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스마트폰에서 알람 음악이 울린다. 기호는 알람을 끄고 계속 잔다. 어두컴컴한 기호의 방에 엄마가 들어와 커튼을 힘차게 열어 젖힌다. 스르륵하고 커튼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눈이 부신다. 기호는 이불로 얼굴을 덮는다. 이번에는 창문을 열었고 시원한 공기가 방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아들! 빨리 일어나. 정신 차려. 식탁에 계란이랑 빵이랑 바나나 있으니까 꼭 먹고 학교가. 엄마는 이제 출근할 거야.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
엄마는 기호가 뒤집어쓰고 있는 이불을 양손으로 잡아 힘있게 걷어냈다.
“아! 조금만 더 잘래.” 기호는 엄마가 잡고 있는 이불을 뺏으려 한다.
“안 돼. 일어나. 그러다 수업 늦어.” 엄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기호가 계속 누워있자 엄마는 억지로 기호의 몸을 일으켜 세운 후 방에서 나갔다.
기호는 부스스하게 군데군데 위로 치솟은 머리에 아직 졸음이 가득한 반쯤 뜬 눈으로 고개를 숙이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시원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자 머리를 들어 고개를 한 바퀴 돌린다. 고개를 드니 맞은 편 벽에 걸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인다. 기호는 거울에 비친 헝클어진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기도 싫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다. 기호는 고개를 돌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외면한다.
이때 엄마가 방문을 열며 말한다. “아들! 엄마는 지금 나간다. 10시 반 수업이라며 얼른 씻고 아침 먹고 학교 가. 너는 대학생씩이나 돼가지고 이제는 스스로 좀 일어나라.”
“알았어. 일어났어.” 기호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들, 멍 때리지 말고 엄마 좀 봐봐. 오늘 엄마 스타일 어때?”
기호는 고개를 돌려 방문 앞에 서있는 엄마를 본다. 숱 많은 갈색 머리가 어깨 정도까지 내려오고 아랫부분에는 굵게 컬을 넣었다. 세련돼 보이기 위해 머리에 신경을 많이 쓴 티가 난다. 옷은 아래위 베이지색 정장 안에 실크 소재의 푸른색 셔츠를 입었다. 베이지색 정장과 푸른색 셔츠의 조합이 단정한 스타일에 화려함을 더해줘 매우 멋스러워 보인다. 전체적인 스타일이 누가 봐도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짐작할 수 있는 분위기가 풍긴다.
기호는 잠시 엄마를 뚫어져라 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한다. “오늘 스타일 괜찮은데. 신경 쓴 티가 팍팍 나.”
“하여간.. 아들, 좀 성의 있게 말해주면 안되냐? 엄마는 지금 나가. 얼른 아침 먹어.”
“다녀오세요!”
엄마는 출근했다. 기호는 자신의 방에서 나와 식탁에 앉았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아침식사를 한다. SNS 피드에 새로 올라온 사진들을 빠르게 위로 넘겨가며 본다. 여자친구인 현지가 올린 사진이 나오니 넘기는 것을 멈추고 사진을 자세히 본다. 현지는 친구들과 함께 저녁 먹는 사진을 올렸다. 어제 친구들과 간다고 했던 새로 찾은 맛집인 거 같다. 기호는 현지가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먹었는지 유심히 본다. 기호가 다 아는 현지 친구들이다. 현지가 올린 사진을 다 본 후 피드에 올라온 사진을 다시 빠르게 넘긴다. 그러다 미술 작품 사진에서 멈췄다.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고등학교 친구가 올린 사진이다. 사람 얼굴을 하고 있는 새 같기도 하고, 아무리 봐도 무슨 그림인지 잘 모르겠다. 그림 밑에 ‘<Angelus Novus, Paul Klee>, 우리는 이제 새로운 천사를 맞이해야 한다.’라고 적혀있다. 친구가 적어 놓은 글도 이해가 안 된다. 고등학교 때 미대를 준비하던 친구였는데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기호는 식사를 마치고 샤워를 했다. 헤어드라이어로 앞 머리를 한껏 올려 세웠다. 왁스로 좀 더 세련되게 머리카락을 매만졌고, 흐트러지지 않게 그 위에 헤어스프레이를 뿌렸다. 약간 빛바랜 청바지에 잘 다려진 하얀색 셔츠를 입었고 그 위에 가죽 항공 점퍼를 걸쳤다. 거울을 본다.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자신의 전면, 옆면, 뒷면을 꼼꼼하게 보면서 옷매무새를 확인한다. 머리며 옷이며 거울에 비춰진 스타일이 괜찮아 보인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똑바로 쳐다보지를 못 하겠다.

11월의 어느 맑은 아침. 기호는 현지가 오늘 자신의 옷 입은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안고 집을 나왔다. 이맘때 즈음 아침은 조금 춥거나 쌀쌀해야 할 거 같은데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 기분 좋게 시원한 정도의 기온이다. 기호는 전철역으로 걸어가면서 하늘을 올려다 본다. 하늘 색이 너무 예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짙은 파란색 물감을 칠해 놓은 듯하다. 멋진 하늘에 매혹돼 계속 보고 있는데 파란 하늘에 하얀색 작은 별빛 같은 것이 반짝한다. 한 번 반짝하더니 바로 사라졌다. ‘방금 저게 뭐였지?’ 기호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잘못 본 건가? 분명 무언가가 반짝거렸는데.’
혹시 한 번 더 반짝일까 하고 하늘을 계속 봤지만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 봤다고 생각한 기호는 전철역을 향해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간다. 러시아워가 막 지난 시간임에도 지하철 2호선 안에 사람들이 꽤 많다. 기호는 지하철 맨 뒤칸 객실과 운전실을 막아놓은 벽에 기대 서있다. 학교를 갈 때마다 빈자리가 있더라도 늘 이 자리에서 서서 간다. 모르는 사람과 나란히 앉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이다. 지금 기호는 머릿속에 현지 생각으로 가득하다. 오늘 엄마와 자신 단 둘만 알고 있는 비밀을 현지에게 말하려고 한다. 그런데 막상 현지가 앞에 있으면 비밀을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동안 몇 번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하지 못했다. 현지가 비밀을 알게 되는 것도 두렵고, 혹시 비밀을 듣고 이별 통보를 하지 않을까도 걱정된다. 더 이상 현지를 속이고 만날 수는 없다. 기호는 현지와 사귄 지 7개월이 넘었다. 어느 정도 관계가 안정기에 들어갔기 때문에 현지가 쉽게 이별을 선택하지 못할 것이라는 희망도 가져본다.
‘오늘은 무조건 얘기해야 해. 현지가 이해해줄 수도 있잖아. 아니야 나라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이해 받지 못하더라도 헤어지자는 말만 하지 않아도 좋으련만.’
기호의 생각이 계속 왔다 갔다 한다. 사람들로 붐비던 전철 안은 많이 한산해졌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인다. 기호는 평소처럼 자리에 앉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서있는다. 현지와의 첫 만남을 떠올려 본다.

영화감상 동아리에서 현지를 처음 만났다. 첫 눈에 현지가 마음에 들었다. 동아리 첫 회식 때가 생각난다. 현지는 기호가 앉은 가장 반대편 끝자리에 앉아있었다. 기호는 주변에 앉은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얘기를 하면서도 현지에게 계속 신경이 갔다. 틈나는 대로 현지의 옆모습을 흘끗 흘끗 쳐다봤다. 현지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서 적당한 템포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현지는 맑은 눈빛과 옅은 미소를 보이며 옆에 앉은 선배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현지의 그 눈빛과 미소는 천진한 면을 드러내면서도 뒤로는 경계심을 숨기고 있는 듯 보였다. 술기운에 하얀 얼굴은 조금 홍조를 띠었고 긴 생머리는 사선으로 매끈하게 뻗은 어깨위로 흐트러져 흘러내린 모양이었다. 머리카락이 홍조 띤 한쪽 뺨에 검붉은색 그림자를 드리웠다. 머리카락이 만들어낸 명암은 현지의 얼굴을 한 층 더 깊이 있고 입체적으로 만들어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기호는 그 깊이에 점점 빠져들어 갔다. 분위기에 매료된 기호는 곁눈질로 보다 잠시 멍하니 현지를 바라보았다. 마침 고개를 돌리던 현지와 눈이 마주쳤다. 술기운에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기호를 발견한 현지는 놀라서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기호를 향해 친근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번에는 그 웃음이 기호의 마음 속을 깊이 파고들었다. 기호도 현지를 따라 어색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현지의 눈웃음 때문이지 아니면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현지가 자신에게 눈웃음을 지었고 자신의 가슴은 뛰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자리를 바꿔가면서 술을 마시다 현지와도 이야기를 할 기회가 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회식을 계기로 현지와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냥 친한 친구로 지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현지는 같은 심리학과 선배랑 사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의 눈웃음은 기호의 마음에 계속 남아있었다. 기호는 1학년을 마치고 1년 동안 휴학했다. 심한 우울증 때문이었다. 1년 동안 약물 치료와 상담을 받으며 보냈다. 치료를 받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증상이 많이 호전되어 복학하게 됐다. 복학한 첫날 기호는 수업을 다 마치고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그때 수업을 듣고 나오는 현지를 우연히 만났다. 그날 현지를 만난 건 거의 1년 만이었다. 현지도 수업을 다 마치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길을 걷다가 함께 저녁을 먹게 됐다. 현지와 단둘이 저녁을 먹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기호는 자신이 휴학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지가 남자친구와 헤어진 걸 알게 됐다. 저녁만 먹기로 했다가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이어졌다. 술을 마시며 좀 더 깊이 있고 사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 기호는 현지의 부모님이 중학교 때 이혼했고 그 후부터 아버지와 살고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어머니가 재혼을 한 이후로는 만나지도 연락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연락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과 달리 여동생은 1년에 한 번 정도 어머니를 만난다고 했다. 1년에 한 번 여동생으로부터 듣는 소식이 어머니와의 유일한 접점이라고 했다. 당시 기호는 현지의 눈에서 어머니에 대한 미움과 그리움을 읽었다. 현지의 이런 사정을 듣고 기호는 고등학교 3학년 겨울에 아버지와 쌍둥이 형이 교통사고로 죽은 사실을 말했다. 누군가에게 아버지와 형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게 처음이었다. 현지는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기호의 말을 들은 현지는 왜 우울증으로 1년이나 휴학을 했는지 이해가 간다고 했다. 자신도 중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상당 기간 심리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현지는 술잔을 가볍게 만지작거리고 있던 기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올려놓았다. 반 정도 술이 담겨있는 술잔을 보고 있던 기호는 고개를 들어 현지를 봤다. 기호와 현지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기호는 누군가와 이렇게 한참 동안 눈맞춤을 한 적이 있었나 싶었다. 그때가 처음인 것 같았다. 계속 손을 잡고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현지와 손잡고 말없이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기호에게는 많은 위로가 됐다. 그 순간 두 사람 마음 속 깊은 곳에 잠겨있던 결핍이 만났고, 그 결핍은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기게 하는 매개체와도 같았다. 기호와 현지는 그 날 이후로 친구 이상의 관계로 발전했다.

기호는 현지를 처음 만났을 때와 사귀기 시작했을 때를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든다. 현지와 사귄 이후로 삶에 우울한 일보다는 즐거운 일이 훨씬 더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못한 비밀 때문에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불안하고 불편했다. 현지가 모르면 그만이겠지만, 그런다고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기호는 여전히 지하철 끝 벽면에 기대어 서있다. 앞으로 세 정거장 후면 내린다. 지하철 안을 천천히 둘러본다. 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나름대로 자신만의 우울함과 즐거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하철은 좌우로 부드럽게 흔들리면서 선로 위를 달리고 있다. 흔들리는 지하철의 리듬에 맞춰 사람들의 몸도 조금씩 흔들린다. 사람들은 흔들리는 지하철에 몸을 맡겨두면서도 한편으로는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기호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쓴다. 지하철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렇게 속이면서 현지를 계속 만날 수는 없다. 오늘은 반드시 말해야 한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기호는 반드시 말하겠다고 다짐을 하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기호가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수업이 막 시작했다. 수업에 집중이 되지 않고 교수님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지금 강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머릿속은 온통 현지에게 어떻게 얘기를 꺼낼지에 대한 생각뿐이다. 시간이 금새 지나 수업이 끝났다. 기호는 강의실에서 나와 현지를 만나러 간다. 만나기로 한 사회과학대 건물 근처에 도착했다. 기호는 초조하게 현지를 기다린다.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 시간이 조금 지났다. 수업이 늦게 끝나나 보다. 그때 저 멀리 건물 입구에서 나오는 현지가 보인다. 현지가 활짝 웃으며 기호를 향해 빠르게 걸어온다.

기호와 현지가 사회과학대 건물 근처 벤치에 손을 잡고 앉아 있다.
“안 추워?” 기호가 물었다.
“응. 전혀 안 추워. 오늘 날씨 따뜻하다.” 현지가 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기호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러게 11월치고 많이 따뜻하네. 아침에도 쌀쌀하지 않고 시원한 정도더라고. 오후가 되니까 오히려 따뜻하기까지 하네.”
“기호야, 오늘 입은 항공 점퍼 멋있다. 처음 보는데 새로 샀나 봐.”
“작년에 산 옷인데 올해는 처음 입는 거야. 정말 괜찮아?”
“응. 예쁘고 너한테 잘 어울려. 오늘 너의 패션 컨셉은 어떤 속박에서 벗어나 하늘을 높이 날고 싶은 욕망인 거 같아. 하하.”
“하하. 고마워.” 기호는 현지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 점심은 뭐 먹을까?” 현지가 기호의 자켓을 만지면서 말했다.
“나는 뭐든지 상관 없어. 현지 너 먹고 싶은 걸로 먹자.”
“그럼 우리 즉석 떡볶이 먹으러 갈까? 나 오늘 매운 거 먹고 싶어. 괜찮지?” 현지가 웃으면서 물었다.
“좋지. 오랜만에 나도 즉석 떡볶이 먹고 싶다.”
사실 기호는 점심 생각이 별로 없다. 현지가 먹고 싶다고 하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자신도 먹고 싶다고 했다.
“야야, 뭐야? 오랜만은 아니지. 우리 지난 주에도 즉석떡볶이 먹었잖아.”
“그.. 그랬나?” 기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은 먹고 싶다면서 표정이나 말투는 전혀 먹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은데? 먹기 싫으면 다른 거 먹어도 돼.”
“아.. 아니야. 나도 즉석떡볶이 먹고 싶어.”
“기호야, 나한테 무조건 맞춰 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나, 그런 거 싫어. 같이 있을 때 함께 즐거워야지. 안 그래?”
“응. 그렇지. 너한테 무조건 맞춰 주고 그러지 않아.” 기호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현지는 기호의 말투나 표정을 보고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기호야, 혹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왜.. 왜 물어보는데.. 무슨 일 있어 보여?”
“응. 표정이나 말투가 평소랑 완전히 다른데. 너 말할 때 넋이 나가 있는 거 같아. 나랑 얘기하면서 딴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그렇게 보이는 구나. 현지야, 사실, 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현지는 진지해 보이는 기호의 모습에 조금 놀라며 묻는다.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응.” 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그렇게까지 평소랑 다른 거야? 너 무지하게 심각해 보인다. 심각한 일이야?”
이번에도 기호는 고개를 끄덕인다. “응. 심각한 일이야.”
“그래? 그럼 얼른 얘기해 봐.”
“사실 나..” 기호가 말을 하다가 말았다.
“사실 너 뭐?” 현지가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
기호는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와 허리를 숙이고 바닥을 바라본다. 현지는 그런 기호의 모습을 말 없이 바라만 보고 있다. 기호는 10분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닥만 보고 있다. 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기다린다. 한참 바닥을 보던 기호는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현지도 기호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구름이 많이 끼어 있는 하늘 위로 참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기호와 현지의 시선이 동시에 참새를 따라 움직인다. 두 사람은 날아가는 참새를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봤다.
현지가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날씨가 엄청 흐리네.”
“그러게 말이야. 학교 올 때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었는데. 완전히 흐려졌네.”
“…………..”
또 다시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흐르고 있다.
“저기, 현지야.”
“응.”
“사실 나..” 이번에도 기호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소리 없는 온화한 웃음을 보이며 현지가 말한다. “기호야, 말하기 힘들면 굳이 오늘 말 안 해도 돼. 언제든 마음 편할 때 얘기해 줘.”
현지의 웃는 얼굴과 배려가 담긴 말이 기호의 긴장을 누그러뜨려준다.  
“아니야. 지금 말할래. 현지야, 원래 내 이름은 기호가 아니야.”
“원래 이름이 기호가 아니라고?” 현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기호를 빤히 쳐다본다. “다른 이름이었는데 기호로 개명한 거야?”
“아.. 아니 개명한 건 아니고.”
“그럼 뭐야? 개명한 것도 아닌데 기호가 네 원래 이름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말이지. 기호라는 이름은 원래 우리 형 이름이야.”
현지는 기호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가 안돼. 형 이름을 쓰고 있다는 거야? 하늘로 먼저 갔다는 쌍둥이 형 말하는 거 맞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네.”
“맞아. 엄마랑 나를 두고 교통사고로 아버지와 함께 먼저 떠난 일란성 쌍둥이 형. 내 이름은 기호가 아니라 진호야.”
“원래 이름이 진호라고? 김진호?”
“응. 김진호가 내 이름이고, 김기호는 우리 형 이름이야.”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어?”
진호는 크게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본 다음 날이었어. 아버지와 기호가 외출을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어. 사고 지점이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곳이야. 사고가 크게 나서 아버지와 기호는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바로 실려 갔어. 아버지는 병원에 도착하고 얼마 후 돌아가셨고 기호는 중환자실에서 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끝내 하늘 나라로 갔어. 그때 엄마와 함께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많이 힘들었겠다.” 현지가 진호를 위로하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럼. 그때 정말 많이 힘들었지. 그런데 응급실에서 나는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어. 음.. 이상한 생각보다는 나쁜 생각이 맞을 거 같아.”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데?”
“병원에는 내가 먼저 도착했고 엄마는 나중에 왔어. 응급실에서 나 혼자 아버지 임종을 지켜봤고, 의사는 안타깝지만 기호도 너무 심하게 다쳐서 가망이 없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더라고. 그 얘기를 듣고 시간이 좀 지나서 그런 생각이 번쩍 들었어. 기호가 하늘 나라에 가게 되면 내가 기호의 점수로 대학을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기호가 나보다 공부를 더 잘했었거든. 내 실력보다 더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하면 안 되는 생각이었는데.. 그리고 입원 수속을 기호 이름이 아닌 내 이름으로 했어.”
현지는 진호의 말에 너무너무 놀랐다. 진호가 한 말을 듣고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믿고 싶지도 않았다. 현지는 잡고 있던 진호의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놓았다.
“너, 거짓말 아니지? 이런 걸로 장난칠리도 없을 거고.”
진호는 많이 당황하는 현지의 표정을 보면서 말한다. “놀랐지? 많이 놀랐을 거 같은데.. 거짓말 아니고 사실이야.”
“당연히 놀라지. 어떻게 안 놀랄 수가 있어. 너.. 진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너 진짜 나쁘다.”
진호가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나도 알아. 나쁘다는 거.”
“형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슬픔은 느껴지지 않고 그런 생각만 떠오른 거야?”
“그런 건 아니야. 의사한테 가망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어. 정말 너무너무 슬펐어.”
“하면 안 되는 생각을 했다 치자. 생각만으로도 너무너무 나쁜데, 생각에만 그친 게 아니라 진짜 실행에 옮겼다는 거잖아. 그 상황에서 입원 수속을 네가 직접 형 이름이 아닌 네 이름으로 했다는 거잖아.”
“…….” 진호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머니도 네 말에 동의하셨던 거야?”
“당연히 엄마는.. 처음에는 반대했지.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자고 계속 밀어붙이니까 엄마도 결국에 동의했어. 그때 엄마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아마 판단력이 완전히 흐려지고 제정신이 아니었을 거야. 왜 아니었겠어.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기호도 가망이 없다는 얘기를 의사로부터 들었으니까.”
“정말? 어머니께서도?” 현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돼서 결국 내 이름으로 장례식을 했고 사망 신고도 내 이름으로 했어.”
“그게 가능해?”
“가능했어. 우리는 일란성 쌍둥이니까.”
“말도 안돼. 진짜 세상이 생각보다 많이 허술하네. 장례식장에 온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았어? 아무리 쌍둥이더라도 친척들은 알아 봤을 거 아냐?”
“그게 말이지. 부모님 모두 외동이어서 친척도 많지 않고 가깝게 지내는 친척도 별로 없어. 거기다가 갑작스러운 일들이 벌어지면서 당시에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거든. 그래서 그런지 내가 기호가 아니라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 하더라고.”
“그리고 나서 형의 수능성적으로 우리 학교에 입학한 거야?”
“응.” 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너보다 공부를 훨씬 잘 했어?”
“훨씬 잘 한 거까지는 아니고, 조금 더 잘했어. 내 성적보다 바로 위에 있는 좋은 대학 갈 정도였어.”
“그럼 엄청나게 차이가 난 것도 아니네. 그런데도 굳이 그렇게까지 한 거야?”
“나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했는지 잘 모르겠어.”
“나 너무 놀래서 지금 심장이 막 뛰어.” 현지는 얼굴이 조금 상기된 채로 손을 가슴에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현지의 말투는 차분하다.
“현지야, 나한테 많이 실망했지?” 진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실망한 정도가 아니야. 그 이후로 형의 신분으로 살아오고 있는데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사실 많이 후회하고 있어. 죄책감에 엄청나게 시달렸고 심한 우울증으로 자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 지난 3년간 내 자신이 완전히 사라진 거 같았어. 기호한테도 많이 미안하고 내가 한 선택을 후회하고 있어.”
“그럼 지금은 우울증과 죄책감이 사라진 거야?”
“사라진 건 아니고 치료받고 예전보다 많이 나아진 상태야. 어쨌든 내 삶은 계속되는 거고 살아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병원에서 처방 받은 약이 많이 도움이 되더라고. 약을 먹으면 일정 시간 후에 우울증이 가라앉고 기분이 많이 나아졌어. 기분이 나아진 내 자신이 너무 신기했어. 사람의 몸이라는 게, 마음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약 하나에 기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이상하더라고. 사람은 화학적인 존재에 불구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끊임없이 내 자신을 합리화하기도 했어.”
“어떻게 합리화했는데?”
진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일란성 쌍둥이니까 하나의 세포가 둘로 분열 돼서 기호와 내가 된 거잖아. 완전하게 동일한 DNA를 가지고 태어났으니 우리는 하나나 마찬가지라고 내 자신을 설득하고 속였어.”
“너 정말! 진짜 말도 안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이상하게 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현지가 말을 하다 멈추고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간다. “정말 말이 안 나온다. 아무리 하나의 세포였고 동일한 DNA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세포가 분열하는 순간 둘은 다른 개체가 된 거지. 그리고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 개별의 인간이 되어 세상의 빛을 본 거고, 출생 신고를 함과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완전하게 다른 인물이 된 거라고. 진짜 너무 소름 돋는다.” 지금까지 차분하고 건조하게 이야기하던 현지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현지야, 나한테 많이 실망했지?”
“실망했다고 아까 말했잖아. 왜 또 물어보는 거야? 실망한 정도가 아니라고. 너 같으면 안 그러겠어?”
“맞아 나 같아도 그럴 거 같아.” 진호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나한테 왕따를 당해서 중고등학교 때 친구가 없었다고 했잖아. 그것도 거짓말 같은데. 맞지? 네 자신이 아닌 형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어릴 적 친구들은 만날 수가 없는 거겠네.”
“………..” 진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나한테 이 사실을 말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뭐야?”
“그냥… 그냥 너를 속이고 싶지 않았어. 너한테만큼은 솔직해지고 싶었어.”
“나한테 솔직해지고 싶었다고? 정말 이해가 안 된다. 네 스스로를 속여가면서 살고 있는데 나한테는 솔직해지고 싶었다고? 과연 이게 진짜 솔직한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한테 솔직한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 의미 없어.”
“…………” 진호는 현지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현지와 진호는 말 없이 벤치에 앉아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 침묵은 꽤 긴 시간 동안 지속된다. 진호가 하늘을 올려다 본다. 진호를 따라 현지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다. 회색 빛 구름이 하늘 전체를 뒤덮고 있다. 그런데 머리 위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에 구멍이 뻥하고 뚫린 것처럼 구름이 없는 자리가 있다. 그 뚫려있는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있고 구멍 난 구름 가장자리를 타고 빛이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이상하기도 하고 신기한 광경이다. 구멍이 뚫린 것 같은 구름 가득한 하늘을 보다가 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호야, 아니..” 현지가 말을 하다 말고 손사래를 친다. “기호가 아니지 진호라고 불러야 하나? 두 이름 다 부르기가 어색하네. 어머니는 너를 어떤 이름으로 불러?”
진호는 가볍게 한숨을 쉰 후 말한다. “휴~ 엄마는.. 엄마는 어떤 이름으로도 안 불러. 나를 그냥 아들이라고 불러.”
“그렇구나. 어머니가 그렇게 부르는 게 이해가 되네. 많이 어색하지만 지금부터 진호라고 부를게. 너는 기호가 아니라 진호니까.”
“진호야!” 현지가 힘있게 진호의 이름을 불렀다.
진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얼마만인가? 현지가 자신을 진호라고 부르는 순간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전기가 쭉 타고 올라가는 듯한 전율이 느껴졌다. 심장이 멎는 것 같고 온몸이 마비가 되는 느낌이다. 도저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진호야!” 대답이 없자 현지가 다시 한 번 불렀다.
진호라는 이름에 마음이 울컥한다. 진호의 눈에서 진한 눈물 한 방울이 나와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진호는 오랜만에 불리는 자신의 진짜 이름이 어색하다.
“응?” 진호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너, 학교 자퇴하고 수능 다시 보는 거 어때?”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말을 현지가 했다. “자퇴하고 수능을 다시 보라고? 휴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퇴?”
“네 자신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 우리 학교를 다니고 있는 너는 네가 아니잖아. 이건 너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고. 휴학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잘 한 번 생각해 봐.”
현지의 말을 듣고 진호는 고민에 빠졌다. 현지가 왜 자퇴를 하고 수능을 다시 보라고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데 현실의 삶을 생각하니 선뜻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진호야, 고민 돼?” 현지가 물었다.
진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솔직히 고민되네.”
“진호야, 나 대학에 합격했을 때 우리 아빠가 나한테 어떤 말을 해줬는지 알아?”
“어떤 말을 해주셨는데?”
“아빠가 어떤 이야기를 통해서 성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줬어. 잘 들어봐. 어떤 19살 젊은이가 가족들하고 크루즈 여행을 하는데 배가 난파되는 사고가 일어났대.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물에 빠졌고 젊은이 혼자만 생존하게 됐어. 뗏목 같은 걸 혼자 타고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신세가 된 거지.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은 피할 곳이 없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인 거야. 그것도 홀로. 오랜 시간 바다에 표류하다 보니 배가 얼마나 고프겠어. 그러다가 운이 좋게 물고기 한 마리를 잡게 됐어. 그런데 문제는 이 젊은이는 채식주의자였다는 거야. 태어나서 고기를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어. 한참을 고민했지만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물고기를 먹기로 했어. 역겨웠지만 살아야 하니까 참고 억지로 먹었어. 그렇게 젊은이는 처음 고기를 먹게 되었고 표류하면서 어쩔 수 없이 물고기를 계속 잡아 먹었어. 19년동안 채식만 했지만 몇 번 먹다 보니까 먹을 만 하다는 생각이 들게 됐어. 그러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뗏목이 무인도에 도착한 거야. 젊은이는 더 이상 뗏목을 타고 떠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어. 그 무인도에는 과일이 풍부했어. 채식주의자로 돌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어. 과일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했고 매일 바닷가에 불을 피워서 구조 신호를 보냈어. 그런데 매일 과일만 먹다 보니 바다에 표류하면서 먹었던 물고기가 생각나는 거야. 그래서 젊은이는 바다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았고 이번에는 불에 익혀서 먹어 보았어. 그랬더니 생고기로 먹었을 때보다 훨씬 맛있는 거지. 그 이후로 계속 물고기를 잡아 먹었고 또 우연한 기회에 그 섬에 살고 있던 야생 토끼도 잡아 먹게 됐어. 사냥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종종 토끼도 잡아 먹었어. 그러던 어느 날 젊은이는 지금 살고 있는 섬이 무인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 이 섬 어딘가에 살고 있는 원주민 한 명을 우연히 만나게 된 거야. 서로 놀란 젊은이와 원주민은 그 자리에서 싸움을 벌였고 둘이 치열하게 싸우다가 젊은이가 그 원주민을 죽였어. 그리고 어떤 생각에서 그랬는지 젊은이는 구조 신호를 보내기 위해 피워놓은 불에 그 원주민을 구워서 먹었대. 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아빠가 이 이야기를 들려 줬어.” 현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굉장히 무시무시한 이야기이다.”
“아빠 말로는 성인이 된다는 건 이런 거래. 채식주의자가 우연한 기회에 육식을 하게 되면서 고기 맛을 알게 되고 세상의 풍파를 맞아가면서 인육을 먹는 인간으로 변하는 거라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아빠는 나쁜 성인이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어.”
“어른이 된다는 게 그렇게 무시무시한 건가?”
“어른이 아니라 성인. 아빠 말로는 이 세상에 어른은 별로 없대. 어쩌면 어른은 한 명도 없을 수도 있대.”
“그렇구나.” 진호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했다.
“그리고 아빠가 성인이 되면 세상에 대한 예의를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고 했어.”
“세상에 대한 예의? 세상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모두 드러내거나 전부 실행하려면 안 된대. 그게 예의라고 하더라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위선적으로 살아서도 안 된대. 세상 혼자 고상한 척 하는 위선자가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무슨 말씀 하시려고 하는지 알 거 같다.”
“진호야, 우리 덜 나쁜 사람이 되자. 나는 네가 자퇴를 하고 수능을 다시 보는 것이 옳은 거라고 생각해. 물론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면을 쓰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는 하지. 우리도 예외는 아니겠지. 하지만 진짜 자기를 완전히 잃어 버려서는 안되지 않을까? 우리 그렇게 살지는 말자.”
진호는 현지의 말을 곱씹어 본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거 같아. 현지야, 고마워.”
진호의 콧잔등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진호는 하늘을 올려다 본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다.
“11월 초에도 눈이 내리나?” 진호가 말했다.
“그러게. 11월 초에 눈이 내리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데 말이지. 신기하다. 그런데 이상한 게 날씨가 춥지 않고 따뜻한 편인데 눈이 오네.” 현지가 구름 가운데 구멍이 뚫린 파란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나 아까부터 저 구멍 뚫린 거 같은 하늘이 되게 신기했어.”
“맞아. 나도 그런 생각했어. 어떻게 저기만 동그랗게 구름이 없을 수가 있나? 난 저런 하늘 처음 봐.”
이때 구멍 뚫린 구름 사이 파란 하늘에서 하얀 불빛이 반짝거렸다.
“현지야, 봤어? 저기 파란 하늘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리는 거.”
“응. 너도 봤어?”.
“응. 저게 뭐지? 나는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서도 저 반짝거리는 걸 봤거든. 그때는 잘못 봤다고 생각 했는데 아니었네. 현지야, 별이었을까?”
“설마, 대낮에 별이 보이겠어? 아마 인공위성 아닐까?”
“아! 인공위성일 수도 있겠구나.”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바로 녹아버린다.

그날 현지와 진호는 즉석떡볶이를 먹지 않고 헤어졌다. 진호는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에게 학교를 자퇴하고 수능을 다시 보겠다고 말했다. 그날 어머니와 진호는 펑펑 울었다. 일주일 후 진호는 학교를 자퇴했다. 학교를 자퇴하자마자 현지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다. 진호는 가슴이 많이 아팠지만 현지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이별 통보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Epilogue
1년 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 진호가 수능을 마치고 시험장을 나왔다. 고등학교 3학년 때보다 시험을 잘 본 것 같다. 그래도 작년까지 다녔던 학교를 다시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혹시 그 학교를 갈 수 있는 점수가 나오더라도 그 학교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다. 결과와 상관 없이 기분이 뿌듯하다. 시험을 본 학교 정문에는 시험을 보고 나오는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들로 북새통이다. 어머니는 오늘 바빠서 못 오신다고 했다. 진호는 버스를 타기 위해 인파를 뚫고 걸어간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진호를 부른다.
“진호야!”
진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무심코 뒤돌았다. 현지가 꽃다발을 들고 활짝 웃으며 서있다. 진호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현지를 바라본다. 현지가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진호의 입가에 조금씩 미소가 번진다.
“현지야, 어떻게 여기..”
“어떻게는 너 수능 보는 날이니까 왔지. 수능 다시 본 거 축하해!”
현지가 진호에게 꽃다발을 건넸고 진호는 어색한 자세로 꽃다발을 받아 안는다.
“고마워.”
현지와는 1년 만에 만나는 거다.
현지가 진호에게 팔짱을 끼며 말한다. “시험도 끝났는데 우리 즉석떡볶이 먹으러 갈까? 작년에 못 먹었잖아.”
“즉석떡볶이 완전 좋지. 우리 튀김만두 추가로 넣어서 먹자.”
“하하. 그래 만두 더 넣어 먹자. 즉석떡볶이의 꽃은 당연히 튀김만두지. 하하. 그나저나 어머니는 오늘 안 오셨어?”
“응. 엄마 바빠. 일도 바쁘고 일 끝나면 남자친구 만난다고 하더라고. 얼마 전에 남자친구 생겼어.”
“진짜? 잘 됐다. 그런데 엄청 신기하다.”
“뭐가 신기해?”
“얼마 전에 우리 아빠도 여자친구 생겼거든.”
“와! 잘 됐네. 진짜 잘 됐다.”
현지와 진호가 웃으면서 걸어간다. 맑은 하늘에 작고 하얀 불빛이 반짝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현지와 진호는 반짝거리는 불빛을 보지 못했다. 이때 진호의 스마트폰에 톡이 오는 알림이 울린다.
“뭐지? 이상하네.” 톡을 확인한 진호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왜 그래?” 현지가 물었다.
“모르는 사람한테 톡이 왔는데, 아무 내용도 없고 동그란 얼굴에 활짝 웃는 이모티콘 있잖아. 그것만 왔어. 누가 잘 못 보냈나 봐.”
“정말 이상하네. 문자도 아니고 톡을 어떻게 모르는 사람에게 잘못 보낼 수가 있는 거지?”
“그러게 말이야.”
진호는 톡을 삭제하고 발신자를 차단했다. 갑자기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현지와 진호는 하늘을 올려다 본다.
“뭐야? 하늘이 맑은데 어떻게 눈이 내릴 수 있지?” 진호가 말했다.
“그러니까. 날이 이렇게 맑은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 이럴 수도 있는 건가?”
현지와 진호는 눈이 내리는 맑은 하늘을 바라본다.
“에이, 모르겠다. 눈이 오든 말든 배고픈데 우리 얼른 즉석떡볶이나 먹으러 가자.”
“그런데 현지야, 나 같이 나쁜 사람을 다시 만나기로 한 거야?”
현지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1년 동안 기다리느라 힘들었어. 그리고 나도 그렇게 좋은 사람만은 아니야. 진호야, 우리 덜 나쁜 사람이 되도록.. 아니, 우리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면서 살자.”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호가 현지에게 물었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음.. 생각을 멈추지 말아야지.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이상화하지 말아야만 해.”
“맞는 말이야. 생각을 멈추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해. 생각을 해야 해! 계속 생각해야만 해! 생각을 해야 한다고..” 진호가 반복해서 읊조렸다.
현지와 진호는 팔짱을 끼고 빠르게 걸어간다. 두 사람 위로 더 많은 눈이 내린다. 맑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바로 녹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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