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완벽한 실험체

2021.09.07 19:4909.07

 

 

 

○출처: 국립생체반응연구소

 

○파일분류: 피실험자 보고서(2612/02/18/A10024/T23)

-연구유형: K1028

-피실험자 범죄유형: R10010011100011001111001

 

○기밀등급: 절대기밀

○기밀사유: 유출 시 국가 체제 위협이 우려됨.

○내용: 해당 수감자(피실험자)가 죽기 전에 작성한 글을 아래에 그대로 첨부하였음.

 

***

 

 친애하는 연구진에게. 이것이 제가 실험체로서 보내는 마지막 보고서가 될 것 같습니다. 급속한 건강악화로 인해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군요. 제가 수감되어 있는 방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보고서 작성용 모니터의 화면은 오류라도 난 것처럼 여러 겹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타이핑을 하고 있는 손가락에는 감각이 없습니다. 서둘러야겠네요. 글이 길어질 텐데 걱정입니다. 먼저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 동안 ‘약물에 따른 인공기관의 부작용 연구’라는 프로젝트에 기여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살인범으로서 이보다 영광스러운 죽음은 없을 것입니다. 국가의 은총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매 실험마다 제 몸에 투여되는 약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신체에 일어나는 반응을 성실히 기록해 왔습니다. 그것은 다른 수감자들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들에게도 인사를 남기고 싶습니다. 모두들 지금처럼 죄를 뉘우치면서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보고서를 완수해 주길 바란다고. 범죄자로서 마땅한 일이지만, 매 순간 성실하게 임하는 당신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입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자수하기 전, 저는 ‘기억관리국’의 공무원으로 일했습니다. 연구진께서 허락하신다면 그 당시의 이야기부터 시작을 하고 싶군요. 제가 왜 살인범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얘기하도록 하지요. 기억관리국은 아시다시피 어릴 적 기억을 심어주는 기관입니다. 인간에게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어릴 적 기억’ 말입니다. 저 먼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자연적인 교배와 수태를 통해 동물처럼 새끼를 낳았음을 잘 아실 겁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큐베이터를 거쳐 모두가 성인으로 태어납니다. 미성숙의 시기가 갖는 경제적 비효율성을 극복하게 된 것이지요. 단, 미성숙한 시기에 얻어야 할 지혜와 감수성을 보완하기 위해 가공된 어린 시절 기억이 필요합니다. 가상의 기억은 메모리칩으로 만들어지고 인큐베이터에 있는 동안 심어지는데 이것을 총관하는 곳이 기억관리국입니다. 저는 태어나자마자 그곳에 지원하였고 30년간 저의 소중한 일터가 되었습니다.

 

 저는 기억관리국 내에서도 ‘추억개발팀’에 발탁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특별하게 감화되었던 순간의 기억을 만드는 팀이지요. 팀원들은 여러 가지 추억을 시나리오로 만들고 코딩을 하여 앞으로 태어날 국민들의 메모리칩에 새겨 넣습니다. 태어난 국민들은 각자가 가지게 된 소중한 추억을 원동력 삼아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 하는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가공된 추억 따위가 무슨 대수냐 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가공의 추억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 지 말입니다. 비록 가상일지라도 나를 구해준 시민영웅에 대한 기억이 소방관을 꿈꾸게 합니다. 어릴 적 맛보았던 천연 고기에 대한 기억이 최고의 요리사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결국 추억은 가공되든 왜곡되든 한 사람에게 진심이면 그것은 실재가 되는 것이지요. 저는 그런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제가 심어준 추억을 안고서 훌륭한 박사가 된 사람을 보았습니다. 훌륭한 외교부 장관도 배출했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국가에 크게 공헌을 했다는 사실에 뿌듯함이 밀려왔습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더욱 열심히 일을 했고 총통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은사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국가에 충성을 다짐할 더 이상의 이유가 필요할까요? 사실 더 많은 것을 열거하고 싶으나 기억이 흐릿합니다. 30년의 찬란한 기억이 거의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또한 건강악화로 인해서 생긴 기억력 감퇴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죽인 사람은 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기억력 감퇴로 인한 것인지 그 순간이 흐릿하기만 합니다. 어떤 충동이 일어났고 그것이 신호탄이 되었던 것같습니다. 자수를 했으니 뒤늦게 정신은 차린듯한데 동기가 생각나질 않습니다. 그리고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기억관리국에서 일을 했던 30년의 세월에서 느껴지듯이 저는 반동분자가 아닙니다. 매일이 보람의 연속이었으며 국가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넘쳐났습니다. 이런 제가 왜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요? 하지만 납득이 가지 않는 만큼이나 이곳에서의 시간들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그 날 전까지는 말입니다.

 

 제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8차 실험 이후에 나타난 증상에 대해 곱씹어보면서였습니다. 예의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18차 실험의 약물 투여 이후 저의 가상기억 메모리칩에 매우 큰 손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해 유년기에 해당하는 기억이 거의 다 말소되었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시기와 맞물려 살인에 대한 기억 역시 희미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서 건강악화로 인한 기억력 감퇴라는 말은 거짓입니다. 저는 결국 두 증상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가상기억 메모리칩이 손상을 입자마자 유년기의 기억과 함께 살해 당시의 기억이 지워져간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저는 그날부터 제가 결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메모리칩 안에 살인을 저지른 기억이 심어져버렸다. 그리고 나는 자수를 했고 생체반응연구소에 복역하며 실험체가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기억을 조작한 자는 이곳 생체반응연구소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다…….' 외람되지만 저는 이 전제를 부정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제 몸에는 실험에 적합한 어떤 특성이 있었기에 연구소 입장에서는 필요했을 것이고 범죄자로 기억을 꾸며 이곳에 가두었다는 가정을 해 보았습니다. 공무원이니만큼 신체사항를 입수하기는 쉬웠을 테지요. 하지만 어떻게 기억관리국에서조차 해킹이 불가능한 가상기억 메모리칩을 조작했단 말인가.

 

 방법은 하나입니다. 제가 자고 있는 사이 직접 꺼내서 조작을 한 뒤 다시 삽입하는 것입니다. 기억관리국 공무원들의 가상기억 메모리칩은 탈착이 간편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기억관리국의 특성 때문입니다. 기억을 다루는 곳이니만큼 메모리칩의 악용이 쉬운 기관이지요. 그래서 탈착을 쉽게 하여 매일 감시관으로부터 칩 검사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탈착이 쉬우니만큼 몰래 조작을 범하기도 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심증이 아닌 물증이 필요했습니다. 이곳 생체반응연구소가 모종의 이유로 내 기억을 조작해 범죄자로 만들어 이곳에 가두었다는 확증 말입니다.

 

 저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서는 일반 컴퓨터가 필요했습니다. 생체반응 기록을 작성하는 죄수용 컴퓨터가 아닌 일반 컴퓨터 말입니다. 그것만 주어진다면 저의 가상기억 메모리칩의 고유번호 정도는 확인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고유번호는 매일 자동으로 갱신이 되기 때문에 본인도 외울 수가 없습니다. 각 자리 숫자의 의미가 고정적이라면 이 역시 조작의 동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컴퓨터로 자신의 고유번호를 확인한들 무슨 소용일까요? 소용이 있습니다.

 

 저는 30년을 기억관리국에서 일해 왔습니다. 고유번호에는 하나의 패턴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특정한 알고리즘을 일관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일 번호가 바뀌더라도 패턴만 알고 있다면 유추할 수 있는 정보가 많습니다. 반면 어떻게든 사후조작이 이루어진 고유번호는 알고리즘 자체가 바뀌기 때문에 패턴 자체가 달라집니다. 그럼 패턴이 바꼈다는 사실을 통해 사후조작이 이루어졌음을 추론할 수가 있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제 가상기억 메모리칩의 고유번호만 확인하면 저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음을, 연구진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컴퓨터를 구하는 것은 쉬웠습니다. 연구소에 널린 것이 잡역이고 컴퓨터이니까요. 저는 도서관 청소작업에 자원하였습니다. 그곳에 설치된 컴퓨터를 몰래 켰습니다. 저의 가상기억 메모리칩을 삽입하고 고유번호를 오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의 떨림은 무엇으로도 표현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져 천당과 지옥을 단 번에 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해독을 하기도 전에 저는 멍해지고 말았습니다. 제 눈 앞에 펼쳐진 숫자의 나열은 생전 처음 보는 종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제껏, 그러니까 30년간 알고 있었던 메모리칩의 고유번호는 모두 2진법이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그렇게 정해져있고 다른 경우는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 눈앞에 놓인 고유번호는 10진법이었습니다. 어째서 저의 가상기억 메모리칩은 10진법의 고유번호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공무원 시절에 열어보았을 때는 당연하게도 2진법이었는데 말입니다. 저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불현듯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고 저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채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오고 말았습니다.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정신을 붙잡고 있기 힘들 만큼 증상이 악화가 되었네요. 제 머리가 당장이라도 키보드를 향해 곤두박질을 칠 것만 같아 두렵습니다. 최대한 서둘러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도서관 사건 이후로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저 의심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강력한 무엇입니다. 연구진 여러분은 가상의 추억을 떠올릴 때 보이는 고유한 숫자들이 있습니까? 추억 속 친구의 전화번호라든가 추억 속 교실의 반 번호 따위들 말입니다. 잘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그것들은 대게 2진법의 수로 되어있습니다. 가상의 기억은 디지털 세계이기 때문에 2진법이 안정적이지요. 그래서 중요한 분류는 2진법을 활용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세계는 대게 10진법을 활용합니다. 이제 가장 두려운 가설을 꺼낼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나는 기억관리국에서 일을 한 적이 없다. 내가 보아 왔던 메모리칩의 고유번호가 2진법이었던 것은 가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30년의 세월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이것만큼은 믿고 싶지가 않군요. 그 모든 것이 가상의 기억이라면 저는 실험체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의미가 되니까 말입니다. 국가로부터 좋은 직업을 받고 보람 있는 삶을 살다가 범죄를 저질러 참회를 하는 완벽한 실험체 말입니다. 실험체가 되기 위한 이보다 좋은 가상기억이 또 있을까요? 이 연구소에 수감된 모든 수감자들이 어째서 그토록 충성스럽고 성실하였는지 납득하고 싶지 않음에도 납득이 되려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연구진 여러분들께 부탁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보고서를 올린 뒤에도 만약 살아있다면 이 가설만은 틀렸다고 꼭 말씀해 주시기를. 국가로부터의 숭고한 사명과 총통의 은혜를 받아 살아온 세월만큼은 진짜였다고 말씀해 주시기를. 그래서 마지막 가는 순간만큼은 30년의 명예로웠던 삶을 추억으로 안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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