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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말시티

 

화이트데이를 기념하는 검은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엽서 크기의 봉투 겉면에는 3월 14일이라는 날짜와 함께 이런 문장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당신이 한 달 전에 한 일을 돌려받는 날

혹은 한 달 전에 진 빚을 갚아야 하는 날

보낸 사람이나 주소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냥 우편함에서 통째로 빼 온 고지서와 광고지 사이에 끼어 있었다. 기분이 나빠 그냥 버리려다가 열어는 보기로 했다. 분리수거를 하려고 해도 안에 든 종이 재질은 알아야 하니까.

검은 봉투는 피처럼 붉은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밀랍에는 동전 크기의 둥근 인장이 찍혀 있었는데 언뜻 보니 날개가 달린 천사가 몸에 뱀을 휘감고 있는 형상이었다. 손에는 불타는 검이 들려 있었다. 아무에게나 돌리는 광고라기엔 지나치게 공을 들인 편지였다. 이 정도 되면 이제 그냥 버리기가 더 꺼림칙했다.

살짝 힘을 주자 툭 소리와 함께 밀랍이 떨어져 나왔다. 봉투를 열자 찰칵 소리가 났다. 인위적인 셔터 소리처럼 들렸지만 어디에도 카메라 렌즈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봉투를 뒤집어 보니 검은색의 플라스틱 카드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딱 신용카드 크기였다. 카드 한쪽 구석에는 정말 신용카드처럼 IC 칩이 박혀 있었다. 그 외에 다른 무늬나 글자는 없었다.

나는 내가 어디선가 사은품을 준다는 꼬드김에 넘어가 신용카드를 만든 건 아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내게 신용카드를 만들어 줄 리가 없다. 불과 며칠 전에 나는 수입을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카드 발급을 거부당했으니까. 게다가 이게 정말로 신용카드라면 이렇게 주소도 쓰지 않은 봉투에 넣어 우편함에 꽂아 넣었을 리도 없고.

신종 마케팅 수법인가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카드를 다시 봉투에 넣은 뒤 구석에 던져 놓았다. 동시에 휴대폰이 울렸다.

"학생. 나야. 월세 오늘까지 이체해야 하는 거 알고 있겠지? 벌써 몇 번을 미뤄줬는데. 그 방 들어 온다는 사람도 있으니까. 오늘까지 월세 못 낼 거 같으면 바로 이사 준비해. 보증금은 벌써 다 까진 거 알고 있지?"

나는 잠시 무력하고도 형식적인 저항을 해 보다가 포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주인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보증금 다 까먹고도 석 달 치 월세가 밀릴 때까지 기다려 준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다. 굳이 원망스럽다면 세상이 원망스럽겠지.

한 달 전에 마감된 공모전에 소설을 내지 못한 게 너무 억울했다. 진짜 자신 있었는데. 오랜만에 정말 멋진 글이 나왔다고 기뻐했는데. 그게 2월 14일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검토해 보자고 마감일인 15일에 폴더를 연 나는 그대로 얼어 버렸다. 어디에도 내가 저장한 파일이 없었다. 무슨 내용을 썼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마감을 놓쳤다.

며칠 동안 자신을 탓하며 얼마 남지 않은 통장 잔고를 바닥냈다. 정신 차리고 알바 자리를 구하려 해도 쉽지 않았다. 집주인에게는 사정사정해서 한 달의 말미를 더 얻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지만 내 잔고는 여전히 바닥이었다. 돈이 없으니 신용카드도 만들 수 없었다. 신용카드. 나는 조금 전 던졌던 검은 봉투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정말 딱 신용카드처럼 생겼단 말야.

다른 사람 명의로 된 신용카드를 쓰는 것도 사기겠지. 아마도 그럴 거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걸 내 우편함에 넣어 놓은 사람의 책임도 있는 거 아닐까. 갑자기 배가 고팠다. 내 우편함에 들어 있던 플라스틱 카드 하나를 그냥 예쁘다는 이유로 주머니에 넣어 두고 있다가 결제할 때 무심코 체크 카드 대신 꺼내 주는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 체크 카드에서는 이미 백 원 단위까지 털어 썼다는 걸 까먹을 수도 있는 거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더 이상 따지는 걸 포기하고 집 앞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기분 탓인지 날씨가 유난히 추워서 몸이 덜덜 떨렸다.

딸랑대는 편의점 유리문 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직원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신선식품 코너로 직행했다. 조금 망설이다가 제일 비싼 한우 불고기 도시락을 골랐다. 컵라면과 콜라도 집었다. 직원이 하나씩 바코드를 찍는 동안 몇 번이나 주머니 안을 만지작거렸다. 오른쪽 주머니에는 검은 카드와 내 체크 카드가 들어 있었고 왼쪽 주머니에는 얼마 남지 않은 현금이 들어 있었다. 결제가 되지 않으면 현금을 내야 하니까. 괜히 한우 도시락을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10500원입니다. 결제 도와 드리겠습니다."

오른쪽 주머니에서 카드를 살짝 꺼내 귀퉁이가 검은색인 걸 확인했다. 직원이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카드를 꺼내 내미는 손이 조금 떨렸다. 마른침을 삼키는 동안 삑 하고 결제가 되는 소리가 났다. 직원이 건네주는 카드를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고나오려다가 봉투에 담긴 도시락을 그냥 두고 올 뻔했다.

바보. 무슨 짓을 한 거야. 진짜로 결제를 해 버렸잖아. 도시락을 들고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닫고 나서야 걱정이 밀어닥쳤다. 이건 진짜 신용카드였다. 문제없이 결제가 되는. 도시락을 봐도 식욕이 돌지 않았다. 콜라만 따서 한 모금 들이켰다.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바깥 날씨가 유난히 추웠다. 나는 의자에 아직도 그대로 걸쳐져 있는 롱패딩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갑자기 추워질까 봐 정리를 미뤄두고 있었다. 체크 카드와 현금은 모두 침대 위에 던져둔 뒤 검은 카드 하나만 들고 밖으로 나갔다.

지하철역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 한구석에는 초밥집이 하나 있었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스시 오마카세 맛집이라고 한다. 물론 나는 저렴한 메뉴도 일 인분에 오만 원 가까이 하는 그 집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방금까지는.

마침 막 점심 장사를 시작한 주방장은 나를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초밥을 쥐어주기 시작했다. 보통은 이것저것 물어보며 서빙을 한다고 들었는데 그러기에는 내 표정이 너무 비장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울렁대고 머릿속이 아무리 복잡해도 그저 맛있기만 한 음식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미각 하나만으로도 사람은 세상의 시름을 잠시 잊을 수 있는 거구나. 나는 내가 돈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돈이 이렇게 좋은 건 줄은 처음 알았다. 주방장이 내주는 음식을 깔끔하게 모두 먹어 치우고 검은 카드를 내밀었다. 삑. 역시 문제없이 결제되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옷가게였다. 백화점은 아니고 그냥 적당한 브랜드로. 애초에 옷에는 큰 관심도 없었고 뭐가 좋은지 알지도 못했다.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띈 마네킹 그대로. 직원이 눈대중으로 가져다준 사이즈를 대충 끼어 입고 바로 결제했다. 삑. 통과. 초밥을 먹었을 때만큼의 큰 감흥은 없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

조금 현실적인 고민이 든 건 그다음이었다. 내게는 처리해야 할 공과금 고지서가 있었고 무엇보다 월세를 이체해야 했다. 비밀번호를 모르니 현금 서비스를 받을 수는 없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전자 제품 마트에 가서 가장 비싼 노트북을 골랐다. 이 카드는 한도가 얼마일까. 삑. 적어도 삼백은 넘었다.

박스 사진을 찍어 바로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올렸다. 시세보다 십만 원 정도 적게 불렀더니 광속으로 댓글이 달렸다. 한 시간 뒤 지하철역에서 만난 사람은 내 마음이 바뀔까 걱정이 되었는지 물건을 받고 바로 현금을 건네준 뒤 도망치듯 사라졌다. 밀린 월세를 내고도 남는 돈이었다.

손에 쥐어진 한 뭉치의 지폐를 나는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런 종이 몇 장이 없어서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했었구나. 이게 뭐길래. 검은 카드를 꺼내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이 카드가 뭐길래. 둘 다 현실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검은 카드가 원하는 건 뭐든지 대령하는 도깨비방망이면 좋겠지만. 누군가에겐 오늘 내가 쓴 돈이 새겨진 청구서가 날아가겠지. 전자 결제 시스템이라는 게 그렇게 허술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이 카드 주인의 통장에는 내가 오늘 쓴 돈 정도는 바다에서 물을 퍼내는 것처럼 티도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숫자가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 카드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카드 번호나 이름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카드가 있나. 잘 모르지만 어쩌면 진짜 부자들은 이런 카드를 쓰는 건지도 모른다.

대체 어쩌다 이게 내 손에 들어 온 걸까. 내 옆집에 깜짝 놀랄 만큼 돈이 많은 부자에게 이런 깜짝 선물을 받을 만한 사람이 살고있는 걸까. 오늘은 화이트데이니까. 이런 선물을 받는 사람은 한 달 전 밸런타인데이에는 어떤 선물을 줬을까. 한 달 전.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나는 한 달 전에도 이상한 편지를 받았었다.

오늘 받은 검은 편지와 똑같은 크기의 흰색 봉투였다. 겉에는 2월 14일이라는 날짜만 적혀 있었다. 혹시 누가 나에게 초콜릿을 준 건가. 라고 생각하기에는 봉투가 너무 얇았다. 봉투 안에 뭐가 있었더라. 그래. 청구서가 있었다. 카드 청구서. 순간 나는 소름이 돋았다.

내가 초밥집의 이름을 처음 본 게 그 청구서였다. 청구서의 맨 위에 적혀 있는 상호를 검색해 보고는 집 근처의 초밥집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그런 데 간 적이 없으니 누군가 다른 사람의 편지가 잘못 온 거겠지. 근데 밥 한 끼가 참 비싸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는 그냥 재활용품을 모아 놓은 박스에 던져 버렸다. 밑에 몇 줄이 더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애초에 읽어 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날은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그날 나는 온종일 집에 있었다. 그날뿐 아니라 다른 날들도 대체로 집에만 있는다. 하루하루가 별로 다를 게 없다. 그리고 그날도 집주인에게 월세 독촉 전화를 받았다. 이번 달까지 밀리면 당장 쫓아낼 거라는 말도 똑같이 했다. 그땐 정말 쫓아낼 것처럼 화를 냈었는데 며칠 뒤 다시 전화했을 때는 좀 누그러져서 한 달 더 말미를 주었다.

그날이 이상했던 건 일단 날씨였다. 2월답지 않게 유난히 따뜻했다. 포털에 뜨는 뉴스도 좀 뜬금없었던 기억이 난다. 시사에는 워낙 관심이 없다 보니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이상한 뉴스가 몇 개 있었는데 그다음 날 보니까 다 사라져서 더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날 작업했었던 문서가 다 날아갔다. 공모전 마감이 바로 다음 날이었다. 몇 달 동안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고 남은 건 빈 백지였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갑자기 머릿속에 글이 떠올랐다.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려 하루 만에 원고를 완성했다. 진짜 그날은 뭔가에 씌인 것 같았다. 뭔가에 씌인 게 맞았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그 원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그날 썼던 원고. 그날 봤던 뉴스. 그날의 날씨. 모든 게 다음 날 바뀌어 버렸다. 그땐 그게 이상한 줄도 몰랐다. 원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찬 바람이 휙 하고 불었다. 3월치고는 너무 추운 날씨였다. 그래서인지 지나가는 사람들도 죄다 롱패딩을 입고 있었다. 마치 2월인 것처럼.

마치 2월인 것처럼.

나는 휴대폰을 꺼내 날짜를 보았다. 14일이 맞았다. 그 위에 작게 월이 표시되어 있었다. 2월. 2월 14일. 나는 마침 옆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무작정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죠? 아니. 몇 월이죠?"

두 사람이 나를 미친 사람 보듯 그냥 지나가고 세 번째 사람이 겨우 대답했다.

"2월이잖아요. 2월 14일. 거 참."

몸이 너무 떨렸다. 날이 추워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일단 비틀대며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이 상황이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상황이라는 건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만일 이게 내게 주어진 기회라면. 단 한 번의 기회라면 어떻게 이걸 이용할 것인가. 그걸 생각해야 했다.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가 바뀌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니까 나는 2월 13일 다음에 3월 14일을 살고 다시 2월 15일로 돌아간 거다. 그리고 지금은 2월 14일이고 내일은 3월 15일이다.

두 날이 바뀌었다는 걸 한 달 전에 미리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나는 2월 15일부터 3월 13일까지의 로또 번호를 알아 두었다가 4주 연속 1등에 당첨될 수 있었을 거다. 지금 나는 한 달 전의 과거로 돌아온 셈이니 그런 작전을 쓸 수 없다. 바보. 바보. 멍청이! 밖을 좀 돌아다녔으면 이상한 걸 눈치챘을 텐데. 그날 그렇게 날이 따뜻했는데 이상하다는 생각도 안 했니? 뉴스도 이상했잖아. 근데 날짜가 바뀌었다는 걸 몰랐어?

진정하자.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다. 그날 난 온종일 원고를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갑자기 떠오른 영감을 글로 옮기느라 바빴다. 그래. 갑자기 영감이 떠올랐던 것도 납득이 간다. 그날은 3월 14일이었으니까. 공모전을 놓친 이후로 한 달 동안 나는 내내 그걸 억울해하며 원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두 날이 바뀌며 기억이 섞여 들어갔던 모양이다. 그 기억을 지닌 채로 나는 그날이 3월 14일이라는 것만 모른 거다. 오늘이 2월 14일이라는 걸 몰랐듯이.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원고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비록 마감은 지났지만.

아니. 지나지 않았다. 오늘은 2월 14일이니까. 그럼 뭐해. 오늘 원고를 다 써봐야 내일 공모전에 제출할 수도 없잖아. 내일은 3월 15일이니까. 아냐. 오늘 제출해 버리면 되잖아. 열두 시가 지나기 전에. 시계를 보았다. 벌써 저녁 여섯 시였다. 여섯 시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간은 아니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열한 시 삼십 분.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퇴고할 시간은 없다. 이메일 서버에 접속했다. 역시 오늘은 2월 14일이었다. 첨부 서류를 검토하고 원고와 함께 이메일을 전송했다. 무사히 전송된 걸 확인한 시간은 열한 시 오십 분이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게 최선이었을까. 두 날이 바뀐다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용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이거였을까. 공모전에 제출한다고 해서 다 당선이 되는 것도 아닌데. 떨어질 확률이 훨씬 큰데. 당선되어 봐야 큰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월세 정도는 낼 수 있겠지만. 월세.

노트북을 팔고 받은 현금이 그대로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이 돈이면 월세를 낼 수 있다. 이 돈이 내일까지 남아 있을까. 오늘은 2월 14일이고 내일은 3월 15일인데. 만일 오늘 내가 이 돈을 가지고 있었다면 왜 2월 15일에는 한 푼도 없었을까. 생각을 하자. 생각을.

만일 오늘이 2월 14일이라면. 나는 지난 2월 15일에 내가 왜 이런 일을 했던 걸 몰랐을까. 공모전은 그럴 수 있다. 이메일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지도 않았으니까. 기억이야 뒤섞여서 그랬다고 쳐도. 내가 오늘을 이렇게 보낸 물리적인 증거가 남아 있었을 텐데. 현금도 그렇고. 오늘 산 옷도 그렇고. 사놓고 먹지도 않은 저 한우 불고기 도시락도 그렇고.

이게 동작하려면 모든 사건을 깔끔하게 맞춰 놓아야 하는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 그러면 이렇게 힘들게 제출한 공모전 원고가 다시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나는 2월 15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의 집 안 광경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떠올렸다. 똑같이 맞춰야 해.

폴더에서 원고 파일을 지우고 컴퓨터를 껐다. 오늘 산 옷은 다시 종이 가방에 담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좁은 집 안 구석 어딘가에 숨겨도 한 달 동안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다. 도시락도 함께 던져 버리려다가 손을 멈췄다. 아무리 그래도 먹을 걸 버리다니. 나는 서둘러 뚜껑을 열고는 불고기와 밥과 반찬을 허겁지겁 입속으로 밀어넣었다.

음식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이 비운 빈 트레이와 콜라 캔을 싱크대에서 헹군 뒤 재활용 상자에 던져 넣었다. 도시락 트레이 하나쯤 더 있어도 재활용할 때 눈치채진 못할 거야. 컵라면은 찬장에 넣었다. 찬장에 남은 컵라면 개수를 기억할 정도로 꼼꼼하진 않다. 됐고. 시계를 보았다. 오십구 분이다.

"아. 맞다! 현금!"

책상 위에 놓인 현금을 집어 들고 침대로 몸을 던졌다. 재빨리 베갯잇 속에 현금을 쑤셔 넣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확인한 건 오늘의 날짜였다. 3월 15일.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 안의 모습이 어제 그러니까 2월 14일보다는 한 달 전에 겪었던 3월 14일과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꿈이 아니야. 꿈이 아니니까.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조심스럽게 베갯잇을 열었다. 안에는 노란색 지폐가 들어 있었다. 내가 한 달 동안 이걸 베고 잤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돈이 없다고. 집주인에게 그 사정사정을 하고.

사실 이게 내 돈은 아닌데. 그제야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재활용품을 모아 놓은 상자를 뒤져보니 봉투가 나왔다. 검은 봉투가 아니라 흰 봉투였다. 안을 열어 보니 청구서가 들어 있었다. 청구서에 적힌 내역은 초밥집과 옷 그리고 노트북이었다. 한 달 전에는 이걸 보고도 무슨 뜻인 줄 몰랐구나. 청구서에는 연결된 계좌 같은 정보는 없었다. 이 내역이 내게 어떻게 청구가 될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내가 글 많이 써서 돈 벌고 나면. 그때 청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달칵. 하고 봉투 안에서 종이 하나가 더 떨어졌다. 사진이었다. 내가 찍힌 사진. 그러고 보니 검은 봉투를 열었을 때 셔터 소리가 들렸었다. 어제. 아니 한 달 전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2월 14일에 찍은 사진이었다. 이걸 한 달 전에. 그러니까 3월 14일에 봤으면 뭔가를 눈치챌 수 있었을까.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니 생각해 봐야 소용없겠지.

중요한 게 하나 남았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했다. 페이지를 몇 개 넘기니 2월 15일에 도착한 메일이 있었다. 아직 읽지 않은 메일이었다.

'보내 주신 원고가 정상적으로 접수되었습니다.'

공모전 발표는 4월 14일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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