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기던 용

2009.09.08 19:5309.08





오늘도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늘 그렇듯 차가운 안경 너머로 나를 노려보았다.

"문제는 늘 정신에 있습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신경이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느끼고 계시는 겁니다. 현대 의학은 뇌와 신경 분야에선 아직 미흡하지요. 확실한 것은, 늘 말했다시피 어떻게 느끼는 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늘 같은 소리였다. 듣기는 그럴싸하나 내 다리를 움직이게 해주지 못하는 소리.

들어라.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입은 벌려지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느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듣고 있습니다."

"선생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듣지 않는다고 하셨잖습니까."

의사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지금 몸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그래서 그런 거에요. 늘 말했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고요. 울증과 복합된 정신병으로 인한 증상입니다."

그의 말이 다 옳았다. 말이 되는 소리였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또 찾아오겠습니다."

의사는 내 인사를 받지 않고 서류로 고개를 돌렸다. 서류를 정리하는 그와 의료기기를 챙기는 간호사의 모습은 내게 소리없는 비난을 내뱉었다.

네가 문제지.

병신. 기형아.

그의 마음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움직이는 한쪽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이것도 그가 설명한 정신병 때문일 터이다. 무너지면 안 된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바보같은 일로 귀찮게 하긴. 바보 같은 놈.

문을 닫기 전 그가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착각이었을 것이다. 내 휠체어를 밀어주던 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잘 될 거야. 형."

동생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동생의 머리는 흐트러진 채다.

"잘 될 거야."

그는 내 머리를 쓸었다. 나는 그것이 싫었다. 나는 머리를 돌렸다. 지팡이를 쥔 노인이 보였다. 환자복을 입은 그는 입을 헤 벌린 채다.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텔레비전을 보았다. 안경을 낀 소녀를 보았다. 작고 약해 보이는 그녀. 그녀는 놀라운 속도로 하늘을 날았다. 옛날 영화이거나 광고일 것이다.

사람은 날 수 없다.

그렇게 단언했다.

여러분도 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단언했다.

나는 그 선언에 놀라 텔레비전을 보았다. 사십 대로 보이는 여성이 웃음짓고 있다. 그녀는 손을 들고 기묘한 장갑을 보여주었다. 머리에는 이상한 기계를 쓴 채다.

"이게 바로 가상현실이랍니다."

시시잖은 홈쇼핑이다. 나는 다시 단언했다. 그러나 그 광고는 내 머릿속에 남아서 지워지질 않았다.

동생이 차로 나를 집까지 태워다주었을 때도, 화장실에서 멍하니 내 얼굴을 물로 때렸을 때도 그러했다. 한 때는 내가 운영하던 작은 가게로 동생이 향하는 것을 배웅할 때도 그러했다. 늘상 들던 상념.

나는 기억해 두었던 전화번호로 전화했다. 예쁜 목소리의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가격을 물었다. 아이의 게임기를 사주는 아버지처럼 가장했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떨렸고 열망으로 가득하였다. 여자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었다.

여자는 가격을 말했다. 사십만에서 하나가 부족한 수였다. 나는 내 통장의 잔고와 치료비를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생각을 잊었다.

그것을 주문하면서 나는 나 자신을 자책했다. 애들처럼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웃음이 나오고 조금 서글펐다. 그러나 동시에 묘한 설렘이 들었다.

설렘은 삼 일 후까지 가라앉지 않았다. 그제서야 드디어 택배가 도착했다. 나는 휠체어의 바퀴를 굴리며 현관으로 나갔다. 하마터면 식탁에 부딪힐 뻔 하고서야 택배를 받을 수 있었다.

나는 마치 어렸을 적, 내가 멀쩡했을 적처럼 설레었다. 헤드폰을 확대시킨 듯한 기기를 꺼내고 선을 컴퓨터에 연결했다.

눈을 감고 기다렸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를 기다렸다.

곧 세상이 펼쳐졌다. 눈에 들어왔다. 또 다른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현실이 아니었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사물들은 밋밋했다. 장갑의 촉감은 고무다. 구역질이 나왔다.

거칠게 헬멧을 벗었다. 내 단순함에 절망했다. 그것들을 구석에 치운 뒤 눈을 긁적였다. 어쩐지 울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정신병 탓일 것이다.

조금 뒤 나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너무 큰 기대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단순한 게임으로 즐기면 괜찮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며 다시 헬멧을 썼다.

정말로 그러했다. 나쁘지 않았다. 나는 중세의 기사였고. 동시에 우주비행사였으며, 구역질 나는 괴물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시장에서도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서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다.

"형?"

몸에서 술 냄새가 나는 동생이 돌아왔다. 내가 사온 기기를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이거 산 거야?"

"그래."

동생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자기 방으로 가 문을 닫았다. 여자친구와 통화를 하는 듯 킥킥대는 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왔다.

평소였다면 그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생각했다.

다음날 나는 일찍 일어났다. 낮은 탁자를 짚고 일어나 휠체어에 앉았다.

도서관을 갔다. 사서의 도움을 받아 자료실로 향했다. 프로그래밍 자료를 찾았다. 대학시절 이후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자료들이었다. 잘 들어오지 않는 머리에 우겨넣기 힘들었다.

학생들은 나를 보고 키득거리며 지나갔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책을 보면 볼수록 새로운 지식과 생각이 떠올랐다. 꿈을 꾸게 하는 교양과 꿈을 이루게 할 기술. 그 모두를 먹어치우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날 나는 꿈을 꾸었다.

다음 날도 꿈은 멈추지 않았다. 멈춘 줄 알았던 심장이 다시 뛰었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겪는 모든 것이 설레었다.

꿈꾸어라.

내가 내게 명령했고, 나는 그 명령을 따랐다. 나는 즐거웠다. 감각이 사라진 다리는 거짓된 간지러움을 주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밝았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애인이라도 새로 사귀셨나요?"

의사는 그렇게 물어왔다.

"아니오."

나는 그렇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싱글벙글한 미소까지 감추지는 못하였다. 의사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좋았다. 그가 나를 경멸하고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내 착각에 불과했으리라.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계속해 보세요. 긍정적으로 살아서 몸에 해될 일 하나도 없으니."

그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러할 작정이었다. 나는 깊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일을 계속했다.

공부를 시작한 지 이십삼 일. 나는 옛 기억의 편린에 근거해 기술을 되찾았다.

사십이 일. 상상력이 돌아왔다.

팔 개월 뒤, 나는 조그만 게임을 만들었다. 그것은 용의 시선으로 진행하는 게임이었다. 나는 날 수 있었고, 고무의 냄새와 느낌이 났으나 파충류의 비늘을 느낄 수 있었다. 함수 값과 상상력이 만들어낸 승리였다.

나는 그다음부터 내가 만들어낸 것을 탐구했다. 실험하고 발전해 나갔다. 낡은 기기에 신경이 동화되고, 감각의 촉수들이 가상을 헤집는다.

용은 거칠고 강해졌으며 동시에 그 부드러운 눈을 내게로 돌리기 시작했다. 공부를 시작한 지 십이 개월째. 나는 기기를 다시 구동했다.

하늘이 보였다. 끝없이 이어진 하늘과 구름 사이에서 날았다. 손을 비틀었다. 고정된 장갑이 내 행동을 제약한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그것들이 마치 날개를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뜨거운 태양과 스며드는 바람. 나는 깨달았다. 나는 용이다.

날았다. 끝없이 날았다. 한참 동안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긴 몸체를 흔들어 공기를 탔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이미 저녁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침이 흘러 목덜미를 적셨다. 나는 마치 정신병자처럼 침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형."

과일이 가득한 비닐봉지를 든 동생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마주했다.

그날 밤 동생은 내게 물었다. 내가 걱정된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지켜보았지만 더는 지켜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이것이 내가 다시 설 수 있게 할 것이라고 했다.

"이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문제는 전적으로 내 정신에 의한 것이다. 가상현실을 통해 몸을 다루고 훈련을 하게 된다면 나는 설 수 있다. 달릴 수 있다. 날 수 있다. 평생 처음으로 열과 성을 다했다. 동생은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나는 거의 무릎을 꿇을 뻔했다.

"의사에게 가 보자."

그는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되었다. 나는 늘 보던 의사. 자신을 신경전문의라 말하는 자의 앞에서 어깨를 구부렸다. 동생이 말해주는 내 비참한 묘사를 들었다.

"그건 정신병 때문일 겁니다."

의사는 그렇게 단언했다.

"정신병은 아직 규명되지 않은 점이 많아요."

"이성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나는 항변했다.

"문제는 정신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가상현실기기를 통해 그 정신을 회복하려고 했습니다."

"침을 줄줄 흘리시면서 말예요."

의사는 안경을 올렸다.

"가상현실기기라고는 하시는데. 그게 뭔지 압니까? 그건 그냥 한물간 게임기입니다. 가상현실도 무엇도 아니라고요."

"저는 다만 다시 날고 싶었을 뿐입니다."

"난다고요?"

의사는 코웃음을 쳤다. 옆에서 기기를 치우던 간호사가 웃고, 동생조차 웃었다.

"뭐가 우습습니까?"

"선생님은 복합적인 정신병에 걸리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약물치료로 효과를 볼 거라 생각했었지요. 그러나 이건 좀 더 심리적인 이야기…… 그러니까 좀 더 전문적인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의 말은 무거웠다. 동생은 고개를 끄덕이고 내 휠체어를 밀었다. 집까지 가는 길 동안 나는 입을 다물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야 물었다.

"나를 정신병원에 넣을 거니?"

"아니."

그래.

거짓말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 때문에 나는 한 달 뒤 조무사들이 나를 끌어내었을 때도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나는 다만 사랑하는 동생의 눈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날지 못한 채 둥지에서 추락하는 것이 아쉬웠다.

나 같은 정신병자의 시간은 빨리 간다고들 한다. 아마 그러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지나갔으므로 장담할 수 있었다. 끔찍했던, 그러나 지루하지는 않았던 두 달이 지났다.

"기기를 주십시오."

내 요구에 반응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날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이제 한 번이면, 단 한 번만 접속만 하면 됩니다. 나는 날 수 있습니다."

의사는 무감각한 눈으로, 안경 너머로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선생님은 병에 걸리셨습니다."

다섯 달이 지났다. 나는 무한한 시간 동안 용을 꿈꾸었다. 때론 그 열망이 하도 강렬한 나머지 현실과 혼동이 오기도 했다. 나는 용이었고, 동시에 쓰레기였다. 내 수염은 까칠하게 자라고. 거울 속에서 나를 노려보던 눈은 더욱 퀭해져만 간다.

아홉 달이 지났다. 나는 의사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나는 다만 배웠다. 배우고 다시 배웠다. 단 한 번의 기회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년 즈음이 지났을 때 기회가 왔다. 새로운 의사가 부임한 것이다. 그는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지금은 조금 더 높은 위치가 된 기존 담당의사의 말을 의심까지 했다.

"그럼 해보세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예요."

그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정말로 뛸 듯이 기뻐했다. 이제는 정말로 구형이 되어버린 기기를 손에 쥐었다. 의사의 컴퓨터에 연결했다. 인터넷에 올려놓은 용을 불러들였다.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접속했다, 하늘. 푸른 하늘. 평생을 떨어진 것만 같은 하늘을 갈랐다. 그 하늘의 끝에서 몸을 뒤틀었다. 뒤틀다가 나는 문득 다리를 꿈틀거렸다. 정말이었다. 내 비늘 덮인 다리가 꿈틀거렸다.

눈을 떴다. 의사가 나를 바라본다. 그는 조금 물러난 채다.

"효과가 있었습니다."

나는 웃었다.

"정말로 효과가 있었습니다. 다리가 움직였어요! 보셨지요?"

"선생님."

그는 무거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다만 앉아 계셨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저는 분명 다리를 움직였습니다."

간호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가와 내 목덜미를 닦아주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다시 침을 흘렸음을 깨달았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치들다가는 절망에 빠졌다. 고개를 내렸다.

내 두 다리가 있어야 할 곳이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고깃덩이 뿐이다.

나는 내 생각이 없음을 슬퍼하며 울었다. 의사와 간호사가 나를 위로했다. 나는 그들에게 악을 썼다.

"다시 한 번만 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내 더러운 침이 그에게는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애원해볼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나는 더이상 비참해질 자신이 없었다. 나는 애원하는 대신 방 안으로 돌아왔다. 얌전히 웅크리고 흐느꼈다.

내 시간은 늘 빠르게 흐른다. 잠시 풍경을 바라보는 사이에 사고의 흐름은 저 먼 구석으로 사라지고, 그러는 틈에 시계는 이미 휴식을 할 시간임을 가리킨다.

새로운 의사가 오고, 예전의 의사들은 사라진다. 오랫동안 들었던 말들은 이제 귓가만을 맴돌고, 가족들은 내 정신을 기만한다. 동생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말만 맴돌 뿐이다.

형.

그가 그렇게 말할 때면 늘 자랑스러웠다. 어릴 적 그와 다투던 일이 기억났다. 웃음이 나왔다. 그러던 그가 이제는 여드름이 왕성한 소년이 된 것이다.

그렇게 웃음짓다가 문득 소름이 돋았다. 그가 여드름이라고? 그렇지 않았다. 그는 수염자국이 성성한 완전한 성인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 수염자국을 가진 모습 역시 그의 예전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혼미한 정신을 달력이 깨닫게 해주었다.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동생은 까칠한 수염자국을 갖게 되고 눈가엔 주름이 쌓였다. 이미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을 것이다. 그런 통보를 받았던 것 같은 기억이 들었다.

세월은 너무나 빨리 흐른다. 그것이 부끄러워서 울었다. 용을 생각했다. 그 무한한 생명이 다시 한 번만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그 생각에 반발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기기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리쳤다.

"문제는 늘 정신에 있다고 하지요."

새로 온 의사의 말이 나를 일깨웠다. 신경전문의가 하던 말이었다.

"서류를 보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선생님은 가상현실기기, 정확히는 단순한 게임기로 개발되었던 VTBO에 집착하시는 모습을 보이셨더군요."

"그렇습니다."

"음, 독자적으로…… 아, 이것 참 실례. 그걸 시뮬레이션이라고 하나요? 그걸 만드셨다면서요."

"그렇습니다."

그는 나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탁자 밑에서 무언가를 뒤적였다. 그가 꺼낸 것은 놀랍게도 내가 그렇게도 갈망하던 기기였다.

"이 기기를 통해 선생님의 다리를 직접 치료할 수 있다고 하셨었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기기를 살폈다. 외부에 난 흠집이며 떨어져 나간 스위치가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의 외형이 아닌 그것이 내면에 간직한 힘을 보았다.

용의 느낌이 너무나 강렬했다. 다시 한 번 그 햇살, 그 하늘을 맛볼 수만 있다면 어떨지.

"어떠십니까? 시험하는 셈치고 다시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많은 시간이 지났을 텐데."

나는 그의 유혹을 멍하니 직시했다. 웃음짓는 그. 내민 헬멧. 옛 장군처럼 생긴 우스꽝스러운 헬멧이었다. 나는 그 헬멧을 받아들였다.

다시 한 번 이어지는 접속.

하늘을 날다.

그러나 그 접속의 끝에 남은 것은 토악질 뿐이었다. 간호사가 나를 부축했다.

"다시 한 번만."

나는 침을 꿀럭였다.

"다시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 방으로 돌아가셔야겠습니다."

나는 그 명령에 따랐다. 끝나기 전 나는 의사가 외치는 목소리를 들었다. 예전과 같았다.

병신.

그가 그렇게 생각할 리 없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역시 정신병 때문일 터이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다시 한 번만."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홀로 중얼거렸다. 용의 느낌이 팔다리 이곳저곳을 관통했다. 단 한 번만 다시 날 수 있다면, 영혼을 바칠 수도 있다. 내 심장을 줄 수도 있다. 단 한 번만 그것을 뛰게 해줄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좋았다.

나는 흐느꼈다. 흐느낌과 동시에 외로움은 심해지고, 외로움 가운데서 몸이 부글부글 끓는 듯 했다. 나는 동생과 사람들. 병동에 갇힌 모든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말할 것이다. 내가 조금 더 미쳤다고 욕을 할 것이다. 비웃을 것이다. 위선으로 나를 기만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방 바깥으로 나왔다.

지나다니던 조무사들, 간호사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환자들의 미친 시선.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저 사람은 대체 뭐하는 걸까. 저런 놈은 독방에 가둬야지. 간호사는 뭘 하는 거야. 목덜미 좀 봐. 정말 역겹군. 눈빛이 희번뜩거려.

곧 기막힌 숫자 소리가 내 귀를 덮었다. 그 소리를 따라 몸을 돌렸다. 까칠한 수염에 어린 얼굴을 한 청년이 원주율을 외운다. 입을 벌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사고의 흐름을 알 것만 같다. 같다고 착각하거나.

빨리 조무사를 불러야겠다.

자폐아를 돌보던 간호사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맞받아치고자 크게 소리쳤다.

"그럼 빨리 불러요! 뭘 기다립니까? 빨리 쫓아가란 말입니다."

간호사는 놀란 입을 벌렸다.

그렇다. 그녀는 분명히 이제서야 입을 벌렸다.

나는 혼란스러운 정신을 다잡으며 멍청히 섰다. 그녀는 조무사를 부르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입을 열리는 것을 본다. 그녀는 말한다. 아니 생각한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지?

"뭐라고요?"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조무사를 부르라고. 그렇게 말했잖습니까."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입을 벌렸고 나 역시 입을 벌렸다. 나는 그녀를 본다. 그녀의 눈썹. 옅게 화장한 얼굴 사이로 솟아난 코와. 비강 사이를 지나 흔들거리는 감각의 중추를 볼 수 있는 것만 같다.

가끔 사람들의 생각이 들린다는 것. 나는 그것이 내 착각일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의사들은 망상이 불러온 정신병이라고 하겠지. 그러나 간호사의 반응은 너무나 생생해서 정말로 내가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당신 생각을 압니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간호사는 기분나쁜 표정만을 짓고 조무사를 부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무엇을 부르든 상관하지 않았다. 새로운 깨달음에 놀라 몸을 떨었다. 그녀의 표정. 그러했다. 내가 지금까지 그러한 일들을 해왔을 때 사람들이 짓던 표정. 모두 그것들이었다.

그들은 그것이 우연이라고 했다. 과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그들의 생각을 안다는 것처럼 여기는 것. 그것은 모두 정신병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러했을까. 정말로 그러했을까. 그러한 의문이 불쑥 파고들어왔다. 시험해봐야 한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내 생각에 대해 고민했다. 내 생각은 어쩌면 그저 미친 생각일 뿐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가 늘 그래왔었다. 그 빌어먹을 기기는 단지 내 정신을 속박되게 하고, 미치게 만들 뿐인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기기. 빌어먹을 사고. 그것은 악마처럼 나를 집어삼킨다. 생각이 길어지는 순간 세월 역시 길어지는 끝이 없는 구멍. 내 가족들을 내게서 떼어놓는 괴물. 그 때문에 일어난 것을 생각하며 몸을 찢고 울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그렇다 할지라도 날고 싶다.

나는 날아야만 한다. 그 생각을 품은 채 어쩌면 짧을 수도 있고 어쩌면 길 수도 있는 시간을 기다렸다. 병원에 새로운 근무자가 와 보안기기의 신체정보를 바꿀 때까지.

그때가 되어 나는 몰래 일어났다. 병원의 서버를 해킹한 후 병원의 정보 가운데 내 생체정보를 숨겨두었다. 작업을 하면서 나는 내 기술이 이미 낡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나 그것은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병원의 보안체계를 무너트릴 정도는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설령 광인의 기술일 지라도.

나는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어둠 가운데 몰래 일어났다. 밤 산책을 하는 것처럼 정원에 나간 다음 담장을 쓸고, 문득 돌아서서 조무사가 오기 전에 창고로 향한다.

바로 그 창고에 내 기기가 있었다. 오래되어 낡았으며 이제는 먼지마저 쌓인 물건. 먼지가 쌓인 작은 비닐 차단막을 벗겨내고 내 기기를 바라보았다. 기기를 집은 채 전력이 들어오는 의사의 방으로 향했다.

"다시 한 번만."

심호흡을 한 뒤 그렇게 말했다. 의사의 구형 컴퓨터에 그것을 꽂은 뒤 떨리는 손을 들어 머리에 썼다.

접속.

이어지는 접속.

"한 번만 더."

세 번의 접속 끝에도 해답은 없었다. 나는 미리 막아놓은 문을 누가 두드린다는 것을 알았다. 조무사가 소리치고 있었다. 잠이라도 자다간 나를 발견한 모양이다. 그 뒤로 소리치는 경찰. 하지만 그도 어쩔 수가 없다. 환자들의 난동을 막기 위해 설계된 유리창은 철판보다 단단했다.

"이봐요!"

경찰과 조무사 사이로 다가온 의사가 그렇게 소리쳤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다시 한 번 접속했다.

접속이 생각만큼 되지 않았다. 강철 날개를 퍼덕이던 날개의 상실감이 너무나 컸다. 신경이 떨리고, 그 사이로 피가 희번득이는 것을 느꼈다. 헐떡이는 내게 의사가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중독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다.

"미친짓을 하고 계신 겁니다. 이윤석 씨."

그렇다. 그의 말이 옳을 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그만둘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나."

그렇게 말한 다음 나는 울었다. 의사와 경찰은 당황스럽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 어눌해진 신경 덕택에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무언가를 말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신경들. 꼬인 신경들이 내 몸을 얽죈다는 것. 그 와중에도 자유로운 내 정신은 신경 너머, 그들조차 도달하지 못한 허공을 노린다는 것을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나는 날 것이다.

"선생님. 경고입니다."

몽롱한 표정을 한 내게 의사가 외쳤다. 그는 잠을 방해당한 데에 무척 화가 나 있었다. 그의 생각들이 내게 흘러들어왔다.

"지금 그만두시면 아직 상황이 나쁘지는 않단 소리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이 문을 부술 때까지 계속 그러한 짓거리를 하고 있단 건 무척이나 나쁜 상황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는 나를 위협하고 있다. 흘러들어오는 생각이 아니더라도 쉬이 알 수가 있다.

"이 미친 문을 열어요! 빌어먹을, 점잖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 새벽부터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덜컹거리는 소리. 남자들의 분노. 그것들 때문에 생겨난 두려움이 내 마음을 짓눌렀다. 내 날려는 마음을 방해했다. 내가 신이라도 되는 것인양 붙잡은 기기가 단순한 놀이기구에 지나지 않으며 내 마음은 망상일 뿐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그렇다 할 지라도 날고 싶다.

나는 눈물이 턱을 타고 흐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럴 지라도 좋았다. 나는 가족들을 볼 것이다. 태어난 내 조카. 조카의 아이를 볼 것이다. 날 것이다.

나를 주시하는 사람들. 경찰. 빌어먹을 미친놈 때문에. 그의 생각이 흘러들어왔다. 그들은 나를 정신병이라고 했다. 의사가 그러했다. 동생이 그러했다.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어떠했는가.

나는 그들의 말에 휩쓸렸다. 매일 제대로 생각을 한다고 착각하며 숨죽였다. 매일매일 끝에 가서는 포기한 것이다. 그들을 배려한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그들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진짜일지.

나는 정신병일까? 편집증일까? 의심하고 두려워하는가?

아니다.

그 깨달음에 몸을 떨었다. 나는 안다. 그렇다. 나는 이제서야 깨달을 수 있다. 내 정신이 속삭이는 감각의 촉수를, 흔들거리는 예지의 편린들을 보았다.

꿈꾸어라.

나는 다시 그 명령에 응했다. 기기의 접속부를 눌렀다. 구형 게임기. 그들은 그것이 본질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본질이 아님을 안다.

나는 그것과 함께한 시간을 기억했다. 그것을 공부하며 즐겼던 시절을 기억했다. 늘 그랬다. 단 한 번만 더. 한 번 더.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나는 눈을 감는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다. 조악한 기술로 짜여진 기기와 그것을 구성하는 함수 값들. 그 숫자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의 파노라마를 알 수 있다. 타오르고, 튀겨지는 영혼의 불꽃들을 알 수 있다. 기기의 중추를 파고들었다. 그제서야 나는 드디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나는 용이다.

강철 같은 뼈대는 구름을 뚫고, 펼쳐진 날개는 태양을 향해 솟는다. 유려한 비늘은 꿈틀거리며 흐름을 탄다.

회색으로 찌든 도시를 주유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건물들 사이를 난다. 바람을 찢고 하늘을 가른다. 한없는 자유로움과 무한한 힘. 아무런 상념도 없이 대기를 박찼다.

접속의 끝에서 눈을 떴다. 강철 날개의 짜릿한 느낌. 그것은 이미 내 안으로 파고들어와 있었다.

어둠 가운데서 하나의 번뜩임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내 뇌에서 발원하며 파장을 타고, 인간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거리를 헤메인다. 지구 전체를 흐르는 파장과 함께 뒤섞여 세계로 퍼지고 수많은 생각들 가운데로 그 흐름을 쏘아낸다.

흐름. 그것이다. 너무나 여리고 깨어지기 쉬운 흐름. 뇌의 파장이 내 온 몸을
댓글 4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434 단편 나방과 유화등4 안단테 2009.10.16 0
1433 단편 Bon Voyage, Monsieur Lupin! Mothman 2009.10.15 0
1432 단편 내가너를무심히바라본다 yzombie 2009.10.15 0
1431 단편 Gryphonman # 1 Mothman 2009.10.14 0
1430 단편 무림괴수 Mothman 2009.10.14 0
1429 단편 소원 cena 2009.10.04 0
1428 단편 우아한 생활인2 세이지 2009.10.02 0
1427 단편 경계 (Border) 하로리 2009.09.28 0
1426 단편 Concept Black, Prologue LeftHander 2009.09.27 0
1425 단편 새와 태양, 거인, 그리고 용 Mr.Jones 2009.09.26 0
1424 단편 붉은 눈, 검은 혀4 박하 2009.09.17 0
1423 단편 그녀의 이름은 라돈1 Mothman 2009.09.15 0
1422 단편 그림자 숲. 고담 2009.09.10 0
1421 단편 손은 낚아챈다 메이 2009.09.09 0
1420 단편 소녀시대에게10 우상희 2009.09.09 0
단편 기던 용4 호워프 2009.09.08 0
1418 단편 책도둑 냠냠 2009.09.06 0
1417 단편 발사통제관 역습의 김달삼 2009.09.03 0
1416 단편 문형 2009.08.31 0
1415 단편 그녀는 발길 닿지 않은 곳에 살았다.1 LeftHander 2009.08.30 0
Prev 1 ... 71 72 73 74 75 76 77 78 79 80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