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그라데이션 증후군

2021.08.14 17:4808.14

 

<그라데이션 증후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라데이션 증후군'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앓고 있는 주변인을 본 사람은 많지 않다. 나 역시 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그라데이션 증후군은 실재한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다. 누구나 말이다. 증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외계생물체의 존재를 믿는 것처럼, 사라진 한쪽 양말이 떠난 세계를 믿는 것처럼 말이다. 존재하지만 증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기록해두기 위해 사람들은 많은 노력을 해 왔다. 신화라는 형태로, 혹은 도시괴담이라는 형태로 말이다. 나 역시 비슷한 이유로 이 글을 쓴다. 그라데이션 증후군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기록하고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를 가명으로 ‘이섬’이라 하겠다. 내가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묘사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확실한 건 그가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 그리고 인연이 닿은 사람들에게 전심을 다해 대하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무방비의 순수함 때문에 얕잡아 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친구도 많지 않았다. 삐딱함이 없는 사람은 재미가 없으니까. 결국 그와 같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감각적인 대화에는 서툴렀던 것 같다. 그는 대화에 있어 선택적인 소재의 중요성에 대해 알지 못했다.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다른 소재의 이야기, 다른 말투, 심지어는 다른 스타일의 욕설까지도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때로는 세상사를 향한 비아냥거림이, 누군가를 향한 비꼼이 유머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그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자신이 심취한 주제들을 이야기했다. 모두들 하나 같이 그와의 대화를 지루하다 여겼으리라.

 

 이섬이 처음으로 그라데이션에 심취하게 된 것이 언제였을까. 그건 아마도 아내와 함께 바캉스를 떠났을 때가 아닌가 싶다. 그들은 아름다운 바다로 둘러싸인 몰디브로 떠났는데, 그곳에서 이섬은 뜬금없이 건축양식에 반했던 것이다.

 

 “이거 정말 흥미롭지 않아?”

 

 몰디브식 마사지를 받기 위해 전통가옥에 들어선 이섬이 지붕의 형태를 바라보며 아내에게 말했다.

 

 “몰디브가 지리적으로 보면 아프리카랑 인도 사이에 있잖아. 그래서 그런가, 가옥형태가 어찌 보면 오리엔탈이고 또 어찌 보면 아프리칸 양식이야. 두 대륙 사이에서 어떤 중간변화가 있었는지를 보는 것 같다니까. 문화라는 게 나라마다 툭 끊겨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지리적으로 서서히 변한다는 게 너무 흥미롭단 말이지. 마치 그라데이션 같아. 혹은 오리너구리.”

 

 그가 일장연설을 끝냈을 때 아내는 이미 마사지 가든으로 들어간 뒤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섬의 이런 말들은 아내에게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언제나 늘어놓던 근거 없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뒤로도 이섬은 여행을 갈 때마다 관광의 의미를 그라데이션에서만 찾았다.

 

 “이쪽 지역 사람들의 생김새는 많은 걸 느끼게 하는 것 같아. 동북아시아의 외모랑 아랍계 외모의 중간쯤 돼서 마치 그라데이션을 완성하는 느낌인걸? 역시 사람은 네다섯 가지 인종으로 구분할 수 없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고.”

 

 그는 외출을 할 때도 그라데이션 무늬가 채워진 옷만을 고집했다. 건조를 마친 수건을 정돈할 때에도 색깔의 변화가 자연스럽도록 파란색-하늘색-흰색-베이지색-황토색-풀색 순으로 나열을 했다. 단순히 색깔뿐만이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도 그라데이션을 유지했다. 기상 시에도 갑자기 일어나지 않고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방식을 고수했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 때에도 단 번에 집중시키지 않고 서서히 눈치를 채게끔 유도했다. 주기적으로 폐지와 공병을 모아 이웃 노파에게 보내주곤 했는데, 어떤 날 수거량이 지나치게 많다 싶으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참아야 했다. 감기에 걸렸을 때는 또 어떤가. 너무 갑자기 낫는다고 느낄 때마다 약을 줄여가며 서서히 회복이 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그저 강박이라 여길 뿐 그라데이션 증후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혹여나 그라데이션 증후군이어도 그다지 심각한 수준일 리 없다고 치부했으리라.

 

 그 즈음 아내에게는 더 큰 고민이 있었다. 최근 들어 건망증이 심해진 것이다. 훗날 그것이 이섬의 그라데이션 증후군과 연관이 있음을 깨닫게 되지만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그 즈음에 이섬은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지곤 했는데 아내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방금 전까지 같이 있었는지조차 헷갈렸다. 또 한 번은 이섬의 그라데이션 집착 때문에 크게 다투었는데 정확히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떤 가정용품을 새 것으로 바꾸려 했던 것 같은데. 그때 이섬이 '너무 좋은 것으로 바꾸는 건 그라데이션적이지 않다'며 겨우 한 단계 좋은 것으로 바꾸려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물건이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아내의 건망증은 점점 더 심해져서, 이제는 이섬과 어떤 대화를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고 이섬에게 그라데이션 증상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가끔은 이섬과 결혼한 사실조차 잊고 지낼 때가 많았다. 아마 그 즈음에 이섬은 더욱 자주 사라졌을 테지만 아내는 건망증으로 인해 그 빈도를 체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섬은 그렇게 존재감이 옅어지다가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 사라짐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치 그라데이션 그 자체였다. 아내는 몇 달이 지나서야 자신이 기혼자임을 알게 되었고 이섬이라는 남편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가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 후 치매를 의심하고 찾아간 병원에서 비로소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아내는 치매가 아니었고 그저 이섬의 그라데이션 증후군에 휘말렸던 것이었다. 의사가 말했다.

 

 "남편분께서는 어느 순간 결심을 했을 거요. 완전한 그라데이션 그 자체가 되겠다고 말이지.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서서히 잊히게끔 어떤 기질을 갖추게 되었을 거요. 현재는 그것이 그라데이션 증후군의 말기 증상이라고 학계에서 보고가 되고 있는데……."

 

 아내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으리라.

 

 그럼 이섬은 왜 사라진 걸까. 왜 사라지는 것이 그라데이션 증후군의 말기 증상이어야만 하는 걸까. 인간은 결국 죽음으로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는 존재이다. 사라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그라데이션 증후군으로서 최후의 증상으로 어울리기는 하다. 하지만 너무나 완벽한 그라데이션이라 아무도 기억을 못한다는 점은 심각한 사회문제라 할 수 있다. 최근까지 치유된 케이스가 없다고 하니, 모두 같은 말로를 걷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은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신이나 나나 그라데이션 증후군을 ‘직접 본 기억’이 없는 것이다. 그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그때 우리 사이에 한 명이 더 있었는데? 누구였지?’ 하는 정도의 의문을 품는 것이 다인 셈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자.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는 몇 몇 친구들은 왜 어느 틈엔가 엔딩장면 없이 사라진 걸까. 나는 이제 알고 있다. 그들이 단순히 그럴 만한 존재여서, 그렇게 망각의 심연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님을. 그들이 결코 시시한 존재여서 잊힌 것이 아님을 말이다.

 

 요컨대 잊혀도 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특별했을 것이다.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어 이 글을 쓴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저 어딘가에 이섬 같은 사람이 살았던 것을 기록해두고 싶었을 뿐이고. 어딘가에 존재했을 그와 같은 사람이 당신의 말 한마디에 조심스레 반응하던 시절이 있었고 당신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며 당신의 여운을 되뇌던 시절이 있었음을 말해두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제 주변사람들에게 안부 연락을 좀 더 자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볼 뿐이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654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1장 키미기미 2021.10.31 0
2653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첫 만남 키미기미 2021.10.31 0
2652 단편 발신번호 표시제한 깨비 2021.10.29 0
2651 단편 V (브이) Sagak-Sagak 2021.10.22 2
2650 단편 최후의 인간 쾌몽 2021.10.10 1
2649 단편 미스틱 레스토랑 킥더드림 2021.10.05 0
2648 단편 에버렛 시스템 우서림 2021.09.15 0
2647 단편 가장 효과적인 방법 깨비 2021.09.12 0
2646 단편 연대보호정책 라그린네 2021.09.12 1
2645 단편 寤夢(오몽) - 곧 현실의 꿈 깨비 2021.09.08 0
2644 단편 완벽한 실험체 잉유신 2021.09.07 0
2643 단편 나쁜 사람이 받은 웃는 이모티콘 킥더드림 2021.09.06 0
2642 단편 제주 문어는 바다처럼 운다 빗물 2021.08.30 2
2641 단편 엘러시아와 발푸르기스 니그라토 2021.08.22 0
2640 단편 우주 폭력배론 : 증오 니그라토 2021.08.18 0
단편 그라데이션 증후군 잉유신 2021.08.14 0
2638 단편 [심사제외]빅 리치 니그라토 2021.08.12 0
2637 단편 먼지보다 가벼운 기록 히로 2021.08.09 0
2636 단편 江巨村 (관찰사 이제팔) 키미기미 2021.08.07 0
2635 단편 창귀 (관찰사 이제팔) 키미기미 2021.08.07 0
Prev 1 ...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