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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바벨의 도시 上, 정지원

2008.09.26 23:4109.26





lunaticsun@msn.com비정한 도시, 캐피탈

[바벨의 도시]라는 제목에서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미지다. 예쁜 하늘색의 표지를 넘겨보기도 전에 인간의 죄악과 탐욕으로 들끓는, 그야말로 타락한 도시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예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바벨’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다름 아닌 혼란이다. 아니나 다를까, 작품의 배경이 되는 캐피탈은 천사와 악마, 신성과 역도(逆徒), 귀족과 빈민이 공존하는 온갖 욕망의 집합소이다. 교황과 귀족이라는 특권계층이 살아있고, 천사와 악마가 출몰하여 서로를 물어뜯는 와중에 헌터들이 가세해 총알을 날리고, 반쯤 사이보그라고 할 수 있는 인간들이 버젓이 걸어 다니는 한편에서는 쓰레기를 줍고 장기를 내다 파는 빈민들이 살고 있는 이 도시를 혼란이라는 말 외에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작가는 에피소드마다 캐피탈의 구석구석으로 시선을 옮겨가며―――가끔은 천국과 지옥도 왕래해가며―――이 뒤죽박죽인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여러 인물들의 사연을 파헤친다. 그러나 현실과 판타지, SF, 신화의 일부가 혼재하는 뒤죽박죽인 세계관의 면면을 접해도 독자의 머릿속은 쓸데없이 복잡해지거나 하진 않는다. 어떤 면에서 현실과 비슷하기도 한 캐피탈은 참으로 편리하다. 모든 것이 있는 이 도시에는 단 하나, 선과 악의 구별이 없다. 악마도 가끔은 변덕에서 우러나오는 선행을 베풀 수 있고, 그 아름답고 순결하다는 천사마저도 죄 없고 애처로운 자의 기도를 저버리고 인간의 어리석은 소망을 이용하는 이 비정한 세계에서는 신조차도 한없이 선하지는 않을 것이다. 넘쳐나는 욕망으로 살아있듯 꿈틀거리는 이 바벨의 도시는 그 존재만으로도 이어지는 어떤 에피소드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래서일까,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조리 캐피탈에 잡아먹혀버린 것 같은 기분은.

   아쉬운 캐릭터

   라이트 노벨 전반을 가리켜 캐릭터 소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라이트 노벨이 캐릭터의 매력과 개성에 어느 정도 의존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바벨의 도시]는 라이트 노벨을 표방하는 작품치고는 드물게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성이 약하다. 특히 주인공이 인상적이지 못하다는 점이 아쉽다. 얼떨결에 순진한 얼굴의 대천사에게 속아 심장을 빼앗기고 종이 되는 수모를 겪는 악마 세이린과 사랑하는 아내를 지옥에서 만나기 위해 그와 계약한 헌터 센이 중심인물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매 회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는 옴니버스 형식이기 때문에 이들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주인공은 아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도시의 장소가 바뀌고 새로운 등장인물이 출현하는 와중에도 여러 에피소드 중간에 틈틈이 얼굴을 내비치기는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아직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프롤로그에서 세이린이 미카엘의 종이 되는 사연을 소개해준 것을 제외하고 다른 에피소드에서 이들의 과거는 대화의 양념 정도로나 쓰일 뿐이다. 게다가 주인공의 과거가 그의 성격에 미친 영향이 지나치게 미미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책을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천사의 심장에 칼을 박아 주겠다고 독기 어린 눈으로 맹세하던 어린 악마는 어디 가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장난에 응해주는 쿨한 여악마가 서 있으니, 아무리 수백 년이 흘렀다는 설정이지만 그새 심하게 풍화된 감정에 약간은 허탈해질 수밖에 없다. 작가가 그때그때의 에피소드에서만큼은 특정 인물의 이야기에 집중력을 할애하기 때문일까, 이야기가 분산된 주인공들보다는 오히려 레린느나 아담, 레지나 같은 주변인물이 (캐릭터의 매력과는 별개로) 흥미롭게 다가온다. 어차피 옴니버스 형식이라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도 상관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주인공인데 (전체 이야기가 상, 중, 하로 기획된 것인지 상, 하로 끝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작품의 거의 절반쯤 온 시점에서 아직도 캐릭터가 희미하다는 것은 단점이 아닐 수 없다. 아쉬움을 느끼는 나와 같은 독자를 위해서라도 후의 에피소드에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아낌없이 풀어놓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리고 로맨스

 작가는 언제나 자신의 작품을 관통하는 원류로 로맨스를 든다. 그러나 거울에 올라온 그의 다른 단편들을 이미 읽어본 이들이라면, 그리고 캐피탈이 지니고 있는 어두운 이미지를 생각해본다면 [바벨의 도시]에서 나타나는 ‘로맨스’가 통속적인 의미의 달콤한 사랑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차라리 애증, 집착, 질투, 기만의 혼재라는 말이 어울리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그려지고 있다. 개중 가장 ‘로맨틱’한 {다섯 번째 지옥의 연인}이나 나름대로 순애(純愛)에 가까운 커플이 등장하여 해피엔딩을 이뤄내는 {죄악이라는 이름의 자비}와 같은 에피소드도 있긴 하지만,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로맨스가 대체 무엇인지―――‘어떤 것인지’는 어렴풋이나마 눈치로 알 수 있겠으나―――독자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그의 작품 안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의 로맨스에는 어떤 의도라는 것이 없고 순수한 감정들만 살아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질 수 있는 감정의 어두운 면까지도 포용하고 싶은 듯하다. 그 이름에서 빛과 어둠을 모두 걷어치운 가장 원초적인 밑바닥에는 절실한 욕망이 존재한다. 자신이 깨닫든 그렇지 못하든 작중인물들로 하여금 인간이 아닌 존재와 계약하고, 희생하고, 도망치고, 부수게 만드는 것은 의도가 아닌 욕망이다.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고, 로맨스라고 부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눈가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결국 ‘바벨의 도시’ 캐피탈이 상징하고 있는 혼란과 욕망, 모든 것이 뒤섞여있음과 통하는 구석이 있다. 후기에서 작가는 세이린과 미카엘이라는 캐릭터가 탄생한 후에 캐피탈을 구상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어쩌면 캐피탈은 이미 그 전부터 부정형으로나마 존재해왔을지도 모르겠다.

   뱀발

   냉소적인 시각과 그리 밝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전개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읽는 경험은 즐겁기만 하다. 특출하게 개성적인 세계관은 아니지만 강렬한 상징성을 지닌 캐피탈과 그 안에서 풀려나온 다양한 거주자들의 사연은 때론 부드럽게, 때론 날카롭게 들어와 박힌다. 아직도 이 도시에는 무궁한 에피소드가 잠자고 있을 것이고, 곧 나머지도 만나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가슴이 설렌다. 현재 진행형인 작품을 가지고 리뷰를 쓴다는 것이 조금은 조심스럽기도 했지만 이 기회에 리뷰의 형식을 빌려 작가에게 다음 편에 대한 격려와 기대를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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