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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황금가지라는 지명도 있는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간의 거울 단편선과 큰 차별성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전문 출판사에서 제작한 만큼 표지부터 편집, 제책 방식에 이르기까지 여러 모로 조금씩 낫긴 하지만, 책의 가장 큰 가치인 내용물에 있어서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질적인 차별성이 없다.
또 대체로 편집에서 의도한 대로, 장르 판타지나 대중성과 너무 떨어진 글은 비교적 배제되어 있긴 하지만, 상당히 비틀기는 했어도 역시 이계진입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미소녀 대통령’이나 몇 번을 읽어도 현란하기 그지 없는 ‘몽중몽’ 등을 보면 꼭 그렇다고만도 할 수 없다. 결국 약간 더 대중화되고 약간 더 모양이 좋아진 거울 선집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마치 호수에서 노닐던 물고기가, 적당한 흐름을 만나 덩치나 형태는 변하지 않은 채 큰물로 나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어쨌건 여러 작가의 동반 단편집이란 게 원래 총론을 얘기하기는 어려운 물건이니, 이제 한 작품씩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김이환의 ‘미소녀 대통령’은 제목에서도 살짝 느껴지지만 상당히 일본만화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이다. 겉으로 느껴지는 발랄함 속에 심도 있게 휘감긴 사상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의도는 알겠으나, 중심 줄거리부터가 진실성에서 많이 어긋나 있어서 천박해 보일 뿐이다. 진지함이 아니라 진지해 보이려는 억지가, 경쾌한 발랄함보다는 골조에서 들뜬 어색함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마치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나간 나머지 테마를 잃고 그 테마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었던 겉멋만 남은 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같은 느낌. 하루히와 에반겔리온과 유키카제를 적당히 섞다 보면 수도 없이 많이 나올, 그럴듯한 껍데기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 글이 첫머리를 장식한 건 이계 진입물에 익숙한 어린 독자를 흡수하려는 배려였을지도 모르나, 이후의 다른 글과는 괴리가 커서 권두 작품으로서는 물론이고 그냥 중간에 끼어있기에도 조금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김주영 ‘크레바스 보험사’는 전체적으로 평이한 작품으로, 역시 게재 순서상 편집 의도를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글이다. 딱히 흠잡을 곳 없이 무난하지만, 반대로 꼭 집어 좋다고 말할만한 부분도 그다지 없다. 단편에 딱 좋은 적절한 아이디어를 적절한 구도와 적절한 서술로 풀어낸 모범작. 그러나 너무도 적절하기에, 경탄스러운 의외성이나 신선함 같은 것도 없다. 환상 소설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알맞은 글로, 오히려 이것이 권두에 올라 있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정소연의 ‘마산 앞바다’는 아주 인상적인 설정을 사용해 작품 전반에 흐르는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강렬한 외적 설정과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두 개의 충실한 중심축을 좀 더 매끄럽고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도 있었을 법 한데, 완전히 하나로 유착되었다기보다 믹스 앤 픽스로 꽉 붙들어 맨 것 같은 기분이다. 성적 소수자의 절박함을 충분히 전달해주지 않은 것이 미스 포인트가 아닐까.

박애진의 ‘문신’은 그답지 않게 차분하게 가라앉은 글로, 심지어 얼핏 보기엔 환상소설 같지도 않다. 자칫 흔해빠진 그렇고 그런 소재로 되기 쉬운 글감을, 쉽게 눈에 띄지 않는 통찰력으로 정련해 사람이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져준다. 방랑벽이 든 중년 여인이란 주인공 역시 전체 분위기에 잘 녹아 들어가서, 이런 글을 풀어나감에 부족함이 없다.

백서현의 ‘윌리엄 준 씨의 보고서’는 읽는 내내 기시감을 느끼게 했다. ‘요정을 믿지 않는 어른’이라는 흔해빠진 소재를, 추리 소설 같은 흔해빠진 형식으로 풀어나간다. 정갈한 묘사와 잘 배치된 복선도, 기초가 너무 뻔하기에 그다지 장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역시 환상문학 입문자를 위한 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요정 이야기에 어느 정도 익숙한 독자들을 위한 포석인 마지막 반전도, ‘과연 그랬구나’보다는 ‘결국 그거였어’라는 느낌이라 아쉽다. 좀 더 일상적인 에피소드들을 삽입하는 등의 감정 이입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수현의 ‘서로 가다’ 는 구도자판 축약 구운몽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전반부의 중후한 분위기에 비해 후반부는 전체적으로 힘이 딸리고, 특히 마지막 장면을 납득할 수 있기에는 주인공의 변화와 성장 (혹은 노화?)가 너무 부실하다. 한자 지명까지 모두 현대화 (현지화)한 마당에 인명 등 몇 가지는 오히려 옛날식으로 남기는 등, 용어 사용의 부조화도 읽는 내내 거슬린다.

은림의 ‘할머니 나무’는 처음 보았을 때는 무척 인상적이어서 마음 한 켠에 따스하고 단단한 싹이 돋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너무나 이상적이고 완벽한 가족애의 모습에서 오히려 위화감이 느껴진다. 잘 짜여진 기계 안에서 돌아가는 태엽 인형들. 겉모습으로 꾸며진 피상적인 인물들이 아니라, 아예 보이는 겉모습 그 자체가 본질인 인물들. 작가가 말하고 싶어하는 주제를 강하게 드러내는 데에는 최적화되어 있지만, 그 자체로서의 생동감이 없어서 이리저리 돌려 보며 즐기는 맛은 없다. 덕분에 두 번째 볼 때 처음보다 더 좋아야 명품이라는 나의 기준에는 좀 미달되지만, 작가의 의도를 아름다운 묘사를 통해 명확히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훌륭한 작품이다.

배명훈의 ‘초록연필’은 참신하다 못해 정신이 확 깨는 듯한 기발한 발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조곤조곤하고 감칠맛 있게 전개되던 전반부에 비해, 너무 큰 흐름을 서사적으로 보여주는 후반부는 거의 문학적 가치가 없다. 같은 밀도로 서술했으면 중장편은 너끈히 나올 분량을 지나치게 압축하는 바람에, 재미있게 풀어갈 수 있는 결론을 억지스럽게 강요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분량에 구애되지 말고 충분할 만큼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면, 혹은 아이디어를 조금 깎아 내서 적당한 선에서 결말을 내 줬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곽재식의 ‘콘도르 날개’ 역시 수없이 반복 사용된 아이디어를 기조로 삼았다는 점에서 ‘월리엄 준 씨의 보고서’같은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뻔한 패턴을 뻔하지 않은 서술로 풀어가는 솜씨는 꽤 좋아서, 결말도 신선한 편이고 진행도 비교적 유쾌하다. 발랄하고 건조한 캐릭터는 배명훈과도 닮았지만, 복제했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닌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성이 그저 작가들 자신의 심정적 유사성에서 나오는 것인지 상호작용의 결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대로라면 좀 더 색채가 뚜렷한 배명훈에 것에 비해 그의 작품이 묻혀 버릴 가능성은 커 보인다.

김보영의 ‘몽중몽’은 다시 읽어도 역시 어지럽다. 그나마 처음 접했을 때 보다는 머릿속에서 정리가 잘 되지만, 여전히 대중적인 이해를 얻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다. 편집자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책 맨 뒤로 빼놓은 것이겠지만… 그래도 어떤 의미에서는 환상 문학이 추구해가는 한 가지 방향의 궁극에 이른 듯한 글이고, 이만한 작품은 기성 문단에서도 쉽사리 나오기는 힘들 것 같다. 필력이 부족하지 않은 분들이야 얼마든지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꿈을 추구하는 작가가 과연 얼마나 있을 것인가. ‘몽중몽’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현실을 모사한 3차 방정식의 특수해에서 조화 수열을 발견하는 것 같은 아름다움이다. 그들만이 느끼는, 그들만을 위한 아름다움. 이런 글이 대중성을 가지는 사회라면 환상문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를 잃을 것이다.

각 작품마다 미흡한 점 위주로 써 놓긴 했지만, 사실 ‘미소녀 대통령’을 제외한 나머지 글들은 기분 좋게 읽을만한 작품들이다. 그러나 대중성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상대적으로 수준이 높지 못한 글을 권두에 놓음으로써 전체적인 기대감을 낮추어 버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미소녀 대통령’도 그렇게 부족하기만 한 것은 아니고 아마추어의 작품으로서는 훌륭하다는 평을 들을만한 글이지만, 황금가지에서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이라는 제목으로 낸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기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편집 방향을 달리 하여 글의 순서만 바뀌었어도 나의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좋아졌을 것이다.
첨언하자면, 확실히 책이라는 사물로서의 가치는 거울 선집과 차별화되었고, 특히 표지 그림은 아름다우면서도 환상문학이라는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수작이다. 다만, 나의 책에 대한 평가는 주로 내용 쪽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크게 높은 점수를 주진 않았다.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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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 08.08.30 11:35 댓글 수정 삭제
    르혼님 리뷰는 언제나 단단하고 명확해서 좋아요.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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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ux 08.08.30 22:54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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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moe 08.09.04 13:27 댓글 수정 삭제
    그래도..이 책 사고..여기 알고 들어왔...^^ 책 읽어보고 다시 읽어볼게요. 선입견 생기면 안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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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린 08.12.27 03:42 댓글 수정 삭제
    정말 맨앞에 분 말씀대로 르혼님 리뷰는 콕콕 찝어주는(?) 맛과 가려운 곳 긁어주는 맛이 좋아요. ^^
    요것도 읽어봤는데 두개만 르혼님과 평이 반대네요.
    미소녀대통령은 황당하고 웃긴 농담들이 여기저기 뿌려져있어서 실실 쪼개면서 봤습니다. 특히 동방신기 싱글을 줬네 여기서 뿜었고요. -_-;
    대신 갈수록 안드로메다로 빠지는 심각함 때문에 좀.. 그대로 유쾌하게 갔으면 더 좋았을텐데.
    할머니 나무는 대기업 이미지 광고에서나 보던 비현실적인 가정의 등장에 심한 두드러기가 돋을 정도였고. 사람이 식물이 되어간다는 설정도 예전에 봤던 일본SF 단편과 자꾸 비교 되는 바람에 그다지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고요.

    이 책에선 '문신' 이 가장 좋았습니다. 박애진님 작품은 어째 읽을 수록 호감이 쑥쑥 상승하네요.

    마지막으로.. 이 책 너무 얇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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