가 그녀에게 고통을 가한다는 사실을. 그녀와 나는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음식에서 물러선 그녀와 나는 서로 등을 돌린 채 앉았다. 그녀는 소리죽여 중얼거리며 피가 흐르는 뺨을 다시 긁었고 나는 떨리는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안으로 좀 더 안으로 웅크렸다.

 환한 빛에 눈이 부셨지만, 몸은 졸렸다. 밖은 아마 깊은 밤일 터였다. 아니 낮일지도 모른다. 여기 갇힌 이후로 점점 낮과 밤을 헤아리기 어려워졌다. 나를 지켜보는 눈을 떠올리자 잠이 오지 않았다. 허기로 가득 찬 배를 쓰다듬으며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봤다.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설사 방법이 있다 해도 남자가 나를 감시하는 한 탈출은 허무한 끝을 보게 될 게 분명했다. 옆 철창에 갇힌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는 자는지 조용했다. 우리가 죽어 없어지면 남자는 또 다른 이들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이어가겠지. 불현듯 그녀가 봤다는 모든 것이 진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웠다. 동생도 여기 갇히게 될까? 동생이 저쪽 철창에 갇히게 되면? 살갗 위로 소름이 번져갔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기댈 것은 조건 없는 친절뿐인 걸까? 가슴이 답답했다.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물건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긴장한 채 꼼짝 않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는 소리 같았다. 잠시 후, 미약하면서도 선명한 쩝쩝 소리가 들렸다. 아까 바닥에 떨어져 있던 음식물을 그녀가 조심스럽게 먹는 게 분명했다. 음식을 씹는 소리, 삼키는 소리가 너무 선명하게 들렸고 그녀가 먹는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먹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더는 참지 못하고 일어난 나는 바닥에서 음식을 찾아 먹기 시작했다. 내가 일어나자 잠시 긴장하던 그녀는 내가 음식을 먹는 걸 보더니 다시 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곁눈질하며 최후의 부스러기까지 깨끗하게 먹어 치웠다.

 하! 사흘이나 버틸 줄이야, 점점 흥미진진한데. 그러게요, 생각도 못 했어요. 그의 얼굴에 야릇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곧 새로 채워야 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정말이지 알기 쉬운 녀석이었다. 또 요? 당연하지. 그리고 다음은 네 차례인 거 알지? 그건 내기에서 진 사람이 하기로 한 거였잖아요. 둘 다 틀렸으니까…. 네 차례야! 더는 칭얼거리는 소리 따위 듣기 싫었다. 형편없는 반푼이, 한심한 녀석. 저런 녀석의 뒤를 봐주는 건 이제 지겨웠다. 네 차례야! 냉정하게 잘라버리는 날 보며 그는 웅얼거리던 입을 꽉 다물었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에 울화가 치미는데다 팔목의 상처가 아까부터 자꾸 욱신거렸다. 망할!

 그날 이후로 그녀와 나 사이에 생겨버린 뜻밖의 관계 때문에 우리는 싫든 좋든 서로 눈치를 살폈다. 벼랑 끝에 놓인 널빤지 위에 있는 꼴이었다. 섣불리 움직이면 누군가는 벼랑 아래로 추락한다. 추락하는 건 그녀일지 나일지 둘 다 일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원할 때 언제든 밥을 먹어도 된다. 하지만, 그녀가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 나도 허기를 참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내가 밥을 먹는 방법은 단 하나였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잘 알았다. 그녀는 내가 밥을 먹기 전에 먼저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도 나도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내가 물을 마시려고 통 쪽으로 다가갈 때마다 버튼을 누르는 게 아닌가 싶어 피딱지가 엉겨붙은 뺨을 긁어대던 그녀의 손이 멈칫했고 안 그래도 미친 듯 보이는 눈빛에 공포와 흥분이 더해졌다. 내가 물을 마시는 걸 확인하고서야 그녀는 다시 손을 움직였고 피딱지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상처가 덧나는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손을 움직이는 그녀의 시선, 잠시도 내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한참 전부터는 물도 마시지 않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느라 완전히 지쳤다. 박제된 듯 미동도 없는 상황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만이 까마득한 높이를 향해 한발 한발 전진해갔다.
 변하지 않는 상황이란 과거뿐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결국 변하려고 살아간다. 그녀도 예외는 아니다. 어느 순간 눈빛이 돌변한 그녀는 앞으로 내달려서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먹었다.
 그녀의 손이 움직이고 손안에 가득 든 음식이 입안으로 들어가서 바닥의 음식이 차근차근 줄어가는 동안 잘근잘근 씹는 소리에, 꼴딱꼴딱 음식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힘차게 움직이는 근육에, 뜨겁게 차오르는 뱃가죽은 달달하고 음식에 취한 온몸의 피가 활기차게 내달려서 다시 손이 움직이고 음식이 그녀의 입속으로 사라지면 내 입안 가득 고인 침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손등으로 입가의 침을 쓱 닦아내는 황홀하고 몽롱하며 꿈같은 어떤 달콤한 풍경 속에서 나는 목적지까지 정확하게 달려가서 입맛을 다시며 버튼을 눌렀다.  
 촤르르 - 비명, 촤르르 – 비명, 촤르르 – 비명.
 두 개의 소리가 쌍을 이루며 이어졌다.
 촤-,
 “아~~~~~~~~~~~!”
 철창이 부서져라 몸부림치며 소리지르는 그녀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나는 떨리는 양손 가득 음식물을 집어 들고 눈물이 흘러드는 입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맛있었다. 목구멍을 꽉 채워 누르며 넘어가는 터칠 듯 팽팽한 부피가 날 자극했다. 입안 가득 음식을 품고도 그 안으로 또 음식물을 밀어 넣었다. 그녀의 비명이 귓가를 후벼 팠다. 입안에서 음식과 공기가 뒤엉켜 제멋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사레들린 나는 입안의 음식물을 뱉어내며 켁켁거렸다. 눈물 위로 눈물이 흐르고 기침을 하면서 세차게 가슴을 쳤다. 간신히 숨을 돌린 순간 이번에는 속에서 먹은 것이 올라왔다. 나는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먹은 것을 거의 다 게워 냈을 즈음 고개를 든 나는 입에 거품을 문 채 정신을 잃어가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섬뜩하게 붉어진 그녀의 두 눈은 고통과 증오로 가득 차 나를 저주하는 듯했다. 마침내 그녀가 눈을 감았고 나는 더 뱉어낼 것이 없어진 뱃속에서 노란 신물을 연방 게워내며 정신을 잃었다.

 또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여전히 그 철창 안에 누워 있었다. 그 남자가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건지 다행히 몸이 가뿐했다. 충분히 몸을 움직일 수 있겠다 싶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옆 철창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가 어떻게 됐는지 확인할 생각은 더더욱 들지 않았다. 끔찍하게 울리던 그녀의 비명이 아직도 생생했다. 속이 다시 메스꺼웠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는 동안 몇 번이나 반대편 철창 쪽으로 기우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가 무사하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무사하긴 한 걸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동안 그 남자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왜 내 몸을 멀쩡하게 해 놓은 걸까? 알 수 없는 어떤 두려움이 떠올라 불안해 졌다. 문득문득 동생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치 자기를 잊으면 안 된다는 듯. 동생은 아직 무사할까? 그녀는 괜찮겠지? 나는 머리를 감싸쥐며 몸을 웅크렸다.
 “언니!”
 또 동생 목소리가 들렸다. 반대편 철창 쪽에서 내내 들리던 중얼거리는 음산한 목소리 대신 이제 동생의 환청이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중얼거리지 않는다? 그녀는 결코 중얼거리는 걸 멈추지 않는다. 그걸 그만두는 경우는 밥을 먹을 때와 잘 때뿐이었다. 그녀는 자는 거다. 분명히 자는 거야. 나는 삐걱거리는 괴물처럼 몸을 돌려 반대편 철창을 보았다. 제발 그녀가 거기 잠들어 있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거기 없었다. 그녀의 부재와 선명한 그녀의 비명이 내 머리를 휘어잡고 흔들었다. 그녀가 없다. 죽었을까, 내가 한 짓 때문에?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에 더해 익숙한 목소리가 난폭하게 전신을 두들겨 팼다.
 “언니!”
 “악-!”
 털썩 주저앉은 나는 눈을 의심했다. 왜 동생이 저기 있는 걸까? 나도 모르게 동생의 손목을 쳐다봤다. 가죽밴드가 동생의 가는 손목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내 버튼은 이제 동생과 같았다. 동생이 바로 버튼이다. 그 둘은 완벽하게 하나였다. 그 남자는 이걸 위해 날 살려둔 거였다.
 “빌어먹을 자식, 나와! 당장 나와!”
 “언‥언니?”
 불안에 잠긴 동생의 목소리가 흐느끼듯 나를 불렀다. 나는 쇠창살을 잡고 흔들었다. 발로 차고, 온몸으로 들이받았다가 다시 흔들었다. 철창은 뿌리부터 뒤흔들렸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나와! 죽여버릴 거야, 빌어먹을, 죽일 거야!”
 남자가 무서웠다. 남자는 거대했고 나는 기댈 것을 가지지 못했다.
 “죽일 거야.”
 내가 달아날 방법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옆에는 동생이 있다. 내가 뭘 해야 하는 걸까?
 “언니, 괜찮아?”
 물기에 젖은 동생의 목소리가 축축했다.
 “언니, 괜찮은 거지?”
 “응.”
 동생을 안심시키기에는 턱없이 빈약한 목소리였다. 동생은 쭈뼛쭈뼛 물러나 앉았다. 내 눈치를 보느라 한동안 조용하던 동생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기 언니.”
 “응?”
 “나 배고파.”
 소름이 끼쳤다.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동생이 들을세라 배를 힘껏 누르며 동생 쪽을 보았다. 다행히 동생은 듣지 못한 듯했다.
 나는 동생에게 버튼 사용법을 알려주었고 동생은 금방 버튼에 익숙해졌다. 동생은 양껏 배를 채웠고 내게도 먹으라고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동생은 내 불안한 마음을 눈치챈 건지 먹는 게 시원치 않았다. 먹으면서도 자꾸 내 쪽을 흘끔거렸다.
 지금도 동생은 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입안으로 음식을 가져갔다.
 “언니.”
 “왜?”
 “배 안 고파?”
 “응.”
 “진짜 안 고파?”
 “안 고프다잖아!”
 내가 소리치자 동생이 움찔했다. 동생의 입안에 든 음식물이 묵직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동생은 음식을 든 손을 철창 밖으로 삐죽 내밀었다. 죽을 힘을 다해 손을 뻗는다 해도 동생의 손에 닿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두 철창의 거리는 딱 적당히 멀었다. 척 보면 서로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다는 걸 알 텐데, 바보 같은 짓이다.
 “이거 좀 먹을래?”
 “싫어.”
 “난 배불러. 그러니까 나머진 언니가 먹어. 응?”
 “안 먹는다잖아.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동생이 손에 든 걸 떨어뜨렸다. 나는 며칠째 먹지도 만져보지도 못한 아까운 음식이 바닥으로 낙하하는 것 망연히 보았다. 바닥으로 내리깔았던 시선을 쳐들어 동생을 쏘아 보았다. 내 시선에 동생은 우물거리며 아무 말도 못했다. 나는 우물거리는 동생의 입을 얄밉게 쳐다봤다. 우물거리는 입, 오물거리며 음식을 씹던 입, 그 입, 혼자 배를 채우던 그 입을 꼭 누르면 입안에서 음식이 촤르르 떨어질 거 같았다. 맛있겠지.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동생도, 내 버튼도 보이지 않도록 돌아앉았다. 내가 그녀처럼 미쳐 가는 걸까? 나 때문에 비명을 지르던 그녀처럼 미친 나는 또다시 버튼을 눌러 이번에는 동생의 비명을 들으며 양손 가득 음식을 쥐어 들고 입속으로 밀어 넣을지도 몰랐다. 무언가가 언제 변할지 알지 못했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무섭고 두려웠다. 이제 나의 매 순간은 공포로 가득했다.

 오늘로 딱 사흘인데, 더 버틸까요? 먹지 않으면 죽는다. 당연하고 완벽한 논리. 식욕에 대한 본능을 그 무엇으로 누를 수 있을까? 타인에 대한 배려, 도덕, 윤리 같은 건 내가 안전할 때 펼 수 있는 논리다. 제한된 상황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강렬해서 사람을 변질시킨다. 상황을 쥔 것은 나고 선택은 먹느냐 먹지 않느냐 딱 두 가지뿐이다. 결국은 먹게 돼 있어! 네가 저 상황이면 어떨 거 같은데? 저, 저요? 내 질문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럴 테지. 자기라도 별수 없을 테니까. 며칠은 버티지 않을까요? 흥! 며칠이나? 뭐, 며칠은. 자신 없는 그의 말투는 듣다 보면 짜증이 난다. 뭐 하나 자신 있게 하는 게 없었다. 결국, 우리에서 저 동생 놈의 목을 낚아채온 것도 나였고 새로 우리를 채워 넣는 것도 항상 나였다. 형편없는 겁쟁이. 그래도 이번 건 꽤 흥미진진해, 안 그래? 아, 네! 다음이 기대돼. 저도 좀 그렇네요. 참, 다음은 진짜 네가 해. 그는 또 특유의 질린 표정으로 나를 본다. 이번엔 정말 네 차례야, 명심해!

 내 몸은 시든 풀잎처럼 바닥에 축 늘어져 더는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마치 내 몸이 아닌 듯 멀었고 눈앞도 흐릿해졌다. 옆 철창에서 동생이 칭얼거렸다. 나는 간신히 쥐어짜 낸 목소리로 동생에게 제발 밥을 먹으라고 부탁했다. 내가 아프다는 사실에 동생은 겁을 먹었다. 훌쩍거리며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하다가도 계속해서 내가 괜찮은지 물었다. 며칠을 굶은 동생의 목소리도 어느새 생기가 빠져나가 힘이 없었다. 이대로 내가 죽고 나면 다른 자가 이 철창 안에 들어온다. 그는 처음 하루 이틀쯤은 잘 참아낸다. 점차 허기에 지친다. 결국은 버튼을 누른다. 이것 말고 다른 결말이 있을 수 있을까? 몸이 약해진 동생은 단 한 번의 충격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겠지. 그때 버티기 위해서라도 지금 동생에게는 음식이 필요했다. 천장을 향해 누워 있던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어 동생을 향해 누었다. 흐릿한 눈에 동생의 그렁그렁한 얼굴이 어른거렸다. 우는 걸까?
 “밥을 먹…어.”
 버튼을 가리키던 낸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생은 고개를 저으며 훌쩍였다.
 “밥……, 먹…어.”
 그 남자는 지금 나와 동생을 비웃겠지. 무서움도 공포도 이젠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화가 났다. 남자한테 제대로 덤벼 보지도 못했고 동생을 지키지도 못했다. 그저 죽어갈 뿐이다. 남자에게 나와 똑같은 고통을 맛보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남자의 그림자도 보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분하고 억울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동생이 무슨 짓을 했기에, 그들에게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어서? 어느 때보다 흥미진진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어서 버튼을 눌러 배를 채우라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어서 해!’
 ‘싫어.’
 ‘딱 한 번이면 돼. 생각해봐, 음식을 씹는 그 느낌을.’
 ‘한… 번만?’
 ‘그래, 한 번! 정말 황홀할 거야.’
 세상이 온통 멀어지고 버튼만 보였다. 내게 걷을 기력이 남았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나는 버튼 앞에 섰다. 천천히 손을 뻗자 버튼의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 약간의 힘으로 누르기만 하면 음식은 이제 내 것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싸늘하게 미소 짓는다. 얼어붙은 듯 고요했다.
 버튼에 손이 빨려 들어가듯 달라붙고 내 시선과 남자의 시선과 동생의 시선이 버튼으로 겹쳐져서 이제 버튼은 두 개 세 개 네 개로 번지고 달아나는 표적을 낚아채듯 움직인 손의 흔적에 어지러워진 나는 서 있는지 주저앉았는지도 모르고 그녀의 비명인지 이명인지 모를 소리가 귓속을 내리쳐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된 채 남자의 웃음과 동생의 얼굴과 내 허기가 빙글 돌아 멀리 사라질 때 발작처럼 윙윙거리는 비명이 아득히 멀어지다가 어느 순간 빛도 소리도 움직임도 끊어졌다.

 동생 쪽의 목덜미를 움켜잡은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손안에 붙들린 동생은 안간힘을 다해 발버둥치며 소리질렀다.
 “거참, 시끄럽네. 단단히 좀 잡아!”
 “저도 그러고 싶은데요, 잘 안 되는 걸 어떡해요. 엄마야!”
 하마터면 그는 목덜미를 움켜쥔 손을 거의 놓을 뻔했다. 끝까지 칠칠찮은 행동에 화가 치밀었다. 철창문을 열고 그가 동생 쪽을 철창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가 한 번에 밀어 넣지 못한 탓에 그것이 입구에 찰싹 달라붙어 저항했다. 그가 입구를 닫지 못한 채 땀을 뻘뻘 흘리는 사이 철창에 갇혀 있던 다른 것들이 철창 밖으로 손을 뻗어 허우적거리며 고성을 질러댔다. 보다 못한 나는 축 늘어진 언니 쪽을 들고 작은 철창 쪽으로 가던 걸음을 돌려 그에게 다가갔다.
 “하여간에.”
 그는 바짝 긴장한 채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책임한 웃음이 역겨웠다. 철창 입구를 막은 것을 떼어내려고 손을 내민 순간 왼손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
 기절한 줄 알았던 품 안의 어린 것이 내 팔을 물어뜯다가 내가 고개를 숙이자 갑자기 솟구치더니 얼굴을 손톱으로 사정없이 긁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쌌다. 그가 소리를 질렀고 우리가 당황한 사이 철창에서 탈출한 그들이 다른 철창마저 전부 열어젖혔다. 몸 깊숙이 찌들었던 분노와 공포를 흥분으로 바꾼 그들이 달려들었고 우리는 도망쳤다. 쫓기던 우리는 두 개의 철창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등 뒤로 육박해오는 괴성을 들으며 우리는 각기 철창 안으로 도망쳤고 그 와중에 발이 꼬인 나는 철창 바닥에 머리를 찍었다. 그 뒤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철창 안에 누워 있었다. 온몸이 쑤시고 아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철창에 바짝 붙은 그들이 손을 뻗어 내 몸을 할퀴거나 물어뜯는 중이었다. 손들을 피해 재빨리 몸을 움츠렸다. 팔이 생각처럼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보니 한쪽 팔이 부러진 채였다. 넘어질 때 다친 모양이었다. 다른 한쪽 팔은 손가락에 가죽밴드가 끼워져 팔목 전체가 전선으로 칭칭 감겼다. 한 손은 묶였고 한 손은 부러지다니. 나는 꿈틀대며 간신히 철창 중앙으로 몸을 굴린 채 웅크렸다. 철창은 성인 남자가 들어가 자유롭게 움직이기에는 턱없이 작아 몸을 조금만 잘 못 움직여도 그들의 손아귀에 잡힐 판이었다. 나는 최대한 몸을 작게 구겨 넣었다.
 “깨셨어요?”
 심란한 목소리로 그가 말을 걸었다. 그는 나 못지않게 꾸깃꾸깃 접은 몸으로 그들의 손을 피했다. 기묘한 동지애가 느껴졌다. 아까 얼굴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흘러 엉겨붙었는지 눈을 뜨는 게 조금 불편했다.
 그와 나는 철창 안에 갇혔고 그들은 이제 밖에 있었다. 완전히 역전된 상황에 부러진 팔은 처량하게 흔들렸다. 몸 여기저기에서 피가 흘렀다. 내가 이런 꼴을 보게 될 줄은, 그것도 하필 저 녀석 앞에서 이런 망할 모습이라니, 상상도 못했다. 통증보다 구겨진 자존심이 더 강렬하게 몸을 때렸다.
 “이게 무슨 꼴이야!”
 “전부 제 탓은 아니잖아요.”
 “지금 네가 뭘 잘했다고?”
 “먼저 놓친 건 분명히 선배님입니다.”
 “네가 제대로 철창에 넣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어!”
 철창 주위를 맴돌던 한 녀석이 기어이 내 옷을 낚아챘다. 나는 기겁하며 옷을 잡아당겼다. 옷을 잡아당긴 것은 내 얼굴을 긁어 놓은 어린 것이었다. 아까까지 축 늘어져 있었는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두 개의 힘 사이에서 파르르 떨던 옷이 찢어졌다. 찢어진 옷조각을 든 어린 것이 분했는지 미친 듯이 철창을 흔들었다. 나는 침을 삼키며 철창이 내 생각보다 훨씬 튼튼하기를 바랐다.
 한 마리가 흥분하자 무리 전체가 사방을 휘젓고 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철창 밖에서 소리지르는 원숭이 무리는 의기양양했고 이빨은 날카로웠으며 눈에선 광기가 흘렀다.
 “선배님, 이제 어쩌죠.”
 “왜 나한테 물어?”
 “에이 씨, 오늘 아침도 못 먹고 나왔는데.”
 순간 등줄기가 오싹했다. 나는 철창의 버튼을 곁눈질했다.
 “잘났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못 기세등등하게 그를 타박했다. 그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구시렁거렸다.
 “옆 실험실은 다들 휴가 가서 다음 주에나 출근할 텐데, 어쩌죠?”
 “왜 자꾸 나한테 물어?!”
 “그럼 어떡해요!”
 “나도 몰라!”
 그와 나 사이에 한동안 설전이 오갔다. 시곗바늘이 어느새 자정을 가리킬 무렵, 순찰하던 경비원이 소등을 했는지 실험실의 전등이 꺼졌다. 광대한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원숭이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며 우리를 응시했다. 한껏 웅크린 몸 안에서 슬금슬금 허기가 고개를 들었다. 버튼으로 향하는 그의 시선을 보며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지금 그는 얼마만큼 배가 고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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