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발사통제관

2009.09.03 07:3209.03

"강철 벌집에서 악어-1에게. '풍전'의 발사를 허가한다."

산악지대에 고립되어 있다고 믿었던 우리에게 지하 총사령부의 교신이 들어왔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듯 그들도 아직 살아있군. 무지막지한 폭격 가운데서도 죽진 않았나 봐."

한사람이 겨우 몸을 가눌만한 발사통제실에서 나는 조롱조로 입을 놀렸다. 그 즉시 들려온 것은 주조종실 출처의 시끄러운 스피커음이었다.

"발사통제관 동무! 우리 공화국과 수령동지께서는 불멸하십니다!"

앙칼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고영화 동무. 내 소꿉친구이자, 부관이자, 그리고 4족 보행 전차 '악어'의 조종수이기도 하다.
악어는 2인승이다. 짤막하지만 튼튼한 네 다리로는 평지에서 최대 시속 47km의 속도를 낼 수 있으며, 고체 중거리 미사일인 풍전(風戰) 4기를 탑재하고 있다.
나는 악어의 미사일 발사통제관이며 차장이다. 현재 악어는 4기의 미사일을 탑재중이며, 하나하나에는 전부 도시 하나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핵탄두가 장착되어져 있다.

"통제관 동무. 드디어 우리 공화국이 자본주의의 개 남반부에 심판을 내릴 때가 왔나 봅니다."

영화는 여자치고 당성이 매우 뛰어나다. 국제 사회주의 연합이 붕괴되고 우리가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는 와중에도 그녀는 그것을 사회주의의 체제적 모순 탓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스스로 붕괴되고 전세계가 공산주의로 자체적 진화를 이루리라는 신념만을 굳힐 뿐이었다. 그리고 그 신념은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 남반부(자본주의 체제인 남쪽 지역)를 심판해야 한다는 결의로 이어졌다.

"영화는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이것은 우리가 남반부에 내리는 심판인가?"
"통제관 동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

한 종교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조물주의 모습을 따라 만들어졌으나 죄성을 가지고 타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사상을 기본으로 하는 서방 자본주의 진영은 인간의 본질적 악함을 인정하고 차선책으로 자본주의를 선택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인간을 위대한 존재로 보았다. 철학적 변증법에 따라 정반합(正反合)식 진화를 이루며 스스로를 보다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간다. 그것이 공산 유토피아 사상의 본질이었다.

영화는 물론 이 본질 자체를 신봉하겠지만 나는 이것을 최근 부인하기 시작했다. 공산 사상은 이 공화국을 유토피아는 커녕, 수백만이 얼어죽고 굶어죽고 맞아죽은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얼려죽이고 굶겨죽이고 때려죽인 것이겠지만.
그 살해의 주체는 누구인가? 공화국인가? 당인가? 수령인가? 그것은 아마도 하나의 형체없는 사상일 것이다. 수령은 그 사상의 대행자일 뿐이다.

"통제관 동무가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지만, 이제 당과 공화국의 승리는 필연적입니다. 우리는 학교에서부터 그렇게 배웠잖아요?"
"...그래. 산속에 숨어있는 것도 질려가는 차에 잘 되었다. 어서 발사를 해서 임무를 마치는게 좋겠지."

심판이란건 개소리지만 나의 본분이 군인인 이상 '강철 벌집'에서 내려온 지시를 거역할수는 없다. 어서 미사일을 쏜 다음 더 이상의 책임을 피하고 싶다. 그게 내 소극적인 면피 태도였다.

기존에 사용하던 트럭 운반식 탄도미사일들은 개전초기 전부 남반부의 폭격으로 전투불능상태가 되었다. 액체 연료 미사일은 트럭으로 이동하다가 연료를 충전해 쏘는 방식이기 때문에 연료를 주입하는 상태에서는 꼼짝없이 당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악어는 다르다. 네 다리로 걷고 고체연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산악지형에 숨어있다가 적합한 위치로 나와 즉석에서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

"영화, 발사위치로 이동을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통제관 동무."

통제실이 일정한 간격으로 흔들린다. 발사체를 등에 진 악어가 평지로 걸어나오는 것이다.
이내 움직임이 멎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이어 영화가 미사일 발사를 위한 악어의 고정을 통보했다.

"발사체 기립 시작."

기립은 금방이다. 다음 단계는 목표물 선택이었다. 4기의 풍전 미사일은 이미 각기의 목표물이 배정되어 있다. 남반부 수도, 항구도시 둘, 그리고 군항이었다.

나는 배정된 목표에 동의하고 발사 조작에 들어갔다.
그때,

"대공 레이더에 기체 감지! 적반응입니다!"

적기인가. 상황판단을 하기도 전 폭음과 거센 진동, 스피커속 비명이 통제실을 뒤흔들었다. 잠시후 흔들림이 사라졌다.

"영화, 상황은?"
".......쿨럭...!"

액체가 섞여나오는듯한 기침소리. 예감이 좋지 않다.

"영화!"
"도, 동무...적기는 갔지만...폭발로 파편이..."
"영화..."
"숨을...쉬기가....폐를...쿨럭...!"

스피커 상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어갔다.

"발사를....어서...동무..."

더이상의 회피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소꿉친구를 죽게 내버려두고 발사를 해서 면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영화, 이렇게까지 해서 발사를 해야 하는가? 이대로 가단 공화국 인민의 개죽음과 공멸(共滅)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수령동지가...당이...공화국이..."

뜨거운 것이 자꾸 볼을 타고 흐른다. 이 상황에서도 수령과 당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려는 영화에게 내가 해줄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
"예...통제관 동무..."
"상관이 아닌 너의 소꿉친구로 묻고 싶어."

나는 통신기를 대고 이야기했다.

"우리의 사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었나?"
"당이...건재하면...우리의 행복은...자연히...."
"거짓말하지마! 지금 현재를 보라구! 당은 건재한가? 불멸하기라도 한가? 그래서 우리의 행복은 보장된 건가?"

기침이 섞인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무, 아니...오빠....오빠와 행복할수만 있다면...그래서...저는....쿨럭...당을..."
"영화, 이 길은 아니라고 생각해. 우리는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잘못은 아니야."
"오빠..."
"구급 키트를 가지고 그쪽으로 갈게."

오지말아요. 영화가 소리쳤다.

"오면....안돼요. 오빠에게...내 흉칙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요. 난 이제..."
"영화..."
"오래전의...철없고 순수했던 당시의 저를 기억해 주세요...한 사상에 찌든채 죽어가는 제가 아닌...."

지금이라도 되돌릴수는 없는 건가.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이제는...너무 늦었어요."

그것이 영화와의 마지막 교신이었다.

나는 발사를 중지하고 해치를 열었다. 새어들어오는 빛 사이로 고개를 들자, 푸른 하늘에 길게 늘어진 항적운(航跡雲)이 보였다. 남반부 공군이리라. 물론 일그러진 주조종석은 열지 않기로 했다. 영화와의 약속이니까.

"여기는 강철 벌집. 악어-1, 어째서 발사하지 않는가!"

나는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었다. 그리고 장전해 교신장치에 대고 몇방을 쏘았다. 더 이상의 교신이 들려오지 않을 때까지.

한발은 남겨두었다. 나를 위해서다. 우리의 잘못은 아니지만 우리는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 이제 그 댓가를 치를 시간이다.

남쪽의 하늘을 보며 미소지었다. 그곳-남반부-에서 평범한, 그러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나와 영화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이제는 너무 늦었다."

즐거이 웃으며, 나를 위한 방아쇠를 당겼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431 단편 Gryphonman # 1 Mothman 2009.10.14 0
1430 단편 무림괴수 Mothman 2009.10.14 0
1429 단편 소원 cena 2009.10.04 0
1428 단편 우아한 생활인2 세이지 2009.10.02 0
1427 단편 경계 (Border) 하로리 2009.09.28 0
1426 단편 Concept Black, Prologue LeftHander 2009.09.27 0
1425 단편 새와 태양, 거인, 그리고 용 Mr.Jones 2009.09.26 0
1424 단편 붉은 눈, 검은 혀4 박하 2009.09.17 0
1423 단편 그녀의 이름은 라돈1 Mothman 2009.09.15 0
1422 단편 그림자 숲. 고담 2009.09.10 0
1421 단편 손은 낚아챈다 메이 2009.09.09 0
1420 단편 소녀시대에게10 우상희 2009.09.09 0
1419 단편 기던 용4 호워프 2009.09.08 0
1418 단편 책도둑 냠냠 2009.09.06 0
단편 발사통제관 역습의 김달삼 2009.09.03 0
1416 단편 문형 2009.08.31 0
1415 단편 그녀는 발길 닿지 않은 곳에 살았다.1 LeftHander 2009.08.30 0
1414 단편 광선검의 도공 들개 2009.08.30 0
1413 단편 인터폴, 사제, 마피아 니그라토 2009.08.28 0
1412 단편 코스모스 이발소-연마제와 영웅의 이야기 wholic 2009.08.28 0
Prev 1 ... 71 72 73 74 75 76 77 78 79 80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