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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가리타와 나

pilza2

2006년 8월 12일
오늘 드디어 레벨 50을 넘었다,,,, 한달동안 밥먹고 이짓만,,,,,, 이제 때려친다,,, 나는 왜 이따위로 살아야 할까,,,,,,,,,,,,

2006년 8월 13일
엄마 몸에서 파스 냄새를 맡았다,,,,,, 쓰레기 같은 나 때문에 엄마만 고생이다,,, 엄마 미안,,,,,,,,,,,, 하루빨리 사라져줄게,,,,,,

여기까지 쓰고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열린 창문으로 미지근한 바람이 들어왔다. 지영은 습관처럼 쓰고 있는 싸이월드 미니홈피 일기장을 훑어봤다. 1촌이 하나도 없으니 아무도 안 볼 텐데. 그래도 굳이 공책이 아니라 인터넷에 쓰고 있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볼 거라는 기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자신이 죽은 뒤, 세상에 남겨진 유서가 되겠지만.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불쌍하다, 진작 알았으면 도와줄걸, 그렇게 여길까? 설마. 지영은 애초에 그런 기대를 버린 지 오래다. 그저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을 뿐이다. 울든 웃든 마음대로 떠들어봐. 이미 늦었어. 난 벌써 죽고 없거든.

지영의 관심은 오직 안 아프고 쉽게 죽는 방법이다. 인터넷에 찾아봐도 영 신통치 않다. 이름도 생소한 독극물을 약국 같은 곳에서 구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처방받는 수면제를 조금씩 몰래 모으는 정도밖에 방도가 없다. 서랍을 열면 보이는 빈 안경집에 감춰둔 알약 몇 개가 부적처럼 든든하게 느껴진다.

멍하니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덜컹거리는 소리가 신경 쓰였다. 커튼이 마구 춤을 추고 창문이 흔들거렸다. 이내 방 안의 옷가지와 물건까지 춤을 추었다. 바람 한 점 없던 열대야 도중에 몰아친 갑작스런 강풍이라니. 지구도 이제 미쳐가는 건가 싶을 때 바람은 뚝 그쳤다. 대신 열린 창문을 통해 커다란 물체가 방 안으로 쑥 들어왔다. 낡아서 녹슨 방충망이 쉽게 뜯어지며 길쭉한 덩어리가 창가에 앉은 지영의 몸 위를 덮쳤다. 사람의 몸뚱이라는 사실은 그 다음에야 알았다.

한바탕 소동이 그치자 방 안도 바람처럼 가라앉았다.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정적을 휘저었다. 지영은 옆으로 쓰러졌고 불청객은 거의 한 바퀴를 굴러 운 좋게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아구, 아야, 허리……!”

지영은 끙끙대며 팔로 침대를 붙잡고 겨우 빠져나왔다. 옆으로 쓰러진 휠체어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침대 위로 기어올랐다. 팔의 힘이 조금은 세진 것 같지만 아직 다 적응하지 못했다. 무겁고 움직이지 않는 하체를 끌고 다니는 삶에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침대를 본 지영은 입을 떡 벌렸다. 알몸의 여자애가 엉덩이를 높이 쳐든 민망한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길고 풍성한 황갈색 머리카락이 작은 침대 위를 장막처럼 덮었다. 뽀얀 엉덩이가 바로 위에 있는 형광등 불빛을 고스란히 받아 하얗게 빛났다.

“아유, 다행이다. 마침 침대가 있었네…….”

여자애는 이불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런 말을 웅얼거리며 몸을 꿈틀거렸다. 이내 일어나 앉더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쓸어내렸다. 살짝 찌푸린 눈과 지영의 당혹스러운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둘은 거의 동시에 동공이 팽창하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꺄악!”

여자애는 얼른 이불을 끌어올려 몸을 가리고 원망섞인 눈초리로 지영을 쏘아보았다.

“뭐, 뭐 해! 얼른 자리를 피해주는 게 예의 아냐?”

지영은 황당하고 기가 막혔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자연히 대꾸하는 말에도 심술이 섞였다.

“여긴 내 방인데요. 멋대로 쳐들어온 건 그쪽이죠. 그리고 난…… 그렇게 빨리 피해주질 못하니까…….”

지영의 말소리는 점점 수그러들었고 말꼬리를 흐렸다. 여자애는 멍한 얼굴로 ‘응?’하는 소리를 내며 지영을 살펴보았다. 넘어진 휠체어와 침대 위에 웅크리듯 앉은 지영의 모습을 번갈아보았다.

얼굴이 달아오른 지영은 고개를 돌렸다. 이제 곧 쏟아질 상대의 감정을 받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동정이든 경멸이든.

* * *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무안해서 이불만 쳐다보던 침입자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오해는 안 했으면 좋겠어. 난 도둑이 아냐. 그렇다고 치한은 더더욱 아니고. 피치 못할 가택침입이었다고나 할까? 혹시라도 레즈 치한이라고 생각했다면 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근데 왜 알몸인데요?”

지영의 무심한 듯 날카로운 말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확실히 누가 봐도 수상했다. 여기는 아파트 4층. 여자 혼자 있는 집. 알몸으로 창문을 통해 들어온 침입자가 도둑이나 치한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설득력이 없다. 아무리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쁜 여자애라 할지라도.

이대로는 변명을 늘어놓을수록 더 수상하게 느껴질 뿐임을 스스로도 느꼈는지 목을 가다듬고 마음을 가라앉히더니 좀 더 진지하게 말했다.

“으흠. 내 이름은 마르가리타. 이래봬도 난 마법사야!”

두둥. 묵직한 효과음이라도 들어가야 할 순간이었으나 지영의 입에서는 한숨만 새어나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의심은 들지 않았다. 상대가 마법사인 것보다는 알몸으로 아파트 4층까지 기어 올라왔다는 쪽이 더 믿기 어려우니까 그럴지도.

“뭐야, 못 믿겠다는 얼굴이잖아? 보면 모르겠어? 이렇게 하늘을 날아왔잖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마법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 ……할 예정인 마르가리타라고 해! 너는?”

마르가리타는 이름만큼 외국인으로 보이진 않았다. 혼혈 정도라면 믿을 수 있을지도. 갈색 머리카락에 깨끗한 피부. 지영은 지금까지 직접 눈으로 본 중에서는 가장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한들 방을 어지럽히고 혼자만의 평화를 방해한 죄가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심통이 난 지영은 일부러 거칠게 대답했다.

“홍지영. 열아홉. 보다시피 작년에 다리병신이 되어서 학교는 때려 치고 집에만 있어.”

보니까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 보여서 존댓말도 그만두었다. 다시 무거운 침묵이 따라왔다. 마르가리타는 파리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무안함과 미안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보였다.

“근데, 마법사가 우리집에 왜 홀딱 벗고 온 건데?”

지영이 묻자 마르가리타는 시선을 피하면서 우물거리듯 대답했다.

“그게 말이지, 음……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닌데. 전문용어로는 불시착이라고나 할까? 헤헷.

뭔데,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일부러 온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왜 사람이 살다보면…… 오소리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하잖아? 비행 연습을 하다가 마력 소모를 예상하지 못하고 너무 멀리 와버리는 바람에……”

킥. 지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예상치도 못한 오소리의 등장에 허를 찔린 듯이 새어나온 웃음이다. 마르가리타는 이유도 모르고 상대의 마음이 누그러졌다는 생각에 같이 웃었다. 목소리와 표정에도 여유가 돌아왔다.

“지금은 마력이 다 떨어져서 돌아가질 못하겠어. 너야 모르겠지만 마력이라는 게 그렇게 쉽고 빨리 회복되지 않거든. 오랜 시간 자연 속에서 서서히 끌어 모아야 순수하고 정제된 마법의 힘을 모을 수가 있다는 말씀!

오늘 연습은 좀 실수했어. 생각보다 마력 소모가 너무 많았거든. 돌아갈 거리까지 계산하고 비행을 해야 하는데 들떠서 그만…… 그래도 벽이나 땅에 안 부딪치고 너네 집 창문으로 들어와서 다행이다, 헤헷.”

도중에 추임새처럼 귀여운 척을 하며 웃어 보였으나 지영에게는 큰 효과를 얻지 못했다.

“나 정도 되니까 살았지. 너무 자만했나봐. 성적우수 재색겸비인 나에게도 이런 실수는 일어날 수 있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미안하지만 뭐 먹을 거 없니?

아, 걱정 마. 난 별로 많이 안 먹어. 마력을 회복한답시고 엄청나게 먹어대는 마법사도 없는 건 아닌데, 회복력이 떨어지는 애들이라 그래. 근데 지금 배 무지 고픈데. 밥 없어? 찬밥이라도 불평 없이 먹어줄게. 내가 손님도 아니고 신세지는 거니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거든. 고기반찬은 있음 좋겠는데, 없으면 소시지라도…….

아냐, 일어날 거 없어! 다리도 불편한 거 같아 보이는데 내가 직접 차려먹지 뭐.”

매몰찬 거절의 말과 함께 가택 침입자에게 퇴거 명령을 내리려던 지영은 말문이 막혀 입만 벌린 채로 있었다. 입과 손의 움직임을 멋대로 집주인의 선의로 해석한 마르가리타는 지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말리더니 이불을 몸에 둘둘 감고 방 밖으로 나갔다. 마침 여름이라서 작고 가벼운 이불은 샤워 타올처럼 몸에 맞았다. 막상 일어난 모습을 보니 마르가리타는 꽤 키가 컸다.

어이가 없어진 지영은 멍하니 방충망이 뜯겨진 창문을 보았다. 모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들어올 일이 무엇보다 걱정이었다. 다행히 가장자리가 찢어졌을 뿐 방충망 자체는 구겨졌지만 쓸 만했다. 휠체어를 세우고 앉아서 테이프와 커터칼을 가져와 방충망을 수선하기 시작했다.

결국 가장 궁금했던 왜 벌거벗고 있는지를 결국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급한 문제는 해결했으나 더욱 큰 걱정거리가 집 안에 떡하니 들어와 있는 셈이었다.

* * *

지영이 휠체어를 밀고 방을 나섬과 동시에 바닥에 냄비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엄마야 아빠야를 찾는 겁먹은 비명이 이어졌다. 불길한 예감이 여지없이 들어맞아 마르가리타는 부엌을 어지럽히며 쩔쩔매고 있었다.

지영은 한숨을 내쉬고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라면이라도 끓여줄 테니 방에서 옷이나 입고 와. 옷장 서랍에 내 잠옷 있어.”

“응? 그렇지? 남의 집에 와서 내가 너무 소란 피웠지?”

마르가리타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러나더니 방으로 가서 작아서 안 입는 낡은 잠옷을 입고 와서 식탁 앞에 앉았다. 작고 네모진 식탁에 의자는 하나 뿐.

지영은 냉동실에서 물만두를 꺼내어 라면과 함께 끓이고 계란을 깨 넣었다. 파도 조금 썰어 넣자 뒤에서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쫓아왔다.

“어, 나 파는 매워서 안 먹는데……”

대답 대신 지영의 날카로운 눈빛이 돌아왔다. 닥치고 주는 대로 먹기나 하라는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되었는지 마르가리타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가끔 깜빡대는 오래된 형광등 아래 지영과 마르가리타는 마주 앉았다. 지영이 만두 몇 개만 젓가락으로 뒤적거리는 사이 마르가리타는 사흘 굶은 사람처럼 시끄럽게 소리를 내며 맛나게도 먹었다. 수다스러운 입에 먹을 걸 넣어주면 얌전해질 줄 알았지만 되레 더 시끄러워졌다.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더니 밤 11시 반이었다. 지영은 속으로 망설였다. 엄마가 올 시간이잖아. 오늘 밤은 일단 방에 숨겨놔야지. 이 녀석을 내쫓을지 어떻게 할지는 내일 가라앉은 정신과 침착한 마음으로 생각해보자.

생각은 정리했지만 조바심은 커졌다.

“야, 빨리 좀 먹어.”

“어? 우으으.”

반찬으로 놓은 감자조림을 입 가득히 쑤셔 넣고는 중얼거렸다. 꼴 보기 싫은 짓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꽤 예뻐 보였다. 약간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올려다보는 얼굴은 동그란 눈망울과 부푼 볼 때문에 마치 어린 아기 같았다. 감자조림 모양으로 솟아오른 왼쪽 뺨 위의 작은 점도 귀여웠다.

“됐어. 그냥 먹기나 해.”

지영은 포기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마르가리타가 남은 국물을 마시려고 두 손으로 대접을 가만히 감싸 안았을 때 덜커덕하고 열쇠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생전 처음 보는 애를 집 안에 들여다 놓다니! 일 년 가까이 병원 말고는 집 밖에 나가본 적도 없는 내가!’

지영의 엄마는 여느 때와 같은 지친 표정으로 얕은 한숨을 뱉으며 문을 닫고 잠갔다. 거기까지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이제 다시 몸을 돌려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순간, 넓지도 않고 좁아서 현관에서 집 전체를 다 훑어볼 수 있는 이 오래된 아파트 4층의 광경은 예전과는 다른 세상으로 보일 터.

“누구세요?”

지영의 엄마는 놀라서 마르가리타에게 물었다. 보통 이럴 때는 지영에게 ‘누구니? 친구야?’라고 물어보는 게 정상적인 반응일 텐데, 마치 자기 집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낯선 장소에 낯선 인물이 살고 있는 광경을 본 사람처럼 행동했다.

마르가리타는 살짝 들었던 그릇을 도로 살며시 내려놓고 지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 구원요청을 하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정말 마법사답게 텔레파시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지영은 상대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얼른 입을 열었다.

“치, 친구야. 반 친구.”

“반……?”

아차. 생각도 안 하고 급하게 대답하다 실수를 저질렀다. 지영은 고등학교를 중퇴한 지 오래였고 이전부터 집에 친구를 데려온 적이 없다. 설득력이 있을 리가.

“안녕하세요.”

마르가리타는 일단 일어나서 넙죽 고개를 숙였다. 마법사니 어쩌니 해도 예절교육은 똑같이 받았나 보다 싶어서 지영은 조금 안심했다. 엄마랑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지영은 변명거리를 더 생각해냈다.

“엄마는 모를 거야.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인데 중학교가 달라서 헤어졌거든. 얼마 전에 싸이에서 만났는데, 마침 이 근처로 이사 왔다고 하길래 놀러오라고 그랬어.”

“아, 그랬니?”

엄마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겨우 어른도 납득할 수는 있는 정도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용하지는 않지만 지영의 엄마도 싸이월드가 무엇인지 개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 이름은?”

엄마는 다시 딸을 위기에 빠뜨렸다. 마르가리타는 천연덕스럽게 히죽 웃으며 대답하려고 했다.

“마르가……”

“악!”

마르가리타가 얼토당토 하지 않은 외국 이름을 천연덕스럽게 입에 올리려는 순간 지영은 아찔한 위기감을 느끼며 비명을 질러 일단 엄마의 귀를 차단했다. 지영이 사고를 당한 이후 기침이라도 할라치면 낯빛이 창백해지는 엄마는 얼른 괜찮냐고 물으며 다가왔다. 지영은 만두를 먹다가 입천장을 데었다고 핑계를 대고 여전히 놀란 토끼눈을 한 마르가리타를 슬쩍 쏘아본 다음 이렇게 대답했다.

“쟤는 말자. 김말자라고 해.”

지영의 엄마는 웃으며 넘어갔고 잘 지내다 가라는 말을 남긴 다음 화장실로 씻으러 들어갔다. 졸지에 새 이름을 하사받은 말자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지영을 쳐다보았으나 반응은 없었다.

* * *

“히잉~. 나 설거지 처음 하는 거란 말야. 그릇 깰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손 시려 죽겠어. 허리도 아프고. 싱크대가 왜 그리 낮은 거니? 여름이라고 뜨거운 물도 안 나와?”

지영의 명령으로 설거지를 마친 마르가리타가 칭얼대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열대야가 작렬하는 8월에 손이 시리다니. 지영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침대에 누운 채로 몸을 벽 쪽으로 돌렸다.

엄마가 이 아이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면서 불안했다. 친구를 집에 데려와 함께 자다니 19년 평생 해본 적도 없는 일이다. 특히 하반신이 마비된 이후로는 사람 자체를 안 만나고 살았는데. 생각이 이에 미치자 지영은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우툴두툴한 왼쪽 손목이 저리고 근지러웠다. 수없이 칼로 그어 만신창이가 된 왼쪽 손목. 손목을 꺾거나 돌리면 지금도 피부가 당기고 아픈 슬픈 손목.

미니홈피에 하루걸러 쓰던 생각이 또 떠올랐다. ‘확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왜 살아서 이 고생을 할까.’ ‘어떻게 하면 안 아프고 확실하게 죽을 수 있을까.’ ‘나는 왜……’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갑작스레 큰 소리와 함께 마르가리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림자가 드리워 시커메진 얼굴에 지영은 흠칫 놀라 몸을 움츠렸다. 마르가리타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상체를 지영에게 기울이고 있었다.

“뭐라고 했는데?”

“네가 그러니까 친구가 없는 거야. 사람이 말하면 들어줘야지.”

“내가 친구 없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없긴 하지만.”

“아까 부엌에서 네 어머니랑 얘기했어. 사람을 안 만나려 하고 친구들이랑도 연락을 끊었다며? 나한테 찾아와줘서 고맙다고 그러고 자주 와달라고 고개까지 숙이며 말씀하셨어. 나 그만 울 뻔했단 말야. 다리가 불편하다고 죄를 지은 건 아니잖아. 왜 친구들을 안 만나려고 하니?”

“아무것도 모르면서 멋대로 말하지 마!”

지영은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다시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아프고 힘든 걸 알아? 꼬리는 꿈틀대기라도 하지, 내 다리는 꼬리만도 못해…….

내가 왜 밖에 안 나가려고 하는데. 엘리베이터도 없는 4층 아파트를 어떻게 오르내리는지 알기나 해? 식당일로 허리가 굽어진 엄마가 날 업고 다닌다고. 처음엔 엄마 등에서 엉엉 울었지만 이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 됐어. 난 정말 못된 자식이지.

엄마가 아무리 고생해도 집에서 놀고먹는 이놈의 자식 먹여 살리기도 힘들지. 이사 가려고 돈 모으고 있다는데 솔직히 안 믿어. 이 아파트도 아빠 아는 사람 거라서 월세도 싸게 낸다고 들었어. 우리 처지에 어디로 갈 수 있겠어?”

“미안해. 알지도 못하면서 막 말해서.”

가만히 듣던 마르가리타는 의외로 순순히 사과했다. 지영은 치밀었던 화가 가라앉자 왜 지금까지 입 밖에 낸 적도 없는 신세한탄을 처음 만난 아이에게 했는지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조금 부끄럽기도 했고.

“뭐, 나도 괜한 얘기를 한 것 같아.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래서 말인데, 아까 얘기로 돌아가서…… 여기가 정확히 어딘지 좀 가르쳐주라. 지도가 있으면 좋겠는데. 좀 큰 지도. 그리고……”

지영은 손을 휘저어 말을 막았다. 다친 이후에 생긴 버릇이었다. 움직임이 상체에 한정되어서 그런지, 이전보다 감정을 표현할 때 팔을 더 많이 움직이게 되었다.

“알았으니까 하나씩만 말해.”

작게 신음을 흘리며 지영은 일어나 앉았다. 주소를 불러줬지만 영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지영은 손으로 컴퓨터를 가리켰다.

“지도는 없지만 찾아볼 수는 있어.”

“내가 도와줄게!”

마르가리타는 지영이 휠체어에 앉도록 도와줬다. 경험이 없는 문외한이라 별 도움은 안 되었으나 지영은 군말 없이 몸을 맡겼다. 모니터에는 공이 튀어 다니는 화면보호기 영상이 흘렀다. 지영은 포털 사이트의 지도 검색으로 들어가 아파트 인근 지도를 보여주었다.

“야, 신기하다! 이런 것도 있어?”

“너네 마법사 나라엔 인터넷 개통도 안 되었냐?”

지영이 피식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마르가리타는 한참이나 지도 축척을 바꿔달라고 조르며 살펴본 끝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우~. 너무 멀리 왔어. 아무래도 내 능력을 너무 과신했나봐. 돌아오는 코스를 전혀 생각 안 하는 바람에…….”

“도대체 네가 사는 곳이 어딘데?”

지영은 짧은 순간 마법사의 나라에 대한 상상을 펼쳤다. 비록 인터넷은 없지만 다들 날아다니는 세상. 꼭 그렇게 불편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버스나 택시는 다 망하고 없어졌을까. 철가방이 날아다니며 총알배달을 하는 우스운 광경을 떠올렸다.

“어쩜 좋아. 마력을 모으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낯선 곳에 나 혼자뿐이야……!”

마르가리타는 혼잣말로 중얼대다 침대에 도로 걸터앉더니 양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어쩐지 과장되고 연극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쳐들며 반짝이는 눈으로 지영을 봤다.

“그래서 말인데, 나 너네 집에 당분간 머물러도 될까? 되지?”

지영은 싫다고 소리치려고 입을 벌렸는데 막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택침입죄는 들어봤는데 남의 집에서 멋대로 머무는 죄는 뭐라고 부를까. 엉뚱한 생각만 들었다. 어쩐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걱정하지 마. 방금 어머니 허락도 받았어. 너랑 같이 말동무도 해주고 며칠 놀다 간다고 했더니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너 어머니 걱정 끼치면 안 된다? 피곤해보이셔서 어깨도 조물락조물락 주물러 드렸더니 좋아하시더라고.”

그 짧은 사이에 설거지도 하고 지영 엄마와 친해지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지영은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약점이라 할 수 있는 엄마를 들고 나오는데 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저 봐, 저 봐! 저 나를 못 믿겠다는 아우라를 반경 30미터는 넘게 뿜어대는 듯한 저 표정! 두고 봐. 내가 마력만 되찾으면 멋지고 화려한 마법으로 널 뿅 가게 만들 테니까. 그때 가서 잘못했다고 빌어도 안 봐줄 거야!”

“무슨 나를 뿅 가게 만든다는 건데?”

“내 능력을 못 믿는구나? 내가 마력만 되찾으면 못할 게 없어! 그래, 네 다리! 내가 네 다리를 낫게 해준다면 어쩔 거야? 벌떡 일어나게 해줄 수 있어!”

“뭐? 뭐야? 다리?”

어두운 터널에 빛이 번쩍 비추는 듯한 느낌이었다. 갑작스런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졸고 있다가 뒤통수를 크게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다리를 낫게 할 수 있다고? 내, 다, 리, 를……? 정말로? 진짜로? 만의 하나, 아니 억의 하나, 조의 하나, 경의 하나라도 나을 수 있다면, 정말 그렇다면……!’

흥분이 극에 달아 숨이 멎었다. 놀라서 떠진 눈이 감길 줄 몰랐다. 굳어버린 몸이 천천히 떨렸다. 영원히 사라진 줄 알았던 희망이 지영의 말라서 굳어진 가슴을 파헤치고 새싹처럼 돋아났다.

“다시…… 일어날 수 있어? 두 발로 땅을 딛고 걸어 다닐 수 있어? 뛰고 싶을 때 얼마든지 달릴 수 있어? 숨이 차서 쓰러질 때까지 마음껏 달릴 수 있어?”

“문제없다니까! 그 정도는 나에게 있어 누워서 죽 먹기야. 뛰는 게 뭐야, 아예 날아다니게 만들어줄게!”

뭔가 먹는 것을 잘못 들은 듯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을 겨를은 없었다. 이미 지영은 마르가리타의 머리 뒤에서 환하게 비치는 후광을 보고 있었으니까. 눈앞의 소녀는 지영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천사요, 성녀요, 여신이었다.

흥분도 잠시, 멎었던 숨을 다시 내쉬면서 지영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머리에 피가 돌자 사라졌던 이성과 의심이 돌아왔다. 가만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무슨 증거로 마르가리타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마르가리타가 한 일이라곤 벌거벗고 4층 아파트 창문으로 뛰어 들어온 것밖에는 없다. 분명 그것도 일어나기 힘든 일이긴 하지만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보이진 않지만 옥상에서 줄을 타고 내려왔다든지, 옆집에서 창틀과 가스관 같은 걸 붙잡고 건너왔다든지,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지영이 가진 인간불신과 절망감은 순순히 마법사의 허언을 믿어줄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마르가리타도 지영의 표정 변화를 읽어냈다.

“흥, 아직도 날 못 믿겠다는 표정이네? 좋아, 그럼 직접 봐. 일각이 불여삼추라잖아? 내 마법의 증거를 너에게 직접 줄게. 잘 보라고.”

마르가리타는 벌떡 일어나서 선언을 하듯 당당한 태도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얼굴은 지영을 향한 채 양손을 들어 두 손바닥을 맞붙였다. 왼손을 아래로, 오른손을 위로 가도록 하고 손등을 살짝 구부려 틈이 벌어지도록 했다. 그래도 손가락을 꼭 붙여서 손틈은 보이지 않았다.

“잘 봐.”

마르가리타는 야심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지영을 쳐다보았다. 주문 같은 걸 외우지는 않았다. 그저 아주 잠깐 눈을 감고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을 뿐. 손틈이 반짝 빛나던 순간은 눈의 착각이었을까? 지영은 확신하지 못했다.

이제 마르가리타는 오른손을 들었다. 왼손 손바닥 위에는 가느다란 금반지가 놓여 있었다. 반지를 손가락 끝으로 집어 들면서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짜잔~! 어때?”

마르가리타가 입은 지영의 낡은 잠옷은 짧아서 손목까지 훤히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감출 공간 따위는 없었다. 마술인지 마법인지 몰라도 지영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박수를 쳐야 하나 잠시 망설였을 정도로 훌륭한 솜씨였다.

“이게 뭐냐면 말야, 내 마력의 응집체야. 내가 자연의 삼라만상에서 흡수한 마법의 힘이 여기에 모여서 실체화된다 이거지. 자, 우리 서로 믿는다는 증거로 이걸 너한테 맡길게. 네가 갖고 있어.”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에 마르가리타는 지영의 손에 반지를 억지로 끼워주었다. 왼손 새끼손가락. 반지는 아주 가늘었고 체온 때문인지 차갑지 않았다.

“원래는 그렇게 가늘지 않아. 마력을 흡수하면 점점 커지게 돼. 지금은 내 마력이 바닥나서 그것밖에 안 되지만 나중에 마력이 쌓이면 보석처럼 생긴 결정체도 하나 생길 거야. 마석(魔石)이라고 부르는데 그게 우리가 부리는 힘의 원천이야.

마법사라고 하면 지팡이 휘두르며 긴 주문을 중얼거리는 모습을 생각할 테지만 그건 옛날 고리짝 시절의 이야기야. 우린 보통 사람들이 신용카드 긁듯이 마석으로 마법을 부려. 지폐 세고 동전 세면서 주고받을 필요 없이 카드로 물건 쉽게 사잖아? 그거랑 똑같아.

박쥐 날개랑 쥐꼬리를 가마솥에 넣고 끓이지 않아도, 72소절짜리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마석이 있으면 마법은 간단하게 쓸 수 있다는 말씀! 헤헷.”

설명을 마친 마르가리타는 팔짱을 끼고 서서 휠체어에 앉은 지영을 내려다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때, 이젠 믿겠지? 내가 우수한 마법사 후보생 마르가리타라는 걸?”

“그래봤자 후보생이면서…….”

“뭐? 직접 보여줘도 내 능력을……?”

“알았어. 알았으니까, 여기서 지내려면 빨래랑 청소랑 설거지는 네가 해. 밥은 내가 할 테니까.”

“뭐? 설거지까지? 나 청소는 자신 있어. 청소는 할래. 근데 빨래는…… 세탁기는 있니?”

“세탁기 고장 났는데.”

“뭐? 말도 안 돼!”

“꼬우면 네가 마법으로 고쳐보든가.”

“기계를 고치는 건 일반적인 마법사의 일이 아냐! 그건 완전히 그쪽에만 특화된 애들이 따로 있어서…… 아무튼 난 못한단 말야. 손빨래라니 말도 안 돼.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너무 심하잖아.”

심하든가 말든가, 지영은 중얼대며 싸이월드로 들어갔다.

‘하루빨리 사라져줄게,,,,,,’

오늘자 일기의 마지막 줄이 눈에 들어왔다. 불과 30분 전만 해도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니. 새삼스런 깨달음이 닥쳐왔다.

지영은 백스페이스키를 지그시 누르고 오늘 쓴 글을 다 지우기 시작했다. 하루빨리 죽을 필요는 없었다. 비록 이 수다쟁이 여자애의 말을 다 믿지는 않더라도…….

“저기, 있잖아. 나 졸려서 자야겠는데, 아무래도 침대가 좀 좁지? 난 침대가 아니면 잠을 못 자는데…….”

어쩌라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러니까아~, 네가 딴 데서 자면 안 될까? 이럴 땐 집주인이 손님에게 양보해줘야지? 그래 네 맘 다 알아.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

지영은 화를 억누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웃기지 마. 양보는 무슨 양보. 자고 싶으면 부엌에서든 마룻바닥에서든 아무데나 퍼질러 자!”

‘쯧’하는 냉소적인 혀 차는 소리로 마무리 짓고 다시 키보드에 손을 얹는데 잉잉 우는 소리가 들렸다. 과장된 거짓 울음임에 분명했지만 소리가 점점 커지자 당혹스러웠다. 옆방에 있는 엄마가 깨면 어쩌지?

다행히 대꾸를 안 하자 포기했는지 소리는 뚝 그쳤다. 고개를 내밀어 문틈으로 보니 소파 위에 웅크린 모습이 보였다. 여름이니까 이불 없이 자도 괜찮겠다 싶었다.

비좁은 아파트. 현관과 거실과 부엌 사이는 다섯 걸음 안에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영에게는 그 짧은 거리를 걸음의 수로 가늠할 수 없었다. 팔로 바퀴를 몇 번 밀어야 할지로 셀 뿐. 모든 게 바뀐 삶은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쩌면 슬픔과 억울함의 응어리가 가슴 한 켠에 아직 다 녹지 않은 채 달라붙어 적응을 거부하도록 부추기는 것일지도.

지영은 미니홈피에 새 일기를 남겼다.

2006년 8월 13일
집에 갑자기 침입자가 찾아왔다. 라면을 뺏어먹고 내 잠옷을 입고,,,,,, 지금은 소파에서 자고 있넹;; 확! 쫓아낼려다가,,, 예쁘게 생긴 여자애라서 참았다;;;; 엄마에게는 친구라고 둘러댔지만 내일 두고보자,,,,,, 맘에 안 들면 진짜 쫓아낼거야!!!!

* * *

2006년 8월 16일
오늘도 말자양께서 한 말씀 남기셨다. 하룻강아지 뱀 무서운 줄 모른다라닠ㅋㅋ 근데 어째 말은 되는 것 같기도? 하여간 대단한 말자양이다,,,,,, 아무래도 조만간 말자양 어록을 만들어서 인터넷에 뿌려야겠다. 어젠가 그젠가는 천리길도 게걸음으로 가라는 말씀을 남기셨는뎈ㅋ 날 웃기다 죽일 셈이냐,,,,,,,,,

2006년 8월 24일

마르가리타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법 학교가 내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다. 전교 학생 수가 서른이 안 된다니 산골 학교네 완전;; 그리고 또 한참 들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참 견습생은 자기를 도와주는 마법생물을 하나씩 데리고 있단다. 애완동물은 아니고 파트너라고 한다. 넌 왜 없냐고 물으니 비행연습하다 헤어졌다고 한다. 얼마나 칠칠치 못하면 자기 파트너도 잃어버릴까ㅎ

2006년 9월 2일
요즘은 말자가 내 컴을 완전 장악했다. 것도 지뢰찾기만 하루종일한다,,, 안질리니 미친뇬아^^;; 첨엔 내가 하던 겜 가르쳐줬는데 어려워서 못하겠단다;;;; 바부탱이같으니,,,,,, 하여간 요즘은 누가 컴 쓰느냐로 맨날 다툰다. 가위바위보도 하고 동전 던지기도 하는데 내가 더 많이 이기지롱^^ 아무래도 말자는 가짜 마법사인가보닼ㅋㅋ큐ㅠㅠ

2006년 9월 7일
오늘은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 날은 더웠지만 바람이 조금 불어서 괜찮았다. 마르가리타 덕분에 오랜만에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다치고 나서 병원에 가는 것 말고 밖에 나온 게 얼마만인지,,,,,, 오늘은 말자님께서 소잃고 부뚜막에 올라간다는 명언을 남기셨닼ㅋㅋ

지영은 8월 중순부터 9월초에 이르는 일기를 훑어봤다. 분명히 이전과는 내용도 말투도 확연히 달라졌다. ㅋ이나 ㅎ 같은 웃음을 일기에 써본 적이 전에 있었던지 생각도 안 날 정도로 우중충했었는데.

오늘은 어제 내린 비가 그치고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마르가리타가 나가자고 졸라댔다. 내 꼴 뻔히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냐, 지영은 심통이 나서 쏘아붙였지만 마르가리타는 자기가 나가게 해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마법으로 공중에 띄우거나 순간이동이라도 시켜주려는 걸까? 지영은 짧은 순간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마르가리타는 지영을 업고 4층 계단을 낑낑대며 내려갔다.

재어보진 않았으나 겉모습만 봐도 마르가리타가 더 가벼울 게 분명했다. 가냘픈 몸으로 자신보다 더 무거운 사람을 업고 낑낑대는 모습은 지영을 제법 감동시켰다. 뿐만 아니라 지영을 1층에 내려놓은 다음엔 도로 올라가서 접은 휠체어를 갖고 내려와야 한다. 집으로 돌아갈 때도 이렇게 두 번을 왕복해야 할 터였다.

막상 이렇게 힘들게 내려와서 무엇을 했던가. 지영은 되짚어 생각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저 마르가리타는 휠체어를 밀면서 끊임없이 재잘거렸고 지영은 묵묵히 햇빛과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몸에 닿은 감각만이 생생하게 남았을 뿐.

가끔 바뀐 가게의 간판이나 새로 생긴 버스 정류장을 발견했을 때는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엔 창피하고 주위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오고 싶지 않았던 거리인데도 오늘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뒤에서 마르가리타가 지켜주고 있다는 기분에 태연히 고개를 들고 있을 수 있었다.

이후로 둘은 목적지로 없이 거리를 지나갔고…… 길거리에서 파는 과일 주스를 사먹었고…… 놀이터에 가서 아이들이 미끄럼틀 타는 모습을 구경했고…… 그게 다였다.

“고작 이러려고 날 업고 4층을 오르락거린 거야?”

“헤헤헤.”

“빨리 마법사가 되어서 날 낫게 해줘. 이 다음엔 둘이서 더 멀리까지 놀러 가자.”

“으, 응. 헤헤…….”

지영의 말에 마르가리타는 웃기만 했다. 사실 속으로는 고맙다고 말하고 싶지만 왠지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만 나왔다.

마르가리타는 놀이터 옆 벤치 구석에 앉고 지영은 바로 옆에 있었다. 휠체어가 조금 낮아서 지영은 고개만 살짝 젖혀 마르가리타의 등을 보았다. 땀에 푹 젖은 셔츠가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루종일 휠체어를 밀었으니 꽤 힘들었겠지.

“나 때문에 오늘 고생했어.”

돌아오면서 지영은 간신히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럼 오늘 저녁 컴은 내가 쓴다? 농담이야. 지영이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이야.”

“바보. 내가 어떤 애인 줄 알면 그런 소리 못할 텐데…….”

지영은 힘없이 웃더니 두서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왜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아이인지를. 1년 반 전, 운영하던 가게가 망하자 아버지는 빚을 감당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기는 딸도 마찬가지였던가. 지영은 곧바로 가출하여 석 달 후에 어머니와 병원에서 재회했다.

친구도 별로 없는 가출한 여자 고등학생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작은 유혹에 이끌린 순간 어둠의 손길에 휘어 잡히고 만다. 지영은 ‘원조’가 뭔지 아냐고 묻고 마르가리타의 멍한 얼굴을 보더니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이후 지영은 우연히 가출한 남자애를 만나 짧게 사귀었다. 취객에게서 돈을 뺏고 살면서 허세로 장만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애였는데, 친구들에게 자랑할 용도로 지영에게 야한 옷을 입혀 데리고 다녔다.

그와 친구들은 헬멧을 비롯한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밤거리를 폭주했다. 지영 역시 뒷자리에 앉아 그의 허리를 껴안고 바람에 머리카락을 나부꼈다. 아찔했지만 재미도 있었다. 적어도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병원에서 깨어나니 운 좋게 머리와 상반신은 무사했으나 하반신은 마비되었다는 선고를 받았다. 남자애는 목뼈가 부러져 죽었단다. 이후 언제 어디서 장례를 치렀는지 아무 소식도 못 들은 채 둘의 관계는 그대로 끝나고 말았다.

다행히 지영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 아파트로 돌아왔다. 마르가리타는 다시 말없이 지영과 휠체어를 4층까지 날랐다. 이날은 지영이 밥을 차리고 설거지까지 했다. 마르가리타는 지쳤는지 컴퓨터를 쓰겠다는 말도 잊고 곧바로 소파에 누워 TV를 보다 잠들었다.

* * *

지영은 그렇게 지난 미니홈피 일기를 훑어보고 있었다. 내용은 큰 차이 없이 세 가지 주제를 다루었다. 레벨이 몇 되었다는 게임 이야기, 엄마 미안해로 끝나는 신세한탄, 그리고 죽고 싶다는 타령. 그런데 최근 며칠 사이에 확 달라졌다. 마르가리타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무슨 말을 했고 같이 무엇을 하며 놀았고 무엇 때문에 웃었고…… 웃었어? 지영은 새삼 놀라며 마치 남의 글을 보는 듯이 읽었다.

“아, 여기서 살고 있었구만.”

누군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못 들어본 목소리다 싶어 돌아보니 창가에 작고 시커먼 게 달라붙어 있었다. 지영은 깜짝 놀라 절로 몸을 움츠렸다. 이젠 창문만 봐도 경기를 일으킬 것 같다. 가만히 보니까 검은 고양이였다. 밤의 어둠에 묻혀서 오직 두 눈만이 에메랄드처럼 반짝였다.

“이 집 주인인가? 내가 보이지도 않을 텐데 이쪽을 쳐다보네? 참, 내려앉을 때 창가에 좀 부딪혔지. 지가 놀라봤자 내 말이 들리는 것도 아닐 텐데. 그나저나 마르가리타는 어딨담……?”

고양이는 앞발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완전히 혼잣말임에 분명했다. 입은 거의 안 움직이는 것 같은데 목소리는 또렷했다. 분명 고양이가 있는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지영은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다. 이미 창문으로 알몸 여자애가 날아들지 않았나. 그저 자기네 집 창문이 마법사의 나라로 통하는 문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가만있자. 지금 뛰어 들어가면 소리가 나서 저 녀석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일단 여기 가만히 있어봐야지. 지가 날 어쩌겠어?”

“어떻게 할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너 마르가리타와 아는 사이야?”

지영이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자 고양이는 지영보다 훨씬 크게 놀랐는지 앞발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뭐라? 자네는 내가 보인단 말인가? 내 말이 들려? 아하……”

고양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뭔가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더니. 자네에게서 마르가리타의 마력이 느껴져. 날 보고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것도 납득이 가는구만. 어흠, 내 소개가 필요한가?”

고양이는 대답도 안 듣고 태연하게 테이프로 붙여놓은 방충망을 뜯고 들어와 침대 위로 뛰어내렸다. 형광등 불빛에 비친 몸은 작지만 날렵하고 털빛엔 윤기가 흘렀다.

“내 이름은 베헤모스. 마르가리타의 파트너 정도로만 알고 있도록. 그런데 마르가리타의 반지를 끼고 있다니, 자네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마법사도 견습생도 아닌 것 같은데……?”

지영이 뭐라고 설명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설거지를 마친 마르가리타가 방으로 들어오다 문가에서 딱 멈춰 섰다. 동영상을 보다가 일시 정지를 누른 것처럼. 어쩌면 고양이가 마법으로 열려버린 걸지도.

“베헤모스!”

“이거 이렇게 걱정 끼쳐도 되는 건가? 자네를 찾으려고 고생한 걸 생각하면…… 대관절 어디서 마력을 다 써버렸나? 게다가 자네 마력을 이 여자에게 주다니, 제 정신인가?”

“아, 그거, 이야기하자면 길어. 긴데……”

“다 필요 없고, 후딱 가세. 시험이 며칠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나?”

마르가리타는 선생님이라도 만난 듯 쩔쩔매고 있었다. 그런데 시험이라고? 지영은 문득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반지는 이전보다 더 굵어졌고 하얗게 반짝이는 작은 보석이 하나 박혀 있었다. 베헤모스는 한심하다는 듯 마르가리타를 다그치고 있었다.

“이번에도 낙제면 자넨 아주 가망이 없어지는 거야. 이젠 유급 같은 걸로 얼렁뚱땅 봐주진 않아. 벌써 휴학기간도 다 써버렸잖나. 이거야 원…….”

“알고 있어. 알고 있단 말야.”

마르가리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푸념을 할 뿐이었다. 낙제라니? 수석으로 졸업할 거라던데? 마법사만 되면 다리도 낫게 해준다며? 지영이 그렇게 항변하자 베헤모스는 비웃음을 흘렸다.

“얘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자네도 참 어리숙한 사람이구만. 아니면 너무 착해 빠졌거나. 불구가 된 육체를 되살리다니, 마법 학교의 학생이나 견습 마법사가 감히 넘볼 영역이 아니라네. 지금 현존하는 마법사 가운데에서 가능한 분을 찾아도 있을까 말까인데……”

지영은 갑작스런 충격에 몸이 굳어졌다. 온몸의 감각을 잃은 것 같았다. 마르가리타는 벌 받는 아이처럼 말없이 서있었다. 머리카락이 늘어져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창피함과 부끄러움을 감추려 애쓰고 있으리라.

“애초에 얘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를 생각했어야지. 오랜만에 비행이 잘 된다고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전속력으로 날아간 모양이야.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이제 막 면허를 딴 주제에 차 없는 고속도로에 자기밖에 없다고 신이 나서 정신없이 달렸는데 정신이 들고 보니 연료는 다 떨어졌고 주위엔 아무것도 없는 생전 처음 보는 곳이더라, 라는 이야기지.

여기 이 마르가리타 학생으로 말하자면 성적 한심에 품행은 방정맞은 학교 최고의 문제아라네. 개교 이래 처음으로 연속 낙제로 한 학년을 더 다녔고, 교칙에 정해진 휴학을 다 써버리고 이제 벼랑 끝에 몰린 상태지. 이번 졸업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못하면?”

지영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베헤모스는 긴장을 고조시키려는지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푹 숙인 마르가리타를 흘깃 보고는 대답했다.

“제적이지. 퇴학은 아니지만 졸업을 못해. 정 하려면 재입학을 해야 하고. 그 길고긴 과정을 다시 처음부터 거쳐야 한다네.”

“뭐?”

지영의 마음을 탑에 비유한다면 바닥까지 우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으리라. 스스로를 대단한 마법사가 될 것처럼 뻐기면서 다리를 낫게 해준다는 헛된 희망으로 사람을 속였다. 결국 마르가리타도 예전의 자신처럼 현실 앞에서 겁이 나 도피한 불량학생에 불과했다.

지영의 영혼은 마약에 취한 불치병 환자와 같았다. 절망적인 상황은 그대로인데 거짓에 속아서 잠깐의 행복에 헤롱거렸던 것이다. 내일이라도 일어서서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희망은 헛된 몽상이고 마약이 준 최면에 불과했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절망과 배신감이 한데 뭉쳐 지영을 짓눌렀다. 깨진 희망의 조각이…… 거창하지도 대단하지도 않고 그저 예전처럼 남들처럼 두 다리로 걷고 싶었던 작은 소망이 산산이 부서지며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지영의 영혼에 박혔다.

지영은 마르가리타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스스로도 뭐라고 말하는지 알지 못했다. 닥치는 대로 욕을 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마도 거짓말쟁이, 사라져, 그런 말들이었으리라. 이내 울먹임으로 바뀌면서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

베헤모스는 진정하라며 타일렀지만 지영이 양팔을 마구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자 별 수 없이 물러났다. 마르가리타는 베헤모스 뒤를 따라 열린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지영을 돌아봤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신기하게도 지영은 그 상황에서도 똑똑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거짓말해서 미안해. 하지만 약속은 꼭 지켜주고 싶었어.”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돌아봤지만 창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긴 머리를 찰랑거리던 소녀도, 눈만 번뜩이던 시커먼 고양이도 사라지고 없었다. 모두 지영이 잠깐 졸다가 꾼 꿈인 것처럼. 지영이 품었던 희망도, 친구를 만나 느꼈던 기쁨조차도…… 사라지고 없었다.

‘맞아, 역시 그랬어. 친구고 뭐고 다 필요 없는데. 사람을 믿으면 안 되는데. 그 자식을 믿고 따라갔다가 다리를 잃었고, 이제는 이런 꼴이야. 실수로 또 누군가를 믿고 마음을 주다가 멋지게 배신당했어. 다리도 잃고 영혼도 잃고, 이제 이 쓰레기 덩어리에게는 남은 가치도 의미도 아무것도 없어. 불쌍한 우리 엄마를 위해 한시라도 빨리 죽어 없어져야 해…….

어떻게 해야 죽을 수 있을까? 빠르고 쉽고 간단하게…… 그래, 저 창문이라면?’

방충망이 뜯기고 눅눅한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 밖으로는 별도 안 보이는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블랙홀 같은 어둠이 지영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이내 어둠은 마치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렸다. 점차 어둠은 베헤모스와 비슷한 잿빛 짐승으로 변했다. 두 눈만이 붉은 루비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쥐와 돼지를 섞은 듯한 몸뚱이에 머리는 박쥐를 닮았으나 날개는 보이지 않았다.

“여보세요, 실례 좀 하겠습니다. 제가 보이십니까? 목소리도 들리고요?”

“잘 들려. 할 말 있으면 해.”

지영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벌써 이상한 상대, 이상한 광경은 실컷 봤으니 더 놀랄 일도 없었다.

“네, 네. 역시 그랬군요. 소질도 재능도 없는 일반인이 마수(魔獸)를 알아차리다니, 역시 아까 그 마법 견습생에게서 뭔가 힘을 좀 얻으신 모양이죠?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제가 이렇게 온 건 말이죠. 실은 전혀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제가 아까 만나신 베헤모스란 놈하고 좀 친분관계가 있거든요. 그렇다고 막역한 관계라고 오해하진 마시길. 원래 우리가 소싯적에……”

“알았고, 용건이 뭐야?”

“아유, 성격도 급하셔라. 네, 저는 아스타로스라고 합니다. 여러분 평범한 인간들이 흔히 부르는 그 악마라는 존재입죠.”

“악마?”

“네, 두 눈이 빛나시는 걸 보니 역시 제 짐작이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아서 기쁘기가 한량없습니다 그려. 본디 저희들이 하는 일이 죽은 후에 떠돌아다닐 원혼들을 흡수함으로써 여럿에게 피해가는 일을 줄이는 공익적 활동인데 말입죠. 그걸 사람들이 곡해를 해서 악마가 사람을 속여 영혼을 팔게 하느니 뭐 영혼을 잡아먹느니 떠들어대는 거죠.

제가 방금 지나가다 베헤모스가 가까이 있길래 인사나 하려고 오다가 당신의 뭐랄까, 영혼의 냄새라고 비유해야 할까나? 그걸 느끼고 이렇게 찾아오게 된 겁니다. 한 마디로 당신은 저와 같은 존재들이 아주 좋아하는 타입의 영혼이에요.”

“내 영혼이?”

“그렇지요. 영혼. 분노와 슬픔, 고뇌와 절망으로 가득 찬 당신의 그 가엾은 영혼이 나를 이끌었답니다. 너무나 마음에 들었어요. 한 마디로 반해버렸다고나 할까요! 그리하여 당신을 도와주고자 제가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나타난 겁니다. 더구나 놀랍게도 당신은 저를 알아보고 이렇게 대화도 나눌 수 있으니 오죽이나 좋지 않습니까!”

“나를 도와줘? 정말로?”

“당신이 지금 가장 애타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맞춰볼까요? 어려운 것도 아니죠! 저는 당신의 영혼에서 풍기는 냄새를 느낄 수 있답니다! 이런 조악한 비유를 써서 죄송합니다만, 인간의 영혼을 곧잘 음식에 견주는 저희의 습성을 이해해주시기를!

영혼의 기질은 정말로 냄새와 비슷하지요. 가령 방 안에 향기로운 과일이 있다면 그 향기가 퍼져 방 전체가 향기롭게 느껴집니다. 반대로 똥 덩어리가 있다면 냄새 때문에 마치 방 전체가 더러운 것처럼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영혼의 냄새로 저희는 그 인간의 본질을 알아볼 수 있답니다. 지금 당신에게 가득한 단 하나의 열망, 그건 바로…… 죽음입니다.”

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스타로스는 눈에 담긴 감정을 정확하게 읽어내고는 미소를 지었다.

“어때요, 마음이 끌리지요? 제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자살하고 싶어 미치겠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죠. 이런 불쌍한 영혼을 위해 저희가 존재하는 겁니다.”

“네가…… 나를 죽일 거야?”

“저런! 무슨 그런 끔찍한 생각을! 안타깝게도 저희는 당신에게 손가락 하나도 댈 수가 없어요. 저희에게도 룰이란 게 있죠. 항간에는 악마가 사람을 해치고 재산을 빼앗는다고 하지만 잘 생각해보세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사기를 치고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누가 다 하지요? 네, 같은 인간들이죠!

그러니까 저희들은 그저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뿐입니다. 사실 솔직히 한때 인간들을 죽이려고 날뛴 적이 있어요. 옛날엔 전염병을 퍼뜨리고 천재지변을 일으키기도 했죠. 하지만 이제 그런 짓은 안 해요. 인간 세상에 함부로 개입할 수도 없고 직접 손을 써서 인간에게 해를 입힐 수도 없어요. 그게 룰입니다.

저희가 하는 일이란 그저 물건을 보고 훔칠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의 귓가에 훔치라고 속삭이고, 전쟁을 일으킬까 말까 고민하는 지배자에게 저지르라고 부추기는 가소로운 짓거리뿐이랍니다. 결정도 행동도 책임도 모두 그들의 것이죠. 자살하고 싶어 하는 이의 눈에 날카로운 칼이 잘 보이도록 주의를 돌리는 일,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의 등을 토닥여주는 게 바로 저희가 하는 일입니다.”

“좋아, 알았어. 그 정도면 충분해. 네가 저 베란다 천장에 빨랫줄을 매달아주기만 하면 내가 목을 맬게. 아니면 수면제 백 알만 구해다줘. 청산가리인지 황산구리인지 뭔지 몰라도 더 센 게 있으면 그것도 좋아. 아니면…… 그래! 높은 곳, 높은 곳에 데려다줘.”

“높은 곳이요?”

“건물 옥상 같은 곳에 날 갖다놓기만 해. 그럼 내가 알아서 자살할 테니까. 직접 손을 쓰는 일이 아니잖아? 넌 그냥 내 위치만 옮겼을 뿐이라고.”

“오호, 그것 참 신선하면서도 재미있는 발상이시군요. 역시 가끔은 인간과 대화도 나누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려. 약을 훔쳐오는 것도 결국 제가 직접 개입한 게 되니까 곤란할 테고, 이게 더 좋은 방법 같군요. 좋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갑시다!”

아스타로스는 그 작은 몸을 재빠르게 움직여 휠체어 뒤로 가더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들었다. 고양이만한 덩치의 쥐가 자기 몇 배는 더 나가는 휠체어에 탄 인간을 이렇게 쉽게 들었다는 사실이 바로 악마임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어진 갑작스런 바람에 지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강한 바람이 얼굴과 가슴을 정신없이 두들겼다.

“자, 다 왔습니다.”

천천히 눈을 뜨니 정면에는 어둠, 그 아래에는 도시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더운 여름밤이었지만 비교적 시원했다. 바람이 불자 휠체어가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바퀴 아래는 1센티미터만 움직여도 떨어질 듯한 옥상 위 철망 꼭대기. 눈앞은 그야말로 까마득한 낭떠러지였다.

“근처에 보이는 가장 높은 건물이길래 무작정 와봤습니다. 자, 이제 형식상의 절차가 필요한데요. 당신은 제 도움을 받아 죽는 거니까 죽은 후 당신 영혼의 소유권은 저에게로 이전됩니다. 이걸 또 음식에 비유하자면 제가 영혼을 먹는 셈입죠.

여기에 동의하신다면, 물론 동의하니까 여기까지 온 거지만 3분 이내로 죽으면 계약이 이루어집니다. 떨어지는 시간을 감안해도 충분하겠죠? 그러면, 영혼이 되어서 다시 만납시다.”

아스타로스는 말을 마친 후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듯 세찬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지영은 어둠에 묻혀 사라지는 모습을 멀거니 보면서 자신도 죽어서 영혼이 되면 저렇게 날아다닐 수 있을지 궁금했다. 죽음 이후가 두렵긴 하지만 어차피 악마에게 먹혀버린다면 상관없는 일이리라. 지영은 망설임 없이 휠체어 바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균형을 잃은 순간 지영은 앉은 채로 앞으로 기울어졌고, 그대로 어두운 밤공기를 가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 * *

지영은 세찬 바람에 눈을 질끈 감고 어서 모든 것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심장을 터뜨릴 듯한 두려움이 가시면서 이 짧은 순간이 벌써 지겨워지고 있었다. 왜 아직도 떨어지고 있는 걸까. 어쩐지 시간의 흐름이 느려졌다는 느낌도 든다.

그럴싸한 가설이 떠올랐다. 자신은 이미 죽었고 둥실 떠오른 영혼은 아직도 자기가 죽은 줄 모르는 게 아닐까. 그 증거로 마치 물속에 있는 듯이 몸이 가볍다.

불어온 바람을 맞아 먹먹하던 귀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탄식에 가까운 비명. 조롱하는 듯한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머릿속에서 뚜렷하게 재생되었다. 아스타로스의 목소리다. 떨어지라고 부추기던 악마의 웃음이 분노 섞인 외침이 되어 돌아왔다.

지영이 살며시 눈을 뜨자 아스타로스가 곁으로 날아와 맴돌고 있었다. 눈 아래 어둠에 물든 아스팔트에는 부서진 채 나뒹구는 휠체어가 보였다. 지영은 고층건물의 절반쯤 높이에서 둥실 떠있었다.

악마는 지영의 주위를 날아다니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

“나를 속였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분명히 너는 마법사가 아닐 텐데? 역시 네가 가진 힘은…… 무심코 넘긴 내 실수였어. 나를 볼 수 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설마 이것도 베헤모스 그 녀석의 계략은 아니겠지? 멍청하게 속아 넘어갔다면서 비웃는 꼴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군! 좋아, 알았어. 이번엔 너희가 한 방 먹였어. 그치만 두고 봐. 난 너 같은 애들을 잘 알아. 얼마 지나면 또 죽고 싶다고 징징댈 거야. 그때 다시 보자고. 그땐 확실하게 네 영혼을 잡숴주실 테니까.”

말을 마친 아스타로스는 폭죽처럼 긴 빛의 꼬리를 남기며 하늘로 곧장 날아가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지영은 멍하니 보고 있을 처지가 아님을 깨달았다. 느리긴 하지만 점점 땅에 가까워지고 있던 것이다. 이대로 추락하면 운 좋게 죽지 않더라도 큰 부상을 피할 수 없었다.

‘왜 나는 이토록 중력의 법칙에 저항하고 있을까? 내겐 아무런 능력도 없을 텐데…….’

하지만 지영은 의문을 떠올린 순간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답은 바로 손 안에 있었다. 왼손이 밤의 어둠을 뚫고 반짝였다. 새끼손가락에 끼었던 반지. 하얀 보석이 점점 밝게 빛났다.

지영은 반사적으로 오른손으로 보석을 감싸 쥐었다. 그러나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마법을 배워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마법의 반지를 준다 한들 방법은 없다…… 아니, 있을지도.

마르가리타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석이 있으면 마법은 간단히 쓸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소원이라도 빌어야 하나? 지영은 간절한 심정을 담아 속으로 빌었다.

‘날고 싶어. 날아가고 싶어!’

오른손이 점차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보석이라고 생각했는데, 분명 돌이나 금속에 가까운 감촉이었는데도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 원래 형체를 잃어가던 보석은 그대로 안개처럼 반투명한 빛의 흐름이 되더니 지영의 손을 휘감고 이내 몸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따스하고 기분 좋은 촉감이 전해졌다.

몸에 와 닿던 바람이 사라졌다. 땅이 가까워지면서 강해지던 중력의 손아귀도 약해졌다. 성공하는 걸까? 안도의 한숨을 쉬던 찰나, 반지를 낀 손을 제외한 지영의 몸은 축 늘어지며 다시 추락하기 시작했다. 새끼손가락만 걸치고 절벽에 매달린 듯한 형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추락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손가락과 어깨의 통증을 참으며 지영은 자학했다.

‘죽고 싶어 뛰어내렸으니 이런 꼴을 당해도 싸지.’

생각해보면 이것은 마르가리타의 마력이지 지영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온전히 자신의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것일지도. 애초에 아무나 쓸 수 있다면 마법학교에서 시험을 치면서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지영의 마음속은 점점 포기와 체념으로 검게 물들어갔다. 어차피 죽을 텐데 왜 이렇게 애를 썼을까 싶었다.

‘난 마르가리타가 아냐. 마르가리타처럼 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녀석은 잘도 벌거벗고 날아다녔는데. 벌거벗고……?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갑작스런 깨달음이 지영을 번쩍 깨어나게 만들었다. 개펄에 밀려온 밀물처럼 어두워진 마음을 새로운 희망이 뒤덮었다. 지영은 즉시 입었던 옷을 훌훌 벗었다. 속옷까지 모두 땅으로 후두둑 떨어졌고, 다시 빛의 장막이 전신수영복처럼 몸을 감쌌다.

정말로 물속을 헤엄치는 듯한 부유감을 느끼며 지영은 하늘로 떠올랐다. 양팔을 휘저어보니 몸은 너무나도 쉽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수영보다 더 간단했다. 이제 마비된 두 다리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얼마만에 느끼는 자유인지…… 지영은 아이처럼 입을 벌리고 나오는 대로 소리를 지르며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녔다. 땅 위를 기어 다니던 벌레가 이제 고치를 찢고 나비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자유로이, 너무나도 자유로이 날았다.

한참 날아가던 지영의 곁으로 검은 고양이가 다가와 나란히 날아갔다.

“자네 여기 있었군. 마르가리타의 마력이 느껴져서 왔는데 역시 자네였어.”

“베헤모스? 돌아간 줄 알았는데요.”

“나도 그럴 작정이었다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마르가리타가 자신의 마력을 몽땅 자네에게 넘겨주지 않았나?”

지영은 물끄러미 왼손을 쳐다보았다. 보석은 사라졌지만 반지는 그대로 있었다.

“마르가리타의 마석을 쓴 걸 보니 자네에게도 마법사의 재능이 있었나보이. 녀석도 아마 비슷한 힘을 느끼고 자네 집으로 이끌렸던 거겠지. 지금이야 벌거벗지 않으면 자유로이 날 수가 없겠지만, 더 많은 마력을 부릴 수 있는 마법사로 성장하면 옷을 입고도 날 수 있다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긴 하지만 자네가 다리를 쓸 수 없기 때문에 그만큼 하늘을 날고 싶다는 열망을 끌어내기 쉬웠다고 봐. 그렇기에 처음 하는 비행을 이 정도로 성공시킬 수 있었겠지.”

전혀 생각도 못했던 말이라 지영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돌이켜봐도 지영은 딱히 마법을 믿거나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저 어릴 때 수영을 좋아했기에 그 기억을 되살렸을 뿐.

“그렇다 해도 자네는 전문적으로 수련을 거치지 않은 초보자라서 마력의 소모량이 너무 비효율적이야. 벌써 거의 다 쓰고 있지 않나. 이래선 마르가리타에게 돌려줄 게 없겠구만.”

“아차, 중요한 시험이 있다고 했죠? 마르가리타는 어디에 있어요?”

베헤모스는 고개를 살짝 젓고는 앞발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실은 마력이 느껴져서 마르가리타인가 싶어서 왔는데 자네였어. 마력을 잃은 마르가리타는 평범한 여자애나 마찬가지라서 내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쉽사리 찾아낼 수가 없다네. 같이 돌아가던 중에 집에 놔두고 온 게 있다면서 아파트 쪽으로 가더니 그대로 사라졌지 뭔가. 집에 들어가 봤더니 자네도 없고 말이야…….”

“내 탓이에요. 내가 마석을 가져가는 바람에 마르가리타는 시험도 못 치고……”

“그보다 자네, 어서 착륙하지 않으면 마력이 바닥나서 추락할 거야!”

베헤모스의 재촉에 지영은 고도를 낮추며 생각했다. 마르가리타는 어디에 있을까? 이 동네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갈 곳은 한정되어 있을 터다. 아무데나 돌아다니다 길을 잃었다면 큰일이지만,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고 믿었다.

지영의 추측이 맞다면 있을 곳은 하나였다. 분명히 자기를 찾아주길 기다리고 있으리라…….

* * *

전구 수명이 다 되었는지 깜박거리는 가로등 주위엔 날벌레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그 아래 놀이터에서 혼자 그네를 타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힘없이 발만 움직여 앞뒤로 까딱거리던 그네가 멈추었다. 마르가리타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영을 알아보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맺힌 눈물까지 보였다.

다음 순간 알몸임을 자각한 지영은 얼른 몸을 틀어 놀이터 가장자리에 있는 나무 뒤에 착지했다. 갑작스레 몸이 무겁고 숨이 찼다. 장거리 달리기를 한 것처럼 지영은 웅크린 채 거친 숨을 내뱉었다.

마르가리타가 다가왔다. 지영은 새삼 지금이 밤이고 주위엔 희미한 가로등 불빛밖에는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괘…… 괜찮니?”

마르가리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지금 기분이 엄청 좋으니까. 너의 마석 덕분에 난 새처럼, 나비처럼 날아다녔어.”

“그래, 좋겠다. 내가 하늘을 날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훈련을 받았는데……. 너 참 대단해.”

“베헤모스가 나보고 다리를 못 쓰니까 하늘을 잘 날 수 있을 거라고 했어.”

“그럴 수도 있겠네. 마법은 바람을 이루는 힘이니까. 자신에게 없는 것, 자신이 잃은 걸 바라는 마음……. 우린 비행할 때 날개가 있다고 생각하라는 식으로 배워. 하지만 우리에겐 원래 날개가 없잖아? 있지도 않은 걸 바란다니 너무 어려워.”

마르가리타는 밤하늘을 보면서 말을 하고 있었다. 베헤모스는 언제 가져왔는지 지영이 벗어 던졌던 옷을 입에 물고 날아와 가볍게 착지한 후 앞에 놓았다.

“속옷은 잘 보이질 않아서 급한 대로 겉옷만 가져왔네. 휠체어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워서 일단 놔두었는데, 급한 대로 그거라도 입고 집으로 가세. 가서 이야기하자고.”

“고마워요……. 참, 깜빡 잊을 뻔했네.”

지영은 옷을 입더니 중얼거리며 왼손에 낀 반지를 빼었다. 반지에 있었던 하얀 보석은 사라지고 있었다.

“자, 돌려줄게. 내가 마력을 너무 많이 썼나봐. 미안.”

반지를 내밀었다. 어두운 데다가 가로등의 역광 때문에 지영은 마르가리타의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떨리는 목소리를 통해 그 마음만은 느낄 수가 있었다.

“정말…… 괜찮겠니? 이젠 날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어. 예전처럼 돌아가는 거야. 그런데도…… 괜찮겠어?”

지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나는 짜릿한 느낌. 정말 잃고 싶지 않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 반지가 있다면, 마석이 있다면 지영은 다시 하늘을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지영의 마음속에는 함께 떠오른 풍경이 있다. 마르가리타의 미소, 함께 마주보며 웃던 두 사람, 휠체어를 밀어주던 모습, 땀으로 젖은 등. 그런 마르가리타의 것을 빼앗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지영은 속으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어차피 예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더 나빠지는 건 아니잖아. 난 마법사도 아닌 주제에 하늘을 날아봤어. 그만하면 충분해.”

이왕이면 멋진 미소까지 보여주고 싶었으나 그럴 자신이 없던 지영은 앉은 채로 팔만 내밀어 반지를 건넸다. 감싸 쥐는 마르가리타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가락.

반지를 받아든 마르가리타는 말없이 곁에 앉아 지영을 끌어안았다. 지영도 가만히 손으로 등을 휘감았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의 호흡과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베헤모스가 다가와 말없이 이별을 알렸다. 마르가리타는 지영을 업고 걷기 시작했다. 이어졌던 침묵은 지영이 깨뜨렸다.

“좋은 꿈을 꾸게 해줘서 고마웠어. 시험 잘 쳐야 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마르가리타. 집으로 돌아와 지영을 침대에 앉힌 마르가리타는 반지를 도로 내밀었다.

“아무래도 이건 너 가져.”

“왜? 귀한 반지 아냐?”

“그냥 금반지야. 황금은 마법을 모으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데 마법사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마. 그걸로 휠체어 새로 장만해.”

“알았어, 그렇게까지 말하면 고맙게 받지.”

지영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금반지를 도로 받았다. 이제야말로 작별인사를 나눌 때였지만 마르가리타는 여전히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결국 인사 대신에 엉뚱한 말이 나왔다.

“나 있지, 생각해봤는데 너도 마법 학교로 와.”

“뭐?”

지영과 베헤모스는 동시에 놀랐다.

“네 마법의 재능은 틀림없이 뛰어나. 내가 두 눈으로 봤잖아. 분명히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거야.”

베헤모스가 고개를 저었다.

“어림없는 소리. 마법 학교는 평균 다섯 살에 입학한다는 걸 알면서 그런 말을 하나?”

“지영이는 그렇게 들어가서 10년 넘게 배운 나보다 더 하늘을 잘 날았어. 베헤모스도 봤잖아?”

“그야…… 말했듯이 신체의 결손으로 인한 자유에 대한 강한 소망이 비행의 촉매가 되었겠지. 마법사의 재능이라고 단정하기엔 일러.”

둘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지영은 생각했다.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희망에 대해서.

마법으로 가능할 자유로운 비행과, 가능할지도 모를 신체의 치료를 상상해봤다.

“베헤모스, 솔직하게 말해줘요. 내 다리를 마법으로 고칠 방법이 있나요?”

지영의 질문에 베헤모스는 잠깐 생각한 다음 대답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가능은 아니라네. 허나 엄밀한 의미에서 치료나 재생은 아니지. 그 분야에서는 현대 의학이 우리의 마법보다 더 세밀하고 뛰어나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으니까.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마법이 하는 일은 과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네.

대신에 말이야, 의족이라고 생각해보게. 자네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편리한 의족이 있다면 다리를 대신할 수 있지 않겠나? 더구나 굳이 새로 만들 필요도 없이 이미 있는 다리를 재활용한다면…… 마법은 그런 식으로 자네의 다리를 되살릴 수 있다네. 그렇다 한들 마력의 소모는 어마어마할 테고 겨우 걷는 정도밖에 안 될 거야.”

“그게 어디에요! 걸을 수 있다니!”

지영은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막연한 희망이 베헤모스의 설명 덕분에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큰 기대감을 주었나? 당장 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해서 미안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마법 학교 학생 정도로는 흉내도 못 낼 수준의 능력이 요구된다네.”

“괜찮아요. 가능성만 있다면 충분하죠.”

지영은 베헤모스를 보며 평생 없었던 용기를 쥐어짰다.

“부탁드릴게요. 저도 마법 학교에 가서 배우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되죠? 입학금을 내야 하나요?”

베헤모스는 난처한 표정으로 쩔쩔맸다. 보고 있던 마르가리타가 끼어들었다.

“나한테 맡겨! 내가 다 도와줄게. 내가 얼른 마법사가 되어 너를 학교에 입학시켜줄게. 입학금은 필요 없어.”

“진짜로? 말만이라도 고맙다.”

“아직도 날 못 믿는 거야? 이번엔 진심이야. 내 목숨이라도 걸 수 있어! 자, 약속하자!”

마르가리타는 지영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잠시 말없이 마주보았다.

“으흠, 그 전에 시험 낙제부터 모면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베헤모스의 신랄한 지적에 마르가리타는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지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다니까 그러네. 그럼 지영아, 우리 갈게. 조만간 마법 학교에서 널 데리러 올 거야. 기대하고 있어!”

“그래, 믿고 있을게. 수석으로 졸업할 예정인 우수한 아이의 말이니까.”

지영의 말에 섞인 장난기를 이해한 마르가리타는 윙크를 하며 혀를 살짝 내밀었다.

“잘 있어.”

마르가리타는 창가로 가서 섰다. 입었던 지영의 옷을 훌훌 벗더니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다음 순간 마르가리타와 베헤모스는 창문을 빠져나가 어두운 밤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처음엔 천천히, 그러나 이내 빠른 속도로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안녕, 마르가리타.’

지영은 미처 전하지 못한 작별인사를 속으로 되뇌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돌아보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손을 흔들었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결국 지영은 가만히 침대에 몸을 눕혔다. 문득 계속 움켜쥐고 있던 반지가 떠올라 손바닥을 폈다. 어느새 체온으로 따뜻해진 금반지. 마르가리타가 준 작별선물이라고 생각하니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굳이 주고 간 이유를 생각하면 고집을 부려선 안 된다며 스스로를 달랬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선물을 받았으니까. 희망이라는 빛이 지영의 가슴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 * *

그때 돌연 강풍이 불어 닥치며 창문이 덜컹거렸다. 깜짝 놀란 지영의 몸 위로 허연 물체가 덮치듯 떨어졌다. 이번엔 정체가 궁금하지 않았다.

“어우, 아파.”

마르가리타가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얼굴은 맞닿을 듯 가까웠다. 지영이 투덜댔다.

“야, 너 방금 멋있게 떠났잖아? 근데 왜 갑자기 나를 덮치는데?”

“응? 아하하, 그건……”

그때 창가에 앉은 베헤모스가 앞발로 수염을 쓱쓱 문지르며 대신 대답했다.

“녀석의 마력이 모자란 거지. 역시 너무 낭비한 게 원인인가보이. 이 상태로는 시험을 치르기는커녕 돌아가는 것도 힘들어. 나도 그 먼 거리를 마르가리타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고.”

그렇다는 얘기는 어떻게든 결국 낙제를 피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지영이 긴 한숨을 내쉬자 마르가리타는 마주 앉아서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헤헤. 그래서, 마력을 모을 동안 여기에 좀 더 있어야겠어. 잘 부탁해!”

지영은 하도 어이가 없어 얼굴이 구겨진 신문지처럼 되었는데 마르가리타는 눈치도 없이 환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히잉~ 나 배고파. 지금 몇 시야? 어머나, 벌써 새벽 두 시가 다 되가네? 우리 간단하게 샌드위치나 만들어 먹을까? 어제 내가 토마토랑 상추랑 재료는 다 사다 놨걸랑.”

“넌 이 상황에서 게다가 이 시간에 밥이 먹히냐?”

“오늘 너무너무 힘들었잖아. 너도 배고프지? 그지? 왜 그런 말 있잖아, 금강산도 식도락이라고. 일단 먹고 나서 얘기하자, 응?”

“금강산이 뭐?”

지영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움켜쥐었다. 마르가리타는 거실에 있는 바퀴 달린 의자를 가져와 다짜고짜 지영을 앉히더니 싱글벙글하며 신이 난 기세로 의자를 확 밀면서 부엌으로 갔다. 지영은 조금 놀라 허둥대면서도 터진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 (2006.12.29. / 2018.01.17. 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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