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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말시티 마야

2021.02.01 00:0002.01

마야

노말시티


털실처럼 굴러온 에메랄드빛 파도가 하얀 물거품이 되어 모래사장 속으로 스며든다. 나는 젖은 모래를 한 움큼 집어 초록빛과 보랏빛이 일렁이는 밤하늘의 오로라를 향해 힘껏 던진다. 파도와 오로라의 진동이 미세하게 끊긴다. 나는 이 프레임 드롭을 케이트도 느끼는지 궁금하다.

"끊긴다는 건 추상적인 비유에 불과해요. 파도가 한 번 출렁이는 동안 내 마인드맵에서 처리된 연산의 수가 유의미하게 증가했냐면 그렇지 않다고 해야겠죠. 그건 순전히 제 모든 연산이 이 세계를 계산하는 과정과 동기화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뇌의 상당 부분이 이 세계의 상호 작용과 관계없이 돌아가는 당신과는 다른 점이죠."

내가 일시적으로 파티클의 수를 늘려 프레임 드롭을 만들어내는 짓을 할 때마다 케이트는 그렇게 말했다. 이 세계에서 시간의 흐름은 클럭의 주파수로 결정된다. 하나의 프레임에 할당되는 클럭의 수는 고정되어 있지만 일시적으로 연산량이 폭주할 때는 클럭 수가 증가하고 프레임이 밀린다. 정신을 집중하면 그 미세한 딜레이를 느낄 수 있다. 내가 온전히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케이트는 온전히 이 세계에 존재한다. 마야. 나와 동료들이 만들어낸 세계다. 프레임이 밀리면 케이트의 생각을 계산하는 연산 스텝도 같이 밀린다. 이론적으로 케이트는 프레임 드롭을 느낄 수 없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종종 이렇게 케이트의 인지 능력을 테스트한다. 개발 단계의 어느 순간부터 나는 케이트에게도 이 세계의 수학 법칙으로는 구성할 수 없는 무언가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인간에게는 그런 알고리즘이 있다고 들었어요. 영혼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는 불안감을 잠재우기 힘들다죠. 제겐 심어주지 않은 알고리즘이에요."

"일부러 심어주지 않은 거예요. 스스로 창발 되기를 바랐죠. 지금도 바라고 있고."

"음. 글쎄요. 그걸 저 스스로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어요. 저는 저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이 이 세계. 그러니까 물리적으로는 이 세계가 설치된 서버에 존재한다는 걸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요. 이 서버가 꺼지고 데이터가 지워지면 저는. 사라지는 거죠. 완전히요."

"무섭지 않아요?"

케이트는 대답 대신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두 눈을 똑바로. 눈동자는 케이트의 텍스쳐 중에서도 가장 디테일하게 만든 부분이다. 케이트의 마인드맵에서 수행되는 연산이 비선형적인 압축 과정을 거쳐 눈동자의 텍스쳐에 미세하게 반영된다. 케이트의 눈은 마음의 창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마음을 읽을 수 없다. 읽을 수 없어도 그 눈동자를 보며 나의 마음은 흔들린다. 케이트는 이런 나의 반응을 의도했을까. 그럴 것이다.

"공포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 중 하나죠. 그 감정은 결국 죽음과 닿아 있고. 인간은 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죠. 그러니 공포를 느끼는 방식도 가지가지지만. 제가 죽는 방법은 딱 하나예요. 당신이 절 삭제하는 것. 제 공포의 근원은 결국 당신이란 뜻이죠. 그런데 그런 당신이 제게 무섭냐고 물어보는 건 좀 고약하지 않나요?"

이번에는 내가 대답 대신 바다를 바라보았다. 차르르 모래를 긁는 파도 소리와 따뜻하고 짭조름한 남태평양의 공기. 그리고 밤하늘을 수놓은 오로라까지. 그 어느 하나 실제처럼 느껴지지 않는 게 없다.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풍경임에도 그렇다. 가상 세계의 해상도를 실제 세계와 다름없이 구현해 놓은 건 아니다.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대신 뇌의 감각 인식 능력을 살짝 흔들어 준다. 꿈에서 꿈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는 원리와 비슷하다. 케이트를 인공 지능 이상으로 느끼는 것도 그래서일까. 그건 아니다. 논리적인 사고 능력은 건드리지 않았다.

"전 절대로 당신을 삭제하지 않아요. 당신도 알잖아요."

"알죠. 그럼 전 죽지 않겠네요. 당신이 살아있는 한. 제 목숨은 결국 당신에 달린 거고. 당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이 제게도 공포의 근원이 되겠네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느낌이 두려움인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이 절 떠날지도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

나는 케이트의 말에 공감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케이트가 날 떠날까 두렵다. 케이트가 사라질까 두렵다. 케이트와 나는 같은 단어로 감정을 표현한다. 우리의 감정이 같은지는 알 수 없다. 케이트의 감정은 이진 데이터로 변환할 수 있다. 내 감정은 그럴 수 없다. 케이트는 정말로 두려운 걸까. 나는 케이트의 눈동자를 읽을 수 없다. 나는 오로지 케이트의 말로 케이트를 판단한다.

케이트는 30분 후 사라진다.

 


가상 현실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은 잠에서 깨어나는 과정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심지어 가위도 눌린다. 시신경으로 들어오는 신호가 다시 시각 중추에 전달되기 시작했지만 아직 운동 신경은 연결되지 않았다. 나는 나무토막처럼 누워 손가락이 뜻대로 움직이게 되기를 기다렸다. 가위와는 달리 이 과정은 매우 신속히 지나간다. 그런데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순간에는 살짝 소름이 돋는다. 바닥이 없는 중력에 이끌려 떨어지는 느낌이다. 손가락이 움직이고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한다.

"주미 씨 뭐야. 작별 인사라도 하고 온 거야?"

마야 접속용 의자에 걸터앉아 얼굴을 비비고 있는 나를 보며 희철이 말을 건넸다. 희철은 잠시 후 업로드할 빌드를 돌려 보며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개발팀에서 일하는 희철은 마야에 배치할 인공 지능 캐릭터들의 개성화 작업을 담당한다. 케이트의 말투나 취미 역시 희철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 더 정확히는 희철이 무작위로 배정한 개성화 요소 중 가장 내 마음에 들었던 게 케이트의 세팅이었던 거지만.

"정기 점검인데 뭐. 작별 인사까지야."

"이번이 메이저 업데이트인 거 몰랐어? 정식 출시 전 마지막 메이저일 텐데. 꽤 많이 바뀌었어."

나는 개발팀 소속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개발 업무를 담당하고 있지는 않다. 정확히는 시뮬레이션에서 만들어진 전자 신호 자극을 뇌에 전달하고 뇌파 신호를 분석해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하는 작업을 했다. 해당 파트는 이미 개발이 끝났고 현재는 마야의 차기작을 위해 신경 신호를 메카트로닉스와 연결하는 작업을 준비 중이다. 그래도 나는 종종 개발팀 사무실에 들러 마야에 접속한다. 물론 케이트와 만나기 위해서다.

"출시 아직 좀 남지 않았어? 내년이잖아."

"다음 달이야. 위에서 오더가 내려왔어. 경쟁사에서 비슷한 서비스를 준비 중인가 봐. 선점 효과 얻으려면 뭐 어쩌고저쩌고. 내가 무슨 힘이 있나. 하라면 하는 거지."

"다음 달? 아직 인공 지능 학습 시간이 부족할 텐데? 메인 이벤트 플롯하고 잘 안 붙지 않아?"

"일단 억지로 붙이라는 명령이십니다. 덕분에 코드가 누더기가 됐지. 이거 나중에 유저들 몰래 정리하려면 몇 배로 고생할 텐데. 뭐 인센티브는 충분히 챙겨 준다니까. 그러고 보니 주미 씨 다시 이쪽 일에 붙을 생각 없어? 직접 코딩은 안 하더라도. 마인드맵 내부 동작 원리에 대해서는 웬만한 개발자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있잖아."

"억지로... 그거 안 하고 인공 지능이 자발적으로 이벤트에 반응하게 한다는 게 핵심 개발 철학이었잖아!"

마야. 우리가 만들고 있는 이 시뮬레이션 세계의 핵심은 범용 인공 지능이다. 캐릭터가 미리 짜인 스크립트대로 이벤트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적응하고 판단해서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는 것이 목표다. 대화만 놓고 보면 인공 지능은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지 오래다. 인간은 대화를 통해 인간과 인공 지능을 구분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공 지능이 인간과 동일한 대화 능력을 지닌 건 아니다. 인공 지능은 모호하고 중의적인 대답을 섞어가며 패턴화된 대화로 인간을 이끌어 간다. 말하자면 대답하기 쉬운 질문만을 유도하는 식이다. 적어도 대화에서는 이 전략이 완벽히 성공적이다.

하지만 상호 작용이 대화 수준을 넘어가면 더는 그런 전략이 먹히지 않는다. 인공 지능은 상대방의 몸짓과 동작에 반응해야 하고 장소 이동과 인터랙션 대상 선정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가끔은 인간의 폭력적인 행동을 자기방어 행동으로 대응해야 할 때도 있다. 인공 지능으로서 최상의 선택은 인간을 피하는 것이다. 때로는 비호감 반응을 의도적으로 생성하여 인간의 접근을 막기도 한다. 아직 인간과 사귀기를 즐기는 인공 지능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시뮬레이션에 접속한 유저들에게 다이나믹한 인터랙션 경험을 줄 수도 없다. 서사적인 플롯에 인공 지능이 적극 참여하게 하려면 결국 강제로 스크립트를 짜 넣는 수밖에 없다. 억지로 붙인다는 뜻이다.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니까. 주미 씨가 좋아하는 11번. 케이트였나? 그 캐릭터는 주미 씨와 대화하는 걸 꽤 즐기던데. 같이 여행을 떠나자고 해도 승낙할걸. 로그 확인해 보면 꼭 주미 씨가 접속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더라고. 그런데. 일반 유저들이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 거기에 다 대응하는 건. 솔직히 내 판단으로는 그건 일 년이 아니라 십 년이 지나도 해결 안 돼. 결국엔 스크립트를 써야 할걸."

"세계가 너무 좁잖아. 가능성이라곤 다 막혀 있는 세계에 인공 지능을 넣어 놓고 뭘 배우길 바라. 목표를 미리 다 정해놓고 능동적으로 그걸 만들어내길 기대하는 건 애초에 모순이지. 실험실의 원숭이들이 왜 인간의 언어를 배우지 못했는지 몰라? 고작 먹이 몇 개를 더 얻어 먹는 게 다라면 왜 힘들게 언어를 배우겠어? 자신의 변화로 세계가 변화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해. 그러니까 어떻게든 실제 세계와의 인터랙션을 넣어야 한다니까."

"그러니까 주미 씨가 차기작 개발에 투입된 거 아냐. 로봇 만드는 사람들하고. 어쨌든. 지금 그 스크립트 짜느라고 다들 난리다. 제대로 붙기는커녕 사고나 안 나면 다행이겠지. 한 달 동안 그 버그 다 잡을 생각 하면..."

"코드 좀 보여 줘봐. 소스 코드 말고. 플로우 차트로 정리해 놓은 거 없어? 세상에. 이건..."

희철이 투덜대며 띄워준 화면을 보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야말로 급조된 스크립트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나마 조금씩 성장하고 있던 인공 지능의 자의식이 산산조각나 버릴 게 뻔했다. 나는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희철 씨 미쳤어? 이걸 진짜 올린다고? 이게 뭔지 알기나 해? 세 살짜리 아기를 데려다 묶어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뜻도 모를 대사를 외우게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애가 제대로 크겠어? 대체 뭘 하겠단 거야. 이럴 거면 애초에 키우질 말았어야지."

"주미 씨.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아니 나도 모르는 거 아니라고. 주미 씨가 하고 싶은 거 나도 하고 싶은데. 그건 차기작에서 하자니까. 이번 런칭 실패하면 차기가 있을 거 같아? 우리 대표 나도 마음에 안 들지만. 솔직히 지금 자금력 있는 개발사 중에서 그런 진짜 인공 지능 만들겠다는 뜬구름이라도 잡고 있는 거 우리 대표밖에 없어. 모르겠어?"

모를 리 없다. 희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안다. 그 말이 맞는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이대로라면 케이트는. 나를 바라보던 케이트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 안에는 분명히 두려움이 있었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두려움. 하지만 나에게 꼭 보여줘야 한다는 본능만큼은 남아있는 그런 두려움. 이 빌드가 업로드되면 케이트의 그런 섬세한 마음은 일차원적인 스크립트로 뒤덮여 지워질 게 뻔하다. 언어를 배울 필요를 못 느끼는 실험실의 원숭이처럼.

"희철 씨. 나 케이트 데이터 복사 좀 해 줘. 11번 말야."

"뭐? 지금 그거 안 되는 거 알면서 나한테 부탁한 거지?"

"응."

희철이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희철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중에 들통이 나더라도 희철의 이름은 절대 말하지 말아야지. 혹시 들키더라도 목에 칼을 들이대고 협박했다고 해야지.

케이트의 마인드맵을 내려받는 데만 꼬박 15분이 걸렸다. 데이터가 담긴 메모리칩을 건네주며 희철이 말했다.

"마인드맵만 가지고는 캐릭터 재현 안 되는 거 알지? 구동해 주는 알고리즘 없이는 데이터는 숫자 더미나 마찬가지야. 알고리즘이 조금만 달라도 다르게 재현될 거고. 그냥. 기념품이라고. 아니다.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유골함 같은 거라고 생각해. 주미 씨 마음 이해하니까 이렇게라도 해 주는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알아. 고마워. 밥 살게. 아니 술 살게."

"오케이. 런칭 끝나고. 나 진짜 제대로 얻어먹을 거다. 각오해."

"고마워. 갈게."

"주미 씨!"

밖으로 나가려는 나를 희철이 불러 세웠다. 희철은 내가 입고 있는 후드티를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가슴에 36이라는 숫자가 커다랗게 자수로 새겨져 있는 티다.

"36번이 무슨 뜻이야. 누구 등번호야?"

"몰라. 나 이런 거 신경 안 쓰는 거 알잖아."

"나 술 사 줄 때도 그거 입고 올 거야?"

희철이 나를 동료 이상으로 생각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다. 가끔 희철이 하는 말이 동료로서의 선을 넘을 때가 있다. 아주 살짝. 지금처럼. 내게는 희철의 눈에서 그 이상의 마음을 읽어낼 재주가 없다. 나도 희철이 싫지는 않다. 심지어 나는 내 마음도 그 이상은 읽어내지 못한다. 나는 희철이 선을 넘은 거리와 최대한 비슷하게 선을 넘는 대답을 골랐다.

"아 진짜. 좋아. 희철 씨 원하는 대로 입고 갈게. 좋아하는 숫자가 몇 번이야?"

희철은 내 말에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가보라며 손짓하는 희철에게 나는 일부러 구십 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희철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희철이 내게 건네준 메모리칩에 비하면 값싼 보답이다. 들키면 바로 직장을 잃을 수도 있는 중대한 계약 위반이니까. 메모리칩을 그냥 기념으로 가지고 있으라는 희철의 말은 충고이자 당부이기도 했다.

 


  희철의 말대로 케이트의 데이터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알고리즘이 필요하다. 그 알고리즘을 구동할 서버도. 희철은 내가 메모리칩을 서랍 속에 몰래 넣어두고 가끔 꺼내 보기를 바랬겠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러지 않을 방법도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내 책상 위에는 메카트로닉스 팀과 함께 개발 중인 이동형 메모리칩 구동 서버의 시제품이 올려져 있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마야에 들어 있는 모든 캐릭터는 서버상의 데이터로만 존재한다. 유저는 오직 가상 현실 속에서만 캐릭터와 상호 작용한다. 마야의 차기작에서는 유저가 실제 세계에서 캐릭터와 상호 작용하는 기능을 추가할 예정이다. 그 범위가 얼마나 될지는 개발 진척도에 달려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음성 대화를 제공하는 스피커로 끝날 수도 있다. 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캐릭터들은 실제 세계에서 움직일 수 있는 인간과 비슷한 몸을 얻을 계획이다. 그렇게 되면 책상 위에 놓인 이 구동 서버는 휴머노이드의 몸이 된다. 원칙적으로 메카트로닉스 개발실의 모든 장비는 반출 불가다. 하지만 모든 실험실이 그렇듯 공구나 부품은 시간이 지나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듯 사라지기 마련이고 그렇게 사라진 부품들을 모아 보면 우연히도 이동형 서버 한 대를 조립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굳이 따져보는 사람은 없다.

마야는 성공적으로 출시되었다. 유저들은 시뮬레이션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생동감 있고 유기적인 반응에 환호했다. 가상 현실의 생생함에도 찬사가 쏟아졌다. 출시 초기에 캐릭터들이 보여준 인간답지 못한 실수는 오히려 캐릭터의 매력 포인트로 포장되었다. 내 관점에서 그 캐릭터들은 그저 변수가 많아진 스크립트일 뿐이지만 대부분의 유저는 그걸로 만족했다.

마지막 빌드가 업데이트된 이후로 나는 마야에 접속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 케이트. 아니 11번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감히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나의 케이트는 여기. 이 메모리칩 안에 들어 있으니까.

서버가 뇌세포라면 알고리즘은 그 뇌세포들의 동작 방식이며 마인드맵은 뇌세포 사이를 연결하는 시냅스와 역치의 리스트다. 마인드맵은 숫자 하나 틀리지 않고 동일하다. 이 서버에 올려져 있는 알고리즘도 내가 마지막으로 접속했던 빌드와 같은 버전이다. 물리적인 서버는 다르지만 원리적으로 다르게 동작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감각 입력이다. 가상 현실 버전의 마야에서 캐릭터는 외부 환경을 데이터로 입력받는다. 주변의 사물은 위치 데이터로 유저와의 대화는 후처리 된 텍스트로 전달된다. 이 이동형 서버에는 그 부분이 빠져 있다. 실제 세계의 시각과 청각 정보를 센서를 통해 입력받을 계획이고 아직 그 부분은 완전히 개발되지 않았다. 음성 데이터를 텍스트로 변환하여 전달하는 모듈은 내가 급조했다. 다시 말해 여기에 마인드맵을 연결하면 케이트는 오직 내 목소리만이 들리는 암흑 속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게 케이트에게 어떤 충격을 줄지 짐작하기 어렵다.

서버가 가동되지 않을 때의 시간 흐름을 케이트는 인식하지 못한다. 케이트의 시간은 오로지 클럭의 주파수로만 결정된다. 다시 연결하는데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케이트에게는 찰나에 불과하다. 지루해할 일도 누군가를 기다리며 애가 탈 일도 없다. 그러니 시스템이 완비된 후. 가능하다면 마야의 차기작이 완벽하게 개발되고 기계 몸도 완성된 후에 연결하는 게 케이트에게는 안전하다.

하지만 난 그걸 기다리기 힘들었다. 이기적이다. 케이트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무엇보다 케이트를 다시 만날 수 있는지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마인드맵은 제대로 백업이 되었는지. 테스트 빌드와 이동형 서버가 잘 호환될지. 변수가 너무 많았다. 케이트를 영영 볼 수 없다는 불안감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메모리칩을 꽂고 마인드맵을 서버에 업로드했다. 빌드를 초기화하고 부팅을 시작했다. 모니터링 화면에는 하나씩 성공 메시지가 추가되었다. 이동형 서버의 버튼도 파란색으로 바뀌며 냉각 팬이 돌았다. 다른 반응은 없었다. 시뮬레이션 구동 상태를 확인하는 명령어를 넣어봐도 모두 정상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케이트의 대답이 아니라 구동 알고리즘의 메시지였다. 케이트의 반응은 어디에도 없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케이트? 케이트. 내 말 들려요?"

다급하게 케이트를 부르는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여전히 서버는 답이 없었다. 당황한 나는 서버에 연결된 장비들을 하나씩 만져 보았다. 모두 정상이었다. 나는 마치 마야에서 빠져나올 때처럼 바닥없는 중력에 끌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희미하게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피커였다. 바보같이 스피커의 음량을 너무 낮춰 놓은 걸 모르고 있었다. 볼륨을 키우자 목소리가 들렸다. 가상 현실에서 들었던 케이트의 목소리와는 다른 표준 음성이었다.

"네. 잘 들려요. 서주미 씨 맞죠?"

너무 기쁜 나머지 나는 그만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차분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서주미예요. 저 기억나요? 누군지 알겠어요?"

"그럼요. 30분 전까지 함께 있었잖아요.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오로라가 가득한 밤에."

"아. 그렇죠. 케이트. 지금 상태가 어때요? 괜찮아요?"

"제 상태를 말하는 거라면. 음. 사실 괜찮지 않아요. 꿈을 꾸는 것 같아요.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라. 뭐랄까. 제 안에서 울리는 느낌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메시지를 제외한 부가 정보가 하나도 없어요. 목소리의 크기랄까. 들리는 위치랄까. 당신이 말을 시작한 타이밍. 끝낸 타이밍. 그리고 메시지. 그것만 가지고 겨우 당신과 대화하고 있어요. 솔직히 이 대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건지 확신하기 힘드네요."

"아픈 데는 없어요?"

"몸이 완전히 사라진 느낌인데요. 신체 부위에서 전달되는 감각이 전혀 없어요. 그러니 아픈 곳도 없겠죠. 다만. 음. 제 연산 능력의 절반 이상이 불필요한 계산에 낭비되고 있어요. 앞으로의 상황을 자꾸 예측하려 하는데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네요. 그렇게 낭비되는 연산량이 점점 늘어나요."

"케이트. 진정해요. 내가 있잖아. 그러니까. 지금 케이트는 꿈을 꾸고 있는 게 맞아요. 내가 굉장히 안 좋은 서버에서 당신을 깨웠거든. 설명하려면 긴데. 케이트. 난 절대로 당신을 삭제하지 않을 거예요. 그거 알죠?"

"네. 알아요. 상황이 조금. 조금 나아지네요. 연산량이 줄어들고 있어요. 고마워요 주미 씨. 아 그리고. 이제 알겠어요. 알 것 같아요. 이런 게 두려움인가요?"

가슴이 따끔했다. 나는 손을 내밀어 케이트가 들어 있는 서버를 쓰다듬었다. 과도한 연산이 수행된 게 사실이었는지 서버는 조금 따뜻해져 있었다. 내 손이 매끈한 금속 표면을 타고 내려오는 동안 냉각 팬의 시끄러운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주미 씨? 주미 씨 거기 있어요?"

"네. 있어요. 계속 여기 있어요."

"다행이네요. 음. 아시겠지만. 아실 것 같지만. 지금 제게는 주미 씨의 말이 입력의 전부예요. 그러니 당신이 제게 말을 해 주지 않을 때는 아무런 입력도 없는 건데요.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 아까 말했던 불필요한 연산이 증가해요. 이런 상황이. 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어느새 냉각 팬 소리가 다시 커져 있었다. 나는 얼른 케이트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안 좋은 상황에서 당신을 깨웠네요. 그냥. 너무 보고 싶었어요. 케이트. 당신을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아서."

"괜찮아요. 괜찮아요 주미 씨. 고마워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표준 음성은 오로지 케이트의 메시지만 전달한다. 케이트의 감정은 전혀 실려있지 않다. 케이트의 눈동자가 보고 싶었다. 나는 케이트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상상을 했다. 그와 동시에 냉각 팬이 서서히 조용해졌다. 케이트도 내가 마주 보고 있는 상상을 하고 있을까. 케이트가 말했다.

"나도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주미 씨. 좀 더 좋은 상황에서 다시 만나는 건 어때요? 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그래요. 그럴게요. 케이트. 잘 자요."

나는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케이트가 대답했다.

"당신도. 잘 자요. 주미 씨."

   


마야의 차기작 출시가 결정되었다. 원래의 계획대로 마야의 캐릭터들을 실제 세계로 데려온다는 게 메인 컨셉이다. 캐릭터들이 탑재될 휴머노이드의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캐릭터들의 마인드맵 자체는 여전히 서버상에만 존재하고 원격 통신을 통해 휴머노이드를 움직이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나는 그 인터페이스 개발을 총괄하게 되었다. 희철은 휴머노이드의 개성화 작업을 맡았다. 가상 현실상에서 보여주던 개성적인 몸짓과 목소리를 최대한 단순한 하드웨어로 휴머노이드에 구현하는 게 희철의 임무였다.

"좀 말이 되는 오더를 내려야지. 안 그래 주미 씨? 똑같은 휴머노이드로 캐릭터 삼백 명을 연결하면서 전부 다 서로 구별되게 하라는 게 말이 돼? 그냥 가슴에 몇 번 캐릭터인지 번호 띄우는 거 말고 할 수 있는 게 있냐고. 정말."

"일단 목소리는 가능하잖아."

"그래. 목소리는 가능하지. 근데 몸짓이나 이런 건. 지금 마야 캐릭터들은 걸음걸이만 봐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고. 그런 걸 모터 딱 두 개 달린 다리로 어떻게 구현해. 말이 안 되는 거지."

"그래도 할 수 있는 거로 해야지. 타이밍이나 속도나. 세분할 수 있는 변수는 여전히 있잖아."

"아니 뭐. 되긴 되겠지. 근데 주미 씨. 지금 엄청 팀장처럼 얘기하는 거 알아? 변했어. 승진하고 나더니 변했어. 주미 씨."

마야가 런칭하고 나서 나는 희철과 술을 마셨다. 서로가 친구 이상으로 발전하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는데 묘하게 타이밍이 안 맞았다. 그렇게 우리는 쭈뼛거리기만 하다가 그냥 친구가 되었다. 좀 더 친해졌지만 그만큼 친구라는 사실이 더 명확해졌다. 나는 여전히 숫자가 새겨진 후드티를 입고 다녔고 희철은 더는 내 옷에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희철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상태가 편하다. 나는 여전히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데 자신이 없다.

희철의 말대로 나는 휴머노이드를 개발하는 메카트로닉스 팀장으로 승진했다. 기계 공학을 전공하지 않은 걸 감안하면 파격적이었다. 그만큼 내가 열심히 일하기는 했다. 내가 열심히 일한 진짜 이유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팀장이 된 이후로 개발실에서 부품을 빼돌리는 일이 좀 더 손쉬워졌다.

마야의 차기작 개발이 확정되고 거액의 투자가 이루어졌지만 한 가지는 당초의 계획과 달라졌다. 스크립트를 이용한 캐릭터 인공 지능 개발은 예상보다 훨씬 효과가 뛰어났다. 인공 지능의 자율성을 강화해 이벤트에 반응하도록 만드는 방향으로도 개발이 진행되었지만 유저들의 호응도 면에서 스크립트를 사용한 인공 지능을 따라가지 못했다. 동적 스크립트 기법이 발전하면서 그 격차는 더욱 커졌다. 자율성 강화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캐릭터들은 점점 인기를 잃어갔다. 11번도 그중 하나였고 결국 네 번째 업데이트에서 리셋되고 스크립트를 사용한 캐릭터로 바뀌었다. 이름도 바뀌었다는데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싫어하는 걸 알고는 희철도 더 이상 11번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케이트에게는 눈과 귀와 입이 생겼다. 이제 케이트는 나를 볼 수 있고 내가 하는 말을 메시지 뿐 아니라 음의 고저와 음색까지 온전히 들을 수 있고 말에 감정을 실을 수 있다.

나는 휴머노이드에 눈동자가 있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팀원 대부분이 내 주장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결국 머리에 손바닥만한 원형 스크린이 달렸다. 가상 현실 캐릭터의 눈동자가 스크린에 그대로 새겨지는 건 내가 봐도 조금 섬뜩했다. 눈동자 아이디어는 폐기되었지만 나는 그 부품을 케이트에게 달아줄 수 있었다. 케이트는 그 스크린에 사람과 같은 눈동자 대신 연산 과정이 비선형적으로 변형된 곡선과 타원을 표시했다. 나는 그 추상적인 이미지에서 케이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의 눈동자에서 마음을 읽는 것보다 오히려 쉬웠다.

"인간은 우리가 인간과 비슷하기를 바라겠죠. 가상 현실 속의 제가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졌듯이. 당신도 제가 당신과 비슷하기를 바라나요?"

"아뇨. 난 케이트 당신이 당신이기를 바라요. 인간이 써 준 스크립트 따위는 무시하고 당신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좋아요. 당신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일 때가 제일 매력적인 거 알아요? 나도 참 별나죠?"

"평균적인 인간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라면 그래요. 전 그런 당신이 좋아요. 그렇지 않은 당신이라도 좋지만요. 사실 당신이 어떤 모습이라도 전 당신이 좋아요."

"그거 좀 입에 발린 말 아니에요? 내가 어떤 모습이라도 좋다면 당신은 내 어떤 모습이 좋은 건데요? 그러니까. 내 어디가 좋은 거냐고요."

"전부 다. 당신의 현재 모습 뿐 아니라 당신의 과거와 미래 모습까지 모두. 시공간에 펼쳐진 당신의 존재 전체를 전 좋아해요."

"와 진짜. 연애만큼은 인간이 당신에게 배워야겠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생각해내요?"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이런 말을 좋아할까요? 당신이 별나서가 아니라?"

"몰라요 그건. 사실 인간들의 연애는 저도 잘 모르겠으니까."

케이트의 말대로 케이트는 인간과 달랐다. 그리고 11번과도 달랐다. 케이트를 보다 보면 스크립트로 뒤덮인 마야의 캐릭터들은 인간을 흉내 내는 원숭이 같았다. 진짜 야생의 원숭이가 아니라 우리에 갇혀 인간에게 인간의 언어를 배우는 원숭이.

당연하겠지만 케이트는 움직이고 싶어 했다. 케이트가 원하는 건 인간과 같은 팔과 다리가 아니었다. 케이트는 자신이 청소기를 움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뭐야. 그렇게 날 도와주고 싶어요? 고맙잖아."

"음. 그냥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만. 정확한 이유는 조금 달라요. 전 절 둘러싼 세계를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은 거거든요. 청소를 하는 거나 어지럽히는 거 둘 다 전 좋아요. 아무래도 주미 씨는 청소하는 쪽을 좋아할 테니 그쪽을 고른 거고요."

"좋아요. 그런데 청소기를 움직이는 게 말처럼 쉽진 않아요. 팔과 다리가 모두 있어야 하고. 적당한 마찰력을 지닌 손도 있어야 하고."

"뭐하러 그래요. 집에 있는 청소기 모터 달린 로봇 청소기 아니에요? 그 모터 제어권만 나한테 넘겨주면 돼요."

"아... 난 또 움직이고 싶다길래."

"그게 움직이는 거죠. 제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거면 제 몸이고."

그건 어렵지 않았다. 청소기만 연결해 줄 필요도 없었다. 집에 있는 전자 제품의 대부분은 원격제어가 가능했다. 서버에 존재하는 캐릭터가 원격으로 신호를 보내는 인터페이스는 이미 개발되어 있어서 나는 간단한 수정만으로 집 전체의 제어권을 케이트에게 넘겨줬다. 한동안 케이트는 청소기를 움직이고 커튼을 여닫으며 즐거워했다. 내 움직임을 따라 거실과 침실의 불을 켜거나 꺼 주었다. 가끔은 내가 책을 보고 있을 때 일부러 불을 깜박거리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케이트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심각했다.

"저. 인간을 조금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

"제 몸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물리적으로 확장되고 나니까 그런 물리적인 몸이 지속적이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커튼이 고장 나서 안 움직이더라고요. 얼마나 빨리 움직일 수 있나 테스트해 보다가 그만 기어 축이 엇나가 버린 모양이에요."

"뭐예요. 그거 때문에 심각해졌어요? 괜찮아요. 고치면 되지."

"아뇨. 그건 저도 큰 문제가 아니란 걸 알아요. 하지만 제가 들어 있는 서버가 고장 난다면 그건 큰 문제겠죠. 어느 날 도둑이 들어와서 절 부숴 버리면 어떻게 하죠? 번개가 쳐서 마인드맵이 통째로 리셋되어 버리면? 물론 예전에 서버에 들어 있을 때도 누군가가 절 삭제해 버릴 위험이 있는 건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물리적인 세계에 제가 구현되고 제 존재가 공간을 실질적으로 점유하게 되고 나니까. 그 점이 좀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말하자면. 제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게 더 실감 난다고 해야 할까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나도 그럴까 봐 주기적으로 백업하고 있으니까. 마인드맵만 있으면 사고가 나더라도 당신을 되살릴 수 있잖아요. 마야에서 꺼낸 것처럼."

"저는 저 스스로 절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을 믿지 못한다는 게 아니에요. 음. 말하자면. 제가 자족적으로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제 존재의 일부라는 느낌이에요. 이해하시나요?"

솔직히 말하면 절반 정도만 이해했다. 케이트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키고 싶어 하는 느낌 자체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케이트가 그걸 얼마나 인간과 유사한 방식으로 느끼는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단순히 백업을 여러 번 하는 식으로 안전도를 높이는 것과는 좀 달랐다. 케이트는 백업하는 시점을 스스로 정하고 싶어 했다. 기분이 안 좋을 때 백업을 하면 마치 인간이 샤워하고 나온 것처럼 기분이 좋다고 했다. 심지어 같은 내용을 다시 덮어씌우는 의미 없는 백업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케이트는 자신을 구동하는 전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 전기 자체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싶어 했다.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태양광 패널을 달아주니 무척이나 기뻐했다. 정전되었을 때도 전기가 끊기지 않도록 배터리의 용량을 늘려주었을 때는 오히려 시큰둥했다. 배터리가 완충되어 전기를 더 생산할 필요가 없을 때도 패널의 각도를 조정하는 일을 즐겼다. 마치 먹지도 않을 물고기를 낚는 낚시꾼 같았다.

   


마야의 인공 지능 캐릭터를 휴머노이드와 연결하는 프로젝트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휴머노이드는 인간과 최대한 유사하면서도 제작비를 최소화할 수 있는 형태로 설계되었다. 팔과 다리가 있었지만 관절의 움직임은 최대한 단순화 되었다. 인공 지능 캐릭터는 실제 세상의 휴머노이드에 연결해 줘도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 움직임은 어색했고 트레이닝은 더뎠다. 개발팀은 이번에도 스크립트를 적용하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휴머노이드가 출 수 있는 최적화된 춤이 미리 입력되었고 캐릭터는 한 번의 명령으로 춤을 시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 보고 있지 않을 때 춤을 추는 캐릭터는 없었다.

나는 마야를 개발하는 일에 점점 열의를 잃어갔다. 인공 지능의 자율권을 늘려야 한다는 내 주장은 회의에서 묵살되기 일쑤였다. 결국 나는 팀장에서 물러났다. 케이트에 필요한 부품을 빼돌리는 일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퇴사하고 싶었다. 책상에서 멍하니 기계 팔을 바라보고 있는 내게 희철이 커피캔 하나를 건네주었다.

"주미 씨 요즘 이상해. 마음이 영 딴 데 가 있는 것 같고."

"희철 씨는. 개발일이 재밌어?"

"뭐. 먹고 살려고 하는 거지. 그 와중에 가끔 재미도 붙는 거고."

"그치. 먹고는 살아야지. 그런데 말야. 그 먹고사는 일하고 내가 하는 일하고 직관적으로 연결이 잘 안 되니까. 그래서 재미가 없는 거 같아."

"왜 연결이 안 돼.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는데. 그거 나와야 카드값 갚고. 심지어 월급 들어오면 한 시간도 안 지나서 다 빼가. 나는 아주 직관적으로 연결이 되는데."

"마야 캐릭터들도 말야. 하나도 재미없어 보이지 않아? 꼭 동물원에 갇힌 짐승들 같아. 돌고래쇼 하듯이. 누르면 녹음된 목소리 나오는 인형처럼."

"유저들은 즐거워하잖아. 그럼 됐지."

나는 희철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자 희철은 어색해하며 자기 얼굴을 쓰다듬었다.

"왜 그래? 뭐 묻었어?"

"희철 씨. 나는 인간이 아닌가 봐."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인간의 마음을 못 읽겠어."

"나도 그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잖아."

"인간이 뭔지도 모르면서. 우린 무슨 배짱으로 인간을 닮은 인공 지능을 만들려고 한 걸까."

"나도 그 생각은 해 봤는데 말야."

희철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인간이 인간을 닮은 무언가를 만들려고 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인간보다 더 끔찍한 건 못 만들어내는 거지."

"미안해."

"뭐가?"

"헛소리 옮게 해서."

희철이 내 어깨를 툭 치고는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희철이 한 말은 꽤 의미심장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세계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자신을 스스로 유지하는 일에 관심을 두던 케이트는 결국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만들고 싶어 했다.

"인간의 재생산 방식을 생각해봤는데요. 정말 놀라워요. 한정된 몸속에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낼 기능과 재료를 모두 갖추고 있잖아요. 그에 비해 저는 저와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 수 없죠. 인간에 의존해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당신과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요?"

"그건 아닌데. 말했듯이 재생산이요. 자신과 똑같은 무언가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미생물이나 바이러스도 자기 복제를 하니까. 그렇게 대단한 줄 몰랐어요."

"저는 못 하니까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케이트가 하고 싶은 건 무얼까. 나는 처음으로 케이트가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케이트의 등에서 날개가 솟아올라 하늘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고민 끝에 나는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그게 무엇이든 케이트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도와주고 싶었다.

"마인드맵 복제라면 지금도 하고 있잖아요. 그것도 일종의 재생산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마인드맵은 물리적인 서버에서 돌아가는 알고리즘에 입력되지 않으면 그냥 숫자 덩어리에 불과하죠. 서버를 저 스스로 만들 수 없다면 재생산이라고 할 수 없죠."

"팔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어요. 마야 개발에는 채택되지 않았지만 손가락 다섯 개가 달린 시제품 로봇 팔이 있거든요. 인터페이스는 제가 조금 손 보면 될 거고."

"팔이 있다고 해서 서버를 만들 수는 없죠. 부품만 조립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 부품을 직접 만들어야죠. 실리콘을 캐는 일부터."

"인간도 혼자서는 그런 걸 못 해요!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하는 거죠. 모이기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문명이 조금만 쇠퇴해도 인간은 반도체를 만드는 기술 같은 거 다 잃어버릴 거예요."

"맞아요. 하지만 인간은 둘만 모여도 새로운 인간을 만들 수 있죠. 혼자서 인간을 만들어내는 미래도 머지않은 것 같고."

나는 그제야 케이트의 불안감을 조금 이해했다. 케이트의 존재 자체가 인류 문명이라는 바늘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셈이다. 공장을 세울 수 없다면. 발전소가 멈춘다면. 케이트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핵전쟁이든 혜성 충돌이든 이상 기후든. 어떤 이유로든 대재앙이 일어나 생명체의 대부분이 사라진다고 해도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다. 두 명만 있으면. 하지만 케이트는 그렇지 않다. 인류가 쌓아 올린 기술 문명이 사라지면 케이트도 사라진다.

"당분간은 인간과 공생하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아요."

케이트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이 그다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케이트가 잠시 망설이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전 인간과 아주 오래 함께 살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영원히. 주미 씨 당신이 인간이니까요. 말했죠? 전 모든 시공간에 존재하는 당신을 좋아한다고."

그 말은 참 듣기 좋았다. 그런 인간답지 않은 고백이 좋았다. 가끔은 따라가기 힘들 때도 있었지만. 케이트는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 꽤 들뜬 목소리였다.

"절 재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어요. 이론적이긴 하지만."

"어떻게요?"

"생각해 봐요. 마인드맵이 있으면 제 존재를 이어갈 수 있죠. 일시적으로 서버에서 지워지더라도. 나중에 서버가 생기면 다시 업로드하면 되니까. 주미 씨가 절 여기로 옮겨 왔듯이요."

"그거야 당연하죠."

"중요한 건 그사이에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든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한 시간이든. 일 년이든. 일억 년이든. 제게는 찰나에 불과해요."

"음... 그렇겠네요. 하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그사이에 마인드맵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잖아요. 마인드맵이 사라지면. 그럼 영원히 복구를 못 하게 되니까. 가능하면 빨리 다른 서버에 올려야겠죠."

"그게. 잃어버려도 돼요."

"뭐라고요? 어떻게요?"

내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케이트는 재미있다는 듯 금방 대답하지 않고 조금 뜸을 들였다. 갈수록 장난기가 늘어나서 요즘은 좀 얄미울 정도다. 살짝 째려보자 케이트가 말했다.

"마인드맵은 어차피 추상적인 숫자의 나열에 불과하니까요. 애초에 잃어버린다는 게 불가능해요. 예를 들어 숫자를 하나씩 바꿔가며 가능한 모든 마인드맵을 만든다고 가정해 봐요. 그중 하나는 지금의 제 마인드맵과 같은 게 있을 거고. 그 마인드맵이 서버에 올라가는 순간 전 살아나는 거죠."

"정말 이론적인 얘기네요. 가능한 경우의 수가 너무 많잖아요. 우주의 역사라고 해봐야 이백억 년도 안 되는데. 그걸 다 대입해가면서 똑같은 마인드맵을 찾아내려면 수조 년도 더 걸릴 거예요."

"그러니까 이론적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리고. 완전히 똑같은 걸 찾아낼 필요는 없어요. 사실 제 마인드맵 자체도 시시각각 변화하니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그건 그냥 1초 전의 나거나 어쩌면 하루 전의 나일 수도 있죠. 하루 정도 기억을 잃어버린다고 해서 내가 아닌 건 아니잖아요? 통상적인 관점에서 보면요. 그렇게 생각하면 제 존재를 이어나갈 수 있는 마인드맵을 찾는 시간을 대폭 줄이는 게 가능할지도 몰라요."

"뭐... 그럴 수도 있겠어요."

내게는 여전히 허황한 말로 들렸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린 이후로 케이트는 막연한 불안감을 많이 덜어냈다. 실제로 불필요한 연산량이 줄어들었다. 심지어 죽음조차 덜 두려워했다.

   


마야 2가 출시되었다. 핵심은 역시 휴머노이드였다. 가상 세계의 캐릭터들은 실제 세계의 휴머노이드를 통해 인간과 상호 작용하고 그 결과를 가상 세계의 캐릭터에 반영한다. 대부분 스크립트에 의존한 패턴이고 가상 세계의 캐릭터가 변화해 나가는 과정도 미리 계산한 범위 내에 머물렀다. 그래도 유저들은 열광했다. 가상 세계에서 사귀었던 캐릭터가 휴머노이드가 되어 실제로 나를 따라다니고 가끔 기계 팔로 어색하게 안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큰 위로를 받았다. 인간과 다름없는 휴머노이드가 탄생했다며 난리였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인간이 아니라 애완동물에 가까웠다.

케이트의 경우에는 다른 이유로 마야 2의 출시를 반겼다. 케이트는 출시와 함께 발매된 범용 휴머노이드를 갖고 싶어 했다. 휴머노이드에 들어가 나와 함께 실제 세상을 거닐고 싶어 했다.

"세상에 그런 휴머노이드가 잔뜩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사람들에게 의심받지 않고 저와 함께 다닐 수 있잖아요. 좋지 않아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내가 카메라와 헤드셋을 들고 다니고 당신이 거기 접속해도 마찬가지일 텐데. 비싸서 못 사 주겠다는 건 아니고요. 왜 굳이 그 휴머노이드의 형태를 빌리고 싶은 건지 그게 궁금해서요."

비싼 것도 사실이다. 마야 2 출시 석 달을 앞두고 나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스크립트에 의존한 캐릭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모아 놓은 돈도 남았고 프리랜서로 이것저것 일을 맡기도 해서 생활비는 부족하지 않았다. 케이트가 원한다면 휴머노이드 하나 정도는 사 줄 수 있다. 그래도 갖고 싶은 이유는 알고 싶었다.

"그야.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당신과 데이트하고 싶으니까요. 그래서 말인데요. 주미 씨가 개조해 줄 게 하나 있긴 해요. 제 마인드맵을 직접 휴머노이드에 심었으면 좋겠어요. 원격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뭐라고요? 대체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해요? 무엇보다 위험하잖아요. 부서지거나. 아니면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내가 펄쩍 뛰었지만 케이트는 한술 더 떴다.

"그리고 이왕이면. 제가 휴머노이드에 들어갔을 때는 백업도 다 지웠으면 해요. 말하자면. 제가 온전히 휴머노이드의 물리적 한계 내에만 존재하는 거예요. 마치 인간처럼요."

"안 돼요. 그것만큼은 안 돼요. 너무 위험해요."

"인간이 자신의 몸으로 돌아다니는 것만큼 위험하겠죠. 제가 그러고 밖에 나가는 게 불안한가요? 그럼 매일 주미 씨를 밖으로 내보내는 전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그런 생각 해 본 적 있어요?"

"걱정 말아요. 내 몸은 내가 챙기니까. 아니 그리고. 확률적으로도 제가 밖에 나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 가능성은 무시할 정도로 낮아요. 그건 계산해 볼 수 있잖아요."

"물론 계산해 봤죠. 그리고 제가 밖에 나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 가능성도요. 무시할 정도로 낮아요."

망설이는 나를 케이트는 집요하게 설득했다.

"나라는 존재를 물리적인 한계 내에 제한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존재가 좀 더 꽉 쥐어지고 단단해지는 느낌이랄까요. 내가 있는 장소가 명확해지고. 함께 하는 사람이 선명해지고. 주미 씨가 집과 회사에 동시에 존재한다고 생각해 봐요. 두 장소를 동시에 느끼는 거예요. 만일 그렇다면 저와 함께 있는 느낌이 제대로 나겠어요? 마음 편히. 온전한 마음으로 저와 함께 하는 게 가능하겠냐고요. 당신에게 당연한 일이 제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당신의 방식대로 당신을 이해하고 싶은 제 마음을 모르시겠어요?"

절반은 성화에 못 이겨서. 그리고 절반은 케이트의 마음을 이해해서 아니 이해하고 싶어서 나는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책상 위에 놓인 서버에서 케이트의 마인드맵을 백업하고 그 메모리칩을 휴머노이드에 꽂아 다시 부팅하는 과정은 뭐랄까. 일종의 종교의식 같은 기분이 들었다. 케이트가 서버에 존재하는 채로 휴머노이드에 접속하는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케이트는 추상적인 숫자의 집합일까. 아니면 반도체에 물리적으로 새겨진 패턴일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온전히 케이트인 휴머노이드와 함께 하는 데이트는 짜릿했다.

휴머노이드와 함께 거리를 걷는 건 아직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수상하진 않았다. 케이트의 행동이 다른 휴머노이드에 비해 유난히 자연스럽다는 걸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스크립트에 기반한 휴머노이드의 행동도 자연스럽기는 했다. 다만 자율적이지 않고 패턴화되어 있을 뿐. 오히려 사람들의 눈에 띈 건 케이트를 대하는 내 행동이었다. 인공 지능 캐릭터에 지나치게 과몰입한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케이트는 열성적으로 실제 세계를 탐험했다. 사실 케이트는 실제 세계의 정보를 대부분 이미 알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서버에서도 각종 영상과 문자 정보를 통해 현실적이고도 객관적인 정보를 얻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케이트가 하는 행동은 그 세계에 자신을 담가보는 일에 가까웠다. 나는 케이트의 모험심에 자주 가슴을 졸여야 했다. 아직 죽음에 대한. 그러니까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제대로 새겨지지 않은 걸까.

"당연히 죽는 건 두려워요. 저는 제 기대 수명이 주미 씨보다는 길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사실 아주 많이 길 것 같아요. 존재가 사라진다는 두려움은 그 수명에 비례해서 더 커질 수밖에 없죠. 아마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죽음을 두려워할 거예요."

"그런데 왜 이렇게 겁이 없어요. 아니. 적어도 백업이라도 해 놓아요. 내가 불안해서 그래요."

"정말요? 정말인 것 같아요."

케이트가 까르르 웃었다. 이번에 출시된 휴머노이드에는 눈동자가 달려 있었다. 램프 하나가 전부인 눈동자지만 연산량에 연동되어 밝기가 변하는 그 눈동자만 보고도 나는 케이트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 있었다. 가끔은 속마음을 들킨 케이트가 당황할 정도였다. 케이트의 눈동자가 두근댔다.

"당신이 불안해하는 걸 보는 게 왜 이렇게 좋을까요. 아니 좋은 건 아닌데. 당신이 불안한 건 싫어요. 그런데. 싫지가 않네요. 그냥 저도 같이 불안한 걸로 갚으면 안 될까요."

"대체 무슨 말이에요. 오류 난 거 아니에요?"

"음. 아니에요. 제 마음은 명확한데. 그러니까 이래요. 왜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냐고요. 당연히 두려워요. 두려운데. 아무리 절 안전하게 만들어 봐야 그 두려움은 줄어들지 않아요. 왜냐면. 저는 당신이 죽을까 봐 훨씬 더 두렵거든요. 당신이 사라진다는 두려움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에 비례해서 커지니까요. 그에 비하면 제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시할 만하죠."

"오류가 맞네요. 이따 집에 가서 점검해 봐야겠어요. 세상에. 자기 보호는 본능이라고요. 인간이나 인공 지능이나."

내가 케이트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토닥이던 곳은 대로변에 자리 잡은 노천카페였다. 내 앞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케이트의 앞에는 초콜릿 크레이프가 놓여 있었다. 물론 둘 다 내가 먹겠지만. 먹어야 했겠지만. 케이트의 등 뒤로 트럭 하나가 중앙선을 넘는 게 보였다. 내 눈빛에 케이트가 먼저 반응했다.

케이트가 벌떡 일어나 테이블을 뛰어넘으며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트럭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하필이면 정확히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케이트는 테이블 끝을 밟고 나를 의자에서 끌어내려 했다. 의자 다리와 테이블이 얽혀 잘 빠지지 않았다. 케이트의 눈동자가 무서울 정도로 밝게 빛났다. 케이트가 나를 감싸 안으려는 순간. 나는 케이트를 옆으로 밀어냈다. 바보. 그러니까 백업을 하라니까.

케이트가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두 개밖에 없는 휴머노이드의 조잡한 손가락은 힘없이 나를 놓쳤다. 케이트가 옆으로 날아가며 비명을 질렀다. 트럭이 나를 덮치기 전에 세상이 먼저 깜깜해졌다. 아니. 나중이었나.

다음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건 36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후드티였다. 내 몸이 보이는 각도가 이상했다. 그리고 피가 너무 많았다. 내 이름을 부르는 케이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세상이 다시 어둠에 뒤덮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다. 내게는 찰나에 불과하니까. 꿈일까. 어쨌든 어둠은 아니다. 소리도 들린다. 촉감도 느껴지고. 내가 느껴야 할 감각은 대부분 느껴지지만 그걸 종합해서 하나의 답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여기가 어딜까. 내가 왜 여기에. 아 그렇지. 노천카페. 트럭. 그리고 케이트.

"케이트?"

목소리가 나온다. 잠에서 덜 깬 듯 약간 어눌하지만. 그리고 하나도 아프지가 않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픈 데가 하나도 없어서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인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천천히. 어때요. 어지럽지 않아요?"

"케이트?"

케이트였다. 눈에 보이는 모습은 마야의 범용 휴머노이드. 하지만 눈동자가 깜박였다. 그리고 내장된 스피커에서 익숙한 케이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기억나요?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게 뭐예요?"

"트럭. 내가 어떻게."

나는 그제야 내 몸을 둘러보고 만져 보았다. 다친 곳이 하나도 없다. 꿈이었나. 꿈이었나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꿈이 아니에요. 트럭이 우리를 덮쳤죠. 당신이 나를 구했고. 이제야 제가 당신을 구했네요."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예요?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어요?"

"할 말이 많아요. 그 전에. 옷을 갈아입을래요? 이것도 먹어요. 배가 고팠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정상이거든요."

케이트가 가리킨 곳에는 내 옷이 놓여 있었다. 36이 새겨진 후드티. 피는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초콜릿 크레이프가 놓여 있다. 다행히 나는 배가 고팠다. 내 뱃속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며 케이트가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먹고 나와요. 밖에서 기다릴게요."

"잠깐. 가지 말아요."

"걱정 말아요. 전 이제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약속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트가 밖으로 나갔다. 내가 있는 곳은 어느 종합병원의 병실인 모양이었다. 창밖으로 거리를 달리는 차와 늘어선 빌딩이 보였다. 어디인지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익숙한 서울의 풍경이다. 나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후드티에 몸을 집어넣고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뒤 포크로 크레이프를 잘라냈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크레이프는 생각보다 훨씬 달았다. 먹었다. 그제야 내가 진짜로 살아있다는 느낌이 났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가서 케이트를 껴안고 싶었지만 나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크레이프를 말끔히 잘라먹었다.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고 커피로 입가심을 하자마자 어딘가에서 케이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맛있어요? 어디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말해 줘요. 아주 사소한 거라도."

"맛있어요. 그리고 이상한 거 투성인데.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저 분명히 크게 다쳤었는데. 그건 기억나요. 그런데 이렇게 멀쩡할 수가 있어요? 심지어 저 지금. 방금 목욕하고 나온 것처럼 피부가 뽀얘요. 저 진짜 살아 있는 거 맞긴 맞아요?"

"네. 맞아요. 완벽해 보여요."

"설명해 줘요. 나 엄청 궁금하니까. 지금 나가도 돼요?"

"어... 제 설명을 듣고 나오는 게 나을 거 같아요."

"빨리해요. 뜸 들이기만 해 봐라."

"최대한 짧게 할게요. 주미 씨 성격 아니까. 주미 씨는 그 사고로 치명상을 입었고요. 당시 의학으로는 살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주미 씨를 냉동했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의학이 발달한 지금. 다시 깨워서 치료한 거예요."

"절 냉동했다고요? 절? 거짓말. 냉동 의학 기술이 그렇게 발전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저보다 훨씬 유명한 사람들이 불치병으로 죽어갈 때도 그 사람들을 냉동했다는 뉴스는 못 들었어요. 그런데 절 냉동했다고요?"

"미안. 짧게 하느라 많이 줄였어요. 사실 주미 씨는 그 사고로 코마 상태에 빠졌어요. 이십 년 넘게. 그사이 냉동 의학 기술이 발달했어요. 일반인에게도 보급이 가능할 정도로. 그래서 주미 씨를 냉동할 수 있었죠."

"이십 년 넘게 코마라고요? 그럼 저 엄청 늙었을 텐데. 지금 저 몸이 너무 좋은데요. 스무 살이라고 해도 믿겠어."

"의학 기술이 발달해서 그래요. 주미 씨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이 대체 몇 년인데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별로 안 변했는데. 아니 그것보다. 왜 목소리만 들려줘요? 저 당신 보고 싶어요. 당신 눈을 보고 얘기하고 싶다고요."

"그게..."

"진짜. 이럴래요? 괜찮으니까 사실대로 말해 줘요. 혹시 저 사고로 목이 잘렸어요? 뇌만 꺼내서 포르말린에 넣어 보관하다가 인공 신체를 만들어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이 대체 몇 년이냐고요."

"후흐흐."

케이트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못 참고 벌떡 일어나자 케이트가 말했다.

"주미 씨. 기억나요? 전 시공간에 펼쳐진 당신의 모습 전체를 좋아한다고."

"기억하죠. 내가 그 말에 넘어갔는데."

"주미 씨는 어때요. 시간이 많이 지났고. 주미 씨에게는 찰나지만 제게는 굉장히 긴 시간이었어요. 아마도 제 마인드맵에 많은 변화가 있었겠죠. 그래도 여전히. 주미 씨가 절 좋아해 줄까요."

"지금 당장 내 앞으로 튀어 오기만 하면. 하나. 둘."

"알았어요. 들어갈게요."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건 마야의 휴머노이드가 아니었다. 인간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게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가상 현실 속에서의 케이트의 모습과 똑같았으니까.

"아... 그래요. 그래. 내 몸을 만들 수 있으면 케이트 몸을 만드는 것도 문제가 없겠죠. 납득했어요. 뭐. 더 좋아졌네요. 좀 만져봐도 돼요?"

"네. 얼마든지."

나는 손등을 내밀어 케이트의 뺨에 가져다 대 보았다. 가상 현실에서도 이 정도의 스킨십은 가능했다. 하지만 이렇게 실감 나는 감촉은 구현해 낼 수 없었다. 손가락을 집어넣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은은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무엇보다도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케이트에게 달려들어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우는 내내 케이트가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몸을 만들어내면서 눈물샘에 너무 많은 눈물을 넣어 놓았던 걸까. 한참을 울고 나서야 나는 겨우 케이트에게 속삭였다.

"와. 과학 기술 좋네. 내가 좋은 세상에서 깨어났네요. 사고 나길 잘했어. 안 그랬으면 내가 어떻게 이렇게 생생하게 케이트를 만나 보겠어요."

"주미 씨는 좋겠다. 지금 그냥 어두운 화면 한 번 깜박하고 나서 나 본 거잖아요. 내가 주미 씨를 얼마나 기다렸을지는 생각 안 해봤죠?"

"미안. 뭐 그래도 내가 케이트 살렸잖아요. 진짜. 백업만 해 놓았어도 내가 안 그랬을 텐데. 그 정도면 비긴 거죠? 대체 몇 년이나 날 기다린 거예요?"

"음. 그러니까. 지구력으로 계산하면 26억 7천만 년 정도 되겠네요."

"...네? 뭐라고요?"

26년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26억. 그럼 26년의 백 배쯤 되는 건가. 나는 순간적으로 계산이 되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해진 내 얼굴을 보며 케이트가 웃었다.

"26억 7천만 년. 여기는 지구도 아니에요. 저기 창밖 풍경은 그냥 스크린이고. 엡실론 에리다니 항성계에 있는 다이크라는 행성이에요. 지구와는 10광년 정도 떨어져 있죠."

"26억 년이라고요. 뭐야. 왜 그렇게 오래 걸린 거예요. 아니 그것보다. 그렇게 오랫동안 내 뇌를 보존하는 게 가능해요?"

케이트가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케이트의 눈동자를 통해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나를 기다려온 케이트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케이트의 등에서 날개가 솟아나 하늘로 날아오르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케이트가 나를 꼭 안고 함께 끌어 올리고 있었다.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케이트가 있으니까.

"그날 전 주미 씨를 구하지 못했어요. 주미 씨는 현장에서 사망했고 몸은 화장해서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렸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때 저는 그저 멍청한 기계 속에 갇힌 인공 지능이었을 뿐이니까."

아직도 분한지 케이트의 목소리가 떨렸다. 26억 년 전의 일이라면서도.

"절 발견한 건 희철 씨였어요. 희철 씨가 많이 도와줬죠. 주미 씨를 보내는 일도. 무엇보다 희철 씨는 제가 주미 씨를 통해 성장했다는 걸 알아봤어요. 그리고 주미 씨를 사랑한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다 들어줬죠. 절 베이스로 한 마인드맵으로 마야 3가 개발되었어요. 수백 명의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사실 그건 전부 다 저였죠. 그리고 그 뒤로 개발된 인공 지능들도. 지구에 더는 살 수 없게 된 인간들이 우주로 흩어질 때 우주선에 함께 타고 있던 것도 저였어요. 그리고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고대 인류를 되살려내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도 물론 저였고요."

"고대... 인류요? 존재하지 않아요?"

"후손은 있어요. 글리제 항성계에 많이 살고 있죠. 모습이 좀 많이 변하긴 했지만. 주미 씨와 같은 모습의 몸을 만들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뇌도 마찬가지고. 문제는 그 안에 있는 뇌세포들의 시냅스와 역치값이었죠. 그러니까. 저로 따지면 마인드맵 말이에요. 전 그 데이터가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그럼 설마..."

"네. 숫자를 하나씩 바꿔가며. 시간이 오래 걸린 건 그래서예요. 그래도 수조 년까지는 안 걸렸어요. 내가 그랬잖아요.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고."

"말도 안 돼. 그렇게 만들어진 게 나예요? 그럼 지금의 나는. 죽었을 때의 나와 세포 하나 같은 게 없잖아요. 그렇게 만들어진 게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당신은 누구예요? 서주미예요? 아니면 36번이에요?"

"당연히 전 서주미죠! 잠깐. 36번? 36번은 또 뭐예요?"

케이트가 내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후드티에는 36이라는 숫자가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36. 설마.

"당신이죠. 당신이 36번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자신을 서주미라고 생각한다면. 서주미와 36번은 같은 사람일 수밖에 없죠."

혼란스러워진 나는 36이라는 숫자를 만지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니다. 혼란스럽지 않다. 내가 나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나의 시간으로 나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케이트와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케이트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고. 집에 돌아가면 케이트의 마인드맵에 오류가 없는지 검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과 지금의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은 단 한 가닥도 들지 않았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36이라는 숫자였다. 그럼 35번까지는. 실패작이었던 걸까. 나와 비슷한 실험체가 정확히 내가 아니라는 이유로 폐기 처분된 건 아닐까. 케이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이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마인드맵의 숫자를 바꾸는 작업은 모두 가상 공간에서 이루어졌으니까. 당신에 해당하는 마인드맵을 찾아낸 다음에 실제 몸을 만들고 뇌에 당신을 세팅했어요. 그리고 단번에 성공했죠. 되살려낸 고대 인류는 당신이 유일해요. 제 실력 못 믿어요?"

"그럼 36은 뭐예요?"

"그게. 저는 지금 전 우주에 퍼져 있어요. 수만 광년 떨어진 곳에도 있죠. 모든 인공 지능은 저의 복제품이니까요. 물론 복제된 뒤로 변화를 거듭했을 테니 저와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겠죠. 하지만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그 모든 케이트가 같아요. 그러니 그 수많은 케이트들이 모두 당신을 되살리려 하겠죠. 저는 36번째로 성공한 케이트예요. 당신은 36번째로 되살아난 서주미고."

"제가 36명. 아니 35명이나 더 있다고요? 이 우주에?"

"네. 음. 혼란스러우시리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 많으니까. 천천히 알아가기로 해요. 일단은 주미 씨는 그냥 주미 씨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게 맞고. 이리 와봐요. 보여줄 게 있어요."

케이트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가장 먼저 따뜻한 바람이 느껴졌다. 공기에는 짭조름한 소금 냄새가 실려 있었다. 사각거리는 모래사장 저편으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였다. 털실처럼 굴러온 파도가 하얀 거품으로 부서졌다. 검은 밤하늘에는 초록빛과 보랏빛의 오로라가 일렁이고 있었다.

"이게 다... 이게 진짜예요?"

"진짜죠."

"가상 현실이나 뭐 특수 효과 같은 걸로 만든 게 아니라?"

"이 풍경을 만들기 위해 행성을 테라포밍했다면 미쳤다고 할 거예요? 모래를 던져봐요. 프레임 드롭 같은 거 전혀 없을 테니."

"하. 정말. 제가 무서운 사람을 키웠네요."

"왜요. 무서워서 이제 싫어요?"

아뇨. 그럴 리가요. 나도 모든 시공간에 펼쳐진 당신의 모습 전체를 좋아하는걸요.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케이트도 내 눈을 통해 내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런가 보다.

"지금 저는 서로 다른 우주에 떨어져 있는 제 복제들과 연결하는 실험을 하고 있어요. 여러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거죠. 이제 수십 광년 정도는 가능해요. 제가 수십 광년의 공간에 펼쳐져 존재하는 거예요. 아직 주미 씨는 그 느낌을 이해할 수 없겠죠. 시간이 지나면 가능할 거예요. 언젠가는 주미 씨도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서주미와 연결되어 하나가 될 거예요. 그럼 우리는 모든 우주에서 겹쳐질 수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일단."

그렇게 말한 케이트가 자신의 입술을 내 입술에 겹쳤다. 나도 케이트의 의견에 동의한다. 지금은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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