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그녀의 이름은 라돈

2009.09.15 22:3709.15

내가 왜 너를 여기에 데리고 왔는지 궁금하리라 믿어.
이 자리 보이지? 여기는 이 시간 보호군이라는 곳에 처음 입대할 때부터 같이 지내온 내 친우 중의 친우가 매일 매일 앉던 지정석이야.
어떤 골 빈 놈이 멋모르고 앉았다가 죽도록 맞았으니까 알아서 조심해.
뭐? 앉는 녀석이 예쁜 여자일 경우에는 어떻게 하냐고? 흠, 그럴 때에는 신사적으로, 그러니까 부드러운 대화로 해결해야지.
음, 이야기가 빗나간 것 같군, 내가 너를 이 술집에 끌고 온 이유는 한 가지야.
내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지.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진정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
누가 그랬지. 누군가에게 마음에 든 이야기를 쏟아낼 때에는 항상 시작 부분을 말하기는 쉽다고. 뭐, 나한테도 그래.
우리 둘은 꽤나 힘겨웠던 러시아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여기에 왔었어.
분명 적백 내전과 관련한 문제였는데...여기서 그건 중요한 문제는 아니로군.
하여간 우리들은 늘 하던 대로 좋아하는 음악을 술집 내부에 빠방하게 틀고 로봇 바텐더한테 술을 주문했지.
아, 잠깐! 맞아. 내가 중요한 사실을 빼먹었군. 그 친구는 분명 그 날 중위 진급을 통보받았어.
그리고 어느새 피로를 불기 위한 우리 둘만의 술자리는 동료들과 벌이는 시끌벅적한 파티로 변해버렸지.
아, 지금도 생각나는 흥겨운 순간이었지.
어디 보자, 처음 시작은 분명 알더튼 소위의 우렁찬 외침에 모두가 환호성에 가까운 구호를 동시에 내지르는 것으로 시작했었군.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그 녀석은 쑥스러워할 뿐이었고.
흠, 내가 기억하기로 그 녀석을 제외하고도 총 12명이 좁은 술집에 모여서 파티를 열고 있었어.
전세 낸 것도 아닌지라 몇몇 녀석들이 자못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우리들을 바라보다가 그 추태에 질려 도망치기도 했고.
이미 거나하게 취한 알롱 디모아라 육군 대위가 껄껄 웃으며 한스 중위의 뒤통수를 연신 내려쳤지.

“난 자네가! 꺽~ 흠! 이렇게 빨리 성장할 줄 예상하고 있었지! 1256년의 사하라 전투에서 자네는 육군을 위해! 꺼억~ 흠! 우리 위대한 보병대를 위해 대단한 활약을 펼쳤지! 껄껄껄!”

흐음, 자세히는 기억 안 나지만 분명 이런 내용이었을 거야. 나의 친구는 녀석 답게 손을 내저으며 겸손을 표시했고.
참 착한 녀석이었지. 뭐? 지금 내가 우냐고?
제기랄, 그냥 먼지가 들어갔을 뿐이야. 청소 좀 제대로 할 것이지!
하여간 각 군에 포진해있는 그의 절친한 친구 및 선배와 후배들이 앞 다투어 녀석에 대해 개인 견해를 전개해나갔어.
다시는 찾아오지 못할 그 순간은 정말 즐거웠지.
부글거리는 온갖 유쾌한 감정의 도가니 속에서 녀석은 조금은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어.
불행이 통상적으로 그러한 사소한 일로 시작된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만약 녀석이 한숨을 안 내쉬었더라면!
이미 일어난 일이니 후회해도 소용은 없겠지. 어쨌거나 녀석은 한숨에 대한 대가로 독한 증류주(이름을 알 수 없으며 출신 시간대조차 모르는!)를 한 컵 선사받았지.
나는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낄낄 댔고.

“고생이 심하군, 친구!”

녀석 역시 유쾌하게 받아쳤지만 취한 기색이 역력해보였어. 그 때 말렸어야 했건만.

“뭘 이정도 가지고! 친구!”

녀석은 그 컵을 그대로 원 샷 했어. 그리고 곧바로 정신을 잃고는 책상에 코를 박고 실신한 것처럼 잠에 취해버렸지.
주인공이 기절해버리자 어느새 파티도 대강대강 마무리됐어. 오직 나만이 거의 혼수상태로 잠든 친구를 옆에서 지켜주었지.
마침내 그 친구가 깨어났을 때 몽롱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더군.
여전히 새빨개진 얼굴로, 머리가 깨질 것 같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면서.

“으음....내가 잠들었었나?”

녀석이 이마를 문지르면서 묻자 나는 차가운 소다수 한 잔을 건네주면서 싱긋 웃었지.

“물론. 후후후, 한 모금 넘기는 순간 바로 나뒹굴어지더군. 크크크. 정말 장관이었어. 아! 그 장면을 영상으로 영구 보존했어야 되는데!”

아마 녀석은 음험하게 낄낄대는 내 모습을 한심하단 표정으로 쳐다보았던 같아. 뭐, 그렇다고 정말 한심하단 표정은 아니었어.
우리들은 어지럽혀진 자리를 대충 정리했고 다시 달콤한 과실주로 몇 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지.

“다른 사람들은?”

“아, 모두들 자기네 숙소로 돌아갔어. 자네가 쓰러지고 난 후에 파티가 마무리됐거든.”

녀석은 흠하는 신음성과 함께 자신의 손목시계를 살펴보았지. 나도 시간관념을 까먹고 있다가 보자니 벌써 새벽 3시 35분이었어.
맙소사! 나조차도 경악을 감추지 못했지.
9시에 파티를 시작해서 9시 반 즈음에 자신이 기절했는데 새벽 3시 35분이라니!
그 때에 조금씩 들던 잠도 싹 달아났더랬지.
우리들은 서로 머리를 긁으며 달콤한 과실주로 찝찝한 입을 달래며 아예 밤을 새우기로 결의했어.
만약 그 때 우리 둘 다 그냥 자러 들어갔다면....
내가 적당한 안주를 새로 들고 왔을 때였어. 잔잔한 멜로디와 함께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분명 그 때였어.
아, 그 저주받을 년!
밤늦게 누군가 싶어 바라보니 이지적 외모를 갖춘 장신의 여성이었지.
일단 여기서는 여성이라고 말해야겠군. 뭐, 머리만 빼면 분명 아름다운 모델 같은 모습이었거든. 한 가지 머리가 도마뱀 대가리 비슷한 파충류의 모습이었다는 것이 흠이지만.
하하하, 맞아! 흠 정도가 아니지.
뭐, 우리들은 그렇게 놀라지 않았어. 일개 개인이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는 하나의 시공간선에서 이 지구라는 행성에 오직 우리들 인류만이 산 것도 아니라는 것쯤이야 우리 시간 보호군의 일원이라면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지 않아?
맞아, 우리는 시공을 초월한 영원의 군사조직에 복무하고 있어. 영광인지 저주인지!
하여간 광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 인간만이 지구의 지배자인 시간대가 영원히 지속되리라 생각하는 멍청이는 신참들을 빼면 아무도 없지.
아, 그러고 보니 너도 신참이었군. 그렇다고 너가 멍청이란 소리는 아니고.
젠장,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다시 이야기에 집중해야겠군. 그러니까 우리들 앞에 나타난 지성을 가진 인간형 도마뱀은 말하는 고양이에, 기계들이 지배하는 세계랑 비교하면 그럭저럭 준수한 수준이었어.
그리고 우리랑은 분명 다른 이질적 생물이 시간 보호군의 군복을 입고 나타났다고 놀라 자빠질 것도 당연히 아니고. 우리들이 속한 시간 보호군에는 평범한 인류 말고도 다양한 시공간대에서 온 녀석들이 여기저기서 복무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그 망할 년처럼!
하여간 그녀는 자로 잰 듯한 발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어. 그 움직임이 아직도 눈에 선하군.
그 다음은 나도 예상 못한 일이었는데....
갑자기 내 친구를 덥석 끌어안으면서 보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혀로 얼굴을 날름날름 햩기 시작한 거야!
나는 이런 미친 도마뱀 년을 봤나하는 심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녀석은 놀라기는 했지만 곤란하다는 표정만 한 채 바보같이 앉아 있을 뿐이었지.
약간의 소동과 해명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린 그녀에 대해 보다 상세한 정보를 알 수 있었어.
이름은...뭐, 어차피 나로선 발음도 어려우니 그냥 라돈으로 하지.
내 친구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던 과거에 그녀가 훈련병 시절 우연히 사고를 당했다가 구해졌다고 그녀가 미소와 함께 설명했지만 친구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지.
나중에 알아보니 훈련용 전투 기계의 원인 모를 폭주 사건이었어.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훈련병들이 갑자기 습격을 당했으니 위험하긴 위험한 상황이었다고 하더군.
가장 먼저 사태를 파악한 나의 친구는 자기의 목숨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어떻게든 전투 기계들의 포위망을 간신히 뚫고 들어가 몇 번에 걸쳐 훈련병 녀석들을 탈출시켜줬지.
아무도 안 읽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군 잡지에도 실렸는데 찾아서 읽어보니 완전히 영화에나 나올 법한 스토리더군.
어쨌거나 그 처참한 사태에 그 도마뱀 여자 역시 끼어 있었더군. 웃기는 것이 그 때는 훈련병이었는데 우리들 앞에 나타나 친구에게 부비부비 할 때에는 이제 곧 제대를 앞둔, 그 녀석보다 높은 계급이었다는 거지.
이게 바로 시간의 장난질이자 묘미인 거야. 하하하.
뭐, 하여간 그 때 내 친구의 영웅적 활약을 눈앞에서 목도한 그녀가 한 눈에 반했다고, 지금까지 찾느라고 아주 고생했다고 눈물 비슷한 액체를 그 뱀 같은 눈에서 흘리며 말했지.
글쎄, 내 생각에는 처음에는 그저 목숨을 구해줬다는 흥분에 따른 일시적 감정, 그러니까 동경의 감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종족 특유의 마음과 맞물려 사랑으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싶어.
흠, 얼굴을 보아하니 아직도 이해가 안 가나보군. 그러니까 그 여자가 내 친구에게 아주 뜨거우면서 지극히 순애보적인 사랑에 빠진 거야.
한 번 보고 반했다고 다시 만날 때까지 계속 사랑의 감정을 품다니 원. 정말 무서울 정도의 집념이지. 역시 파충류 조상에서 물려받은 것인가?
하하, 이제야 이해를 했나보군!
맞아! 도마뱀과 포유류 사이의, 종을 초월한 사랑을 나는 지금 말하고 있는 거야!
뭐,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야. 비슷한 케이스를 말하자면 늙은 상사를 사모해서 불륜을 저지르는 여성 OL이라고 할까나. 외모는 그렇게 중요하게 보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게 사실이야. 사람의 외모에 상관하지 않고 그 내면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그리고 거기에 반해 평생을 함께하는 녀석들도 있는 것은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내 멍청한 친구 녀석은 한 번 친구로 지내보자고 했더군!
그 말이 떨어졌을 때 그 망할 년의 끔찍한 눈을 쳐다봤어야 하는데! 마치 먹이를 노리는 것 같은 파충류 특유의 차가운 동공이 움직이는 그 모습을!
그녀와 나의 친구는 자주 붙어 다녔지. 그 때부터였던가? 하여간 어느 순간부터 내 친구는 패션 용도임에 틀림없는 안경을 쓰고 다녔고.
자주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잘 지냈나보더군.
겉모습과는 다르게 서로 간의 상성이라던가 취미도 잘 맞고.
종종 임무도 같이 하면서 그들의 사이는 돈독해지기 시작했지.
물론 신체적 차이로 인한 트러블이 있기는 했어. 그 년은 우리들의 음식을 잘 먹지 못하더군. 분명 그 재료 자체에는 별 다른 차이점이 없을 텐데.
뭐,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리고 너도 예상했다시피 그 여자가 즐겨먹는 음식은 우리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노릇이지.
물론 굶어죽기 직전의 상황이라면 맛이고 나발이고 배를 채우기 위해 먹기야 하겠지만 그런 상황도 아닌데 그 망할 음식을 왜 먹지?
그래서 본의 아니게 그들의 식사 시간은 웃지 못 할 촌극이 연출되기도 했어.
기지 안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가끔 저녁 식사를 같이 했던 모양인데 가까이에서 안느 앤드류네 정비반장과 데이트를 즐기던 한스 슈트리펠 소위의 증언에 의하면....
아니 됐어. 이런 이야기는 그만두지. 그래도 그 친구는 분명 괴로웠음에도 웃으면서 그녀와 같이 하는 식사를 즐겼다고 하니.
음식 문제만 빼면 그들은 잘 지냈어. 아, 음악도 있군.
그 여자는 강렬한 일레트로닉과 테크노 또는 트랜스 계열의 음이 가미된 클래식 음악만을 들었지.
흠, 음식과 음악을 뺀 나머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다른 문화 간의 이질적인 면모마저 그들에게는 재미와 흥미를 가져다줄 뿐이었지.
같이 영화도 보고 서로 책을 빌려 읽으면서 그들은 시간을 보냈지. 늦은 밤까지 심도 깊은 지적 대화를, 살아온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임무에 바빠 그 녀석에 대해 신경 쓰지 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되는군.
우연히 녀석을 만날 때면 그 옆에는 항상 그 여자가 있었지.
혀를 낼름거리며 감히 웃음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표정을 한 채 팔에 안겨 있는 그 파충류가....
그 때만해도 난 그냥 웃어넘길 뿐이었지. 그 어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도마뱀한테 사랑에 빠지겠는가?
난 그렇게 생각하며 둘이 많이 친해졌군 이라고 추측했지. 난 그저 내 친구가 마음이 맞는 새로운 친구를 얻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을 뿐이었지.
늦은 시각 내 방으로 찾아와 사랑 고백을 늘어놓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어리석었지.

“나...아무래도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아.”

하하하, 지금 웃고 있군. 나 역시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웃었지.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염두에 두지 않은 문제가 튀어나올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
내 친구가 정말로 그 도마뱀과 사랑에 빠지다니!
음? 괜찮아, 그렇게 많이 취하지는 않았어. 그냥...그냥 다시 생각하자니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래.
후우, 그 대가리에 총 맞은 녀석이 나에게 말하기를 겉모습이 아닌 내면이 중요하다나?
나는 입만 딱 벌린 채로 사랑의 열병에 허우적대는 그 녀석을 설득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 혹시나 얘가 맛이 갔나 싶어서 뺨을 한 번 때려보기도 했고, 그 년이 약이라도 사용했나 싶어서 의무실로 끌고도 가봤지.
그 충격의 밤 이후 내가 한 모든 노력을 글로 적자면 아마 책 한 권은 족히 채워지지 않을까 싶군.
내가 알고 있는 주변 아름다운 미녀들을 그 녀석에게 소개시켜주었고 남자라면 평생 꿈꾸는 시공 연속체 최고의 파라다이스로 데리고 가기도 했지.
하지만 그 녀석은 요지부동이었어. 아아, 벌써 그녀의 매력에 사로잡힌 가련한 영혼은 그냥 바보 같이 웃으며 그녀의 이름과 매력을 찬양하더군!
고민 끝에 상부에 탄원을 해보기도 했지만 무심한 답변만 날아오더군.
병사들 개인 간의 애정 문제에는 간섭할 수 없다는 요지의.
결국 나는 그 여자를 직접 만나 담판을 짓기로 했어.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패였어.
인간의 의지를 대변하는 기계인형이 침묵 속에 잠들어있는 FS 격납고에서 그녀는 추호도 거짓이 없는 진실 된 감정으로 나에게 말했어.
사랑의 열정으로 충만한 그녀의 눈동자 앞에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지.
물론 순수한 마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어. 과학 기술의 힘도 도와주긴 했더라구. 그래, 그 안경!
뭐더라, 일종의 홀로그램 안경이라던데 나도 그 안경으로 그 년을 보자니...뭐, 그럭저럭 이쁘긴 했어.
물론 인간의 모습이었는데 붉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나는 이지적 외모에다가 눈처럼 새하얀 피부의, 늘씬한 여자가 안경을 쓴 채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더군.
원래 모습에서는 있을 리 만무한 그 여자의 긴 생머리에서는 눈부신 푸른빛으로 찰랑이고 있었고.
하지만...하지만 난 이 미녀의 모습에서조차 비인간적 면모를, 파충류 특유의 날카로움을 느꼈지.
자, 이제부터 끔찍한 부분이군. 사람들은 이 부분을 들을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를 황급히 뜨던데 말이야.
아마 너도 그러리라 믿어. 이건 그만큼 쓴 뒷맛과 피와 광기로 얼룩진 결말을 상상하게 만드니까.
그녀는 친구를 위해 몸을 인간으로 바꾸는 의료 시술을 받기로 결정했다고 하는군.
그러기 위해서는 고향으로 같이 돌아가 그 사랑을 일족들에게 증명해서 허락을 받아야지만 되므로 같이 가주길 그 친구에게 부탁했고.
친구는 기꺼이 그녀와 같이 가리라 결정했지.
그 때 말렸어야 되는데....
그래, 맞아. 지금도 우리는 친구를 찾지 못하고 있어.
친구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할 때에 우리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몰랐지만 친구를 마치 친동생처럼 아끼던 제라드 중령이 뒤늦게 모든 사실을 전해 듣고는 대경실색하더군.
나도 참 멍청했지. 제라드 중령이 정말 진심으로 화를 내며 호들갑을 떨 때가 돼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겨우 할 수 있었으니까.
우리들이 뒤늦게 뒤따라갔을 때에 그는 자신의 전용기 가헤스에 탑승하고는 무단으로 타임 홀을 이용하여 도마뱀들이 지배하는 시공간대를 거의 뒤집어놓고 있더군.
녀석들의 최정예 부대들이 구축해놓은 방어선을 차례차례 돌파하고 거의 몇 개 기갑군단을 박살내면서 수도로 진격하는 것을 우리들은 간신히 말릴 수 있었지.
그거 아나? 그 도마뱀 녀석들은 영위하는 기술 수준과 문화 수준의 편차가 꽤나 심해.
특히나 우리들 입장에서는 야만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전근대적 면모도 분명 존재하고 있어.
그 지적 도마뱀들은 그 근원이 파충류야. 일족의 풍습에 의하면 무언가 중요한 결심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해서는 피부를 탈피해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하는군.
아아, 상상만 해도 역겹군.
응? 그래, 그 놈들은 상관없지. 조금 고통스럽긴 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새롭게 나니까.
문제는 내 친구야. 그 망할 도마뱀 놈들이 내 친구의 피부를 억지로 쥐어 뜯어버렸다면 내 감히 신에게 맹세코 모조리 죽여....아, 미안하네. 좀 흥분했군.
그래, 괜찮아. 이럴 때에는 알코올이 만능은 아니더라도 조금 도움이 되기 마련이지.
음? 아, 거기를 발칵 뒤집어놓은 제라드 중령은 아직도 그 시공간대로 침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나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를, 그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동생을 구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거지.
난 그가 성공하길 개인적으로 바라고 있어.
뭐, 시간 보호군도 그 녀석의 구출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지금도 시간 보호군이 자랑하는 첩보부대들이 은밀하게 임무를 수행하고는 있지만....
그 친구들은 아직도 그 냄새 나는 년의 일족을 못 찾고 있어. 사실 우리 같은 인간들이 보기에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상황에다가 우리 시간 보호군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그 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누군가 그러더군.
망할 자식, 누가 운다고 그래!
뭐? 입대하면서 제공받은 유전 정보를 사용하면 찾을 수 있다고?
우리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어. 그래서 사용해봤지. 결과가 어땠냐고?
빌어먹을, 전 행성의 절반 이상이 그 범위 안에 들더라고!
물론 시간 보호군에 그 년 말고도 다른 파충류들이 꽤 있긴 하지. 그래서 그 놈들한테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놈들은 종족의 어쩌구 같은, 우리 인간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사고방식 때문에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주절대더군! 망할 새끼들!
대신 우리들은 그 파충류 녀석들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지. 재생력이 경이로울 정도로 높아서 머리를 제외하면 몸의 일부가 잘려나가도 새로운 팔이나 다리가 순식간에 생성된다거나.
그리고 또 잔혹한 풍습이 하나 더. 일족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일족의 중요한 몇몇 사람들에게 몸의 일부를 잘라 주어야 한다고 하는군.
그래, 결혼 한 번 하려다가 팔 다리가 남아나지 않을 지경인거야!
빌어먹을, 난 제발 내 친구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만을 신에게 간절히 기도할 뿐이야.
물론 그 망할 년에게 악의는 없었을 거야. 그냥 평범하게 결혼하려고 했겠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고 그녀로서는 통제 불가능한 사태가 일어났을 거야.
내 친구는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휘말린 것이고.
어? 아, 그건 나도 못 해본 생각인데. 그렇군. 그 녀석이 파충류 시술을 받아서 기억도 사라진 채 그냥 도마뱀 놈들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고?
흠, 그걸 들으니 조금은 희망이 생기는군. 하지만 그것 역시 끔찍한 결말이긴 마찬가지야.
그러고 보면 그 친구는 그녀와 만나면서 정말로 행복했을까? 그녀의 고향으로 같이 가면서 조금의 불안한 마음도 없었을까? 그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녀와 함께 그 미지의 시공간으로 건너간 것일까?
아마 영원히 알아낼 수 없겠지.
내가 그 친구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난 아직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어. 기억나지 않는 꿈의 잔향 속에서 친구는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지옥 속에서 사지가 뒤틀리고 피로 뒤범벅이 된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어.
지금도 난 두려운 상상 속에 그 친구를 기다리고 있어. 누군가가 말했지. 이 시간 보호군 안에서 시간의 가끔 기묘한 장난을 친다고.
내 친구 역시 그 기묘한 장난에 휘말렸다가 이제 곧 행복한 웃음을 한 채, 그 옆에는 평생을 같이 할 아름다운 배우자를 동반한 채 술집 문을 열고 걸어 들어왔으면 해.
그래, 내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기대인 것 잘 알아. 너무나 잘 알지.
다만 나는 그 도마뱀의 소굴에서 착하고 불쌍한 내 친구가 어떻게 됐는지 너무나 두려워.
그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무슨 생각이든, 그리고 무슨 일이라고 하고 싶을 뿐이야.
바로 너한테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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