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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해와 달의 생사여탈권

2009.10.25 07:0610.25


대사에 색이 들어간 건 얼마 전 박민규의 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흉내 내어 봤습니다.
어설픈 실력이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꾸벅)

※ 후에 추가된 부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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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의 생사여탈권


  달이 지고, 해가 뜬다. 해가 지고, 달이 뜬다. 반복되는 나날은 생사生死의 경계에 걸친 수많은 사람들의 순환하는 목숨과도 닮아 있다. 죽음의 의미를 알고, 삶의 의미를 알고. 삶에 의문을 품고, 죽음에 의문을 품고. 세상은 물음과 해답으로 뒤엉켜 알 수 없는 빛깔을 내뿜고 그곳에서 고뇌하는 이들은 항상 기침을 하며 가래를 뱉을 수밖에 없다.

  운명은 수레바퀴다. 한없이 돌고 도는 나선형의 소용돌이인 것이다. 그리고 운명이란 거대한 물레를 돌리는 역할을 부여받은 건 한 소년과 한 소녀였다. 해와 달의 오누이. 해와 달의 소년소녀. 태양의 소녀와 달빛의 소년. 속박의 굴레를 이탈해 영원한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죽음의 강과 생명의 구름을 떠도는 두 사람이 물레의 주인이었다.

  해의 소녀는 언제나 밝고 사랑스러웠다. 화사한 색동옷에 아름다운 보관寶冠을 쓴 그녀의 광채는 저 땅 끝 마을에까지 닿았고, 사람들은 모두 그 빛을 경배했다. 해의 소녀는 환인桓因을 품고, 생명의 탄생을 주관했다.
  달의 소년은 언제나 음침하고 무서웠다. 칙칙한 검은 망토에 해골이 웃고 있는 회색반지를 낀 그의 칠흑은 세상의 중심까지 뒤덮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그 어둠을 경외했다. 달의 소년은 명왕冥王을 품고, 생명의 죽음을 주관했다.
  해와 달의 소년소녀는 아무런 의문 없이 자신들의 의무를 수행했다. 물레를 돌리고 돌려 계속해서 생명을 탄생시키고, 죽여 왔다.


◆◆◆



  가장 먼저 자신들이 묵묵히 수행해온 임무에 의문을 품은 건 달의 소년이었다. 소년은 어째서 죽음의 존재가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죽음이란 끔찍하다. 그 누구도 죽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무리 삶이 싫다고 하는 사람도 막상 죽음이 닥치면 눈물을 흘리며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기 마련이다.
  달의 소년은 스스로 죽음을 다스리고 있기에 더욱 그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이란 허무하다. 세상만물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허무의 밑바닥에 떨어져 절망하는 인간들의 단말마를 소년은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 모든 절규는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하나 같이 소년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소년은 그럴 때마다 너무 슬프고 괴로웠다.
  그렇기에 달의 소년은 최대한 죽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예 물레를 돌리는 일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건 정해진 것이기에 함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설령 자신이 그 자리를 버린다고 해도 누군가 곧 뒤를 이을 것임을 알았기에, 소년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죽음의 공포를 이해할 수 있는 자신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



  얼마 있지 않아 해의 소녀 또한 달의 소년과 마찬가지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왜 사람들은 그리도 살아가려고 하는 걸까. 어째서 사람들은 생명을 찬양하는 걸까. 소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삶이란 끔찍하다. 인생은 언제나 고난과 고뇌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어 실로 고해苦海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헤어지고, 버려지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괴롭히고, 갈등하고, 굶주리고, 늙어가고, 병들어가는 그런 삶의 어디가 과연 즐겁다는 걸까. 삶이란 항상 채워지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는데, 이 세상 그 누구도 완벽히 채운다는 건 불가능하기에 결국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정신론이나 종교나 도덕 같은 걸로 결핍을 위장한다고 해도 그 효과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해의 소녀는 비참하게 저주하다 스러지는 인간들의 절규를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들의 삶에 구원이란 없다. 그나마 안식이 있다면 그건 오로지 죽음 뿐. 해의 소녀는 끔찍한 생을 자아내는 자신의 업보를 잘라내 주는 달의 소년이 있어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달의 소년은 해의 소녀가 좋았다. 음산한 죽음의 기운을 풍기는 자신과 달리 그녀는 생기발랄하고 멋진 생명력으로 가득했다. 어둠 속에서 가만히 소녀를 응시할 때마다 소년은 행복했다. 그리고 정말 다행이라고, 마음 속 깊이 안도했다. 소녀가 있기에 이 세상은 자신의 끔찍스러운 죽음의 안개로 넘치지 않고 생명의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소년에게 있어 소녀는 기쁨이자 이 세상의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다.

  오랜 세월 해의 소녀를 지켜보고 있던 달의 소년은 어느 날 결심을 굳혔다. 다름 아닌 소녀를 만나러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비록 창백하고 공포만을 가져다주는 비참한 자신이라도 그 소녀라면 따스하게 맞아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령 소녀가 거부한다 하더라도 괜찮았다. 태양의 딸조차 거부할 정도로 죽음이란 것이 끔찍하다면 그건 사라져야 마땅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만 둘 확신이 생기는 것이다. 소년은 소녀가 자신을 부정한다면 당장 돌아와 물레 자체를 부숴버려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



  석양이 지는 붉은 벌판. 낮과 밤의 경계가 뒤섞이는 노을 지는 시간에 달의 소년은 해의 소녀를 찾아갔다. 소녀는 황금빛으로 물든 풀들과 각양각색의 꽃들이 장식되어 있는 벌판에서 순한 노루를 베개 삼아 잠자리에 들려 하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든든한 호랑이와 곰들이 듬직한 얼굴로 경계를 서고 있었고, 이름도 모르는 작은 새들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벌판 저편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당을 지어놓고 멀찌감치 떨어져 소녀를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는데, 다행히 시끄러운 그들의 목소리는 여기까지 닿지 않았다.

“안녕. 널 보고 싶어 찾아왔어.”

  하지만 그 평화로운 풍경은 달의 소년이 인사를 건네자마자 순식간에 깨져버렸다. 사당에서 기도를 올리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졌고, 소녀를 위해 곁에 있던 노루와 새들도 화들짝 놀라 어디론가 사라졌다. 곰과 호랑이는 소녀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제 자리를 지켰지만 곧이어 거품을 물고 기절하고 말았다. 소년을 보고도 떨지 않는 건 오직 주변의 초목과 소녀뿐이었다.

“안녕. 아름다운 저녁이야.”

  해의 소녀는 석양을 받아 금싸라기처럼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에 답했다.
  바라마지 않던 환영이었지만 달의 소년은 방금 전 소동 때문에 침울해졌다.

“미안해. 나 때문에 아름다워야 할 네 시간이 엉망이 되고 말았구나.”

“그런 말 하지 마. 다들 그저 겁이 많아서 그럴 뿐이야. 난 네가 와줘서 기쁜 걸.”

“정말이야?”

  달의 소년은 해의 소녀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환희를 감추지 않았다. 그 말 한 마디에 사람들과 동물들이 도망친 일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곧 소년은 평소처럼 의문을 가졌다.

“넌 내가 무섭지 않아? 나는 살아있는 모든 걸 허무하게 만드는 불길한 존재야. 너처럼 찬란한 빛을 내뿜지도, 존귀한 생명을 낳는 일도 하지 못하는데, 그런 내가 싫지 않니?”

  해의 소녀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는 삶이 얼마나 추악한지 아직 모르는 모양이구나. 살아있는 것들에게 있어 안식이란 오로지 죽음밖에 없어. 부패하는 살덩어리를 그나마 더 이상 추해지지 않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잘라낼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고. 만약 네가 없었다면 난 이미 예전에 미쳐버리고 말았을 거야.”

  달의 소년은 자신을 추켜세우는 해의 소녀의 말이 싫지 않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소녀는 왜 소년이 자신의 훌륭함을 사랑하지 못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둘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낮과 밤을 잠시 멈춰두고 석양의 경계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달의 소년은 울 것 같은 얼굴로 토로했다. 죽어가는 생명의 처절함을, 단말마의 끔찍함을, 삶에 대한 사자死者들의 미련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해의 소녀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열변했다. 살아있는 생명의 비참함을, 쇠락해가는 무력함을, 삶에 대한 생자生者들의 고난을 빠짐없이 늘어놓았다.

  그러나 둘의 의견은 평행선인 채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고, 인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도무지 자신만큼 좋아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해하는 게 불가능했던 것이다.
  시간이 제대로 흐르지 않아 세상이 삐걱거리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이야기를 마치기로 했다. 하지만 이대로 헤어지는 걸 납득할 수 없었던 소년과 소녀는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고 제안을 했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야.”

  해의 소녀와 달의 소년은 한 번 역할을 바꿔보기로 했다. 서로 자신의 역할에 납득할 수 없다면 동경하는 상대의 자리에 앉아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좋아하는 상대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고, 싫은 의무에서 벗어나 좀 더 동경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었다. 그렇게 해의 소녀와 달의 소년은 서로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징과 힘의 근원을 넘겨주기로 했다.

  해의 소녀가 달의 소년에게 선물한 것은 환인의 보관寶冠과 금색의 두루마기였다. 소년은 보관을 머리에 쓰는 걸로 탄생을 주관할 수 있게 되었으며 금두루마기를 입는 걸로 그에 어울리는 복장을 하게 되었다.
  달의 소년이 해의 소녀에게 선물한 것은 명왕의 반지와 검은 드레스였다. 소녀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는 것으로 죽음을 주관할 수 있게 되었으며 검은 드레스를 입는 걸로 그에 마땅한 차림새를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해의 소년과 달의 소녀가 되었다.


◆◆◆



  명왕을 품게 된 순간 달의 소녀는 죽음이란 무엇인지 깨닫고 말았다. 죽음이란 너무나 차가웠다. 얼어붙은 그 시간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태어나지 않는다. 고통도 없는 대신 기쁨도 없고, 고뇌가 없는 대신 의지도 없다. 절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그 검은 공동은 삶을 끝낸 이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어머니의 따스한 품 속 같은 게 아니라 시체를 버리듯이 툭 던져지는 메마른 땅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달의 소녀는 무언가 자신이 바라는 가치가 숨어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 지긋지긋한 삶에 종지부를 가져오는 멋진 죽음이 이렇게 덧없는 것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손가락의 반지를 움직여 죽음의 권리를 행사했다. 곧 칠흑 같은 장벽이 내려와 때가 된 사람들의 목숨을 거두어왔고 작은 영혼의 빛은 검은 구덩이 속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귀를 찌르는 듯한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영혼이 온 힘을 다해 내지르는 그 비명소리에 소녀는 너무나 무서워 그만 머리가 하얗게 세고 말았다.


◆◆◆



  태양을 품게 된 순간 해의 소년은 생명의 고동을 귀에 담았다. 그건 너무나도 감미롭고 달콤했다. 이 세상 전부가 축복 받은 것처럼 보였으며 자신이 품고 있던 사악한 죽음 따위는 범접도 하지 못할 만큼 청결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소년은 한동안 행복한 기분에 젖어있었다. 소년은 자리를 바꿔준 소녀에게 감사하며 그녀 또한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소년의 기쁨은 마치 비눗방울이 곧 공중에서 터지는 것처럼 허무하게 꺼져들었다. 생명을 관장하게 된 소년은 얼마 있지 않아 모든 이들의 삶을 눈에 담아두게 되었는데, 그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제대로 응시하기 어려울 만큼 끔찍한 모습들이었다.
  서로 싸우고, 약탈하고, 증오하고,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병에 고생하다 보잘것없는 것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스러져가는 인간들의 인생. 그것도 한순간이 아니라 수 십 년이나 그런 아비규환阿鼻叫喚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해의 소년은 동정을 넘어서 구역질을 느꼈다. 이제야 소년은 소녀가 한 말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정녕 이들에게 구원이 되는 건 죽음밖에 없다고 할만 했다. 끔찍하다, 끔찍해. 이런 게 진짜 내가 그리 동경했던 삶의 본질이란 말인가.

  하지만 곧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 내가 모를 뿐이지 더 멋진 무언가가 존재할 거야. 틀림없어.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은 소년은 머리에 쓴 보관에서 빛을 내뿜어 생명을 탄생시켰다. 얼마 있지 않아 세상 곳곳에서 갓 태어난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응애응애. 응애응애. 응애응애. 어머니의 뱃속에서 힘겹게 모습을 드러낸 아기들은 하나 같이 이 세상에 태어난 걸 저주하듯이 울고만 있었다. 아기들의 울음소리는 커다란 줄기의 폭포가 되어 해의 소년의 귀를 강타했고, 소음을 견딜 수가 없었던 그는 그만 핏줄이 터져 눈알이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



  해와 달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소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죽음의 공포에 떨던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는 춤을 추며 기뻐했다. 그 상냥하고 아름다운 해의 소녀가 명부를 다스리는 주인이 되었다면 이제 비참한 죽음은 맞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명왕의 반지가 내뿜는 둔탁한 빛은 여전히 모두에게 평등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웠고, 사람들은 전과 다를 바 없이 소멸의 공포에 몸을 떨어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 사이에는 분노가 커져갔다. 그 음침하고 무서운 달의 소년이 죽음을 관장하고 있을 때는 처음부터 그는 사악한 존재라고 생각해 참을 수 있었지만, 해의 소녀가 달로 건너간 이후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는 건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전보다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은 채 그대로였지만 사람들은 흐름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화를 냈다.

  하지만 아직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 해를 가지고 있었던 달의 소녀가 어쩌면 단순히 우리들의 고충을 알지 못하는 것뿐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확실히 인간이 아닌 그녀는 쉽게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 잘 얘기하고 부탁한다면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지도자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았다.

  사람들은 의논 끝에 사자使者를 선발했다.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의 애처로운 마음을 전하기 위한 대표단을 선출한 것이다. 10인의 사자들은 모두 신체 건장한 역전의 용사들로서 험준한 계곡과 사악한 요물들이 사는 숲을 지나 달의 소녀가 거주하는 명부의 성까지 도착해야만 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열 명의 용사들은 각기 다른 소원을 품고 있었다. 어떤 이는 가족친지가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사람들에게 불사不死를 가져다 준 영웅으로서 명예를 떨치고 싶어 하기도 했다. 돈이 필요한 자도 있었으며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전쟁노예도 있었다.

  어쨌든 용사들은 쉴 새 없이 전진했다. 수많은 역전의 용사들 중 고르고 고른 이들이라 이들의 행진은 매우 신속하고 매서웠다. 그들은 하늘을 찌르는 산을 몇 개나 넘고, 잠잘 틈도 없이 덤벼드는 숲속의 악마들과 싸우며 발이 푹푹 빠지는 설원을 지났다. 마침내 달의 소녀가 사는 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절반 이상이 죽어 네 사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온통 회색빛으로 침잠해 있는 명부의 성은 그야말로 달의 주인이 거주하기에 합당한 어둠을 품고 있었다. 달의 소녀는 처음부터 그들의 방문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곧장 마중을 나왔다.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시다니 드문 일이군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4명의 용사는 달의 소녀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던 것이다. 검은 비단처럼 물결쳤던 머리카락은 새하얗게, 오색으로 빛나던 색동옷은 칙칙한 검정드레스로 변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말투도 가라앉았으며 발그스레했던 얼굴빛도 마치 죽은 이처럼 창백했다. 명왕의 반지를 낀 그녀의 모습에서 이미 과거의 들판에서 해맑게 뛰어놀던 해의 소녀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4인의 대표는 자신의 임무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이렇게 탄원을 드리러 찾아왔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정말 비참합니다. 언제나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만 하니까요. 우리 산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지만, 누구나 다 그것을 무서워하죠. 왜냐하면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죽음은 절대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때 우리와 함께 해주셨던 당신이라면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찬란한지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에 비해 죽음은 끔찍하고 괴롭습니다. 죽음은 아무것도 낳지 않아요. 모든 걸 무가치하게 만들고, 산자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당신께서 그런 인간들의 괴로움을 이해해주십사, 더 나아가 이제는 죽음의 물레를 돌리는 일을 그만둬 주십사 간청을 하러 온 것입니다.”

  용사들은 합창하듯이 간절하게, 애절하게, 비통하게 준비해둔 말을 쏟아내었다. 사실 시인이나 철학자가 있었다면 좀 더 호소력 있고 아름답게 마음을 흔드는 말을 전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자들은 여기까지 이르는 가혹한 여정을 견딜 수가 없을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련되지 못하고, 우직한 부탁이라 하더라도 그 옛날의 착한 소녀라면 자신들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 용사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달의 소녀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전 당신들의 소원을 들어드릴 수 없답니다. 모두 돌아가세요.”

“말도 안 돼! 그렇게 생명을 사랑하시던 당신께서 어찌 그러실 수 있단 말입니까. 외람된 말씀이오나, 당신의 하얗게 질려버린 머리카락과 낯빛을 보십시오. 당신 또한 죽음의 단말마가 내지르는 독기에 떨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당신이 왜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단 말이죠? 우리는 여기까지 오느라 많은 고생을 겪어야 했습니다. 여섯 사람, 여행 중에 여섯 명의 맹자들이 산골짜기에서, 숲속에서, 황야에서 목숨이 끊어졌고요! 여기 있는 우리도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요. 우리는 우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을 위해 인생 그 자체를 걸고 당신을 찾아온 거라 말입니다!”

  용사들이 내뿜는 분노는 성조차 위압하여 무너뜨릴 만큼 거세고 사나웠다. 그러나 달의 소녀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성 안으로 들어가 쿵하고 밖에서는 절대 열리지 않는 문을 닫아버렸다. 아무리 4명의 용사들이 대단하다고 해도 칠흑으로 만들어진 성문을 부수는 건 불가능했기에 그들은 낙담하고 저주했다.


◆◆◆



  달의 소녀가 변심해 더 이상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온 세상에 퍼졌다. 저승문턱까지 다녀온 10인의 용사들 중 극적으로 간신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한 사람의 용사가 모든 사실을 전했으며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러나 곧 어떤 현자가 희망적인 관측을 내놓았다. 만약 해의 소녀가 달의 소녀가 되어 변질되었다면, 마찬가지로 달의 소년 또한 해의 소년이 되면서 뭔가 바뀌지 않았겠느냐 하는 이야기였다. 현자의 이론에 의하면 생은 죽음에 대치되는 것으로서 만약 삶의 기운이 훨씬 강해진다면 죽음도 이겨낼 수 있으니 해의 소년을 잘 설득한다면 죽음도 피할 수 있다는 모양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희망의 꽃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모두 현자가 해의 소년을 설득해주기를 바랐다. 해의 소년이 있는 곳은 명부와는 달리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누구나 찾아갈 수 있는 곳이기에 몸이 빈약한 현자라도 무사히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자는 거절했다. 혹시라도 자신의 마음이 더러워 무지개다리를 건너지 못한다면 큰 망신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현자는 내심 해의 소년이 두려웠다. 현자는 한 때 명부의 왕자였던 자와 단둘이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현자는 다른 변명을 내세웠다. 그건 해의 소년을 만나는 것에는 정결한 처녀가 좋다는 이론이었다. 여러 가지 변증법과 수사학으로 사람들을 어지럽게 만든 현자는 결국 현명한 자신보다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마음씨는 착한 시골처녀가 찾아가는 편이 적합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지도자들의 축복 속에 시골처녀는 해의 소년을 만나러 길을 떠났다. 해가 머무는 황금벌판으로 가는 길은 간단했다. 세상의 중심에서 비가 온 다음 날 길게 뻗은 무지개를 건너면 금방 도달할 수 있었다. 이윽고 아름다운 벌판에 도착한 시골처녀는 해의 소년을 찾았다.

“처음 뵙는 분이군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시골처녀는 얘기로만 들었던 무서운 명왕의 왕자와는 달리 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소년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소년의 새빨간 눈이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매우 정중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힘이 불끈 넘치는 매력에 시골처녀는 얼굴을 붉혔다.

“저, 저기, 부탁이,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시골처녀는 기억을 더듬어 현자가 가르쳐 준 말을 힘겹게 읊었다. 며칠에 걸쳐 달달 외운 탓에 내용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된 말이 아니었기에 매우 어색하게 들렸다. 요는 삶은 아름답고 죽음은 끔찍하니, 한 때 그 어둠 속에 몸을 담고 있었던 소년께서 부디 잘 헤아려 죽음을 피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의 소년은 이야기를 다 듣고도 머리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정말 사는 게 행복합니까?”

“예? 무슨 말씀이세요?”

  시골처녀는 영문을 알지 못해 되물었지만 해의 소년은 다시 물음을 답했다.

“삶이란 그렇게도 가치 있는 것일까요?”

“저기…….”

“인생이란 그토록 아름답습니까?”

“으으음…….”

“당신들은 당신들의 이 순간이 영원으로 만들어 간직하기에 합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해의 소년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으나 현자가 적어준 탄원서만을 기억하고 있던 시골처녀는 그에 대해 아무런 답변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시골처녀는 해가 지기 전에 고개를 숙이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몇 명인가 현자의 교육을 받은 시골처녀들이 해의 소년을 찾아갔지만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하게 해주겠다는 보장을 받지 못했으며 소년의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오래 전 만났던 석양의 벌판에서 해의 소년과 달의 소녀는 다시 만났다. 조금 키가 커 어른이 된 두 사람의 분위기는 전과 많이 달랐다. 해의 소년은 금빛 머리카락과 금색 두루마기, 그리고 핏발이 서 붉게 보이는 눈동자가 강렬한 인상을 주는 청년으로 자랐으며 달의 소녀는 은빛 머리카락에 검은 드레스가 신비스러운 매력을 풍기는 정숙한 아가씨로 성숙했다.
  먼저 입을 연 건 달빛의 숙녀였다.

“죽음은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감당하기 힘든 괴물이었어요. 차갑고, 무섭고, 허무했죠.”

  태양의 청년도 말했다.

“삶 또한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견디기 힘든 진흙탕이었소. 추레하고, 흉악하고, 덧없었지.”

  두 사람은 힘없이 토로하며 동시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했고, 무엇 때문에 진저리를 쳤는지 절실히 공감하게 되자 자신이 얼마나 철없는 동경을 품고 있었는지도 깨닫게 되어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허나 알게 된 건 그것뿐만이 아니다. 두 사람은 상대가 왜 자신을 동경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죽음은 청정하고 고요했어요.”

“그래도 삶은 활기차고 떠들썩했소.”

“삶이 없는 죽음이란 영원히 얼어있고,”

“죽음 없는 삶이란 영원히 부패하오.”

“시작하기 위해서는 끝이 필요하고,”

“끝내기 위해서는 희망이 요구되오.”

“흘러간 물은 다시 거슬러 올 수 없지만,”

“흐르지 않는 물은 그저 말라붙을 뿐이지.”

  노래를 부르듯 장단을 맞춘 예전의 소년과 소녀는 작게 미소 지으며 서로 손을 쥐었다. 바람이 불어 붉게 물든 벌판을 물결치게 했고, 저물어가는 석양 속에서 두 사람은 작별의 시간을 예감했다. 이제 두 사람은 시간을 멈추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으며 이대로 잠시 서로를 느끼다 헤어지기로 했다. 그러나 둘의 작별은 예기치 못한 사건 때문에 평온치 못한 일이 되었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어디선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했던 황금벌판이 점점 우르릉하는 소음과 대지가 떨리는 진동으로 소란스러워져 갔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서 엄청난 무리의 성난 사람 떼가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 같이 손에 날카로운 날붙이나 무거운 둔기를 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봉기했다. 굴레에서 이탈한 예전의 소년과 소녀와 달리 직접 그 생사生死의 갈림길에 있는 사람들은 좀처럼 침착하게 삶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사를 주관하는 예전의 소년소녀를 죽이기로 결심했고, 악착 같이 두 사람의 밀회일시를 밝혀내 이렇게 쳐들어온 것이다.
  아쉽지만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빨리 헤어지지 않으면 분노한 사람들에게 휩싸여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예전의 소년이 물었다.

“다시 태양을 가슴에 품고 싶소?”

  예전의 소녀는 그에 물음으로 대답했다.

“다시 어둠 속에 몸을 담고 싶나요?”

  예전의 소년과 소녀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이제 완연한 달의 여신과 태양신이 되었고, 아무도 쉬지 않고 계속 물레를 돌리는 두 연인을 방해할 수 없었다.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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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crime 09.10.27 11:07 댓글 수정 삭제
    한 편의 몽환적인 동화를 읽은 거 같아요.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낭만적으로 쓸 수 있다니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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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단테 09.10.31 13:44 댓글 수정 삭제
    감상 감사드립니다. 사실 삶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테마에 대해 쓰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실력이지만 그렇기에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았지 않을까 해서 쓰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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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夏弦 09.11.03 16:24 댓글 수정 삭제
    아... 멋있어요, 푸욱 빠져서 읽어내렸답니다. 그리고 색깔이 깃들어져 있으니 훨씬 훨씬 와닿는거 같아요!
    에,, 그리고 이런 건 지적하기 싫지만 '단발마' 가 아니라 '단말마' 가 옳은 말이랍니다- 어찌됐든! 정말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제목부터 마음에 들어요^^
  • No Profile
    안단테 09.11.03 19:13 댓글 수정 삭제
    에고, 부끄러워라;;; 수정했습니다. 지적과 감상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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