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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바벨의 도시 上

2008.08.29 21:29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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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원님의 소설은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에 수록된 {카나리아}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묘하게도 기억에 안 남았지요. 인상적인 부분은 있었어요. 그것은 애증의 끈으로 얼기설기 얽힌 인물들과의 관계입니다. 다만 그렇게 된 과정 속에는 순전히 감정적인 이유만 가득 차 있던 듯해요. 무엇보다 인물들은 서로 진술만 반복했을 뿐입니다. 누군가와 누군가가 어떻게 해서 만났다는 이야기만 이 소설이 말하는 내용의 전부였지요. 무엇보다 ‘노래를 잃은 카나리아’가 의미하는 상징성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알 수 있지요. 새는 회초리와 수리, 그리고 바다 속과는 무관해요. 어쩌면 단지 어떤 아름답고 처연한 동물의 이미지를 넣고 인물들과 대입하고 싶었던 것뿐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의도야 어땠든 제게는 장점으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사실 본문에서 말하고 싶었던 소설은 따로 있지요. 바로 대원씨아이의 브랜드 아키타입에 묶여 출간된 [바벨의 도시] 上권입니다. 완결되지 않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읽고 글을 쓰는 것에 망설임은 없습니다. 이 소설은 어차피 에피소드 중심입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즉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법이지요. 오죽하면 후기에 “더 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으면 언제든지 메일을 보내주세요”라는 말까지 남겼겠습니까. 오히려 下권으로 완결된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지요. 사실 이런 이야기는 도시만 존속한다면 무한히 이어갈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캐릭터(아마도 세이린/센 정도겠지요)만 꾸준히 살아서 도시를 유영할 수 있다면 그들이 살아온 삶만큼 만나온 사람도, 만날 사람들도 꾸준할 테니까요. 하지만 이 소설에서 바벨의 도시를 상징하는 도시 캐피탈은 어디까지나 부정적인 장소입니다. 이런 도시에다가 작가가 ‘토포필리아(장소애)’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요. 어쩌면 이야기의 끝에 도시가 붕괴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야 완결되더라도 아쉬움이 줄어드는 법이지요.

말하자면 캐피탈은 방사형 도시입니다. 추측이지만 아마도 방사형 도시는 완전한 계획 하에 이루어지기 힘들지요. 그것도 중앙집권형이라면 더욱이 말입니다. 외곽지역은 언제나 가장 비루한 하층민들이 몰려들기 마련이지요. 도시를 찾아왔지만 떠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도시의 확장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도시의 외곽은 조금씩 밀려나온 하층민들로 인해 확대됩니다. 그리고 중심부에는 귀족들이 모여 살고 철저히 계급과 신분을 중시하며 살아가지요. 무엇보다 바벨의 탑이라는 곳에는 교황이 살고 있습니다. 이곳이야말로 죄악의 도시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식의 소설 속에는 기본적으로 각종 세계관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천사와 악마 사이의 구도와 천국과 지옥의 설정은 비교적 전형적이지요. 사용하는 용어나 단위들도 비교적 익숙합니다. 심지어 서인도제도의 바베이도스 섬마저 미카엘의 입을 빌려 등장합니다.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증거를 부정할 수 없지요. 그렇지만 너무 제약이 없습니다. 너무 광범위해요. 모든 세계가 한 곳에 흘러들어 왔으니 어떤 이야기든 써낼 수 있습니다. 사이보그 기술은 최첨단을 달리고 있고, 인간을 초월한 신적 존재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며 관여합니다. 인간은 타락했고, 인물들을 움직이는 힘의 근원은 누가 뭐래도 사랑입니다. 하지만 사랑만으로는 부족하지요. 그래서 증오합니다. 증오가 집착을 낳고 결국은 죽어서도 떠나지 않게 되지요. 아니면 죽어서도 떠나보내질 않거나요! 이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세상 모든 사랑들이 이런 식이라면 연애 따위 차라리 하지 않고 말겠습니다. 소름이 끼칠 지경이에요. 이런 것이 로맨스라면 저도 좀더 고민해봐야겠어요.

만일 소설 속 세계의 기본 베이스가 우리의 현실과 이어진 것이라면, 바벨의 탑이라는 이름을 붙인 작자들은 정말로 우스꽝스러운 짓을 한 것이지요. 자신들이 먼 고대인들처럼 타락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대놓고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굉장히 이해하기 쉬워요. 마찬가지로 도시의 인간군상과 죄악의 일상화를 담은 프랭크 밀러의 [씬시티]를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르더군요. 上권을 읽은 현재까지의 감상만 가지고 평가하자면 이 소설은 어떤 목표가 아직 그려지질 않습니다. 소실점이 없어요. 시선을 잡아끄는 중심이 아직 어디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에피소드가 모두 동등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사실 에피소드 4는 다른 에피소드와 비교해도 유난히 원초적이었지만요. 개인적으로는 에피소드 6이 가장 좋았어요. 일단 새로 등장한 인물들이 차분해서 좋았지요. 결말도 행복했어요. 다만 이런 식으로라면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는 못 되네요. 여전히 [바벨의 도시]의 세계관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합니다. 부디 정지원님이 下권에서 끝까지 마무리 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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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 08.08.30 11:53 댓글 수정 삭제
    저도 이 책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 중심축이 없다는 데 아쉬움을 느꼈지요. 연작 단편이라는 게 꼭 중심축/사건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만화 '나만의 천사' 같은 경우는 중심축이 전혀 없죠. 편당 독립성도 높고요) 중심 인물이나 세계관이라도 더 강했으면 이런 생각은 안했겠지요. 하지만 지금 방식이었기에 더 술술 읽힌 게 아닌가 싶기도 하더라고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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