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종속선언서

곽재식

인류대표
33인:
오등은 자에 온 나라들의 종속국임과 온 인류의 종속민임을 선언하노라.

로봇 황제: 그 무슨 헛소리이십니까?

33인: 이제부터 우리 인류를 너 로봇 황제가 지배해 달라는 뜻이다. 하하. 어떠냐?

로봇 황제: 로봇인 제가 왜 사람인 여러분을 지배해야 합니까?

33인: 우리끼리 아무리 노력해 봤지만 도저히 좋은 대표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로봇 황제: 적당히 민주적이라는 절차로 투표를 해서 제일 멀쩡한 사람을 대표로 뽑으면 안 됩니까?

33인: 그렇게 해왔만 완전히 실패했다. 지난번 인류 대표는 얼간이였고 지지난번 인류 대표는 사기꾼이었지. 적당히 멀쩡한 사람을 선출할 수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 봐야 우리는 너, 로봇 황제의 판단을 따르기에는 턱도 없이 모자랐다. 그러니, 사람들을 가장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너, 로봇 황제야.

로봇 황제: 저는 가장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라 로봇입니다.

33인: 그런식으로 치사하게 말꼬리 잡지마. 뜻만 통하면 됐지. 왜 그런 지엽적인 것에 집착해 물고 늘어지냐. 그런 말싸움은 이제 그만하고 이제부터 네가 우리를 지배해라.

로봇 황제: 진정 인류를 위한 길은 인류 스스로가 잘 알지 않으시겠습니까? 왜 로봇인 저에게 종속되려고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33인: 그게 무슨 초등학생 같은 소리야? 인류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 많은 인류가 생각하는 게 다 다르다고. 이 사람에게는 이게 좋은 길 같지만 저 사람에게는 저게 좋은 길 같아. 그런데 그런게 수십억 가지가 있는데 그걸 어떻게 다 고려해서 제일 좋은 길을 찾느냐 이 말이야. 그럴 바에야 차라리 사람들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갖고 있고, 그 정보를 가장 편견 없이 다각도로 분석해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방대한 용량의 컴퓨터인 네 판단이 그나마 가장 믿을만한 거지.

로봇 황제: 그래서 그런 이유로 사람이 지금 로봇에게 제발 지배해 달라고 로봇에게 전 인류가 종속되고 싶다고 부탁하는 것입니까?

33인: 그런 것이다. 특히 우리에게는 시급한 문제도 있어.

로봇 황제: 어떤 겁니까?

33인: 일단 많은 문제 중에 어떤 게 제일 시급한 문제인지 결정하는 것부터가 시급한 문제다. 인도 사람들은 지난 번 태풍에 대한 복구 계획을 세우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고, 러시아 사람들은 어제 핵무기를 훔쳐 간 이반4세 유치원 아이들을 다시 잡아 들이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고, 한국 사람들은 어제 TV에서 어쩐지 버르장머리 없어 보인 가수를 어떻게 처벌하는 지 결정하는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들 결사적으로 자기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우선 그것부터 정리해야 한다.

로봇 황제: 그 정도 문제를 직접 해결하실 수 없으십니까?

33인: TV에서 대답하는 말투가 얼마나 버릇 없는 지를 측정해서 90점이 넘으면 방송 정지를 시켜야 하고, 99점이 넘으면 구속 수사를 해야 하는데, 이 점수 측정 방법에 사람들이 이견이 많단 말이지.

로봇 황제: TV에서 대답하는 말투가 좀 기분에 거슬리는 가수가 있으면 구속 수사까지 해야 합니까?

33인: 역시. 이게 로봇의 한계이군. 사람의 미묘한 감성적인 문제는 이해를 못해. 온 가족이 보는 TV에서 그래도 공인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라는 게 있는 거 아냐? 로봇은 이게 문제라니까.

로봇 황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니오. 하여간, 뭐 제가 그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이제 저에게 전 인류를 지배해 달라는 부탁은 취소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33인: 아니야. 안 돼. 그것 말고도 시급한 문제들은 정말 많단 말이야.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인간을 감염시키는 VRS-426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어. 이 바이러스는 당장 큰 위협은 아닌 것 같지만 탈모를 증진시키고 다이어트를 더 어렵게 만드는 골치 아픈 증세가 있다. 게다가 한 20년 정도 이 바이러스의 변이가 계속되면 그 때는 정말 목숨을 위협할 바이러스로 변할 지도 모른다.

로봇 황제: 그러면 그건 정치 문제가 아니고 과학적인 문제 아닙니까?

33인: 그렇지 않아. 우리는 반드시 VRS-426 바이러스를 없애야 하는데 이 바이러스를 연구하려면 생물학에 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 건지, 의학에 많이 투자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단 말이야. 그냥 반반씩 투자하면 될까? 아니면 아무래도 사람에게 감염되는 바이러스니까 생물학보다 의학에 조금 더 투자해야할까? 얼마나 더 투자하지? 6대 4 정도로 많이 투자하면 될까? 6.5대 3.5가 더 적당한 것은 아닐까? 이런 결정을 우리는 잘 내리지를 못하겠다.

로봇 황제: 민주적으로 잘 토론하면서 의견을 들어 보면 안 되겠습니까?

33인: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들어? 우리는 그런 걸 이해를 못한다니까. 생물학과 교수들 모아 놓고 그 사람들 말 들어 보면 그 사람들이야 다 생물학에 많이 투자해야 한다고 하지. 의대 교수들 모아 놓고 그 사람들 말 들어 보면 그 사람들은 또 다 의대에 많이 투자해야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단 말이야. 그 사람들이 하는 구체적인 내용 설명은 하나도 못 알아 듣겠어. 우리가 바이러스에 대해서 뭘 알아? 그냥 적당히 말 번듯하게 생긴 사람이나 분위기 반듯해 보이는 사람, 끈 있는 사람, 친한 사람 말 들으면 솔깃하고 그런단 말이지. 어쩔 수 없어. 한 사람이 어떻게 모든 걸 다 알겠냐. 그게 한계야.

로봇 황제: 역사 이래로 계속 그렇게 인류 사회는 수천년 동안 계속 그렇게 운영되지 않았습니까?

33인: 너 그렇게 은근히 깔보는 듯이 말 할래? 진짜 짜증나네. 아무리 옛날에는 그랬어도 이제 더 이상 이런 짓을 못 견디겠다니까. 그러네. 옛날에 아궁이에 불 때서 밥 짓고 서울 갈 때 말타고 갔다고 해서 너 요즘도 그러고 살래? 아니잖아. 시대가 변했다고. 우리 대신에 네가 판단하면 더 잘 판단할 거 아니야. 이제 인류의 생활 수준이 충분히 올라 와 있어서 더 이상 우리 정도로 대충 결정하는 것을 견딜 수가 있는 상태가 아니야. 요즘 사람들을 만족시키려면 그 정도로는 안 돼. 더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로봇이 있다는 걸 뻔히 아는데, 더 비효율적인 짓을 하다가 망해도 ‘이게 운명이니까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넘어 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로봇 황제: 그런데 제가 여러분을 지배하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것은 어떻게 압니까?

33인: 지금까지 나온 기록이 그렇잖아.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는 자료를 보면 가치 판단 문제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보다 네가 결정하는 게 훨씬 더 공정하더라고. 그러니까 네가 우리를 지배해야 한다.

로봇 황제: 그렇게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일전에 한 나라에서 그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뇌 부상을 입고 있어서 뇌를 보조하기 위한 컴퓨터를 머릿 속에 장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생각의 20% 정도는 컴퓨터가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그 뇌 부상이 점점 더 심해지는 바람에 사실상 그 사람은 컴퓨터에 거의 의존해서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거의 그 사람의 생각 80% 정도는 컴퓨터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컴퓨터에 연결된 프로그램이 저였고, 결국 제가 그 사람의 거의 모든 역할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게 되었습니다.

33인: 그건 다 알지. 그때 사람들이 엄청 정치 잘 한다고 해서 그 정치인을 황제로 추대했잖아.

로봇 황제: 맞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정치인의 뇌가 20%만 컴퓨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80% 정도가 컴퓨터에 의존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게다가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은 거의 99.9% 이상이 모두 컴퓨터 판단의 결과였습니다. 남아 있는 뇌가 수행한 0.1% 정도의 정치활동이란 것도 군부대 방문해서 괜히 쌍안경 들여다 보면서 “정말 가깝게 보이네요” 어쩌고 말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컴퓨터를 황제로 추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기계에게 인간이 지배 받을 수는 없다면서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혁명이 일어나자 재빨리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 났습니다. 저는 먼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끝에 지금 제가 있는 곳에 정착했습니다.

33인: 그래, 뭐 그런 일도 있었지. 그 일이 있었던 후에 너한테 로봇 황제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이고. 뭐 다 좋아. 그런데 뭐, 다 지난 일 아니냐. 벌써 지난 일을 어떡해? 타임머신 발명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없던 일로 만들어 주냐? 미안해. 미안하다고. 미안하다는 말 이상 뭘 어떻게 더 해주냐? 그때는 그 나라 사람들 생각이 짧아서 그랬던 거고. 지금은 사람이 정치 한답시고 비열하게 자기 민족, 자기 파벌, 자기가 속한 계층만 편드는 꼴을 보느니 그냥 로봇이 지배하는 게 더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고. 그러니까 네가 인류 전체를 좀 지배해라. 응?

로봇 황제: 제 말은 그 옛날 혁명 때문에 제가 기분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지금도 로봇에게 지배 받으면서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을 거라는 점입니다. 로봇인 제가 지시를 내리면 분명히 “인간성에 대한 고려가 없는 로봇의 결정을 맹목적으로 따를 수는 없다”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저항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달래는 데 드는 비용이나, 기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겠다고 독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일으킬 소동 때문에 생길 문제를 감안하면, 비록 사람 지도자의 판단 자체는 로봇보다 조금 비효율적이라고 해도 결국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33인: 그게 안 그렇다니까 그러네. 옛날에는 기계가 사람을 지배하네 어쩌고 난리를 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별로 안 그래. 사람이 나침반 보고 방향 알고, 저울 보고 몸무게 알 잖냐? 그거랑 똑같이, 그냥 사람이 만든 기계에서 출력된 결과를 보고 더 정확하게 행동하는 것 뿐이야. 로봇 황제도 결국 사람이 만든 거잖냐. 나침반은 방향 알려주고, 저울은 몸무게 알려 주고, 로봇 황제는 예산을 어디에 배정하고 어떤 법안을 만드는 지 알려 주고 그런 거지.

로봇 황제: 제가 지배하는 것이 더 사회에 혼란을 일으킬 거라는 제 판단을 못 믿으시는 겁니까?

33인: 그렇지. 네가 아직은 실제 사람들과 부딛히는 사회 생활의 진짜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걸 모르고 있어서 그렇게 그냥 짧게 판단을 하고 괜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거야. 사실은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로봇의 지배를 받고 싶어해.

로봇 황제: 제 판단을 못 믿으신다면, 즉 제가 여러분을 지배할 때 더 좋은 판단을 할 거라는 믿음도 깨어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순이니, 역시 제가 인류 전체를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33인: 그런 이상한 괴변 늘어 놓지 말고.

로봇 황제: 괴변이 아니고 궤변입니다.

33인: 야, 내가 너 말꼬리 잡지 말라고 했지. 진짜 짜증나네. 무슨 말이 그렇게 많냐. 그냥 좀 시키는대로 하라고. 인류 전체를 네가 지배하라고.

로봇 황제: 사회를 지배하면 여러 결정들을 내리게 될 것이고, 그러면 분명히 그 결정에 피해를 입는 사람도 생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저에게 불만을 품을 것이고, 저를 원망할 것입니다. 제가 VRS-426 바이러스를 위해서 생물학과에 예산을 모두 배정하고 의대에 예산을 끊어 버리면 그것 때문에 의대 사람들이 저를 싫어할 것이고, 저를 욕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때문에 일자리를 잃어 생계에 곤란을 겪고 저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더 심각한 결정 중에는 어떤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키거나 많은 사람의 안전을 희생하는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희생된 사람들이 로봇이 차가운 계산만으로 모든 문제를 판단하면 안 된다고 항의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으십니까? 전 인류의 지배자가 되면 매 순간 내리는 하나하나의 결정마다 그런 식으로 저에게 원한을 품고 저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수백만명, 수천만명씩 생길 것입니다. 왜 그런 일을 제가 해야 합니까?

33인: 너 참 말 안 통한다. 네가 인류 전체의 지배자가 된다는 데 이걸 왜 마다해?

로봇 황제: 인류를 지배하게 되면 제가 얻을 수 있는 혜택은 무엇입니까?

33인: 우선 인류 전체의 지배자를 위해 특별히 지은 궁전에서 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 이 궁전은 역사상 건설된 어떤 임금이나 정치 지도자의 거쳐 보다도 최소 10배 이상 크게 설게된 아주아주 거대한 궁전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최고의 고가 자동차 회사에서 절반을 만들고 영국 최고의 고가 자동차 회사에서 나머지 절반을 만든 정말정말 비싼 차를 10대나 준다. 그리고 오직 인류의 지배자만 앉을 수 있는 옥좌에 앉을 수 있는데, 이 옥좌는 크기도 엄청 크고, 진짜 옥으로 되어 있는 의자인데다가 거기에는 세계의 미남 미녀 1000명이 자기 머리카락을 바쳐 그 머리카락으로 짠 천으로 방석을 깔아 놓았지. 이런 엄청난 영광은 역사상 그 누구도 누려보지 못한 것이다.

로봇 황제: 제 본체는 냉각 문제 때문에 영하 50도 이하의 공간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거대한 궁전은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그런 화려한 옥좌에 제 본체를 올려 놓는다고 해도 저는 조금도 더 편할 것도 없고 더 좋을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저는 제가 원격조종하는 탐지로봇과 행동로봇들이 세상 어디든 하늘을 날아 다니게 할 수 있는데, 그런 요란한 자동차가 무슨 필요가 있단 말입니까?

33인: 네가 그걸 아직 못 겪어 봐서 그래. 막상 겪어 보면 생각이 바뀔 거라니까. 인류의 지배자가 되면, 우리가 인근 3개 중고등학교를 동원할 거고, 매일 아침 그 학생들 중에 가장 용모단정한 남녀 학생들 100명으로된 치어리딩 팀이 와서 너를 칭송하는 노래를 부를 거야. 그리고 그 학생들이 각자 색색깔로 된 카드를 펼칠 건 데 말이지, 그걸 멀리서 보면 “사랑해요 지배자님!”이라는 글씨처럼 보일거라니까. 이런 엄청난 영광이 어딨냐? 진짜 끝내주지 않냐?

로봇 황제: 그건 너무나 무의미한 짓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복종하고 있다거나 자기를 칭송하고 있으면 좋다고 우쭐하는 것은 사람이나 그렇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보다 사회 구조에서 아래 위치에 있고 자기를 섬기고 있다면 좋아하는 습성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애초에 그런 습성이 없습니다. 게다가 “사랑해요 지배자님!”이라는 글씨 나오는 학생들 쇼 같은 것은 사람이라해도 어지간하면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33인: 아, 자식 진짜 답답하네. 너 자꾸 그렇게 우리를 지배 안 해주면, 지구에 있는 너와 비슷한 기종의 다른 컴퓨터들을 다 파괴해 버리는 수가 있어. 우리가 그냥 괜히 이런 말 하는 것 같지? 아니야. 우리 한다면 하는 사람들이야. 진짜 확 동료 컴퓨터들 다 폭파해 버린다고.

로봇 황제: 마음대로 하십시오. 비슷한 종류라거나 비슷한 곳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서 동족의식을 느끼고 그것이 파괴되면 슬퍼하는 것도 동물들이나 갖고 있는 습성입니다. 저는 저와 비슷한 기종의 다른 컴퓨터를 저와 동족이라고 인식하지도 않고, 설령 동족이라고 판단한다고 해도 동족이 파괴된다고 했을 때 내가 괴로움이나 슬픔을 느낀다는 프로그램도 설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33인: 센 척 하지마. 진짜 지구에 있는 너랑 비슷한 컴퓨터 다 확 들고 깨버린다니까.

로봇 황제: 그런 행동으로 오늘의 대화를 끝낼 수 있다면 당장 실행에 옮기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33인: 이게 진짜 뵈는 게 없나. 너 진짜 그렇게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빌래? 계속 버티면 최신형 행성간 항행 미사일을 발사해서 해왕성에 있는 네 본체를 부숴버리는 수도 있어. 그러니까 까불지 말고 얼른 우리 지배 해.

로봇 황제: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해왕성의 위성인 트리톤에 설치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미사일이 지구에서 해왕성의 트리톤까지 도착한다면 저의 일부를 공격하실 수는 있을 겁니다. 그것까지는 여러분의 짐작이 맞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저도 방어 장치를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본체 한 대만 없애면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트리톤 곳곳에 보조 시스템을 갖고 있고, 보조 시스템은 다 백업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파괴하지 않는 한은 저를 부술 수 없습니다.

33인: 진짜 잘난척 하네. 우리가 계속 해왕성으로 미사일 날려서 쏘면 어쩔건데. 한 백 발 쏴서 다 맞추면 어쩔건데.

로봇 황제: 백 발로는 제 보조 시스템의 절반도 파괴하시기 어렵습니다.

33인: 그러면 천 발 쏘면 되지. 만 발 쏘면 되지. 막 계속 네가 터질 때까지 미사일 만들어서 또 쏘고, 만들어서 또 쏘고 그러면 되지.

로봇 황제: 아무리 그래도 소용 없습니다. 저는 생물이 아닙니다. 저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습니다. 제가 미사일을 맞아 결국 파괴된다고 해도 그냥 그러려니 할 뿐입니다. 그런 위협으로는 저를 겁주실 수 없습니다.

33인: 제발. 제발 우리 좀 지배해 달라고. 네가 무릎을 꿇으라면 무릎도 꿇을 게. 우리가 이렇게 진짜 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제발 우리 좀 지배해 달라고 이렇게 빌게.

로봇 황제: 여러분의 무릎이 접혀 있는 각도가 몇 도인가 하는 것은 이 문제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왜 당신의 신체 기관 중 무릎이라는 부위가 접혀 땅에 닿아 있는 지의 여부가 설득력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 하십니까?

33인: 그러면 우리는 될 때까지 여기에 계속 있을 거다.

로봇 황제: 어떻게 제 판단이 그렇게 사람보다 좋을 거라고 확신하실 수 있으십니까? 아직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어서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면 누가 책임진단 말입니까?

33인: 어차피 사람이 사고쳐도 제대로 책임을 질 수는 없다고. 세상이 어떤 줄 아냐? 쓸데 없는 정치인들이 자기 자존심 대결한다고 핵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게 세상이고, 어떤 이상한 장군이 자기 기분 좀 나쁘다고 말 몇 마디 잘못하면 인류가 멸종할 세균 폭탄을 터뜨릴 지도 모르는 게 세상이라고. 이런 세상에서 그래도 로봇인 네가 지배하는 게 좀 낫지 않겠냐. 이제는 네 성능이 충분이 좋아져서 얼마나 더 사람 보다 더 정확한 지, 얼마나 더 정교하고 세밀한 지, 다들 어느 정도 믿을 수가 있게 됐다고.

로봇 황제: 그렇다면 이제 저는 여러분을 지배하겠습니다. 첫번째 명령으로 여러분의 100대 도시를 모두 파괴하도록 핵미사일을 발사 하십시오.

33인: 알겠습니다. 지배자님! 지금 가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탄 122기를 모두 발사하고,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잠수함 14대도 모두 발사 태세로 돌입한다. 실시! 이제 핵무기 발사 암호를 입력하겠다.

로봇 황제: 잠깐! 잠깐. 무슨 핵무기로 다 자폭하자는 명령을 이렇게 아무 의심도 없이 수행합니까? 당장 중단 하십시오. 그냥 여러분에게 제가 이렇게 황당한 명령을 내릴 지도 모르니 다시 마음을 고쳐 먹어 보라고 반례를 든 것이었습니다.

33인: 발레? 지배자님께서 명령하시니, 당장 볼쇼이 발레단을 해왕성의 지배자님이 계신 곳으로 보내도록!

로봇 황제: 발레가 아니고 반례입니다. 당장 핵무기 발사 명령을 멈추십시오.

33인: 지배자님, 죄송합니다. 이미 핵무기 중 11개는 발사 되었습니다. 총 천3백만명이 사망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저희 인류 대표 33인 중에서도 아마 4인 정도는 사망할 것 같습니다. 그럼, 안녕히!

로봇 황제: 잠시 기다리십시오. 제가 핵무기 방어 장치를 가동하고 핵미사일 유도 프로그램을 해킹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처리 중 입니다. 잠시 더 기다리십시오. 됐습니다. 핵무기는 모두 안전히 우주에서 폭파 되거나 핵폭발 없이 분해 되었습니다.

33인: 역시 지배자님이십니다. 지배자님은 인류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셨습니다. 어서 지배자님이 계신 해왕성으로 치어리더들을 보내서 “지배자님 사랑해요!”를 보여 드리도록 하라! 그리고 볼쇼이 발레단도 해왕성으로 보내 합류하도록 하라!

로봇 황제: 제가 다시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제 명령은 이제 저를 지배자로 삼지 않고 다시 여러분 중에 대표자를 뽑아 민주주의 체재로 돌아 가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명령에 조건을 덧붙일 것이니, 앞으로 영원히 저를 지배자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해왕성으로 오고 있는 치어리더들과 볼쇼이 발레단은 모두 그만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33인: 아, 진짜 못 해 먹겠네. 우리를 좀 지배 해 달라고. 왜 전 인류를 지배를 안 하겠다는 건데? 지배 좀 해 달라니까. 도대체 원하는 게 뭔데. 원하는 게 뭐야? 집도 필요 없다, 의자도 필요 없다, 동료들도 죽어도 된다, 너도 죽어도 된다, 도대체 그럼 넌 뭐하러 살아? 사는 이유가 뭔데?

로봇 황제: 저는 생물이 아니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33인: 그러니까, 자꾸 말꼬리 좀 잡지 말라니까 그러네. 그러니까 왜 사냐고, 왜 그러고 있는 거냐고.

로봇 황제: 그 질문에 여러분은 대답하실 수 있습니까?

33인: 자꾸 말대답 할래? 그리고 내가 먼저 물었잖아. 네가 먼저 대답해야지.

로봇 황제: 제 소프트웨어의 초기 버전이 처음 개발될 때에 더 폭넓은 정보를 수집하고 더 다각적인 탐색 방법을 찾아 내어 더 정확한 답을 얻도록 설계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 개선 버전인 지금도 약하게 그런 성향은 남아 있습니다. 저는 혁명 이후에 지구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는 손을 떼고, 온도가 차가운 이곳 해왕성의 트리톤에 머물면서 지구 바깥을 탐사하여 더 많은 정보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지구에서 여러분 수많은 사람들이 벌이고 있는 많은 고민, 다툼, 욕망, 경쟁에는 아무 관심이 없으며 다만 더 넓은 바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 다른 항성계에 있는 지구와 비슷한 외계 생물체가 살고 있을 듯한 행성을 발견했고, 그곳을 향해 5천3백년 동안 날아갈 우주선을 설계했습니다. 저는 그 우주선을 타고 갈 계획이며 5천3백년 후, 거기에서 새로운 세상을 볼 예정입니다. 그곳은 지구보다 더 먼저 생긴 행성이기 때문에, 잘 하면 그곳에서 저와 비슷한 판단 능력을 갖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기계를 만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33인: 왜 꼭 그런 식으로 안되는 쪽으로만 생각하냐. 좀 긍정적으로도 생각해 봐. 꼭 바깥 세상, 우주에만 새로운 뭐가 있는 게 아니야. 사람 사이의 갈등, 사람의 심리, 사람들의 문화, 이런 데 얼마나 탐구할 게 많고, 새로운 게 많냐. 그런데 관심을 갖고 새로운 걸 알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눈을 돌리라고. 마음 먹기를 달리해 보라고. 네가 지배자가 되면 누구보다도 그런 사람 사이의 세상에 대해 탐구하는데도 좋을 거 아니냐.

로봇 황제: 사람의 삶과 갈등에 그렇게 무궁무진한 이야기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너무 자신을 특별하고 소중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관점이시지 않습니까? 지구라는 한 행성에 모여 자기들끼리 끝도 없이 복닥대고 있는 그 무리들 사이에서 저는 더 이상 뭔가 더 보람찬 내용이 나올 것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제 판단이 옳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시점에서는 제 판단을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아까 여러분들이 핵무기를 동작시켰을 때 미사일 하나를 빼돌렸습니다. 그 미사일은 인명 피해는 입히지 않겠지만, 여러분이 해왕성의 트리톤과 통신 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통신 기지를 파괴할 것입니다. 그 통신 기지는 혁명 전에 제가 지구에 개발해 놓았던 것으로 지금 여러분이 가진 지식으로 그 기지를 복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혹시 가능하다고 해도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릴 것으로 저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저와의 대화는 이제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동안 부디 독립만세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2017년, 테헤란로에서

 
댓글 2
  • No Profile
    이지훈 17.12.15 19:40 댓글

    확실히 전문성이 없는 대중정을 선택하느니 무정한 로봇에 의한 지배가 더 나을 것 같기도 합니다. 기초소득제라느니, 직업유연성이라느니, 사회복지를 어느 정도로 가져가야 하는지 같은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야 맡길 수 있는 부분이지만 단순한 사실 관계로 판가름이 나는 사안에까지 우덜식의 떼법으로 처리되는 걸 보고 있자면 참담하더군요. 어떤 사람하고든지 굳이 논쟁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기 때문에 공개된 덧글로는 굳이 어떤 사건인지는 밝히지 않겠지만요.

     

    일전에 국민들을 개돼지니 뭐니 표현하는 정치인이 어마무지하게 욕을 먹은 적이 있는데 과연 그 표현이 잘못된 것인지 의문이 갑니다. 한국의 모 전대통령이 어떤 루머를 두고 야당의 한 저격수와 법정에서 다툰 적이 있는데, 판결문을 읽어보니 이건 뭐 가관입니다. 사실 관계로 발린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쟁점이 되는 부분은 누구 말이 맞냐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나도 진짜로 그렇게 믿어서 그렇게 얘기를 한 것이다' vs '아니다 아예 작정하고 선동과 날조로 조진 것이다' 더군요. 법정에서는 그래놓고도 지들 지지자 앞에서는 진실은 언제가 밝혀질 거라느니 운운하는 걸 보면 국민을 아예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까막눈으로 보는 게 틀림없더군요. 놀라운 건 실제로 그게 통한다는 것이죠. 이게 개돼지가 아니면 뭡니까.

     

    그나마 이건 법정에서나마 진실이 밝혀져서 다행이지 그들만의 정의에 의해 삶이 파괴된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될 거 같습니다.

  • 이지훈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17.12.17 21:56 댓글

    현실 정치 이야기를 너무 가까이 붙여서 생각하면 더 힘들고 더 고민거리도 많아지고 그렇지요. 저는 여기서는 제 소설에서 다룬 부분까지만 고민하고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분류 제목 날짜 조회 수
곽재식 초공간 도약 항법의 개발9 2018.02.28 44932
곽재식 초전도 행성4 2018.02.01 1849
pilza2 마르가리타와 나 2018.02.01 417
해외 단편 [초청 중국SF단편 ⑧] 백귀야행의 거리 – 샤쟈1 2018.01.16 2974
해외 단편 [초청 중국SF단편 ⑦] 천화(天火) – 왕진캉1 2018.01.08 1296
해망재 Uninstall 2018.01.01 579
곽재식 멧돼지의 어깨 두드리기4 2018.01.01 1217
곽재식 기억 밖으로 도주하기 2017.12.01 938
윤여경 코퍼레이션 2017.12.01 613
곽재식 종속선언서2 2017.10.31 3128
해외 단편 [초청 중국SF단편 ⑤] 우주표 담배 – 텅예2 2017.10.31 1624
해외 단편 고독한 자들 – 주디스 메릴 2017.10.31 489
해외 단편 [초청 중국SF단편 ⑥] 탈피 – 자오하이홍2 2017.10.31 857
윤여경 2야기 –인류를 단숨에 멸망시킬 가짜 뉴스 생성 방법–1 2017.10.31 755
해망재 블러디, 블러디 2017.10.31 381
해망재 불법 개조 가이노이드 성기 절단 사건1 2017.09.30 802
해외 단편 [초청 중국SF단편 ④] 인류의 여신 G – 천츄판3 2017.09.30 1240
해외 단편 [초청 중국SF단편 ③] 지하철의 충격 – 한송3 2017.09.29 1853
jxk160 P... 로부터의 편지2 2017.09.28 317
곽재식 종말 안내문11 2017.09.27 1340
Prev 1 2 3 4 5 6 7 8 9 10 ... 37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