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정의의 거짓말

2009.10.26 15:1810.26

정의의 거짓말


나는 이 거리를 사랑한다. 사각형의 군집형태를 이루며 정확한 간격으로 배치된 건물과 그 사이로 나있는 도로를 보며 나는 안정을 느낀다. 도로는 깨끗했고 불필요한 과다한 장식이나 소란스러운 음악은 찾아볼 수 없다. 바닥에 즐비한 전단지, 취한 채 비틀거리는 날파리들은 이 땅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정돈된 질서의 아름다움만이 있다. 그런 풍경의 한 구석에 위치한 해원의 모습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해원은 일전에 만났을 때보다도 뚱뚱했고 또 지저분했다. 색 바랜 청바지에는 진흙이 묻어있었다.  방 구석에 굴러다니던 것을 줏어입었을 것이 뻔한 난방은 코 푼 휴지조각마냥 쭈글쭈글했다. 해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숨이 턱 막힐 정도의 땀냄새가 났다. 상한 우유, 혹은 오랫동안 방치된 변기통 같은 역한 냄새가 피부에 와 닿았다.
입을 열면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거리가 그의 더러운 모습을 더욱 부각시켰다.
해원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나에게 친한 척을 했다.
“박태민! 오랜만이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특별히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도 없이 지내던 해원이 지난밤 갑작스레 나에게 전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년, 주소지도 바뀌었고 휴대폰 번호도 두 번은 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해원이 내 전화번호를 알게 되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신경을 썼을 터였다.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아냈냐?”
정말로 궁금했다.
해원은 정신연령 미달, 타인배려 부족, 자기관리 미비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병신이다. 나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죽 같은 반을 다닌 동기로, 해원은 그것을 어떠한 운명적 계시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단순한 우연의 일치-혹은 지독한 악운이었을 뿐이다.
해원은 중학교 시절부터 나와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드러냈지만 본래 둔한 것인지 아니면 무시하는 것인지 해원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리는 이야기들이나 학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줏어모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연결시키거나 자신의 취향에 맞게 각색, 보충하여 다시 퍼뜨렸다.
해원이 지어낸 이야기는 기묘할 정도로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해원이 지어낸 이야기는 기묘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한 번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체육선생이 여학생들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체육선생은 여자를 밝히는 바람둥이다!”라는 이야기를 하루 종일 떠들어댄 적이 있는데, 졸업할 무렵에는 체육선생이 바람둥이라는 것을 신입생도 모두 다 알고 있는 정설이 되어버렸을 정도였다.
그런 해원이 지어낸 이야기들을 처음으로 듣고 평하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다.
그 외에도 해원은 사사건건 나에게 참견하며 우정을 과시하고 싶어했다. ‘우정’이라는 것은 해원의 입장에서 이야기 한 것이고, 해원이 나에게 한 행동들은 갈취, 협박, 구타, 방해였을 뿐이다. 나에게 있어 해원은 자연재해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야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난 2년간 나는 해원이 내 연락처를 알아내지 못하도록 주의에 주의를 기울였다. 고등학교 동창들은 내 앞에서는 해원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정도였다.
해원은 머리를 긁적였다. 심하게 떡진 머리는 그의 손가락이 들락거릴 때마다 모양이 헝클어졌다.
“너 밥은 먹었냐?”
네 땀냄새를 맡고 있으니 있던 식욕도 다 날아가 버릴 것 같다. 입안에서 온갖 욕설과 비아냥이 맴돌았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해원은 내가 얼굴을 찌푸리든 헛기침을 하든 신경도 쓰지 않고 나를 끌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리고는 상가 구석에 있는 감자탕집에 들어섰다.
해원은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무슨 동네가 이렇게 조용하냐느니 식당마저 이렇게 조용하면 장사 못해먹는다느니 하며 소란을 떨었다. 그는 가게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떠들었다. 당장 발걸음을 뒤로 돌려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에는 이미 해원이 자리를 잡은 뒤였다. 그는 내 의견은 묻지도 않은 채 뼈다귀해장국 두 그릇을 주문했다.
부글거리며 끓어오른 해장국 두 그릇이 상 위에 올라왔다. 나는 젓가락으로 건더기들을 뒤적거리며, 뼈다귀에 붙은 살점을 대체 어떻게 해야 깔끔하게 떼어낼 수 있나 궁리했다. 해원은 뜨겁지도 않은지 거리낌 없이 맨손으로 뼈를 잡아들어 뜯어먹고 있었다. 씻지도 않은 손으로 뼈를 구석구석 쑤셔대기까지 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한참을 말없이 먹는 것에만 몰두하던 해원이 말했다.
“왜, 석가라고 있었잖아.”
식욕을 잃은 나는 그릇을 쭉 밀어놓고 대답했다.
“석가영?”
석가영은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던 여자애의 이름이었다.
“어, 그래 석가영. 걔 기억하지? 언니가 자살했잖아.”
나는 눈을 치켜 떴다.
석가영의 언니, 지영의 자살에 대한 이야기는 고등학교 시절 입 밖으로 내어선 안되었던 금기였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떠들고 다니던 해원조차 남자 선배들에게 두드려 맞은 이후 입을 다물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가 나를 불러낸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그게 생각해보니까 지영이누나 자살한 거 목격한 사람이 너더라?”
해원의 말대로 지영의 시체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나였다. 나는 그 날 주번일 때문에 해가 뜨기도 전에 첫 차를 타고 등교했다. 숙직실에 계신 선생님께 시체의 발견을 알리고 유서를 보여 준 것도 나였다.
해원은 손에 묻은 국물을 밥상에 문질러 닦았다.
“네 이야기 좀 들어보고 숙제 하는데 참고나 할까 해서.”
“그게 대체 네 숙제랑 무슨 상관인데.”
  “나 문창과 다니잖냐. 이번 학기에 소설 하나 써내야 하는데 적당한 꺼리가 없어서.”
해원은 그렇게 말하고는 식 웃었다. 그 면상이 꼭 거머리의 군집처럼 보였다. 소설이란 말이지. 자극적이고 하등 쓸데없는 감언이설로 대중들을 현혹하는 물건. 해원에게는 더없이 어울렸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해주면 되는데?”
해원은 그 때 보았던 광경이 어땠는지, 기분은 어땠는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엇인지 등을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내키지 않으면 이야기해주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는 해원의 눈은 새로운 소문거리를 생각해낼 여력이 충분해 보였다.
나는 해원이 “태민은 선배의 시체를 보고 충격을 받아 기억이 희미해졌다!”는 식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시체는 학교 벽에 매달려 있었어. 처음에는 누가 교복이라도 걸어놓고 간 줄 알았어. 추워서 빨리 치우고 들어가려고 끌어내리려는데 묵직해서 쳐다보니 사람이더라고.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체육 선생님을 불렀어. 근처에 놓여있던 유서도 보여드렸고.”
이야기를 들은 해원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다야? 기절할 정도로 놀랐거나 꿈에도 선배의 얼굴이 나오지는 않았어?”
“처음 봤을 때는 실감이 안 났고 체육선생님을 부른 이후에는 정신이 없었어. 나중에 생각하니 섬짓하기는 하더라. 석가영이도 불쌍하고.”
해원은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쓰려는 소설에 대해 이야기했다. 좋아하던 선배가 자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 주인공이 선배를 궁지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찾아내어 복수한다는 내용이었다. 복수라니. 해원의 수준에 걸맞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해원은 이 소설에 중요한 것은 리얼리티니 뭐니 하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끝을 모른 채 이어지는 해원의 이야기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다 먹었으면 자리 옮기자. 가게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식당이란 활기차고 시끌시끌 해야 장사가 잘되는 것이라느니 하며 또 다시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 해원은 내가 무시한 채 가게를 나서고 나서야 부랴부랴 따라 나왔다.
해가 벌써 저물어 어둑해져 있었다. 거리는 조용했다. 오와 열을 맞추어 늘어선 건물들 사이로 드물게 자동차 엔진소리만이 들렸다. 식당들이 일찍 폐점하는 일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거리의 어둑함이 평소보다 한 층 더했다. 군데군데 켜진 간판 불빛 아래로 사람 몇몇의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산 캔커피를 마시며 그 사이를 걸어갔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나지 않냐?”
해원이 대충 찌그러뜨려서 바닥에 던진 캔을 주워오는데 될 수 있으면 잊고 싶었던 옛날 이야기가 나왔다.
“너한테 신세도 참 많이 졌는데. 그 왜, 네가 종종 내 숙제도 대신 해주고 그랬잖아. 노트에 빽빽하게 옮겨 적는 그런 거.”
해원은 중학교시절부터 선생님들이 종종 내던 깜지 숙제를 해 대신 내가 하던 일을 말했다.
“너도 참 착했어. 군말 없이 도와주고.”
해원은 내가 온갖 불평과 저항, 완강했던 거부의사를 완전히 잊고 있는 듯 했다. 덧붙여 숙제를 대신 하게 만든 원동력은 내 심성이 아니라 그의 완력이었다.
“생각해보면 너 때문에 내가 성적이 왕창 떨어진 것일지도 몰라. 맨날 네가 나 대신 숙제 해줘서.”
해원은 또 다시 진지한 얼굴로 헛소리를 지껄였다. 내가 해원 대신 깜지 숙제를 하게 된 이후 암기과목의 성적이 올라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싫다는 사람에게 강제로 숙제를 떠맡기고 놀던 사람 탓이지 내 탓이 아니다.
해원은 그 이후에도 나를 붙잡아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막차 시간이 되고 나서야 버스를 타고 돌아가던 해원은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어 큰 소리로 인사하며 마지막까지 소란스럽게 떠나갔다. 으슬한 한기가 느껴졌다. 나는 팔짱을 움츠려 걸으며 내일부터는 점퍼를 입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미대의 과제물이 기절할 정도로 많다는 것은 흔하게 도는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게까지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것은 연필 굴리는 것을 특별히 수고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내 성격 때문일 수도 있고 수많은 과제물을 일일이 체크하기 보다는 한 두 번의 과제를 통해 일괄적으로 평가하려고 하는 교수님의 강의방식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나는 여유롭게 제출할 과제를 준비할 수 있었다.
내가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교실의 풍경이었다. 사각형의 틀 안에 정확한 간격으로 놓여있는 책상, 정 중앙에 배치된 교탁, 어느 위치에서든 잘 보일 수 있도록 정면의 중앙에 놓여진 칠판, 쓸데없는 장식이나 개성을 거세시킨 깔끔한 시설, 무늬 없이 깔끔한 벽은 그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질서의 극치였다. 교실이 간직한 정돈된 질서의 엄숙함을 그려내고 싶었다.
미리 정해둔 시간 동안 배경의 채색을 끝낸 나는 화구를 정리한 뒤 엠피쓰리에 담은 음악을 고르며 실습실을 나섰다. 적당한 볼륨의 음악을 통해 학교의 잡음들을 제거할 작정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는 언제나 쓸데없는 잡음이 가득했다. 삑삑 소리를 내는 엠피쓰리를 조작하며 듣고 싶은 음악을 찾아냈을 때 즈음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검은색 액정위로 가영의 이름이 떠올라있었다.
“어제 이해원 만났어?”
핸드폰을 통해서 씩씩거리는 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영은 해원이 갑작스레 학교에 나타나 지영에 대한 것을 꼬치꼬치 캐묻더라는 이야기를 하며 크게 불쾌해했다. 해원은 나와 만나기 전 먼저 가영에게 찾아간 모양이었다. 3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언니의 자살은 가영에게 아직도 충격으로 남아있을 터였다. 그러한 것을 신경도 쓰지 않고 곧바로 가영에게 물어보러 가는 무배려가 해원답다면 해원다웠다.
가영은 해원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다느니 일부러 엿을 먹이고 있다느니 하며 욕설을 쏟아냈다. 해원이라면 십중팔구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가영에게 넌지시 알려볼까 생각했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비난의 화살이 나에게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입을 다물고 가영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영은 유독 기가 센 여자아이였다. 성적은 교내 최하위권에 키도 작달만했지만 기세만큼은 남에게 눌려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언니인 지영의 후광을 등에 업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지영은 용인에서 날고 긴다 하는 예비건달들을 부하처럼 거느린,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익히 이름을 들어왔을 정도로 일대에서 꽤 유명한 여걸이었다. 지영은 수려한 외모와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인해 남녀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았다. 공부도 꽤 잘하는 편이라, 패를 끌고 다니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생님들도 지영에게는 너그럽게 대하는 편이었다. 그런 언니와 패거리들이 자신의 비위를 맞춰주는 환경 속에서 자라난 가영은 콧대가 높고 무서운 것을 몰랐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지영의 자살 이후 가영의 비위를 맞춰주던 패거리들은 모두 등을 돌렸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지영만 믿고 까불던 가영은 순식간에 외톨이가 되었다. 지영의 죽음 이후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버린 사람들을 보며 가영은 이를 갈았다. 지영의 이름을 빌려 휘둘렀던 가영의 권위는 삽시간에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은 유독 기가 세고 남에게 고개 숙일 줄 모르는 성격 뿐이었다.
지영의 죽음 이후 가영은 조금이라도 자신을 무시하면 무조건적인 분노를 보였다. 나도 한 동안은 가영의 분노를 감내해야 했다. 가영은 언니의 시체를 가장 먼저 발견했던 나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 개자식에게 쓸데없는 소리 했으면 너도 죽을 줄 알아!”
허세밖에 남지 않은 위협이었다. 인천에 위치한 전문학교에 간신히 합격한 후 용인에 돌아오지 않는 가영에게 따를 사람은 없었다. 지영이라면 인천에서도 패거리를 모았겠지만 가영에게는 그만한 능력도 매력도 없었다. 그저 앙상하게 깡마른 자존심만이 가영을 지탱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괜히 밉보여서 원망을 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최대한 부드럽고 원만하게 해원과의 대화를 전해줬다. 나는 절대로 가영이나 지영에 대한 험담은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가영은 다시 해원이 찾아오거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꼭 연락하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며칠 뒤 슈퍼에서 간식거리를 사서 돌아가는데 입구의 벤치에 해원이 앉아 있었다. 헤어진 지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 한층 더 살이 찐 듯한 느낌이었다. 해원은 지난번과 비교하면 비교적 깔끔한 빨강색 체크무늬 난방을 입고 있었다. 해원은 모른척하고 지나가려던 나를 붙잡아 벤치에 앉혔다.
“생각해보니 이유를 모르겠더라고.”
내가 마주 앉자마자 해원이 뚱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지영이누나 자살 말이야. 왜 자살했었지?”
“그건 또 왜 궁금한 건데? 너 소설 쓰는 데는 상관 없는 일이잖아.”
해원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렇게 긁어대는데도 머리숱이 많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냥 궁금해서.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죽었는데 이유도 모르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성적 떨어져서 비관자살 했다고 했을걸?”
학교와 언론에서는 분명 학생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맨 처음 그 사실이 밝혀졌을 때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해원 역시 납득이 되지 않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성적 때문이라고? 그렇게 성적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정말 그것 때문이야? 너 유서 읽어봤을 거 아냐.”
“그건 또 왜 읽어보는데?”
“뭐? 안 읽었어? 왜?”
내가 자살현장에 떨어져있던 유서를 아무 생각 없이 뒤적거릴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냥 유서라고 적혀있는 거 줏어서 숙직하던 선생님께 가져다 드렸을 뿐이야.”
“아 그래?”
“그리고 그 사람이 자살한 이유를 왜 내가 알고 있어야 하는데?”
“가영이가 너한테 가라더라고.”
해원은 또 가영에게 찾아간 모양이었다. 가영이 또 다시 노발대발할 것이 분명해보였다. 나는 자살 사건에 관한 것을 가영에게 물으러 가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해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한테 물으러 올까?”
“차라리 체육선생한테 가지? 그 때 숙직이었고 유서도 읽어봤으니까.”
“아, 그게 체육선생은 다른 데로 갔다고 하더라고. 멀리까지 가기는 또 귀찮아서.”
뉘앙스로 보아하니 선생님들을 찾아보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해원은 그것만을 물어보러 온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알았어. 다음부터는 바로 너한테 올게.”
나한테도 오지 말라고 하면 해원은 누구에게 갈까. 체육선생을 찾으러 가나? 머릿속에 잠시 의문이 떠올랐다. 해원은 그 뒤로도 종종 나에게 찾아오며 자신의 소설에 대한 것들이나 지영에 관한 것 등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들려주거나 물어봤다.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으면 다음 날 똑 같은 것을 물어보러 찾아왔기 때문에 나는 머리를 쥐어짜가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종종 해원이 무슨 소리를 떠들고 다니는지 물어보는 가영도 상대해줘야 했다. 몇 번을 더 찾아오던 해원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쓰려던 이야기를 완성했거나 지영에 관한 흥미를 잃은 듯 했다.
해원이 들락거린 약 한 달여간 나는 작업을 끝마칠 수 있었다. 그림에 담긴 내용 그대로 교실이라고 이름 붙인 내 그림은 형편없이 낮은 점수를 받았다. 점수가 공개된 날 나는 밤늦게 홀로 내 방에 앉아 먼산을 바라봤다. 달이 창문을 벗어날 때까지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냈다. 깔끔하게 봉해져 있는 봉투 안에는 지저분한 필체로 갈겨 쓴 편지 한 장이 있었다. 지영의 유서였다.
유서 안에는 지영이 어떤 사람에게 품었던 연정, 남들 몰래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있었던 것, 우울증,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어떠한 전망도 있을 수 없는 가정환경, 자살을 결심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연인의 배신이었다. 유서 안에는 “나를 능멸하고 배신한 남자에게 절망감과 죄책감을 안겨주고 간다.”라고 쓰여있었다. 이 유서가 세상에 공개되는 일은 없었다. 다른 유서를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 날, 지영은 현관문 바로 옆의 벽에서 발견되었다. 벽에 달려있는 파이프에 목을 맨 지영의 시체는 벽에 딱 달라붙어있어 늦은 겨울의 매미처럼 보였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기 때문인지, 시체의 낯빛이란 원래 그러한 것인지 얼굴은 벽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희었다. 바닥은 선배의 몸에서 새어 나온 오물과 목을 매는데 사용하려고 가져왔던 도구들로 인해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선배의 주변을 정돈하는 일이었다.
정리를 끝낸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유서를 읽었다. 그리고 숙직실에 있을 체육선생에게 찾아갔다. 숙직실에는 술병 몇 개가 굴러다녔다. 새벽부터 학교 문이 활짝 열려있던 이유가 짐작이 되었다. 체육선생은 간밤에 술에 취해 교문을 닫는 것도 잊어버린 채 잠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학교에서 자살한 것도 몰랐을테지.
나는 유서를 읽는 내내 미술학원의 석고상마냥 굳어가는 그의 표정을 보았다. 체육선생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네가 여기서 본 거 절대로 다른 애들한테 말하면 안된다.”
지영의 유서에 적혀있는 남자가 체육선생이라는 것을 유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해원은 나에게 체육선생이 지영을 건드린 것 같다는 이야기를 줄곧 해왔다. 나는 지영과 그 패거리들에게 거슬리는 것이 두려워 해원의 입 단속을 철저히 시킨바 있었다.
체육선생은 나에게 지영의 유서를 꾸며 쓰라고 지시했다. 나는 조건부로 그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지영의 필체를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해원뿐만 아니라 교내의 몇몇 아이들의 숙제를 대신 해주면서 익힌 기술이었다. 나는 최근 들어 학업이 뜻대로 되지 않고 미래가 보이지 않아 자살한다는 간결한 내용의 유서를 완성했다.
경찰은 내가 쓴 유서를 받아 들고 갔다. 나는 이후 체육선생을 통해 시험문제를 미리 받아볼 수 있었다. 또한 지영의 유서 또한 가져갔다. 체육선생은 유서가 자신의 손을 벗어나는 것을 불안해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이것을 어디에도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 이 유서는 내게 있어 단순한 전리품이었다.
학교는 ‘학생과 선생의 연애’라는 괜한 구설수에 오르지 않게 되었다. 지영은 자신의 명예를 다소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체육선생은 최악의 경우 교사해임이라는 결과를 피할 수 있었다. 해원은 언제나 그랬듯 눈에 안 보이는 것에 대한 흥미는 금새 잃어버리고 또 다른 이야기 거리를 찾아갔다. 학생들은 체육선생과 지영에 관한 이야기꽃을 피우는 대신 학업에 매진할 수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이 잘 되었다. 나의 생활, 학교는 금새 평소처럼 잔잔해졌다. 나는 그 안정감에 만족했다.
나는 유서를 몇 번에 걸쳐 다시 읽은 뒤 새로운 봉투에 담아 봉했다. 나는 내 평화를 위해 싸웠던, 승리의 전리품을 서랍 한 구석에 고이 간직했다.
모든 이를 혼란으로 밀어 넣을 뻔 했던 한 장의 유서는 오늘도 그렇게 침묵을 지켰다.







공지 보니까 메일주소 쓰라길래요.
doodm1122@naver.com
댓글 2
  • No Profile
    9crime 09.10.27 11:31 댓글 수정 삭제
    음. 죽은 지영이만 불쌍하게 됐네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알리고 싶었던 것들이었을 텐데.
  • No Profile
    奇極敾 09.10.27 18:53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등장인물을 섬세하게 묘사하는데 너무 치중한 나머지 서사적 시간이 지루해진 감이 있습니다. 해원이라는 인물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해원을 통해 특수한 소설적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징후도 안 보입니다. 단지 지영의 자살을 끄집어내기 위한 설정이었다면 언어를 낭비한 셈입니다. 화자와 해원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사건에 의한다기보다는 화자인 '나'의 자기 토로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때문에 소설적 긴장이 몹시 약하다 하겠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배치와 구성에 따라 여운을 줄 수 있으리라 봅니다만, 평이하게 서술되어서 그냥 그렇구나 하는 느낌입니다. 일인칭 시점이면서 관찰자연하는 '나'의 태도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고등학생이 체육선생님과 밀약을 맺었는데도 아무런 내면적 갈등이 엿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담담하게 과거를 회상합니다. 이 대목은 소설 전반부에서 '나'의 성격과 소설의 핵심 소재를 뒷받침할 이야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라면에 빗대서 전체적인 감평을 해보겠습니다. 냄비에 물을 붓고 라면 봉투를 뜯습니다. 내용물을 꺼냅니다. 불을 켰는지 안 켰는지 냄비의 끓는 점이 요원합니다. 분말 스프와 건더기 스프와 플라스틱같은 라면은 왠지 서먹해보입니다. 조금 뒤 분말 스프의 맛을 봅니다. 라면을 다 먹었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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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3 단편 Bon Voyage, Monsieur Lupin! Mothman 2009.10.15 0
1432 단편 내가너를무심히바라본다 yzombie 2009.10.15 0
1431 단편 Gryphonman # 1 Mothman 2009.10.14 0
1430 단편 무림괴수 Mothman 2009.10.14 0
1429 단편 소원 cena 2009.10.04 0
1428 단편 우아한 생활인2 세이지 2009.10.02 0
1427 단편 경계 (Border) 하로리 2009.09.28 0
1426 단편 Concept Black, Prologue LeftHander 2009.09.27 0
1425 단편 새와 태양, 거인, 그리고 용 Mr.Jones 2009.09.26 0
1424 단편 붉은 눈, 검은 혀4 박하 2009.09.17 0
1423 단편 그녀의 이름은 라돈1 Mothman 2009.09.15 0
1422 단편 그림자 숲. 고담 2009.09.10 0
1421 단편 손은 낚아챈다 메이 2009.09.09 0
1420 단편 소녀시대에게10 우상희 2009.09.09 0
1419 단편 기던 용4 호워프 2009.09.08 0
1418 단편 책도둑 냠냠 2009.09.0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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