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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대보호정책

2021.09.12 06:3709.12

왜 우리는 지금까지 시간여행자들을 보지 못한 걸까?

"어디 한 번 이야기해 보쇼. 널린 게 시간이니까."

 

히스패닉계의 덩치가 말했다. 그는 죄수복이 제법 어울리는 관상을 가진 사람인데, 막상 그와 같은 감방에서 살아본 이들은 '그만큼 친절한 사람이 없다' 고 말했다. 혹자들은 '생양아치에 인간말종, 콧수염 안 달린 히틀러' 라고 했다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소식은 지금 알 수 없다.

 

"그래 맞아 형씨. 지금 백투더퓨처가 거짓말이라는 거야?"
"그건 영화잖아. 당연히 거짓말이라고."
"조용히들 해 봐. 샌님이 입을 열잖아."

 

'샌님' 이라 일컬어진 사내는 말 그대로 왜소했다. 어느 작은 대학의 연구실에서나 볼법한 외형의 남자는 잠시 몸을 풀더니, 입을 열었다.

 

"아,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왜 우리는..."
"맞아, 왜 우리는 지금까지 시간여행자들을 보지 못했는가."

 

왕년에 교편을 잡았다던 샌님은 수업 방향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양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앞에선 다른 범죄자들 역시 한 무리의 학생처럼 보였다. 다만, 교복이 조금 단조로운 줄무늬일 뿐이었다.

 

"우선 패러독스부터 이야기 해야겠구만! 자네들 패러독스가 뭔지 아나?"
"백투더퓨처에 나온 거잖아!"
"맞아, 거기에도 나왔지. 미래에서 온 시간여행자가 과거에서 시간의 연대기를 건드리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근육질의 백인이 무르팍을 크게 휘둘러 내려쳤다. 마치 풍선 터지는 듯한 소리가 샌님의 말을 잘랐고, 그 백인은 아까의 원수라도 갚는 것처럼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백투더퓨처가 사실이었어!"
"계속해도 되겠나? 시간의 연대기를 건드리면 미래가 완전히 바뀌어버리지."

 

히스패닉 덩치는 백인을 진정시키는 듯 손바닥을 내밀었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DVD를 우편으로 보내주던 시절부터 영화를 즐기던 백인은 이 사안에 대해 꽤 진심인 것 같았다.

 

"이 문제를 패러독스로 끌고가보자고. 이 봐, 히스패닉. 자네는 무슨 죄로 감옥에 왔나?"
"살인, 종신형."
"그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의 살인을 막고 싶지 않나?"

 

샌님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히스패닉 덩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쥐었다. 감방에 가득 찬 위압감에 모두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꼈다. 레게를 땋은 흑인은 눈을 감았다. 곧 샌님의 얼굴이 뭉개지거나 그와 유사한 참사가 벌어질 수 있겠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개새끼는 소아성애자였어! 놔뒀으면 더 많은 애새끼들이 피해를 봤을 거라고.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해하네,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일은 해야 하는 법이지. 자리에 앉아주게."
"샌님도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마."

 

흑인은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샌님에게 경고했다. 그는 감방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매순간 감방 동료가 실려 가고 히스패닉의 형기가 늘어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았던 사람이다.

 

"알겠네, 그럼 이야기를 바꿔보자. 내가 먼 미래에 타임머신을 발명했다고 치세."
"불가능할걸? 샌님은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잖아?"

 

분위기를 바꾸어보려는 흑인의 농담에 감방에 웃음이 차올랐다. 모두의 웃음코드가 맞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가끔 이런 일도 일어난다.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샌님은 쓴웃음을 삼켰다.

 

"하여간, 미래의 나는 알고 있겠지. 과거의 내가 얼마나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고생했는지."
“박사라니, 배우신 분 이셨구만.”
"석사 시절의 나에게 실제로 나의 박사 논문인 '연대보호정책' 을 준다고 생각해보세."

 

한동안 그 말을 끝으로 질문을 하거나 무언가 답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30초 정도가 지나고 나서, 백인 영화광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그 논문은 없어지는 거야!"
"맞아, 미래의 내가 준 논문은 과거의 내가 쓴 논문이지. 그런데 과거의 내가 쓰지 않고 미래에서 받으면..."
"아하. 미래의 형씨가 준 논문은 없어지고, 그럼 과거에 줄 수도 없겠네."

 

교편을 잡았다는 샌님은 감방 동료들에게 완벽하게 패러독스를 이해시켰다. 사회에서 촉망받던 학자의 자질은 죄수복으로는 가릴 수 없는 종류의 것인가보다. 단 하루 만에 죄수들은 뜨내기 샌님을 '좀 배웠는데 재수에 옴 붙은 불쌍한 어르신' 으로 여기게 되었다.

 

"실제로 이 내용은 아까 말한 내 박사 논문인 '연대보호정책'의 주된 소재기도 하네."
"꽤 재미있는 일을 하다 오셨구만. 그래서 이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갈 텐가?"
"이제 나머지는 쉽네. 미래에서 온 시간여행자가 과거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나?"

 

교수가 한 '쉽다' 는 말은 강단에서건 감방에서건 모두 뜻이 같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어렵다. 죄수들은 학생들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교수가 이 정적을 깨부수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백인 영화광마저도 같은 모습이었다.

 

"생각해보게, 그 시간여행자가 그냥 논문 하나만 던져주고 가겠나?"
"음... 디버깅을 위해 옛날 컴퓨터를 가져가려나?"
"그게 대수겠나?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겠지. 폭탄테러 같은 악의적인 일부터 시작해서 의도치 않은 참사까지!"
"의도치않은 참사라니?"

 

교수는 대답했다. '시간여행자의 신발에 그 시대의 바이러스가 묻어올 가능성을 생각해보라' 고. 수천 년, 어쩌면 수만 년 동안 진화한 바이러스가 말이다. 그들 시간대에서는 감기에 불과할지 몰라도, 우리 시간대에서는 의도치 않은 생물학적 멸망을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거, 좀 무섭군."
"하지만 걱정 말게. 내가 얼추 해결했으니 말일세."
"아까부터 하던 논문이야기인가? 대체 무슨 내용이요?"
"이번엔 아주 간단하네. 잘 들어보게."

 

다행히, 진짜로, 정말로. 이번에는 간단한 설명이었다. 교수는 실제로 과거에 파티를 열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파티였다. 그리고 다음 날, 신문에 '어제 파티를 열었으니 시간여행자들은 꼭 참석해줄 것' 이라는 광고를 낸다. 그러므로 교수가 열은 파티에는 시간여행자들만 참석할 수 있게 된다.

 

"하하하, 염병. 고작 그런 게 박사 논문이라고? 아마존에서 일하는 내 조카도 쓰겠네"
"물론 아니지. 파티 개최 사례, 그리고 이와 관련된 수학적 논증이 수십 페이지나 되거든."
"니 조카는 못 쓰겠다, 야."

 

졸지에 조카와 함께 욕을 먹은 히스패닉 덩치는 중지를 뽑아 들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서로가 농담인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까와 같은 위압적인 분위기는 없었다. 교수는 히스패닉의 조카 때문에 끊긴 말을 다시 이었다.

 

"결국 우주의 기본적인 정책은 시간의 연대기를 보호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네."
"어, 음... 그러니까... 아, 완전히 이해했네. 이제 그만 하자고 머리가 아파오니까."
"간단하네, 잠시 내 말을 좀 들어보게."

 

질색하는 모두를 무시하며 교수는 말했다. 시간의 연대기는 훼손당하더라도 그 피해를 예방하거나 혹은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사건을 일으킨다. 이러한 움직임은 완전히 무작위여야 하는 파동함수의 붕괴에서도 대칭성이 깨지는 경향으로 알 수 있으며, 이는 우주적인 기본질서가 연대보호정책을 채택할 수 있음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대칭성 붕괴가 반드시 일어나지는 않으며 사인함수에 따라 확률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미시세계에서 미진한 부분을 거시세계에서 보완하는 정책이 필요하며 극단적인 경우 현재시대의 정당방위를 인정할 필요성이...

 

"... 자네들 자나?"
"으아! 아, 아니야. 아니야. 어릴 적에 고양이를 길렀는데, 이름이 에르빈이었어."
"아무튼 이게 내가 말하고 싶은 전부였네. 즐거운 시간이었으면 좋겠군."

 

이야기를 마친 교수는 침대에 편하게 누웠다.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경청한 듯한 백인 영화광은 머릿속으로 한참이나 이야기를 정리한 끝에 다시 교수에게 말을 물었다.

 

"잠깐, 그건 오히려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말 같은데?"
"정확히 들었군, 자네 혹시 대학원은 생각 없나?"
"앞뒤가 안 맞잖아!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왜 우리는 시간여행자들을 보지 못한 건데?"

 

침대에 누워있던 교수는 깊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질문한 예비 대학원생에게 되물었다.

 

"자네는 무슨 죄목이지?"
"절도로 4년. 그럼 교수 당신은 연구비라도 횡령했나?"

 

교수는 떠올렸다. 연대보호정책 논문을 작성하던 시절의 자신을. 지금보다 어리고 담대했으며, 단호했던 시절의 자신을. 아무도 오지 않는 파티, 연구비 명목으로 산 케이크와 샴페인. 어지러울정도로 풍선을 불던 자신의 뒤에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던 기억을.

 

"살인죄였지, 모두를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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