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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미스틱 레스토랑

2021.10.05 10:5210.05

1 문턱
성휘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대형마트에 왔다. 혼자 마트를 둘러보고 있다. 회색 하트가 그려진 흰색 티셔츠에 무릎 밑으로 내려오는 옅은 베이지색 긴 주름치마를 입었다. 그 위에 얇은 패딩을 입고 있다. 긴 머리는 전체를 뒤로 넘겨서 묶었고 도수가 높은 알이 큰 안경을 쓰고 있다.
마트 안이 쌀쌀하다. ‘마트 안이 왜 이렇게 쌀쌀하지? 몸이 안 좋은가? 이런 대형마트에 히터가 고장 났을 리가 없을 텐데. 고장 나면 바로 고칠 텐데 좀 이상하네.’
성휘는 무엇을 먹을지 보기 위해 긴 통로 구석구석 돌아다닌다. 가끔 오는 마트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새삼 여기에는 정말 없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건 이곳에 다 모아둔 것만 같다. 카트에 먹을 것을 잔뜩 싣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별 고민 없이 진열대에서 물건을 집어 카트에 바로 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진열되어있는 같은 종류의 여러 식품을 매우 꼼꼼하게 비교해 보고 고민한 끝에 카트에 담는다. 인간의 삶에 있어 먹는 것이 중요하긴 한가 보다. 이렇게 먹을 것이 넘쳐나고 마음껏 먹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더 맛있는 걸 더 많이 먹으려고 갈구한다. 없는 걸 찾아 헤매고 존재하지 않는 걸 만들어 내기까지 한다. 그러고도 만족을 못 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기를 바라는 게 인간인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원하는 대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성휘는 정육 코너를 지나가고 있다. 붉은색 빛이 도는 돼지고기와 소고기가 비닐포장에 위생적으로 말끔하게 싸인 채 각 부위별로 진열되어 있다. 매끈하고 윤기가 나는 비닐포장과 고기위로 떨어지는 야릇한 조명 빛이 붉은색 살코기를 더욱 먹음직스럽게 보이게 한다. 성휘는 고기가 진열된 냉장실 안으로 손을 넣었다. 냉장실에서 나오는 찬 기운이 손 전체에 그대로 전달 되어 몸이 오싹거린다. 무심코 소고기 등심 부위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고기를 누른 손가락 끝에 살코기의 부드러운 육질이 그대로 느껴졌다. 성휘는 정육 코너에서 나와 돌아다니다 라면이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왔다. 라면을 보자마자 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성휘는 평소 엄마가 먹지 못하게 하던 라면을 먹기로 마음 먹었다. 라면 5개가 들어있는 한 묶음을 사서 계산을 하고 마트에서 나왔다.
성휘는 라면 다섯 개가 들어있는 비닐 봉지를 들고 집으로 향한다.
집으로 가는 길에 생각한다. ‘참으로 이상하구나. 죽으려는데 식욕이 있다니. 그렇다고 뭐.. 그렇게 대단한 식욕도 아니다. 그저 맛있게 끓여진 라면이 먹고 싶을 뿐이다.’
집에 왔다. 아무도 없다. 라면 먹기 좋은 날이다. 성휘는 냄비에 물을 적당량 붓고 전기레인지에 올려 놓는다. 라면 봉지를 뜯고 냉장고에서 파와 양파를 꺼냈다. 물이 끓는 동안 파와 양파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물이 끓기 시작한다. 성휘는 끓는 물에 면과 스프를 넣었다. 냉장고에서 배추김치를 꺼내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접시에 정갈하게 담는다. 김치를 썰고 나서 다시 냉장고 문을 열어 계란 하나를 꺼냈다. 냄비에 계란을 살짝 부딪쳐 껍질을 깬 후 끓고 있는 라면에 계란을 넣는다. 계란 껍질을 쓰레기 통에 버린다. 성휘는 혹시 계란 껍질에 살모넬라균이 묻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싱크대에서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었다. 끓고 있는 라면에 이미 썰어 놓은 파와 양파를 넣는다. 면이 어느 정도 잘 익은 거 같다. 전기레인지를 끄고 냄비에 있는 라면을 큰 그릇에 옮겨 담았다. 라면, 김치, 수저를 쟁반 위에 놓고 식탁으로 가져가 자리에 앉았다. 라면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한 젓가락을 들어 입으로 후후 불어 면을 식힌 후 입에 넣었다. 면을 씹기 시작한다. 맛있다. 얼마만에 먹어 보는 라면인가.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단 말인가. 라면의 개발은 인류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높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게 한 엄청난 사건이나 다름 없다. 라면 하나로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하지만 성휘는 알고 있다. 라면을 먹는 이 소소한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라면은 근원적인 두려움과 불안을 상쇄시키지 못한다.
‘이렇게 맛있는 걸 엄마는 왜 못 먹게 하는 걸까?’
단숨에 라면 한 그릇을 먹었다. 국물까지 남김없이 다 마셨다. 이 즐거움을 라면 한 그릇으로 끝내기는 많이 아쉽다. 성휘는 부엌으로 가서 똑같은 방법으로 라면 한 그릇을 더 끓였다. 식탁으로 가져와 두 그릇째 먹기 시작한다. 여전히 맛있다. 그런데 먹을수록 배가 부르기 시작한다. 두 그릇째를 거의 다 먹어갈 때쯤에는 배가 가득 찬 느낌이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국물까지 남김없이 다 먹었다. 하나 더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성휘는 부엌으로 가서 라면 한 개를 더 끓였다. 이번에는 계란, 파, 양파를 넣지 않았다. 라면 세 그릇째를 먹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첫 번째 젓가락부터 맛있지가 않다. 면은 텁텁하고 국물은 느끼하다. 그래도 성휘는 계속 먹는다. 꾸역꾸역 먹는다. 중간 정도 먹었을 때 배가 터질 것 같고 목에서 신물이 넘어올 것만 같다. 도전한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먹으리라 다짐한다. 한 숨을 크게 한 번 쉬고 다시 먹기 시작한다. 억지로 억지로 세 번째 라면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성휘는 먹은 그릇을 쟁반에 올리고 부엌으로 간다. 배가 너무 불러서 부엌까지 몇 발 안 되는 거리조차 걷는 것이 버겁다. 싱크대에서 그릇에 묻은 기름기와 김치국물을 적당히 헹궈냈다. 먹은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세척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방금 먹은 라면이 안에서 넘어오려고 한다. 성휘는 바로 화장실로 달려간다. 가는 동안 라면이 식도를 역류해 입안으로 도달했다. 안에서는 계속 넘어온다. 성휘는 필사적으로 손으로 입을 막고 화장실에 도착했다. 변기에 먹은 라면을 게워낸다. 면발과 국물이 시큼한 위산과 함께 쏟아져 나온다. 토하는 것이 매우 고통스럽다. 한참을 게워낸 후 성휘는 화장실 바닥에 천장을 보고 누웠다. 입 주위에 라면 찌꺼기와 국물이 묻어있고 옷에도 여기저기 라면 국물이 많이 튀어 더러워졌다. 성휘는 일어나 다시 부엌으로 갔다. 다용도실 문을 연다. 입고 있는 옷을 벗어 빨래 바구니에 넣는다. 속옷까지 다 벗어서 넣었다. 성휘는 알몸으로 싱크대로 가서 서랍을 열어 과도를 꺼냈다. 오른 손에 과도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책상 한 켠에 놓여있던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시 화장실로 갔다. 물기 없이 건조하게 마른 세면대에 과도와 스마트폰을 놓았다. 성휘는 샤워를 한다. 샤워를 하면서 이도 닦는다. 이를 닦으니 입안에 감돌던 시큼하고 텁텁한 맛이 사라지고 민트 향으로 채워졌다. 몸 구석구석도 깨끗이 씻었다. 샤워를 마치고 욕조에 미지근한 물을 받는다. 욕조에 앉았을 때 가슴 높이 정도까지 오도록 물을 채운 뒤 수도를 잠갔다. 화장실 안은 수증기로 가득하다. 성휘는 세면대에 있던 과도와 스마트폰을 욕조와 붙어있는 선반에 놓고 욕조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니 금방 몸이 이완되고 노곤해지는 느낌이 든다. 콧잔등과 인중 주위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성휘는 스마트폰의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를 열어 음악을 검색한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사랑의 죽음>을 선택하고 음악을 재생 한다. 화장실 안에 오페라가 울려 퍼진다. 성휘는 오른손으로 과도를 들었다. 잠시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한다. 선곡한 음악이 마음에 든다. 음악이 자신의 심정과 잘 맞는 것 같다. 무언가 결심한 듯 눈을 떴다. 성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과도 끝으로 왼 손목 안 왼쪽 끝을 찌른다. 칼이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 좀 더 힘있게 찌른다. 뜨거운 통증과 함께 칼 끝이 살을 파고 들어갔다. 주저하지 않고 칼을 잡고 있는 손을 안으로 당겨서 손목 끝까지 그었다. 베인 곳에서 붉은 피가 스며 나온다. 핏방울이 욕조 안의 물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다. 성휘는 떨어지는 핏방울을 본다. 핏방울은 붉은 색 잉크마냥 물 안에서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내며 서서히 퍼져나간다. 물이 점점 붉게 변하면서 물 안의 성휘의 몸도 점점 붉은 색으로 보인다. 이내 욕조 안의 물 전체가 붉은 피와 뒤섞여 투명함은 사라졌다. 성휘는 어제 남자친구에게 갑자기 화를 냈던 게 생각났다. 화를 크게 냈었고 남자친구는 영문도 모른 채 받아주었다. 그 화를 받아주다니 착하다. 하지만 남자 친구에게 미안하지는 않다. 부모님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두렵다. 몸에 힘이 빠지고 의식이 약해진다. 조금씩 조금씩 나른해진다. 아픔은 느껴지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혼미해져 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정신이 흐려질수록 기분이 좋아진다.
'참으로 이상하구나. 기분이 왜 좋아지지?'
성휘는 알 수 없는 쾌감마저 들었다. 첫 번째 라면을 먹을 때와는 다른 기분 좋음이다. 갑자기 죽기 싫어졌다.
'어쩌면 문득문득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즐거움 때문에 삶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있으면 대학생이 되는데 대학생활도 못해보고 죽는 건 억울하다. 제대로 된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의식을 잃어가던 성휘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사랑의 죽음>이 흘러나오는 스마트폰을 힘겹게 들었다. 피 묻은 손이 스마트폰을 피범벅으로 만든다. 통화 앱을 누르고 맨 위 즐겨찾기로 고정 돼있는 남자친구 이름 조진성을 눌렀다. 전화가 걸려 신호가 가고 남자친구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진성아, 우리 집으로 빨리 와 줘. 나 화장실에 있어. 우리 집 현관 번호는 내 생년월일이야." 힘 없이 말한 후 전화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주여! 다시 살고 싶어졌습니다. 살아나면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제 앞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나요? 너무너무 두려워요! 저와 함께해주세요.'
몸이 녹아 내리는 것 같고 몸의 형상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손목에서 계속 피가 흐르고 입술은 점점 파래진다. 의식을 거의 잃어가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2 미스틱 레스토랑
해가 지기 전 어느 저녁 성휘는 신사동의 한 좁은 골목길을 천천히 걷고 있다. 파란색 하트가 그려진 하얀색 티셔츠에 옅은 색 빈티지 데님팬츠를 입고 있다. 그 위에 무릎 높이까지 내려오는 패딩을 입었다. 해가 지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하고 아직 날이 밝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지나는 골목은 이상하게 어둡게 느껴진다. 양 옆으로 늘어서 있는 모든 가게들의 불이 꺼져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듯 하다. 일찍 문을 닫은 가게도 있는 것 같고, 아예 폐업을 한 가게도 많은 것 같다. 원래 이 골목 분위기가 이랬나 싶다. 한 블럭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니 여기는 문을 연 가게들이 드문 드문 있다. 또 한 블럭을 더 지나 다른 골목으로 왔다. 여기 있는 가게는 대부분 문을 열었다. 두 블럭 전에 지나온 골목과 지금 지나는 골목은 같은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어떤 차이가 이렇게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만드는지 궁금하다. 거리도 멀지 않고 별 다를 것도 없는데 말이다. 성휘는 계속 골목을 걷는다. 마치 마음 속 미로를 헤매고 있는 기분이다. 이 골목길에는 예쁜 식당들이 많이 모여있다. 집이랑 멀지 않은 곳에 이렇게 분위기 좋은 식당들이 모여있는 골목이 있는 줄 전혀 몰랐다. 걷다 보니 유독 눈에 띄는 식당이 있다. 성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식당 입구 앞에 섰다. 입구에 붙은 작은 간판에 예쁜 글자체로 <레스토랑 상크튀에르>라고 적혀있다. 식당 이름이 왠지 마음에 든다. 2층짜리 건물에 1층 전체가 식당이다. 식당 건물 앞에 꽤 넓은 테라스가 있다. 테라스에는 이름 모를 여러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중간에는 테라스 반 이상에 그늘을 만들어 낼 만한 아주 커다랗고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테라스보다는 정원이나 뜰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듯하다. 큰 나무를 중심으로 테이블 여러 개가 놓여있고 각 테이블 마다 파라솔이 있다. 테라스 한 쪽에 있는 담을 따라 폭이 좁고 긴 화단도 있다. 화단에는 연한 빨간색 꽃들이 심어져 있다. 성휘는 테라스의 아름다움에 홀렸다. 입구에 서서 넋을 놓고 이 식당을 계속 바라본다. 해가 넘어 가면서 주황빛 저녁 노을이 내려 앉아 테라스는 한층 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식당 건물은 접이식 유리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어 테라스 너머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빨간색과 녹색으로 꾸며진 벽이 눈에 확 띈다. 식당 안은 다양한 꽃과 고풍스러운 소품들로 장식되어 있다. 멋진 인테리어 위로 할로겐 조명의 따뜻한 빛이 떨어지고 있다. 주황빛 자연광과 은은한 할로겐 조명, 나뭇잎의 녹색과 실내 벽의 청록색, 꽃의 다홍색과 실내 벽의 붉은색, 오래된 나무의 불규칙한 나뭇결과 매끈하게 손질된 테이블의 나뭇결. 이렇듯 레스토랑 상크튀에르는 자연적이면서도 인공적인 질감과 색감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공간이다. 식당 건물 안과 테라스에는 식사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무언가 조금 이상하다. 지금은 2월 달이다. 어떻게 여기 나무는 푸르고 꽃이 피어있단 말인가. 성휘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있는 가로수를 본다. 나뭇가지가 앙상하다. 그러고 보니 테라스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볍다.
'참으로 이상하구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시공간이다. 성휘는 무엇에 홀린 든 자신도 모르게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몸이 공중에 붕 떠오르는 기분이 아주 잠시 들었다.
'이 기분은 뭐지?'
잠시 후 따뜻한 기운이 온 몸을 휘감는다. 따뜻하다 못해 조금 덥기까지 하다. 성휘는 입고 있던 얇은 패딩을 벗었다. 패딩을 벗으니 더운 감은 사라졌고 적당히 따뜻한 온도가 됐다. 순간적으로 다른 세상으로 이동한 한 것만 같다.
말끔하게 차려 입은 아름다운 종업원이 성휘에게 다가온다.
"몇 분이세요?" 종업원이 물었다.
"혼자 왔는데요." 성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 그러세요.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 종업원은 밝은 미소와 함께 매우 친절한 태도로 말했다.
종업원은 성휘를 테라스 가장 안쪽으로 데리고 가서 담장 아래 있는 화단 옆 두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두 사람이 앉는 자리 치고는 테이블이 꽤 큰 편이어서 좋다.
"테이블 위에 메뉴 천천히 보시고 어떤 걸로 주문할지 결정하시면 불러주세요." 종업원은 밝은 미소를 남기고 다른 곳으로 갔다.
성휘는 주위를 둘러본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테라스 안이 훨씬 넓고 분위기도 좋다.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 안 식당도 멀리서 볼 때 보다 훨씬 예쁘다. 식사를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은 밝은 웃음으로 가득하다.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면서 얘기하는 사람들, 바라만 봐도 좋은지 말없이 미소를 짓는 사람들, 음식의 맛에 감탄을 쏟아내며 만족해하는 사람들.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메뉴를 꼼꼼히 살펴본 끝에 자리를 안내해 준 종업원에게 알리 올리오 파스타, 연어 샐러드, 레드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진짜 여기 너무 좋은데요. 저는 이 근처에 살면서 여기를 오늘 처음 알았어요. 건물, 인테리어, 조경 정말 다 너무 멋져요." 성휘가 주문을 마치고 종업원에게 말했다.
"그러시군요. 저희 주인님께서는 건축가세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이시죠. 건물이랑 조경 전부 다 저희 주인님께서 설계하고 디자인하신 거에요."
"아! 식당 사장님이 건축가구나. 어쩐지 분위기가 남다르다 했어요. 사장님 성함이 뭐에요?"
"저희 주인님 성함은 스텔라 리 입니다. "
"스텔라 리 선생님. 저는 처음 들어봤어요."
"아, 그러세요. 건축에 관심이 없으면 당연히 처음 들어보실 수 있죠. 건축 쪽에서는 신화 같은 분이세요. 주로 유럽에서 활동하셨다고 들었어요. 작년에 귀국하셨고요. 2층이 저희 주인님 건축 사무소에요. 귀국하시기 전부터 건축 사무소랑 레스토랑을 같이 준비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레스토랑 상크튀에르는 오프한지 얼마 안 됐어요. 아마 그래서 고객님께서 저희 레스토랑을 모르셨을 수도 있습니다. 주문하신 음식은 조금 기다리시면 금방 나올 거에요." 이번에도 종업원은 밝은 미소를 남기고 다른 곳으로 갔다.
성휘는 종업원이 식당 사장님을 왜 주인님이라고 부르지는 의아했다. 아무리 식당 주인이라 해도 사장님, 대표님과 같은 조금 더 적절하게 들리는 단어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해가 완전히 지자 테라스 위를 엑스 자로 가로지는 전선에 줄줄이 걸린 백열등에 불이 들어왔다. 끈적끈적한 재즈음악도 흘러나온다. 자연광이 비출 때 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연출 된다. 해가 지기 전에는 즐거운 가운데 인위적인 엄숙함이 깔려 있었다면 지금은 은밀하게 숨겨 놓은 걸 풀어헤친 듯한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음식과 술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층 더 들뜨고 유쾌해 보인다. 바뀐 빛은 식당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까지 바꿔놓았다. 이 곳은 마치 우리가 보는 세상은 빛으로 빚어져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알려주고 있는 것만 같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하얀 접시에 예쁘게 담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알리 올리오 파스타. 큰 볼에 담긴 여러 종류의 야채와 얇게 썰린 훈제 연어. 다 맛있어 보인다. 우선 연어 샐러드를 먹어본다. 쌉싸래한 야채에 드레싱의 새콤달콤한 맛이 더해지고 거기다 잘 훈제된 연어의 식감까지 정말 기가 막히다. 이번에는 포크로 잘 말아 알리 올리오 파스타를 먹는다. 약간 탄듯한 마늘 향과 따뜻한 올리브 유의 부드러운 맛이 탱글탱글한 파스타 면발에 잘 어우러진다. 너무 맛있다. 별로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데 지금껏 먹어 본 알리 올리오 파스타 중 제일 맛있다. 파스타를 다 넘기기 전에 레드 와인 한 모금을 마신다. 마치 천국에 온 것 같다. 천사들의 나팔 소리가 귀에서 들리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성휘는 눈 깜짝할 새 알리 올리오 파스타, 연어 샐러드, 와인 한 잔을 해치웠다.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다 먹고 나니 크림 파스타 맛이 궁금해졌다. 미소를 남기고 간 종업원이 다시 찾아왔다.
“고객님, 더 필요한 거 있으세요?”
“저, 이번에 크림 파스타가 먹고 싶어요. 추천 좀 해주세요.”
종업원은 미소와 함께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저희는 한 사람 앞에 식사 하나밖에 제공하지 않습니다. 고객님께서는 이미 알리 올리오 파스타를 드셔서 크림 파스타를 주문 하실 수 없으세요. 죄송합니다.”
이상한 식당이다. “왜 그런 거죠?” 성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고객님들께 최대한 신선한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서 저희는 식자재를 많이 준비해 놓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한된 식재료로 가능한 많은 분들께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어요. 고객님께서 이해해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종업원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럼 할 수 없죠.”
“저희가 와인이랑 간단한 안주 정도는 주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휘는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주는 어떤 게 있죠?”
“고객님, 치즈 어떨까요? 여러 가지 치즈가 함께 나오는데 맛있어서 손님들한테 인기가 아주 많습니다.”
“네. 좋아요. 치즈 주시고요. 제가 한 잔 마셨던 와인, 같은 걸로 한 병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종업원은 이번에도 아름다운 미소를 남기고 다른 곳으로 갔다.
성휘는 다른 테이블로 가는 종업원의 뒷모습을 본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천사 같고 기분 좋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녀의 뒷모습에도 미소가 보인다. 잠시 후 와인과 치즈가 나왔다. 큰 접시에 많지 않은 양의 다양한 치즈가 예쁘게 담겨있다. 작은 치즈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치즈 특유의 짭짜름함에 우유의 고소한 맛이 풍부하게 더해져 있다. 치즈도 너무 맛있다. 그리고 와인 한 모금을 마신다. 다시 한 번 지금 천국에 와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휘는 와인을 마시다 하늘을 한번 올려다 봤다. 밤하늘은 칠흑같이 어둡다.
성휘는 아주 작은 소리로 기도하듯 말한다. “제 삶에도 이렇게 즐거울 때가 있네요. 주님!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제발, 저와 함께 해주세요.”
이때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테라스에 있는 나무의 잎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나뭇잎에 닿는 바람소리가 왠지 반갑다.
테이블 옆을 지나가던 어떤 여인이 성휘에게 말을 건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여기 잠시 앉아도 괜찮을까요?”
성휘는 그 여인을 빤히 쳐다봤다. “아.. 네. 그럼요. 괜찮습니다.” 갑작스러운 물음이 당황스러웠고 자신도 모르게 괜찮다고 했다.
그 여인은 앉아도 괜찮다는 대답을 듣고 성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맞은 편에 앉은 여인은 성휘보다 적어도 10살 이상은 많아 보이고, 패션디자이너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우 세련된 스타일로 꾸몄다.
“갑자기 앉아도 되냐고 물어봐서 당황했죠?” 여인이 물었다.
“네. 조금 당황했는데 괜찮습니다.”
“혼자 온 거 같은데 같이 한 잔 하는 거 어때요? 혼자 즐기는데 제가 방해한 거라면 지금이라도 일어날게요.”
“아니에요. 저도 같이 한 잔 하고 싶어요.” 성휘는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로 앞에 있는 여인과 같이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종업원이 와인 잔 하나를 가지고 왔고 여인은 종업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다. 성휘의 잔과 자신의 잔에 와인을 따른다. 와인 따르는 소리가 맑고 경쾌하다. 여인이 성휘에게 잔을 내밀어 건배 제안을 했고 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친 후 와인 한 모금씩 마신다.
“반가워요. 저는 스텔라 리라고 해요.”
“아! 안녕하세요? 여기 식당 주인님 맞으시죠? 저는 이성휘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맞아요. 저를 어떻게 알고 있죠?”
“주문 받는 직원 분한테 들었어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라고 들었습니다. 직원 분이 건축 업계에서는 신화적인 존재시라고 하더라고요.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스텔라가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하하. 아니에요. 건축가로 열심히 살기는 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런데 말이죠. 참으로 이상하네요.”
“뭐가 이상해요?”
“이름이 이성휘라고 했죠?”
“네. 이성휘 맞습니다.”
“지나가는데 성휘씨 보니까 제 아들이 생각나는 거에요.”
“저를 보고 주인님 아드님 생각났다고요? 왜요?”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네. 제 아들이 생각났어요. 이유는 저도 모르겠어요. 어딘가 제 아들하고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스텔라가 성휘를 빤히 쳐다본다. “아닌가? 어쨌든 아들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마침 혼자 있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자리에 앉아서 같이 한 잔해도 되냐고 물은 거에요.”
“네, 그러셨군요. 주인님이 상당히 미인이셔서 주인님 닮았으면 아드님도 잘 생겼을 거 같아요. 아직은 굉장히 예쁘고 귀엽겠네요. 아드님 이름이 뭐에요?”
“제 아들 이름은 조성호에요. 귀엽긴요. 징그럽죠. 지금 나이가 몇 인데요. 전혀 귀엽지 않아요.”
“징그럽다고요? 몇 살이길래 징그럽다고 하는 거에요? 제 생각에는 아주 어릴 거 같은데요.”
“아마 성휘씨 보다 많을 걸요. 우리 아들은 스물 다섯 살이에요. 성휘씨가 몇 살이에요?”
성휘는 스텔라 아들의 나이를 듣고 깜짝 놀랐다. “아드님 나이가 스물 다섯 살이라고요? 저는 이제 스무 살 됐어요. 그럼 저보다 다섯 살이나 많다는 거네요?”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성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에이, 농담이시죠? 저 놀리시는 거 맞죠? 주인님 연배에 그 정도로 큰 아들이 있을 것으로는 안 보이는데요.”
“농담 아니에요. 정말 스물 다섯 살 맞아요.”
“정말이요? 저는 아드님 나이가 많아 봐야 다섯 살, 여섯 살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주인님께서는 어떻게 되시는지.. 많아야 서른 중반으로 보이는데요.”
스텔라가 유쾌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하하. 젊게 봐줘서 고마워요. 저는 마흔 넷이에요. 우리 아들이 스물 다섯이니까 굉장히 일찍 낳은 편이죠.”
성휘는 스텔라의 나이를 듣고도 놀랐지만, 매우 이른 나이에 출산한 것에 더 놀랐다. “그러게요. 매우 이른 나이에 낳으셨네요.”
“맞아요. 열 아홉 살에 임신해서 스무 살에 낳았어요. 딱 성휘씨 나이네요.”
“그러게요. 진짜 제 나이에 낳으신 거네요. 그럼. 혹시 고등학교 때 임신하신 거에요?”
“음.. 그렇다고 봐야죠. 고3 12월에 임신했고, 대학교 1학년 때 출산했어요. 성휘씨도 한 달 정도 후면 대학에 입학하겠네요?”
“네, 저도 이제 곧 대학생이에요.” 성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시 남자 친구와 크리스마스 이브를 기념해 잠자리를 가졌는데 그때 임신이 된 거에요. 정말 철이 없었죠.”
“아.. 그러셨구나. 그럼 아드님은 지금 뭐하세요?”
“아들은 대학 졸업하고 취업하기 전까지 시간이 좀 있어서 여행 갔어요.”
“와! 여행. 부럽다. 어디로 갔어요?”
“남미로 갔어요. 시간 있을 때 충분히 여행하면서 다른 세상을 한번 느껴보라고 제가 적극 권했어요.”
“우와!! 남미 너무 좋겠다. 저도 남미에 가보고 싶어요. 맞는지 모르겠지만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곳이라고 알고 있어요. 진짜 부럽네요.”
“하하. 맞아요.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곳이죠. 부러워할 거 없어요. 성휘씨도 언젠가 갈 기회가 있을 거에요.” 스텔라가 유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남미면 꽤 머니까 오랜 기간 여행 하겠어요?”
“원래는 두 달 예정으로 갔어요. 그런데 출발한지 한 달 정도 됐는데, 여행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해요.”
“그 먼 남미까지 가서 여행하다 말고 돌아온다고요?”
“네. 그렇게 됐어요”
“흔하지 않은 기회일 텐데 왜 중간에 돌아와요? 무슨 일이 있나 보네요.”
“글쎄 브라질 여행 중에 강도를 당했다지 뭐에요.”
강도를 당했다는 말에 성휘는 크게 놀랐다. “어머, 말도 안돼! 브라질에서 강도를 당했다고요? 어떻게 그런 일이. 다치지는 않았대요?”
“다행이 다친 데는 없다고 하더라고요.” 스텔라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들이 외국에서 강도를 만났다는 사실을 별다른 감정 동요 없이 차분하게 말하는 스텔라의 모습이 성휘는 조금 의아했다..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섭네요. 어떻게 하다가 강도를 당한 거에요?”
“버스를 타고 브라질의 어느 시골길을 가고 있어나 봐요. 잘은 모르겠지만 브라질 현지 여행사를 통해서 버스 관광 같은 걸 했던 거 같더라고요. 인적도 드물고 포장도 되어있지 않은 시골길을 버스가 뿌옇게 먼지를 날리며 달리고 있었대요. 오랜 시간 버스는 홀로 황막한 시골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버스 먼 뒤편에서 거친 자동차 엔진소리와 함께 총 쏘는 소리가 들렸대요. 그리고 곧 기관총으로 무장한 강도가 타고 있는 지프차 두 대가 버스 양 옆으로 다가왔고 공중에다 총을 쏘아대며 버스를 세웠대요.”
“기… 기관총으로 무장한 강도요?” 성휘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성휘의 물음에 스텔라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을 이어간다. “네. 강도가 기관총으로 무장을 했대요. 그리고 나서 강도 두 명이 버스에 들어와 소리를 지르며 승객들을 밖으로 내리라고 했대요. 버스에 운전사, 관광가이드 포함해 타고 있던 사람이 열 명 조금 넘었다고 하더라고요. 모두 버스 밖으로 내보내고 바닥에 엎드리게 한 후 손과 발을 묶었고 말도 하지 못하게 천으로 입도 묶었대요. 그리고 강도들은 머리 뒤에다 총을 겨누고 승객들의 현금, 휴대폰, 여권을 빼앗았대요. 그리고 강도들은 다시 지프차를 타고 먼지를 날리며 빠르게 사라졌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듣기만 해도 무서운데 당한 사람들은 엄청 공포스러웠겠어요.”
“낯선 땅에서 강도를 만나 자기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었으니까 그 공포감은 상상도 못하죠.”
“그러게요. 상상만해도 무서워요. 저 지금 소름 돋았어요.” 성휘가 스텔라에게 자신의 팔에 소름이 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어머, 진짜 소름이 돋았네요.” 스텔라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한다.
“주인님은 아드님이 강도를 당했는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시네요.”
“하하. 그런가요? 처음에는 정말 엄청 놀랐었죠. 지금은 많이 진정이 돼서 그래요. 다친 데가 없어서 다행이기는 한데 대사관을 통해서 아들이랑 통화했는데 완전히 넋이 나가있더라고요. 아들이 그러한 상태인데 저라도 정신차리고 있어야죠. 안 다쳐서 평온한 마음을 찾을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당연히 넋이 나갔겠죠. 충격이 이만 저만이 아닐텐데요.”
“버스에 아들 말고도 한국 사람이 몇 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강도에게 반항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었대요. 머리도 맞아서 두개골 골절도 당했고요.”
성휘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스텔라를 쳐다본다. “아니. 총까지 들고 있는 강도에게 위험하게 왜 그랬나.. 무서워라.”
“강도 한 명이 한 눈 파는 동안 총을 뺏으려고 했대요. 강도가 그 사람한테 총 쏘는 걸 보고 아들이 정신적 충격을 크게 받았어요. 그때가 정말 무서웠다고 하더라고요. 잘못 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대요.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저들이 하라는 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더라고요. 그 한 사람 외에는 다친 사람도 죽은 사람도 없다고 해요. 다친 사람도 치료만 받으면 괜찮나 보더라고요. 다행이죠.”
“살면서 어떻게 그런 일을 당할 수 있죠? 운이 너무 없었네요.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이지, 어떻게 현실에서 그런 일이.. 저 같으면 감당이 안 됐을 거 같아요. 너무 무서워서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멎었을 지도 몰라요.”
“그런 일을 당한 게 운이 없다고도 볼 수 있는데, 살다 보면 그 보다 더 한 일도 닥칠 수가 있어요.”
“에이.. 그럴 리가요. 어떻게 아드님이 당한 것 보다 더 한 일이 있을 수 있죠?” 성휘는 스텔라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물론 주관적일 수는 있겠지만, 우리 삶에 그보다 더 한 일은 많이 발생하죠.”
“심지어 많기까지 하다고요? 그럼 주인님께서도 그보다 더 한 일을 겪으셨나요?
”당연히 저도 겪었죠.”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물어봐도 돼요?”
“19살에 임신했을 때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아..” 성휘는 스텔라의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아주 작은 탄성을 냈다.
“정말 너무 무섭고 두려웠어요. 외국에서 기관총으로 무장한 강도를 만나는 건 그 순간만 넘기면 되는 거잖아요. 어떻게든 그 순간을 넘기고 다치지만 않는다면 일시에 해결 되는 거잖아요. 하지만 19살에 임신 하는 건 그 순간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요. 그 일로 인해 내 삶이 갑자기 180도 달라졌고 불안과 두려움에 삶이 완전히 지배당했어요. 새로운 생명을 가졌다는 기쁨은 전혀 느낄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 한 순간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 같았어요. 누구의 잘 못도 아니었어요. 제가 미숙했던 거 뿐이었죠. 오롯이 제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어요. 그때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고 세상이 너무 싫었어요. 우리 아들을 포함해 외국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를 썼을 거 아니에요? 저는 그 상황이 너무 공포스럽고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을 거 같아서 죽으려고 했어요.”
“아.. 그러셨구나.” 성휘는 또 다시 탄성을 자아내며 말했다.
“경중을 따지는 게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상황과 삶을 포기하려는 상황 중 어떤 게 더 큰 고통이겠어요. 이런 차원에서 살다 보면 더 한 일이 닥칠 수도 있다고 말한 거에요. 우리 삶도 여행이고 모험이에요.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도 알 수 없죠.”
“그러셨구나. 아드님을 훌륭하게 키운 걸 보면 잘 극복 하셨나 보네요.”
“하하. 훌륭하게 키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극복하게 됐네요. 그때는 정말 죽으려고 했어요. 낳을 결심을 했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건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던 거죠.”
“정말 대단하세요. 그런 일이 있었으면서도 세계적인 건축가가 되셨네요. 어린 나이에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저도 주인님처럼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하하. 성휘씨는 저보다 훨씬 더 멋진 사람이 될 거에요.”
“아니에요.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주인님과 아드님이 있었던 일을 제가 맞닥뜨린다면 헤쳐나갈 자신이 없어요. 주인님 말씀대로면 저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 수 있다는 거잖아요.”
“아마 성휘씨도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될 거에요. 하지만 너무 두려워하지 마요. 잘 극복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사는 동안 우리는 많은 문턱을 넘게 돼요. 결핍의 문턱, 쾌락의 문턱, 타락의 문턱, 욕망의 문턱, 허영의 문턱, 양심의 문턱, 도덕의 문턱, 고통의 문턱, 죽음의 문턱, 선택의 문턱. 이런 다양한 문턱을 넘어야만 하는 때가 와요. 이런 문턱들을 잘 넘어야만 우리 삶에 낭만적인 순간이 찾아오는 거에요. 그 낭만적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군분투하면서 살아야 해요.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요. 누구나 겪는 과정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잘 알겠습니다. 낭만적인 순간이라.. 저에게도 그런 순간이 왔으면 좋겠어요.”
스텔라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휘를 바라본다. “당연히 와요.”
“주인님, 이 건물하고 테라스를 직접 설계하고 디자인하셨다고 들었는데, 정말 너무 멋진 공간이에요. 건물과 나무랑 너무 잘 어우러지고 식당 안 인테리어도 너무 예뻐요. 가구, 작은 소품들, 장식품들, 화병, 꽃. 전부 다 제 마음에 쏙 들어요. 저도 언젠가 이런 저만의 멋진 공간을 가지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하하. 당연히 가능하죠. 자신을 믿으면 분명히 가능해요. 아마 본인이 몰라서 그렇지 이미 만들고 있을 수도 있어요”
“좋은 말씀 해 주셔서 감사해.. 으아아아아아!” 성휘는 말을 하다 말고 비명을 크게 질렀다.
식당에 있는 사람들이 비명 소리에 놀라 성휘를 쳐다본다.
성휘가 몸을 스텔라 쪽으로 기울이고 담장 밑 화단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 저게 뭐에요? 왜 여기 있는 거죠?”
작은 화단에 새빨간 눈을 가진 노란색 뱀 한 마리가 긴 혀를 날름날름 거리며 느리게 기어 다니고 있다.
스텔라가 성휘의 어깨를 감싸며 말한다. “많이 놀랐죠. 저도 처음 봤을 때 놀랐어요. 여기 살고 있는 뱀이에요. 가끔 담을 타고 넘어와서 화단에 기어 다니고는 해요. 화단까지만 오지 절대 사람들이 있는 테라스로 넘어오지는 않더라고요. 우리 직원 중 한 명이 아침에 출근했을 때 아무도 없는 테라스에 있는 걸 본적이 있다고는 했어요. 그때 말고는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온 적이 없어요. 그냥 이 근처에 사는 뱀이에요.”
“너무 놀랬어요.”
성휘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주위를 보니 손님들이 하나 둘씩 나가기 시작한다. 문 닫을 시간인가 보다. 이야기를 하며 마시다 보니 어느새 와인 한 병이 거의 다 비워져 있다.
스텔라가 말한다. “얘기하다 보니 식당 영업 끝날 시간이 다 됐네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우리 마지막 잔 마시고 마무리할까요?”
“아니에요. 제가 사야죠. 제가 주문한 건데요.”
“오늘 성휘씨 덕분에 즐거운 시간 보냈으니까 제가 사도록 할게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네, 감사합니다.”
성휘와 스텔라는 얼마 남지 않은 와인을 잔에 따라서 다 마셨다.
"성휘씨는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에요."
"제가 반짝반짝 빛난다고요? 그걸 어떻게 알죠? 오늘 저를 처음 보셨잖아요."
"다 알 수 있어요. 성휘씨, 제 말을 믿어요. 그리고 자신이 반짝반짝 빛난다는 걸 믿어요! 반드시! 스스로를 믿어야 해요. 그러면 큰 힘이 될 거에요."
성휘는 스텔라와 인사를 하고 레스토랑 상크튀에르에서 나왔다. 테라스 출입문에서 나오자마자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날씨가 매우 쌀쌀하다. 레스토랑 상크튀에르의 안과 밖은 완전히 다른 세상 같다. 손에 들고 있던 패딩을 입었다. 주변의 식당들은 이미 불이 다 꺼진 상태다. 성휘는 어두운 골목길을 홀로 걸어간다. 레스토랑 상크튀에르 안의 등도 하나 둘씩 꺼진다.

 

3 문턱
성휘와 진성이 손을 잡고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날씨가 흐리고 쌀쌀하다. 오늘 기온이 예년보다 낮다는 일기예보를 본 것 같다. 성휘는 왼쪽 가슴에 빨간색 하트가 그려진 회색 스웻셔츠에 짙은 색 청바지를 입었다. 그 위에는 가벼운 패딩을 걸쳤다. 성휘의 왼쪽 손목에는 붕대가 감겨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려는 듯 몸을 바짝 붙여서 걷는다.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한참을 걷다 두 사람은 어느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성휘가 진성의 손을 꽉 잡는다.
“결정했어?” 진성이 성휘를 보며 물었다.
“…….” 성휘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아직도 안 했어? 걸어오는 동안 결정하겠다고 했잖아.”
“결정하기 너무 어렵네. 네 의견이 맞는 거 같아. 그런데 진성아, 나 너무 무섭고 두려워. 넌 안 두려워?”
“당연히 나도 두렵지. 그렇지만 어쩌겠어. 이미 벌어진 일이잖아.”
성휘와 진성은 커다란 간판에 <OO 산부인과>라고 적혀있는 건물 앞에 서있다.
“일단 들어가자.” 성휘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말했다.
성휘와 진성은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1시간 정도 지난 후 성휘와 진성이 병원에서 나왔다.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왔던 길을 돌아간다. 병원 들어가기 전만해도 날이 많이 흐렸는데 그새 해가 났다. 날씨도 많이 풀린 것 같다. 쌀쌀한 느낌이 전혀 없다.
“성휘야, 잘 생각했어. 결정하기 많이 힘들었을 텐데.. 나는 네 결정을 무조건 존중해.” 진성이 아직은 납작한 성휘의 배를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고마워. 그런데 진성아, 낳든 낳지 않든 결정을 내리면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사라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두려워.”
진성이 성휘를 바라보면서 말한다. “나도 두려워. 두려운 게 당연한 걸지도 몰라.”
“학교도 다녀야 하는데 우리가 잘 할 수 있을까?” 성휘가 걱정하듯 물었다.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야지.”
“맞아. 믿어야지. 믿어보자.”
“그래 잘 할거라고 믿자. 내가 내 자신을 믿지 못 한다면 세상 어느 누가 나를 믿어 주겠어. 안 그래?” 진성이 말했다.
“맞는 말이야.”
“부모님한테는 언제 말할 거야?” 진성이 걱정하듯 물었다.
“오늘 말하려고 언제까지 숨길 수 있겠어.”
“나도 오늘 말해야겠다.”
“그래 너도 잘 생각했어. 빨리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성휘야, 걱정이 있거나 힘들 때 너는 항상 기도를 했잖아. 이번에는 기도 안 해? 내가 같이 해줄까?”
“아니야. 괜찮아. 이번에는 기도 안 할 거야. 이미 나 스스로 결정했는데 기도할 필요 없을 거 같아.”
“그래. 마음 편한 대로 해.”
성휘와 진성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간다. 날씨는 더욱 개었고 패딩을 입고 있기에 조금 따뜻한 느낌 마저 들었다. 성휘와 진성은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팔에 걸쳤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계속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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