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에버렛 시스템

2021.09.15 19:5309.15

후회할 행동을 했나요? 돌이킬 수 없다고 자책하고 있나요? 에버렛 시스템으로 오세요. 당신이 후회할 행동을 하지 않은 그 우주로 당신을 데려다 드릴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우주는 나눠지고 있답니다. 파동 함수는 붕괴되지 않으며,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주사위를 던져서 3이 나왔다면, 단지 당신이 속한 우주가 3이 나온 곳으로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다섯 가지의 가능성은 가능성이 아닌 현실로 어딘가에 존재합니다. 에버렛 시스템을 무시하는 당신이 존재하는 우주도 있겠지만, 에버렛 시스템을 선택한 당신이 존재하는 우주로 들어오세요.

 

“엄밀하게 말하면, 실제 다중 우주에 들어가는 건 아닙니다.”

광고 문구를 읽고 있는 나에게 체험 코디네이터가 말했다.

“저희 서비스는 ‘만일 다중 우주가 있다면, 내가 후회할 어떤 행동을 하지 않은 또 다른 우주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 위에 세워져있습니다. ‘그곳의 나라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가상 현실로 체험하게 해주는 겁니다.”

여러 말들이 귀에 들어왔지만, 그저 ‘후회’라는 말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 혹시 ‘다른 세계로 들어가서 현실 세계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지는 않을까?’ 같은 걱정을 하지는 마세요. 광고 문구는 그저 비유일 뿐입니다. 대신 체험은 아주아주 실재적이죠.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 같은 시시한 방식이 아닙니다. 비삽입형으로 고객님의 뇌와 컴퓨터를 직접 연결하는 BCI(Brain-Computer-Interface) 방식을 통해 시각, 청각뿐만 아니라 촉각, 미각, 후각까지 완벽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따뜻한 몸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고요. 음식의 맛을 현실보다 더 맛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침묵이 계속되는 우주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이 정도로 떠들어 댔는데도 잠자코 있는 나를 마주하고 있는 이 우주가 못마땅했는지 코디네이터가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관심이 가시나요?”

이제는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처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겨우 내뱉었다.

“왜 두 시간뿐이죠?”

“좋은 질문입니다!”

대화를 이어나가게 되어 기쁜지 목청을 높이며 그녀가 대답했다.

“그것은 우선...”

“시스템 리소스 문제입니다. 워낙 현실과 똑같은 경험을 제공하려다 보니 저희 쪽 시스템 리소스가 상당히 들어요. 그래서 이 체험 서비스가 고가인 것이기도 하고요.”

“또 한 가지는...”

“이건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요...”

나 같은 고객에게 특히 더 중요한 유의사항인 듯, 코디네이터는 얼굴을 가까이하며 말했다.

“체험 시간이 길어지게 되면,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임상 실험을 통해 밝혀진 부분이죠. 두 시간을 넘겨 체험하신 분들이 가상 현실과 실제 세계를 혼동하시는 부작용들이 좀 있었습니다. 두 시간의 체험 세션 후에 최소 일주일 이상의 휴식 기간을 둔 후, 다음 번 세션을 체험하시도록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완벽한 몰입감을 위해 수면 마취를 시행하는 것도 규정이 엄격한 이유 중 하나고요.”

역시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우물거리고 있는 동안, 코디네이터는 덧붙였다.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체험하시는 동안, 고객님의 뇌파와 생체 신호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해서 위험 신호를 감지하니까요. 고객님의 건강에 해로울 정도로 뇌파와 생체 신호가 불안정해지면 접속은 종료되고 그 이후로는 서비스 이용이 제한됩니다.”

정신 건강에 해를 미칠 정도로 현실과 똑같다고?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바다.

“좋습니다. 이용하겠습니다. 뭘 하면 되죠?”

코디네이터의 표정이 밝아졌다. 동시에 매우 진지해지기도 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지금부터가 중요한데요. 고객님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선택이 있었던 그 시점, 그 시점에서 딱 두 시간을 체험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시점이 언제죠?”

“2021년 5월 22일 토요일 아침입니다. 아내와 딸이 놀이공원에 가는 도중에 교통사고가 났어요.”

“아...”

듣고 있던 그녀가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원래 저도 함께 갈 계획이었는데, 갑자기 회사에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딸만 데리고 나갔어요. 체험 시간이 두 시간뿐이라면 아내가 출발하기 직전 장면으로 돌아가서 아내가 차를 몰고 나가지 못하게 하고 싶습니다.”

꽤 오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그녀도 침묵이 있는 이 우주를 참을 수 있는 모양이다. 그녀가 결심한 듯 물었다.

“아내분과 따님의 사진이 있는 클라우드 접속권을 저희한테 주실 수 있을까요? 동영상은 더 좋습니다.”

그녀가 내민 동공 인식기에 눈을 갖다 대자, 내 클라우드에서 수없이 많은 우리 가족의 사진과 동영상이 에버렛 시스템에 업로드되었다.

“실례가 안된다면, 업로드되는 동안 저도 사진들을 봐도 될까요?”

“....”

이미 눈물이 흘러내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이 나왔다.

“네, 그러세요.”

업로드가 끝나자 코디네이터가 말했다.

“저희 쪽 사전 작업이 사흘 정도 걸립니다. 나흘 후, 금요일 오후 같은 시간에 뵈면 어떨까요?”

“좋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쳐내며 내가 말했다.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있었다.

 

 

아내 은영의 뒷모습이다! 오래된 우리 집 거실에서 딸 수진이의 나들이옷들을 챙기고 있다. 봄날의 햇살이 아홉 살 여자아이의 알록달록한 옷들을 비추고 있다.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아내를 껴안는다. 아내의 작고 따뜻한 체온이 내 몸에 전해진다.

“어머! 이 사람이 오늘따라 징그럽게 왜 이래. 회사에 급한 일 있다더니 안 가는 거야?”

“응, 다른 사람한테 대신 좀 해달라고 했어. 오늘 우리 재밌게 놀자.”

“와! 아빠 오늘 우리랑 같이 놀이공원 가는 거야?”

어느새 내 딸 수진이가 내 품에 와서 안긴다. 얼마 전 엄마 손에 이끌려 수진이는 파마를 했다. 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내 뺨을 스친다. 앞니가 빠진 아홉 살 내 딸 수진이가 맞다. 아기일 때는 내 배 위에서 잠들기도 했던 그 내 딸 수진이가 지금 내 품 안에 있다.

“응, 그래. 아빠 오늘 수진이랑 엄마랑 같이 놀 거야. 그런데, 우리 E 랜드말고 L 월드로 놀러 가자.”

“아이, L 월드는 많이 가봐서 E 랜드 가고 싶은데~~”

“수진아. 아빠 말씀도 맞다. 5월에는 나들이 길이 많이 막히잖니. 우리 오랜만에 지하철 타볼까?”

아내는 내가 회사에 안 나가게 된 사실 자체로 매우 만족하는 듯하다. 착한 내 딸 수진이도 곧 수긍한다.

지하철에 오른다. 빈자리가 하나 나자 아내는 그 자리에 수진이를 앉힌다. 아홉 살 꼬마가 귀여웠는지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수진이를 보고 미소를 짓는다.

“아이고, 다리 아파라.”

수진이를 일으키고 그 자리에 내가 앉은 후, 수진이를 내 무릎에 앉힌다. 옆자리 아주머니가 눈치를 준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둘 앞에 서있는 은영의 손을 잡는다. 은영은 창피한지 손을 빼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 은영의 손이 따뜻하고 보드랍다. 수진이는 마냥 즐거운 듯 내 무릎에 앉아 연신 재잘댄다. 이곳이 나의 우주다.

L 월드에 도착한다. 왠지 모를 초조함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지만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다. 단지 나의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행복감이 모든 불안감을 억누른다. 수진이는 작년까지 키 제한에 걸려서 롤러코스터를 탈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136센티미터! 우리 딸이 태어나 처음으로 당당하게 롤러코스터에 오른다. 롤러코스터가 하늘로 솟구치고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동안 우리 세 식구의 함성과 비명이 귓전에 울린다. 롤러코스터를 좋아한 적이 없었는데, 높은 곳에서 떨어지며 다리와 몸이 붕 뜨는 순간, 안전 바가 풀어져 몸이 튕겨져 나간다 해도 우리 셋이 손을 잡고 하늘을 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홉 살짜리 어린이는 먹고 싶은 것도 많다. 추로스와 탄산음료를 와구와구 먹더니 알록달록 캔디 가게로 가자고 성화다. 한 움큼씩 형형색색의 캔디를 담는다. 아내와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여보. 오늘 웬일이야?”

“뭐가?”

“이 썩으니까 사탕 조금만 먹으라는 잔소리를 안 하네.”

아내는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짓는다.

“자기는 내가 맨날 잔소리만 하는 잔소리 쟁인 줄 아나 봐. 오늘은 그저 한없이 내 새끼가 예뻐 보이기만 하네.”

“엄마, 아빠. 우리 회전목마 타자.”

수진이는 아기 때부터 유난히 회전목마를 좋아했다. 아장아장 이제 걸음마를 막 뗀 아기였을 때, 용감한 기사인 엄마는 말 등에 올라타 우리를 이끌고, 아빠와 우리 수진이는 마차에 앉아 좋아하곤 했지. 이제 아홉 살 어엿한 어린이인 우리 수진이가 가장 크고 멋진 말에 올라타고 엄마, 아빠도 각자 말 한 마리씩 차지한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예쁘다. 나의 아내 은영. 대학 캠퍼스에서 처음 만났던 어느 봄날의 그 얼굴 그대로 나에게 웃어주고 있다. 예쁘다. 내 딸 수진. 어쩌면 웃는 모습이 제 엄마와 저렇게 똑같을까.

 

회전목마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진다. 아내와 딸을 보려고 두리번거리려는데 몸이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갑자기 숨이 가빠지면서 공포가 밀려온다. 이게 뭐지? 이게 뭐지?

 

 

“죄송합니다.”

코디네이터가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두 시간이 끝났구나. 이곳은 내 우주가 아닌데, 나는 도로 이 낯선 우주에 떨어져 버렸구나.

“이것 좀 떼도 되겠습니까?”

“앗, 죄송합니다. 저희가 떼어드릴게요.”

간호사가 와서 이마에 있는 연결선을 떼주었다.

“이런 것이었군요. 코디네이터님이 죄송하실 게 뭐 있겠습니까.”

“체험 시간을 좀 더 늘려드리고 싶지만 법규 때문에요.”

“아닙니다. 정말 좋았습니다. 가상 현실이지만 가족의 얼굴을 보니 마음의 짐을 좀 덜어낸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우선 휴식을 취하신 후, 혹시 체험을 더 하고 싶으시면 저희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아닙니다. 최소 요구 기간이 일주일이라고 했나요? 다음 주 금요일 이 시간으로 지금 예약해 주십시오.”

“네, 고객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야 코디네이터의 얼굴과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20대 후반 정도 나이의 젊은 여성, 이소윤. 수진이 또래다.

 

 

“야옹~”

고양이가 내 품에 와 안긴다. 접힌 귀로 유명한 스코티시 폴드 종이다. 녀석은 얼굴도, 눈도, 심지어 몸 전체도 동글동글 귀여운 외모를 하고 있다. 애교도 꽤 있는 편이라 대게 소파에 있는 나에게 먼저 다가와서 풀쩍 뛰어올라 안기곤 한다. 몸은 전반적으로 흰색인데, 얼굴 쪽에는 자신이 호랑이와 친척임을 자랑하는 듯 회색 줄 무늬가 있다.

녀석의 이름은 아치(Archie)다. 존 아치볼드 휠러(John Archibald Wheeler)의 미들 네임에서 따왔다.

“아치. 널 이중 슬릿 사이로 던지면 어떻게 될까?”

아치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들어 올린 후, 마주 보며 내가 말했다. 아치는 내 눈을 바라보며 야옹 하고 울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이중 슬릿 사이로 던져도 간섭무늬를 얻을 수 있다! 고양이가 우주에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 상태, 즉 결맞음 상태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고양이도 파동성과 입자성, 두 가지 상태가 중첩되어 존재할 수 있다! 고양이도 이중 슬릿의 왼쪽 구멍과 오른쪽 구멍을 동시에 지날 수 있다! 이게 코펜하겐 해석, 즉 결 어긋남 해석이지.”

서은영. 나의 아내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대학교 4학년, 은영이가 2학년일 때 소프트웨어 공모전 참가자로 우린 만났다. 컴퓨터 공학과에 다니던 나는 코드를 짰고 물리학과에 다니던 은영은 데이터 베이스 설계를 맡았다. 은영은 양자역학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러니까 오빠와 나 역시 연인 관계와 단순 선후배 관계의 두 가지 속성이 중첩되어 있다고 볼 수 있어.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있는 것처럼 우리 사이도 연인 관계와 단순 선후배 관계의 두 가지 가능성이 동시에 중첩되어 존재하는 거야.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

나의 사랑 고백에 은영은 이런 식의 짓궂음으로 화답했다. 그럴때 마다 내 얼굴 표정은 손에 쥔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린 어린아이처럼 일그러졌고, 은영은 그런 어리숙한 나를 놀리는 걸 좋아했다. 그런 나를 보며 어느 날 은영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오늘 우리 그 상자를 열어볼래?”

그날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It from bit. 존재는 비트로부터.”

존 아치볼드 휠러의 이 말을 나의 아내 서은영은 가장 좋아했다.

“모든 것은 1927년 클린턴 데이비슨과 레스터 저머가 이중 슬릿을 통과하는 전자 빔 실험을 하면서 시작되었지.”

은영은 마치, “하느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 하와를 만드시면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지.”라는 식의 말이라도 하는 양,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곤 했다.

“전자는 입자였기 때문에 파동이 이중 슬릿을 통과했을 때 기대되는 간섭무늬는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 하지만 관측을 할 때는 입자를 던졌을 때 기대되는 줄 무늬가 찍힌 반면, 관측을 하지 않을 때는 파동이 두 구멍을 동시에 지날 때 나타나는 간섭무늬가 찍혔지. 거시 세계는 물질과 에너지라는 존재하는 실재에 의해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 반면, 미시 세계는 확률에 의해 요동치는 불확정성 원리의 지배를 받기 때문일까? 사실 이런 설명 만으로는 부족했어. 모든 거시적 존재는 빅뱅 이전의 양자 요동이라는 미시적 존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냔 말야. 게다가 안톤 차일링거는 축구공 모양의 탄소 원자 육십 개로 이루어진 풀러렌을 통해서도 간섭 무늬를 얻었단 말야. 전자의 1백만 배의 질량을 가진 풀러렌은 사실상 거시 세계의 물질이거든.”

“그렇다면 우리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이중 슬릿에 던져도 간섭무늬를 얻을 수 있겠군. 사실상 관측의 주체가 되는 우주와의 정보 상호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실험 조건만 세팅할 수 있다면 말이야.”

은영의 관심사에 맞장구를 치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터넷 검색과 독서가 필요했지만, 사랑에 빠진 나에게 그 정도의 수고는 즐거움일 뿐이었다.

“오! 오빠도 이제 양자역학을 잘 이해하게 되었구나. 잘 했어. 공부 많이 했네.”

나의 발전을 칭찬하며 은영이 말했다.

“계속해서 관측이 문제가 되자, 물리학에 확률론을 도입하는 것이 죽기 보다 싫었던 아인슈타인은 물었지.”

“우리가 쳐다보지 않으면 달은 없는 것인가?”

“방금 그거 성대모사야?”

‘나의 여자친구는 어쩜 이리 독특하면서도 사랑스러운가?’ 생각하며 내가 물었다. 내 질문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은영은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존 휠러는 ‘지연된 선택’ 실험을 통해 전자가 입자 또는 파동으로 결정되는 것은 이중 슬릿의 구멍을 지날 때가 아니라 실험자가 사전에 특별한 측정 장비를 추가할 때라는 점을 증명했어. 존 휠러는 말하고 싶었을 거야.”

“아인슈타인 형님,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은 없습니다. 측정이 있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측정이 대상을 만들죠. 달은 우리가 바라봤기 때문에 하늘에 떠 있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우주에 실체나 본질은 없기 때문입니다. 질문과 답, 측정과 정보만 있을 뿐입니다.”

아인슈타인과 휠러의 성대모사 목소리가 비슷했기 때문에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은영은 역시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것이 ‘It from bit.’이 의미하는 바야. 오빤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해? 오빠는 존재하는 게 맞을까?”

 

존재, It으로서의 아내 은영과 딸 수진은 2021년 5월 22일 사라졌다. 내가 어제 만나고 온 은영과 수진은 누구였을까? bit, 정보로서 0과 1로 이루어진 가상 현실 세계 안의 환상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 나 역시 뉴런 안의 전기 신호로 정보 처리를 하는 컴퓨터 중 하나일 뿐이다. 달이 질문과 답, 측정과 정보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나 역시 그런 존재, 질문과 답, 측정과 정보로 만들어진 존재다. 나는 지금 눈을 떠서 내 손을 바라본다. A-C-G-T로 코딩된 단백질 덩어리다. 이 손의 원자들은 5년이면 백 퍼센트 다른 원자로 교체된다. 5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것은 DNA에 새겨진 나의 유전 정보 체계밖에 없다. 그건 결국 정보다. 나는 정보다. 은영과 수진도 지금 정보다.

 

나는 에버렛 시스템에 거짓말을 했다. 2021년 5월 22일, 사고 시점에 나는 아내와 딸과 동승하고 있었다. 운전자는 나였다. 우리는 E 랜드로 가고 있었다. 경부 고속 도로 신갈 분기점 원주 방향을 3킬로미터 앞둔 시점이었다. 나는 2차선으로 주행하고 있었다. 갑자기 3차선 전방에서 주행하던 화물 트럭의 바퀴가 떨어져 내 쪽으로 굴러왔다. 당황한 나는 핸들을 꺾었다. 1차로에서 주행해오던 승용차와 충돌했다. 그 순간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 사고로 아내와 딸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정신을 잃고 6개월간 혼수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내와 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그 사고는 나에게 실재감을 주지 못한다. 그 일은 진짜로 일어났던 일이 맞는 걸까?

내가 핸들을 꺾는 바람에 내 차와 충돌한 차량의 탑승자 역시 사망했다. 젊은 부부라고 들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부모님이 피해자의 가족과 합의를 마친 상태였다. 더군다나 하반신 마비로 움직일 수도 없게 된 나를 어찌할 수도 없었으리라. 피해자 가족분들을 뵙고 사죄하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이십 년간 나는 하반신 마비 상태로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왔다. 이십 년간 나의 두뇌는 전기 신호를 발생시켰다. 하지만 척수가 손상된 상태에서 나의 두 다리에는 어떤 전기 신호도 도달하지 못했다. 나의 두 다리라는 단백질 덩어리는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 있는 것처럼, 내 다리도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의 삶은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는 중첩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작년에 내 두개골과 내 대퇴부 신경망에 작은 칩을 심자 상황이 달라졌다. 둘 다 동전 만 한 크기다. 내 두뇌에 심긴 브레인 칩이 전기 신호를 발생시키자 무선 통신을 통해 그 신호가 하반신에 전달되었다. 거짓말처럼 그 순간 나는 걷게 되었다. 아니 심지어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와 똑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브레인 칩을 두뇌에 심은 컴퓨터 보안 전문가. 에버렛 시스템에 나에 관한 이 정보는 주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가상 현실에 접속하고 있는 동안, 뇌파를 활용해 시스템을 해킹해 내 브레인 칩에 다운로드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알 것이다. 실제로 작년에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고 차량에는 아내와 딸만 동승하고 있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나는 에버렛 시스템을 해킹한 후 다운로드할 것이다. 은영과 수진이 존재하는 다중 우주는 내 두뇌의 해마 안, 작은 브레인 칩에 생겨날 것이다! 비록 그 우주가 비트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전혀 상관없다.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이 거기에 없는 것처럼, 이 비루한 현실의 나를 무시하고 내 브레인 칩 안에 있는 다중 우주 안에 머문다면 나는 영원히 은영과 수진과 함께 있을 수 있다!

 

“휴 에버렛 3세는 프린스턴 대학 존 아치볼드 휠러 교수의 대학원생이었어.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있는 ‘중첩’ 상태에 있다가 관측을 할 때에만 파동함수가 붕괴되며 어느 한 쪽으로 결정된다든지,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이중 슬릿의 왼쪽 구멍과 오른쪽 구멍에 동시에 ‘중첩’되어 있다가 관측할 때만 파동함수가 붕괴되며 어느 한 쪽으로 결정된다든지 하는 설명이 에버렛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야.”

은영은 이렇게 말했었다.

“에버렛은 완전히 새로운 가설을 제안하지. 우주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살아있는 우주와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죽어있는 우주로 갈라진다는 거야. 확률도 없고 중첩도 없고, 오로지 모든 경우의 수들만 존재하는 거지. 관찰자가 어느 한 쪽의 우주로 고양이와 함께 갈라져 나왔고 어차피 반대쪽으로 갈라져나간 다른 우주와는 소통할 방법이 없으니, 우주는 어느 한 쪽으로 진행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거지.”

“미친 생각 같은데?”

내가 말했다.

“응. 다른 사람들도 오빠처럼 생각했어. 사실, 우리 직관하고는 맞지 않는 미친 생각이었지. 하지만 휠러는 에버렛의 박사 학위 논문이 마음에 들었나 봐. 어쨌든 방정식 상으로는 정확하게 맞았으니까. 그래서 양자역학의 태두인 닐스 보어에게 에버렛의 논문을 보여주고 의견을 구하지.”

“닐스 보어는 뭐라고 했어?”

“쓰레기 같은 생각이라고 했지. 결국 휠러는 에버렛에게 박사 학위를 위해 논문을 수정하라고 권했고,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수정한 형태로 논문은 수정되지. 에버렛은 학계에 남지 못하고 어딘가 취업은 해야겠기에 군수 산업 쪽에서 일을 하게 되었지. 자신의 생각이 맞는데 세상이 그걸 받아들여주지 않으니까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살았어. 결국 이른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말았지, 심지어 그의 딸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다중 우주에서 아버지를 만나겠다며 자살을 했어. 안타까운 스토리지.”

“에버렛은 본인의 이론을 확신했던 건 아니었군.”

내가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은영이 물었다.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이 큰 환영을 받는 우주도 있었을 거 아냐. 그 우주에서는 분명히 에버렛이 노벨상을 받았을 텐데 왜 그는 낙심해서 술과 담배에 찌들었을까?”

은영이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

“오빠 말이 맞는데? 오빠야말로 진정한 다세계 해석의 신봉자 군.”

 

그래. 은영과 수진이 없는 우주로 갈라져 나왔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없다. 은영과 수진이 나와 함께 있는 우주가 분명히 있다. 그곳에서는 이미 수진이가 내 품에 손자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 우주로 이주하면 된다!

 

 

아내 은영의 뒷모습이다! 오래된 우리 집 거실에서 딸 수진이의 나들이옷들을 챙기고 있다. 봄날의 햇살이 아홉 살 여자아이의 알록달록한 옷들을 비추고 있다.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아내를 껴안는다. 아내의 작고 따뜻한 체온이 내 몸에 전해진다.

“어머! 이 사람이 오늘따라 징그럽게 왜 이래. 회사에 급한 일 있다더니 안 가는 거야?”

“응, 다른 사람한테 대신 좀 해달라고 했어.”

“와! 아빠 오늘 우리랑 같이 놀이공원 가는 거야?”

어느새 내 딸 수진이가 내 품에 와서 안긴다.

손목시계를 본다. 1시간 59분이 남아 있다. 나는 가족에게 양해를 구한다.

“여보, 수진아. 미안하다. 우리 오늘은 집에서 좀 쉬는 게 어떨까? 아빠가 회사를 나갈 필요까지는 없지만 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다행히 은영과 수진은 내 말에 수긍한다. 은영은 분주히 점심 식사 준비를 시작하고, 수진은 레고를 한바닥 어지러놓고 맞추기 시작한다.

나는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편다. 엔맵(nmap)을 통해 에버렛 시스템의 IP와 포트, OS를 확인한다. 에버렛 시스템의 방화벽은 생각보다 강력하게 구축되어 있다. 판교에서 알아주는 보안 전문가인 나도 애를 먹는다. 오월의 봄날인데도 등에 땀이 흐른다.

“여보. 자기 뭘 그렇게 열심히 해?”

“응, 별거 아냐. 회사 일이 밀린 게 있어서...”

방화벽을 뚫고 포트에 접속하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이제 한 시간 안에 비밀번호를 알아내야 한다. 다행히 그래픽 카드의 연산 기능을 활용해서 해시 알고리즘을 알아냈다. 이제 어드민 계정에 접근해서 수퍼 유저 권한을 얻기만 하면 된다.

“여보. 점심 먹고 해. 자기 좋아하는 콩국수야.”

“응, 여보. 잠깐만, 5분만 있다가...”

이제 30초 남았다. 29, 28, 27, 26...

해냈다! 어드민 계정으로 시간 설정을 2시간에서 기한 없음으로 변경했다.

10, 9, 8, 7...

지난번처럼 두 시간에 체험이 끝나면 어떻게 하지? 내가 왜 시간만 세고 있었을까? 은영과 수진을 한 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둘걸....

3, 2, 1, 0...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성공이다! 여전히 은영과 수진이 내 눈앞에 있다.

나는 기뻐 소리를 지르며 아내를 껴안는다.

“어머, 이 사람이... 또 이러네. 무슨 백억 짜리 프로젝트라도 딴 거야?”

“아냐. 그것보다 더 기쁜 일이야.”

일단, 시간을 벌었으니 아내와 딸과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다. 콩국수의 시원하고 고소한 맛이 있는 그대로 느껴진다.

“자긴 콩국수 참 좋아해.”

맛있게 먹고 있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아내가 말한다.

“알잖아. 나한테 콩국수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걸...”

국수 가락을 입에 넣으며 내가 말한다.

대학교 1학년 때 온 가족에게 영주권이 나왔다. 미국에 사시는 외삼촌들의 초청 이민 절차가 십 년이 넘게 걸린 것이다. 나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언어 문제도 있었지만, 인종 차별을 느꼈다. 스무 살의 나이에 미국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주류에 편입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한국에서 입학한 대학이 이른바 명문 대학이라 기득권이 한국에 있다는 생각도 영향을 줬을지 모른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혼자 귀국길에 올랐다. 영주권은 반납했다. 그렇게 모든 걸 홀로 헤쳐나가야 했다.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했던 귀국 길 공항에서 처음 먹은 한국 음식은 콩국수였다. 여름 철이면 웬만한 한국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 콩국수. 콩국수는 나에게 한국을 의미했다.

그때 미국에 남기로 결정한 내가 사는 다중 우주도 있을 것이다. 그 나에게는 푸른 눈에 금발 머리를 한 아내가 있을지 모른다. 초끈 이론은 10의 1,000승 개의 다중 우주를 예측한다고 한다. 10의 1,000승 개의 또 다른 내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고, 그 각각은 다 다른 인연을 맺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 다중 우주 가운데서 나는 은영을 만났고 또 함께 수진을 탄생시켰다. 우리는 절대 헤어져서는 안되는 인연이다.

아내가 수진과 함께 책을 읽는 사이, 나는 다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일단 구조를 파악하니 에버렛 시스템 전체를 비교적 수월하게 다운로드할 수 있다. 이제 해킹하는 과정에서 남겨질 수 있는 모든 발자국을 지운다.

“여보. 주말인데 언제까지 일만 할 거야. 우리 한강 공원에 산책 나가요.”

아내의 말이 맞다.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가. 그들과 함께 있는 이 시간을 최대한 즐겨야 한다. 우린 한강 공원으로 나선다. 토요일 오후의 한강 공원,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부모와 아이들, 연인들, 친구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삶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노을이 붉고 아름답다.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온다. 수진이가 양치질을 하고 잘 준비를 한다. 옆에서 동화책을 읽어준다. 수진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 아내 옆에 눕는다. 아내와 사랑을 나눈다. 아내의 하얀 몸을 만진다. 아내도 내 몸을 만진다. 이 우주에 우리 둘 만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를 확인한다.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 시간이 지금 여기서 얼어버리기만을 바라며 아내의 부드러운 품에 안긴다.

 

“죄송합니다.”

코디네이터가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왜 잠에서 깬 거지? 혹시 내가 해킹에 성공한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두 시간을 넘겨 스무 시간 가까이 가상 현실 세계에 있었던 것에 대해 수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불안한 마음에 코디네이터의 표정을 살핀다. 무심한 표정이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익숙해진 나는 스스로 연결선을 떼고 몸을 일으킨다.

“다음 주 이 시간으로 또 예약해드릴까요?”

“아닙니다. 제가 좀 쉰 후에 홈페이지에서 예약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편안한 체험이셨기를 바랍니다.”

“고맙소.”

나는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왔다.

 

 

아내 은영의 뒷모습이다! 오래된 우리 집 거실에서 딸 수진이의 나들이옷들을 챙기고 있다. 봄날의 햇살이 아홉 살 여자아이의 알록달록한 옷들을 비추고 있다.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아내를 껴안는다.

아내가 내 품 안에서 모래처럼 스르르 녹아내려 사라진다.

“여보! 여보!”

내가 울부짖는다. 집마저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안돼! 안돼!”

 

 

무엇이 잘못된 걸까? 분명 해킹에 성공했다. 다운로드 과정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내 두뇌에 심어진 브레인 칩의 용량도 충분하다. 그런데, 왜? 왜?

 

 

“이소윤입니다. 선생님.”

‘이소윤? 이소윤이 누구지?’

“에버렛 시스템의 체험 코디네이터입니다. 기억나시나요?”

그녀가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혹시 내가 해킹한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해킹하신 소프트웨어는 잘 구동되던가요?”

그녀가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녀가 이 사실을 알고 있지?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는 휴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을 실제로 믿으십니까?”

머리에 총알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내 눈앞에 서 있는 이소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운 그녀의 말에 비해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단정했다. 마치 현실과 꿈의 중첩 상태에 놓인 것 같았다.

“제가 첫날 말씀드렸을 텐데요. 에버렛 시스템은 실제 다중 우주가 아닙니다. 단지, 후회할 일을 저지른 어떤 사람들의 괴로움을 달래주는 가짜 기억일 뿐입니다.”

“가짜 기억이라뇨? 가상 현실이기는 하지만, 현실을 체험하게 해주는 게 아니었던가요?”

“선생님께서 체험하신 생생한 장면을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선생님의 뇌파가?”

“모르겠소. 하지만 그 장면만큼은 너무나 생생했어요.”

“저희는 인터뷰를 통해 고객님들의 사연을 듣습니다. 대게 너무나 전형적인 사연들이죠. 그때 누군가를 사고 지점으로 보내지 않았어야 한다. 그때 화를 내고 헤어지지 않았어야 한다. 그때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어야 한다. 등등... 저희 에버렛 시스템의 라이브러리 안에 있는 사연들이 카테고리로 분류해 봐야 50개를 넘지 않습니다. 게다가 고객님들은 저희에게 그리운 분들의 사진과 동영상 자료를 꽤 많이 주시죠. 이 정도면 시나리오를 구성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저희는 그걸 장면으로 구성합니다. 그리고 고객님들께 수면 마취제를 주사하죠. 두 시간 동안 가족을 만났다고 생각하시나요? 두 시간 동안 그저 주무신 겁니다. 깨어나기 직전에 저희는 고객님이 원하실만한 장면을 기억의 형태로 주입할 뿐입니다.”

난 그저 내 아내와 딸이 출연하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본 것인가? 아니, 그저 그 장면을 본 기억을 주입받은 것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나는 아내와 딸을 만나고 왔다. 내가 소리쳤다.

“아니오. 분명 두 번째 접속 때 나는 해킹에 성공했소! 그리고 깨어났을 땐 이미 스무 시간 이상이 지나있었어요!”

이소윤이 비웃으며 말했다.

“그날 손목시계를 차고 오셨죠?”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최준규 선생님. 저희는 보통 고객님의 프로파일에 대해 별도로 조사합니다. 최준규 선생님은 컴퓨터 보안 전문가로 유명하신 분이더군요. 2021년 교통사고 당시, 최준규 선생님이 차 안에서 계셨고 선생님은 이십 년간 하반신 마비로 투병하시다가 최근에 두뇌에 브레인 칩을 이식하셨습니다. 대게 그런 경우, 저희는 90% 이상의 확률로 고객님께서 해킹을 시도하실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럼, 해킹 성공도 당신들의 시나리오일 뿐이라는 거요?”

화가 난 내가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해킹 시도를 하시는 분이 최 선생님만은 아닙니다. 그런 분들은 대게 손목시계를 차고 오시죠. 선생님의 의도를 간파한 저희는 스무 시간 분의 수면 마취제를 준비했을 뿐입니다.”

녹아내렸다. 은영과 함께 한 시간들, 수진과 함께 한 시간들, 내가 있는 공간, 내 앞에 있는 이 낯선 악마 같은 존재, 이소윤. 모든 것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 당신이 뭔데 나를 이렇게까지 무너뜨리는 거야. 당신 도대체 누군데, 나한테 와서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거야?”

그녀는 무너져내리는 나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2021년 5월 22일 오전 9시 39분, 경부고속도로 신갈분기점 전방 3킬로미터 지점, 제 어머니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이소윤이 내 딸이란 말인가? 내 딸은 최수진이다. 나는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맞다. 화물 트럭 낙하물이 떨어졌고 나는 핸들을 급하게 꺾었다. 그리고 옆 차선의 승용차량과 충돌했다. 그렇다면, 이소윤은 내가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만나지 못한 피해 차량 차주의 딸인가?

“혹시 나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건가요? 그렇다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당시 나도 찾아뵙고 피해자분들께 사죄를 드리고 싶었지만 무의식 상태에다가 마비 상태였습니다.”

“아닙니다.”

그녀가 말했다.

도대체 이소윤은 누구인가? 오랜 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퀴즈를 내고 맞추지 못하면 사람을 죽였다는 스핑크스처럼 내 눈을 바라보며 꽃꽃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도저히 이 퀴즈를 맞힐 수 없다.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다. 내 목숨은 그녀의 처분에 맡겨져 있을 뿐이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로 겨우 말을 내뱉었다.

“미안합니다. 이 소윤 씨. 나는 저지른 잘못이 많은 늙은이오. 내가 분명 당신한테 큰 잘못을 한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당신의 관용을 바랄 뿐입니다.”

“기억 이식이라는 것이 정말 역겹군요.”

이소윤이 드디어 답을 알려주려는 듯했다.

“그날 제 어머니는 당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당신의 내연녀였죠. 당신이 처음 나를 만나러 와서 놀이공원에 가는 당신의 아내와 딸을 말렸어야 했다는 둥, 엉뚱한 거짓말을 했을 때 저는 구역질을 참느라 혼났습니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나요?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이?”

이게 무슨 말인가? 차량에 동승한 사람이 나였다는 것이 에버렛 시스템에 알려지면 에버렛 시스템이 경계를 할까 봐 아내와 딸만 차를 타고 나갔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날 나는 분명 아내와 딸과 함께 E 랜드에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내연녀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제가 겨우 아홉 살 때입니다. 엄마는 직장 동료인 당신과 바람이 났어요. 아빠도 나도 엄마가 죽은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날 엄마와 당신은 어딘가 바람을 피우러 가고 있었던 거야. 우리 엄만 죽었는데, 당신은 살아났지. 아빠와 난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어. 그런데, 당신은 당신의 아내와 딸이 당신을 용서하지 않자 이십 년을 괴로워하다가 마침 브레인 칩을 이식할 기회가 오자 기억마저 이식해버린 거지. 당신은 내연녀와 함께 밀월을 즐기러 가다 교통사고가 난 기억을 당신의 가족과 놀이공원에 가다 교통사고가 난 기억으로 바꿔치기해버렸어. 어차피 몇 백만 원 더 얹어주면 브레인 칩을 심는 김에 기억 이식까지 서비스로 해주는 게 관행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당신은 멀쩡히 살아 있는 당신의 아내와 딸조차도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 우리 엄마에 대한 죄책감마저 깨끗이 씻어내 버렸지. 그러고선, 다세계 어쩌고 해가면서 또다시 자기 자신마저 속이려 드는 꼴이라니! 제발 너 자신을 돌아봐! 네가 누군지 똑바로 보라고!”

그녀의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떤 기억을 덮어쓰기 했는지 그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나는 하반신 마비 치료용 브레인 칩을 이식하면서 인생의 핵심 기억 한 가지를 다른 것으로 교체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다. 나는 구역질 나는 인간이다.

“자, 여기 이 사진을 보세요. 당신의 아내 서은영 씨와 따님 최수진 씨입니다. 제가 수소문해서 그분들 계신 곳을 찾아냈고 자연스럽게 접근해서 이렇게 사진까지 찍었죠.”

이소윤이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제주도였다. 이소윤과 함께 눈가에 주름이 생긴 내 아내 서은영과 훌쩍 커버린 내 딸 최수진이 미소 지으며 서있었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란 인간은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사진을 보고 있자니 뭔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이소윤을 봤다. 이소윤이 나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이소윤의 검지가 방아쇠 위에 얹어져 있었다.

그 순간, 우주는 이소윤이 방아쇠를 당긴 우주와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우주로 갈라졌다.

 

 

내 입장만 생각한다면 차라리 이소윤이 방아쇠를 당긴 우주로 갈라졌다면 좋았으리라. 그 우주에는 이미 나는 없을 것이고, 이소윤은 감옥에 있겠지. 그곳이라면 나는 또다시 소윤의 인생에 악영향을 미친 것이므로, 그 우주도 그다지 바람직한 곳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녀에게 두 번 죄를 지을 수는 없다. 그렇게 따진다면, 다행히도 이곳, 이소윤이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우주에 내가 살고 있다.

소윤이 총을 겨눈 채 한참 나를 바라보다 떠난 뒤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후, 나는 은영과 수진을 수소문해서 찾았다. 은영은 여전히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수진이 나를 만나는 것은 허락했다. 수진은 결혼해서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나는 일 년에 두 번, 설과 추석에 딸과 사위, 그리고 내 손녀를 만나는 과분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

 

소윤은 에버렛 시스템에서 핵심 인재로 성장했다. 소윤이 기획팀 차장을 맡고 난 뒤, 소윤은 회사에 새로운 제안을 했다. 에버렛 시스템은 인생에서 후회할 어떤 일을 이미 저지른 나 같은 지질한 인생들을 위한 위안용 가상 현실만을 제공하고 있었다.

소윤은 이미 저질러진 후회할 일 말고, 앞으로 후회하게 될 일들을 미리 가상 체험하는 서비스를 개발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후회할 일을 곱씹으며 사는 못난이들이 아니었다. 소윤이 새로 개발한 서비스는 무너져 내리는 북극의 빙하 위에 있는 북극곰의 현실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했다. 공장식 축산으로 고통받는 닭과 소의 입장에서의 현실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했다. 플라스틱이 목에 걸려 죽어가는 바다거북의 상황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했다. 기후변화로 인해 고온과 가뭄과 산불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경험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했다.

이 서비스는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생생한 체험을 통해 환경을 살릴 수 있는 행동이라면 어떤 것이든 실천하게 되었다. 후회를 곱씹으며 살아가는 찌질이들보다는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건전한 시민들이 훨씬 더 많았고 에버렛 시스템은 소윤이 기획한 새로운 서비스를 통해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소윤은 회사를 나와 환경 보호 활동가로 활약했고, 제1야당인 녹색당 대표가 되었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상속받은 전 재산을 녹색당에 정치 후원금으로 기부하고 세 평짜리 고시원에서 혼자 살고 있다. 나는 일 년 중 363일을 내 손녀를 만날 수 있는 설과 추석, 이틀만 기다리며 살고 있다.

 

이 곳이 내가 속한 우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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