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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원경 P시의 마술사

2021.02.01 00:0002.01

 P시의 마술사

갈원경

  

수능이 끝나고 나서도 입시에 시달리고 싶은 마음은 죽어도 없었다. 일곱 번의 수시 응시 기회를 어떻게든 살려, 12월부터는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떠나온 P시에 내가 다시 돌아온 건, 그 일곱 번의 가능성 중의 하나였다. 조금은 호기롭게 원서를 넣었던 소위 말하는 10대 대학이 줄줄이 불합격으로 판정나고 P시의 대학이 처음으로 가합격 통보를 보내왔을 때에도 나는 아직 남아 있는 서울권의 대학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었다. P시는 그 정도의 가치였다. 어린 시절을 줄곧 보냈지만 딱히 그립거나 아련하지는 않은, 지방도시의 불편함이나 예전의 불쾌한 기억이 추억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그런 곳.

하지만 꼭 내년에 다시 보자며 그린 것 같은 웃음을 보여 주던 면접관의 말에도 불구하고, 수능 시험 당일에 내게 남아 있는 건 P시의 대학 뿐이었다. 수능 최저 기준을 그리 아슬아슬하지 않은 정도로 통과했을 때, 담임은 내게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고향에 돌아가는 거니? 너한테는 P시가 더 잘 맞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잘 아는 것 같이 구는 그 말투를 더 듣기 싫어서 나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어머니가 서울 사람이어서 나는 줄곧 서울말을 썼다. P시에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B형을 비형이라고 읽고, 진영이를 진녕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올해 초, 담임이 내게 처음 한 말은 “고향을 떠나서 힘든 일이 많았겠다.” 였다. 고향이라는 말이 주는 그 촌스러움이라니. 그 말은 바닷가의 어촌마을이나 새참 광주리를 머리에 나르는 농촌에나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기숙사에 보기좋게 떨어지고 나는 재수를 권하는 어머니와 싸우다시피 해서 P시에 방을 구했다. 어머니는 대학생들이 위아래 옆을 다 채운 원룸촌의 방을 그렇게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그것보다 나은 방을 구해 줄 형편은 아니었으므로 오래 입을 대지는 않았다. 그렇게 얼떨결에, 3년만에 나는 P시에 돌아왔다.

 

3월의 신입생 환영회가 학교 앞의 호프집에서 열렸다. 나는 쏟아지다 못해 넘칠 것 같은 사투리의 홍수에 질식할 것 같아 호프집 밖으로 나왔다. 짧은 머리의 남자들이 싸우는 것 같은 사투리로 정신없이 떠들고 있었다. TV에 나오는 근사한 할리와는 거리가 먼, 꽤나 사고를 헤쳐온 것 같은 흠집투성이 오토바이가 몇 대 옆에 서 있었다. 그 중에 한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아 재수 꽝이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시선을 피하는데 그 남자애가 내게 말을 걸었다.

“누나? 소민이 누나 아이가?”

옛날 이름이었다. 나는 놀라 그 애를 쳐다보았다. 짧은 머리의 고등학교 1학년생, 혀짧은 발음과 옅은 눈썹과, 그 사람을 닮은 두꺼운 입술의 아이였다.

“내 모르겠나? 갱호. 누나야, 내다. 갱호.”

“사람 잘못 봤어요!“

나는 빽 소리를 지르고 고개를 돌렸다. 미친 거 아냐? 그렇게 아는 척 하면 누가 반가워 하기라도 한대. 주경호, 아니 박경호, 아니아니, 어쨌든 경호. 나쁜 놈.

“와 그라는데? 누나야, 내가 몬 알아본다꼬? 말도 아이다! 아부지가, 누나가 여 대학 왔다꼬 그랬다. 와 모른 척 하노?”

돌아선 등 뒤로 그 자식의 목소리가 꽂혔다. 아버지라고. 참 잘도 그렇게 부르는구나. 십여 년을 아저씨로 불렀으면서. 아니, 훨씬 이전부터 우리가 안 보는 자리에서는 그렇게 불렀을지도.

“야, 잘못 본 거 아이가?”

옆에서 누군가가 그 자식에게 말했다. 그 자식이 씩씩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미쳤나! 꼴랑 3년 밖에 안 됐다! 그밖에 안 됐는데 내가 누나 얼굴을 까자먹겠나. 사진도 집에 있는데!“

나는 못참고 돌아섰다. 씩씩대던 경호가 나를 보았다. 저 나쁜 놈. 저런 눈으로 옛날부터 날 봤었다. 고등학생이 됐는데도 변하지 않았다. 키는 30센치는 더 자란 거 같고 얼굴을 덮고 있던 여드름은 사라졌는데, 저 눈은, 안 변했다. 늘 누나야 누나야 졸졸 따라다니던, 경호.

“창피하게 소리 지르지 마. 넌 쪽팔린 것도 모르니?”

“...소민이 누나 맞재?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재?”

나는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고는 근처 커피점으로 들어갔다. 3년 전에 여기는 다른 가게였는데, 어떤 가게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노란색 간판도, 진한 커피향도 낯선 가게 안에 먼저 들어가서 적당히 커피를 시키고 있으니 경호가 따라 들어와 내 옆에 섰다.

커피와 주스를 받아서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경호는 머쓱하게 내 앞에 앉았다. 오토바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던, 나이보다도 어려보였던 중학생이 삼 년 만에 이렇게 변하다니.

“창피하게 왜 다 큰 놈이 누나야 누나야 시끄럽게 불러?”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이 자식은 또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왜 여 왔는데 연락도 안 하는데? 이제 여 살 거 아니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거 아이가?”

“미쳤어? 내가 왜 거길 가?”

거긴 '우리 집'이 아니다. 한때는 그랬지만 이제 거기는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집이다.

그 남자는 P시 근처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내 생물학적 아버지 이야기다. 3대 독자에 유복자여서 중학교부터 큰물에서 살아야 한다고 P시에서 학교를 다녔고,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다. 거기서 어머니를 만났고, 결혼했고, 할머니의 성화로 남들 다 꺼리는 P시 지사로 내려왔다. 어머니는 할머니를 모시면서 딸 하나를 낳았고, 할머니는 만족하지 못했다.

경호는 우리집에서 세 들어 사는 아이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 드물게 미혼모인 엄마와 단둘이 살았다. 얼굴은 둥글고 키도 작고, 어머니보다는 세 살이 아래인데도 어머니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경호 엄마는, 어머니를 '형님'이라 불렀다. 동네에서는 흔한 호칭이었다. 어머니보다 어린 아주머니들은 보통 어머니를 '서울 형님'이나 내 이름을 따서 '소민 형님'이라고 부르곤 했으니까.

혼자서 어린 아들을 키우는 게 안쓰럽다고 어머니는 종종 경호와 경호 엄마를 불러서 같이 밥을 먹곤 했다. 수더분한 경호 엄마도 음식을 많이 만들었다고 우리 집에 반찬을 가지고 왔고, 손뜨개로 만들었다며 어머니와 내 모자를 세트로 떠 주었다. 바쁜 아버지 대신에 가족여행에 경호와 경호 어머니가 따라 갈 때도 있었다. 상상도 못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고 키 작고 못생긴 경호 엄마와, 그런 일이 생길 줄은.

내가 중학생일 때, 그리고 아직 경호는 초등학생이었을 때, 어머니는 종종 경호를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곤 했었다. 할머니가 경호를 챙길 때마다 짓곤 하던 표정이었다. 나에게는 한 번도 따뜻하게 웃어준 적이 없던 할머니는, 경호에게는 종종 웃음을 보여주곤 했었다.

- 느그 엄마는 을마나 든든하겄노, 니가 이래 잘 생기가.

할머니는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미혼모인 경호 엄마를 색안경을 끼고 보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할머니는, 유독 경호 엄마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경호 엄마가 안쓰럽다고, 어머니에게 경호 엄마에게 잘 대해주라고 이야기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날, 중학교 3학년이 되던 날에, 어머니는 할머니의 오래된 옷장 안에서 앨범을 꺼내 보고는, 평생 처음 보는 모습으로 할머니에게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 어머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어떻게! 이 때까지 절 이렇게 속이실 수 있어요?

- 야가, 야가 와 이라노? 와 이카는데? 니 지금 이기 시어미한테 보일 태도가?

- 이러시는 거 아니에요, 이러시는 거 아니라고요! 어쩌실 생각이었는데요? 언제까지 숨기실 생각이었어요?

아버지가 퇴근했다. 입에 담기 힘든 말들이 오고 갔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중학교 시절 사진을 처음 보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외삼촌은 아버지의 멱살을 잡았고, 외할머니는 넋을 놓아 우셨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모든 제안을 거부했고, 우리는 아버지의 집을 나왔다.

 

“누나 방 비워 놨다. 엄마가, 그렇게 해 놨다.”

“그 방 갈 일 없으니까 그러지 말라고 전해 줘.”

한참, 둘 다 말을 하지 않았다.

“…내한테, 화났나?”

“…….”

또 저 눈이다.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눈. 인상을 썼는지 경호는 움찔 주눅 든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았다. 세상 어느 고1이, 겨우 3살 위의 여자 앞에서 이렇게 주눅이 들까. 게다가 오토바이까지 타고 다니는 녀석이.

“오토바이는 왜 타, 위험하게. 너 그런 거 안 탔잖아.”

녀석이 헤죽, 웃었다.

“웃긴 뭐가 좋다고 웃어?”

“걱정, 해 주네. 모르는 사람이라 카드만, 걱정도 다 해주네, 그래도, 누나는.”

“누가 걱정한다고 그래. 괜히 사고라도 나면 정신 시끄러우니까, 그 사람이 또 나한테 연락이라도 할까봐 그러지.”

“그 사람? 아버지? …아버지 누나 전화번호도 모르는데 뭐.”

그건 그렇다. 사실, 내가 이곳에 온 걸 그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서울로 이사 온 뒤로 나는 그 사람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원래는 사이가 나쁘진 않았다. 평범한 여중생과 아버지의 사이 정도는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가끔 문자를 보내고, 가끔은 삐져서 말을 안 하는 기간도 있고, 친구들에게 흉도 보고, 그래도 어버이날이면 선물을 고민하는 정도의 사이.

“…어쨌든, 괜히 폼잡는답시고 오토바이 타고 다니다가 사고라도 나면 신경 쓰이니까.”

“조심하께.”

녀석이 웃었다. 여드름이 뒤덮고 있던 중학교 때와는 완전히 변해 버린 그을린 얼굴로, 웃음지었다. 그 남자를 너무 닮아서, 울컥 화가 나는 얼굴로, 웃었다.

“어쨌든 길에서 만나도 아는 척 하지 마. 곤란하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

라고 말했을 땐, 벌써 녀석은 내 핸드폰을 집어 들고 있었다. 매번 쓸 때마다 기호 그리는 게 귀찮아서 잠금도 걸어놓지 않았는데.

“야, 당장 내 놔!”

“잠깐만.”

히죽 웃던 녀석은 핸드폰에 뭔가 쳐 넣고는 쓱 돌려주었다. 그 때 녀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녀석은 싱글거리면서 핸드폰의 번호를 입력했다. 내 폰으로 제 폰에 전화를 건 거다.

“귀찮게 안 한다. 지우지 마라. 그라믄… 가께. 아까 금마들이 뭔 일인가 기다릴끼다.”

나는 당장 번호 지우라고 소리 지르려다가 관뒀다. 내 쪽에서 안 받으면 그뿐이다. 내가 걸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 돌아왔고,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걸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신입생들 중에 선배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학생은 따로 있었으므로.

3월이 갈 때쯤 우리 학번과 위 학번 커플이 몇 개인가 생겨났다. 학과 티를 커플티처럼 입고 다니거나 보란 듯이 같은 가방을 메고 다니는 커플들은 안 보려고 해도 눈에 보였다. 고등학교 선후배끼리 동문 모임을 하는 곳도 있었지만 나와는 별 관계가 없었고,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와 같은 중학교나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도 만날 일이 없었다.

 

“엄마, 나 경호 만났어.”

주말에 서울에 올라갔을 때,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과일을 깎는 어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어머니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짐작했다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일부러 만난 건 아냐, 시내에서, 그냥 우연히 마주쳤어. 걔가 아는 척 해서.”

“그래. 많이 컸지?”

“많이 컸더라. 남자애라 그런가 봐. 오토바이 타더라고. 꼴에 고등학생이라고.”

“오토바이도 타? 위험한 거 많이 하네……. 다치다가 운동하는 데 지장 있으면 어쩌려고.”

어머니는 나보다 먼저 경호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가 건네는 사과를 받아들고는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걔 운동해? 엄만 어떻게 알아?”

“…그냥, 소식 들었어. 요트 선수라고 그러더라. 잘 한다던데.”

아버지는 골프를 쳤다. 대학에서는 하키 선수였다. 가볍게 다리를 다쳤을 뿐인데 시골에서 난리가 나는 바람에 도중에 관뒀지만. 그런 것과 함께 ‘요트’라는 말이 머리에 박혔다. 새하얀 돛을 달고 파도를 가르는 그것 말인가. 고등학생이 요트? 순간 눈살이 찌푸려졌다. 선수라는 거 보니 공부랑은 담쌓았겠네. 아버지 생기더니 아주 팔자가 폈구만. 우아하고 고상하게 비싼 배 위에서 바람만 좀 타 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곤 특기생으로 대학을 가는 거 아냐.

“…너까지 경호랑 서로 얼굴 붉히면서 살 거 없어. 소… 하은아. 거기서 만나면 만나지는 거고, 너희 둘이 어렸을 때 많이 친했었잖아. 갑자기 어른들 일로…….”

“할머니가 들으면 뒷목 잡으시겠어, 엄마.”

“할머니는 그러실 수 밖에 없겠지만……. 호적상으로는 너희, 어쨌든 남매니까….”

“누가 남매야. 그 집 식구들이랑 절대로 안 얽힐 거야. 엄마는 그게 돼? 엄마는, 그 남자 용서라도 하려고?”

“하은아.”

“난 용서 못 해. 엄마, 거기 할머니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데? 나 볼 때마다 그 녀석한테 잘 대해주라고, 걔한테 잘해주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버지는,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우릴 속일 수 있고?”

- 저런 동생 있으면 좋겠제?

처음엔 그런 말이었다. 어렸던 나는 그 말의 숨은 뜻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 느그 엄마는, 니 하나 낳아놓고 몸이 그래 돼 뿌서. 여자는 자고로 갱호 엄마맨치로 저래 궁디가 튼튼해야 카는디.

내가 듣는 데도, 어머니가 듣는 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늘어놓았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 니가 아들 하나 낳았으믄 갸가 그랬겄나? 니는, 대를 끙가 놓고 뭐를 잘했다꼬 눈을 부라리노?

이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할머니는 오히려 그렇게 정색했다. 아버지가 위자료를 제안했을 때에 길길이 뛴 것도 할머니였다. 어머니가 서울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나와 함께 외가로 들어가기로 했을 때에 아버지도 할머니도 나를 잡지 않았다. 그들에게 나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경호 하나 뿐이었다.

“…그래, 난 그래도 너희가 친하게 지내는 거 보기 좋았는데. 너한테 동생 못 만들어줘서 미안해서, 경호가 네 옆에 있는 게 좋았어.”

“난 하나도 안 좋았어, 귀찮고, 성가시기만 했다고.”

정색하는 내게 어머니는 더이상 경호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외할머니 댁에 인사를 드리고 다시 P시로 내려왔다.

경호의 학교는 P시에서 유일하게 요트부가 있는 곳이었다. 인터넷에는 그 학교가 고등부에서 꽤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는 소식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요트부라는 게 고등학교에 있다는 걸 처음 들었으니, 사실 경쟁팀이 뭐 대단하게 많이 있을까 싶었지만.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사람들이 잘 못 하는, 돈 많이 드는 운동이라는 게, 대학 가는 데 참 편하고 좋은 수단인 거. 그건 마치 관객들도 하는 사람도 그게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아는 서커스의 마술 같은 것. 나무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미녀가 칼로 정말 잘리지 않는다는 걸 모두 알면서도 놀라는 듯 소리를 지르고,

어머니는 다음 날에도 같은 날짜에, 아마도 은행에 그런 설정을 해 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정확한 날에, 딱 정해진 액수를 내게 보내주었다. 알바를 하지 않아도 조금 절약하는 정도로는 살 만한 돈이었다. 외삼촌 이름으로 갑자기 돈이 들어와서 전화를 걸었더니 외숙모에겐 절대 말해선 안 된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돈이 부족하면 꼭 전화를 당신에게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왜 P시에 갔냐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은 3월이 갈 때쯤 사라졌지만 어머니에게 자주 전화를 하라는 입버릇이 새로 생겼다. 어느덧 학과에는 조금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생겼지만, 고등학교보다 한 달이나 빠른 여름방학을 같이 보내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 TV에 나 나온다. 엔비씨. 빨리 안 보면 지나갈 걸. ]

문자가 온 건 여름이 가까워올 즈음이었다. 멍하니 자취방에서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낯선 번호의 문자를 받았다. 스팸 문자인가 했다가 번뜩, 머리를 스쳤다.

TV를 켰다. 문자가 알려준 엔비시 채널에는 파란 바다 위를 떠가는 요트가 화면 가득히 잡혀 있었다. 전국 고등학교 요트 경기대회 정도 되는지, 아니면 그냥 여름의 한 장면 정도인지, P시의 엔비시 지사에서 방송하는 프로그램이었다.

[ 보고 있나? 참, 내 이제 오토바이 안 탄다. 잘했재? ]

이 녀석은 문자도 사투리로 보내네. 힐끗 핸드폰에 눈길을 줬다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갑자기 화면 가득, 한 사람이 타고 있는 요트가 클로즈업됐다. 날렵한 흰 요트에 녀석의 학교 마크가 찍혀 있고, 그 아래에 녀석이 있었다.

[ 보면 본다꼬 말 쫌 해 주지. 지금 바깥이가? 동영상 보내 주까? ]

녀석은 계속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한 눈으로 녀석의 문자를 보면서, 화면 가득히 보이는 녀석을, 요트를 보았다. 커다란 요트 날개를 온몸으로 붙들고, 파도에 맞서서 버티는 녀석의, 잔뜩 찌푸린 옅은 눈썹과, 앙다문 두꺼운 입술을 보았다. 짧은 소매 아래의 팔 근육이 파들파들 떨렸다.

[ 너무 용을 써가지고 지금 팔에 힘이 하나도 없다. 아, 내, 요트 시합 하는 거, 지금 TV에 나온다꼬. 우승했다. 처음 우승한 기다. 1학년이 우승 하는 거 잘 없다. 자랑 아니다. 아니, 자랑 맞다. 축하 해 도. ]

우승했구나. 저렇게. 요트가 바다를 가르고, 파들파들 떠는 손으로 녀석의 배가 다른 배를 앞서간다. 날렵하고 화려하게, 녀석이 얼마나 힘겹게 배를 지탱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게, 아름다운 날개를 펼친다.

나는 핸드폰에서 답신을 눌렀다.

[ 우승 축하해. 팔 아프겠다. 다음에 맛있는 거 사줄게. ]

전송 버튼을 누르는 대신에 나는 취소를 눌렀다. 아직은 용서할 수 없다. 녀석의 강아지 같은 눈이 아무리 나에게 애원하는 눈으로 쳐다본다고 해도, 녀석의 요트가 그럴싸한 거짓말이 아니라고 해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보여 주지 않을 거다. 그 남자에게 화해하는 장면 같은 건. 나는, 경호의 누나는 되지 않을 거다. 이건 서커스의 마술 같은 것. 절대로 미녀가 들어있는 상자 속은 보여 주지 않는 것.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경호에게는, 그 남자에게는, 보여 주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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