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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

2008.07.25 23:1607.25





starrisener@gmail.com

   - 쓸데없이 긴 서론

   글을 쓰기 전에 약간 고민을 했다. 좋은 얘기만 써야 할까. 아니면 내 맘대로 써야 할까. 순수 문학계에는 ‘주례사 비평’이란 용어가 있다. ‘주례사 비평’이란, 결혼식 때만 되면 아무리 망나니라도 건전한 청년이 되는 것처럼, 기사나 문학 잡지 비평을 무조건 좋게 써주는 일을 말한다. 글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워낙 책이 안 팔리다 보니 글의 수준이 낮아도 낮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한국 영화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한국 영화가 잘 될 때는 영화 잡지에 악평을 싣자마자 그 영화의 홍보부에서 연락이 온다. 하지만 지금처럼 한국 영화가 죽을 쑤고 있을 때는 기사 작성자가 자신의 밥줄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어차피 한국 영화가 망하면 잡지도 안 팔리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영화 수준이 어떻든 간에 일단 한 명이라도 더 보게 하는 것이 영화사에게나 기자에게나 이익이다.

   게다가 기자도 어차피 업계인이라는 점도 한 몫한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다. 나중에 영화 시사회나 제작 발표회 때 또 만나게 될 사람들인데, 나쁜 평을 써서 기분 상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문학계는 더욱 좁아서 같이 술이나 마시러 몰려다니는 사람들이니 더 말해 무엇 하랴. 구멍 가게에서 서로 욕해봤자 누워서 침 뱉는 것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는 업계인도 아니고, 이런 글을 써서 책이 한 권 더 팔릴 일도 덜 팔릴 일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글을 쓸 때도 옛 선비들처럼 도의적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런 종류의 생각은 그냥 자의식 과잉인 경우가 많다. 애초에 인터넷에 올라온 글은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많은 사람이 보지 않는다. 그리고 건전한 이성을 가진 독자라면 깊게 신뢰하지도 않는다(물론 언제나 건전한 이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때문에 나는 언제나 글을 쓸 때마다 약간 고민을 하지만 그때뿐이다. 그냥 내 맘대로 쓴다. 그것이 후회가 남지 않는 일이다. 학점? 평판? 교수의 생각? 이미지? 체면? 그게 다 무어란 말인가. 내가 만족할 수 있다면 그건 좋은 글이다.

   그렇다면 이 글이 잘못되었을 가능성, 그것은 어찌할 것이냐란 의문이 생긴다. 내가 오독해서 근거 없는 얘기를 마구 써놨을 경우에는 어찌하냐는 것이다. 그럴 때에는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내가 만약 올바른 이야기를 써놨다면, 아무리 수위가 높은 표현이 오간다 해도 걱정이 없다. 내가 그른 이야기를 써놨다 해도, 그것은 나의 무식함을 증명할 뿐이지 책의 수준을 판정하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독자를 믿는다. 내가 틀렸다면 댓글로 무자비하게 지적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것이 인터넷의 유일한 순기능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얘기를 마구 믿는 건 양식있는 현대인이 취해야 할 삶의 태도가 아니다(그러나 최근에는 양식있는 현대인이 멸종하고 말았다).



   - 의미 없이 이어지는 본론

   책을 펴자마자 맨 처음 보게 되는 단편은 김이환씨의 {미소녀 대통령}이다. 이 작품은 아이디어는 좋지만 완성도는 떨어지는 용두사미격의 글이다. 그러나 초반에는 매우 유쾌하고, 아이디어는 신선하며, 세계관은 매력적이다.

   연예인을 등장인물로 채용하는 것, 말하는 동물 같은 요소가 그의 신작 [양말 줍는 소년]으로 이어지는 걸 보면, 이 단편의 세계가 발전하여 [양말 줍는 소년]이 된 것 같다([양말 줍는 소년]을 읽어보지 않고 인터넷 서평만 보고 쓰는 거라 확실하지 않다. 독자가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길 바란다). 나는 김이환씨의 전작 [에비터젠의 유령]이 너무 수준 이하의 작품이라서 읽다가 던져버린 적이 있다. 하지만 {미소녀 대통령}을 보니 이 정도 세계관이라면 그의 신작 [양말을 줍는 소년]은 기대할만한 작품인 것 같다.

   [미소녀 대통령]의 후반부가 단순히 주인공의 독백으로만 처리된다는 점은 매우 실망스런 부분이다. 보통 설익은 작가들은 아이디어만 앞선 나머지 ‘보여주기’보다는 설명하는 걸 더 즐긴다. 그러나 소설이란 양식은 음식점에서처럼 완성품을 제시하는 것이지, 독자의 입을 벌린 다음에 자신이 씹어서 먹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롤리타의 강림’이라든가 세계를 구하다가 병들어 누워 있는 소녀의 이미지, 갑자기 거대 로봇을 타게 된 소년, 가시적인 이유 없이 출현하는 괴물은 가이낙스의 애니 [에반게리온]을 떠올리게 한다. ‘세컨드 임팩트’, 신지, 레이, 사도와 다를 게 없다. 작가는 이 점을 눈채챘어야 한다. 만약 작가가 의도적으로 오마쥬나 패러디를 시도했던 것이라면 그 시도는 실패했다. 창작인지 모방인지 구분할 수 있는 힌트가 전혀 없었다. 특히 ‘모빌 수트’ 개념을 연상하게 하는 로보트 조종 매커니즘 설명 부분은 [건담]의 그림자 안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건담의 애니메이터이기도 했던 ‘안노 히데아키’의 오마주를 2차적으로 답습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건담] 이후로 너무나 흔해진 설정을 그저 생각없이 적은 것인지 모르겠다. 좀 더 세밀하게 각 요소들을 조율했어야 한다. 독자는 바보가 아니다(대중 문화적 요소를 연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곽재식씨의 {콘도르 날개}가 훌륭한 전범이 되어주고 있다. 독자들은 참고 바란다).

   이 단편은 후에 작가가 장편으로 개작했다고 한다. 현재 그의 개인 홈페이지(grovenor.cafe24.com)에서 감상할 수 있다.



   수학 선생님이기도 한 김주영씨의 {크레바스 보험사}는 그가 황금드래곤 문학상 수상자라는 이력을 감안하고 본다면 적잖이 실망스럽다. 작중의 인물은 계속해서 자신의 불행을 ‘보험 계약’과 관련짓는다. 아무 이유도 없이! 물론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작가가 관심을 가질 만한 이유―――내용상 ‘보험 계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작가의 계산―――이지 독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아니다. 독자로 하여금 관심을 가지게 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미끼를 던져야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쓰는 건 얄팍한 수다.

   “어쩌면 보험에 든 탓인지도 몰라.” 영현은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을 갖다 붙였다.
   “이 보험사 전화를 받은 뒤부터 계속 재수 없는 일이 생기잖아.” 영현은 그렇게 죄책감과 책임을 전가했다. 그러자 마치 말에 마법이 붙은 것처럼 그 보험사가 모든 재수 없는 일의 원인이 되었다.


   작가가 개입해서 사건을 조작하는 모습을 ‘작위적’이라고 한다. 독자의 이해력 혹은 눈치를 너무 낮게 본 게 아닌가 싶다. 이와 유사한 실수는 이수현씨도 하고 있다.

   {크레바스 보험사}는 정작 일을 벌여 놓고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신비한 일이 있다. 설명한다. 그리고 끝이다. 판타지는 언제나 새로운 세계에 맞는 특수한 법칙을 제시하곤 한다. 그리고 그 법칙은 소설의 룰을 어기지 않는 방식으로 반드시 깨져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서사가 생겨나고 독자는 재미를 느낀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그런 선택이 특수한 효과를 자아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다. 안타깝게도 {크레바스 보험사}는 시작하자마자 끝나버렸다.



   정소연씨의 {마산 앞바다}는 흥미로운 단편이다. 이 작품으로 정소연씨는 서울대 대학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배명훈씨 또한 학창 시절에 이 상을 수상했다니 기묘한 일치가 더욱 재밌다(이수현씨도 동문으로 알고 있다). 애매하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장점일 수 있겠으나 또한 단점이기도 하다. 모호한 분위기를 자세한 상황 묘사를 생략함으로써 이루어냈는데, 안타깝게도 정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독자가 파악할 수 없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때문에 나는 2번 읽고 나서야 작품의 전체적인 양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내 이해력이 무척 부족한지도 모르겠다.

   다 읽고 나서도 남는 찜찜함은 혹자에게는 여운일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단순한 불명료함일 뿐이었다. 나는 아직도 ‘림보’가 관광 상품이 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죽음은 대개 사람들에게 불쾌하게 여겨지는 성가신 존재다. 작품 내에서도 ‘징그럽다’는 표현으로 림보는 표현되고 있는데, 어째서 그 주위에서 아시안 게임까지 열려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일상적인 환상을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다. 작가가 번역서 선택(장애인을 다룬 SF)에서 보여준 소수자에 대한 관심도 적절한 수준에서 버무려졌다. 그러나 동성애란 소재의 울림이 너무 강해서 ‘림보’란 소재를 먹어 들어가고 있는 느낌도 있다. 독자가 처음 읽을 때는 과연 ‘림보’가 무엇인지 파악하기에도 바쁜데, 동성애까지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좀 힘겹지 않을까.



   박애진씨의 {문신}은 작품집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차세계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솔직히 나는 이 작품에서 안도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판타지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려고 관습적이지 않은 작품들을 선정한 것은 좋다. 그렇지만 작품집이 너무 백면서생 같은 분위기가 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배명훈씨의 {초록연필}이나 {미소녀 대통령}, {콘도르 날개}가 유쾌한 양념을 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다.

   {문신}은 죄를 지으면 그만큼 몸에 문신을 새기는 것으로 형벌을 대신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이 세계를 여행한 후 여행기를 작성해서 먹고 산다. 아무리 봐도 이 여행가란 직업은 작가의 비유로 읽힌다. 여행가가 새로운 세계에 탐닉하는 것은 작가가 새로운 소재를 갈구하는 것과 유사하다. 결국에는 여행가의 필력에 의해 성패가 결정된다는 서술은 내 추측을 확신으로 바꾸는 부분이다. 결론을 내리는 부분이 너무 설명조이긴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단편이다.



   백서현씨의 {윌리엄 준 씨의 보고서}는 요정 이야기의 현대적 답습이다. 이야기 전개가 너무 느리고 지루하다. 좀 더 압축적으로 쓸 수 있는 이야기인데 굳이 이렇게 질질 끈 이유를 모르겠다. 요정 이야기처럼 너무나 많이 알려진 형식을 쓸 때는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독자가 처음부터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제시하고 싶다면 그것을 깰 수 있는 패를 준비해야 한다. 작가 생각에는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였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 패는 겨우 투페어였다.  

   굳이 영국이 배경인 이유도 모르겠다. 요정은 영국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요정 이야기는 프랑스나 독일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게다가 영국을 미국으로 바꾼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이야기다.



   이수현씨의 {서로 가다}는 작가의 성실한 사전 조사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13, 14세기의 세계가 손에 잡힐 듯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배경에 서사가 압도당했다. 이야기 자체는 별 것이 없고 억지가 강하다. 치밀하게 구성된 가상의 세계일주에 들인 공력에 비해 이야기에는 얼마나 신경 썼는지 의문이 든다.

   주인공은 분명히 처음에는 인도로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것이 ‘흰 섬’―――그린란드로 변경되는지 이해되질 않는다. 그것은 작품의 내적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다. 주인공은 갑자기 그린란드가 서쪽에 있다는 이유에서 그곳이 서방정토라고 주장한다. 오랜 노예 생활 때문에 미친 거라면 미쳤다는 서술이나 묘사를 해주어야 한다.

   흰 섬. 관세음보살이 있다는 보타락가산. 관세음보살의 아버지 아미타불이 다스리는 서방정토.

   그러나 서방정토는 인도인들의 방위/시간관에서 유래한 용어다. 인도인의 내세來世의 방위는 해가 지는 쪽인 서쪽이다. 그들에게 동東은 과거이고 서西는 미래이다. 때문에 죽으면 서쪽으로 간다는 의미에서 서방정토라고 한 것이고 이건 우리나라의 북망산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중국에 북망산이란 지명이 정말로 있긴 하지만, 한국 사람이 죽으면 중국에 가서 산다는 얘기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말로 서쪽에 정토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주인공은 부유한 상인의 자식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인물인데 상상속의 방위와 실제 방위를 혼동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또한 보타락가산은 상상 속의 공간이긴 하지만, 인도에서나 중국에서는 실재하는 섬이나 산을 보타락가산으로 지명한 후 그곳에서 관세음보살을 숭배했다. 심지어 우리 나라에서도 낙산사라는 절을 지었는데, 이 ‘낙산洛山’이란 것이 바로 보타락가산이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주인공이 ‘서’라는 방위에만 집착했다고 해도 인도에 가는 게 맞다. 지금이야 서양이라고 하면 유럽을 떠올리지만, 14세기의 유럽이란 미개한 족속들이 사는 뒤처진 땅이었다. 중국인이 관심을 가질만한 서쪽의 땅은 당연히 중앙 아시아 지방과 인도였다. 이것은 서양인이 오리엔트라고 하면 중앙 아시아나 인도를 떠올리지 동북 아시아를 떠올리지는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더군다나 불교가 인도에서 전래하였다는 것을 독실한 불교 신자를 유모로 둔 주인공이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여행가들을 친구로 뒀기에 세계 사정에 비교적 밝은 사람이기까지 하다.

   마지막에 주인공의 지친 영혼이 앙코르 톰으로 돌아가는 부분은 너무 뜬금 없다. 앙코르 톰은 이미 주인공이 실망한 공간이다. 다음 문장을 보면 마치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공간이동을 했다는 식이다.

   (전략) 혹은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은 왜 그에게 굳이 생의 끝에 몇 시간의 유예를 주어 이것을 보여 준 것일까.

   관세음보살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도 되는가. 만약 고대 소설 식의 결말을 의도한 거라면 처음부터 힌트를 줬어야 했다. 마치 역사 소설인 것처럼 ‘필자’를 내세워 기술해 놓고, 나중에 가서는 단순히 환상적인 부분 하나를 달랑 첨가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서양에서는 ‘동’이 신비스러운 방위로 여겨졌다. 미지의 장소이며 마법이 살아 있는 곳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톨킨에게는 ‘서’가 중요한 방위였다. 엘프들은 회색 항구에서 발리노르로 떠난다. 동쪽은 악마인 사우론이 지배하는 땅이다. 작가가 동쪽 대신 서쪽을 선택한 이유가 단순히 역오리엔탈리즘인지, 아니면 톨킨의 영향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서로 가다}에서 ‘서’란 방위가 가진 문화적 함의가 충분하게 고려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작품의 대사나 서술을 보면 이러한 비약에 대해 변명을 하는 듯한 부분이 여럿 보인다. 하지만 작가가 작품의 단점을 알고 있고 변명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감추어지거나 상쇄되지는 않는다. 해결책은 아예 비약하는 부분을 삭제하거나 그것을 상쇄할만한 적당한 카드를 준비해야 한다. 정신 이상이라면 주인공의 정신 이상을 묘사해야지 알 수 없다, 모르겠다고 서술해봤자 소용 없다. 그런다고 해서 신비스럽거나 환상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은 아니다. 기법이나 서술의 모호함과 환상은 구분되어야만 한다.

   신비스런 공간에 대한 비이성적인 동경을 다룬 작품으로는 [톨킨의 환상 서가](윌리엄 모리스 외 지음/더글러스 A. 앤더슨 엮음/김정미 옮김, 황금가지, 2005년 5월)에 실린 존 버컨의 {머나먼 제도}가 일독할 만하다. 혈통에서 기인하는 신비한 공간에 대한 충동이 어떻게 한 인간의 생을 잠식하는지를 알 수 있는 훌륭한 전범이다.



   은림씨의 {할머니 나무}는 황금드래곤 문학상 수상작 답게 탄탄한 기본기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문장도 나름대로 안정되어 있고 이야기 진행도 유려하다. 구성의 묘도 적절하게 살렸다. 여성성을 나무를 통해 긍정한다는 아이디어도 매우 좋다. 약간 심심한 것이 좀 흠이다.



   배명훈씨의 {초록연필}. 이건 여러 소리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 여러분은 이제야 한 명의 제대로 된 SF 작가를 얻었다. 지금까지 듀나 말고는 한국에 SF 작가가 없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이제 배명훈이 있다.

   일단 읽어 보라.



   곽재식씨의 {콘도르 날개}는 작가의 개인적 취향이 반영된 유쾌한 작품이다. 한국의 B급 영화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환상문학웹진 거울에 게재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독자들이 직접 읽고 어떤 쪽이 더 나은지 판단하길 바란다. 재귀 소설로서도 구색을 갖추었다. 올드 게이머라면 웃음을 지을만한 숨은 그림 찾기도 몇 개 있다.



   마지막 단편인 김보영씨의 {몽중몽}은 환상 문학이란 이름에 걸맞은 몽환적인 작품이다. {몽중몽}의 변용에 관한 이미지는 젤라즈니의 단편 {사랑은 허수}나 앰버 연대기에서 그림자 세계를 걷는 부분을 연상하게 한다. 읽을수록 독자를 몽롱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이 단편집에 어울리는 가장 적절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몽중몽}은 모호함이 어떻게 환상과 연계되는지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소설이다.



   - 차마 내릴 수 없는 결론

   전체적으로 평가하자면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은 뒤표지에 나온 것처럼 “한국 환상 문학의 놀라운 도약!”이라고까지 칭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다. 내가 황금가지나 환상문학웹진 거울에 대해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런 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선집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보여주는 주목할만한 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배명훈씨는 이번에도 멋진 솜씨를 보여줬다. 배명훈씨의 개인 단편집이 조만간 나오기를 기대한다. 김이환씨나 정소연씨, 은림씨도 주목할 만하다(박애진씨도^^).

   하지만 이것저것 상을 받은 작가들이나 정식 지면을 통해 소개된 작가들조차 아직은 읽을 만한 작품을 쓰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문장이 너무 맛없다. 단순히 맞춤법을 틀리지 않거나 번역투를 벗어나는 정도에만 그친다. 글을 읽는 재미가 부족하다. 이야기나 구조도 치밀하지 못하다. 단순히 환상적인 이야기를 창작하고 있다는 선에서 만족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이 소설을 쓰고 있고 그 소설은 ‘끝내줘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지루하다. 독자의 감정선을 거의 건드리지 못한다. 공포, 희열, 분노, 슬픔, 놀람.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애초에 그러고자 하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는다. 단편에 필수적인 반전(물리적이거나 논리적이거나)도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국내에 들어온 장르 문학은 이상하게도 너무나 지성적인(?) 작품들이 많고, 19세기나 20세기 중반의 먼지 쌓인 작품들만 많이 소개되었다. 국내 창작 분야에서는 반대로 저열한 활극 수준의 작품이 판을 치는 바람에 이 두 가지 흐름이 부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 듯하다. 작가들이 개인적인 취향과 대중적인 재미 사이에서 멋진 접점을 찾아내기를 기원한다.

   이 선집은 앞으로 한국의 환상 문학계를 견인할 ‘도약대’가 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이 선집에 작품을 수록한 작가들의 이름을 기억해 두시라.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한국 문학의 기수가 될 사람이 나올 테니까.
댓글 13
  • No Profile
    as 08.07.26 00:16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꽤 있지만 그건 굳이 반론할 문제가 아니고, 읽다가 든 의문.

    '한국에 SF작가는 듀나밖에 없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배명훈이 있다'는 부분이 걸리는데요. 아, 물론 초록연필이 일단 읽어보라는 말을 들을 만한 작품이라는 데에는 동의하고. 그거랑 별개로요.

    대체 '한국에 SF작가는 듀나밖에 없다'는 말을 누가 했는지 혹시 아십니까? 전부터 궁금했거든요. 누가 한 말인지. 제가 보기에 이 말에 적절한/처음 나왔을 법한 배경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책을 내는 SF작가는'이라고 봅니다만, 흔히들 '제대로 된 SF를 쓰는 작가'처럼 쓰시더군요. 지금 리뷰에서도 그런 맥락으로 쓰였고요.

    그러고보니 쓰신 문장을 처음 봤을 때는 그 말에 동의하시는구나 했는데(그러니까 '듀나밖에 없었지만 이제 배명훈을 추가!'로 읽혔지요), 다시 보니 좀 애매하네요. 굳이 - 말이 있었지만, 이라고 쓰신 건...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런 말이 있다는 뜻인지?
  • No Profile
    08.07.26 00:38 댓글 수정 삭제
    저도 물론 듀나 이전에 sf 작가가 없었다거나, 배명훈씨 이전에 sf 작가가 듀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과학 기술 창작 문예 1회 단편 분야 수상자인, [레디 메이드 보살]의 박성환씨라거나, 중편 부문 수상자인 [촉각의 경험]의 김보영씨는 2회 수상자인 배명훈씨보다 못한 분들이 아니지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과학 동아]에 신선한 sf 엽편을 연재하시고, [신이 되고 싶은 컴퓨터]로 작품집을 묶어 내신 이한음씨 같은 분,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오랫동안 충실한 sf 독자이자 약간은 나태한 작가였던 복거일씨 같은 분들이 있음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듀나가 순수문학계와 영화 평론 분야에서 이름이 약간 알려진 관계로 그가 매우 유명한 것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여러가지 오해가 발생할 여지가 있지요.

    [한국에 sf 작가는 듀나 밖에 없었지만]이 아니라 [듀나 말고는 한국에 sf 작가가 없다는 얘기가 있었지만]이라고 적은 것은, 이러한 오해를 그대로 받아 적은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줄로 요약하자면, 저 또한 [한국에 sf작가는 듀나 밖에 없다]는 표현에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실 개인적 취향을 얘기하자면, 배명훈씨가 최고입니다.)
  • No Profile
    as 08.07.26 02:07 댓글 수정 삭제
    그러니까 [SF 작가는 듀나밖에 없다는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은 작가]라고 말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 No Profile
    08.07.26 02:17 댓글 수정 삭제
    허허 거기까지 가는 건 독자의 몫이지 글쓴이의 몫은 아니죠.

    하지만 비오는 밤이니 단순하게 말하겠습니다. 예.
  • No Profile
    fenner7 08.07.26 06:38 댓글 수정 삭제
    마산 앞바다-는 이야기가 그리움에서 상처가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 까지는 멋졌지만, 그 상처가 동성연애 였다는 것은 단편 안의 플롯으로 다소 버거운 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림보의 징그럽다와 아시안 게임의 개최 차이는.... 림보의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여러가지 반응과 관심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운, 죽은 사람을 보여주는 존재에 관해 사람들이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건 어떤 모양일까요. 작가가 설명하지 않음으로서 독자에게 열어 놓은 것들을 일부 알아보지 못한 독자가 있다고 해서 그게 이상하거나 미흡한 점이 될 수는 없지요.
  • No Profile
    as 08.07.26 09:36 댓글 수정 삭제
    소설도 아니고 리뷰에서 이게 '글쓴이의 몫은 아니'라고 잘라말할 수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 No Profile
    08.07.26 12:51 댓글 수정 삭제
    하하 저도 두 분 말씀에 동감입니다. 제가 쓴 건 소설이 아니고, 마산 앞바다는 불친절하지만 그 불친절함은 의도된 것이며 상당히 매력적이죠.

    하지만 마산 앞바다의 경우 만약 림보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견차를 그리려고 했다면, 결코 아시안 게임이 열릴 수는 없죠. 왜냐하면 아시안 게임이 열리려면 사람들의 의견 수렴이 엄청나게 광범위한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기름 유출 당시 태안에서 아시안 게임이 개최될 수 없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죠.

    이건 뭐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 생각이고, 이것에 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 있겠으나, 만약 정말로 림보에 대한 의견차를 그리려고 했으면, 림보 찬성론자와 반대론자가 등장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단편은 워낙 애매모호하고, 림보가 뭔지도 잘 모르겠는지라, 과연 그것이 현실이긴 한 건지, 이런 종류의 설명 부족 내지는 모호함이 과연 단점인지 장점인지조차 명확하게 알아 볼 수 없다는

    심각한 단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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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소연 08.07.26 14:14 댓글 수정 삭제
    이미 쓴 글에 대해서는 말을 아껴야겠지만, 아시안 게임에 대해서는 본문애 분히 언급이 되어 있는 부분이므로 굳이 거듭 쓰겠습니다.

    림보는 (본문에 반복해서 언급되듯이) '근처에 있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생체에너지가 반응하여'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림보를 유지하는 것은 결국 살아 있는 사람들이고', '아시안 게임을 굳이 마산에서 연 것도 그래서'입니다. 마산은 림보를 유지하기 위해서 '유별난 세제 혜택이 제공되고', '아시안 게임'과 같은 거대한 생체 에너지를 끍어들일 행사를 개최하는 일종의 관광 도시인 셈이지요.

    만약 죽은 사람을 그 얼굴만이라도 다시 볼 수 있는 공간이 자연적으로 존재한다면, 살다가 지인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 중에 그런 곳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꽤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림보가 수천 년 동안 존재해 왔더라도, 죽음의 가시성이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살을 맞대고 살아가던 사람의 완전한 물리적 소멸(죽음)의 무게를 없애지는 못할 테니까요. 오히려 그 차이가 죽음의 무게를 더 크게 만들 수도 있고요. 이 부분 그야말로 열린 부분이고, 죽음에 대한 경험의 정도와 반응의 다양성에 따라 달라질 영역이지만,

    림보가 무엇인지와 왜 아시안게임이 게최되었는지는 본문 중에 분명히 나와 있는 분이기에 굳이 부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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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07.26 17:42 댓글 수정 삭제

    아, 그렇군요. 어차피 소설의 설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것을 두고 왈가왈부 해봤자 효율성이 떨어지겠지요. 제가 림보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것은, 마치 작품내에서 림보란 현상이 주관적인 현상처럼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혹은 그렇게 그려졌다고 제가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즉 한 명의 인간이 볼 수 있는 림보의 형상은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사람이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관광객들이 림보에 갈 경우 각각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죽은 이의 얼굴을 볼 수밖에 없는 거죠. 림보는 주관적인 인식 현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생체 에너지]란 것은 매우 모호한 개념이긴 하지만, 바로 그 개인의 생체 에너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A란 사람이 림보를 방문할 경우 그 사람이 보는 림보의 광경은 A의 생체 에너지로 인해 구현된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저는 이 [생체 에너지]라는 것을 기억과 결합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에너지라고 생각한 것이지, 전기나 원자력처럼 객관적인 에너지라고 생각하지를 않은 겁니다.

    그러나 작품 내에서 과연 이 [생체에너지]가 주관적인 에너지인지, 아니면 객관적인 에너지인지 설명이 되어 있지 않고, 또한 림보란 현상이 주관적인 현상이기에 개개인에게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안 게임을 동력원으로 사용해서 관광지화한다는 것은, [림보]에 대해 주관적으로 생각했던 제 이미지와 주관적인 현상으로 묘사되고 있는 림보와는 동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어이쿠 글로 쓰려니까 힘들군요.


    자, 만약 [림보]가 객관적인 현상 - 모든 이에게 동일한 결과를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곳에 나타나는 죽은 이의 형상은 60억을 넘겠죠. 죽은 이들로 가득찬 바다라, 그것도 정말 멋진 일이겠지만 마산 앞바다는 그러기에는 너무 좁군요. 게다가 림보를 티비로 중계하더라도 그대로 나타날 겁니다. 과연 어떻게 될까요. 림보를 카메라로 찍으면. 아마 그냥 물이 찍히겠죠.

    림보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라고 이해했습니다.)

    1. 생체 에너지 - 그것이 전기 같은 것이든 영적인 힘이든 간에.
    2. 관찰자의 기억.

    그렇다면 어째서 아시안 게임이 필요한가. 아, 림보가 엄청난 생체 에너지 동력을 필요로 할 가능성이 있군요. 하지만 그런 설명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시안 게임이 열릴 정도로 마산은 엄청난 관광 도시인가. 세제 혜택을 받는다, 입장료를 받는다, 수학 여행을 간다, 이 정도로는 아시안 게임이 열려야 할 정도의 관광 도시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실제로 통계 수치를 따져보면 다르겠죠. 하지만 한국의 경우 1986년 아시안 게임은 서울에서 열렸고, 2002년 아시안 게임은 부산에서 열렸으며, 2014년 아시안 게임은 인천에서 열릴 겁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를 봐도 아시안 게임 같은 게 열리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건 수도이거나(서울), 수도에 맞먹거나(부산, 인천)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마산이 과연 수도이거나 수도에 맞먹는 도시로 소설에서 묘사되었느냐. 하면, 마산 앞바다는 너무 모호했기 때문에 제 판단으로는 아시안 게임이 열릴 정도로 유명하거나 무게 있는 도시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림보가 과연 마산을 서울이나 부산에 맞먹는 도시로 만들었을 것인가. 수학여행은 경주로도 갑니다. 하지만 경주에서 아시안 게임이 열릴 일은 없죠. 단순히 관광지라고 해서 아시안 게임이 열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림보가 그렇게 대단한 곳이란 말인가. 그런데 어째서 작품 마지막에서 지원이는 수학여행을 갔는데도 림보를 보지 않았는가. 지원이는 어려서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많이 보지 못할 것이기에 가도 별 게 없었을 가능성이 많죠. 즉 림보는 관광지가 될 가능성이 있으나, 중장년층 이상의 죽을 때가 다 가까운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는 공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대개 관광은 어린이나 청소년 특히 죽음과는 거의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20~30대가 많이 가는데, 그들에게 죽은 사람을 볼 수 있는 공간은 매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60대 이상이 효도 관광을 가는 것은 어떠한가. 글쎄요. 개인차가 있겠지만, 저라고 해도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을 부모님에게 "죽은 사람 얼굴 좀 보고 오세요."라고 하면서 관광을 보내드릴 것 같지는 않군요. 물론 보고 싶은 사람도 있겠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얼마나 있을 것인가. 그건 소설 속의 이야기니까 알 수 없는 이야기고, 그렇게 따지고 들어가봐야 나올 것도 없죠. 그래서 애매한 겁니다. 아시안 게임이란 구체적 사실을 적시했음에도 아시안 게임이 열리게 할만큼 대단한 현상 자체는 매우 애매한 모습입니다.

    은경이 어머니만 해도 남편이 죽자 이사를 가려고 했고, 반대로 은경이는 남기로 했죠. (물론 근처로 이사 가기는 했습니다만.) 죽음은 대개 일반적으로 불쾌한 것이고, 아시안 게임이 열리려면 소설의 세계에서 죽음이 전혀 불쾌한 것이 아닌 것으로 묘사되어야 하며, 적어도 은경이 어머니 같은 사람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로 그려져야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작품에서 서술된 반응은 반반이죠. 이래서야 관광지는 될 수 있겠으나 아시안 게임 같은 거대한 행사를 유치할 정도는 안 되죠.

    관광지는 될 수 있습니다. 림보를 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안 게임을 개최할 정도로 거대한 관광도시가 되려면 죽음에 대한 감상적인 취향보다는 훨씬 더 구조적인 것인 필요합니다. 도시 인프라라거나 인구 수, 도시의 역사적 가치, 동아시아에서의 지리적 위치 같은 것 말이죠.

    그리고 아시안 게임은 단기간에만 한정된 행사인데, 과연 이 에너지는 축적되는 것인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날라 갈 에너지라면 굳이 사람들을 단기간에만 끌어모을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물론 축구 경기장이 있다면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모이겠죠. 여기서 다시 알 수 없는 것은 과연 이 생체에너지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범위는 어디인가. 킬로미터로 따져서 얼마나 가까워야 림보에 영향을 줄 수 있느냐도 전혀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 제반 사항 없이 단순히 사람이 많으면 생체 에너지가 많고 생체 에너지가 많으면 림보가 활성화된다고 이해하기에는 제게 궁금증이 너무 많았습니다.

    아, 그리고 아시안 게임은 그 도시에 인구가 많기 때문에 열리는 것이지, 그 도시에 많은 인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시안 게임이 열리면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사실이나, 그 전에 이미 그 도시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야만 합니다. [인구의 필요성]이 소설 내에서 아시안 게임의 [개최 조건]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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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철이 들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서쪽에 있다는 많은 나라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도 그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136쪽)
    <주인공은 부유한 상인의 자식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인물인데 상상속의 방위와 실제 방위를 혼동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리뷰를 쓰겠다는 분이 본문의 명백한 언급을 무시하고 개연성을 부정하는 것은 이상하군요. -_-


    2
    <중국인이 관심을 가질만한 서쪽의 땅은 당연히 중앙 아시아 지방과 인도였다.>
    <작가가 동쪽 대신 서쪽을 선택한 이유가 단순히 역오리엔탈리즘인지, 아니면 톨킨의 영향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서로 가다}에서 '서'란 방위가 가진 문화적 함의가 충분하게 고려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목천자전]은 들어나 보시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ㅅ- 아니면 '죽은' 엄마 찾아가는데 서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지금 원형적 심상 무시하시는 거 맞는지요. '서'란 방위가 가진 문화적 함의가 충분하게 고려되지 않은 것은 어느 쪽인지 모르겠군요. 설마 좌청룡 우백호를 아시면서 서쪽과 그린란드의 백색 얼음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시대는 다르지만, 정화의 대원정도 결국 이전 시기의 중국 해양 세력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국의 '해외'에 대한 관심을 아프리카까지 끌어가지 않고 중앙아시아와 인도 정도에 국한시키신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3.
    <다음 문장을 보면 마치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공간이동을 했다는 식이다. // (전략) 혹은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은 왜 그에게 굳이 생의 끝에 몇 시간의 유예를 주어 이것을 보여준 것일까.>

    그 문장을 왜 굳이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인한 공간이동으로 보시는지 모르겠군요. 톨킨으로부터 거슬러올라가는 서구의 환상문학 전통은 기준점이지만 금오신화나 조신지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동아시아의 환몽구조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동급인 고대의 유물일 따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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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a 08.07.27 00:20 댓글 수정 삭제
    [나]님께 : 본문을 비롯하여 마지막 댓글 전까지는 평범한 토론으로 보였는데, (마산 앞바다에 관해 쓰신) 마지막 댓글은 그렇지 않네요. 반론해보려다가 작가가 이미 쓴 글을 반복할 뿐이라 그만둡니다. 이미 한 말을 반복해야 한다면 잘못 받아들이셨던가 뭔가 논점이 어긋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봐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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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xk 08.07.27 15:18 댓글 수정 삭제
    맥주맛 레몬/ 본문에서 갸웃한 부분이 있었던 만큼 맥주맛 레몬님의 댓글 내용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렇게 날카로운 어투를 쓰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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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赤魚 08.08.04 12:51 댓글 수정 삭제
    글은 작가의 손을 떠난 순간, 딱 독자의 수와 같은 이해와 이독(작가와 다른 해석과 작가의 의도와 다른 읽기)를 동반한다고 생각합니다. 비평은 그 중 실체가 드러나는 한 가지에 지나지 않지 않을까요? ^^;;; 하고자 하는 말은.... 나의 정의를 부르짖으며 독자나 비평가를 교정해 줘야 할 의욕에 불탈 필요는 없다는... 모르긴 몰라도, 이 책 몇 장 읽고 '이런 쓰레기!-o-'하고 던져버리는 사람도 있긴 할 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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